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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7-02 15:33:31

왜인 한반도 남부 지배설

이덕일 세력의 역사왜곡
왜인 한반도 남부 지배 주장 '김현구 임나일본부설 주장' 날조 정조실록 기록 왜곡 해설
삼국사기 초기기록 수정
식민사관 주장
한사군 한반도설
식민사관 주장
'동북아역사재단이 독도 누락' 주장
두음법칙·한글 맞춤법 통일안
식민국어학 주장

1. 개요2. 비판
2.1. 왜는 5세기 이전 전라도에 있었다?
2.1.1. 문헌 사료의 단장취의2.1.2. 접(接)에 대한 견강부회2.1.3. 전방후원분의 미스테리
2.2. 왜는 백제, 신라, 가라의 종주국?2.3. 왜는 고구려와 패권을 다투었다?2.4. 왜는 5세기에 일본으로 이주했다?2.5. 왜는 대륙에 존재했다?2.6. 결론
3. 외부 링크4. 같이보기

1. 개요

검찰의 질문: "임나일본부설을 주장한 쓰에마쓰 야스카즈의 주장을 국내에서 인정한 학자가 있는가?"

이재석 한성대 역사문화학부 교수: 거의 없다. 하지만 간혹 있다. 전라도에 '왜'라는 표시를 하며 고구려에 진 뒤, 일본으로 갔다는 묘사를 한 책을 봤다. 이런 것이 임나일본부를 인정하는 것이고, 증거로 내라면 낼 생각도 있다. 어떻게 이런 기술을 할 수 있는지 놀랐다.'''
이덕일 박사의 김현구 교수 명예훼손 공방 ⑥ 이재석 한성대 교수 향한 이 박사 측 고압적 증인신문
[[파일:external/pds26.egloos.com/d0112467_561406807eaee.jpg
align=center]]| 이덕일, 『고구려 700년의 수수께끼』, 2000, 41쪽
무섭게도 한국에서 주장되었던 한국 버전의 임나일본부설이다. 이 주장에 따르면 5세기 이전 왜는 영산강 유역에 있었으며, 백제 · 신라 · 가라의 종주국이었고, 고구려와 한반도 중남부의 패권을 다툴 정도로 강력한 나라였다고 한다. 이렇게 잘나가던 왜가 고구려 광개토대왕에게 깨지고, 그 지원을 받은 내물 마립간에게 깨지면서 버티지 못하고 섬나라로 달아나 지금의 일본이 되었다고. 물론 다 거짓주장이다. 일본 우익이나 좋아할 만한 주장. 사실 일본의 영토는 저렇게 작지 않다면서 싫어할지도

일본의 임나일본부설, 김성호의 비류백제설에 버금가는 해괴한 주장이다. 1990년대 영산강 유역에서 전방후원분이 다수 발견되면서 반짝 인기를 끌었지만, 2005년에 전방후원분 오보사건이 터지면서 이 학설은 다시 사장되었다. 하지만 정작 이를 주장했던 이덕일은 이후 역으로 김현구를 역사왜곡으로 몰아붙인다.

최근 '남원 일대 가야고분군을 조성한 세력의 명칭을 '기문'으로 세계유산에 등록을 추진하는 것은 일본서기를 인용한 것이며 이는 곧 임나일본부설을 인정한 친일강단세력의 음모이다'라는 주장을 펼치고 있다. 그러나 이 기문이란 이름은 일본서기뿐 아니라 중국 기록인 양직공도에도 나오는 이름이다. 즉 아래의 논란과 별개로, 일단 일본 기록을 전면 배제한다고 쳐도 기문국이라는 나라 이름을 사용하는 것 자체는 무리가 없다.

그런데 여기서 포인트는 이 주장을 펼친 강연회를 남원에서 열었으며 이에 감동받은(?) 시민단체들이 그의 주장을 따라 '기문국을 삭제하라, 남원 고분군의 세계유산 등록에 반대한다'는 시민운동(?)을 펼치고 있는 것[1].

이미 다 알다시피 한반도에 왜가 거주하면서 실제적으로 지배했다고 공식적으로 저서에서 밝히고 있는 사람은 이덕일 뿐이다. 즉 이 주장을 달리 설명하면, '한반도에 왜가 있었다고 (나는) 믿고 있으니 일본서기에 언급된 기문 지명을 차용하는 것이 임나일본부설을 뒷받침하는 내 얘기가 맞다는 뜻이다'라는 말이 된다.

