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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3-20 17:54:32

부르주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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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어원 및 번역3. 역사
3.1. 구미권3.2. 비유럽권
4. 특징5. 비판6. 문화
6.1. 심상6.2. 영향6.3. 대중매체
7. 관련 항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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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언어별 명칭
한국어 부르주아 표준어
유산계급(有産階級)
부르죠아 문화어
프랑스어 Bourgeois [buʁʒwa] (형용사)
Bourgeoisie [buʁʒwazi] (명사)

부르주아란 직역하면 '성벽 안에 사는 사람'이란 말로서, 중세에는 도시에 사는 사람들 가리키던 말이었으며, 근대 이후로는 자본가 계급을 가리키는 말이다.

2. 어원 및 번역

프랑스어 기원인 'bourgeoisie'는 'bourgeois'(성 안의; 읍민)+'-ie'(여성명사형 접미사)의 합성어이다. 이는 곧 옛 프랑크어인 'burg'의 파생어이다. 프랑크어 'burg'는 군읍 및 성읍(town)을 뜻했는데, 이 단어는 각각 영어에서는 'burh'를 거쳐 'borough', 독일어에서는 'burg', 프랑스어에서는 bourg', 이탈리아어에서는 'burgo'가 되었다.

한국어에서 '브르주아', '부르주아지' 등으로 아무렇게나 표현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부르주아'는 본래 프랑스어에서는 형용사형이고, 실제 여기에 속한 사람들을 부르는 명칭은 '부르주아지'가 맞는 표현이므로, 계층을 말할 때는 '부르주아', 그 집단 사람들을 표현할 때는 '부르주아지'로 부르는 것이 맞다. 한국어에는 자본가라는 대체적 단어가 있다.

3. 역사

3.1. 구미권

부르주아는 도시와 밀접한 존재이다. 중세도시는 기존 고대도시 중 주교가 존재하는 종교적 중심지나 교통 요충지가 계속 제 기능을 하면서 이어져오거나 주변에 이곳을 피난처로 삼는 사람들이 정착하면서 마을이 자연형성되자 영주가 이를 보호하고 세금을 걷으려고 새로이 성벽을 쌓으면서 발생하기 시작했다. 정세가 조금 더 안정된 시기에는 촌락이 없거나 잘 발달하지 않은 곳들도 산업적이거나 교통적인 이점 덕에 도시로 발달하고는 하였다.

부르주아라는 말은 11세기부터 등장한다. 11세기 중세 전성기를 맞이한 유럽에서는 농업 및 상업적 성장이 두드러졌다. 기존 촌락이나 군읍들의 규모가 커지거나 잉여 인구가 도시로 이주하게 되었다. 도시가 발전하면서 성벽을 두르고 주교나 세속귀족 등 영주에 대항하고자 군주로부터 특허장을 얻어 자체적으로 법을 제정하고 재판할 자치권을 획득하기 시작했다.[1] 그리고 이곳에 거주하는 사람, 특히 상공인 계층을 프랑스어에서는 bourgeoisie라 불렀다.

다만, 이 무렵의 부르주아지는 통념과는 달리 도시에 산다고 전부 상공업자였던 것은 아니며, 모두 부유층이었던 것도 아니다. 실제로는 중세~근세 동안에는 성 안에 사는 사람들이라고 해서 특별히 더 부유한 경우는 드물었다. 대상인이거나 길드에서 마스터(장인)를 맡는 소수나 부유했지, 성 안에 사는 사람들의 상당수는 그냥 돈 없는 학생, 소상인, 장인 휘하의 직원, 시 정부나 도시영주(주로 주교)한테 고용된 관리, 성직자와 수도사, 그냥 농부(!?),[2] 거렁뱅이(...) 등이었다. 그런데도 상공업에 대한 심상이 두드러지는 것은, 상업이나 가내수공업에 종사하던 자유민들로서는 수요가 적은 향촌 장원에서 영주의 기술자 가신으로 지내기보다는 도시에 모여 원격지 교역 등에 참여하는 것이 일반적이었기 때문이다. 이는 영주의 가신으로서 제한된 범위 안에서 활동하는 것보다 도시에서 상대적으로 더 자유롭게 경영하는 것이 이득이었던 까닭이다.

