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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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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德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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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961년 10월 7일 ([age(1961-10-07)]세)
충청남도 아산시
국적
[[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
학력 온양천도초등학교 (졸업)
아산중학교 (졸업)
천안중앙고등학교 (졸업)
숭실대학교 인문대학 (사학 / 학사)
숭실대학교 대학원 (사학 / 석사, 박사)
직업 사학자, 작가
소속 한가람문화연구소
링크 파일:홈페이지 아이콘.svg | 파일:페이스북 아이콘.svg | 파일:유튜브 아이콘.svg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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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3. 역사적·정치적 성향4. 인식과 평가
4.1. 이덕일의 '고대사/조선사'에 대한 전문성?4.2. 초기엔 의도는 좋았다?4.3. 역사 왜곡 및 비판4.4. 대중적인 평가
5. 다른 학자들과의 논쟁
5.1. 법정 다툼
6. 칼럼7. 저서8. 그 외9.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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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작가사학자.[1]

여러 역사 관련 책을 저술하고, 대중을 대상으로 한 역사 관련 평론으로 많이 알려졌었다. 다만 후술되어있듯 본인이 전공한 근현대 독립운동사가 아닌 다른 시대를 가지고 비주류, 독자적 주장을 많이 하며 무턱대고 식민사관이라 모함하는 탓에[2] 비판도 받는 학자이다.

조선시대 중기 '우국가(憂國歌)'를 지은 시인 이덕일(1561~1622)과는 동명이인이다. 한자도 李德一로 같다.

2. 생애

1961년 10월 7일 충청남도 아산시에서 태어났다. 온양천도초등학교아산중학교, 천안중앙고등학교, 숭실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 진학함과 동시에 강사로 출강하였다.

1993년 8월 숭실대학교 대학원에서 「日帝下 朝鮮共産黨과 소련과의 關係 : 코민테른을 중심으로[3]」라는 학위 논문으로 사학 석사 학위를 취득하고, 1997년 동 대학원에서 사회주의계 무장 독립운동 단체인 동북항일연군에 대한 연구 논문인 「동북항일연군 연구」로 사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1998년부터 사단법인 한가람문화연구소 소장 등을 역임하고 있다.

3. 역사적·정치적 성향

이덕일이 박사 학위를 받은 연구주제인 동북항일연군은 중국공산당 그중에서도 소련 코민테른의 지시를 받는 왕명이 중심이 된 중국발 항일무장군사조직에 대한 것이다. 이덕일은 이 연구에서 동북항일연군에 소속된 공산주의 계열 한인 조직과, 활약상에 대해서도 밝히었다. 훗날 김일성이 소속되는 항일유격대도 동북항일연군에서 파생되었는데, 이덕일이 연구를 진행하던 80~90년대까지만 해도 강한 반공의식 때문에 북한과 관련된 항일무장투쟁에 대해서는 거의 연구되지 않았다. 동북항일연군의 대표적 인물이 바로 김일성이고[4] 그 지원자가 중국 공산당이다.[5]

정조 독살설과 관련하여 그의 소설을 바탕으로 정조가 독살되었다고 주장하는 주요한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다. 저서로는 '당쟁으로 보는 조선역사, 사화로 보는 조선역사, 사도세자의 고백, 조선왕 독살사건, 여인열전, 누가 조선왕을 죽였는가' 등이 있다. 독살설 관련은 조선왕 독살설 문서로.

노론 음모론의 신봉자기도 하다.

정치적 성향은 분명하지 않다. 친민주당계 뉴스채널인 팩트TV에 길거리 특강을 가기도 했지만, 반대로 국가보안법을 운운하기도 했다. 확실한 건 민족주의 성향이 강하다는 것인데, 그가 2021년 유튜브 채널에 게재한 한국 양당 정치와 친일 문제 관련한 강연을 보더라도 한국은 한민당 후예격인 민주당이나 자유당 후예격인 국민의힘이나 친일파 후신이라고 디스하며 이게 정권 교체해도 바뀌는 것은 없는(?) 한국 정치의 근본 문제라고 주장했다.[6] 문재인 정부에서 한국독립사 재간행 사업을 강제 중단시켰다고 주장하기도 했으며, 1945~48년 해방 공간 사이 보수, 진보 세력을 계승하는 정치 세력이 나타나야 근본적인 변화가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4. 인식과 평가