즉 이덕일의 말에 동조하는 남원 시민들은 자신도 모르게 이덕일의 '왜인 한반도 지배설'에 동조하고 있는 것이다. 이덕일 일파의 큰그림? 일부 초,중학교 선생들도 이덕일 주장의 오류를 깨닫지 못하고 부화뇌동 하는 것이 안타까움을 더하고 있는 현실이자, 남원 교육의 미래가 걱정되는 점이다.

참고로, 일본서기는 일부 내용에 대한 과장과 왜곡이 있으며 과거 일제강점기 왜곡된 역사관의 주입을 위한 보조자료로 사용된 흑역사가 있지만, 한국 고대사의 연구에 있어 상당히 가치 있는 자료 중 하나이며, 세부 내용 중 사실과 사실이 아닌 것은 이미 학계에서 잘 정리가 되어 있다. 자세한 내용은 일본서기 참조.

또한 6세기에 편찬된 일본서기가 20세기 제국주의 시기에 왜곡되어 사용되었다고 해서 사료가 작성될 당시의 내용에 대해 비판적 활용을 원천 차단할 이유가 전혀 없으나, 이덕일미래로 가는 바른 역사 협의회[2]에서는 일본서기의 이러한 특성을 교묘히 왜곡하여 국민 정서를 건드리며 본인들의 세력을 확장하는 도구로 사용하고 있다.

오히려 남원의 기문이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된다면 과거 일제강점기 및 현재 일본 우익들 일부가 일본서기를 왜곡 인용하면서 왜가 고대에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다고 주장했던 설들을 한번에 날려버릴 수 있는 좋은 기회이다. 이덕일 일파들은 본인들 외에 나머지 강단사학자 모두가 친일사상으로 썩었다고 비난하지만, 한국의 고대사를 바로 세우기 위해서는 일본서기에 대한 피해의식을 반드시 극복해 나가야만 한다.

1. 일본이 한반도를 지배했다는 일본서기 대목에 나오는 명칭이 기문이므로 이를 등록하는 것은 왜인 한반도 남부 지배설을 인정하는 것이므로 세계유산 등록을 추진하는 세력들은 친일 매국노이다, 라는 견해와

2. 일본이 한반도를 지배했다는 일본서기 대목에 나오는 명칭이 기문인데, 이 일대 고분군의 고고학적 발굴 성과로 보아 상당한 세력을 과시했던 가야의 일원임이 증명되었으므로 이것이 세계유산에 기문으로 등록이 성공하면 (일본서기의 해당 부분인) 왜인 한반도 남부 지배설이 근거 없음이 세계적으로 인정되는 것이다. 라는 견해 중 어느 것이 더 타당한지는...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미래로 가는 바른 역사 협의회 같은 유사사학 무리들의 농간과 왜곡된 강연에 선량하고 순수한 남원 시민들이 홀랑 넘어간 현실이 안타깝다. '일본서기에 나온 지명을 사용하는 것은 임나일본부설을 인정하는 것이다' 라는 단순한 표현이 임팩트가 있긴 하지만..
여기에 동조하여 남원 지역구 국회의원인 이용호는 2021년 9월 11일 남원 유곡리 두락리 고분군 앞에서 이에 대해 "가야고분군의 세계유산 등재를 왜 우리가 합니까? 일본에서 해야지. 일본에서 일본 정부가 기문가야로 세계유산에 등재하면 될 일이지 남원시가 나설 일이 아니다."라는 멋진 발언을 하여 소소한 화제가 되었으니 기억해 두자.[3]

아무튼 시민들(?)이 반대하면 세계유산 등록은 당연히 물 건너 갈 것이고, 그것이야말로 이덕일 일파가 원하는 대로 왜가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다는 것을 인정하는 꼴이 되어버린다. 다시 강조하지만, 이덕일이 왜 남원에 와서, 왜 전라도 지역에 와서 이런 분탕질을 하고 갔는지 그 의도를 부디 잘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참고로 이 주장은 증산도 계열의 상생방송을 통해서 암암리에 전파되고 있는 중. 자신도 모르게 환빠에 동조하지 않도록 각별한 주의가 필요하다.

