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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20 12:50:30

자본주의 맹아론

근대 국가의 식민 지배와 그 결과에 대한 관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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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한국의 자본주의 맹아론
2.1. 반론2.2. 현황
3. 같이보기

1. 개요

자본주의 맹아론( )은 열강의 지배가 없었더라도 비서양 지역 내에서 자체적으로 자본주의가 형성되고 근대화가 이루어졌을 것이라는 이론이다. 맹아(萌芽)는 싹이라는 뜻이다. 이는 '식민지인들에게 근대 문물을 전파시켜 해당 지역의 발전에 기여하였다'는 기존의 서양 중심의 이론에 대한 반대항으로 대두된 것이다.

달리 보면 유럽 대륙 내부에서도 맹아론이 등장할 수 있다. 내생적 산업화를 달성한 것은 영국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산업 혁명은 영국에서 우연히 탄생한 것인가? 아니면 모든 인류가 필연적으로 자본주의에 닿을 수 있었는가? 가 쟁점이 된다.

자본주의 맹아론은 사회주의에서 처음 대두되었다. 소련이 통치이념으로 채택한 소위 '마르크스-레닌주의'에서는 인류 역사가 '세계사적 발전법칙'인 고대-중세-근대의 발전과정을 거쳐왔다고 보았으며, 이에 따라 유럽뿐만 아니라 세계 모든 지역에서 세계사적 발전법칙이 적용되어 왔음을 검증하려 들었다. 이에 따르면, 사회는 원시 공산사회 → 고대 노예제 사회 → 중세 봉건제 사회 → 근대 자본주의 사회 → 현대 공산주의 사회 순서로 발전한다. 이를 '역사발전 5단계설'이라고 한다. 즉, 마르크스주의 이론상으로는 자본주의가 먼저 나타나야 공산주의가 그 다음으로 나타날 수 있다.[1]

하지만 실제로는 자본주의가 극에 달한 영국이나 미국이 아니라, 오히려 러시아와 중국 같은 자본주의 발달이 미약한 나라에서 공산주의 체계가 성립되었다.[2][3] 이때 중국 공산당에서는 서구적 발전법칙이 중국에서 역시 발견된다고 주장하였고 이에 자극을 받은 중국학계에서는 1920 ~ 30년대에 중국 자본주의 맹아론을 펼치게 된다. 한국의 자본주의 맹아론은 마르크스경제학자 백남운과 같은 사람들이 중국의 영향을 받아 시작된다.

2. 한국의 자본주의 맹아론

광복 이후 대한민국에서는 일제의 정체성론을 비롯한 식민사관에 대항하는 학설로 자본주의 맹아론이 대두하였다. 일찍이 백남운을 비롯한 유물 사학자들은 마르크스가 확립한 5단계 발전설에 기초해 한국사의 단계적 발전론을 제시한 바가 있다.

1960~70년대 조선농업사를 연구한 김용섭과 송찬식, 상공업사를 연구한 강만길 등이 대표적이다. 그중 김용섭은 「조선후기농업사연구」등 걸출한 연구 성과를 내놓은 거물로, 자본주의 맹아론은 거의 그에 의해 주도되었다. 이 학자들은 17세기 이후 조선 경제에서 여러 가지 발전적인 모습들을 제시하였는데 주요 논지는 다음과 같다.이외에 신분제의 붕괴, 평등 사상의 보급, 신문물과 신사상의 등장 등이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부수적인 것은 고등학교 국사 교과서에 잘 반영되어 있으니 참고하자.

한편 2007-2008년 무렵을 중심으로 이덕일 등에 의해 정조는 이 시기를 이끌었던 대표적 군주[4]로 꼽히고 있으며(대표적으로 신해통공), 이 때문에 최근에도 정조에 대한 평가는 매우 좋아졌다(예컨데 영조, 정조 르네상스). 한편으로 19세기 세도정치는 이러한 자본주의 경향을 쇠퇴시킨 것으로 여겨졌다.

내재적 발전론과 자본주의 맹아론은 엄밀히는 다른 개념이지만, 기본적인 관점과 논리는 동일하다. 내재적 발전론은 본래 일본의 조선사학계에서 정의된 개념으로, 식민사관에 대항하여 한국사의 흐름을 한민족의 주체적인 발전으로 파악하는 모든 역사 인식을 일컫는 말이었으며, 이렇게 정의된 개념이 한국에서도 받아들여진 것이다. 따라서 자본주의 맹아론은 내재적 발전론의 일환이면서도, 식민사관에 대항한다는 점에서는 핵심으로 볼 수 있겠다. 그래서 자본주의 맹아론의 카운터격인 식민지 근대화론에서는 내재적 발전론=자본주의 맹아론으로 보는 경향이 강하다. 굳이 구분하는데 큰 의미가 없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2.1. 반론

자본주의 맹아론의 시작은 김용섭에 의해 주도되었다. 그가 내세운 이른바 경영형부농론을 시작으로 전개되었는데, 이 경영형부농론은 1980년대 초반 이영훈의 박사 논문[5]에 도전을 받았다.