물론 이때의 부르주아지는 엄밀히 말하면 '시민'(citizen)이 아니라 '도시인' 혹은 '성민'(burgher)이라 불러야 한다. 근대적 개념으로서 '시민'의 기원은 중세도시가 발전한 이래 근대까지 이곳에 사는 사람들, 즉 자연 인구증가, 해방농노의 후손, 타지에서 이주해 온 사람, 도시 근교에서 사는 사람 등을 모두 포괄하여 개별 주권자로 거듭난 것이기 때문이다. 통념과는 달리, 이들 도시민은 대부분 농노출신으로서 도시에 정착하여 신분상승을 이룬 존재들이었다. 초기에는 원래 예속되어있던 영주한테 대금을 치르거나 전통적인 도시영주인 주교한테 의탁하여 장원공동체를 벗어나 도시공동체의 일원이 되었는데, 외혼세와 인두세, 상속세로 대표되는 인신상의 예속은 그 대상이 장원영주에서 주교로 바뀌었을 뿐 여전히 존재하였다. 이는 도시의 발전과 함께 전개된 코뮌 운동으로 도시 자치가 이루어지면서 차츰 폐지되었다.

이들은 상공업과 교환경제를 책임지면서, 중세시대 말부터 계몽시대 초까지 절대다수의 농노귀족들과 성직자들사이에서 중간계급으로서 국가의 부를 증가시키는 생산계층으로 자리매김하면서 성장했다. 그리고 중세에서 근세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도시민들은 영주의 간섭을 차단하고자 국왕이나 황제 등 군주와 더 적극적으로 연대하게 되었다. 군주는 밖으로는 교황을, 안으로는 지역교회(주교)와 귀족(특히 영역제후)들을 견제하고자 서로 결탁하기 시작하였는데, 군주로부터 삼부회 등 의회에 참여할 권한을 얻거나 관료로 발탁되거나 자치권을 보장받는 등의 특권을 얻는 대신, 세금을 군주에게 직접 납부하고 군주의 전시 소집 명령에 따라 참전하는 등 정치적 영향력을 키워갔다.

이러한 도시민, 즉 부르주아들의 자치 전통은 법률적 근거로 보호됨으로써 단순히 군주를 위한 부품 중 하나가 되는 것에서 끝나지 않았다. 경제가 발전할수록 이러한 도시는 늘어났고, 중상주의하의 유럽에서 부를 모으면서 상류층으로 올라서더니 그 영향력이 기존 지배층을 능가하게 되었다. 이들의 정치참여는 계몽주의 등 정치사상의 발전에 따라 서구 각국에서 다른 양상으로 발전했다. 자본주의로 가는 과도기에서 영국처럼 귀족들과 협상하거나 프랑스처럼 귀족을 몰아내는 등, 절대왕정을 종식시키고 입헌군주정공화정을 세계적인 지배체제로 만드는데 성공하면서 지배층으로 올라서는데 성공했다. 네덜란드, 스위스 등은 아예 도시들이 자체적으로 동맹을 결성해서 독립적인 국가로 성립했으며, 멀게는 미국 독립 전쟁도 도시민들의 자치 전통과 자유주의적 정치사상의 영향 속에서 일어난 사건이다. 그리고 1789년 프랑스 혁명은 부르주아 혁명의 꽃이라고 할 수 있다. 부르주아 혁명이 성공적으로 일어난 곳에서는 자본주의 뿐만 아니라 계급제도가 타파되고 시민적 자유가 보장되어 민주주의의 기초가 완성됐다.

