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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나일본부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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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역사3. 근거와 논박
3.1. 일본서기의 내용
3.1.1. 일본서기의 위치 설명 대목
3.2. 일본이라는 국호가 등장한 시기상의 오류와 신빙성3.3. 칠지도3.4. 중국 역사서의 왜왕 책봉 기사
3.4.1. 왜왕 무(武) = 웅략천황?
3.5. 가야 = 임나 ?3.6. 수서 왜국전의 내용3.7. 삼국지 위지한전(魏志韓伝)의 기록3.8. 양직공도 신라 제기(題記)3.9. 구당서3.10. 『광개토대왕릉비』의 내용
3.10.1. 고구려 주체설에 대한 의문점과 그에 대한 반박
3.11. 주구묘와 장고형무덤(전방후원분)3.12. 구마모토의 편두 유골3.13. 경남 서부 내륙지역 및 남해안 일대의 왜계 석실3.14. 일본의 당대 항해력
4. 임나일본부설과 가야5. 반도 일본어설과의 관계6. 종합7. 현재진행형 수정설
7.1. 제1차 (2005), 2차 (2010) 한일역사공동연구 보고서의 고대사 부분(제1분과)의 내용과 토론부문 발췌7.2. 일본 학계7.3. 한국 학계
8. 한국 유사역사학자들의 주장9. 기타10. 관련 문서

1. 개요

파일:임나일본부설_지도2.png
임나일본부설의 실존 여부에 대한 관점
A<colbgcolor=#fff,#1F2023>진구 황후백제를 속국으로 두고 신라를 정벌했다는 주장(삼한정벌).
《일본서기》 내 신화적 변작으로, 현대엔 아예 인정되지 않음.
B일본계 세력이 가야 지역을 중심으로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다는 주장.
일본어 위키백과 및 일본 내 일부 교과서에서 채용.[1]
한국 역사학계에서는 일본의 역사왜곡으로 간주, 시정을 촉구하고 있음.
C침미다례가야 안라국(아라가야) 지역을 중심으로 일본부 또는 일본계 세력이 존재했다는 주장.[2]
일본 내 일부 교과서에서 채용.
일본의 역사왜곡으로 간주되고 있음.[3]
D임나일본부는 실존하지 않으며, 안라국 등이 일본과 정치적으로 밀접한 관계였다는 주장.
E임나일본부는 실존하지 않으며, 한반도 남부 일대에서 일본계 또는 왜구의 제한적 활동이 있었을 것이라는 주장.
F임나일본부는 한반도 내에 존재하지 않으며, 대마도의 세력을 지칭했을 것이라는 주장.
G임나일본부는 실존하지 않으며, 《일본서기》, 《고사기》 기록은 당시의 외교나 전쟁[4] 등을 후세에 과장・조작한 결과라는 주장.
임나(가야[5])일본부 존재설([ruby(任那日本府説, ruby=みまなにほんふせつ)])은 일본고훈 시대에서 아스카 시대에 해당하는 서기 4세기-6세기 중엽 사이에 야마토 왕권한반도 남부 지역에 일본부(日本府)라는 통치기구를 세웠으며 이 지역을 속국, 제후국(번국) 또는 식민지로 삼아 지배했다는 주장이다. 일본에서는 남조선경영론(南朝鮮經營論) 또는 남선경영론(南鮮經營論)이라고도 한다.

일본서기에 의하면 신공황후삼한정벌 이래로[6][7] 일본학계에서 주장하는 임나의 일부[8]인 임나4현 즉, 하다리[9], 상다리[10], 사타[11], 모루[12]를 6세기 초반까지 소유했다라는 내용이 나온다. 그러다가 512년에 백제가 사신을 보내, 임나국의 임나4현을 요구 했고 왜왕은 흔쾌히 받아들인다.[13] 이듬해 513년에는 대가야가 백제의 기문과 대사라는 땅을 두고 전쟁을 벌이는데 대가야에게 빼앗기자, 왜왕에게 사신을 보내 되돌려 달라고 부탁하고, 왜왕이 재차 조칙을 내려 대가야의 기문(己汶)과 대사(滯沙)를 백제에게 할양하게 했다.[14] 임나일본부설은 단지 그들이 한반도 남부 일대를 통치했다는 것에서 끝나지 않고, 한반도 남부에 존재하던 백제, 신라마저도 마치 자신들의 영향력 아래 두고 마음껏 전횡을 부렸던 것처럼 서술하는데, 이에 대한 일례로 일본서기에는 진사왕을 무례하다는 이유로 사신을 보내 책망하자, 백제인들이 스스로 진사왕을 죽이고(...) 아신왕이 즉위했다고 기록했다.

그리고 일본서기 397년 응신 8년조의 기사에는 근초고왕 시절 백제가 정복한 침미다례 및 현남[15], 지침[16], 곡나[17], 동한[18]의 땅을 아신왕이 무례하다는 이유로 빼앗았다고 서술하고 있다. 이에 아신왕은 당황하여 태자 직지(후의 전지왕)를 파견하여 선왕의 우호를 잇게 하였다고 일본서기는 전한다.[19][20] 다만 東韓은 아신왕이 죽고 왜국에 체류하던 전지왕을 백제로 송환하여 즉위하는 과정에서 왜국이 백제에게 빼앗은 땅의 일부인 동한을 다시 백제에게 주었다고 나온다. 또 458년에는 지진원(池津媛)이라는 백제 여인이[21][22] 왜왕의 신하와 정을 통하였다가 발각되어 화형에 쳐해지고, 이에 놀란 개로왕은 동생인 부여곤지을 보내어 친선을 도모했다.[23] 즉 4세기 후반부터 5세기 중반에 걸쳐 고구려의 남하와 맞물려 왜국 자신들이 백제와 신라보다 군사적으로 우위인 점을 부각시켜 서술하고 있다.[24]

특기할 점은, 근초고왕 치세기와 맞물려 시작된 이주갑인상의 연도 조작은, 백제가 일본서기에서 장수왕에 의해 정벌해 사라졌다라고 전하는[25] 5세기 중반에 이르러 사라진다. 직후에 등장하는 기사는 개로왕이 장수왕에 의해 죽임을 당하고, 일본서기에서는 백제가 멸망 했다고 이른다. 그 소식을 들은 왜왕은 문주왕에게 고마나리(웅진)[26]을 주어 백제를 재건하게 한다.[27] 그러다가 일본서기에 이르면 백제가 가야에 대한 영향력을 다시 수복한 것은 6세기 중반으로 주장하는데 백제 성왕이 가야계 왜인들의 안라왜신관[28]을 내쫓고 551년[29]에는 성왕이 직접 가야군을 이끌고 신라와 연합해 한성을 수복하고 남평양[30] 일대의 6군을 점령한 기록이 존재한다.

이주갑인상에 대해 특기할만한 점도 일본 국내의 사정을 다룬 기사에서는 이주갑인상이 발생하지 않는다. 한반도 관련 기사, 특히 백제에 관련한 기사에서 집중적으로 나타나는데, 5세기 중반 백제가 고구려에게 멸망하고 (실제로 일본서기에서는 백제가 이때 멸망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이주갑인상은 사라진다. 이를 두고 김현구는 백제가 망해서 왜국으로 망명한 백제8대 성씨중 한개인 목씨가 이룩한 일들을 소급적용 해서 자신들이 통치 했던 것처럼 윤색 했다고 주장한다. 그도 그럴것이, 일본서기에서 가야를 정벌한 목라근자의 아들 목만치가 백제에서 전횡을 일삼자 왜왕이 소환 (일본서기 414년, 광개토왕이 막 승하 했을 시기이다.) 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미 大倭의 목만치라고 기록하며, 마치 왜국의 신하 인것처럼 소급해서 전하고 있다.[31] 백제에서 건너간 이들 세력들에 의해 마치 왜국이 백제의 상전인 것처럼 기록 해놓고, 백제의 역사와 비교하고 나니, 자신들이 우위인것처럼 기록 했지만 정작 당대 백제의 기록에 비해 초라함과 한미함을 느꼈기 때문에 그 이전 기록을 윤색해서 120년을 끌어 올린게 아닌가 하는 해석이다. 당대에 문자가 없어서 문헌기록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일본으로써는 120년을 끌어올렸으니 당연히 그 120년의 공백에 백제삼서를 인용하며 끼워 넣을수 밖에 없었다.

백제가 가야에게 직접적인 영향력을 끼치고 가야 연맹국들에게 리더십을 회복한 것은 사비회의 이후 부터이다. 이 후엔 백제 성왕이 백제/가야 연합군과 신라군을 이끌고 한강 유역을 고구려에게서 다시 빼앗아 온다.[32] 그래서 6세기 중엽에 일본의 가야 패권은 소멸 했다는 견해도 있지만 좀 더 직접적으로 일본이 가야에 대한 패권을 완전히 잃은 것은 562년에 벌어진 신라와 백제 왜 연합군 사이에 가야를 두고 씨운 전쟁이다. 이때부터 가야는 근초고왕 이래로 200여년 간의 백제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신라에게 완전히 복속된다. 자세한 내용은 가야멸망전을 참고하자.

일본서기에서 말하는 임나의 정의는 일관되게 가야의 통칭 즉, 전라남도 일대와 경상남도 일대 (김해 + 부산) 처럼 묘사되지만[33], 삼국사기와 광개토대왕릉비는 임나와 가야를 합쳐서 부르고 있는 용례가 있으며, 임나가야는 부산 김해 일대의 가야 연합체의 일부로 불리고 있어서 서로 충돌하는 경향이 있다. 자세한 내용은 일본서기/한반도 관련 기사 문서를 참조.

간혹 국내 사서에서 임나라고 단독으로 표기하는 경우도 있는데 이 경우에도 일관되게 금관가야를 지칭한다. 후술할 내용이지만 임나와 가야를 같이 병기하며 별개의 나라로 취급하는 용례는 송나라에서 왜왕에게 하사한 육국제군사의 직위 밖에 없다. 임나 혹은 가야를 따로 언급하며 혼용하는 경우나 임나와 가야를 같이 병기하고 같은 국가 취급하며, 부산, 김해 일대의 금관가야[34]를 칭하는 용례는 있어도... 가라에 대한 명칭에 대해도 흥미로운 점이 있는데 일본어로 가라는 한국의 韓을 뜻한다. 일본어에서 한국의 韓은 가야에서 유래했다는 것이다. 또 임나가야에서 임나의 접미어의 가야는 고대 韓語로 나라라고 해석된다. 즉 임나가야는 임나국 (예를 들어 한+국 = 한국, 미+국 = 미국)[35]의 개념이고 가야는 일본어로는 韓이라는 뜻이고 고대 한국어로는 나라라는 뜻이다.

선술한 바와 같이 일본서기의 주장을 곧이곧대로 다 수용한다면 경상남도 전역에 걸친 가야 10개국의 강역은 물론이요 전라남도 일대 전역[36]과 전라북도 일대[37]와 충남 일대[38], 충북 일대[39]를 걸친 백제 강역의 대부분과 중복되는 영토를 소유하고 있었다고 주장한다.[40] 첨부되어 있는 사진의 B에 해당하는 강역이다. 즉, 일본이 말하는 임나는 가야 연맹체 10국과 선술된 임나4현과, 이밖에 일본서기에서 '임나'라고 불리는 국가들의 통합된 강역이다.