고대사에 대해서는 단국대 교수 윤내현의 영향을 크게 받았기 때문에 역사 소설을 쓰는 환빠라는 세간의 평이라는 이미지가 있지만, 실제로는 이덕일은 어쨌든 근현대사 독립운동과 관련해서 역사학으로 박사학위까지 받은 전공자다. 문제는 근현대사 전공자고조선부터 조선 후기, 근대사까지 2천 년이 넘는 시대 전반을 모두 다루고 있다는 것. 그러나 한국 근현대사와 한국 고대사, 중세사는 전문가 수준으로 들어가면 접근 및 연구 방식부터 완전 다르다. 한국 근세사와 근현대사는 넘쳐흐르는 사료 중에서 논점에 필요한 부분을 잘 추출해내서 분석해내는 역량이 중요하고[7] 반대로 한국 고대사, 중세사에서는 부족한 사료를 바탕으로 상상력을 응용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져왔다. 즉 한국 근현대사 전공자가 고대사를 함부로 다루는 것은 프로 농구 선수가 함부로 프로 야구계에 뛰어드는 식의 만용, 소탐대실이 될 여지가 크다.

즉 프로 농구 선수가 축구에서만큼은 조기 축구회 회원보다 축구를 잘한다는 보장이 없는데, 이 부분은 한국사 필드에서도 적용된다고 볼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이덕일 교수는 자신의 박사 학위를 받은 전공자라는 사실 하나만으로 만용을 부리며 자신의 전공 지식과는 사실상 다른 분야에서 계속 잘못된 고집을 부리고 있는 셈이다.

실제로 큰 틀에선 역사학으로 묶일 수 있을지 몰라도 세부적으로 들어가면 해독할 수 있어야 하는 언어나 문체, 표기법부터가 제각각이다.

물론 역사학이란 박사 전공 시대나 지역에 머물라는 법은 없다. 역사는 관점을 지니는 한 시대의 앞과 뒤로 연결지어 논할 수 있다. 하지만 역사학 연구에서는 고대사, 중세사, 근대사, 근현대사에 이르는 각각의 분야는 같은 역사 연구라 해도 기본적인 연구의 접근 방법부터 필요한 언어 능력까지 완전히 천차만별이다.

한편 이것은 강단의 근대사학이 만들어 놓은 구분법이므로 이를 거부하고자 한다면 말릴 수 없다는 시각도 있긴 하다. 아날학파나 심리역사학, 주제 중심의 역사학 등이 이런 근대구분법을 거부하는 편이다.

화려한 수식은 없어도 다른 역사서와는 달리 비교적 무난히 잘 읽히는 글을 쓴다는 평가를 받는다. 사람들의 이목을 끌만한 표지나 제목도 한 몫한다.

4.1. 이덕일의 '고대사/조선사'에 대한 전문성?

파일:이덕일 헛소리.jpg 파일:이덕일 헛소리 2.jpg
이덕일의 저서 中 『고조선은 대륙의 지배자였다』

이덕일과 그 세력들의 역사 왜곡 사례는 이덕일/비판 문서로.

이덕일이 고대사에 대한 이론들을 보면 단국대 교수인 윤내현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고 한다. 윤내현의 이론은 고대 예맥족과 삼한의 영토를 넓게 보고 고조선 지역에 설치한 한군현은 요서 지방에 있다는 것이다. 문제는 윤내현의 이론은 예맥족이나 삼한의 영역을 과대 포장하면서 정작 한군현에 대해서는 무지함에 가까우며, 평양에 발굴되는 낙랑군 유물들을 철저히 무시되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이덕일은 윤내현의 이론이 참신하다 여겨,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어서 이덕일이 내놓는 고대사에 대한 이론은 대부분 윤내현의 영향에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이덕일이 다른 영역에 극단적으로 무지하다는 걸 보여주는 경우가 있는데 바로 임오화변이다. 이덕일은 사도세자의 죽음이 정신병처럼 됐다는 걸 근거로 노론사관을 주장한다. 그러나 사도세자 당쟁희생설은 이덕일이 그에 대한 책을 쓰기 전부터 사학계에선 정설이었다. 다시 말해 주류사관이었다. 오히려 정병설 교수가 비주류설이다. 그런데 이덕일은 완전 다르게 알고 있는 것이다. 이덕일은 심지어 이은순 교수의 논문조차 몰랐다.