이런 임나일본부설이나 일본의 삼국 지배에서 더 확장된 역사 왜곡으로는 한반도 삼국이 일본에게서 선진 문화를 전수받았다는 역사 왜곡도 있다. 이는 아예 한반도 삼국시대에도 백제를 비롯한 국가들이 일본에게 문물을 전파한 것이 아닌, 역으로 "미개한 한반도 삼국에 일본이 직접 선진 문물을 전파해 주었다"는 주장이다.

즉, 일본이 중국에게서 직접 다이렉트로 문물을 배워왔으며 다시 한반도에 전파한 스승이라는 대체역사나 다름없는 학설로, 원래 이런 주장은 일본에서 임나일본부설을 주장하면서 일본 역사왜곡 학자들 측에서 확대시켜 정설로 정립하여 자국의 역사교과서 등에 적용한 역사왜곡이었다. 더욱 개탄할 것은 이러한 주장을 한국에서도 자국 혐오자나 일뽕, 역갤러, 유사 역사학자들도 사실이라며 자주 인용하는 낭설들 중 하나라는 것이다.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 중에는 칠지도를 백제가 일본에게 진상해 바친 것으로 곡해하기도 한다. 이는 일제강점기 오래 전 고대부터 한국이 일본보다 뒤떨어졌다 주장하는 역사 왜곡이자 정신승리 중 하나다. 이를 보아도 일본의 한반도 남부 지배설이나 임나일본부설이 양국의 역사를 얼마나 헤집어 놓았는지를 알 수 있다.

2. 비판

2.1. 왜는 5세기 이전 전라도에 있었다?

한반도에 왜인의 유적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대단히 주목할 만한 것이다. 지금껏 왜라는 정치세력은 처음부터 일본열도 내에 있었던 것으로 인식해 왔기 때문이다. 그런데 『삼국지』 위서 한전과 『후한서』 동이열전 등은 왜인이 처음부터 일본열도에 있었는지 의문을 갖게 해 준다. ……
"남쪽은 왜와 접해있다[南與倭接]"의 접(接)은 육지를 경계로 삼을 때 쓰는 용어지 바다를 경계로 할 때 쓰는 용어는 아니기 때문이다. 만약 바다 건너 왜가 있었다면 '바다[海]'로 동쪽과 서쪽의 경계를 표시한 이 기록이 유독 남쪽 경계를 표시할 때만 바다를 생략할 이유가 없다. ……
이 기록에 따르면 왜의 위치는 마한과 진한, 변진의 남쪽 즉 한반도 남부다. 따라서 왜는 적어도 이 기록이 말하는 시기인 3세기까지는 한반도 남부에 위치하고 있었다는 말이 된다. 이처럼 3세기까지 한반도 남부에 있었던 것으로 기록된 왜가 중국 기록에 바다 건너 존재하는 것으로 나오는 때는 5세기부터다.
{{{#!wiki style="text-align: right;"
이덕일, 『교양 한국사 1』, 2005, 221~223쪽</p>}}}