이에 대한 일본서기의 기술에 대한 일본어 위키백과의 설명은 이렇다.
三書の中で最も記録性に富むのは『百済本記』で、それに基づいた『継体紀』、『欽明紀』の記述には、「日本の天皇が朝鮮半島に広大な領土を有っていた」としなければ意味不通になる文章が非常に多く[75]、また、任那日本府に関する記述(「百済本記に云はく、安羅を以て父とし、日本府を以て本とす」)もその中に表れている。

삼서 중에서 가장 기록성이 풍부한 것은 『백제본기』로서 이를 토대로 한 『계체기』와 『흠명기』의 기술에는 「일본 천황이 한반도에 광대한 영토를 갖고 있었다」고 하지 않으면 의미불통이 되는 문장이 매우 많았으며[75], 또한 임나일본부에 관한 기술(『백제본기』에는 임나가 안라를 부(父)로, 일본부를 본(本)으로 여긴다고 한다.[41][42][43]」)도 그 속에 나타나 있다.
天皇が百済王に「賜」わったという地は、忠清道の洪城、維鳩、公州付近から全羅道の栄山江、蟾津江流域にまで及んでいる。これは、滅亡時の百済王が独立して、かつ正当に統治していた国家の領土とほぼ一致する。しかし、7、8世紀の交の在日百済王族、貴族はそれを天皇から委任された統治と表現せざるを得ない臣下の立場にあった。このような観念を実体化して、「高麗、百済、新羅、任那」は「海表の蕃屏として」「元より賜はれる封の限」をもつ「官家を置ける国」だった(『継体紀』)などというのは信頼し難い

천황이 백제왕에게 하사했다는 땅은 충청도의 홍성, 유구[44], 공주 부근에서 전라도 영산강, 섬진강 유역까지 이르렀다. 이는 백제가 멸망했을 때 까지 백제왕이 독립적으로 통치하던 국토와 거의 일치한다. 그러나, 7-8세기에 백제 멸망후 일본으로 건너간, 백제 귀족들은 천황으로부터 위임받아 통치했다고 표현할 수 밖에 없는 신하의 입장이었다. 이러한 관념을 실체화하여, '고려, 백제, 신라, 임나'는 '海表'[45]의 번병[46] '원래 내려진 봉한'을 가진 '관가 [47]를 둘 수 있는 나라'였다(『계체기』)는 것은 신뢰하기 어렵다.

일본서기》에서는 임나를 가라국(금관가야)을 포함해서 10국이 있다고 쓰여 있다. 가라, 안라, 사이기, 다라, 졸마, 고차, 자타, 산반하, 걸손, 임례 10개국과 임나4현이[48] 일본에서 말하는 자신들이 통치했다던 강역이다. 이 10개국[49] 중 예를 들어 합천 다라리에 다라국의 고수준 제철 유물들이 발견되었는데, 《일본서기》에 나타나는 다라국으로 추정할 수 있다. 이렇게 일본서기는 비록 해외 기록이지만 한국 측의 삼국사기삼국유사가 삼국시대로부터 수백년 뒤 고려시대에 편찬된 것과 달리 좀 더 앞선 8세기에 편찬된 기록이므로, 왜의 한반도 남부 지배가 사실이라고는 볼 수 없어도 부분적으로는 국내 기록보다 정확한 부분이 일부 있다고 확인되었지만[50] 한편으로는 한반도와 관련된 기사는 모두 일본이 상전인 것처럼 조금씩 바꿔 써 놓은 게 《일본서기》의 특징이고, 이런 일본서기의 과장된 내용을 문자 그대로 사실이라고 믿고 다른 사료를 여기에 짜맞춘 것이 바로 임나일본부설이다.

일제시대 이래로 한일 역사학계에서 오랫동안 논란이 되었고, 현대 사학, 고고학이 발달하며 이를 부정하는 근거가 모인 끝에 '일본부의 존재' 가설은 2010년 한일역사공동연구위원회를 통해 폐기되었으나, 마치 한반도 남부 지역을 군사적으로 지배한 것처럼 해석될 수 있는 여지는 남아 일본 내 역사 교과서에 아직까지도 인용되고 있다. 최근 일본의 우경화로 인하여 다시 고개를 슬금슬금 들고 있는 상황.[51] 제1차 한일역사공동연구위원회 좌담회 부분에서 비판 받았던 내용인데, 일본측에서도 상기된 내용들이 신빙성이 떨어지는 기록이라는 걸 인식하고 있긴 하지만 개괄적으로는 사실을 바탕으로 쓴 내용이라고 주장한다. 한국측 김태식 교수와 김현구 교수 등은 일본에서 사료비판 없이 일본서기에 기록 되어있는 내용등을 마구 적으며, 옛 사람들이 쓴 기사니깐 기사 그대로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라는 식의 방관하며 부연설명을 하지 않고 원문만 번역하여 개설서에 수록하며 일반인으로 하여금 현혹 하게 만드는 무책임한 서술 방법을 지적했다.https://www.jkcf.or.jp/wordpress/wp-content/uploads/2019/11/1-07k.pdf 물론 학계에서 헛소리 취급 받는 것은 상단의 A, B, C와 같은 막나가는 주장 쪽이고, 그와는 별개로 일부 지역이 일본계 군사세력에게 공격받은 사례[52]는 실제 있었던 일의 예시로 들 수 있다.

일본서기의 문제가 되는 기록들에 대해서는, 비록 이 책에서 과장이 되긴 했지만 '일본부' 기록의 원형이 된 어떤 왜인 위주의 기관이 6세기 전반 한반도 남부에 있었다는 데는 현대 한일 학계에서 대체로 동의하는 편이다. 그러나 그 기관의 성격은 '통치기구'가 아니라 ‘백제-가야의 여러 나라-신라-왜국’이란 고대의 국제 다자구도에서 일종의 교섭 용도, 그것도 왜왕과 왜국 정부의 통제에서 어느 정도 벗어나 있는[53] 것으로 등장한다. 이 문서의 아래 단락에서 나오는 여러 근거와 논박은 고전적인 식민지적 경영론을 논파하고 반박하는 것이다.

물론 일본서기와 고사기가 무조건 한반도에 대해 왜곡된 기록만 실린 것은 아니다. 백제 멸망 후 멀지 않은 시점에 편찬되었고[54] 한국계 기록에는 남아있지 않는 백제삼서(백제기, 백제신찬, 백제본기)를 대거 인용했으며, 그 내용을 보면 백제인이였던 왕인이 왜국에 문물을 전해줬다는 글도 쓰여 있고 아마테라스의 남동생이 가장 먼저 강림한 곳이 신라의 소시모리라는 기록. 그리고 신라 왕자 아메노히보토와 가야 왕자 쓰누가 아라시토를 보면 한반도인들이 왜국 열도에 정착하게 되는 것을 알 수 있으며 야요이의 묘지 대부분이 한반도에서 전래되었다는 증명도 있다.[55] 하지만 다이카 개신 이후 일본 특유의 자주성과 선민의식이 강화되면서 왕실을 찬양하기 위해 만들어진 일본서기의 왜곡된 부분을 그대로 사실로 믿는다는 것은 위험하며, 교차검증을 통해 과장을 걷어낸 기록의 원형을 추출하기 위해 한일 사학계에서 많은 노력을 하고 있다.

임나일본부설에 대한 실체적 접근을 하기 위해서는 주요 쟁점들에 대해 집중적인 연구가 이루어져야 한다.

1. 왜의 통일 시기는 언제인가?
2. 일본서기에 기록 되어 있는 왜의 실체 (지방 분국들의 구전)
3. 왜왕 武는 유랴쿠 천황인가?
4. 가야와 일본의 관계 등이다.

2. 역사

일본 내 임나일본부에 관한 연구는 이미 17세기 초에 시작되어 19세기에 이르러서는 본격적인 문헌고증에 의해 정설로 여겨졌으며, 19세기 말 일본이 서구화되면서 각국에 소개되었다. 에도시대(江戶時代 1603-1867) 에도 《고사기》(古事記)•《일본서기》 등의 일본고전을 연구하는 국학자들은 그를 통해 태고 때부터의 일본의 조선 지배를 주장하였다. 이어 스에마쓰 야스카즈(末松保和)는 대일본사(大日本史)의 한 편으로 일한관계(日韓關係)를 정리했다가, 제2차 세계대전 후에 학문적 체계를 갖춘 남선경영론을 완성시켰으니, 그것이 괴작 임나흥망사(任那興亡史)였다. 이를 통해 3세기경에는 외국에 식민지를 건설할 정도로 일본의 고대사회가 발전하였다는 논리로 나아갔고, 한편으로는 일본 제국의 한반도 식민지배를 정당화하는 논리로 이용하였다. 현재 일부 일본의 교과서극우 집단 잡지에 수록되어 일본인의 한국에 대한 편견과 우월감을 조장하고 있다.

이처럼 임나일본부설은 일본의 한국에 대한 제국주의적 침략행위를 과거로의 환원으로 정당화하는 도구로 사용되었으며, 일본인과 한국인은 본래 같은 뿌리에서 태어났다는 '일선동조론(日鮮同祖論)'과 함께 표리관계를 이루면서 35년간의 식민통치를 합리화하는 관념적 버팀대로서 기능했던 것이다. 따라서 식민사학의 극복을 논의할 때, 임나일본부설에 대한 비판과 부정이 빼놓을 수 없는 과제가 됨은 당연하다.

광복 이후 한국 사학계에는 '임나일본부'의 존재 여부조차 의심되었고 이에 대한 반론들이 제기되기 시작했다. 《일본서기》 기록의 신빙성에 대한 논란이 지속되어 왔으며, 당시 야마토 왕권이 한반도에 진출해 이를 통치할 여력이 있었는지에 대해서도 회의적인 의견이 꾸준히 제시되었다. 우선 '임나일본부'란 명칭부터, '일본'이라는 명칭은 7세기 중반 이후에 출현하므로 당대엔 존재할 수 없는 명칭을 후대에 소급했던 것이고, 《일본서기》의 6세기 전반에 해당하는 기록에는 빈번히 나타나지만 당연히 한국의 기록에는 전혀 나오지 않는다. 또한 일본서기의 4-6세기의 기록은 통일왕조가 이룩되기 이전의 일이므로, 통일왕조에 병합되기 전의 지방국가들에서 전해져 오는 구전[56][57]을 후대에 기록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삼삼오오로 분열된 국가 시절에 바다 건너 한반도를 체계적으로 통치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보는게 타당하다.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왜5왕, 일본서기를 읽어보자.

임나일본부에 대한 반박의견으로 가장 먼저 나온 것이 북한 역사학계 김석형(金錫亨)의 삼한삼국의 일본열도 내 분국설(分國說)이다. 김석형백남운(白南雲)과 함께 북한 역사학계를 대표하는 학자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사람의 스승은 일제 당시 임나일본부설을 일본 학계의 정설로 만들었던 일본 사학자 스에마츠 야스카스였다. 그가 임나일본부 관련 수업을 할 때마다 김석형은 한복을 입고 출석해 수업 내내 그를 노려보았다고 한다. 김석형의 분국설은 스에마츠의 임나일본부설을 철저하게 뒤집어 해석한 것으로, 이 주장에 의하면 삼한, 삼국시대에 수많은 사람들이 한반도에서 일본열도로 건너가 그곳에서 삼한, 삼국의 식민지라 할 수 있는 분국들을 곳곳에 설치하였고, 이때 임나일본부는 일본 열도 내에 수립된 가야의 분국 임나에 설치된 것이라는 것이다. 물론 근거가 매우 희박한 설이라 현재는 북한에서도 부정한다.

그리고 임나일본부설의 반박으로 초창기 학계에서 제기되었던 또다른 설로 재일교포 학자인 이진희가 제기했던, 『광개토대왕릉비』가 석회가 발라져 변조되었다는 것이 있는데 이 두 설은 현재 학계에서는 연구가 쌓이면서 설득력이 희박한 주장으로 보고 있지만, 당시에는 참신한 설로 상당히 파장을 몰고 왔고 근대 일본역사학의 '제국주의적 체질'에 대한 반성을 촉구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를 미루어봐선 신묘년조가 조작되었을 가능성은 낮지만, 이진희가 주장한 개찬설이 완전히 논파 당한것은 아니다. 이 사건으로 인해서 광개토대왕릉비를 해석하는데 있어, 좀 더 객관적 실체를 탐구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1970년대 들어 천관우는 《일본서기》에 나온 왜의 한반도 안에서의 군사 활동 기록의 주체를 《일본서기》 문면(文面)에서 적은 대로 왜로 볼 것이 아니라 백제로 주어를 바꿔서 해석해야 한다는 '주체교체설' 혹은 '백제군사령부설' 이론을 내놓았다. 즉 원래는 해당 사건들이 백제가 주도한 정벌인데 훗날 《일본서기》가 편찬되면서 천황의 권위[58]독립적이고 자체적으로 벌인 행위를 "백제가 천황의 명령으로 벌인 행위"라고 써넣는 식으로 일본서기 왜곡이 이루어졌다는 것이다.]를 위해 주어를 백제에서 왜로 바꾸었다는 것. 천관우의 이 주장은 원래 이병도가 시사한 것을 천관우가 하나의 이론으로 정립시킨 것으로 식민사학이 제시하던 한국 고대사의 구도를 깰 수 있는 결정적인 전기를 제공했다는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는다.