이덕일이 제시했다는 프레임은 1968년 발표된 이은순 현 한국외대 명예교수의 논문 <한중록에 나타난 사도세자의 사인>에서 처음 제기됐다. 이은순은 《사도세자의 고백》이 출간되기 30년 전에 <한중록에 나타난 사도세자의 사인>이라는 논문에서 그런 가설을 발표했다. 그것을 발전시켜 1981년에는 《한국학보》에 <현륭원지 행장과 한중록의 비교 연구>라는 논문을 실었고 1988년 출간된 자신의 저서 《조선후기당쟁사연구》에 수록했다.
 
- 이은순, <한중록에 나타난 사도세자의 사인>, 1968(이화사학연구) 이화사학연구소
- 이은순, <현륭원지 행장과 한중록의 비교연구>, 1981, 일지사, 이은순
- 이은순, <사도세자의 정치적 생애와 시벽의 분립>, 《조선 후기 당쟁사 연구》, 1988

책을 내기 몇십 년 전부터 이미 이은순 교수가 제기해서 "주류사학"이 된 것이 바로 사도세자 당쟁희생설이다! 그런데 이덕일은 이런 "주류사학" 프레임을 자기 것인 것처럼 착각한 것이다. 일부에선 착각이 아니라는 주장도 한다. 다시 말해 알면서 일부러 그랬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이건 아직 증거가 없으니 섣불리 말하는 건 곤란하다.

이덕일은 심지어 사도세자 당쟁희생설을 "주류사학"으로 만든 이은순 교수의 논문조차 들어보지 못했다고 한다. 이덕일이 근현대사 영역 빼고는 기본 수준조차 안 된다는 근거다. 학자로서 기본 중 기본인 선행연구 확인조차 제대로 안 했다는 것.

그 외로도 여기서 대표적인 업적(?)을 몇 가지만 쓰자면...

다시 말해 근현대사 이 외에 대한 이덕일의 주장은 박사 학위 수준의 전문성이 없으며, 철학과 박사 학위자인 5.18 민주화운동/왜곡의 대표 유사역사학자인 김대령과 수준이 크게 다를 게 없다.

4.2. 초기엔 의도는 좋았다?

초기엔 순수한 부분도 있었다. 특히 세조정도전에 대한 이덕일의 해석 및 평가는 한국 대중의 역사인식에 발전적인 영향을 준 바 있다. 이덕일이 송시열만큼 증오하고 혐오하는 인물이 바로 세조인데, 이에 대해서는 정상참작의 여지가 있다. 이덕일이 나타나기 전까지만 해도 세조에 대한 일반적인 평가는 '위급한 상황에서 구국의 결단을 내린 위대한 영웅'이라는 군사정권의 일방적인 칭송과 찬양이 있었기 때문이다. 때문에 비록 이덕일이 직접적인 영향을 끼친 것은 아니지만 군부독재가 청산된 1990년대 말 이후부턴 세조에 대한 좀 더 객관적인 평가가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기본적으로 세조에 대한 이덕일의 시각은 이러하다. 정통성이 결여된 자가 왕위 찬탈[12] → 이에 반발하는 세력의 반란 → 반란을 진압하면서 또 공신책봉이란 상황이 반복되었다. 이렇게 쏟아져 나온 공신세력을 적절한 숙청 없이 무작정 친위세력을 키워주면서 자신의 생전에는 왕권이 강화되기는 했다. 그러나 그의 사후에는 살아있던 공신들이 원로로서 국정을 장악하여 군약신강의 환경이 조성될 토양을 마련했다는 것으로 정리된다.[13]

이덕일의 세조 증오는 이덕일 자신이 그토록 주장하는 '사악하고 강력한 신권에 맞선[14] 왕들의 외로운 싸움'이 시작된 토양이라고 주장할 건덕지가 있고 그간의 미화에 대한 반대급부가 결합된 것으로 보인다. 이덕일이 드라마 <왕과 비> 방영 당시 세조 미화를 비판하며 쓴 글을 보면 이게 이덕일이 맞나 싶을 정도로 개념글이다.