다만, 엄밀히 말하면 귀족이 대거 쓸려나간 것은 프랑스 만의 이야기이다. 독일, 영국 등 다른 국가는 상대적으로 귀족이 적어도 근대 이후에 이르기까지 보전되었다.[3] 봉건제이되 일찍이 중앙화한 국가체제를 구축해나가던 영국에서는 귀족 및 젠트리 계층이나 요먼 및 성민 등 평민 계층이나 동일하게 국왕재판소나 의회 등 군주권 하에서 딱히 마찰없이 공존하였다. 오히려 귀족 및 젠트리나 그 외 자본가 집단은 정치적으로 야합하거나 서로 통혼하기도 했다. 사실 프랑스도 귀족의 출신에 따라서는 원래 부르주아였다가 고등재판관 등 관직에 진출하거나 영지를 사들이면서 신분상향한 경우도 많았고, 혁명 동안 줄을 잘 선 귀족들은 목숨 보전 정도가 아니라 왕정이 복고하자 왕위를 먹는데 성공하는 등 생각하는 것만큼 귀족들이 다 쓸려나간 건 아니다.

프랑스 혁명이 바꾼 것은 귀족을 (특히 법적으로) 실권도 특권도 없는 단순 명예직위로 바꿔버린 것에 더 가까웠다. 그래도 프랑스 혁명을 기반으로 한 근대적 전형(model)이 다른 국가에도 전해지면서, 다른 지역에서도 프랑스의 부르주아에 해당하는 상공인들의 영향력이 강해지기는 했다. 하여간 프랑스 혁명기만해도 정작 부르주아는 아직 그냥 일반 자유민, 시민이었다. 특히 파리 시민을 등에 업고 왕 모가지를 뎅겅 자른 이들이 프랑스 혁명 정부의 정치인들이었기에, 온 시민에게 평등하게 새 나라의 권리를 나눠야한다는 정파도 분명 존재했다. 그러나 단기간에 그칠 것으로 보였던 정치혼란이 끝이 보이지 않자, 혁명에 피로를 느낀 프랑스 국민들이 스스로 독재정 및 군주정을 지지하면서 이 혼란스러운 정국을 수습한 나폴레옹이 급기야 황제의 자리에까지 오르거나 왕정이 복고되었는데, 그런데도 혁명 이후 프랑스 귀족 계급은 절반 이상이 혁명 이전에는 평민이었던 신흥 귀족들로 채워졌다. 이러한 신흥귀족은 대체로 부르주아 출신이었다.

부르주아지는 출생에 따라 신분이 결정되는 봉건시대의 굴레를 무자비하게 뜯어내버렸다. 그리하여 인간과 인간 사이에는 벌거벗은 이기심과 감정 없는 '현금 지불'이라는 관계만이 남게 됐다.

(…)

부르주아지는 종교적인 외경심, 기사도의 열정, 속물적인 감상주의까지도 몽당 이기적인 계산이라는 얼음물 속에 처박아버렸다.
공산당 선언
부르주아라는 단어가 권력을 가진 유산계급을 뜻하는 단어로 쓰이기 시작한 것은 19세기의 사상가카를 마르크스가 주장한 마르크스주의 철학에서 많은 자본을 가진 유산계급 부자들을 개념화하고자 이 단어를 차용한 이후였다. 그렇게 부르주아는 자본주의 경제체제 하에서 자신들이 가진 자본의 힘으로 토지와 노동력 등 생산수단을 소유해서 부귀를 누리는 지배적 유산계급으로 그 의미가 바뀌었다. 마르크스주의 철학으로 인하여 탄생한 공산주의에서는 무산계급인 프롤레타리아를 착취하는 악독한 존재로서 자본가 계층을 표현하기 시작했고, 현재 좌익에서는 부르주아 계층은 잘 봐줘봤자 제어해야할 집단으로, 극단적으로 보면 혁명과 타도의 대상으로 보고 있다. 중세 부르주아지는 왕과 귀족이 지배로부터 저항하는 피지배계층에 가까웠지만, 이제 근대 자본주의가 등장한 이후에는 피지배계층(프롤레타리아)으로부터 권력을 지키는 입장이 되었다.

3.2. 비유럽권

한국에서는 부르주아가 그냥 높으신 분들을 퉁치는 단어로 여겨지는데, 아시아권에서는 자본주의가 강제적으로 이식된 경향이 매우 컸기 때문이다.