다만 이 논리로 나온 결과(임나일본부는 사실은 백제의 임나 주둔 군사령부)가 《일본서기》에서의 관련 기록들과 모순되는 부분이 많다는 점은 한계가 있다. 하지만 《일본서기》의 한반도(특히 백제) 관련 기록들을 그 주어를 왜가 아닌 백제로 바꿔 해석한다는 논리 자체는 100%까지는 아니라도, 사용하면 한국 측 사료나 고고학과 딱 들어맞는 부분이 상당히 많아서 한국 사학계에서 널리 수용되었고, 김현구나 노중국, 이도학, 이희진 같은 대부분 사학자들이 받아들여 사용하고 있으며, 과거와 달리 일본서기를 과장을 발라내고 백제, 가야사 연구에 적극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큰 계기가 되었다.[59]

2010년 한•일 학자들의 모임인 한•일역사공동연구회는 "가 한반도 남부에서 활동했을 수 있지만 임나일본부를 두고 지배했다고 볼 수는 없다"고 의견을 모았다(한일 양국 역사계의 최초 합의 사항.).[60] 그러자 '일본이 드디어 임나일본부설을 폐기했다'는 보도가 잇따랐다. 과연 그럴까. 우선 '왜가 한반도 남부에서 활동했을 수 있지만'이라는 단서가 걸린다.[61] 또 당시 일본학자들의 의견이 일본 정부나 학계의 공식 견해도 아니었다.[62]

역사학자 이희진이나 김현구는 '일본에서 임나일본부설을 폐기했다.'는 건 과거 식민지 지배 시절의 제국주의적 용어, 스에마쓰 야스카즈같이 한반도 남부가 야마토 조정의 직접 지배를 받았다는 남선경영론적 식민사관 학설 주장을 폐기했다는 뜻이지, 고대 야마토 조정은 5세기 한반도 남쪽의 정치 세력에 대해 자국의 영향력을 크게 미치고 있었던 세력이라는 시각까지 포기한 것은 아니라고 지적했다. 어느 쪽으로든 한반도에서 왜는 으로서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었고 그것이 인 한반도 세력(백제, 가야, 신라 등)들의 역학관계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수준이라고 전제하고 역사를 본다는 것이다.

일본 측에서도 통치기구설은 학계 주류에서는 밀려났으며 한일 양국 여러 학자[63]에 의해 이런저런 설이 제기되고 있지만 대체로 외교/교류 업무를 담당한 기관, 기구 혹은 사신이 있었고, 그것의 역할을 과장한 것이 일본서기에 기록된 임나일본부라고 여겨지고 있다. 즉 모태가 되는 실체가 있기는 있되, 무비판적 수용에서 벗어나 가야 사회를 역사적 주체로 복구하는 맥락으로 대체로 의견이 모이고 있다.

일본 중학교과서 중 일부에 임나일본부 관련 서술이 사실인 양 실려있어 논란이 일었다. 관련뉴스.

3. 근거와 논박

3.1. 일본서기의 내용

근거 중 핵심적인 것이 고사기 일부와 《일본서기(日本書紀)》에 적힌 내용이다. 《일본서기》에 의하면 진구황후는 320년 즈음 신라를 복속시키고 369년 왜군을 보내어 초고왕과 함께 7국(國)과 4읍(邑)을 점령하였다고 한다. 임나일본부설을 주장하는 학자들은 이 사건을 통해 임나(任那), 즉 가야에 일본부가 설치되었으며, 562년 신라에 멸망하였다고 한다. 즉 일본은 369년부터 562년까지 약 200년간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으며 중심기관이 가야에 두어진 임나일본부라는 것이다.
冬十月己亥朔辛丑,從和珥津發之。時飛廉起風,陽侯擧浪,海中大魚,悉浮扶船。則大風順吹,帆舶隨波。不勞櫨楫,便到新羅。時隨船潮浪,遠逮國中。卽知,天神地祇悉助歟。新羅王,於是,戰戰慄慄厝身無所。則集諸人曰,新羅之建國以來,未嘗聞海水凌國。若天運盡之,國爲海乎。是言未訖之間,船師滿海,旌旗耀日,鼓吹起聲,山川悉振。新羅王遙望以爲,非常之兵,將滅己國。警焉失志。乃今醒之曰,吾聞,東有神國。謂日本。亦有聖王。謂天皇。必其國之神兵也。豈可擧兵以距乎,卽素旆而自服。素組以面縛。封圖籍,降於王船之前。因以,叩頭之曰,從今以後,長與乾坤,伏爲飼部。其不乾船柂,而春秋獻馬梳及馬鞭。復不煩海遠,以每年貢男女之調。則重誓之曰,非東日更出西,且除阿利那禮河返以之逆流,及河石昇爲星辰,而殊闕春秋之朝,怠廢梳鞭之貢,天神地祇,共討焉。時或曰,欲誅新羅王。於是,皇后曰,初承神敎,將授金銀之國。又號令三軍曰,勿殺自服。今旣獲財國。亦人自降服。殺之不祥,乃解其縛爲飼部。遂入其國中,封重寶府庫,收圖籍文書。卽以皇后所杖矛,樹於新羅王門,爲後葉之印。故其矛今猶樹于新羅王之門也。爰新羅王波沙寐錦,卽以微叱己知波珍干岐爲質,仍齎金銀彩色及綾•羅•縑絹,載于八十艘船,令從官軍。是以,新羅王,常以八十船之調貢于日本國,其是之緣也。於是,高麗•百濟二國王,聞新羅收圖籍,降於日本國,密令伺其軍勢。則知不可勝,自來于營外,叩頭而款曰,從今以後,永稱西蕃,不絶朝貢。故因以,定內官家屯倉。是所謂之三韓也。皇后從新羅還之。

(중애천황(仲哀天皇) 9년(200년))[64] 겨울 10월 기해삭 신축(3일)에 화이진(和珥津: 와니노츠)[65]에서 출발했다. 이때 풍신(風神)이 바람을 일으키고, 해신(海神)은 파도를 치게 하였다. 그리고 바닷속의 큰 고기들이 모두 떠올라 배를 떠받쳤다. 순풍이 불어 범선이 파도를 타니 노를 젓는 수고로움 없이도 곧 신라에 이르렀다. 그때 배를 따라온 파도가 멀리 나라 안에까지 미쳤다. 이 일로 인해서 천신지기(天神地祇)가 모두 도와준 것을 알았다. 신라왕은 전전긍긍하며 어찌할 바를 몰랐다. 여러 사람을 불러 모아 "신라의 건국 이래 바닷물이 나라 안까지 들어온 일은 아직 없었다. 천운이 다해 나라가 바다가 되는 것이 아닌가?"라고 말했다.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수군이 바다를 메우고, 깃발들이 햇빛에 빛나고, 북과 피리소리가 산천에 울렸다. 이 광경을 멀리서 바라보던 신라왕은 뜻밖의 군사들이 나타나 장차 신라를 멸망시키려 하는 것이라 여기고 두려워 전의를 상실했다.

마침내 정신을 차리고 "내가 들으니 동쪽에 신국(神國)이 있는데, 일본(日本)이라고 한다. 또한 성왕(聖王)이 있는데 천황(天皇)이라고 한다. 반드시 그 나라의 신병(神兵)일 것이다. 어찌 군사를 내어 방어할 수 있겠는가."라고 말하고 백기를 들어 항복하였다. 흰 줄을 목에 드리우고 두 손을 뒤로 묶고, 도적(圖籍)을 바치고 왕선 앞에서 항복하였다. 그리고 머리를 조아리고 "지금 이후부터 길이 천지와 함께 복종하여 사부(飼部: 미마카이)가 되겠습니다. 배의 키가 마를 사이 없이, 춘추로 말빗과 말채찍을 바치겠습니다. 또한 바다를 사이에 두고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것을 꺼리지 않고 해마다 남녀의 조(調)를 바치겠습니다."라고 말하였다. 그리고 거듭 맹세하여 "동쪽에서 떠오른 해가 서쪽에서 떠오르는 일이 없는 한, 또 아리나례하(阿利那禮河)가 역류하고 강의 돌이 하늘에 올라가 별이 되는 일이 없는 한, 춘추로 조공을 거르거나 태만하여 말빗과 말채찍을 바치지 않는다면 천신지기여, 벌을 주십시오."라고 말하였다. 그때 어떤 사람이 "신라왕을 죽이십시오."라고 말하였다.

이에 황후가 "처음에 신의 가르침에 따라 장차 금은의 나라를 얻으려고 하였다. 또 3군에 호령하여 '스스로 항복하여 오는 자는 죽이지 말라.'고 말한 바 있다. 지금 이미 재국(財國)을 얻었다. 또한 사람들이 스스로 항복하였다. 죽이는 것은 상서롭지 못하다."라고 말하고, 결박을 풀어 사부(飼部: 미마카히)의 일을 맡겼다. 드디어 그 나라 안에 들어가 중보(重寶)의 곳간을 봉인하고 도적문서(圖籍文書)를 거두었다. 그리고 황후가 가지고 있던 창을 신라왕문에 세우고, 후세에 표시로 삼았다. 그 창은 지금도 신라의 왕문 앞에 세워져 있다.

신라왕 파사매금(波沙寐錦: 하사 무키무)[66]은 즉시 미질기지파진간기(微叱己知波珍干岐: 미시코치하토리칸키)[67]를 인질로 삼아 금은채색(金銀彩色) 및 능라겸견(綾羅縑絹)을 80척의 배에 실어 관군을 따라가게 하였다. 이로써 신라왕은 항상 배 80척의 조공선을 일본국에 바치게 되었는데 이것이 그 연유이다. 이에 고구려(高麗)와 백제 두 나라 왕은 신라가 도적(圖籍)을 거두어 일본국에 항복하였다는 것을 듣고 몰래 그 군세를 엿보게 하였다. 그리고 도저히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알고는 스스로 영외로 나와서 머리를 조아리며 "지금 이후부터는 길이 서번(西蕃)이라 일컫고 조공을 그치지 않겠습니다."라고 말하였다. 이로써 내관가(內官家)로 정하였다. 이것이 이른바 삼한(三韓)이다. 황후가 신라에서 돌아왔다.

그런데 이 기록은 사실 역사적 사실이라고 보기에는 걸리는 문제점이 한둘이 아니다. 우선 《일본서기》란 책 자체가 위서까지는 아니지만 고대 일본제국 및 천황숭배 내용으로 점철되었다. 동기부터가 신라가 어디 있는지도 모르는 마당에 대뜸 접신해서는 '금은비단이 넘치는 나라가 저기 있다' 하니 쳐들어간다. 마침 진구황후가 유복자를 임신한 상태였는데 애가 막 나오려 하니까 돌을 소매 or 허리춤에 끼우고 주문을 외워 출산을 늦추고, 그렇게 어찌어찌 바다를 건너가니까 신라가 밀물에 잠겨버린다. 신라가 밀물에 잠기자 신라왕이 놀란 나머지 알아서 항복한다.[68] 게다가 고구려의 별칭인 고려는 장수왕 시절 성립한 국호로 그 당시 있지도 않는 국명이었다. 일본서기에서 7-8세기 일본이라는 국호가 성립되었는데, 그 이전부터 일본이나 천황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처럼 시기적 오류가 많다.