또한, 그의 서적들은 그 이전까지만 해도 역적으로 평가받았던 정도전의 재평가를 하는 데에 공헌하기도 했다. 극렬 정도전 빠이자 이방원 까인 그는 드라마 정도전의 자문을 맡기도 했으며 집중 강연까지 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세조와 정도전 등의 시각 변화에 있어서 이덕일이 독보적이었다거나 엄청난 공헌을 했다고 볼 필요까지는 없다. 비슷한 시기에 나왔던 임용한 선생의 <조선국왕 이야기>에도 잘 나오듯, 세조의 찬탈에 대한 비판적 시각은 그 군사정권 시기의 미화에 대한 반동으로 90년대 많은 소장파 역사학자들이 이미 제기하고 있던 것이었고, 정도전에 대한 재평가도 비슷한 시기에 등장하기 시작한다.

어찌되었건, 쉽게 말해서 자신의 전문분야인 근현대사에는 꽤 정확한 사관을 가지고 있었고[15] 조선 초기에 대한 사관도 세종대왕과 관련한 것만 빼고는 상당히 정확한 편이다.

4.3. 역사 왜곡 및 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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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일 세력의 역사왜곡
왜인 한반도 남부 지배 주장 '김현구 임나일본부설 주장' 날조 정조실록 기록 왜곡 해설
삼국사기 초기기록 수정
식민사관 주장
한사군 한반도설
식민사관 주장
'동북아역사재단이 독도 누락' 주장
두음법칙·한글 맞춤법 통일안
식민국어학 주장
"역사학에서는 그것보다 더 중요한, 먼저 해결해야 할 과제들이 있어요. 뭐냐면 진실은 뭐냐 이거죠. 한사군이 실제로 어디에 있었느냐, 이걸 먼저 파헤쳐야 되는 거죠. 그렇다면 파헤치고 파헤쳐 봐도 한사군은 한반도 북부에 있었다라는 결론이 나오면 어떡합니까? 초등학교 때. 그거 가르치지 말아야죠. 초등학교 때 배울 게 얼마나 많아요? 이순신 장군 배워야 되고, 을지문덕 배워야 되고, 단군 배워야 되고. 배울 게 그렇게 많은데, 우리 역사를 식민지로 시작했다 이것부터 가르쳐야 되겠어요?"
이덕일, "딴지라디오 벙커1 특강", 2014.10.28, 28:10~28:52[16]

이덕일은 역사 왜곡 뿐만 아니라 다른 학자들을 향한 마녀사냥도 자주 행한다. 자세한 비판에 대해선 해당 문서로.
"이덕일로 대표되는 사이비 역사학, 이종찬으로 대표되는 극우정치세력이 국회에 그만큼 큰 영향을 미치리라곤, 전혀 상상하지 못했다."
"(한국) 정부는 동아시아를 공부하는 서양학자들에게 아주 나쁜 인식을 주고 있다. 북한에서나 일어날 수 있는 터무니 없는 일을 하고 있다. 좋은 학자들이 설자리를 잃고 강요당하고 있다.”
하버드 대학 한국 고대사 연구실장 마크 바잉턴(Mark E. Byington) 교수#
누구나 자기가 추구하는 가치, 관점과 취향이 있다. 하지만 나와 똑같은 문구멍으로 보지 않는다고 타인을 공격하거나 남의 시각을 날조해 공격하는 폭력은 광적인 파시즘에 지나지 않는다. 폐쇄적 도그마에 빠지면 이성과 감성이 마비되어 자신도 모르게 통제력을 상실하게 된다.
이주한, 노론 300년 권력의 비밀, 2011, 53쪽.
...매국사학자들처럼 『환단고기』를 보는 자는 다 죽여야 한다고 거품을 물 책은 아니다. 『환단고기』에 대한 내 생각은 추후 자세히 밝힐 것이지만 한두 가지만 미리 말하겠다. 매국사학자들은 『환단고기』가 지 에미를 잡아먹었는지, 지 애비를 잡아먹었는지 모르겠지만 극도로 저주한다. 박노자도 「한겨레 21」과 인터뷰에서 『환단고기』에 대한 저주를 늘어놓았다. 나는 어떤 책이든 자유롭게 보고, 자유롭게 연구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이덕일 페이스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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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대중적인 평가

그에게 많은 문제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대중 역사가로 국민들에게 인지도가 높으며 그리고 책을 써서 부와 지위를 얻었다. 대중들은 사도세자 당쟁설을 사실처럼 믿게 되었으며, 노론/벽파=개쌍놈으로 생각하고 있다. 올바른 사실을 미처 파악하지 못하여 초중고교에서도 이 설을 사실처럼 말하고 역사 왜곡 드라마를 추천하는 역사 교사들도 많다.