김용섭은 연구를 통해 17세기 이전 양반의 대농장에서 사역하던 노비가 모내기 등 생산성의 발달로 인해 독립적인 영농을 하게되어 소농사회가 진전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는 여기서 더 나아가 소농들 사이에서 높은 생산성과 시장을 활용하여 성장하는 부농이 등장하고, 부농과의 경쟁에서 다수 농민들이 쇠퇴한다는 경영형부농론(다른 말로 양극분해론)을 펼치게 된다.

이론을 간단하게 도식화하면 다음과 같다.이 이론은 인클로저 운동을 분석한 마르크스의 영국농민층 삼분화설(지주/부농/빈농)을 조선후기 농업변동에 대입을 한 것이다. 대표적으로 김용섭이 말하는 경영형부농은 영국의 요먼(Yeoman)농가에서 착안한 개념이다. 즉, 정체성론에 대한 반박으로서 조선후기사회는 선발 자본주의 국가인 영국사회와 같은 모습을 보여준 다는 것을 증명하려 하였다.

그러나 이 이론은 1980년대 초 분재기나 양안 등을 통해 농작현황을 실증적으로 분석한 이영훈의 학설에 의해 비판을 받았다.# 즉, 소농사회의 진전은 있었으나, 농민층의 양극화는 없었다는 것이다. 이영훈은 박사 학위 논문을 시작으로 그 다음에는 통감부 시기에 작성된 민적통계표를 근거로 개항 이후인 20세기 초에도 상업, 수공업 및 광업 인구는 실질적으로 크게 높지 않아(1 ~ 2%)# 농촌 유랑민이 도시의 상공업에 유입되는 현상은 보이질 않았고, 광작으로 탄생한 대농장주[6]나 노임을 받고 일하는 임노동자[7]와 같은 근거들이 실제로는 부재함을 주장했다. 아울러 근대자본주의의 태동이 일어났다고 주장되는 조선 중후기에 노비제가 쇠퇴하기는커녕 오히려 견고해지고 노비의 수도 대폭 늘어났다는 점을 고문서 등 실증적 자료로 증명하고자 했다.

그리고 경영형 부농의 등장으로 인한 양극분해현상은 서유럽과 중국 등 정작 농업이 조선보다 더 발달했던 다른 나라에서는 확인되지 않는 사례라는 점, 그리고 경영형부농이 대두하였던 영국 사회조차 1870년대 이후로 부농과 빈농의 구분이 사라지고 농민 대부분이 소농이 되었다는 것이 문제점으로 지적된다.# 더불어 1990년대 후반부터 자본주의 맹아론의 모델인 영국에서조차 양극분해현상으로 인하여, 도시에 대량의 산업예비군이 축적되지 않았다는 새로운 연구성과가 제출됨에 따라 경영형부농론의 토대가 무너졌다.#

주로 포스트모더니즘 진영에서 제기되는 비판으로, 자본주의의 등장이 꼭 역사발전의 필연적인 이행단계인지에 대해서도 반발이 있다. 또한 서양 중심의 사관을 왜 동아시아사에 억지로 끼워맞추냐는 비판도 있다. 미야지마 히로시 교수는 한중일 비교 통사라는 서적에서 내재적 발전론이 지나치게 일본과 유럽에 조선을 끼워 맞췄다고 비판했다.

낙성대경제연구소는「수량경제사[8]로 다시 본 조선후기」라는 공동저서에서 조선경제는 18세기 안정세를 보인 이후 19세기에 붕괴하였다며 자본주의 맹아론을 비판했다. 이러한 자본주의 맹아론 논쟁은 이태진과 신용하 등 민족주의적 학자들이 정치적 입장에서 반론을 하며 감정적인 반응이 더해지면서 꽤 복잡한 양상을 보인다.

자본주의 맹아론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학자들은 다음과 문제를 제기한다.

우선, 첫 번째로 철학적, 과학적 기초가 제대로 쌓이지 않아 기계를 동반한 산업혁명으로 연결되지 못했다는 점,[9] 두 번째로 아시아의 경제 성장은 유럽으로부터 자본을 유입받는 수동적인 성격이었다는 점[10], 세 번째로 정치변동이 계속되던 유럽과 달리 아시아는 정치변동이 거의 없었다는 점등이 지적된다.[11]

자본주의 맹아론은 근대화된 서구 국가와 일본에 대한 열등감 표출에 불과하다는 지적도 있다. 맹아론을 주장하는 이들은 유럽과 같은 철학과 학문의 발달을 증명하려고 실학을 발굴하고, 시민운동에 상응하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농민운동을 연구하며, 자본을 연구하기 위해 민족 은행과 거상의 등장을 논하고 있는데, 이런 연구들은 결국 서구와 일본으로부터 열등감을 극복하기 위한 행위에 불과하다는 주장이다.