2.1.1. 문헌 사료의 단장취의

여기에서 이덕일의 문헌 인용은 자기가 보고 싶은 부분만을 뚝 잘라놓은 결과다. 애당초 같은 삼국지 안에서도 정작 논의의 당사자를 기록한 '왜인전'은 돌아보지도 않고 그 이웃인 '한전'만을 거론하는 것이 비정상인 것이다. 그런데 그도 그러할 것이, 삼국지 왜인전에서는 첫 구절부터 바로 왜국이 바다 한가운데 섬에 있는 족속임을 분명히 적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자신의 주장과 상충되는 논거를 의도적으로 무시한 것이다.
樂浪海中有倭人, 分爲百餘國, 以歲時來獻見雲。
낙랑(樂浪) 바다 안에 왜인이 있으니 나뉘어 100여 국이 되었고, 해마다 와서 조공하였다 한다.
{{{#!wiki style="text-align: right;"
『한서』 지리지 하, 중국어 위키문헌}}}
倭人在帶方東南大海之中, 依山島爲國邑。
왜인은 대방(帶方) 동남쪽 큰 바다 안에 있는데, 산과 섬에 의지해 나라를 이루었다.
{{{#!wiki style="text-align: right;"
『삼국지』 위서 동이전 왜인조, 중국어 위키문헌}}}
倭在韓東南大海中, 依山㠀爲居, 凡百餘國。
왜는 한(韓)의 동남쪽 큰 바다 안에 있는데, 산과 섬에 의지해 살고 무릇 100여 국이다.
{{{#!wiki style="text-align: right;"
『후한서』 동이전 왜조, 중국어 위키문헌}}}
게다가 삼국지의 찬자는 참 친절하게도 그 뒤로 대방군에서 왜국까지 가는 경로를 자세히 적어두고 있다. 요약하자면 구야국에서 남쪽으로 바다를 건너가면 대마국이 나오고, 다시 남쪽으로 바다를 건너가면 일대국이 나오고, 다시 바다를 건너가면 말로국이 나온다는 것이다. 이 지리는 오늘날의 현해탄과 일치하는데다, 삼국사기에도 '대마도'가 바다 건너 섬으로 나오니 대마국이 현해탄 위에 있는 섬이라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더군다나 삼국지에는 분명히 구야국에서 남쪽으로 바다를 건너 대마국에 다다른다고 되어 있기 때문에, 이덕일의 주장에 따라 대마국이 지금의 전라남도 어디쯤이라면 방위상 구야국은 지금의 태안반도 안면도 즈음이 된다. 가야의 위치는 자연히 안드로메다로 날아갈 것이 당연지사.
군에서 왜에 이르기까지는 해안을 따라 항해하여 한국을 경유하는데, 남으로 가고 동으로 가서 그 북안의 구야한국(狗邪韓國)에 다다르기까지 7천여 리다. 처음으로 한 바다를 건너서 천여 리를 가는데, 대마국(對馬國)에 이른다. …… 다시 남쪽으로 한 바다를 건너 천여 리를 가는데, 이름을 한해(翰海)라 하고 일대국(一大國)에 이른다. …… 다시 한 바다를 건너서 천여 리를 가는데, 말로국(末盧國)에 이른다.
{{{#!wiki style="text-align: right;"
『삼국지』 위서 동이전 왜인조, 중국어 위키문헌}}}
왕이 왜인이 대마도(對馬㠀)에 군영을 두고 무기와 군량을 쌓아 두어 우리를 습격하려고 한다는 말을 듣고서 그들이 일어나기 전에 우리가 먼저 정예 군사를 뽑아 적의 군영을 격파하고자 하니, 서불한 미사품이 말하였다.
"신이 듣기로 ‘무기는 흉한 도구이고 싸움은 위험한 일’이라고 합니다. 하물며 큰 바다를 건너[渉巨浸]서 남을 정벌하는 것은 만일 이기지 못하면 후회해도 돌이킬 수가 없습니다."
{{{#!wiki style="text-align: right;"
『삼국사기』 실성이사금 7년 2월, 한국사데이터베이스}}}
단순한 반론에서는 벗어나는 여담이지만, 영산강 유역이 왜인의 땅이었다고 보는 논리의 위험성은 단지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삼국지는 이후 말로국에서 동남으로 불미국까지 육로가 700리, 그리고 다시 불미국에서 남쪽으로 왜국들의 우두머리인 야마타이국까지 수로가 한 달, 육로가 한 달이라고 적고 있기 때문이다. 즉 말로국에서 불미국까지의 왜국들을 영산강 유역에 비정한다면 그들의 우두머리였던 야마타이는 지금의 북규슈나 주코쿠 지방 어디쯤이 된다.

애당초 삼국지에 기록된 야마타이의 위치 비정이 기나이설과 북규슈설로 나뉘는 것이 '거리를 중시하여 방향을 보정한다'면 지금의 기나이 지방을, '방향을 중시하여 거리를 보정한다'면 지금의 북규슈 지방을 야마타이로 비정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에 한반도 남부가 왜인의 땅이었다는 이덕일의 주장을 반영한다면 거리와 방위 조건을 모두 충족하면서 북규슈 지방이나 주코쿠 지방을 야마타이로 비정할 수 있다!