심지어 정순왕후와 노론 벽파를 까기 위해 정순왕후가 세도 정치를 시작한 안동 김씨라고 하는 일까지 있다. 그렇지만 안동 김씨는 노론 시파이며, 정순왕후의 집안 경주 김씨는 안동 김씨에게 숙청당했다. 여기에다 안동의 김씨 가문 등이 경북 안동에서 한양 조정을 원격조정한 게 세도정치인 줄 아는 일반인의 오해와 겹쳐 역사가 엉망이 되기도 한다. 아직도 한국의 청소년들은 꼭 그의 저서가 집에 한두 권은 있으며(부모나 학교, 신문의 추천으로) <조선왕 독살사건> 같은 책은 거의 베스트셀러 반열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노론 음모론은 정치적 편향성까지 보이기에 진보지지 성향 정치인, 지지자들에게 널리 사랑받는 대표 음모론 중에 하나기도 하다.

2012년 10월 26일 제55회 전국역사학대회에서 한국역사연구회, 한국사연구회, 역사학회 등 대다수 학회들의 회장, 총무이사 등이 참석한 자리에서 주최 측의 입장으로 축사를 하던 KAIST 부총장이 유수의 역사학자들 앞에서 자신이 요즘 역사책을 읽고 있다는 발언을 하였다. 여기까지는 역사와 거리가 먼 KAIST 부총장의 덕담이라고 생각했는데 다름 아닌 이덕일의 책이었다. 거기에 한 술 더 떠서 해당 부총장은 그 책을 읽고 '우리 역사 왜곡이 이렇게 심한지 처음 알았다'고 발언하였다.

어떻게 보면 일본시오노 나나미와 유사하다고 볼 수 있겠다. 하지만 그 시오노 나나미조차 자신의 상상을 말할 때는 "...가 아닐까."라는 식으로 개인적인 견해라는 점은 분명히 한다. 단지 그런 게 지나치게 자주 나온다는 점이 문제일 뿐[17], 이덕일처럼 그런 상상을 아예 진실이라고 단정짓고 다른 역사학자들의 연구결과를 부정, 매도하는 행각까지 벌인 적은 없다. 또한 후술되겠지만 적어도 시오노 나나미 본인은 스스로 아마추어라고 정의하며 자신이 역사학자라고 주장하지 않는다. 시오노 나나미는 역사관이 지나치게 주관적이고 고증이 이상하다고 까일지언정, 현 사관을 '기독교 사관', '크리스찬들의 음모' 같은 식으로 매도한 적은 없으며 특정 사학자를 저격해 모함하지도 않았다.

이덕일이 정말로 기형적인 존재라고 평가받는 부분은, 그가 비록 근대사 전공이긴 하지만 어쨌든 사학과를 졸업하고 사학으로 박사 학위까지 받은 주류 학자 출신이라는 데에 있다. 이덕일식 해석과 주장은 어쩌면 책을 팔아먹기 위한 고도의 전술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역사학을 공부한 적도 없고 1차 사료에 접근할 능력도 없는 사람들이 무지로 인해 역사를 왜곡하는 것은 변명의 여지라도 있지만, 이덕일은 그런 핑계를 댈 수 없다. 시오노 나나미보다 이덕일이 더 악질일 수도 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시오노 나나미도 문제가 많은 사람이긴 하지만 그래도 그저 역사에 관심이 좀 있는 일반인 수준에 그칠 뿐이기에 최소한 잘 알지도 못하면서 나댄다고 일축이라도 할 수 있지만, 이덕일은 공식적인 학자라는 권위를 가지고 있다. 일개 소설가(시오노)의 주장과 역사학자(이덕일)의 주장은 대중적 신빙성에서 영향력이 다르다.