버전에 따라서는 신라왕의 무릎뼈를 뽑고 돌에서 기게 하다가 목까지 베었다는 기록도 있다. 갈문왕이던 석우로를 죽인 것을 과장했다. 그리고 신라의 항복을 본 고(구)려[69]와 백제가 지레 겁먹고 항복한다. 그리고 고구려와 백제의 국왕이 스스로를 서번 (오랑캐라고) 칭한다.[70] 게다가 그때 신공황후(神功皇后.진구황후) 가 꽂은 창이 아직도 신라 궁궐 문 앞에 있다고 한다. 하지만 약 46년 후의 기록인 366년 기록을 보면 백제는 왜국과 마치 처음 통교하는 것처럼 묘사하는 기사가 나온다.[71]
卌六年 春三月乙亥朔,遣斯摩宿禰于卓淳國[斯麻宿禰者, 不知何姓人也.]. 於是, 卓淳王末錦旱岐, 告斯摩宿禰曰, 甲子年七月中, 百濟人久氐•彌州流•莫古三人, 到於我土 曰, 百濟王, 聞東方有日本貴國, 而遣臣等, 令朝其貴國。故求道路, 以至于斯土。若能敎臣等, 令通道路, 則我王必深德君王。時謂久氐等曰, 本聞東有貴國. 然未曾有通, 不知其道, 唯海遠浪嶮。則乘大船, 僅可得通。若雖有路津, 何以得達耶. 於是, 久氐等曰, 然卽當今不得通也。不若, 更還之備船舶, 而後通矣。仍曰, 若有貴國使人來, 必應告吾國。如此乃還。

(신공 섭정) 46년 봄 3월 을해삭(1일)에 사마숙녜(斯摩宿禰)를 탁순국(卓淳國)에 파견하였다[사마숙녜의 성(姓)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다.]. 이때 탁순왕(卓淳王) 말금한기(末錦旱岐)가 사마숙녜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갑자년(甲子年)[72] 7월 중에 백제인 구저(久氐), 미주류(彌州流), 막고(莫古) 세 사람이 우리나라에 와서 ‘백제왕은 동방(東方)에 일본이라는 귀국(貴國)이있다는 말을 듣고 신들을 보내 귀국에 조공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래서 길을 찾다가 이 땅에 이르렀습니다. 만약 신들에게 길을 가르쳐 통할 수 있게 해준다면 우리 왕은 반드시 군왕(君王)에게 깊이 감사할 것입니다.’라고 말하였다. 그때 왕이 구저 등에게 ‘본디 동쪽에 귀국이 있다는 것을 들은 바 있지만, 아직 왕래한 적이 없기 때문에 그 길을 알지 못한다. 다만 바닷길이 멀고 파도가 거칠어서 큰 배를 타고서야 겨우 왕래할 수 있을 것이다.[73] 비록 길이 있다고 해도 어찌 능히 도달할 수 있겠는가?’라고 말하였다. 이에 구저 등이 ‘그러면 지금 당장은 건너갈 수 없겠습니다. 다시 돌아가 선박을 준비한 다음에 왕래하는 것이 좋겠습니다.’라고 말하였다. 또한 ‘만약 귀국의 사신이 오면 반드시 우리나라에 알려주십시오.’라고 당부하고 이내 돌아갔다.”

놀랍게도 상술한 신공 섭정 46년조[74] 기사와 주아이 9년조 삼한정벌[75]의 기사는 같은 일본서기에 서술된 내용이다. 신공황후가 신라를 점령할 때 본인이 직접 나와 항복의사를 밝히고 스스로 서번이라고 밝혔는데, 정작 46년 후에는 마치 왜국과 처음 통교하는 것처럼 묘사하고 있으며 심지어, 어떻게 당도해야 하는지도 모른다. 단지 동방에 일본이라는 귀국이 있다는 말을 듣고서 사신을 파견한 것이다. 이처럼 일본서기의 내용은 뒤죽박죽이고 횡설수설하는 내용이 많다. 이야기 자체가 지나치게 신화 - 전설의 경향이 강한지라 스에마쯔 이후로 이 기록을 믿는 사람들은 그저 데꿀멍이 되었다. 더구나 진구황후 본인부터가 아버지보다 먼저 태어나서 활동하고, 《일본서기》에 일본에 항복하거나 죽였다는 신라의 지배층들은 진구황후의 생존시기와 전혀 안 맞는다. 진구 황후 문서 문서 참조.

이주갑인상을 감안하여, 일어났던 시기를 4~5세기로 상정하고 사료를 분석하면, 일본에 간 인질 미사금이 등장하는 것은 맞다. 하지만 그마저도 당대의 신라왕으로 등장하는 파사매금(波沙寐錦)은 서기 80년쯤에 신라를 다스렸다는 파사 이사금과 표기가 비슷하다. 파사 이사금이라면 신공황후의 등장기인 3세기 무렵이나 이주갑인상을 감안하여 보정한 4-5세기 사람이 아니다. 후대의 미사흔의 인질 기록을 보고 짜집기 했다고 추정하는 이유. 분명히 일본서기에는 신라를 정벌한 기사는 신공황후 즉위 전기로 200년 10월 3일의 기사이다. 물론 선술했듯이, 일본서기의 연대기는 신뢰할 수 없고 교차검증이 되지 않는데, 근초고왕의 사망기록을 대조하고 교차검증을 해보면, 일본서기의 기술이 120년을 끌어올렸음을 알 수 있다. 고로 200년이라고 적혔지만, 실제로 일어났다고 추정할 수 있는 연도는 320년이다.[76] 문제는, 320년의 기록에 일본서기에서 말하는 정벌 기사를 교차검증 해줄수 있는 자료가 단 한 개도 없다는 것이다. 다만, 일본학자들은 광개토대왕릉비와 미사흔의 인질 파견등을 거론하며 근거로 내세우긴 하지만, 광개토대왕릉비의 신묘년 기사는 391년으로 시대차이가 너무난다. 미사흔의 인질 파견도 402년에 일어났다. 백번 양보해서 320년대 인근이 아니라고 치고, 확장해서 4~5세기의 신공황후 활동기로 추정되는 당대의 기록을 삼국사기로 조사하면, 왜국이 신라를 정복한게 아니라, 오히려 역으로 신라원정을 왔다가 처참히 격파당하고 패주하는 것이 346년, 364년, 393년, 405년 신라본기에 적혀있다.
三十七年,倭兵猝至風㠀,抄掠邊戸。又進圍金城急攻。王欲出兵相戰,伊伐湌康世曰,「賊遠至,其鋒不可當,不若緩之,待其師老。」 王然之, 閉門不出, 賊食盡將退。命康世率勁騎追擊走之。

(홀해이사금) 37년(346) 왜병(倭兵)이 갑자기 풍도(風島)에 이르러 변방의 민가를 노략질하였다. 또 진군하여 금성(金城)을 포위하고 급하게 공격하였다. 왕이 군사를 내어 상대하여 싸우고자 하였으나 이벌찬(伊伐湌)강세(康世)가 말하였다. “적은 멀리서 왔으므로 그 날카로운 기세를 당해낼 수가 없으니, 그것을 늦추었다가 그 군사가 피로해지기를 기다리는 것만 못합니다.” 왕이 그렇다고 여겨 문을 닫고 나가지 않으니 적은 식량이 다해 물러가려 하였다. 강세에게 명하여 굳센 기병을 거느리고 추격하여 그들을 쫓았다.
九年,夏四月,倭兵大至,王聞之, 恐不可敵, 造草偶人數千, 衣衣持兵, 列立吐含山下。伏勇士一千於斧峴東原。倭人恃衆直進,伏發擊其不意。倭人大敗走,追擊殺之幾盡。

(내물마립간) 9년(364) 여름 4월에 왜군이 대거 침입해 왔다. 복병으롤 물리치고 그들은 대패하고 도주했다. 한층 추격하여 전멸 근처까지 몰아넣었다
三十八年,夏五月,倭人來圍金城,五日不解。將士皆請出戰,王曰,「今賊弃舟深入,在於死地,鋒不可當。」 乃閉城門。 賊無功而退, 王先遣勇騎二百, 遮其歸路, 又遣歩卒一千, 追於獨山, 夾擊大敗之, 殺獲甚衆。

(내물마립간) 38년(393) 여름 5월에 왜인을 포위하고 5일 동안 풀지 않았다. 장수와 병사들이 모두 나가 싸우기를 청하였으나, 왕이 “지금 적들은 배를 버리고 깊숙이 들어와 사지(死地)에 있으니 그 날카로운 기세를 당할 수 없다.”고 말하고 이내 성문을 닫았다. 적이 아무 성과없이 물러가자 왕이 용맹한 기병 2백 명을 먼저 보내 그 돌아가는 길을 막고, 또한 보병 1천 명을 보내 독산(獨山)까지 추격하여 합동으로 공격하니 그들을 크게 물리쳐서 죽이거나 사로잡은 사람이 매우 많았다.
四年,夏四月,倭兵來攻明活城,不克而歸。王率騎兵,要之獨山之南,再戰破之,殺獲三百餘級。

(실성마립간) 4년(405) 여름 4월에 왜병(倭兵)이 와서 명활성(明活城)을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하고 돌아갔다. 왕이 기병을 이끌고 독산(獨山)의 남쪽 길목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두 번 싸워 그들을 격파하여 3백여 명을 죽이거나 사로잡았다.

일본서기》 자체에서도 문제가 있다. 임나일본부를 일본 천황의 명령으로 일본이 식민지를 만들었다는 임나일본부설과는 달리 정작 《일본서기》 본문에는 '가야를 정벌해 임나일본부를 세운 세력은 철저하게 백제의 장군 목라근자와 백제의 군사들'이라고 기록되었다.[77] 가야사 연구자인 김태식 교수에 의하면 목라근자와 함께 원군으로 파병간 사사노궤 또한 백제식의 이름으로 백제인이라고 추정한다. 거기다 일본이 임나일본부를 통제한다면 무엇인가 임나에 요구사항이 있을 경우 그쪽에 직접 명령하면 될 터인데, 뭔가 임나에 요구사항이 있으면 일본은 죄다 백제왕을 거쳐서 간접적으로 얻어내지 직접 요구를 전혀 못한다. 실제로 한일 학자들의 토론시 일본 학자가 태클걸었다가 이 때문에 한국학자한테 데꿀멍당한 적도 있다. 목라근자의 자손은 후에 일본으로 귀순하여 일본 소가씨의 시조가 된다는 가설이 있다. 이 때문에 일본에서 임나를 자기들의 땅으로 인식했다는 주장도 있다.[78][79] 다만 목라근자가 가야정벌 기사에 나올때는 백제인이라고 명시 했으나, 그의 아들 목만치는 일본서기 294년 기사에는 大倭의 신하라고 기록돼있다. 고로 목만치는 후에 왜로 이주했는데 이것을 소급 적용해서 왜의 관료라는 식의 윤색을 했던 것은 사실로 보인다.

일례로 흠명천황 4년( 543년) 11월 8일의 가사를 보면, 백제에게 임나에서 백제의 성주와 군령의 추방을 백제 왕에게 부탁한다던가, 또한 일본서기 흠명 9년(548년) 기사를 보면, 왜왕이 백제왕에게 고구려의 임나 침공에 대비해, 방비를 당부하는 서신을 보내기도 했다. 일본인들이 말버릇처럼 얘기하는 가야는 일본이 통치하는 곳이다. 그런데 왜 가야의 통치자에게 서신을 보내 백제와 협력하라고 말하지 않고 구태여 백제왕에게 서신을 보내 제3자가 구경하듯이 말을 하는가?