특히 동아시아는 전통적으로 국가개념만은 거의 근대 수준이었던 영향으로 고도의 중앙화 및 관료제 체제 속에서 관치경제 경향이 강하였고, 또한 지방세력을 과거제로써 중앙으로 포섭하고 권력을 재분배하였다. 그 결과 부의 원천은 농업이었고, 상공업이 어느 정도 활성화되더라도 유럽 도시 및 시민과 같은 독자적 정치주체가 등장하지는 못하였다. 그러한 상황에서 일반적으로 접하게 된 부르주아라는 개념은 근대 자본주의 경제체제 하에서의 계급적 모습이었다. 따라서 한국의 경우 부르주아가 지닌 자본가로서의 속성보다는 상류층으로서의 속성을 주로 받아들여 기존 양반사족의 자리를 대체하는 심상으로 자리잡았다. 이는 일제강점기에 공산주의 사상이 들어오고 해방 이후에도 한동안 활발히 활동한 관계로, 지주 계급과 부르주아를 대충 높으신 나쁜 놈들 같은 것으로 퉁쳐버리는 관념이 생겨버렸다.

그러나 단어의 어원과 역사를 보나 공산주의적 관점으로 보나, 주로 귀족이었던 지주 계급은 부르주아와는 다르다. 일단 어원으로 따졌을 때 지주 계층이 도시민은 아니지 않은가. 또한 공산주의의 관점으로는, 지주는 봉건주의 적폐 세력으로 자본주의의 유산 계급 부르주아가 아니라 오히려 그 이전 고대나 중세적인 존재로서 부르주아와 대립하는 존재이다. 본래 공산주의 관점에서 지주-자본가의 관계는 구적폐-적폐인 것이다. 다만, 근대에 이르러서 등장한 레닌주의마오이즘 입장에서는 귀족이나 부르주아나 둘 다 어쨌든 때려잡을 대상으로 봤으니 잘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대충 비슷한 것으로 여겨지게 된 것이다.
좀 더 자세히 파고들면, 자본가들의 형성조차도 유럽을 제외한 지역에서는 그 과정 면에서 귀족들을 쓰러뜨린 서구 자본주의 사회의 부르주아들과 다르다. 삼성, 현대, 두산, SK, LG의 사례를 보듯 한국사에서 귀족에 대응한다고 볼 수 있는 양반 혹은 사족(士族) 출신들이 다수이며 이승만, 박정희,[4] 전두환 등 옛 사족 출신자들이 장악했던 정부에 협력하여 탄생하였다. 이들은 일종의 자본가가 되었으나 귀족적 정신은 그대로인 탓에 오히려 천한 상인들을 경멸하기도 했다. 일본 역시 서구와 달리 귀족들이 무너지지 않았으나 전쟁에 패하고 미군에 의해 경제적 영향력을 잃은 뒤 관료 세력으로 변모하여 오랜 시간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다.[5]

인도에서도 바니야라고 부르는, 서유럽과 비슷한 자본가 계층이 있었으나 이들 역시 인도 귀족들을 무너뜨리지 못하였다. 물론 이들은 다른 지역과 비교해서도 자본가적인 면이 강한 만큼 현재는 귀족 세력보다도 강한 경제력을 가지고 있으나 아무래도 자신들의 힘으로 이긴 게 아니라서 그런지 인도의 귀족 세력은 여전히 무시하기 힘든 편이다.[6]

4. 특징

부르주아의 특징이라면 경제권은 있지만 지배권은 없는 존재라는 점이다.[7] 일반적으로 귀족들은 경제권과 지배권을 동시에 소유하고 있으며 순수 혈연으로 유지되는 반면, 부르주아는 경제권은 어떻게 획득할 수 있어도 정치적 지배권은 보유하고 있지 않다. 하지만 막강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정치계 인사를 포섭해서 간접적으로나마 정치력을 행사할 수 있다. 대신 굳이 혈연뿐만이 아니라 실력으로도 얼마든지 부르주아 직위에 도달할 수 있다는 점이 그들의 특징이다. 즉 일반 서민이라도 실력에 따라 얼마든지 도달할 수도 있고 또 그 반대로 내려갈 수도 있는 사회적 위치인 셈. 원래의 부르주아는 신분제였던 조선시대의 중인 내지 하위급 사족 같은 위치였다고 보면 된다.[8]

근본 바탕에서도 차이가 있는데 사회 계급, 사회 계층은 신분제를 바탕으로 만들어졌지만, 소득분위는 신분제 없이 통계나 경제를 바탕으로 나누어서 만들어졌다.