'원숭이도 이해하는 자본론'의 저자인 임승수는 페이스북에서 묘한 말로 사도세자 관련한 이덕일에 대한 비판 경향이 지나치다며 이덕일을 옹호하기도 했다. "물론 이덕일 저자가 학문적으로 부족한 부분도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사람들이 이덕일 저자를 너무 과도하게 깐다는 느낌이 든다. 전체적으로 진보적 지향의 좋은 책을 쓰는 분이라고 생각하는데..." (#) 그 밖에도 김상태의 책을 추천하는 등 묘한 말들을 댓글에 썼다.

결론적으로 대중에게 어필하는 능력만큼은 확실하지만, 그 주장의 신빙성이 의심되는 사학자라기보다는 상업 작가에 가까운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이덕일이 사학 박사 학위를 받긴 했으나 어디까지나 근현대사 연구 영역이었으며, 조선시대사 전공도, 삼국시대 전공도 아니다. 심지어 이덕일은 고대사의 기본적인 사료해석에서 오독을 저지른 적도 수두룩하다. 사학과가 아닌 국문학과 교수에게 처발린 경우까지 있을 정도다. 그가 책에 쓰는 내용은 자신의 편집이 들어간 주장일 뿐, 학계에서 공인된 설은 아니다. 그것을 유의해야 한다.

그러나 이덕일의 지지자들은 이덕일에 대한 정당한 비판마저 인신공격으로 몰아가는 등 이덕일을 필사적으로 지지한다. 경우에 따라서는 자신들의 그런 행동에 대해 이덕일을 옹호하자는 건 아니라고 하기도 하지만, 그 말을 거꾸로 보면 그들이 이덕일의 말을 맹목적으로 신뢰하기 때문에 자신들이 이덕일을 감싸주는 것을 이덕일을 억지로 옹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진짜로 이덕일이 옳은 말만 하니까 그런 것으로 여기는 거라고 볼 수 있다.

5. 다른 학자들과의 논쟁

이미 이덕일은 2000년 송시열과 그들의 나라를 쓴 이후로 수많은 전공자들의 비판을 받았다. 충남대 교수 조종업(철학, 송시열과 그들의 나라 비판), 서울대 교수 오수창(국사학, 살아있는 한국사 비판), 한신대 교수 유봉학(국사학), 성균관대 교수 안대회(국문학, 이덕일의 정조 독살설 비판), 전주대 오항녕 교수(국사학, 십만양병설 관련 주장 비판) 등이 이덕일의 편협한 사고와 빈약한 논리에 대해 질타했다. 하지만 이덕일은 발전하는 모습을 보이긴커녕 자신을 비판하는 학자들을 친일파, 노론 후예로 매도하더니 마침내 아래와 같은 만행을 저질렀다.

2009년 한겨레에 '주류 역사학계를 쏘다'라는 제목 아래 역사학계를 조선사편수회의 후예로 몰아 싸잡아 비난하는 글들을 연재하였다.

그러나 그가 쓴 내용에 남들을 납득시키기 어려운 부분이 많아 누리꾼들의 댓글에서 엄청나게 까이고 말았다. 논거로 드는 문헌 중 하나가 재야사학자의 탈을 쓴 문정창의 <고조선사연구>.

연재가 끝난 뒤에 이덕일의 조선시대사 논지를 완전히 부정하는 오항녕 고려대 강사(현 전주대 교수)가 반론글을 한겨레에 싣게 되었다. 이를 계기로 오항녕과 이덕일의 논쟁(?)이 신문상에서 벌어지게 되었다. 이 논쟁에서 오항녕으로부터 "그는 오류나 실수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정말 자신의 논거가 무너진 것을 모르나 봅니다"라는 굴욕적인 비판까지 받았다. 사실 이 논쟁은 한겨레 측에서 제대로 불이 붙기 전에 적당히 끝내버린 것이라고 한다. 신문에 실린 반론 글

오항녕 교수는 이후 이 논쟁을 2010년 출간한 조선의 힘에 수록하며 다시 한 번 이덕일을 깠다. 조선의 힘 판매량을 보면 이덕일에게는 굴욕. 여러모로 2010년인 이덕일에게 팔자가 사나웠는지 자신이 추천평까지 써 준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서(정확히는 경종·영조실록, 정조실록) 사도세자와 정조 사망원인에 관해서 이덕일의 주장을 대놓고 비판하는 모습을 보였다.(이름은 언급되지 않았지만) 그 영향때문인지 작 최후반부인 고종실록, 망국편에서 이덕일의 추천사가 빠졌다.

