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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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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칠지도_.png
七支刀 / 六叉の鉾 [1]

1. 개요2. 설명3. 문구 해석을 둘러싼 역사적 분쟁
3.1. 동진에서 만들어서 에 하사했다?
4. 각종 매체에서
4.1. 한국4.2. 일본

[clearfix]

1. 개요

〈앞면〉 泰△四年五月十六日丙午正陽造百練銕七支刀出(生)辟百兵宜供供侯王△△△△祥(作)
전지왕 4년 11월 16일 병오 날 정양에 백번 단련한 철을 재료로 칠지도를 만들었다.
이 칼은 온갖 적병을 물리칠 수 있으니, 제후국의 왕에게 나누어 줄 만하다. △△△△가 만들었다.

〈뒷면〉 先世以來未有此刀百濟王世子奇生聖音故爲倭王旨造傳示後世
지금까지 이러한 칼은 없었는데, 백제 왕세자가 부처님의 가호로 진귀하개 태어났기 때문에 왜왕 지(旨)를 위해 만들었으니 후세에 전하여 보이라.
일본 나라현 덴리시 이소노카미 신궁(石上神宮)에 전해지는 백제산 철제 이다. 고대사를 바라보는 한일 간의 시각차가 드러나는 유물 중 하나로, 백제야마토 정권에 하사한 검인지 아닌지를 놓고 논쟁이 있다. 일본 학계 일각에선[2] 일본서기를 주된 근거로 백제가 헌상했다고 주장하지만, 칠지도의 명문에는 백제가 야마토 정권에 하사했다고 적혔기에 한국 학계에선 글귀 그대로 백제가 하사했다고 여긴다.

2. 설명




원래는 이소노카미 신궁의 신고(神庫)[3]에 녹이 슨 채로 보관되었는데, 이소노카미 신궁의 대궁사(大宮司)로 임명된[4] 국학자 스가 마사토모(菅政友; 1824–1897)가 1874년 신고를 조사하며 칠지도의 녹을 떼보았다가 명문을 찾아내었다. 1953년에 일본 국보 고고자료 제15호로 지정되었다.

검이라고는 하지만 상당히 특이한 모양으로 뻗은 잔가지가 특징이고, 길이는 74.8 cm이다. 도신에 한반도 금관 문화의 금상감 기법으로 황금 문자 61자를 수놓은, 당시 기준으로 최고의 금속 공예 기술이 들어간 보검이다.

특유의 복잡한 형상 덕분에 한 눈에 봐도 전투용이 아니라 특별한 의미가 있는 보배임을 알 수 있다. 칼자루에서부터 칼날에 이르기까지 형상은 나무 모양인데 이것은 신성한 나무로, 제사의 주관자를 상징한다. 또한 7갈래 가지는 북두칠성을 본 뜬 것으로 한 나라의 화복을 다스리는 군주의 통치권을 뜻한다고 할 수 있다.[5]

말 그대로 제사와 통치를 모두 주관하는 군주의 증표이자 신물이라고 할 수 있다. 역사적으로 각 나라 군주들 사이에서는 정교하게 제작한 보검을 선물로 보내는 일이 많았는데, 대체적으로 대국의 통치자가 그보다 작은 나라에 하사하는 경우가 많았다. 중국 용천지역에선 명나라 영락제가 티베트의 달라이 라마에게 선물한 보검을 복원한 모조품을 전시했다.[6]

신검 전설에 소개된 칠지도 본문. 저 책 자체가 일본 책이라 아래 해석과 다르다.

칠지도 자체는 일본에 딱 한 자루만 있지만, 현대에 들어 사학자들은 한반도에서도 양식이 비슷한 보검들을 발굴하였다.[7]

파일:/news/201307/10/munhwa/20130710120106663.jpg
[8]

일제시기 부여 군수리 사지에서 발굴된 철제 칠지상 철기. 문화재청 부여 군수리 사지 페이지에는 칠지도가 발굴되었다고 나오는데, 이 유물을 말하는 듯하다.

3. 문구 해석을 둘러싼 역사적 분쟁

글씨 몇 자가 훼손되었기에 이를 둘러싸고 한국과 일본 학계 간 의견차가 있다. 일본 학계는 보통 4세기 중엽 백제 근초고왕으로 추정되는[9] 인물이 일본에 바쳤다고 하고[10], 반대로 한국 학계는 백제왕으로 추정되는 인물이 일본에 하사했다고 여긴다. 다만 어느 쪽이든 당시 백제와 왜가 상당히 우호적 관계였음은 맞아보인다.

쌍방의 견해가 자존심 문제 등으로 상당히 충돌하는데, 일단 한국 학계는 격이 낮은 쇠로 만든 유물이며 후왕이라는 문자를 들어서 당시 왜가 백제의 제후국이었다고 인식하는 편이다. 게다가 근초고왕 시절이 맞다면, 이 시기 백제는 바다 건너 요서와 교류하고, 한반도에서 상당한 우세를 점하던 고구려와 경쟁하던 최전성기 시절이었다. 그리고 일본은 백제에게 전수받은 기술들로 중앙 집권화를 시도하던 상태였다. 따라서 백제가 일본에게 칠지도를 바쳤다는 주장은 당시 정황상으로 봐도 설득력이 떨어진다. 반면 일본 학계는 칠지도를 들고 온 사절이 태자로 추정될 여지가 있는 점을 강조하여 백제를 왜의 속국으로 인식하기도 하는 모양이다. 다만 일본서기에서 칠지도를 전했다는 구저(久氐)가 태자라는 설은[11] 일개 학설일 뿐 정설이 아니다. 그가 일본서기에서 나오는 일대기를 보면 태자라는 말도 없고 지극히 신료의 성격이 짙어 태자라고 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애초에 근구수왕과 잇는 경우도 이름과 발음이 비슷하다는 점밖에 근거가 없다.

건국대 홍성화 교수는 자신의 논문 《석상신궁 칠지도에 대한 일고찰》(2009. 12.)에서 '전지왕 대에 고구려의 남하를 막기 위해 전달했다'는 설을 주장하였다. # 다만, 전지왕은 고구려에 대해 수성적인 입장을 취했다. '병오 정양'이라는 표현을 단지 '양기가 강한 때에 만들었으므로 좋은 칼이다.'하는 의미에 불과하다고 해석하는 이들은 칠지도가 정말로 태화 4년(369)[12] 11월 병오일에 만들어지진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고 여긴다.

일단 5월 병오라는 표현은 길상구로서 중국에서 많이 쓰던 표현이 맞는다. 병오는 정오를 뜻하기 때문에 하루 중 제일 무더운 시간이다. 또한 음력 5월은 하지가 있는 달이다. 즉, 일조량이 최고로 많고 무더운 달이다. 그렇기 때문에 양기가 제일 강한 시기이고 그 에너지를 받아서 만든 칼이라는 뜻이므로 길상구로 사용했다는 말이다. 그렇지만 하술할 내용과 X선 판독 결과 11월임이 밝혀졌기 때문에, 병오라는 길상구는 해가 짧아지고 추운 한겨울 중인 11월과는 전혀 부합하지 않는 길상구로 읽히기 때문에 간지일을 병오라고 기록한 것으로 보인다.

조경철은 논문에서, 칼이나 거울에 쓰여진 금석문에 5월이서 적혀 있을 경우 그 달에 병오가 없는 경우가 많지만, 날짜까지 구체적으로 병기했을 경우에는 병오일에 맞는 날이 대다수였다고 한다. 또한 해당 월/날짜에 병오일이 있는 경우에는 같은 월/다른 날짜에 병오를 적는 경우는 없었다고 한다. 다른 말로 하자면 굳이 날짜까지 적어두고 같은 달의 다른 날짜에 병오일이 있는데 이걸 제껴두고 병오라고 적진 않았다는 것이다. 또한 논형에 나오며 당대에 관용적으로 쓰이던 표현인 '丙午日中'을 사용하지 않고 굳이 '丙午正陽'이라고 쓴 것은 백제의 왕이 이 문구를 통해 자신의 위치를 드러내고 있음을 뜻하며, 칠지도를 만든 연대도 실연대일 가능성이 높다고 보았다. 구태여 많이 쓰는 관용구인 병오일중을 버리고 병오정양이라고 씀에는 간지가 맞는 날짜를 부각시키기 위함이라는 것이다.

만약 병오정양이 수사가 아닌 실제 제작한 날짜라면 408년이 유력하다. 11월 16일이 병오정양인 날은 408년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전지왕 4년이 바로 서기 408년이다. 연호를 언제 썼느냐에 따라서 연호의 기년은 달라지지만 우연의 일치라고 치부하기엔 너무 정확하게 떨어진다.

파일:11월16일 병오정양.png

파일:칠지도x선.png
파일:칠지도x선2.png

X선 특성상 뒷면의 문면도 X선이 투과하여 뒷면과 앞면의 문자들이 겹쳐서 보인다. 11월달의 一자는 우측 하단의 사진에서 보이듯 육안으로 확인 할수 있다. 十자는 X선 판독 결과 일부가 보인다고 한다. 기존 일본 학계의 통설이 맞다면 年자와 月의 공백이 좁아야 하지만, 자백이 있으니깐 五월이 아닌 두 글자 11월 12월 중에 하나로 보인다. 그러나 하마다 고사쿠를 위시한 일본 학계 측에서는 年자와 月자 사이의 공간이 넓은 것은 인정했지만, 한 글자가 더 들어갈 정도의 자백은 충분치 않다는 점을 들어 아직도 五월로 읽고 있다.

백제 왕태자 '기(奇)'를 부여기로 특정하면, 전지왕 치세기에 일어났던 일이리고 볼 수 있다. 일설에서는 부여기를 구이신왕과 동일인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일본서기》에 이런 기록이 나온다.
(섭정) 52년 가을 9월 정묘삭 병자(10일)에 구저(久氐) 등이 천웅장언(千熊長彥)을 따라왔다. 이때에 칠지도(七枝刀) 한 자루와 칠자경(七子鏡) 한 개를 비롯하여 여러 가지 귀중한 보물을 바쳤다. 그리고 "신국(臣國)의 서쪽에 강이 있는데, 그 수원은 곡나철산(谷那鐵山)입니다. 너무 멀어서 7일 동안 가도 이를 수가 없습니다. 그 물을 마시다가 문득 그 산의 철을 얻으니 영원토록 성조(聖朝)에 바치고자 합니다."라고 아뢰었다.[13]
五十二年秋九月丁卯朔丙子、久氐等從千熊長彥詣之、則獻七枝刀一口・七子鏡一面・及種種重寶、仍啓曰「臣國以西有水、源出自谷那鐵山、其邈七日行之不及、當飮是水、便取是山鐵、以永奉聖朝。」
일본서기진구 황후조 섭정 52년
일본서기의 서술을 그대로 따르면 진구황후 섭정 52년은 서기 252년이지만, 이주갑인상을 고려하면 372년이 된다. 일본서기 진구황후조 섭정 55년에 "(백제) 초고왕이 죽었다." 하는 기록이 나오는데, 일본서기 서술대로라면 섭정 55년은 255년이지만 근초고왕은 375년에 죽었으므로 이주갑인상이 정확하게 맞아떨어진다. 따라서 일본서기에서 칠지도 등을 '바쳤다'고 말하는 진구황후 섭정 52년은 372년(근초고왕 27년)이 매우 유력해보인다.

일본 역사학계에서 근거로 사용하는 《일본서기》는 한일 고대사 연구에서 몹시 중요한 사료로 한국 학자들도 종종 참고한다. 한국에는 그 시대에 쓴 역사서가 전혀 남아 있지 않으므로, 일본서기만큼 삼국시대를 자세히 서술한 다른 문헌이 없다. 그러나 《일본서기》는 당시 야마토 왕권의 공식적인 프로파간다 목적으로 저술된 역사서이기 때문에, 천황일본 야마토 조정의 입맛에 맞게 집필한 내용이 너무 많아 객관적인 기록으로 받아들이기에는 무리가 있다. 예컨대 칠지도가 언제 일본으로 들어왔는지 쓴 기록이라면, 특별히 의심할 이유가 없는 한 일본서기가 좋은 참고 자료가 된다. 하지만 백제가 일본에게 '하사'했는지 '헌상'했는지 같은 정치적 입장 문제에서는 《일본서기》는 그리 신뢰할 만한 것이 못 된다. 이러한 문제로 양국 학계에서 해석 차이로 논쟁 중이지만, 당시 백제가 일본에 조공할 이유나 근거가 떨어지기 때문에 한국에선 신뢰성을 의심하는 학자들이 많다.