파일:백제에 사신을 보내 고구려 당부.jpg

<흠명 9년, 548년 6월>
六月辛酉朔壬戌,遣使詔于百濟曰,德率宣文,取歸以後,當復何如。消息何如。朕聞,汝國爲狛賊所害。宜共任那,策勵同謀,如前防距。

박적(狛賊)[80]이 백제를 침공 했다고 들었다. 임나와 잘 논의하여 이전과 같이 잘 막아라[81]

<일본서기 601년 (추고9년) 3월 5일>
三月甲申朔戊子,遣大伴連囓于高麗,遺坂本臣糠手于百濟,以詔之曰,急救任那。

3월 갑신삭 무자(5일)에 대반련설(大伴連囓;오오도모노무라지쿠이)를 고구려에 파견하고, 판본신강수(坂本臣糠手;사카모토노오미누카테)를 백제에 각각 파견하여 고하기를 “급히 임나를 구하라.”고 말하였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신라로부터 임나를 구하라고 백제와 고구려에게 급히 사신을 파견해 명령을 하는데, 왜왕의 조칙을 보낸 발송지는 가까운 임나가 아니라 일본 본국이다. 차라리 그렇게 조칙을 보낼 정도라면 일본 본국에 있는 정규군을 파병하는게 나을뻔 했을 것이다. 자신들의 군대가 항시 주둔하는 직할령인데 왜 백제와 고구려에게 부탁하며, 고구려에게 사신을 보내어 부탁할 바에야 자신들이 직접 구원병을 파견하는게 더 빠르고 안전한 방법인데, 역사에 대한 아무런 지식도 없는 일반인들 조차도 논리적로 납득하기 어려운 엉터리 윤색이다. 또 일본서기에서 이르길 임나는 이미 6세기 중반 신라에 의해 멸망했는데, 수십년 후인 601년에 버젓이 살아 돌아온다.

일본 남북조시대(1336~1392)에 《일본서기》와 같은 목적으로 편찬된 신황정통기에서는 진구황후의 삼한 정벌설을 기록하면서, 주석에 '고구려 / 백제 / 신라가 진구황후에게 복속했다는 것은 조상님들이 삼국을 삼한이라고 불렀던 데서 착오가 있었고, 고로 삼국이 아니라 신라만 지배한 것이다.[82]' 이라 기록했고[83], 그마저도 《일본서기》에서 삼국을 삼한으로 본 기록과 중국 사서의 내용을 요상하게 뒤섞어 진한/마한/변한을 합하여 신라라고 부른다고 잘못 적었다. 이후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 사학계에서는 진구황후의 삼한 정벌론에 대해 사로 검증을 통해 비판하는 여론이 있었으나, 제국주의에 덮였다.

또 추고 9년[84]를 보면, 임나가 신라에게 침공받자, 뜬금없이 고구려에게 사신을 보내 임나를 구하라고 요구하는 기록도 나온다.

3.1.1. 일본서기의 위치 설명 대목

일본서기》에는 임나의 위치를 이야기하는 대목이 있는데 북쪽이 바다로 막혀있다는 내용이 써져 있어서 임나가 한반도 영토가 아니라 대마도일 것이라고 추측하는 학자들도 생겨나고 있다. 이러한 학설을 주장하는 곳으로는 대표적으로 인하대 연구팀 등이 있다.
六十五年秋七月,任那國遣蘇那曷叱知,令朝貢也。任那者,去筑紫國二千餘里,北阻海以在鷄林之西南.

65년 가을 7월 임나국이 소나갈길지를 보내 조공하였다. 임나는 축자국[85]에서 2000여 리 떨어져 있고, 북쪽은 바다로 막혀 있으며 계림(신라)의 서남쪽에 위치하고 있다.
일본서기》, 스진 덴노 65년
알다시피 반도 위로는 만주한카호러시아 바이칼 호를 제외하고 바다로 부를 만한 물은 하나도 없다. 게다가 방위를 보면 계림의 서남쪽인데 이 밑은 바다가 맞다. 즉,《일본서기》에서 말하는 임나가 한반도가 아니라 남해상의 섬으로 추정되는 것이다. 이 일본서기에 명시된 지리적 기록에 부정할 여지는 찾을 수 없기 때문에, 임나일본부설 옹호론자들은 다음 세 가지 설을 들어 이를 변론하였다.

이외 일본서기의 한반도 관련 기사는 일본서기/한반도 관련 기사를 참조.

3.2. 일본이라는 국호가 등장한 시기상의 오류와 신빙성

또한 임나일본부에서 나온 일본(日本)이라는 단어는 7세기 이후에나 쓰였다. 5세기 장수왕이 만든《호태왕비(好太王碑)》에도 '일본'이라는 단어는 나오지 않으며 '왜' 혹은 왜구로 표기했다. 본래 일본의 국호는 왜(倭)였고, 국호를 일본(日本)으로 정한 것은 아무리 빨라도 '임나일본부'가 있었다고 비정하는 시대보다 한참 후대인 7세기 덴무 덴노(673~686) 때로 본다. 실제 일본이란 국호가 일본의 공식 국호로 정식 사용된 시기 또한 서기 701년 다이호 율령 때이다.

다이카 개신 이후 국명을 일본으로 칭한 것에 대해 다시 견신라사, 견당사가 그에 대해 해명하고 다닌 것을 보면, 발음문제를 떠나 사서 상으로[88] '일본'이란 공인된 국호는 임나일본부설이 나오는 시기와 연관 짓기란 어렵다. 또한 기록 자체가 일본 국호를 사용한 뒤인 후대에 정리되면서 과장된 쪽으로 윤색되었을 가능성은 뚜렷이 제시할 수 있다. 일본부란 단어는 《일본서기》에 나타난다.

또한 일본을 귀국[89]이라고 표현하고 신라나 백제의 사신이 자신의 나라를 칭할 때는 신국[90]이라고 칭하는 등, 천황의 신격화가 본격화된 시점의 명칭을 사용하는 등 걸러들어야 할 것이 많다. 일본어 위키백과 사전의 해설은 이렇다.
また、『神功紀』・『応神紀』の注釈に引用された『百済記』には、「新羅、貴国に奉らず。貴国、沙至比跪(さちひこ)を遣して討たしむ」など日本(倭国)を「貴国」と呼称する記述がある[76]。山尾幸久は、これまでの日本史学ではこの「貴国」を二人称的称呼(あなたのおくに)と解釈してきたが、日本書紀本文では第三者相互の会話でも日本のことを「貴国」と呼んでいるため、貴国とは、「可畏(かしこき)天皇」「聖(ひじり)の王」が君臨する「貴(とうとき)国」「神(かみの)国」という意味で、「現神」が統治する「神国」という意識は、百済三書の原文にもある「日本」「天皇」号の出現と同期しており、それは天武の時代で、この神国意識は、6世紀後半はもちろん、「推古朝」にも存在しなかったとしている]

또 『신공기』•『응신기』의 주석에 인용된『백제기』에는 "신라, 귀국에 모시지 않겠다. 귀국, 사지히코(沙至比跪)를 써서 쳐부수다' 등 일본(왜국)을 '귀국'이라고 호칭하는 기술이 있다[76]. 야마오 유키히사(山尾幸久)는, 지금까지의 일본사학에서는 이 「귀국」을 2인칭적 칭호(귀국)로 해석해 왔지만, 일본서기 본문에서는 제3자 상호의 회화에서도 일본을 「귀국」이라고 부르고 있기 때문에, 귀국이란, 「가외 천황」 「성(聖)의 왕」이 군림하는 「귀국」 「신(神)나라」 「신(神)나라 후반에도 「천황」이라고 하는 의식은, 백제 3서의 원문에도 있는 「일본」 「천황」의 출현으로 같은 시기에 존재 되어 있으며 (같은 시기에 사용하고 있는), 그것은 천무천황의 시대로(시대에 비로소 생겨난 개념이라는 뜻) 이 천조(천손의식, 신국인식)의식은 6세기 후반은 물론 추고천황 집권기에도 성립(존재)하지 않는 단어들이다.

일본서기에서 4~6세기 이전의 기록들은 일본서기가 아니라 백제서기라고 불릴 만큼 백제와 한반도 및 관련 기사가 일본 국내의 기록보다 방대한 양을 차지하는 이유가, 위에 서술된 문자가 도입된 시기와 관계가 있음을 알 수 있다. 당연히 일본은 당대에 문자가 없으니, 원래 일본 국내의 절대적인 기록도 부족한데 여기에 이주갑인상이라는 조작을 통해 연대를 뻥튀기 했으니, 그 빈자리에는 백제 삼서의 기록이 차지할 수밖에 없다. 일례로 일본서기의 이주갑인상이 된 기사는 죄다 한반도 관련 기사이고, 특히 백제와 관련된 기사임을 알수 있다.

이주갑인상이 생겨난 이유도 일본서기에서 전하는 백제가 고구려에게 멸망 했다는 5세기 중반에 망명간 백제의 지배층들이, 왜국에서 정착하고, 사서의 편찬이라는 국가사업에 관여되어서 자신들의 조상이 백제 신하로 이룩한 업적을 소급해서 마치 일본이 이룩한 일로 곡해했을 것이라는게 중론이다. 그리고 자신들이 가져온 사서와 단편적인 문헌을 일본의 문헌이나 자료들과 비교하자니, 백제보다 훨씬 짧은 왕조 역사와 비루한 기록을 의식했기 때문에 이주갑인상이라는 조작을 했을 것이라는 해석이다. 당연히 가뜩이나 일본은 당대에 남겨진 문헌은 압도적으로 적은데 120년을 뻥튀기 했으니, 그 공백은 백제삼서를 인용해 때우는 식 밖에 없다.

실제로 이주갑인상이 발생한 4-6세기의 기록에서는 일본 국내 기록은 매우 적고 죄다 백제삼서의 기록을 인용하며 그 내용은 죄다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 기록이다. 이에대해 일본측 사학자인 이노우에(井上秀雄) 교수는 “임나일본부의 명칭은 ‘일본서기’에 있어서 신라 백제계의 사료에만 있고 일본 측의 사료에는 일본부의 명칭이 없다. 이와 같은 불확실한 사료를 기초로 임나일본부의 조직을 추측할 수 없다. 임나일본부는 본래 임나에 토착한 일본인의 정치연합이요 일본정부와 관계없다”고 주장했다.[91]

또한, 일본은 한자를 수용하기 이전에는 문자가 없었다. 한자를 본격적으로 수용하기 시작한 시기는 5-6세기라고 본다.

수서(隋書)에서는 이렇게 설명한다.
沒水捕魚 無文字 唯刻木結繩 敬佛法 於百濟求得佛經 始有文字
물속에 들어가 고기를 잡는다. 글자는 없고 나무에 균열을 만들거나 새끼줄을 묶어 기록할 뿐이다. 불교를 숭상하여 백제에게 불경을 구하니 비로소 글자가 생겼다.

고로, 일본서기에 문자가 생기기 이전의 일들 즉 5-6세기 이전의 기록은 구전에 의존한 것이으로, 사전적 정의로 역사라고 말하기 어렵다. 따라서 시대를 거치면서 점차 각색되고 살이 붙어 과장 내지는 없던 사실을 신화마냥 부풀려서 전했다고 추정할 수 있다. 일본어 위키백과의 일본서기 항목의 서술도 수서의 기사를 인용하며 5-6세기 이전의 문자는 없으며 단지 口承(구전)에 의존한 기록이라고 한다.[92] 문자가 생긴 시점은 놀랍게도, 일본서기에서 대략적으로 사료로써 신뢰할 수 있다고 판단하는 5-6세기의 일이다.