그리고 2011년 1월 문학동네 네이버 카페에서 정병설 서울대 국문학과 교수가 한중록을 바탕으로 한 '정병설, 권력과 인간'을 연재하던 도중 이덕일의 저작 사도세자의 고백을 비판하는 글을 올렸다. 이덕일은 즉각 한겨레를 통해 이를 비판했으나 정병설 역시 반박하였다. 참고로 정병설 교수는 이덕일의 사도세자의 고백 비판을 역사비평에 올려버렸고 이덕일의 유사역사학떡실신보냈다. 자세한 건 정병설 문서로.

5.1. 법정 다툼

김현구 임나일본부학자설과 관련하여 명예훼손으로 고소를 당했는데, 1차 공판을 앞둔 인터뷰에서 일본의 극우 야쿠자 자금이 한국 사학계로 흘러들어오고 있다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덕일은 김현구 교수를 일본 극우파 시각에 동조했다는 허위사실을 주장했단 이유로 1심에서 명예훼손 유죄 판결을 받았으나, 2016년 11월 3일 2심에서는 사실 적시와 의견 표명의 사이가 애매하고 임나일본부설은 공적인 관심사이니 폭넓은 논평 자유가 필요하다는 취지 아래 원심 판결을 뒤집어버리고 무죄 판결을 받았다.# 결국 2017년 5월 11일 3심 대법원에서도 무죄가 확정되었다. 자세한 내용은 김현구 임나일본부설학자 모함 사건 문서로.