게다가 한국 사학계 측에선 칠지도에 새긴 문구도 중요하게 여긴다. 아래는 칠지도 문구 원문이다.
앞면: 泰□四年十□月[14]十六日丙午正陽造百鍊(銕)七支刀(出)辟百兵(宜)供供候王□□□□作
뒷면: 先世以來未有此刀百濟王世子奇生聖音故爲倭王旨造傳示後世
학자마다 판독을 다르게 하는 글자는 괄호 안에 나타내었다. 이것의 구체적이고 정확한 해석은 학자마다 이견이 많기에 정설은 없으나, 큰 틀 안에서는 대강 다음과 같이 해석된다.
태□ 4년 1□월 16일 병오정양에 백 번이나 단련된 철로 된 칠지도를 만들었다. 모든 병해를 피할 수 있으니 마땅히 공손한 후왕에게 줄 만하다. □□□□이 만들었다.
선세 이래 이러한 칼이 없었으니 백제 왕세자 기생성음이 고로 왜왕 지(旨)를 위하여 만들었으니 후세에 전하라.
《이십사삭윤표》에 따르면, 칠지도의 제작 연도로 흔히 알려진 369년(기사년) 5월 16일, 11월 16일, 12월 16일은 각각 을미일, 임진일, 임술일이다. 뒤에 나오는 병오일과 맞는 날이 하나도 없다.


여기서 '마땅히 공손한 후왕'이라는 구절이 한국 사학계가 중요시하는 부분이다. '후왕'의 '후(侯)'는 보다 하위에 있는 신하를 지칭하는 글자로 보통 '제후', '후작'과 같은 낱말에 쓰이는 '자'이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일부 일본 학자들은 백제가 아닌 동진에서 만들어서 단순히 백제를 거쳐 동진 → (백제) → 일본 형식으로 하사됐다는 설을 제시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런 주장은 근거가 빈약할 뿐만 아니라 일본서기에도 칠지도는 백제의 곡나철산이란 곳에서 채굴한 철로 만든 검이라고 기록되었다. 즉, 현대의 논쟁이나 후왕의 속뜻이 무엇이었든 당시 백제 왕실은 일본 왕실을 '후왕'이라고 부른 모양이다.

일각에선 백제가 왜에게 '인질'을 보냈다는 식의 표현이 있는 삼국사기의 기록에 근거하여 '인질을 보낼 정도면 칠지도도 솔직히 바친 거라 봐야 하지 않나?' 하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칠지도와 직지가 왜로 건너간 것은 서로 시대적 간극이 길어서 직접적인 연관성이 없다. 즉, 백제 전성기 때 보낸 칠지도와 고구려에 밀려 국운이 기운 시절의 백제를 비교하는 것은 애초에 무리일뿐더러, 백제가 보냈다는 인질의 정체에 대해서도 실상은 속까지 파고 들어가봐야 한다. 정작 당사국들인 백제삼서의 기록[15]과 일본 쪽의 기록('내조하였다.')들 중에서는 그 어디에도 인질을 보냈다고 하진 않는다.

즉, 일본서기에도, 또 일본서기에서 인용했다는 백제의 기록에도 '인질'이라는 표현은 없고, 정작 한참 후대인 고려 시대에 쓰인 삼국사기에만 이런 표현이 나올 뿐이다. 문제가 되는 삼국사기조차도 해당 구절을 살펴보면 결호(結好)라고 하여 상하 관계에 따른 인신 공납이 아닌 단순히 우호 관계를 맺기 위해 일종의 외교관으로서 파견되었음을 알 수 있고, 인질(質)의 의미도 상하 관계와 무관함을 밝히는 견해를 나행주를 위시한 학자들이 제시하여 설득력을 얻었다.

가령 덴쇼 14년(1586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자신의 어머니인 오만도코로를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인질로 보냈지만 당시 히데요시가 이에야스에게 굴복을 선언한 것이 아니듯, 전근대의 인질은 지금처럼 단순한 볼모로서의 의미가 아니라 외교관 또는 보증의 증표 같은 여러 의미들을 모두 포함하는 포괄적인 개념이었다. 실제로 일본 측은 외교관으로서 일본을 방문했었던 김춘추도 인질이라고 표현했기 때문에 그 당시 인질이란 단순히 볼모가 아닌 외교관, 다시 말하면 외교의 수단으로 물건이 아닌 사람을 보내는 것을 인질이라고 칭했음을 알 수 있다.

아니면 실제로는 백제에게 번국 정도의 취급을 받은 왜를 간접적으로 지배하거나 영향력을 행사하러 번왕이나 지방관 형태로 건너온 백제 왕족이, 이후 백제가 멸망하고 난 이후 일본서기가 쓰여지는 과정에서 근초고왕의 행적이 진구황후의 행적으로 둔갑되었듯 인질로 온 것인마냥 조작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가령 이미 수십 년 전부터 학자들 사이에서 정설로 통하는, 일본서기 구절 중 백제가 왜에게 무엇을 바쳤다, 조공했다는 등의 말이 사실은 전해주었다, 하사했다라는 말이었다는 것처럼 일본서기에는 얼핏 보아도 과장과 조작이 수두룩하다. 다시 말하면 일본서기 저술 시점에 이미 망국이 되고 없는 백제의 눈치를 볼 필요 없이, 일부는 백제 사서를 인용해 사실로 적어놓고, 다른 일부는 백제와 왜가 교류했던 사실만 뽑아 입장을 완전히 바꿔 백제가 상국이 아닌 왜가 상국인 것처럼 곡필을 했다는 것이다.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일본서기 본문을 보면 왜에서 백제의 왕을 마치 황제인 마냥 일개 제후나 신하처럼 다루는 모습이 수도 없이 나오는데, 막상 백제가 멸망하고 나서 왜왕이 그제서야 왕이 아닌 천황(황제)이라는 칭호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왜가 백제의 눈치를 봤던 부용국에 지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간접적으로 보여주는 대표적인 증거들 중 하나이다. 정말 왜가 백제보다 우위에 있었다면 백제가 멀쩡히 존속했을 때 천황 칭호를 이미 쓰고도 남았을 것이다. 천황가의 신성성을 강조하는 고사기 뿐만 아니라 그 천황가에 대한 맹목적인 숭조와 국수주의로 점철된 일본서기에서도 당시 왜국이 백제와 교류할 당시 황제 칭호를 썼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나오지 않는다.[16]

상기한 말로 미루어보면 백제에서 왜왕에게 칠지도를 하사한 것은 당시 왜를 다스리는 왜왕의 권위를 인정하는 일종의 의례로, 이 의례를 통해 이전까지는 왜국 내에서 마치 후대의 전국시대마냥 여러 유력자들이 서로 왕을 자칭하며 여러 세력들이 난립하였지만 이 이후로 백제가 인정한 유일한 왜의 정식 국왕이 탄생하였다는 사실을 짐작해 볼 수 있다. 당시에 동아시아에서 황제가 제후나 수하 장수들에게 칼이나 도끼 등을 하사하는 것은 그 제후나 장수의 지도력을 보증하는 행위였다. 만약 삼국지를 읽어보았다면, 당장 중국 삼국시대 오나라에서 손권육손에게 촉나라의 대군을 물리치기 위해 병권을 통솔하게 하며 무엇을 하사했는지 생각해보자. 황제가 그들이 어떠한 직책에 있음을 인정함과 동시에 그들이 아랫사람들을 지휘할 수 있는 원동력을 부여하는 절차였으므로 의심하거나 길게 반박할 필요도 없이 당연히 백제가 왜에게 칼을 하사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칠지도가 왜왕에게는 왜국을 다스릴 수 있는 보증서 역할을 한 것이고 당시 항해술과 거리상의 한계로 매번 식민지처럼 총독으로서 백제의 왕족이나 장수들을 보내는 대신 왜국 현지인으로 하여금 자치를 하라는 의도였던 것이다.[17]

일본의 금속, 철기 제작 기법을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스즈키(2013)는 2013년 세계 대백제전 기념 학회에서 백제의 금속 기술을 다루면서 중요한 점을 지적했다. 바로 칠지도는 명문에서 말하는 대로 '단련', 즉 '단조'된 것이 아니라 '주조'되었다는 것이다. 당시 기술력으로는 칠지도 형상을 단조하기가 기술력으로는 매우 어렵고, 실제로 칠지도 단면은 길게 눌린 타원형인데 이런 모양은 단조하면 나올 수가 없다.

이런 사실을 감안하면 명문의 날짜나 수식어구를 문자 그대로 받아들일 이유는 없을 것이다. 병오정양이든 백 번 단련이든 그저 멋진 미사여구를 갖다붙였을 뿐일 수도 있다.

주보돈은 2011년 《한국 고대사 연구》에 실린 『백제 칠지도의 의미』라는 논문에서 하사했느냐 바쳤느냐를 따지는 것은 '소모적인 논쟁'일 뿐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칠지도의 태화(太和)를 백제의 연호로 보고 원년을 369년이라고 추정하였다. 369년 근초고왕이 황색 깃발을 사용하여 한강 남쪽에 사열했다는 삼국사기 백제본기의 기록을 참고하였는데, 굳이 천자의 색인 황색 깃발을 사용한 것은 연호 사용과 관련이 깊다고 보았다. 게다가 일본서기의 신공황후기의 가라 7국 평정 기사를 주체 교체론 입장에서 받아들일 때, 백제는 가라 7국을 평정하고 남만 침미다례를 도륙했으며 일본과 관계를 텄다. 그리고 삼국사기에 따르면 이해 고구려의 침략을 물리쳤다.

따라서 백제는 사방을 평정했다는 자신감으로 고구려에 대항하여 황색 깃발을 사용하여 열병하는 등, 자신감을 드러낸 해였다. 그래서 이 해를 태화 원년으로 정하여 사용했다고 보았다. 그리고 이에 따르면 칠지도가 제작된 것은 태화 4년으로, 이 시기 백제는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완벽하게 우위를 점하고, 심지어 371년 평양성까지 진출하여 고구려왕을 패사시켰을 정도였다. 동진은 근초고왕을 진동장군 영낙랑태수(鎭東將軍 領樂浪太守)로 봉했는데, '낙랑태수'라는 직책이 4세기 초반까지 한반도 주변을 아우르던 국가에 중국 왕조가 주던 실질적인 직책이었음을 감안하면 이는 동쪽의 패자로서 근초고왕을 인정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때 백제는 그 자신감을 바탕으로 칠지도를 제작하여 일본에 선물하였다[18]. 따라서 백제 칠지도로 드러난 양국 간의 상하관계와 같은, 현대 양국의 자존심 싸움으로 비화되는 지리멸렬한 소모적 논쟁 이전에 당대 백제의 자신감이 드러난 칠지도와 관련된 역사적 의미를 제대로 음미하자는 주장이다. 근초고왕 업적을 낚아챈 것 아니냐는 의심을 받는 일본서기 신공황후기의 가라 7국 평정 기사, 침미다례 도륙 기사에 대한 주체 교체론의 사실성을 간접적으로 증명해주는 실물 유물로 파악한 것이다.

이병도는 태화를 백제의 독자 연호라고 보고, 태화 원년을 369년이라고 하여 태화 4년은 372년이라고 해석했다. 주보돈의 해석과 동일하다. 태화 연호가 근초고왕의 연호라는 주장이 있다. 출처

가야사 전문가 김태식 교수는 칠지도의 형태와 트렌드 등을 고려해 5세기나 6세기로 추정하는 모양이다. 그는 무령왕릉에서 발견된 청동 거울을 근거로 칠자경과 비슷한 형태로 추정하고[19] 그 무렵 유행하던 형식의 거울과 도검으로 보았다. 일본서기에는 칠자경과 칠지도가 백제로부터 전해졌다고 증언하지만, 칠자경은 일본에서 발굴된 바가 없고 칠지도만 있다. 6세기 초 무령왕 재위기 즈음 유행하던 형태라고 본다면, 주조(대량 생산)되었다는 학설을 뒷받침한다.