즉 이를 뒤집어 해석하면 규슈에 있는 야마타이국이 한반도 남부에 있는 나라들의 우두머리가 된 셈으로 임나일본부설과 판박이가 된다. 물론 이덕일이 직접적으로 이런 주장을 제기한 것은 아니지만, 그 자신이 도리어 일본인들에게 악용되기 좋은 논리를 개발해준 것만은 분명하다.

2.1.2. 접(接)에 대한 견강부회

위 인용문에서 이덕일은 접(接)이라는 한자가 육지를 경계로 삼을 때 쓰는 용어지 바다를 경계로 할 때 쓰는 용어는 아니라고 규정하면서 "왜와 한이 접하고 있다"는 기록을 왜가 한반도 안에 있었던 증거라고 내세우고 있다. 하지만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렇지 않다. 다른 사서에서 엄연히 바다를 사이에 두고 떨어진 두 나라가 '접한다'고 기록된 바가 있기 때문이다. 바로 경기만을 사이에 두고 서로 떨어져 있었던 6~7세기의 고구려와 백제다.

물론 신라가 백제와 동맹을 맺고 한강 유역을 차지한 것은 553년 이후, 즉 6세기 중반이다. 중국 역사서에서 이에 대해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한반도 상황을 제대로 반영했을 가능성은 높지 않다. 즉, 『북사』가 편찬될 무렵 중국에선 당시 고구려와 백제가 국경을 접하고 있었을 것으로 판단했을 가능성이 충분하다. 그러므로 『북사』의 내용을 근거로 '접(接)'이라는 한자가 바다를 건넌 영토끼리도 사용하는 한자라고 판단하는 것은 위험하다.

파일:attachment/silla_abunai.jpg
南至小海, 北至舊夫餘。…… 南接百濟, 北鄰靺鞨。
남으로 소해에 이르고, 북으로 옛 부여에 이른다. …… 남으로 백제와 접하고[南接百濟] 북으로 말갈과 이웃한다.
{{{#!wiki style="text-align: right;"
『북사』 동이전 고려조, 한국사데이터베이스}}}
東極新羅, 北接高句麗, 西南俱限大海, 處小海南。
동으로 신라에 닿고, 북으로 고구려와 접하며[北接高句麗], 서쪽과 남쪽은 모두 대해에서 끝나고, 소해의 남쪽에 위치한다.
{{{#!wiki style="text-align: right;"
『북사』 동이전 백제조,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이외에도 삼국유사를 보면 7세기 전반인 636년을 배경으로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하고 있다.
신라 제27대 선덕왕 즉위 5년, 정관 10년 병신에 자장법사가 서토로 유학을 가니 오대에서 문수보살이 법을 내림에 감응하였다. …… 중국 태화지(太和池)가를 지나는데 홀연히 신인이 나와서 물었다. …… 자장이 말하였다.
"우리나라는 북으로 말갈에 잇닿고, 남으로 왜인과 접하며[南接倭人], 고려와 백제 두 나라가 번갈아 국경을 침범하여 이웃의 침략이 종횡하니 이것이 백성의 걱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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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유사』 탑상 제4 황룡사구층탑,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위에서 이덕일은 3세기에 삼한의 남쪽에 '접하고' 있던 왜가 5세기에 열도로 이주했다고 주장했지만, 여기에서 보이듯 7세기에도 여전히 왜는 신라의 남쪽에 '접하고' 있었다. 이 시기에는 가야도 이미 죄다 신라에 병탄되었기에 신라의 남쪽이라고 하면 에누리없이 그대로 남해바다다. 왜인들이 무슨 워크래프트의 나가족도 아니고 수중왕국을 세우지는 않았을테니, 바다를 건너 섬에 살아도 접(接)이라 표현했다고 보아야 함은 당연하다.

일각에서는 자장법사의 말을 그대로 수용한다면 고구려와 신라 사이에 말갈이 있다는 이야기이니 수용하기에 무리가 있다고 주장하는데, 백제와 신라에 인접한 한반도 중부 지역의 말갈이라는 집단은 삼국사기에서 지속적으로 등장한다. 위말갈 참조. 그 집단의 속성이나 경향과 무관하게 고구려와 백제/신라 사이에 말갈이라고 불리는 집단이 존재했다는 것은 역사적으로도 매우 명확하다.