6. 칼럼

7. 저서

8. 그 외

9.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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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비판자들에게는 유사역사학자의 대명사 격으로 여겨지지만 문서 상단 프로필의 학력란에도 적혀 있듯 이덕일이 사학 박사 학위까지 받은 전공자인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이는 역사학자를 자칭하는 여타 유사역사학자들과는 차별화되는 점이라고 할 수 있다.[2] 사실 역사학계에서 비주류나 독자적 주장 자체가 문제가 되는건 아니고 오히려 색다른 시각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호응할만한 부분도 있지만, 이덕일의 경우 주장의 근거 자체가 잘못되었거나 본인과 다른 주장을 하는 사학계는 걸핏하면 식민사학자들이라고 낙인찍는 경우가 많아서 비판을 받는 편이다. 일부 주장은 학계에서도 다뤄볼 만하지만, 근거가 빈약하거나 왜곡된 주장을 하는 경우가 더 많긴 하다.[3] 일제하 조선공산당과 소련과의 관계 : 코민테른을 중심으로[4] 물론 김일성을 연구했다고 그 사람이 김일성을 좋아하는 것은 아니다. 히틀러를 연구했다고 히틀러를 좋아하는 것이 아니듯.[5] 김일성은 중국 공산당 당원이기도 했으며, 소련 붉은군대 소속으로 활동하기도 했다.#[6] 그래도 민주당은 한민당 세력 일부가 참여했다는 식으로 표현한 반면, 국힘은 아예 지금도 자유당 후신을 자처하고 있다고 더 문제가 심하다는듯 표현하긴 했다. 이덕일 왈 해방 정국 여러 정당들 중 친일 세력이 주류가 된 정당이 2개가 있는데, 바로 김성수의 한국민주당과 이승만의 독립촉성중앙회->자유당이란다.[7] 여기서 추출이라 함은 무슨 악마의 편집 식으로 자신의 생각과 반대되는 사료는 무시하고 입맛에 맞는 것만 쏙쏙 골라내라는 게 아니고, 자신이 연구하는 분야와 관련된 사료를 폭넓게 섭렵하고 그 가운데 자신의 주장과 맞는 사료를 모으면서 반대되는 사료는 왜 신뢰할 수 없는지, 왜 (자신이 생각하기에) 사실과 조금 다를 수 있는지까지 밝혀내라는 소리다. 덧붙여 이덕일은 실제로 악마의 편집을 자행한 바 있다.[8] 4,6자를 바탕으로 대구를 이루는 한문의 문체. 고려시기까지 성행하다가 쇠퇴했다.[9]승정원일기》를 비롯한 조선시대 1차 사료들은 초서체로 쓰여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더 깊게 들어간다면 이두까지 읽어야 한다. 문법적인 관점에서는 조선시대 한문은 대체로 《맹자》나 《대학/중용》처럼 깔끔하게 떨어지지 않는다. 우리말 어순처럼 서술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조선왕조실록》이 완역되었다 하더라도 계속해서 교열작업이 이루어지는 가장 큰 이유다.[10] 한국 근대사에서 일본이 끼친 영향을 생각하면 알수 있으며 거기에 연구하는 분야에 따라 중국어나 러시아어가 필요한 경우도 있다.[11] 그나마 영어 사료는 번역이 잘 되는 편이기 때문에 의존도가 그렇게까지 높지는 않다. 물론 관련 전공자들은 잘 알고 있어야 하지만, 이덕일이 그 수준까지 파지는 않았다.[12] 이때 왕은 조선에서도 정통성이 만렙이었던 단종이었다. 단종의 정통성은 그 숙종보다도 정통성이 막강했다. 숙종이 왕세자를 거쳐 국왕으로 즉위한 거라면, 단종은 왕세손부터 시작하는 끝판왕급의 루트를 탔기 때문이며 거기다 본인뿐만이 아니라 아버지 문종까지 세종의 적장자에, 본인 역시 적장자였다. 그야말로 정통성만큼은 누구보다도 앞섰던 셈이다.[13] 이는 틀린 말은 아니다. 세조는 자신의 파벌을 제외하고는 조카인 단종뿐만이 아니라 동복동생이었던 안평대군을 비롯하여 금성대군 등의 종친들까지도 가차없이 숙청했기 때문에, 자기 파벌의 공신들을 제외하고는 지지기반이 전혀 없었다. 그러다보니 계유정난의 정치적 명분도 부족했던 자신이 기댈 수 있는 유일한 버팀목인 공신들을 키워줄 수밖에 없었고, 끝내 공신들을 숙청하지 못한 부분도 있다.[14] 다만 신권이 강하다고 무조건 나라에 해가 되는건 아니다. 당장 입헌군주제가 그런 토양 위에서 싹트기 시작했다. 케바케인 것.[15] 그러나 이것도 요즘은 옛말이 된 것 같다. 근현대사에서도 박은식을 임시정부 초대 대통령으로 소개하는 실수를 저지르거나 노론 음모론의 연장선을 보여주는 등 비판점이 있다.[16] 보았다시피 역사학자로서의 기본 자체가 어긋난 사람이다. 역사학자의 임무는 역사를 연구하고 그 성과를 발표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며, 국민들에게 민족적 자부심을 심어주냐 마냐는 정치가들이 이 성과를 바탕으로 할 일이다. 더군다나 이렇게 심어진 자부심이 사실에서 비롯된 것이면 또 모르겠는데 사실 자체를 왜곡하여 얻는 자부심은 국가적 재앙이다.[17] 물론 시오노 나나미도 역사관에 문제가 많은 인물인 것은 마찬가지라, 자기 자신도 잘 모르는 상태에서 크게 실수한 경우가 적잖이 있다. 가장 대표적인 예로 칸나이 전투 관련 묘사가 있다. 아울러 정설이 아닌 것이나 학계 소수 의견 중 자기 마음에 드는 것을 과도하게 강하게 미는 경우도 있다. 콤모두스 황제 즉위 직후 전쟁 중단 결정이나 카라칼라 황제의 로마시민권 확대 등의 사례가 대표적.[18] 1,2권의 출판 이후,일반 독자들에게 괜찮은 반응을 얻자 후에 3권을 출판하였다. 1권에서는 역시나 환단고기에대한 이야기를 집어넣었다. 역시나 노골적으로 위작이아니라며 헛소리를 시전해 놓았는데 사람들에게 좀 읽힌 대중역사서에 이런 헛소리를 써놓았디. 다만 이러한 부분만 제한다면 흥미로써 역사를 접하기에는 나쁘지않다. 그리고 이희근도 이덕일에 가려져 그렇지 자기 책에서 간도는 한국령이라는 국수주의적인 입장을 내비춘 적이 있다. 다만 그런 것을 빼면 기존에 잘못 알려진 역사를 수정하거나 아동용 역사서적을 쓰고 미시사, 민중사를 연구하고 있다. 게다가 이덕일만큼 크게 사고친 적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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