5. 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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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도시 및 성민의 성립에 관해서는 자유도시, 코뮌, 도시, 농노제 문서를 참고할 것.[2] 성 안에 산다고 하면 도시적인 생활을 하는 게 너무 당연하게 여겨져서 농부라는 게 뜬금없어 보일 수 있으나, 고대 말 정치적 혼란 속에서 무사히 살아남아 중세를 맞이한 고대도시부터 19세기 초 근대도시까지도, 유럽의 도시는 거주 지역 너머 크게 성벽을 둘러서 밭이나 가축을 기를 목초지까지 보호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따라서 그런 곳은 말이 도시지 조금 클 뿐 평범한 농촌과 별 다를 바 없는 곳도 상당했다. 물론 도시 농민은 대체로 자기가 토지를 보유하는 자영농이라서 장원 농노보다는 사정이 나았다.[3] 오히려 제1차 세계대전 시기에 더 많은 귀족 가문들이 멸문을 당했다. 귀족 집안의 자제들이 나름대로 노블리스 오블리주를 보이기 위해 최전선에 하급 장교로 많이 지원, 참전해서 전사했기 때문이다. 장교라니 편해 보일 수도 있겠지만 1차 대전기 하급 장교들의 전사율은 사병보다 높으면 높았지 절대 낮지 않았다. 선두에 서서 진격을 독려하며 모범을 보여야 했기 때문이다. 그나마 총과 대포의 재장전이 오래 걸리고 명중률이 형편없었던 이전 시대까지는 그나마 생존 확률이 꽤 있었으나, 기관총과 주퇴 복좌식 야포가 주력이 된 1차 대전시기에는....[4] 선전선동에 의해 오해하는 사람도 있으나 아버지 박성빈부터가 양반 출신이다.[5] 移民国家アメリカの歴史, 제5부, 199p.[6] 사실 인도에서도 특히 과거로 갈수록 은근히 천민 출신으로 알려진 노벨상 수상자 같은 사람들이 사실은 가난한 귀족 출신인 게 일반적이다.[7] 그러나 부르주아라는 사회경제적 계층의 기원이 된 자치도시에서는 이들이 각자 도시의 자치권을 행사했던 만큼 정치적 주권 역시 보유하고 있었다. 여기에서 말하는 내용은 광대한 영토형 국가에서 사회계층으로 성장한 부르주아를 의미하는 것이다.[8] 조선시대의 신분제는 경국대전상의 원칙적으로는 양민과 양민이 아닌 천민으로만 구분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실제 사회적으로는 양반과 상민으로 나누는 반상제가 통용되었는데, 원칙적으로는 상민도 과거시험의 문과(文科)나 무과(武科)에 합격만 하면 양반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문과는 명문가들이 많이 응시하여 일반 농민들이 사실상 준비 및 합격이 불가능했고, 무과도 연습은 알아서 해야 했는데 화살값이나 말값 같은 것이 여간 만만한것이 아니었기에 비용이 많이 들었다. 게다가 근검절약을 미덕으로 삼는 작은정부 정책 탓에 뒷배가 없으면 과거에 합격해도 임용대기만 수십년 하다가 그냥 사망. 물론 합격한 순간부터 양반은 맞지만 실직을 겪어보지도 못한 이상 사회적 지위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그래도 전란 등 능력이 중요해지는 불안정한 시기에는 실력이 뛰어난 상민의 급제율이 더 높아지는 등 청정수의 유입은 나름 잘 이루어졌으나, 사회가 안정되어 있을 때라면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일반인들은 과거시험을 잡과(雜科)로 응시해서 중인이 되는 편을 많이 선호했다. 중인은 양반과 달리 직접적인 정치 참여는 불가능하지만 전문적인 지식과 경제력을 바탕으로 주로 중앙의 양반가에 연줄을 대거나 부를 축적하는 것이 가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