이에 한술 더 떠서, 일본어 위키백과는 원래 기억과 구전으로 전해진 것들을 6세기에 집대성해서 8세기에 이르러 편찬했다고 설명한다.
『日本書紀』は日本の現存最古の「正史」とされるが、その編纂までには日本における文字の使用と歴史的記録の登場の長い歴史があった。日本(倭)における歴史、即ち過去の出来事の記憶についての記録としてまず言及されるのは「帝紀」(大王家/天皇家の系譜を中心とした記録)と「旧辞」(それ以外に伝わる昔の物語)である[12]。これらは津田左右吉が継体・欽明朝(6世紀半ば)の頃に成立したと提唱して以来、様々な議論を経つつも、元々は口承で伝えられていた伝承が6世紀にまとめられたものと一般的には考えられている[13][14][15]。さらに、文字に残された系譜情報を「史書」として見るならば、雄略朝(倭王武、ワカタケル大王、5世紀後半)にはその種のものが存在していたことが稲荷山鉄剣銘の存在によってわかる[16]。

분명히 일본이라는 국호는 7세기에 말엽에나 생겼는데 BC 408년의 일본서기 기록을 보면 황태자 이름이 日本足彦國押人尊이다. 데꿀멍...
六十八年 春正月丁亥朔庚子,立日本足彦國押人尊,爲皇太子。年廿。天足彦國押人命,此和珥臣等始祖也。
68년 봄 정월 정해삭 경자(14일)에 일본족언국압인존을 황태자로 하였다. 나이 20세였다. 천족언국압인명은 화이신(和珥臣;와니노오미) 등의 시조다.

이것을 보면 일본서기는 문자가 생기기 이전의 5-6세기의 이전의 일은 후대에 창작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후대에 윤색과 날조를 덧붙인 기사의 시대와 황태자의 이름을 보면 무엇을 위해 이런 거짓말을 했는지는 명백하다.

3.3. 칠지도

일본서기》에서 백제가 일본에 '칠지도'와 '칠자경'을 헌상했다는 기록이 있는데[93] 근대에 이소노카미 신궁(石上神宮)의 신고에서 칠지도가 실제로 확인되었다. 이를 두고 일본학자들은 번국(蕃國) 백제가 야마토 왕권에 칠지도를 바친 것이라고 해석했었다.

당연하지만 이를 바탕으로 일본학자들은 '칠지도가 기록된 《일본서기》가 신뢰성이 있으니 임나일본부설도 분명 사실일 것'이라고 처음엔 생각했었다. 그런데 막상 추후에 확인한 결과 칠지도에 적힌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泰○四年十一月十六日丙午正陽造百鍊(鐵)七支刀(出)辟百兵(宜)供供候王○○○○作. 先世以來未有此刀百濟王世子奇生聖音故爲倭王旨造傳示後世.

태화 4년 5월 16일 병오일의 한낮에 백 번이나 단련한 철로 된 칠지도를 ○○○○가 만들었다. 온갖 적병을 물리칠 수 있으니 제후국의 왕(侯王)에게 주기에 알맞다. 지금까지 이런 칼이 없었는데 백제 왕세자 기생성음이 일부러 왜왕을 위하여 정교하게 만들었으니 후세에 전하여 보이라.
칠지도(七支刀, Seven-pronged Sword), 시사상식사전, 박문각

어떻게 해석하더라도 높은 사람이 낮은 사람에게 하사하는 물품에 적힐 만한 내용이다. 하지만 앞에 나오는 문장의 泰○(태○)를 태화(泰和=太和)라고 보고 어거지로 문제삼아 일본학자들은 지금도 애를 쓰며 동진이 백제를 통하여 일본에 하사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렇지만 이 주장은 단순히 생각해봐도 논리적으로 구멍이 매우 많은 허술한 가설이고 정작 일본서기에서는 백제 영내에 있는 곡나철산(谷那鐵山)에서 채취한 철을 원료로 제련해서 제조한 검이 칠지도라는 사실을 분명히 명시했다. 그러므로 '칠지도 중국 동진 하사설'은 쉽게 논파된다. 더 자세한 사항은 해당항목을 참조.

3.4. 중국 역사서의 왜왕 책봉 기사

한편 중국 남조(南朝)의 (宋), (齊), (梁) 나라의 역사기록에 나오는 왜왕의 책봉 기사도 일본 학자들이 근거로 든다. 여기에는 왜왕이 '왜백제신라임나진한모한제군사왜국왕(倭百濟新羅任那秦韓慕韓 諸軍事倭國王)'이라는 관작(官爵)을 인정해줄 것을 요청하였고, 송에서는 백제를 제외한 나머지 지역에 대한 왜의 지배권을 인정하는 듯한 칭호를 하사해주었다고 나온다. 왜왕은 최초에 임나 모한(마한) 진한 신라 백제의 명칭을 요구 했으나 백제가 빠진뒤 가라(가야)로 대체된다. 자세한 내용은 왜5왕 문서를 참조하자

그러나 왜왕의 책봉에 대해서는, 당시 가야와 신라가 중국 남조와 통교하는 부분에서 별로 활발하지 못했기에 남조에서는 사정을 잘 알지 못했을 것이며, 이를 왜에서 차지하지도 않은 땅을 언론플레이용으로 책봉명에 갖다붙인 것이라고 반박한다. 신라의 조공 기록은 377년과 382년에야 처음 등장하는데, 이 또한 고구려를 거쳐서 이루어졌을 것으로 보고 있으며, 그나마도 북조인 전진에 대한 조공 기록이다.[94][95]

이러한 예는 중국의 책봉 사례에서 수도 없이 발견된다. 대표적으로 진덕여왕은 '신라낙랑군왕'으로 책봉되었는데, 낙랑은 정작 고구려의 수도인 평양에 있었다. 백제의 위덕왕 또한 '동청주지사'라는 책봉명을 받았는데, 동청주는 참고로 '중국 산둥지방'이었다. 산둥경략설? 이러하듯이 남의 영토 이름을 책봉명으로 하사받는 일은 당시에 매우 흔했다.

남조에서 내린 작위에는 본래 일본이 요구했던 작위 명에서 백제가 빠졌다. 백제와는 이미 교류하면서 어느 정도 안면이 있었으니 '일본이 백제를 거느리고 있다'고 굳이 써서 외교 관계에 지장이 생길 일은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여기까지 읽어보면 알 수 있겠지만 남조가 내려준 저 관작명은 그냥 왜국측의 허세라고 보는게 옳다. '수서 왜국전'과 '송서 왜국전'에 분명 일본측에 유리한 내용이 나오는 것은 사실이다.[96] 정확히 가 지속적으로 자칭하고 당시 중국에게 인정해달라고 요구한 관작명은 '사지절도독왜.백제.신라.임나.진한.모한육국제군사안동대장군왜국왕'이었다. 그런데 왜왕 '제'와 '무'에 이르러서는 '사지절도독왜.신라.임나.가라.진한.모한육국제군사안동대장군왜국왕'으로 '가라(가야)'가 추가된다. 아마도 백제를 제외하고 나니깐 대신에 가라를 넣어줄게 하고 삽입한 모양이다. 그리고 중국 또한 실제로 '사지절도독왜.신라.임나.가라.진한.모한육국제군사'라는 관작을 내려주었다.

하지만 왜나라가 요청하고 중국이 인정해준 '사지절도독왜.신라.임나.가라.진한.모한육국제군사'라는 관작명을 보면 왜나라가 요구한 관작명에 있던 나라들 가운데 하나가 혼자 빠져있는 걸 알 수 있다. 바로 백제이다. 백제는 중국 남조와 교류가 활발했고 백제는 중국 남조와 지속적인 교류로 선진문물을 일찍이 받아들이고 강력하게 성장을 한 상황이었다. 당시 백제가 받았던 '진동대장군'이라는 직위는 정확히 일본이 받았던 '안동장군'[97]이라는 직위보다 네 단계 더 높은 직위였는데[98][99], 이것은 당시 일본이 백제를 지배하고 있었다(?)는 황당한 주장과는 완전히 정반대의 근거이다. 제군사직 자체로도 백제왕의 관직인 장군호보다 한 등급 아래의 직위라고 한다. 이왕 자칭하는 거 백제보다 높은 작위를 요구했을수도 있지만, 그렇게 하지 않은 것은 왜왕 스스로도 백제왕보다 자신이 하위라는 것을 인정하는 꼴이다. 게다가 한번도 아니고 여러번 같은 작위를 자칭하고 하사해달라고 요구했는데 이 사실 자체가 한반도 남부를 통치했다는 사실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럼에도 당시 왜는 무개념하게도 백제에 자신들의 영향력이 있다는 황당한 주장을 중국측에 마구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백제와의 잦은 교류로 백제의 국력을 이미 알고 있던 중국 남조는 일본이 달라고 자칭한 관작명에서 백제를 아예 제외시킨다. 처음에는 백제 신라 모한(마한) 임나 진한의 지명을 요구하지만 완전히 거부 당했다. 제차 조공하며 직위를 요구하자 백제는 제외시키고 대신 가라(가야)를 포함시킨다. 한마디로 일본이 요구한 관작명은 그저 정신승리용 허울뿐인 관작이었다는 것이다.

또한 왜나라가 자칭하고 당시 중국이 인정해준 '사지절도독왜.신라.임나.가라.진한.모한육국제군사'라는 관작명을 보면 '진한'과 '모한'이 나온다. '모한'은 '근초고왕'때까지 전라남도와 규슈 지방에 세력을 떨치던 '마한의 후손'이었고 '진한'은 당시에 이미 없어진 나라였다. 시기상으로 맞지 않는 국가의 이름이 나온 것으로 보아 허울뿐인 작위라는 것을 다시금 알 수 있다. 그러나 현재의 통설은 전라도 지역에서 발굴되는 전방후원분의 영향으로 마한은 꽤 오랜 시간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했고 6세기 무렵까지 유지 했을 것이라고 보는게 대세이다. 애초에 백제 멸망 시기와 개로왕이 전사한 것을 보면, 백제는 군사 편제 시스템도 개판에다가 지방호족들에게 많이 휘둘리던 나라였다. 4세기 말부터 6세기 후기까지 일어나는 일련의 백제왕 암살 사망 사건들을 상기해보자. 그러므로 근초고왕 시절에 마한을 복속시켰다라는 해석은 주류학계에서도 많이 일축하는 경향이 있다. 중국 황실도 처음에는 왜왕의 무리한 요구를 몇차례 고사하다가 451년에 이르러 백제를 제외한 작위를 하사한 이래로 왜5왕에게 계속 같은 관직을 하사했다

거기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임나'는 분명 '가야'라고 했다.[100][101] 그런데 어째 일본이 요구한 관작명이나 중국이 하사해준 관작명에는 '임나'와 '가야'가 서로 다른 나라로 따로 나오고 있다. 일본서기와 순수한 임나일본부설을 따른다면 '임나'와 '가야'는 분명 같은 나라가 되어야만 한다. 그럼에도 임나와 가야를 다른 국가로 취급해서 '육국'[102]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중국 황실에서 집요하게 자신이 '육국 제국사'라고 주장하는 왜국의 주장을 대충 인가(認可)해줬다라는 것으로 추정한다. 그리고 또 임나와 가야는 같은 국명이라는 것을 인지하고도 정정요구도 하지 않고 그 관작을 그대로 받은 왜왕은 허울뿐인 직위에 집착했다고 해석할 수밖에 없다. 혹 왜왕이 이 오류를 인지하지도 못했다고 하면, 스스로 통치하는 나라의 실정도 전혀 모르고 있었다는 반증으로 임나일본부설은 완전한 허구로 취급받을 수밖에 없다.