2.1.3. 전방후원분의 미스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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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external/pds25.egloos.com/d0112467_561701ab76f6e.jpg
김규운, 「한반도 전방후원분과 왜계석실의 분포유형 검토」, 2010, 84쪽</p>
이덕일이 왜인 한반도설의 또 다른 근거로 제기하는 것이 영산강 유역의 전방후원분들인데, 문제는 5세기 전반에 왜가 이동했다고 본 이덕일의 견해와 달리 이것들 대부분이 5세기 말에서 6세기 초반이라는 사실이다. 게다가 전방후원분이 사라진 뒤에도 왜계 석실분들이 그 자리를 이어받고 있다.

게다가 영산강 유역의 전방후원분은 5세기가 되어야 나타나기 시작하는 데 반해, 일본에서는 이미 야요이 시대부터 전방후원분의 맹아가 나타나기 시작해 4세기 전반에는 유형화되고, 이후 6세기까지 15만 기에 달하는 전방후원분들이 각지에 난립하면서 거대화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들은 수혈식에서 횡혈식으로 발달했으며, 따라서 영산강 유역의 전방후원형 횡혈식 석실분은 그 최종형에 불과하다.(이정호,1996,141 이정호, 「전방후원형 고분의 연구사 검토」, 1996, 141쪽)

또한 5세기 이전까지 영산강 유역의 토착 묘제였던 주구토광묘~옹관묘는 전방후원분과 아무런 계승관계가 없다.
영산강유역에 왜인의 무덤이 있었다는 소위 '왜인설'은 오래전부터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옹관고분이 왜인의 무덤이라는 것이었다. 야쓰이 세이이치(谷井濟一)는 나주 반남면 덕산리 3호분과 대안리 9호분의 분형과 주구의 존재 그리고 하니와 원통류품을 통해 이들 고분(옹관고분)이 '왜인의 무덤'이라고 주장하였다. 이와는 별도로 일본의 고대사학자 이노우에 히데오(井上秀雄)는 왜인의 근거지가 일본 규슈 지역뿐만 아니라 한반도 남부지역까지 포함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견해, 즉 왜가 한반도 남부에 위치한다는 설은 임나일본부설이 점차 힘을 잃어갈 때 에가미 나미오(江上波夫)의 기마민족설과 함께 출현한 것으로 임나일본부설의 변형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일부 국내학자들(이덕일·이희근, 1999)과 매스콤(EBS 8.15 특집프로, 1999)은 임나일본부의 근거가 되었던 '광개토대왕 비문'과 《삼국사기》 등 일부 문헌을 근거로 4세기 말 경의 반남고분의 주인공들이 일본으로 넘어가기 전 한반도 내에 자리잡았던 왜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는 지극히 즉흥적인 주장이다. …… 당시 일본적인 요소가 조금이라도 보이는 곳은 옹관고분의 마지막 단계인 신촌리 9호분을 제외하면 거의 전무하다. 현재 일본학자들조차도 옹관고분의 주인공을 왜인으로 보는 경우가 거의 없다. 따라서 과거 일본학자들의 주장을 신중한 검토도 없이 그대로 받아들여 영산강유역의 옹관고분을 왜와 관련된다고 주장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wiki style="text-align: right;"
최성락, 「전방후원형 고분의 성격에 대한 재고」, 2004, 95~96쪽</p>}}}

2.2. 왜는 백제, 신라, 가라의 종주국?

『삼국사기』의 기록에 따르더라도 왜는 한반도 정세에 여러 차례 현실적 영향력을 행사한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아신왕 6년(397)에 "왕이 왜국과 우호 관계를 맺고 태자 진지를 인질로 보냈다"는 기사 내용과, 신라본기 실성왕 1년(402) 3월에 "왜국과 우호 관계를 맺고, 내물왕의 아들 미사혼을 인질로 보냈다"는 기사는 당시 왜가 백제와 신라를 자신의 영향력 아래 두었던 강력한 정치집단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wiki style="text-align: right;"
이덕일, 『교양 한국사 1』, 2005, 224~225쪽</p>}}}
「광개토대왕 비문」 기사는 광개토대왕이 대규모의 군사를 보내 왜군을 물리쳤음을 보여주고 있다. …… 이 기사는 내물왕의 지원 요청에 따라 광개토대왕이 5만의 군사를 보내 신라를 침입한 왜군을 공격하는 내용이다. 고구려군에 쫓긴 왜군이 도망간 지역이 임나가라인 점은 임나일본부와 관련해 흥미로운 대목이다. 이 당시 임나가라가 왜의 강력한 영향력 아래 있었음을 시사해 주기 때문이다.
{{{#!wiki style="text-align: right;"
이덕일, 『교양 한국사 1』, 2005, 227~228쪽</p>}}}