자본주의 맹아론과 식민지 근대화론[12] 중 어느 이론도 조선 전기와 중기 경제사를 만족스럽게 설명하지 못한다는 비판이 있다. 그나마 조선 중기(특히 16세기) 양반사족의 문집을 통해 그들의 경제활동이 선물경제(gift economy)와 국가에 의한 재분배경제(환곡)였음이 밝혀지고 있지만 당시 발급된 수많은 매매명문에 나오는 거래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

2.2. 현황

2010년대 초반까지는 학계에서는 밀려났어도 교육과정 상에서는 지배적인 위치에 있었으나, 후반부터는 쇠퇴하였다. 현재 교과서의 체계도 보자면, 조선후기를 가리키는 단원명이 '근대 태동기'(구 7차 교육과정)에서 '조선후기의 변화'(7차 이후)로 바뀌었다.

또한 근대화가 무조건적으로 도래하는 요소냐는 의문이 제기되었다. 아시아의 역사 경과의 분류를 서유럽식 분류에 무리하게 끼워 맞추는 것이 아니냐는 주장이 나타났다. 예를 들어, 농업을 중심으로 발달한 동아시아에 서구 중상주의를 대입하는 등 근대화에 관련된 주장 모두 서양의 산업화를 기준으로 자발적이냐 비자발적이냐를 논하고 있을 뿐이라고 지적한다.

3. 같이보기



[1] 마르크스는 생애 후반기에 근대적 자본주의의 발상지인 영국에서 수십 년간 연구하면서 자신의 사상을 체계화하고, 자본론을 저술하였다. 그 과정에서 당시 정치적, 경제적으로 가장 선진적이었던 영국의 역사적 변화를 오랫동안 분석한 결과, 영국을 비롯한 서유럽이 위와 같은 역사발전 단계를 거쳐왔음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마르크스 본인은 이같은 발전 과정이 세계사적 일반 법칙이라고 주장한 적은 없다. 소위 '역사발전 5단계설'이 정리된 것은 소련에서 스탈린 집권 이후로 그가 자신의 저서 "변증법적 유물론과 사적유물론"에서 체계적으로 주장한 것이다. 그러나 마르크스가 이에 대해 체계화된 법칙을 설정한 적이 없기 때문에 마르크스 이론을 벗어났다고 할 수는 없다.[2] 이 때문에 블라디미르 레닌조차도 '혁명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러시아 노동자의 선진성'과 '공산주의로 이행하기에는 생산력이 부족한 러시아 산업화 수준' 사이에서 이리저리 고민이 많았다. 스탈린은 이 괴리를 극복하기 위해 1930년대 급진적인 공업화정책을 펼쳤다.[3] 마르크스의 공산당 선언 러시아어판 서문을 보면, 마르크스는 러시아에서 공산주의가 성립되기 위해서는 독일이나 영국과 같이 고도로 산업화된 국가가 먼저 공산화된 후에 러시아를 지원해주어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레프 트로츠키 같은 사람들은 그래서 역으로 러시아를 먼저 공산화시키고 세계 혁명을 통해 부유한 나라를 공산화시켜 자신들을 원조하도록 하려 했지만 이런 나라들에서는 공산주의 혁명이 일어나지 않았거나 실패해 무위로 돌아갔다.[4] 정조를 계몽군주로 추켜세우는 분위기조차 있다.[5] 나중에 이것을 정리하여 단행본인 "조선후기사회경제사"을 집필하였다. 현재는 절판.[6] 모내기법으로 잡초를 뽑는 노동력은 줄지만, 논갈이하고 거름 주고 물 대고 거두어서 터는 데도 노동력이 필요하므로 실제로는 노동력 감소 효과가 크지 않았다는 것이다.[7] 대표적인 주장의 근거는 화성성역의궤이지만 부역으로 노임을 제공하고 지은 건물은 사실상 수원화성밖에 없으며, 민간의 기록 또한 부실하다는 점을 들었다.[8] 수량경제사는 통계와 미시/거시경제이론 등을 이용하는 최신 연구방법이다. 영어로는 cliometrics라고 한다.[9] 유럽은 중세 때부터 대학이 존재하여 사회와 학문이 발달했고 이를 응용해서 동양에 비해 높은 연구성과를 이룩하였다. 기술적인 부분에서 중세 동양 문명을 쉽게 무시할 수 없다는 반례를 드는 경우가 많지만, 연역추리를 통한 기술적 응용의 발전에서 서양의 체계를 절대 무시할 수 없다. 이 점에서 중요한 조직이 왕립 과학 협회(Royal Society) 등의 전문 조직이다.[10] 이 점은 귀금속의 가격 문제 등 몇 가지 경제적 이유가 있기는 하지만, 이 시기 유럽에서 중상주의 이론이 발달하고 상인의 정치적인 관여도가 높아져 근대 경제와 경제학의 발흥으로 이어지는 점은 연속성 면에서 중요하다. 동양에서도 경제학적 이론에 근접한 학자를 꼽을 수는 있으나 정부 내에서 정치에서 독립한 전문화된 경제 이론이 발생하지는 못했다.[11] 이 세 가지 점은 임마누엘 월러스타인의 <근대세계체제>1권 초반부에 잘 나온다.[12] 사실 이 둘은 모두 마르크스적 역사관과 일본의 정체성론의 기준에 기초했다는 점에서 그 근본은 똑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