일본인들이 좋아하는 중국의 고구려 연구학자 왕건군도 한국의 국내 학회에 참석해, 왜왕이 자칭한 작위는 지극히 개인적인 요구이며, 백제 신라 가야 등을 지배했다고 반복하고 있는 것은 왜가 통치한 사실이 없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는 것이라고 말했다.[103] 또 당대에 한반도 남부에는 백제와 신라 임나가라만 존재했는데 가야와 임나를 별개 국가로 취급하는 것에 대해 지적했고 이는 자신이 자칭해서 다스리는 나라의 실정도 제대로 모르고 요구한 것이라며 더 이상 논할 가치도 없다고 말했다.[104] 조선족 연구자 박진석 (朴眞奭) 또한 왜왕 무(武)가 송나라에 보낸 국서에서 조녜(), 즉 할아버지와 아버지(440~470년으로 추정)가 통일을 이룩한 것에 대해 언급하는데, 이것을 근거로 소국으로 분열된 왜국이 4세기 초반에 한반도까지 진출할 여력은 없었을 것이라고 했다.[105]

그러나 이에 대해서는 반론의 여지도 있다. 선술 했듯이 임나는 가야 제국의 총칭이 아닌 금관가야를 지칭하는 것으로 보이고, 가라의 용례는 일본서기에서 당대 일본인들이 어떻게 사용했는지 알 수 있는데, 두 가지 용례가 있다. 첫번째는 가야제국을 의미하며 두번째는 고령을 중심으로 하는 대가야이다. 왜왕이 '가라'로 자칭했다는 지명은 대가야로 추정하는데, 일본서기에서도 백제가 대가야에게 영토를 빼앗기자 백제왕이 왜왕에게 서신을 보내 다시 돌려달라고 하는 내용이 나오고 대가야에게 막대한 권력을 행사해 왜왕은 조칙을 내려 대가야로 하여금 백제에게 다시 할양하게 한다. 이로 미루어봐선 '가라'는 대가야를 지칭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관념으로 다른 두 개의 국가라고 치부하면 6국 7국 지위가 맞긴 맞다.[106]

그러나 이 논리도 아직 맹점이 하나 있는데, 임나라는 용례는 당대 일본에서 금관가야로서 사용된 바가 극히 드물기 때문에 당대의 왜국의 인식이라고 보기에 무리가 있다.[107] 또한 하술된 수서에서는 가라[108]는 백제의 속국이었다가, 6세기에 신라에 의해 다시 속국이 되었다고 하므로, 가라를 백제의 속국 혹은 부용국 내지로 보는 중국의 사서와 상충되고 있다. 일본서기에서도 성왕이 말하길, 근구수왕 치세기부터 탁순국 안라국 가라국 등과 서로 왕래하며, 우호를 두터이하고 백제를 형의 나라로 여겼다고 언급하고 있다.

또한 당대의 송나라의 국력에 주목해야 한다. 송나라는 당대에 전성기가 막 지나가고 망국으로 향하고 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실질적인 권한이나 권력을 부여할 수 없는 처지므로 의미없는 관직이라는 것이다. 또 남조 북조로 갈라져서 서로 피 터지게 싸우고 있는 상황에서, 북조 남조는 서로 정통성 확보 차원에서 조공-책봉 관계를 대외적으로 맺으려고 애썼다. 이런 차원에서 접근하면 당연히 자신의 제후국이 막강하다고 하면, 자국은 그런 막강한 제후들을 거느린 막강한 황제가 되는 것이다. 실제로 조공하는 나라가 강하고 또 더 멀리서 왔을수록 천자 입장에서는 위신이 더 산다.

이외에도 왜5왕 중 한명인 武가 중국에 사신을 보내어, 마치 자신들의 강역이 고구려와 국경을 맞대고 있으며, 자신들의 영토가 바다를 건너서 까지 이르고 있고 마치 한반도의 일부를 복속시키고 통치하는 것 마냥 중국 황실에 고한 적이 있다. 宋書에 기록되어 있는 478년의 기사다.
東征毛人五十五國,西服衆夷六十六國,渡平海北九十五國,王道融泰,廓土遐畿,累葉朝宗,不愆於歲。
동쪽으로 모인 55국을 정벌하고, 서쪽으로 중이 66국을 복속시키고, 바다 건너 북으로 95국을 평정하여 왕도가 무륵익어 태평하고, 땅은 서울에서 멀리까지 넓혔으며, 해마다 세공을 어긴 적이 없었습니다.
臣雖下愚,忝胤先緒,驅率所統,歸崇天極,道遙百濟,裝治船舫,
신이 비록 어리석지만, 선대를 이어 나라를 평안하게 통솔하고 있으며, 천극으로 가는 길은 백제를 통해 가야하기에 배를 타고 가야합니다.
而句驪無道,圖欲見吞,掠抄邊隸,虔劉不已,每致稽滯,以失良風。
그러나 고구려는 무도하여 우리나라를 집어 삼키려하고 변방을 침략하고 약탈하여[109] 근심이 적지 않습니다. 이렇게 늘 일이 막히고 거슬리는 바람에 어진 풍속을 잃고 있사오니, (중략)

3.4.1. 왜왕 무(武) = 웅략천황?

선술했듯이 송나라에 보낸 왜왕 武의 국서에는 고구려와 대치하고 있으며 국경을 맞대고 있어 자칫보면 '이게 뭔가'싶긴 하지만 일본서기에 비슷한 시기에 이러한 기록이 있긴 하다. 이 비슷한 시기 왜왕 武와 비슷한 행보를 보이는 인물이 일본서기에 있는데, 이것을 두고 웅략천황과 武는 동일인물이라는 추정이 있다. 그도 그럴것이 너무나도 웅략천황의 행보와 비슷하고 왜왕 武가 송나라에 보낸 국서와 비슷한 정황이 수 없이 발견된다.
아래는 일본서기의 내용들이다.

<일본서기 웅략 8년 (464년 2월)>
於是,新羅王,夜聞高麗軍四面歌儛,知賊盡入新羅地。乃使人於任那王曰,高麗王征伐我國。當此之時,若綴旒然。國之危殆,過於累卵。命之脩短,太所不計。伏請救於日本府行軍元帥等。

이에 신라왕이 밤에 고구려군이 사방에서 춤추고 노래한다는 것을 듣고 적이 모두 신라 땅으로 들어온 것으로 알고, 이에 임나왕(任那王)에게 사신을 보내어 “고구려왕이 우리나라를 정벌하려 합니다. 이렇게 되니 흔들리는 깃발과 같이 불안합니다. 나라의 위태로움이 달걀을 쌓은 것보다 더하고 목숨의 길고 짧음을 심히 헤아릴 수 없는 바입니다. 엎드려 일본부(日本府)의 행군원수(行軍元帥)등의 구원을 청합니다.”라고 말하였다.

<일본서기 웅략 8년 (464년 2월)>
由是,任那王勸膳臣斑鳩[斑鳩, 此云伊柯屢俄.]吉備臣小梨難波吉士赤目子, 往救新羅. 膳臣等, 未至營止. 高麗諸將, 未與膳臣等相戰皆怖. 膳臣等乃自力勞軍. 令軍中, 促爲攻具, 急進攻之. 與高麗相守十餘日. 乃夜鑿險, 爲地道, 悉過輜重, 設奇兵. 會明, 高麗謂膳臣等爲遁也. 悉軍來追. 乃縱奇兵, 步騎夾攻, 大破之. 二國之怨, 自此而生[言二國者, 高麗新羅也.]. 膳臣等謂新羅曰, 汝以至弱, 當至强. 官軍不救, 必爲所乘. 將成人地, 殆於此役. 自今以後, 豈背天朝也.

이로 인해 임나왕이 선신반구(膳臣斑鳩;카시하데노오미이카루가), 길비신소리(吉備臣小梨;키비노오미워나시), 난파길사적목자(難波吉士赤目子;나니하노키시아카메코)에게 신라를 구원하도록 권하였다. 선신(膳臣;카시하데노오미) 등은 군영을 설치하고 머무르는 데에는 이르지 않았으나, 고구려의 여러 장수들은 선신 등과 싸우기도 전에 모두 두려워하였다. 선신 등은 직접 힘써 군대를 위로하고 나서 군사들에게 빨리 공격할 준비를 시켜 급히 진격하였다. 그리고 고구려와 대치한 지 10여 일이 지나자, 밤에 험한 곳을 파서 땅굴을 만들어 군대의 무기와 식량을 모두 운반하고 매복병을 배치하였다. 새벽에 고구려는 선신 등이 달아났다고 생각하여 병력을 모두 이끌고 추격해왔다. 그러자 매복병을 풀고, 보병과 기병이 협공하여 크게 깨뜨렸다. 두 나라의 원한은 이로부터 생겼다.[110] 선신 등이 신라에게 “너희는 지극히 약한데도 지극히 강한 나라와 대적하였다. 관군(官軍)이 구하지 않았으면 반드시 큰 피해를 입었을 것이다. 이번 싸움에서 하마터면 나라를 빼앗길 뻔하였다. 지금부터는 어찌 천조(天朝)를 배반하겠는가!”라고 말하였다.

고국양왕 치세 이후로 신라는 고구려에게 복종하였는데[111], 신라에 주둔하던 고구려 군인이 피살되는 사건을 계기로 두 국가 사이의 관계는 틀어지고 마침내 전쟁까지 하게 된다. 이에 신라왕은 임나에 사신을 보내 일본부에게 지원을 요청한다. 그리고 464년에는 고구려를 패퇴시켰다고 나온다. 또 이듬해의 기록 465년 3월의 기사에서는 마치 고구려가 왜국에게 공물을 바치는데, 신라가 이를 방해하기 때문에 정벌에 나선다. 다음 기사는, 신라와 전쟁중에 오호토모노키미라는 일본 장수가 전사하고 패퇴하는 기록이 나온다. 이는 비슷한 시기의 삼국사기와 교차검증이 되는 내용이므로 삼국사기 신라본기 자비마립간 5년 5월과 6년 2월과 동일 사건으로 추정한다. 465년 5월에는 왜군 장수들간의 내분으로 인하여 기노 고유미(기대반숙녜 紀小弓)가 소가노 카코노스쿠네 (한자숙녜 韓子宿禰)와 반목하여 한자숙녜(韓子宿禰)가 기대반숙녜(紀大磐宿禰)에게 피살당하고 철수한다. 이를 보아 삼국사기와 일본서기가 2~3년 정도의 시차가 발생한다.

일설에는 한자숙녜를 백제장군 목라근자가 신라을 공격하고 그곳에서 얻은 현지 첩의 자식인 목만치라는 설도 있다. 그러나 이경우, 이보다 훨씬 선대인 비유왕 시절에 나제동맹을 결성하고 있었기 때문에, 백제의 장군 한자숙녜가 신라를 공격했다고 이해하기 어렵다. 게다가 삼국사기에서 왜인 혹은 왜구라고 특정하고 있으므로 다른 사건일 가능성이 높다. 한자숙녜(韓子宿禰)라고 일컬어지는 인물은 일설에 의하면, 목만치와 동일인물로 추정되는 소가노 마치(蘇我 満智)의 아들이며, 일본서기에서는 소아한자숙녜(蘇我韓子宿禰;소가노카라코노스쿠네)와 한자숙녜(韓子宿禰)라는 명칭이 혼용되고 있다. 한자숙녜(韓子宿禰)의 아들은 소아고려(蘇我高麗)이다.

<삼국사기 462년 5월>
五年,夏五月,倭人襲破活開城,虜人一千而去.
5년(462) 여름 5월에 왜인(倭人)이 활개성(活開城)을 습격해 깨뜨리고 1천 명을 사로잡아 갔다.

<삼국사기 463년 2월>
六年,春二月,倭人侵欿校勘 良城,不克而去。王命伐智•德智,領兵伏候於路,要擊大敗之。王以倭人屢侵疆埸,縁邊築二城。
6년(463) 봄 2월에 왜인(倭人)이 삽량성(歃良城)에 침입하였으나 이기지 못하고 돌아갔다. 왕이 벌지(伐智)와 덕지(德智)에게 명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중도에 숨어서 기다리고 있다가 공격하여 그들을 크게 물리쳤다. 왕은 왜인들이 자주 영토를 침입하였으므로 변경에 두 성을 쌓았다.