박남수 동국역사문화연구소 선임 연구원은 칠지도 연호가 태화가 아닌 '봉원(奉元)'이라는 설을 주장하였다. ##

3.1. 동진에서 만들어서 에 하사했다?

일본 사학계 일각에서 주장하는 칠지도의 동진 하사설은 크게 두 가지이다.

우선 1번의 가설을 살펴 보자. 문장의 태□(泰□)를 동진의 폐제 시절(366년 ~ 371년 12월) 연호인 태화(泰和=太和)라고 보고 동진의 연호를 사용했다는 점을 근거로, 백제가 동진의 연호를 쓰는 즉, 동진의 책봉을 받은 나라이고, 칠지도는 중국의 동진 왕조가 백제왕을 보고 왜왕에게 하사하라고 명령하여 전달한 물건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太와 泰가 엄연히 다른 글자임에도[20] 泰□四年를 중국 동진의 연호인 "太和 四年(369년)"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다. 물론 전근대 한국의 외교와 관련된 부분에서, 당시 동아시아 지역에 있어 사실상 표준으로 쓰이던 기년인 중국 연호를 쓴 사례가 한둘이 아니긴 하지만, 백제 무령왕릉과 그 묘지석이 발견되어 6세기 초반 백제는 중국의 연호를 사용하지 않았음이 밝혀졌다.

따라서 4~5세기에 백제가 중국의 연호를 썼을 가능성도 옅어졌다. 또한 중국의 연호가 등장한다는 게 곧 중국에서 만들어졌다는 증거가 되지는 않는다. 가령 조선왕조실록에서도 중국 연호가 표준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조선왕조실록이 중국에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듯이, 칠지도 명문에 등장하는 연호가 진짜 중국 연호가 맞는다고 하더라도 칠지도가 중국에서 만들어졌다는 증거가 되지는 않는다. 즉, 연호를 제정한 국가와 칠지도를 제작한 국가는 서로 별개일 수 있다는 것이다. 책봉을 받은 국가가 책봉을 해준 국가의 연호를 외교적인 부분에서 사용함은 동아시아 역사에서 보편적인 일이었다. 오늘날도 중세에 유럽 각국에 퍼진 교황발 서력기원과 근세에 퍼진 그레고리력이 이제 서양을 넘어 국제적으로 쓰인다고 그 옛날 유럽 국가들이나 현재의 세계 각국이 교황과 봉신 관계를 따른 게 아니듯이 연호는 그저 당대 동아시아 국제 표준을 따른 것이다.

무엇보다 식별이 안 되는 해당 한자가 和자가 정말 맞는지, 그리고 맞는다라고 하더라도 그게 연호인지는 많은 반론들이 존재하며 또한 한국 학계에서는 태화라는 한자가 혹여 연호라도 해당 연호는 백제의 고유 연호라고 주장하는 의견들이 다수 있다. 당연하지만 칠지도에 적힌 명문대로 칠지도는 백제가 일본에게 하사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의견들이 통설인 상황이다.
그 결과 칠지도는 백제 近肖古王이 369년 치른 고구려와의 싸움에서 승리한 뒤 내부 체제를 정비하면서 스스로 皇帝라는 의식을 갖고 연호를 처음 사용하기 시작하였다고 보았다. 나아가 백제는 371년 다시 고구려의 故國原王을 戰死시켰는데 그에 대비할 목적에서 372년 동진과 통교하여 우호 관계를 맺고 나아가 倭와 군사적 동맹 관계를 맺을 목적에서 칠지도를 제작하여 보내었다고 보았다. 이 칠지도는 『日本書紀』 신공기에 보이는 바로 그것이라고 해석하였다. 이렇게 풀이함으로써 『日本書紀』에 보이는 한반도 관계 기사를 비판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端緖도 확보하는 효과를 거두었다고 하겠다.
— 주보돈, 百濟 七支刀의 의미, 한국 고대사 연구, 2011, vol., no. 62, pp. 253–294 (42 pages)
백제의 세계관을 가시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칠지도와 미륵사이다. 칠지도는 백제가 왜왕을 제후왕으로 인식한 것을 보여준다. 삼탑-삼금당으로 이루어진 미륵사의 가람구조는 백제를 중심에 두고 좌우에 신라, 고구려 등 이웃나라들을 거느리며 공존하겠다는 세계관을 표현한 것이다.
— 노중국, 백제의 고대동아시아 세계에서의 위상, 백제문화, 2009, vol. 1, no. 40, pp. 155–184 (30 pages)
그런데 백제 근초고왕은 倭에 使臣을 파견하여 谷那鐵山의 우수함을 선전하였다. 백제왕이 倭王에게 하사한 七支刀는 谷那鐵山의 山鐵로 제작한 것이었다.
— 이도학, 谷那鐵山과 百濟, 동아시아고대학, 2011, vol., no. 25, pp. 65–102 (38 pages)
더욱이 일본의 주장과는 다르게 제작 연도 또한 369년이 아닌 408년일 가능성이 높아보이므로 해당 한자가 동진의 연호인 태화일 가능성은 더욱 낮아지게 되었다. 왜냐하면 태화(太和)라는 연호는 폐제 시절인 366년 ~ 371년 12월까지만 동진에서 사용되었기 때문에 제작 연대가 408년이 될 경우 칠지도 명문의 태화는 동진의 연호가 아니게 되기 때문이다.
칠지도의 제작 연대는 태화(泰和)를 중국연호로 보고 369년 5월 16일 병오로 추정해 왔다. 그리고 5월을 새롭게 11월로 판독한 이후에도 여전히 만든 연대는 태화 4년 369년이었다. 그런데 칠지도의 369년설은 5월 16일과 11월 16일이 모두 병오일이 아니므로 문제가 있다. 특히 369년 5월과 11 월에는 병오일이 있다. 5월 27일이 병오며, 11월 30일이 병오다. 따라서 그 달에 병오일이 있는데 그날을 피하여 5월 16일 병오 혹은 11월 16일 병오라 했을 가능성은 적다. 칠지도의 丙午正陽은 『논형』의 丙午日中이나 한 대 명문에 보이는 丙午時加日中의 일중을 정양으로 바꾼 것이다. 일중이나 정양이 '화덕(火德)이 성한 날'이라는 의미로 별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다. 하지만 용례가 보이지 않는 병오정양의 정양은 일중 이상의 의미가 있다. 정양은 『사기』 사마상여전에 나오는 '정양현현(正陽顯見) 각오여증(覺寤黎蒸)'에서 취한 것으로 황룡을 의미한다. 황룡은 천하의 중심이므로 지상의 최고 통치자를 말한다. 백제의 왕은 칠지도의 정양이란 문구를 통해 자신의 위치를 드러내고 있다. 『논형』이나 한 대 명문에 병오일중을 쓰지 않고 병오정양이라 썼다는 점을 감안하면 칠지도를 만든 연대도 실연대일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칠지도의 제작연대는 11월 16일이 병오인 408년 11월 16일일 가능성이 높으며 그 해는 전지왕 4년에 해당된다. 칠지도 명문의 태화도 중국 연호가 아닌 백제연호로 생각되며 전지왕이 왕위에 즉위하면서 표방한 연호였다.
— 조경철, 백제 칠지도의 제작 연대 재론: 병오정양(丙午正陽)을 중심으로, 백제문화, 42권 0호, 2010, vol. 1, no. 42, pp. 5–27 (23 pages)
연구 결과에 따르면, 칠지도는 408년에 제작되었으며, 백제를 중심으로 한 동북아시아의 평화를 추구하는 '태화의식(泰和意識)'을 담고 있다. 전지왕이 '태화'라는 연호를 세우고 주변국과의 동맹을 표방한 것은 당시 고구려 광개토태왕의 선례를 의식한 결과로 해석된다.
— 최영성, 사상적 관점에서 본 백제칠지도 — 논점의 정리를 겸하여 — 한국동양정치사상사연구, 2016, vol. 15, no. 2, pp. 35–62 (28 pages)
일본에서 나타나는 龍鳳紋環頭大刀(용봉문환두대도)는 백제 무령왕 출토 龍鳳紋環頭大刀를 모태로 하여 6세기 중, 후반에 걸쳐 성행하고 있는데, 초기 單龍環頭大刀의 분포가 北九州, 세토 내해, 畿內를 중심으로 하고 있어 야마토 정권과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는 백제로부터 전파된 경로를 알 수 있다. 이러한 전파는 七支刀가 408년 일본에 하사된 정황으로 미루어볼 때 백제로부터 賜與 가능성을 상정할 수 있을 것이다.
— 홍성화, 古代 韓日의 龍鳳紋環頭大刀 고찰, 동양예술, 2012, vol., no. 20, pp. 5–39 (35 pages)
칠지도는 종래 369년 제작으로 알려졌지만 11월 16일 병오란 판독과 월일간지의 일치를 중시하면 전지왕 4년(408) 만들어졌다고 볼 수 있다. 이 칠지도는 팔수부인의 아들 구이신이 태자가 된 것을 기념하여 만든 것으로 생각된다. 칠지도에 보이는 '성음(聖音)'은 이러한 왕실의 번영을 가져다 준 부처에 대한 외경의 표현이다.
— 조경철, 백제 왕비와 내법좌평 해수를 통해서 본 4~5세기 백제 불교, 한국사상사학, 2012, vol., no. 42, pp. 1–29 (29 pages)
七支刀는 銘文 해독의 진전에 따라 408년 전지왕 4년 왕세자인 구이신이 탄생한 것을 계기로 백제가 왜에 하사하였던 칼이라는 것이 확실시되고 있다.
— 홍성화, 古代 韓半島系 大刀 銘文에 대한 재조명, 동양예술, 2013, vol., no. 21, pp. 221–246 (26 pages)
그동안 七支刀에 관한 연구는 銘文에 나오는 연호를 東晋의 369년인 것으로 보고 『日本書紀』 神功紀에 나오는 七枝刀와 동일한 것으로 인식하여 4세기 중엽에 제작, 전달된 것으로 보아 왔다. 이에 백제의 헌상설, 백제의 하사설, 동진의 하사설 등 한일 양국 학계의 다양한 논의가 거듭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나 七支刀의 X-선 촬영 결과에서 나타난 銘文을 재판독하면 그동안 '泰□四年五月十六日丙午'로 보았던 七支刀의 제작일을 十一月十六日로 볼 수 있게 된다. 따라서 11월16일이 丙午의 日干支를 가진 연도를 산출하여 七支刀의 銘文을 재해석하면 七支刀는 369년이 아니라 408년 백제의 腆支王 4년 11월 16일에 만들어진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奇生聖音'의 銘文은 '聖音으로 진귀하게 혹은 신성하게 태어나다'로 해석할 수 있어 백제에 불교가 들어온 384년 이래 20 여년이 지난 408년경 부처님의 가호로 왕세자가 태어났다는 의미로 파악할 수 있다. 따라서 본고에서의 七支刀 명문 재해석 결과, 그동안 七支刀를 『日本書紀』 神功紀에 근거하여 369년 백제에서 제작되어 372년 백제가 일본에 헌상했다는 설은 타당하지 않게 되었다. 七支刀는 銘文에서 백제가 泰□라는 연호를 썼던 것, 그리고 銘文의 侯王은 백제에 신속하고 있던 侯王이라는 의미로 해석되어 百濟王世子인 久爾辛이 진귀하게 태어난 것을 계기로 倭王에게 하사된 칼로 볼 수 있다. 즉, 한반도 내에서 백제와 고구려가 치열한 전투를 하던 408년 11월 16일 七支刀가 제작되어 이듬해인 409년 『三國史記』 腆支王 5년에 보이는 倭國의 사신에게 전달되었던 것이다.
— 홍성화, 石上神宮 七支刀에 대한 一考察, 한일관계사연구, 2009, vol., no. 34, 통권 34호 pp. 3–39 (37 pages)
그동안 칠지도의 제작시기에 대해 日本書紀의 기록에만 의존하여 神功 49년(369년)에 있었던 사건의 결과로 372년 백제에서 왜로 전달되었던 것으로 인식되어 왔다. 하지만, 새로운 해석을 통해서는 칠지도가 왜국과 혼인관계를 맺고 있었던 腆支王(전지왕)에 의해 408년 백제왕세자인 久爾辛의 탄생을 계기로 왜왕에게 제작, 하사되었던 것이 확실시 된다. 특히 칠지도가 만들어진 408년은 廣開土王碑文에 나오는 사건과 연속선상에서 파악할 수 있는 시기로서 칠지도는 5세기초 백제가 고구려와 대치하고 있는 상황을 고려하여 판단하여야 할 것이다.
— 홍성화, 七支刀와 谷那鐵山, 한일군사문화연구, 2013, vol.15, 통권 15호 pp. 167–184 (18 pages)
하지만, 그동안 369년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아왔던 七支刀의 銘文을 재고찰하면 七支刀는 369년이 아니라 408년 11월16일 백제의 腆支王 4년에 만들어진 것을 알 수 있기 때문에, 七支刀를 통해 5세기 초 百濟와 倭의 관계를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즉, 七支刀 銘文에 나오는 '泰四年' 및 '宜供供侯王' 등은 百濟가 주체가 되어 倭王인 侯王이 百濟에 신속하고 있던 侯王이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기 때문에 5세기 초 百濟와 高句麗의 전쟁에서 倭가 주도적으로 활동한 것이 아니라 百濟가 주체가 되어 수행한 전쟁에 倭가 지원군의 형태로 왔던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宋書』에서 5세기의 소위 倭 5王이 한반도 남부에 대한 諸軍事權을 자칭하고제수를 요청했던 문제가 쟁점으로 남아있다. 하지만, 이는 당시 야마토 정권이 한반도남부를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에 나타난 것이 아니라 百濟가 관할하고 있었던 영역을 倭가 자신의 영역으로 주장하려 했기 때문에 나타난 현상임을 알 수 있다.
— 홍성화, 5세기 百濟의 정국변동과 倭 5王의 작호, 한국고대사연구, 2010, vol., no. 60, pp. 75–115 (41 pages)
칠지도의 제작연대는 종래 『일본서기』의 신공기 칠지도와 『논형』의 5월병오라는 길상구에 주목했던 것에 대해 반론을 제기하였다. 즉 태화 4년 5월 16일 병오처럼 구체적인 일자를 덧붙인 경우 실제 연월일과 일치하는 것으로 보았다. 특히 369년 5월에 병오일이 있음에도 다른 날을 병오일이라고 한 사례는 없었다. 그래서 칠지도를 369년 5월로 판독할 경우 362년, 11월로 판독할 경우 408년 설을 제시해 보았다. 백제는 『논형』의 5월병오는 취했지만 일중(日中)대신 정양(正陽)을 취해서 한 낮이란 의미에 덧붙여 황룡(黃龍) 또는 천하를 다스리는 남면수조(南面受朝)란 의미를 더하여 왕의 권위를 드러내었다. '역사 이래 이런 칼이 없었다'라는 글을 새겨 자부할 만큼 칠지도는 백제의 창조적이고 독창적인 문화를 유감없이 발휘한 칼이다.
— 조경철, 칠지도 형태의 유래와 제작연대의 문제점, 동아시아비교문화연구회, 東硏(동연), 1권 0호, 2017, pp. 31–51