일본 측 기록인 일본서기를 쓰여 있는 그대로 해석하면 왜가 삼국+가야의 종주국이라는 식으로 쓰여 있다. 그러나 일본서기의 이러한 서술은 현대에는 일본 학계에서조차도 완전히 신뢰할 수 없다고 보는 시각이 주류다. 한국 및 중국 사서와 교차검증도 안 될 뿐더러, 일본서기 안에서조차도 아귀가 맞지 않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서는 일본서기 문서 참조.

하단의 문단에서는 더더욱 어처구니없는 실수를 범하고 있는데 고구려군에 쫒긴 왜군이 임나가라로 도망갔다는 것이 왜의 가야 지배를 근거하는 말이라면 덩케르크 철수작전에서 프랑스군이 나치군을 피해 영국으로 도망친 것은 영국이 프랑스에 의해 지배당하고 있는 나라임을 증명한다는 것인가?

2.3. 왜는 고구려와 패권을 다투었다?

그 후 영락 14년(404) 왜는 백제와 연합해 고구려의 대방 지역을 침입한다. 고구려의 전력이 분산된 틈을 타서 왜와 백제가 공격해 온 것이다. 이때 광개토태왕은 직접 군사를 이끌고 출전해 왜·백제 연합군을 궤멸시켰다.
{{{#!wiki style="text-align: right;"
이덕일, 『교양 한국사 1』, 2005, 185쪽</p>}}}
광개토대왕이 보낸 군사가 무려 5만에 달하는 것은 다소 과장일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이 정도의 군사는 보내야 물리칠 수 있었던 강적이 왜였음을 말해준다.…… 고구려에 맞서 한반도의 패권을 다투던 왜국은, 이렇듯 「광개토대왕 비문」에 따르면 400년에 남하한 고구려군에 타격을 받은 후 전열을 재정비해 404년 고구려의 대방 지역을 선제 공격하다가 또 다시 패배를 당했다. 두 번의 걸친 패배로 왜국의 국력은 약화되지만 여전히 신라왕이 선왕의 아들을 인질로 보내야 할 정도의 세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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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일, 『교양 한국사 1』, 2005, 228~229쪽</p>}}}

결론부터 말하자면 왜가 강했던 것이 아니라, 해당 시점의 신라가 당시 기준으로도 형편없이 약했던 것이다. 일반적으로 교과서의 그림 등을 보고 인식하는 것과 달리, 백제와 고구려가 상대적으로 명확하게 자신의 지배 영역을 갖추었고 왕의 힘이 귀족들을 제압했던 것과 달리 5세기 극초기까지도 신라는 마립간이 서라벌 외의 그 어떤 지역도 직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했다.

고구려가 5만의 대군을 내려보낸 것은, 그 군대를 내려보내는 목적의 방점이 일본을 대적하기 위한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살려달라는 신라의 문이 활짝 열린 김에 신라와 진한 전역을 집어삼켜 버리기 위함이었기 때문이다. 전투병과 점령군의 기본적인 차이조차 인식하지 못하는 군사학에 대한 무지가 드러나는 대목이다.

2.4. 왜는 5세기에 일본으로 이주했다?

