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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22 08:26:45

조선왕 독살설

1. 설명2. 독살설이 제기되는 조선의 임금이나 세자들

1. 설명

조선 왕들의 죽음 가운데 그 죽음에 의문과 의혹이 있는 경우에 제기된다. 한국사에서 손꼽히는 음모론 중 하나다. 조선왕조사는 유난히 왕과 신하들과의 이야기가 사초로 많이 남아 있고, 타 왕조와 다르게 군신간의 밀월관계가 깊었다. 세조가 단종을 죽인 예외적인 사례를 제외하면, 왕이 폐위되었다고 하더라도 목숨은 유배지에서 자연사할 때까지 살려 두었던 조선이어서, 아예 대놓고 왕이 살해당하던 고려시대 무신정권과는 분위기가 크게 다르다. 인조의 아들인 소현세자, 영조의 세자였던 효장세자, 정조의 아들인 문효세자, 순조의 아들인 효명세자 등 왕 뿐만 아니라 단명한 세자들에 대해서도 독살설이 제기되곤 한다.

그러나 이런 독살설 중 상당수는 당대에 왕의 죽음을 아쉬워하거나, 백성들의 공분을 사는 신료에 대한 원망에서 나오거나, 아예 아마추어 역사가들이 왜곡하거나 과대해석한 경우가 많다. 일례로 단종이나 고종, 경종(조선), 소현세자처럼 당시에도 독살설이 널리 퍼져 있거나 유력한 정황 증거가 있어 오늘날에도 논쟁의 대상이 되었던 경우도 있는 반면에 많은 논란을 일으킨 정조 독살설이나 송시열효종, 현종 독살 배후설은 대중에게 널리 알려진 독살설이지만 정설로 인정될 근거는 부족하고 도리어 독살이 아니라는 증거가 계속 발굴되는 경우도 있다. 특히 정조의 경우 전체는 아니지만 이 독살설은 노론 음모론과도 상당히 겹치는데, 세도 정치를 실시한 장본인은 노론 벽파가 아니라 정조의 편에 섰던 시파였기에 설득력이 떨어진다. 그나마 정작 정조를 독살했다는 혐의를 받고 있는 심환지 등 벽파 인사들의 경우에도 정조 어찰첩 등이 발굴되자 실제로는 정조와 매우 가까운 관계를 맺고 있었다는 게 밝혀지면서 더더욱 근거를 잃게 되었다.

독살설 부정론 쪽에서는 당시의 낙후된 의료기술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중병이나 오진, 의료사고 등을 모두 독살로 몰아간다는 견해도 있다. 임진왜란 이전인 조선 전기의 인물들은 독살설이 더욱 성립하기 어렵다는 견해도 있는데, 당시 조선에는 그렇게 강력한 인공 독극물이 드물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당장 죽으라고 보낸 사약마저도 체질에 따라 제대로 듣지 않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그러나 엄연히 15~19세기 수준 문명인데 독으로 사람을 죽이는 것이 그렇게 어렵다고 볼 수만도 없다. 게다가 천연 독극물도 얼마든지 비방으로 쓸 수 있고, 그보다 훨씬 전에도 동아시아에서 으로 사람을 죽였다는 기록은 많다. 이웃인 중국에서도 역대 왕조에서 독살에 대한 기록은 여럿이다.

소현세자의 경우는 당시 사관들조차도 독살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봤고, 한때 사학자들 사이에서도 그를 경계한 인조가 독살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봤다. 그러나 한의학적 관점에서 소현세자의 평소 건강 상태와 시술내용을 조명한 반박론이 강력하게 제기되면서 지금도 독살설을 진지하게 주장하는 해당 시대 연구자는 없다.

어쨌든 오랜 세월이 지난 현재에 와서는 다시 조사해 본들 남아있는 분석 근거들이 적다는 한계도 있어서 명확한 결론을 내기는 힘든 것도 사실이다. 현대에 이 독살설 여부를 확인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왕릉을 발굴해서 시신을 부검하는 것이며,[1] 특히 조선 전기에는 주로 석회를 사용한 회곽묘를 사용했기 때문에 시신이 미라 형태로 잘 남아 있을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왕릉 자체의 발굴도 전주 이씨 종약원에서 허락하지 않는 상황인데 시신의 부검을 허락할 리는 만무하기 때문에 실질적으로는 이루어질 가능성이 거의 없다.