일본은 칠지도의 제작 연대가 태화(太和)라는 중국의 연호에 맞추기 위하여 369년일 것이다라고 주장하지만 이 경우 실제 칠지도 명문에 등장하는 병오일(16일)이 369년도에는 5월 16일과 11월 16일이 모두 병오일이 아니므로 근본적으로 일치하지 않는다라는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 더욱이 369년에는 5월 27일과 11월 30일이 각각 병오일이므로 따라서 그 달에 병오일이 실제로 따로 있는데 굳이 실제로 있는 병오일들을 모두 피하여 5월 16일 병오 혹은 11월 16일 병오라 했을 가능성은 더욱 적어진다..[21] 만약 5월에 제작되었다고 해석한다면 5월 16일이 병오일인 해는 362년, 11월에 제작되었다고 해석하면 11월 16일이 병오일인 해는 408년이다. 어느쪽이든 실제 동진에서 태화(泰和=太和)라는 연호를 사용한 연도인 366년 ~ 371년 12월과 전혀 겹치지 않는다. 일본의 연도 계산은 실제 칠지도의 명문에 기재된 날짜와는 전혀 일치하지가 않는다는 것이다.
『宋書』를 비롯한 중국의 사료에는 5세기대에 讚, 珍(彌), 濟, 興, 武라는 왜왕이 등장하지만, 이들 왜왕의 계보가 『古事記』와 『日本書紀』에 나오는 천황의 계보와 일치하지 않고 있어 현재까지 이들 倭 5王을 『古事記』와 『日本書紀』의 어느 천황에 비정할 것인가에 대한 논쟁은 끊임없이 이어져 왔다.

왜 5왕의 비정에 대하여는 여러 가지 설이 대립하고 있는데, 金石文과 관련해서는 石上神宮 七支刀 銘文의 '倭王旨'를 人名으로 보아 倭 5왕과 연결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하지만, '倭王旨'를 人名으로 보기 어려우며 이는 백제의 헌상설을 전제로 한 해석과의 연장선상에서 파악할 수 있는 인식에 불과하다. 七支刀 명문의 분석을 통해서는 5세기대의 금석문으로 볼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369년이라는 통설적인 인식 속에서 七支刀의 명문을 해석하고 있는 한계를 보여주고 있다.
— 홍성화, 金石文과 5세기의 倭王, 동양예술, 2013, vol., no. 22, pp. 63–96 (34 pages)
또한 칠지도에 등장하는 명문이 4세기가 아닌 5세기 때 것으로 추정된다는 점도 일본의 주장을 반박하는 주요 근거들 중 하나이다. 만약에 일본의 주장대로 칠지도가 369년에 제작되었다면 당연히 5세기가 아닌 4세기 금석문의 형태여야 정황이 맞기 때문이다.

하지만 백번 양보해서 일본 주장대로 칠지도의 연호가 일단 백제의 연호가 아니라 중국의 연호라고 가정해보자. 역설적이게도 백제가 독자적인 연호를 국내외적으로 모두 사용했다는 증거가 있는데 칠지도에 쓰인 연호가 동진 것이라고 밝혀진다면, 일본의 주장대로 칠지도는 중국에서 직접 제조된 검일 가능성이 그만큼 더 커지게 된다.[22] 하지만 반대로 백제가 당시에 중국의 연호를 외교적인 부분에서 만큼은 계속 사용했다면, 칠지도를 백제가 제조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23]

일단 백제는 일반적으로 연호 또는 연호 + 간지(60갑자)로 연도를 적던 다른 왕국들과 달리 그낭 간지만으로 연호를 표기했다. 《한원(翰苑)》에서 인용된 《괄지지(括地志)》에서 "연도를 기록할 때 따로 연호를 쓰지 않고 60갑자로만 차례를 삼는다[其紀年, 無別號, 但數六甲爲次第]"라는 기록이 있고 후에 발견된 사택지적비도 "甲寅年正月"이라고 간지(60갑자)를 사용했다. 일본서기에서도 백제삼서를 인용한 기사들은 간지로만 적었다. 다만 학자들은 백제가 외교 문건이나 외교 무대에서는 중국 남조의 연호를 사용하지 않았을까 추정한다.

물론 일본 사학계에서 백제는 독자적인 연호가 전혀 없었고 칠지도의 태화는 동진의 연호로 보이기에 동진에서 제조된 검이요, 또한 동진에서 하사받은 물건이라고 주장하는데 백제가 외교적인 영역에서도 중국의 연호 대신에 간지만을 사용했는지는 정확히 확인이 안되기 때문에 일본의 주장은 아직 설득력이 부족한 상황이다. 즉, 중국 연호이든 백제 연호이든, 백제가 연호를 어떻게 사용했는지 의문을 해소할 만한 유물이 더 발견되지 않는다면 태화가 진짜로 중국의 연호라고 하여도 그 자체만으로는 중국에서 제조되었다는 근거가 절대 될 수 없다는 것이다.[24]

게다가 백제가 단순히 전달자 역할을 했다는 1번 학설은 헛점이 많으며 일본 내에서도 점차 설득력을 잃어가는 학설이므로 논점을 벗어났다. 그리고 동진백제로 하여금 일본에 하사하도록 지시했다면, 중국 기록들에서도 일본에 하사했다는 기록이 있어야 자연스럽다. 하지만 현전하는 기록들에서는 그런 내용들이 전혀 없다. 중국이 만들었다면 칠지도 명문에도 중국이 분명 주체로 언급되어야 하는데 그런 사실을 의미하는 문구는커녕 동진을 암시하는 단어가 단 하나도 없는게 현실이다.

또한 단순히 백제가 1번 논리대로 전달자일 따름이라면, 백제라는 문구가 나올 이유가 전혀 없다.[25] 일본에서는 동진과 백제가 서로 조공-책봉 관계로 얽혀 있었기 때문에 후왕을 지칭하는 것은 (왜왕이 아니라) 백제왕이라고 주장한다. 상식적으로 1번 논리로는 왜국과 동진이 주고 받는 물건에 굳이 백제나 백제왕을 언급할 이유가 없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단순히 백제가 왜국과 동진 사이에 전달자 역할을 했고, 중국이 왜국에 사하라고 백제에게 전달했다면, 동진을 위시한 제후국인 백제와 중화 질서에 갓 편입한 왜국의 지위를 고려해야 한다.

일본 학계는 백제와 왜국은 당시 중화질서에서 지위가 같은 나라였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4세기 근초고왕 시절의 물건이 맞는다고 가정해보자. 근초고왕은 진동장군이라는 작위를 하사받았는데, 왜왕은 중국 남조에서 하사받은 작위가 하나도 없었다. 아니, 동진과[26][27] 통교한 기록조차 전혀 없다. 백번 양보해서 동진 하사설이 맞는다고 가정해도, 적어도 백제가 일본에 헌상했다는 일본 사학계 주장은 어불성설이다. 또한 한반도에서만 칠지도의 근간이 되는 원삼국시대의 금관양식이 지속적으로 출토된다. 나뭇가지를 형상화한 금은동 제품이 한반도 고대왕조들의 고유한 유물이라는 것. 그렇기에 연호 하나만 가지고 중국에서 만들었느니 하사했느니 하기에는 근거가 너무나 부실하다.

또 1번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후왕이라는 호칭[28] 등으로 보아 일본과 중국은 당대부터 어느 정도 교류가 있었다는 것인데, 이 경우 문제는 그럼 몇백 년 뒤에 쇼토쿠 태자가 중국 입장에서 보면 거만하게 "해 뜨는 나라의 천자"라는 외교문서를 보냈다가 수양제가 일본 사신을 죽이니 살리니 할 정도로 분노했던 사건이 잘 설명되지 않는다. 일본의 주장대로 이미 4세기에 일본이 중화질서에 편입되었다면 외교적으로 문제의 소지가 큰 외교문서가 작성될 가능성도 그 만큼 더 낮아지기 때문이다.

다른 방면에서 바라본 주장도 있다. 후왕 바로 다음에 나오는 한자들이 보이지 않아 누구를 지칭하는지 알기 어렵다는 것. 그런데 한문한국어일본어와는 서기 방식이 반대라 그렇게 보면 해석이 꼬여 이 부분이 문장 전체가 큰 효력을 잃는다. 후왕을 단지 길상구로만 받아들여 '선량한 후왕' 식으로 해석하는 견해도 있다. 국내에 번역 소개된 책에도 이 설을 따르는 경우가 있다.