최근의 일본사 연구자들은 신묘년. 즉 4세기 후반 일본은 통일된 정권을 형성하지 못하고 있었다고 말하고 있다. 즉 4세기 후반에 일본열도에서 바다를 건너와 백제와 신라를 공격할 정도의 정치세력은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이 일본 학계의 연구 결과다. 이에 따르면 일본열도에는 현해탄을 건너 신라를 공격할 만한 능력을 가진 정치세력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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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일, 『교양 한국사 1』, 2005, 224~225쪽.</p>}}}
이런 모든 공격이 실패로 돌아가면서 한반도에서 그 영향력이 약하되어 가던 왜는 5세기 경 일본열도로 이주를 시작하는 것으로 추측된다. 이는 이 무렵부터 일본 나라 지역에 거대한 고분들이 조성되는 것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렇게 일본열도로 이주하던 왜는 500년 무렵 그 중심 세력의 대부분이 이주를 마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신라 소지왕 22년(500) 3월 장봉진을 공격한 왜인을 끝으로 삼국사기는 왜인에 대한 기록을 하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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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일, 『교양 한국사 1』, 2005, 228~229쪽</p>}}}

일부 이덕일 옹호세력들은 '이덕일의 주장은 일본이 아니라 우리민족이 오히려 일본을 지배했다는 주장이다'고 옹호하는데 정작 '왜가 일본으로 이주했다'는 내용은 무시한다. 왜가 일본열도를 지배했으면서 이주했다면 결국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던 세력이 일본의 선조라는 황당한 주장이 된다. 갑자기 여기서만 탈민족주의가 된다

2.5. 왜는 대륙에 존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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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일 역사TV에서 그럭저럭(?) 활동했다가,이제 하다못해 왜인은 대륙에 존재했다는 망언까지했다!

2.6. 결론

이덕일은, 김석형김현구 등이 박살낸 임나일본부설을 살렸을 뿐만 아니라 왜가 백제신라까지 지배하며 고구려와 한반도 패권을 경쟁하다 밀리니깐 열도로 이주했다는 왜곡을 벌였다.

거기다 부흥 카페에서 확인한 결과 이덕일이 사료장난을 친 것이 나타났다. # 사료에 따르면 왜는 한반도 남부가 아니라 '한가운데 섬'에 있었는데 이걸 '한반도 남부에 있었던 것 처럼' 편집을 했다.

그리고 이거 매우 내선일체같은 해석이다. 내선일체에 영향받은 환단고기의 완역을 축하하고 총독부 근무와 황해 은율군수를 지낸 친일파 문정창을 선생이라고 했다. #

참고로 광개토대왕비문을 그대로 해석해 저런 주장을 하는 것과 다르게 김현구는 이렇게 해석했다.
당시 백제는 고구려와 국경을 맞대고 치열한 전쟁을 계속하고 있었다. 그러나 지리적으로 보아서 일본은 직접 고구려와 대립할 이유가 없었다. 따라서 광개토대왕비문 404년 기록에 보이는 왜는 백제가 끌어들였다고 할 수 있다. -김현구, 백제는 일본의 기원인가, 2002, 66쪽

백제가 왜를 용병으로 끌어들인 게 아니라, 왜가 백제와 연합해서 침입했다고 주장했다.
그 후 영락 14년(404) 왜는 백제와 연합해 고구려의 대방 지역을 침입한다. 고구려의 전력이 분산된 틈을 타서 왜와 백제가 공격해 온 것이다. 이때 광개토태왕은 직접 군사를 이끌고 출전해 왜·백제 연합군을 궤멸시켰다.- 185쪽

그런데 여기서 대방이란 말도 이상하다. 이덕일은 '한반도에 대방이 있었다'를 식민사관의 내용으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쓰다 소우키치는 대방이 한반도에 있었으며 삼한도 모두 한반도 남부에 있었다고 전제하고 논리를 전개했다. - 이덕일, 한국사 그들이 숨긴 진실, 역사의 아침, 2009, 211쪽
본인이 식민사관이라 했던 '한반도 내부 대방설'을 정작 자기책에선 아무렇게나 썼다.

3. 외부 링크

4. 같이보기



[1] 남원가야역사바로알기상임대표 곽0훈, 집행위원장 양0님, 지역구 국회의원 이용호가 남원 가야고분군 세계유산 등록 저지를 위해 적극 행동하고 있으니 남원 고분이 세계유산이 못 되다면 이분들의 공로가 막대했음을 꼭 기억해 드리도록 하자.[2] 일명 미사협.[3] 참고로 해당 발언이 들어간 영상은 남원가야역사바로알기상임대표가 적극적으로 배포했다. 팀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