해당 설을 제기하는 주요 학자로는 이덕일 등이 있으며, 관련 서적으로 <누가 왕을 죽였는가(1998, 이덕일 저)>[2] 등이 있다.

2. 독살설이 제기되는 조선의 임금이나 세자들

학계에서도 독살되었을 가능성을 인정하는 경우는 ★ 표시.

이 중에서 인종, 경종, 정조, 고종 독살설이 대중적으로 잘 알려져 있다.


[1] 외국의 유사 사례를 찾아보자면, 2008년에 광서제의 유골과 모발, 수의에 대한 법의학적 감식을 실시해 치사량의 비소를 검출하여 광서제의 사인이 비소 중독으로 특정되면서 광서제의 사망 원인이 독살로 판명된 사례가 있다. 어차피 광서제의 능이 이미 도굴된 적이 있었던데다 중국은 청 황실의 영향력이 거의 남아있지 않아 큰 반발이 없었기에 가능했던 일.[2] 2005년 <조선 왕 독살사건>으로 복간됨.[3] 야사에 의하면 갑자기 시종 하나가 오더니 단종의 목을 졸라 죽인 뒤 단종의 완전히 죽었음을 확인한 뒤 한양에 가면 왕이 자기한테 벼슬을 줄 것이라고 김칫국을 마시면서 올라가던 도중에 갑자기 코와 입으로 피를 토하며 쓰러져 죽었다고 한다.[4]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연산군이 아프다는 얘기가 거의 다 죽을 무렵에 올라온 것을 두고 의혹을 제기하기도 했다.[5] 또다른 설로는 왕이 약밥을 좋아하는 것을 악용해 그 밥에 독을 넣었다는 설도 있다. 참고로, 인조실록에는 김개시가 선조가 먹을 약밥에 독을 풀어놓았다는 이야기가 기재돼 있다.[6] 사실 원래부터 지병이 있었다.[7] 당시 허준은 선조가 죽은 것에 대한 문책으로 벌을 받았다. 본래 왕이 죽으면 치료를 담당했던 의관들은 도의상의 책임을 지고 파직하거나 사직해서 귀가하고, 얼마 가지 않아 복귀하는 게 보편적인 관례였다.[8] 이게 무슨 의미를 지니냐면 사관의 말대로라면 허준과 광해군이 선조의 죽음에 관련이 있다는 얘기인데, 정작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을 몰아낸 서인의 명분은 폐모살제로, 선조를 독살했다는 것은 폐모살제보다 아득히 뛰어넘는 최고의 명분이다. 그런데 그것을 부정했다는 것은 그들이 보기에도 이것은 아니올시다였다는 말이 된다.[9] 단, 한 가지 유의해야 할 점이 있다. 이 1차 사료들은 세자가 약간의 병증이라도 호소하면 어의들이 달라붙어 질병을 처방한 진료기록이라는 점. 이 기록은 날씨 기록과 서연을 했는지의 여부 다음으로 많다. 이렇게 수년간 쌓인 병원 기록만 한꺼번에, 그것도 디테일한 기록을 가감이나 수정없이 그대로 가져와 쭉 붙여서 나열해 놓으면 어떤 멀쩡한 사람도 병약하고 목숨이 위태로운 환자로 보이는 법이다. 멀리 갈 필요도 없이 가까운 곳에 그 사례가 존재하는데, 바로 소현세자의 아버지 인조다. 동궁일기에서 나오는 인조의 병증 치료기록들만 모아봐도 인조 역시 갈 날이 멀지 않은 사람처럼 묘사되기 때문.[10] 성종의 제15남 양원군의 서증손. 봉작은 진원군이며, 아내가 인열왕후의 서매로 소현세자의 이모부이면서 10촌 종조부이다.[11] 그럼에도 학계가 대체적으로 병사라고 치는 이유는 간단하다. 가장 부담이 적기 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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