이러한 논리적 모순이나 한계 때문에 1번 학설을 대체하는 것이 일본 학계에서 강력하게 대두되는 2번 학설이다. 즉, 한국에서 당초에 일본 학계의 주장이라고 알려진 것과 다르게, 애초부터 동진이 왜왕에게 하사하려고 백제를 통해 준 물건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 학설이 일본 연구자들 사이에서 인기를 얻는 이유는, 한국 학자들이 주장하는 것과 다르게 백제가 하사한 물건이라는 주장을 부정할 수 있으면서도 다소 자존심이 상하는 '후왕'이라는 문구가 백제왕이 왜왕을 지칭한 것이 아니라, 동진의 황제가 백제왕을 지칭한 것이라고 설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2번 해석의 근거로는 등이 있다.

부차하자면 일본 사학계는 백제가 칠지도를 헌상한 이유는 고구려와 벌이는 전쟁에서 연합군을 구축하기 위함이라고 주장한다. 다만 이 경우 일본의 주장대로 백제가 일본에 칠지도를 보낸 시기가 372년이라면[36] 그 백제가 남쪽으로 침미다례를 찢고 군사를 돌려 고구려 고국원왕마저 전사시킨 최전성기였으므로 말이 안 된다. 더구나 이후에 4세기 말 광개토대왕이 등장하기 전까지는 왜국과 백제가 서로 연합하여 고구려 전선에 섰음을 교차검증해줄 문헌이 없다.[37]

또한 전면의 문장을 보면 두루뭉실하게 수취인이 누구인지 명시되지 않았다. 다만 제후를 뜻하는 후왕이라고 했을 뿐이다. 후면에는 백제 왕세자[38]와 왜왕이라는 문구가 있기 때문에, 중국에서 제후들에게 하사하기 위해 양산품으로 만들어졌고[39][40] 그것을 百濟王世子奇生聖音故爲倭王旨造의 백제왕세자 造라는 것을 근거하여 백제가 복제품을 만들어, 후면의 글귀를 재가공하여 보냈다고 주장한다. 전면과 후면의 문장이 서로 통하지 않고 서로 연결되지 않음을 근거로 삼는다. 또한 奇生聖音이라는 문구를 중국 천자의 가르침이나 성은을 뜻하고 있다고 말한다.

이에 대해 한국 학계는 '성음(聖音)'이라는 단어를 부처의 가르침 은덕이라고 해석한다.369년에는 백제가 불교를 받아들이지 않고 있기 때문에 이는 칠지도의 제작년도가 369년보다 훨씬 후대임을 전제한 학설이다. (보통 한국 학계에서는 전지왕 4년[408]에 칠지도가 제작되었다고 본다.) 또 다른 한편에서는 도교 철학의 영향이라고도 말한다. 반면에 일본 학계는 기본적으로 양산품이라고 주장하는데, 이 논리의 큰 결함은 형식이 비슷한 도검은 일본 외에서 발견된 적이 전혀 없고, 백제에 있었다는 원품 또한 발견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참고로 2번 학설은 임나일본부설과도 연계된다. 일본서기는 신공 52년(372년으로 비정) 백제가 일본에 칠지도를 헌상하였다고 주장한다. 얼핏 보면 칠지도 전면에 새겨진 태화 4년은 369년으로 이 해에 제조되어, 백제가 동진 황제에게서 받고 또 이것이 왜국 조정에 들어왔다고 주장하는 것으로 일견 합당하다고 해석할 수도 있다. 이것은 동진과 백제의 수교 및 조공 기록으로 미루어 보아도 타당한 추론이다. 삼국사기에 기록된 백제가 동진에 조공한 기록 중 제일 이른 것은 근초고왕 27년(372) 1월, 28년(373) 2월이다.
27년(서기 372) 봄 정월, 진(晉)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二十七年 春正月 遣使入晉朝貢

28년(서기 373) 봄 2월, 진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二十八年 春二月 遣使入晉朝貢
《삼국사기》 제24권 백제본기 제2 근초고왕 ##
하지만 한국에서는 진서에 기록된 백제의 조공은 372년 정월이 처음이므로, 아직 수교관계조차 성립되지 않은 나라(백제의 근초고왕)에 사여하려고 369년에 미리 글귀를 새겼다 함은 이치에 맞지 않다고 주장한다. 링크. 다만, 일본 주장처럼 애초에 제후국들에게 보내기 위해 양산된 물건이라면, 일괄적으로 글을 다 새겨놓고, 보관하고 있다가 사여했을 가능성도 있다. 물론 애초에 이 양산품이란 논리 자체가 아무런 물적 증거가 없다는 게 문제지만 말이다.

또한 2번 학설은 칠지도 전면의 글귀는 동진이 백제에게 하사하기 위해 새겼고, 칠지도 후면의 글귀는 백제가 재가공하여 왜왕에게 상납하기 위해 글귀를 새겼음을 전제로 나온 가설이다. 따라서 전면과 후면의 서체나 각필의 모양 등을 대조해보면 생각보다 쉽게 진위를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41]

백제가 동진에서 하사받은 물건을 소장하다가 필요에 의해서 후면을 재가공하고 9월에 일본에 보냈다는 설도 아귀는 맞아떨어지니 불가능한 이야기는 아니지만 이 경우에도 억지스러운 면이 없지않아 있다. 부여곤지와 태중에 있던 무령왕이 일본으로 떠났을 때 한성에서 일본까지 도달할 때까지 걸린 시간은 1-2달이라고 한다.[42] 372년 정월에 칠지도를 사여 받아서, 두세 달 걸려서 백제에 도착하면 시기는 4월 즈음일 것이다. 거기서 또 복제품을 만드는데 소용된 시간에 일본까지 항해에 소요된 시간을 한두 달로 잡으면, 일본서기에서 말하는 372년 가을은 시간적으로 너무 촉박한 감이 있다. 백제에서 왜로 항해할 때는 보통 훈풍이 부는 가을에만 현해탄을 건넜다. 즉, 물리적으로 가능한 추론이냐에 대해서는 의문이 많이 달린다는 것이다.

이쯤 되면 마치 동진의 연호라고 미리 확정지어 놓고 그것에만 매몰되어 많은 전제와 가설을 쌓고, 반박당할 때마다 방어기재로 새로운 설을 추가한 인위적인 느낌이 듦은 부정할 수 없을 듯하다. 게다가 동진을 중심으로 하는 중화질서에 편입을 제안하기 위해서 동진의 의중이 반영되었다면, 동진과 왜국의 수교 및 통교 기록은 가까운 시일 내에 성사되어야 한다. 그런데 실제로는 일본이 주장하는 칠지도의 헌상 시기로부터 거의 반세기나 지나서인 413년에야 통교했다는 기록[43]이 발견되므로 이 경우에도 역시나 설득력이 크게 떨어지게 된다.

이런 내용과는 별개로, 일본서기에서는 칠지도의 재료가 된 철의 산지라고 언급한 곡나철산(谷那鐵山)[44][45][46]을 분명 언급한다. 따라서 중국에서 만든 물건이란 주장의 신빙성도 문제가 된다. 일본서기도 칠지도의 재료가 된 철의 산지는 백제 영내에 있는 곡나철산(谷那鐵山)라고 분명 기록하지 않았는가.

그리고 백제가 왜국에 전달한 물건은 칠지도와 칠자경 등 2개 물품이었다. 칠자경[47]은 현대에 전하지 않기 때문에 철제인지 청동제인지도 모르지만, 칠지도는 명백한 철제 도검이다. 그리고 일본서기에서는 백제 곡나철산(谷那鐵山)에서 채굴한 철을 얻어서 그 철을 제련하여 칠지도를 만들었다고 기록했다. 여기서 언급하는 칠지도가 철로 만들어진 칠지도가 아니라면 도대체 이 기록은 무엇을 지칭한단 말인가? 그럼에도 일본 학자들은 이를 두고 동진에서 하사받은 원품(原品) 칠지도는 백제가 따로 보관하고(?), 곡나철산(谷那鐵山)에서 채굴한 철을 이용하여 칠지도의 모조품을 만들어서 하사했다(?)고 계속 우긴다. 백제가 갖고 있다는 원품(員品) 칠지도나 동진에서 대량생산 되어 각국 제후에게 보내졌다는 칠지도가 다른 나라들에서도 발견되면 그때 다시 논하자.

추가적으로 위에서 인용한 일본서기의 칠지도 관련 기록을 조금 더 길게 인용해보자.
(섭정) 52년 가을 9월 정묘삭 병자(10일)에 구저(久氐) 등이 천웅장언(千熊長彥)을 따라왔다. 이때에 칠지도(七枝刀) 한 자루와 칠자경(七子鏡) 한 개를 비롯하여 여러 가지 귀중한 보물을 바쳤다. 그리고 "신국(臣國)의 서쪽에 강이 있는데, 그 수원은 곡나철산(谷那鐵山)입니다. 너무 멀어서 7일 동안 가도 이를 수가 없습니다. 그 물을 마시다가 문득 그 산의 철을 얻으니[48] 영원토록 성조(聖朝)에 바치고자 합니다."라고 아뢰었다. (백제왕이) 손자 침류왕(枕流王)[49]에게 "지금 내가 교류하고 있는 바다 동쪽의 귀국은 하늘이 계시하여 세운 나라이다. 그러므로 천은을 베풀어 바다 서쪽을 나누어 나에게 주니, 나라의 기틀이 영원히 견고해졌다. 너도 마땅히 우호를 잘 닦아 토물을 모아 공물을 끊임없이 바친다면 죽어도 무슨 한이 남겠느냐?"라고 일러두었다. 이후로 매년 끊임없이 조공하였다.[50]

五十二年秋九月丁卯朔丙子、久氐等從千熊長彥詣之。則獻七枝刀一口·七子鏡一面、及種種重寶、仍啓曰:「臣國以西有水、源出自谷那鐵山。其邈七日行之不及。當飮是水、便取是山鐵、以永奉聖朝。」乃謂孫枕流王曰:「今我所通、海東貴國、是天所啓。是以、垂天恩、割海西而賜我。由是、國基永固。汝當善脩和好、聚斂土物、奉貢不絶、雖死何恨。自是後、每年相續朝貢焉。
일본서기진구 황후조 섭정 52년 ##
앞에서 일본서기의 372년은 마냥 신뢰할 수 없다고 언급하였는데, 위 곡나철산 내용은 사신이 떠드는 구체적인 진술로 구태여 윤색하여 기록 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신빙성에 관한 문제는 없다고 볼 수도 있다. 다만 일본서기의 이주갑인상이 문제로 지적될 수는 있을 것이다.

일본의 고사기에는 이런 표현도 있다.
백제국의 임금 조고왕(照古王)이 숫말 한 필과 암말 한 필을 아지길사(阿知吉師)[51]에게 바쳤다. 또한 횡도(橫刀)[52] 및 대경(大鏡)을 바쳤다. 또 백제국에 만약 현인(賢人)이 있으면 바치라고 말씀하셨다. 그 명을 받고 바친 사람의 이름은 화이길사(和邇吉師)이다. 즉 『논어』 10권과 『천자문』 1권을 합쳐 11권을 이 사람에게 보내 바쳤다.
고사기오진 덴노
백제를 하대하는 듯한 말투로 쓰였으나 실제로는 이런 내용이다. 일본의 고대 역사서는 의도적인 왜곡이 꽤 포함되었음을 감안해야 한다.

다만 이 기사는 오진 덴노의 시기이기 때문에 진구황후조의 시기와는 시기가 다르다. 오진 덴노는 근초고왕과 시차가 있는 시대의 인물이기 때문에 어디까지가 진실인지는 모른다. 이 기사에 나오는 횡도를 칠지도로 비정한다면, 오진 덴노의 치세기로 소급한다면 진사왕, 아신왕, 전지왕 시기에 제작되었다고 추정할 수 있다. 이 횡도를 바친 인물이 왕인이라고 하는데, 일본서기에 의하면 아신왕 시기의 인물이다. 일단 일본서기를 일괄적으로 끌어내려 이주갑인상을 보정하면 404년인데, 아신왕 재위기로 한창 백제가 한성을 탈환하기 위해 노력하던 시기였다.광개토왕릉비에서는 왜구가 고구려의 영토인 대방을 약탈한 내용이 나온다.

또한, 칠지도 후면의 문장을 살펴보면 先世以來未有此刀百濟王世子奇生聖音故爲倭王旨造傳示後世造 즉, 백제 왕세자가 제조했다고 하였다. 이것을 일본 사학계에서는 이르다, 도달하다는 뜻으로 해석하는 모양이다.[53]

추가로 '왕세자'란 해당 명칭 또한 논란인데 삼국사기, 삼국유사 중에서 고대 한반도 왕조의 국왕의 아들을 왕세자 또는 세자라고 칭한 사례가 거의 없다. 왕세자라고 쓴 기록은 칠지도와 광개토대왕비 그리고 삼국사기에서 등장하는 일부 고구려측 기록들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일본 학자들은 백제의 왕세자가 아닌, 백제의 왕과 그의 세자를 통칭했다고 주장하고 있고 또 다른 일본 학계에서는 동진이 하사한 물건이기 때문에 태자라는 직위를 낮추어 세자라고 칭했다는 학설 등이 있다. 후자라면 앞서 언급했던, 칠지도가 원래 동진이 백제에게 하사한 유물이 맞지만, 백제가 왜의 군사적 원조를 이끌어내기 위해 동진의 뜻과는 상관없이 독자적으로 다시 일본에 헌상했다는 식의 2번 논리도 성립은 가능하다. 단, 백제삼서를 인용한 기사에서 고구려 세자에 대한 기록이 한 번 더 나온다. 장수왕 시절의 내린을 설명하는 대목이다. 그러나 방대한 일본서기의 내용에서도 세자라고 칭한 기록은 이것밖에 없다.

그렇지만 이 2번 학설을 검토해보면 애초부터 백제왕에게 하사하는 동진의 칼에 구태여 왜왕을 따로 언급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 그래서 앞서 선술했듯이 일본에서 받아들이는 2번 학설에 전면은 동진이 백제에게 하사하기 위해 적은 글귀, 후면은 그 이후 백제가 독자적으로 재가공하여 수령자인 왜왕을 위해 따로 추가적인 각필했다는 가설을 첨가한 수정 학설이 팽배하다. 확실히 세자의 용례를 따지자면, 중국 황실에서 변방국의 태자를 낮추어 부르는 칭호긴 했다. 이 관점으로 본다면 중국 제조설이 힘을 얻는다. 허나 이것도 좀만 생각해보면 이상하다. 일본의 주장대로 백제가 일본에 독자적으로 헌상했다면, 동진에게 보내는 물품도 아닌데 굳이 동진을 과도하게 의식하여 왕세자란 문구를 새길 이유가 전혀 없다.

만약 일본의 주장이 옳다고 억지로 가정하려면, 백제가 동진에게 하사받은 칠지도를 독자적으로 후면을 따로 재가공하여 동진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왜왕에게 각필해서 보냈다는 2번 학설이 아니라 1번 학설을 기반으로 해야 한다. 우선 동진이 왜국과 수교하겠다는 명백한 목표를 백제에게 투영시켰고, 칠지도는 처음부터 동진이 왜국에게 하사하기 위해 준비한 하사품이라고 해야 한다. 백제가 그런 동진의 눈치를 봐서 단순 전달자의 입장에서 백제가 동진의 의사에 따라 후면의 칠지도 명문을 각필하면서 자국의 태자를 세자라고 칭했을 것이라고 전제하거나, 아니면 후면의 명문 또한 동진이 백제에게 칠지도 전달을 요청하면서 처음부터 적은 것이라고 전제해야만 한다. 백제가 동진을 의식해서 태자 대신 세자라는 호칭을 사용했다면, 동진의 의사와 상관없이 칠지도에 따로 가공하고 명문을 새겨 왜국에 보냈다는 2번 학설은 처음부터 성립될 수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1번 학설에 기반해야 더 자연스럽다. 왜국에서 칠지도를 백제를 통해 동진으로부터 하사받은 이후 백제에게 중개받아 동진과 수교하기 위해 왜국 사신을 중국에 보낸다고 해보자. 사신이 동진의 조정에서 자초지종을 이야기하다가 백제의 무엄한 칭호를 언급하기라도 하면, 동진이 백제에게 태자·세자 칭호를 두고 시비를 걸 수도 있지 않겠는가. 따라서 백제가 동진을 의식해서 태자 대신에 세자라는 호칭을 사용했다는 논리가 모순 없이 성립된다. 단, 두 학설 모두 그러한 주장들을 뒷받침할 중국이나 한국 사료들의 근거는 현재로서는 전무하다.

무엇보다 가장 큰 문제는 위와 같이 일본이 강하게 주장하는 학설들의 근거 자체가 그 자체로 설득력이 매우 빈약하다는 것이다.

일단 태(泰)는 태(太)와 통자가 맞으며 동진 사람 고숭의 묘지명에 태화(泰和) 원년에 죽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니 사용례가 아예 없었던 것도 아니므로 근거가 전혀 없는 주장은 아니다. 당연하지만 중국과의 교류가 삼국중 가장 활발했던 백제의 입장에서도 이를 모를리가 없었다는 점에서 일본의 태화(泰和) 동진 연호설 주장은 어느 정도 참작할 수 있다. 즉, 일본의 주장은 요약하면 칠지도에 등장하는 연호인 태□(泰□)를 동진의 연호인 태화(泰和=太和)라고 보고 그런 칠지도 전면의 내용을 인용해 사실 이것은 동진이 백제에게 하사한 물건인데 후면을 백제가 마음대로 개조해 왜왕에게 사사로이 (일본식 주장대로) 헌상했다는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추정들 중에서 단 하나만 빗나가도 일본의 주장은 아예 성립이 될 수 없다는 게 진짜 문제이다. 일단 제후국에 보내는 중요한 물건에 굳이 통자를 사용한 연호로 표기할 당위성이 매우 부족하다. 이병도·주보돈·조경철·최영성·홍성화 등 한국 학계의 주장들처럼 해당 문구가 연호라고 할지라도, 그 연호가 동진의 것인지 백제의 것인지에 대해서도 백가쟁명이다. 또한 백제가 굳이 중국에게 하사받은 그런 중요한 물건을 사사로이 개조해서 일본에 헌상할 이유가 있는지, 만약 그렇게 헌상했다면 백제는 왜 개조품의 후면에 "선세 이래 이러한 칼이 없었으니 백제 왕세자 기생성음이 고로 왜왕 지(旨)를 위하여 만들었으니 후세에 전하라." 하는, 고압적인 문장을 새겼느냐는 문제가 생긴다. 동진이 칠지도의 전면에 명문을 새기고, 백제가 복제품을 만들며 따로 후면에 명문을 새겼다면, 두 명문의 어조는 달라야 하지 않을까? 둘 다 사여하는 측에서 수취하는 측에게 일관되이 고압적인 문장으로 명령을 하는 어조이므로, 백제가 일본에 사사로이 후면을 개조해서 칠지도를 헌상했다는 논리는 설득력이 매우 떨어진다.

또한 일본의 또 다른 근거인 왕세자란 명칭에 관하여 일본은 백제가 동진을 의식하여 태자가 아닌 세자라는 호칭을 사용한 것이라고 주장 하지만 이 역시도 다음과 같은 점에서 문제가 발생한다. 일단 왜왕은 칠지도가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시기(태화太和 4년: 369년)에 중국 남조에서 하사받은 작위가 하나도 없었다. 반면에 그 당시 백제의 근초고왕은 진동장군이라는 작위를 하사받은 상황이었다. 당시에 일본이 동진과 아예 통교한 기록조차 전혀 없다는 점에서 해당 주장은 심각한 결함이 있다. 물론 413년에 왜국이 동진과 통교한 기록이 있기는 하지만, 이는 일본에서 칠지도가 제작되었다고 추정하는 태화(太和) 4년(369)과는 무려 반 세기 가까이 차이가 나는 기록이다. 즉, 시간적으로 전혀 성립될 수 없다.

또한 일본측의 이러한 주장은 명백한 반례가 존재하는데, 자국의 연호가 독자적으로 있었던 고구려의 경우에 광개토왕릉비에서 이미 유리왕을 추모왕의 세자라고 칭하면서도 심지어 추모왕 때부터 제후왕을 봉한 천자국이었던 것과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는 시점에서 칠지도에 씌여진 왕세자라는 명칭을 문제삼아 태□(泰□)을 중국 연호로 넘겨집는 일본의 주장은 억지이다.[54][55]

결국 일본이 지속적으로 주장하는 동진 하사설이 최소한의 설득력을 가지려면은 최소한 동진, 즉 중국 사료들에서 그 당시 동진이 칠지도를 백제에게 하사했다거나 그것도 아니면 백제를 거쳐서 왜국에게 칠지도를 하사해서 보냈다는 그런 사료나 기록들이 최소한 한 번 이상은 분명히 확인이 되어야 하겠지만 그러한 기록들은 알다시피 전무한 상황이다. 또한 중국에서는 칠지도와 비슷한 양식이 출토된 적이 없으나, 한반도에서는 칠지도의 근간이 되는 원삼국시대의 금관양식이 지속적으로 출토되었다. 나뭇가지를 형상화한 금은동 제품들은 중국이 아닌 한반도 고대왕조들의 고유한 유물들이라는 것이다.

일본 학설들대로 칠지도가 동진이 여러 제후국들에게 보내기 위해 여럿 양산된 양산품이라면, 일본 외 다른 나라들에게서도 지속적으로 칠지도 관련 유물들이나 관련 기록들이 자주 발견되어야 하겠지만 이마저도 전혀 발견이 되지 않는 상황이다. 당연하지만 동진이 제후국들에게 하사하기 위해 칠지도를 양산품으로서 여럿 제조했다는 기록 자체도 아예 없는 상황이다. 현재 사서와 유물로 확실히 확인되는 내용은 일본서기와 칠지도 명문에 나오는대로 "백제에서 칠지도를 만들어서 백제가 일본에 칠지도를 보냈다"는 내용 뿐이지 동진이 칠지도를 만들고 보냈다라는 내용은 그 어디에서도 전혀 확인이 안 되는 것이 엄연한 현실이다.

물론 태□(泰□)라는 해당 문구가 연호가 맞고 동진이 아닌 백제 연호라는 한국의 주장 또한 백제에서 발굴되는 유물이나 금석문은 일관적으로 육십갑자로만 표기되었고, 논란의 여지는 있지만, 무령왕이 왜5왕 중 왜 무왕에게 하사한 물건이라고 추정되는[56] 인물화상경에서도 육십갑자로만 표기된 이상, 해당 문구가 백제측의 고유 연호라는 주장 또한 빈약한 것은 매한가지다. 물론 백제의 현전하는 유물들이 절대적으로 적은 영향도 있겠지만, 한국의 주장대로 백제가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했음을 논증해주는 근거 또한 일본의 동진 하사설만큼 전혀 없을뿐더러, 백제가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했다는 근거가 될 수 있는 기록들마저도 전무하므로 마냥 지지하기는 어렵다. 즉, 여러 학설들이 난립하여 정론은 없으므로 객관적인 실체를 탐구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일본 주장에 대한 내용은 링크에 상세하게 나와있다. 다소 기계적인 번역인 느낌이 있지만 이해하기 딱히 어려움이 없고, 상술한 포인트를 모두 언급하고 설명하였다. 요지는 동진이 칠지도를 양산품으로 만들어 백제에 하사하였는데, (후면에 각필된 백제 왕세자 組을 근거로 들어) 동진으로부터 받은 원품(原品)은 따로 놔두고, 일본서기에 기록된 곡나철산(谷那鐵山)에서 채굴한 철로 복제품을 만들어 일본에 건넸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일본 논리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점은 바로 고고학이나 문헌학적으로 동진에서 제조했다는 양산품은커녕, 백제가 소장했다는 원품조차도 전혀 발견된 적이 없다는 것이다. 중국의 기록 그 어디에서도 칠지도를 만들어서 백제나 왜국에 하사하였다는 기록 자체가 전혀 없다. 오히려 상술하였듯이 칠지도로 추정되는 조각들이 옛 백제의 수도였던 부여군에서 발견되었기에 중국에서 만들어 보냈다는 주장은 관련증거가 하나라도 발견되기 전까진 아예 물적 근거가 전무하다.

동진 하사설과 관련해서 전문적으로 알고 싶다면, 2009년 나온 학술논문 石上神宮 七支刀에 대한 一考察을 참조하기 바란다. 위키 본문의 내용은 해당 논문의 내용을 극히 압축해 놓았다. 간단히 알아보고 싶다면 여기를 참조.

애초에 이 설이 나온 연유에 대해선 일본서기에 적힌 내용과 상반되는, 백제가 일본에게 있어 우위의 관계에 있었다는 것을 드러내는[57] 고고학유물을 그저 부정하고 싶어서 일본 사학계 일각에서 생떼를 쓰는거 아니냐는 냉담한 반응도 있는데, 실제 그런 부분도 아예 없다고 보긴 힘들 것이다.

4. 각종 매체에서

모양이 특이하고 고대사의 한 아이콘이 된 것 때문인지, 여러 매체에서 빈번하게 등장하기도 한다. 단, 진지하게 "칼"로 쓴다기보단 대개 판타지에서 쓰는데, 당연하지만 의전용이지 실전에서 쓰기엔 심히 부적절하기 때문. 딱 봐도 알겠지만 잔가지 부분에 걸릴 게 너무 많다.

헬게이트 런던에도 나온 바 있고, 바람의 나라에서는 불 속성의 검으로 나오기도 했다. 물건너의 여러 가지 게임이나 매체에서 뭔가 굉장한 무엇인가로 등장한다. 신화의 캐릭터가 사용하기도 한다.

4.1. 한국

4.2. 일본

일본에서 전해내려온 유물이다보니 일본 매체에 자주 등장한다. 칼이 주된 무기가 되는 창작물에선 필수요소급으로 한번씩 등장한다. 다만 칠지도 자체로 나오는 경우보다는 토츠카노츠루기아마노무라쿠모노츠루기 등의 고대의 성검을 그려넣을 때 그 모양을 칠지도처럼 그려넣은 경우가 많다. 또한 칠지도를 다루는 일본 매체에선 보통 고대의 신비로운 검이란 무기 이미지를 강조하지, 한국과의 연관성을 강조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하지만 그래서 국내 팬들이 농담삼아 해당 검을 사용하는 인물이 한민족이라거나 만든 세력이 백제와 교류를 맺었다는 식의 드립을 치곤 한다. 주로 나무, 번개, 불꽃 등을 형상화한 듯한 무기라는 설정으로 등장한다.


[1] 일본어 독음은 각각 시치시토(しちしとう), 로쿠사노호코(ろくさのほこ)이다. 아무래도 베는 것은 힘들어 보이니 ''라기보다는 창의 일종인 ''라고 보아야 한다고 생각했는지, 명문이 드러나기 전까지 이소노카미 신궁에서는 육차의 모(六叉の鉾)라고 불렀다. 이 이름은 적절하지 않은데, 형태상으로는 전혀 '모'로 분류할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모는 나무로 된 대(손잡이)를 날에 끼우는 것이고 창은 창날의 슴베를 나무로 된 대에 박아서 고정시키는 것인데, 칠지도는 손잡이를 끼워넣을 투겁이 아닌 손잡이에 끼워넣을 슴베가 달렸으므로 '모'로 볼 이유가 전혀 없다. 더구나 슴베의 형태도 창날보다는 칼날 쪽에 가깝다. 무엇보다도 칠지도에 새겨진 명문에 칠지도(七支刀)라는 이름이 분명하게 나타난다. 실제 사용할 일이 없는 상징적인 물건인 만큼, 모양이 실용적이지 않다고 해서 검이 아니라고 판단하면 곤란하다. 칠지도란 명문이 있기 때문에 지금은 일본에서도 '칠지도'라고 함이 일반적이다.[2] 본 항목의 영상에 나오듯, 일본에서도 백제가 내린 하사품 맞다고 보는 학자도 있다. 그냥 학자도 아니고 후술된 역사스페셜 영상에서 보이듯 이미 NHK 측에서 칠지도 관련해 자문을 의뢰할 정도의 교토대 교수면 일본 학계에서도 관련 거장이라고 봐야 한다.[3] 신령에게 바친 예물을 모아두는 창고.[4] 이세신궁 등 몇몇 특별한 신토 시설의 최고 책임자를 대궁사(大宮司)라 부른다. 보통은 궁사(宮司)가 최고 책임자가 된다. 일본의 오래된 신궁이나 신사는 따로 궁사/대궁사 직을 세습하는 가문이 있기 마련이지만, 메이지 유신 직후 일본에선 전국의 신토를 통제하는 목적으로 잠시 궁사나 대궁사를 잠시 '임명'했었다.[5] 북두칠성은 음양과 오행을 모두 담은 하늘의 중심 별자리로, 인간의 모든 길흉화복과 수명을 주관한다. 따라서 북두칠성은 자연히 천명을 받아 천지공도를 인간 세상에 펼치는 제왕에게 있어 매우 중요한 별자리다. 그래서 중국의 통치자들은 예부터 보검에다 칠성을 새기는 일이 많았다. 시진핑의 보검에도 북두칠성이 새겨졌다.[6] 모조품이라고 해도 최상품 철과 황금과 마노 등 귀금속으로 제작하여 가치만으로도 60만 위안에 달하는 초고가품이다.[7] 칠지도와 같은 기법이 나타나는 원삼국 시대의 환두대도 유물은 무쇠, 금동(金銅)제를 가리지 않고 고루 출토되었다. 다만 특유의 금상감기법이나 제조법이 동일할 뿐 모습까지 칠지도와 똑같지는 않다. 링크, 또 다른 링크.[8] 사진 출처 기사: 일제 때 출토 미공개 유물 15만 점 박스째 보관.[9] 일각에선 후술되어 있듯 전지왕 때 보낸 걸로 추정하기도 한다.[10] 그래서인지 일본사 교과서에도 헌상(献上)이라 쓰였다.[11] 근초고왕 때라면 태자는 미래의 근구수왕이다.[12] 서기 369년은 근초고왕 24년이다. 이 해는 일본서기에 따르면 닌토쿠 덴노 재위 57년인데, 일본서기대로라면 313년에 즉위해서 399년 사망할 때까지 무려 87년이나 재위했다. 재위기간만 87년이면 도대체 향년은 얼마일까? 일설에는 257년에 태어났다고 하는데, 이를 믿는다면 향년이 무려 143세에 이른다. 전근대의 수명이라기엔 너무 터무니없다. 고사기에서는 사망했을 때 나이가 83세라고 하므로, 일본서기에서 설명한 재위 기간보다도 짧다. 따라서 닌토쿠 관련 기록에 오류가 있음이 분명한데 실제가 무엇인지는 모른다.[13] 우리말 번역문은 2013년 동북아역사재단이 발행한 《역주 일본서기》에서 인용함.[14] 종래에는 □月로 알려졌고 五月로 판독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런데 1981년 NHK에서 엑스레이 판독을 한 결과, 이것이 十□月이라고 나타났다. 11월 16일 또는 12월 16일의 간지가 병오인 해를 4~6세기에서 찾아보면, 408년(전지왕 4년), 439년(비유왕 13년), 501년(무령왕 원년), 532년(성왕 10년) // 431년(전지왕 9년), 537년(성왕 15년), 563년(위덕왕 10년), 594년(위덕왕 41년)이 있다. 그중 가장 개연성이 높은 해는 전지왕 4년(408)이고, 따라서 이 □月은 十一月로 판독함이 옳다.[15] '백제'와 '왜'라는 양 당사자 간에는 '선왕이 쌓은 우호를 잇기 위해 방문하였다.'[16] 역대 천황의 시호에서 '황()'이라는 글자가 나오기는 하지만 이것은 천황 칭호가 사용되고 나서 율령제 시기 당시의 후대에 창작한 것이다.[17] 단 완전한 자치를 맡기지 않았을 수도 있고, 감시를 위해 왕족 등이 정기적으로 내왕 및 현지에 체류했을 가능성이 있다. 무령왕이 왜국에서 태어난 것으로 유명한데, 그의 어머니가 이러한 체제 하에서 남편과 같이 왜국으로 가던 도중 태어났을 가능성이 높다.[18] 약간 경우는 다르지만 13세기 세계 최강대국이던 몽골제국의 군주인 몽케칸도 두 사람이 달려들어도 제대로 시위를 당기기 어려운 강고한 활과 화살 두 개를 일부러 만들어 이를 사절단을 통해 프랑스 국왕한테 선물로 보내면서 "우리는 이런 활로 화살을 발사하는 데 아주 멀리 가고 또 강하다."라는 메시지를 전하여 몽골제국의 힘을 과시하려 했다링크[19] 실제로 무령왕이 게이타이 덴노에게 사사로이 인물화상경을 선물하는 등 양국의 왕끼리 선물을 주고 받는 일도 있었다. 그러나 인물화상경에는 연호가 아닌 십이갑자를 사용하고 있으므로 칠지도가 무령왕 당대의 물건은 아니라는 주장도 있다[20] 太와 泰는 뜻이 서로 통하는 통자(通字)이긴 하지만 엄연히 다른 글자다. 물론 어려운 한자에 대응하는 쉬운 통자로 대체하는 경우가 있긴 하다. 하지만 칠지도 명문은 그 반대로 했다고 주장하는 것이므로 적절치 않다. 게다가 다른 단락에 설명했지만 주조로 제조된 물건에 각필을 새기는 것은 무척 힘든 일이다. 다만 동진의 高崧의 묘지에는 泰和 원년에 사망했다는 기록이 있으므로 용례가 전무한 것은 아니다.[21] 조경철, 백제 칠지도의 제작 연대 재론: 병오정양(丙午正陽)을 중심으로, 백제문화, 42권 0호, 2010, vol. 1, no. 42, pp. 5–27 (23 pages)[22] 당연하지만 독자적인 연호 또는 간지를 통상적으로 잘 사용하다가 갑자기 중국의 연호가 등장하면 중국과 연관된 물건일 가능성이 더 커진다.[23] 당연하게도 통상적으로 국내에서는 간지나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했다고 해도 외교적인 부분에서만큼은 중국 연호를 일반적으로 사용하였다고 한다면, 단순히 중국의 연호가 사용되었다는 것만으로는 중국에서 직접 제조한 물건이란 근거가 되지는 않는다.[24] 비유하자면 조선시대에도 명나라의 연호를 공식적으로 사용했고, 조선왕조실록에도 명의 연호가 기사 맨 앞에 항상 등장한다. 그렇다고 해서 조선왕조실록이 중국에서 만들어지고 기록된 사서는 아닌 것처럼 칠지도의 연호 문제 또한 태화가 혹 중국의 연호가 맞는다고 해도 그 자체만으로는 중국에서 만들어졌다는 증거라고 보기에는 힘들다는 뜻이다.[25] 굳이 가능성을 언급한다면, 전면의 글귀는 동진에서 새기고, 후면은 백제가 받은 뒤 글귀를 다시 새겼다는 2번식 논리밖에 성립되지 않는다.[26] 413년에 왜국이 동진과 통교한 기록이 있기는 하지만, 이는 칠지도가 제작되었다고 추정되는 369년과는 약 반 세기 가까이 차이가 난다.[27] 왜국은 413년 동진과 통교하기 이전에 266년에 진나라와 통교한 적이 한 차례 있다. <晉書> 의희義熙 9년(413) 기사를 참조하자. 이마저도 왜국 사신이 동진 조정에 바친 공물이 인삼과 담비 가죽 등 고구려 특산품이기 때문에 일각에서는 고구려가 광개토대왕 시절 남진하여 백제와 가야에 포섭되어 지원군으로 파병된 왜구를 포로로 삼아 같이 데려간 게 아닐까 추정하기도 한다. 즉, 고구려가 자신의 세력과 국력을 정치적으로 이용하기 위해 데려갔다는 해석이다. 倭國獻貂皮人參, 詔賜細笙麝香. 梁書의 義熙 9년(413년)와 義熙起居注을 참고.[28] 1번 가설이 말이 되려면 후왕은 백제왕이 아니라 왜왕을 지칭한 것이 전제되어야 한다.[29] 동진 사람 고숭(高崧)의 묘지석에 분명히 태화(泰和) 원년에 사망했다고 적었으므로 해당 연호가 백제가 아닌 동진의 연호일 가능성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다. 다만 이 경우 해당 연호가 정말 동진의 연호가 맞는다고 가정하여도 백제가 외교적으로는 중국의 연호를 사용했을 가능성이 있으므로 칠지도의 제작국을 연호 하나만으로 특정해서 파악하기는 매우 어려워지게 된다.[30] 이 경우 중국을 의식했다는 뜻이 되는데 확실히 왕세자라는 명칭은 당대에 흔한 것은 아니었지만, 고구려가 자국의 태자를 세자라고 칭한 적이 있으므로 아예 없는 용례는 아니다. 후술할 내용을 참고.[31] 주조는 단조에 비해 균등한 품질로 대량의 물품을 생산할 수 있는 제조법이다. QC에 특화된 제조법이다. 언제든지 쇳물을 부어 몇 개라도 만들 수 있다. 다만 이 경우에는 왜 칠지도가 일본에서만 그것도 단 1개만 발견되었는 것인지 설명이 안 된다. 양산품이라면 적어도 칠지도와 동일한 유물들이 여러 개가 발견되어야 옳기 때문이다.[32] 전면과 후면에 동일한 문자 4개 즉 造, 百, 刀, 王가 쓰였는데, 글자들을 대조해보면 서체가 다르다는 것이 골자[33] 중국에서 전면만 글귀를 새겨 하사했다고 주장하는데, 후면을 공백으로 놔두고 사여함이 일반적인 형식이나 트렌드였는지도 조사해야 할 것이다. 5세기 유물로 소급 할수 있는 이나리야마 철검의 명문의 경우 전면과 후면 둘다 명문이 기록 되어 있다.[34] 초기에는 音을 晉으로 오독하여 중국이 하사한 도검이다라고 주장하기도 했으나, 통설은 晉이 아닌 音라는 것이다.[35] 이에대해 한국 학계에서는 칠지도에 보이는 '성음(聖音)'은 백제 왕실의 번영을 가져다 준 부처에 대한 외경의 표현이라고 해석한다. (조경철, 백제 왕비와 내법좌평 해수를 통해서 본 4~5세기 백제 불교, 한국사상사학, 2012, vol., no.42, pp. 1-29 (29 pages))[36] 일본서기는 신공 52년(372년으로 비정) 백제가 일본에 칠지도를 헌상하였다고 주장한다.[37] 다만 침미다례를 정복할 때 왜군이 원군으로 온 듯하다.[38] 보통 삼국시대에는 왕태자라고 부름이 일반적이지만, 중국이 원래 백제에게 하사한 물건이기 때문에 왕세자라고 자칭하는 점에서 중화세계에 편입된 백제가 중국을 의식하여 자신을 의도적으로 낮추어 적었다는 주장이다.[39] 양산품으로 각국 제후들에게 보냈다는 주장이다.[40] 다만 칠지도와 같은 형태의 들은 일본과 한반도에서만 나왔다. 일본에서 나온 것은 이소노카미 신궁(石上神宮)에 전해지는 칠지도이고 한국에서 나온 것은 부여 군수리 사지에서 발굴된 칠지도 문화재청 설명 부여 군수리 사지 칠지도 유물 그리고 황남대총에서 출토된 환두대도 칠지도이다. # ## 물론 이에 대해서는 칠지도의 해당 원양식이 산동성 무씨사당화상석의 명협 문양과 비슷하다는 의견과 원삼국 시대부터 만들어지기 시작한 금관양식과 비슷하다는 의견들이 둘다 존재하고 있는 상황이다.[41] 각필과 서체의 모양이 일치한다면, 적어도 2번 학설은 배제된다.[42] 물론 역풍이 부는 여름에 도해한 이유도 있겠지만, 일본서기에 의하면 부여곤지를 왜국에 파견한 시기는 4월 즈음이고 무령왕은 같은 해 6월에 출산했다고 한다. 태어난 곳은 사가현 인근이므로 완전히 도달하지는 않은 상태에서 태어난 것을 염두에 둬야 한다.[43] 광개토대왕이 남방 원정에서 포로로 사로잡은 왜구를 데려와 고구려에게 유리한 증언을 시켰다는 정황이 있다. 고로 왜국이 동진과 실제로 수교했을 가능성은 매우 낮다. 다만 몇 년 후에 송과 통교했다는 기록이 421년에 발견된다.[44] 정확한 위치는 확실하지 않으나, 삼국사기에 기록된 백제의 지명 욕내군(欲乃郡)과 연관지어 전라남도 곡성군으로 비정하는 설이 유력하다. 칠지도의 제작 연대가 일본 사학자들이 주장하는 태화 4년(369)이 맞는다면 전라도 일대라는 주장이 힘을 얻는다. 그 시절 백제는 침미다례 등 호남 일대를 평정했고, 근구수왕이 이끄는 군사를 북쪽으로 돌려 이미 치양 전투에서 고구려를 격파한 뒤였다. 즉 칠지도에 적힌 문장과 일본서기의 칠지도 기사를 취합하면, 백제가 새로이 얻은 영토에서 얻은 철을 채굴하여 제련하여 칠지도를 제조하고 자랑 혹은 과시용으로 하사했다고 해석할 수도 있다. 백제의 중흥기임을 대외적으로 알리며 철의 산지를 언급하며, 교역을 뚫고 철을 수출하여 경제적 이점을 얻기 위해 하사했으리라는 가설이다.[45] 일본서기에서 곡나(谷那)라는 지명이 나오는 기사가 또 있는데, 바로 응신 8년(*397) 3월 기사이다. 여기서 백제기를 인용하며, 백제 아신왕이 무례하여 왜국이 곡나, 동한, 침미다례 등의 영토로 빼앗았다고 나온다. 이러한 관점에서 접근하면 곡나가 침미다례 인근 한반도 남부의 곡성 일대에 있었다는 학설이 더욱 힘을 얻는다.[46] 일각에서는 당시 백제의 도읍이 위례성(현 서울시)이었다는 점을 들어, 임진강 혹은 예성강의 발원지 인근인 현재의 황해도 곡산군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예부터 대방군 지역은 변한으로부터 철 원료를 수입하여 가공하는 기술이 뛰어났다. 근초고왕이 고구려 원정에서 얻은 새 영토를 기념하기 위해 그곳에서 얻은 철로 만든 철제무기라고 추정하는 이유다. 다만 곡성군 설에 비하면 근거는 빈약한 편이다.[47] 김태식 교수는 무령왕릉에서 발굴된 청동거울과 칠자경이 연관이 있다고 생각하여, 칠지도가 6세기 물건이라고 추정했다. 또한 칠지도의 형태 등을 토대로 6세기 무렵에 유행하던 모양이라고 했다.[48] 곡나철산과 철의 산지를 언급하는 것에 주목하여, 백제가 근초고왕 시절 막강한 국력으로 새로이 얻은 땅과 국력을 과시하며, 변한 지역의 가야에게 의존하던 왜국의 철 수입을 백제에게 유리하게 이끌고, 교역 파이프라인을 뚫기 위해 샘플로 칠지도를 선물했다는 학설도 지지받는다[49] 일부에서는 408년 하사설에 무게를 두고 침류왕이 아닌 비유왕으로 특정하나, 통설로는 침류왕을 칭하는 것으로 본다. 한자 그대로 번역하면 침류왕이 맞는다. 그렇다고 비유왕일 가능성이 완전히 없지는 아니하다. 비유왕은 일본서기에서 아예 기록이 없고, 그 빈 자리를 전지왕, 구이신왕, 개로왕으로 채웠다. 만약 정말로 전지왕 재위기에 있었던 일이었다고 한다면 일본서기는 비유왕을 의도적으로 지웠기 때문에 그 자리를 침류왕으로 대체했을 수도 있다. 전지왕 시절인 408년(병오정양에 따른 해석)이라면 그의 손자는 비유왕이다. 더구나 이 기사는 일본서기에서도 걸러들어야 할 것도 많고 이주갑인상을 고려해도 엉터리 뒤죽박죽의 기록이 많은 진구황후조이다. 곡나철산에서 체굴한 철로 만들어진 것이라는 증언에 대해서는 상당히 신빙성이 있지만, 근초고왕의 손자를 침류왕이라고 후대에 소급해서 부르는 시점에서 후대에 윤색을 했을 수도 있다. 하여 침류왕이라는 내용을 별로 신뢰할 수 없다. 일본서기는 이렇게 인명이나 지명과 주체만 살짝 바꾸어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기록하는 일이 잦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진구황후조에서 신라 인질 미사흔의 기록은 일본에서 체류한 기간조차 제대로 맞지 않는다.[50] 우리말 번역문은 2013년 동북아역사재단이 발행한 《역주 일본서기》에서 인용함.[51] 아직기(阿直岐)[52] 일각에서는 칠지도로 비정하기도 한다.[53] 용례로 따지면 만들 조(造)는 만든다는 뜻으로 사용함이 일반적이지만 '이르다'는 뜻도 있다.[54] 이미 릉비에도 영락(永樂) 원년, 5년, 6년 등을 꼬박꼬박 기록하였다. 릉비의 다른 면에는 세자라고 칭하는 사례도 있기에 세자라는 칭호를 중국과의 외교자세를 고려하여 사용하되 중국 연호를 사용했다는 일본 학계의 억지를 깨부수는 중요한 근거이기도 하다. 물론 릉비가 세워진 장수왕 3년에도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했을 것이다.[55] 또한 중국 왕조조차 황제를 전하라고 부른 사례가 단편적으로 몇 번 있었다. 단편적인 사례로 제후와 천자를 구별하는 것은 옳지 않다.[56] 물론 이것에 대해서는 무령왕이 보낸 물건이 아니라는 반박이 있다.[57] 일각에선 일본이 근초고왕의 손자인 침류왕 사망 이후부터 백제-왜국 관계의 서열 뒤집기를 시도했다고 보기도 한다.[58] 심지어 자기 부하들인 쟝과 얀센도 처음에 그런 계획에 대해서 아무리 그래도 매국노 짓을 하겠단 말이냐며 격렬히 반대했다(...). 물론 봉팔이는 돈도 챙기고 그 칠지도를 한국에 줘서 명예도 챙길 계획이었지만.[59] 순간적으로 비정상적인 높은 공격력을 내는데, 유닛은 즉사이고(지상 유닛들 중 이 공격력을 넘어서는 체력을 가진 존재가 없다! 굳이 꼽자면 백설산삼 왕창 먹여서 체력을 다섯자리로 늘려놓은 영웅 정도...근데 그건 사실상 치트키 아니면 꿈의 플레이에서나 가능하다) 건물도 죽을둥 살둥 하는 처지로 만들어버린다.[60] 기존 퇴마의 검은 양기를 띈 불 속성 검인 리였기 때문에 마치 빔 사벨처럼 불꽃이 뿜어져 나오는 형태였다. 참고로 극장판에서 나오는 퇴마의 검은 음기를 띈 땅 속성 검 곤이라 기존 퇴마의 검이 붉은 계열이었던것과는 대조 되게 파란색 칠지도의 모습을 하고 있다.[61] 전체공격 지진, 플레어를 다용하는 초강적으로 신전 지하에서 유일하게 도망이 가능한 전투(즉, 일반 자코전에서는 도망칠 수 없다!)[62] 공격 회수 한계 설정으로 무기가 철저히 소모품인 사가2에서 엑스칼리버는 무제한. 디펜더, 선블레이드, 무라마사 등 최상급 무기들은 소비회수 40 정도.[63] 빠르게지나가기에 자세히안보면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