<일본서기 465년 3월>
三月,天皇欲親伐新羅。神戒天皇曰,無往也。天皇由是,不果行。乃勅紀小弓宿禰蘇我韓子宿禰大伴談連(談, 此云箇陀利.) 小鹿火宿禰等曰, 新羅自居西土. 累葉稱臣. 朝聘無違. 貢職允濟. 逮乎朕之王天下, 投身對馬之外, 竄跡匝羅之表, 阻高麗之貢, 呑百濟之城. 況復朝聘旣缺, 貢職莫脩. 狼子野心, 飽飛, 飢附. 以汝四卿, 拜爲大將. 宜以王師薄伐, 天罰龔行. 於是, 紀小弓宿禰, 使大伴室屋大連, 憂陳於天皇曰, 臣雖拙弱, 敬奉勅矣. 但今, 臣婦命過之際. 莫能視養臣者. 公冀將此事具陳天皇. 於是, 大伴室屋大連, 具爲陳之. 天皇聞悲頹歎, 以吉備上道采女大海, 賜於紀小弓宿禰, 爲隨身視養. 遂推轂以遣焉. 紀小弓宿禰等, 卽入新羅, 行屠傍郡(行屠, 竝行竝擊.).

3월에 천황이 친히 신라를 정벌하고자 하였다. 신(神)이 천황에게 “가지 마십시오.”라고 경고하였다. 천황이 이 때문에 가지 않았다. 그래서 기소궁숙녜(紀小弓宿禰;키노워유미노스쿠네), 소아한자숙녜(蘇我韓子宿禰;소가노카라코노스쿠네), 대반담련(大伴談連;오호토모노카타리노무라지) (談은 카타리(箇陀利)라고 읽는다), 소록화숙녜(小鹿火宿禰;워카히노스쿠네)등에게 “신라는 본래 서쪽 땅에 있는데, 대대로 신하를 칭하였다. 나를 조공하여 알현하는 일을 어긴 적이 없으며 공직(貢職)도 정성껏 바쳤다. 짐이 천하의 왕이 되기에 이르러서 몸을 대마(對馬;쓰시마)의 바깥에 두고, 자취는 잡라(匝羅)의 바깥에 숨기면서 고구려의 공물을 막고, 백제의 성을 삼켰다. 이에 다시 전혀 조빙하지 않고, 공직(貢職)을 행하지 않는다. 이리 새끼와 같은 거친 마음을 품고 배부르면 날아가고, 배고프면 붙는다. 이에 너희들 네 사람을 대장으로 임명한다. 마땅히 왕사(王師)로써 핍박하고 정벌하여 천벌(天罰)을 받들어 행하라.”고 칙을 내렸다. 이에 기소궁숙녜는 근심하여 대반실옥대련(大伴室屋大連;오호토모노무로야노오호무라지에게 “신은 비록 졸렬하고 약하지만 삼가 칙을 받들었습니다. 다만 지금 신의 처가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신의 시중을 들 사람이 없습니다. 공(公)께서는 이 사정을 천황에게 자세히 말해주십시오.”라고 말하였다. 이에 대반실옥대련이 자세하게 아뢰었다. 천황은 이를 듣고 슬퍼하고 탄식하며, 길비상도채녀대해(吉備上道采女大海;키비노카미츠미치노우네메오호시아마)를 기소궁숙녜에게 주어 그를 따르며 시중들게 하였다. 그리고 드디어 수레를 밀어서 전장으로 보냈다. 기소궁숙녜 등은 신라로 들어가서 근처의 고을을 다니면서 공격하였다. (행도(行屠)는 다니면서 공격하는 것이다.)

<일본서기 465년 5월>
夏五月,紀大磐宿禰,聞父旣薨,乃向新羅,執所掌兵馬船官及諸小官,專用威命。於是,小鹿火宿禰,深怨乎大磐宿禰。乃詐告於韓子宿禰曰,大磐宿禰,謂僕曰,我當復執韓子宿禰所掌之官不久也。願固守之。由是,韓子宿禰與大磐宿禰有隙。於是,百濟王,聞日本諸將,緣小事有隙。乃使人於韓子宿禰等曰,欲觀國堺。請,垂降臨。是以,韓子宿禰等,竝轡而往。及至於河,大磐宿禰,飮馬於河。是時,韓子宿禰,從後而射大磐宿禰鞍几 後橋。大磐宿禰愕然反視,射墮韓子宿禰。於中流而死。是三臣由前相競,行亂於道,不及百濟王宮而却還矣。

여름 5월에 기대반숙녜(紀大磐宿禰;키노오히하노스쿠네)가 아버지가 이미 돌아가신 것을 듣고 신라로 가서 소록화숙녜가 거느리는 병마(兵馬)와 선관(船官) 및 여러 소관(小官)을 맡아 마음대로 지휘하였다. 이에 소록화숙녜는 대반숙녜를 크게 원망하였다. 그리하여 한자숙녜(소가노카라코노스쿠네)에게 “대반숙녜가 나에게 ‘나는 마땅히 머지않아 다시 한자숙녜가 거느리는 병사들을 맡을 것이다.’라고 하였소. 원컨대 굳게 지키시오.”라고 거짓말하였다. 이러한 연유로 대반숙녜와 한자숙녜(소가노카라코노스쿠네)는 틈이 생겼다. 이에 백제왕은 일본의 여러 장군들이 작은 일로 인해 틈이 생겼다는 것을 듣고 사람을 한자숙녜 등에게 보내, “나라의 경계를 보여주고자 합니다. 청컨대 왕림하여 주십시오.”라고 말하였다. 그리하여 한자숙녜 등은 말고삐를 나란히 하여 갔다. 강에 이르렀을 때 대반숙녜는 말에게 물을 먹였다. 이때 한자숙녜가 뒤에서 대반숙녜의 안장 뒷부분에 화살을 쏘았다. 대반숙녜가 이에 놀라서 뒤돌아보고 한자숙녜(소가노카라코노스쿠네)를 활로 쏘아 떨어뜨리니, 흐르는 강 속에 빠져 죽었다. 이 세 신하는 전부터 서로 다투어 가는 도중에 소란을 피우니, 백제왕의 궁에 이르지 못하고 돌아왔다.

또 479년의 기록에는,

<일본서기 웅략 23년 (479년)>
是歲,百濟調賦,益於常例。筑紫安致臣馬飼臣等,率船師以擊高麗。
이 해에 백제가 바친 조부(調賦)가 평소보다 많았다. 축자의 안치신(安致臣;아치노오미)과 마사신(馬飼臣;우마카히노오미)등이 선사(船師)를 거느리고 고구려를 쳤다.

라고 나온다. 바로 앞의 기사에서는 (479년 4월) 개로왕이 죽고 말다왕(동성왕)을 일본에서 백제로 송환시키며, 축자국 군인 500명을 함께 보내 호위하게 하였다는데, 이때 파견된 장군이 아치노오미와 우마카히노오미라로 보인다.

재밌는 점은 비슷한 시기 (472년)에 백제의 개로왕 또한 비슷한 내용의 편지를 북위에 보내, 고구려 장수왕은 무도하고 포악하기 그지없어 고구려 백성들이 고통받고 있다. 사실은 그들은 남조와 내통하고 있으며 북조를 능멸하고 있으니, 군사를 일으켜 쳐달라. 또 북위 사신이 백제로 오던 중에 고구려군에게 살해당했다며, 시신을 수습하고 관복과 기물을 거두어, 북위에 증거라고 내밀어 보였으나, 북위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魏書 백제전과, 삼국사기 백제본기에서 내용을 볼 수 있다.

왜왕 武는 처음으로 왜.신라.임나.가라.진한.모한 6국제군사로 임명된 濟의 손자이며, 본인 스스로도 중국 황실로부터 같은 관작을 받은바 있다.

일본서기는 기본적으로 지방 국가(가야 연맹처럼 왜라는 이름 아래 여러나라가 혼재해 있었다)에서 전해져 오는 구전을 집대성해서 후대에 기록한 것이다.

이것은 하마다 고사쿠 규슈대 교수의 제2차 한일공동역사연구회에 투고한 논문에서 발췌한 일부이다.
일본서기 중에서 4세기에 상당하는 기사로 표현된 천황이나 일본은 4~5세기에 아직 성룁되지 않는다는 것, 또한 천조의 칭호도 중국 남조로부터 책봉을 기본으로 하는 백제의 외교자세를 고려하면, 백제가 일본에 대해 주창하는 호칭으로 인정할 수 없으며, 이것도 8세기 초반의 일본서기를 편찬하기 전후의 천황의 왕건을 수식하는 용어다. 일본서기의 기록이 씨족 시조의 업적을 '이야기'화하고 또 후세의 백제 관련 기록도 일본서기 편찬 시의 '지금' 즉 7세기 후반부터 8세기 초반에 이르기까지 율령국가의 성립과정에서 씨족 국가에 대한 기여를 현시하면서 '이야기화'가 계속된 것으로 생각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야기'화가 전혀 가공의 이야기가 아니라 '역사의 기억'을 이야기했던 점은 유의해야 한다.

한편, 478년에 왜왕 무(武)가 송에 보낸 국서에 등장하는 자신의 조녜(祖禰)가 통합을 이룩했다고 하는 내용을 가지고 한일공동역사연구회 1기에서는 치열한 논쟁이 펼쳐졌다.[112] 노중국 교수는 조녜(祖禰)가 중국의 오래된 용례(춘추좌씨전과 연남생묘지명)를 따져가며 아버지와 할아버지대로 해석해서 일본열도의 통합이 5세기 초중엽에 걸쳐 이뤄졌다 주장했다. 반면에 일본측에서는 조녜(祖禰)의 뜻을 조상을 뜻하는 일반명사로 해석해 노중국이 주장한 시기보다 더 이른 시기에 통합이 이뤄졌다 주장했다.[113]

이밖에도 노중국 교수는 무(武)가 국서를 보낸 내용에 대해서도 일본학자들과 열띤 토론을 벌였는데, 주된 논쟁은 변예(邊隸), 해북(海北)등의 표현이다. 이곳을 어디로 비정할 것인가를 두고 노중국 교수는 海北 규슈의 북쪽으로 비정하고 邊隸는 백제가 아니라고 발언했지만, 일본측은 사실 여부는 차치하고라도 변예(邊隸)는 백제 해북(海北)은 한반도로 보인다고 발언했다. 김태식 교수는 '구려(句驪)가 무도하여 (우리를) 삼키려고 한다'에서 목적어 '우리'는 왜국이 조공을 하기 위해 준비한 보물 등이 실어진 선박이지, 왜국이 아니라고 봤다.[114] 반면에 일본측에서는 ‘우리’는 사실 여부는 차치하고 왜왕 자신이 다스리는 혹은 주장하는 한반도의 영토라고 봤다.

《일본서기》나 《고사기》 등에서는 일본의 '삼한정벌', '임나일본부'를 말하고 있지만 대개는 신화적 서술과 '이주갑인상'을 비롯한 왜곡으로 검증 없이는 믿기 힘듦이 사실이다.

3.5. 가야 = 임나 ?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신라 유적에서 발견되는 가야의 용례는 가야 연합을 통칭하고 있으며, 전라남도 일부와 경상남도 일부에 존재하던 "국가"라는 일반명사 격으로 사용되고 있다. 또한 임나 가야의 용례는 일관되게 금관가야를 지칭하고 있으며 이는 임나 단독 표기에서도 동일하다. 그러나 일본서기와 일본의 당대 인식은 임나는 가야와 동일하며 이에 임나4현과 전라도 일대의 침미다례와 충북 일대를 더해서 통칭하는 명칭으로 수용된다.[115] 즉, 가야 임나를 각기의 다른 나라로 취급해 6국, 7국 제군사를 자칭한 것은 사리에 맞지 않는다. 당대의 일본의 인식에 의하면 가야와 임나는 똑같은 뜻이고 중복의 개념이기 때문에 6국은 5국이 되어야 하고, 7국이 6국이 되어야 뜻이 통한다.

만약 왜왕이 당대 한반도에서 통용되는 "임나" = 금관가야 + 나머지 가야 =연합의 통칭"을 지칭했다고 해도, 일개 연합의 구성국과 연합체를 같은 항렬에 병기하고 있다는 시점에서 한계를 드러낸다. 또한 임나는 가야의 일부이므로 이 또한 중복되는 개념이다. 즉, 당대 한반도에서 통용되는 개념이나 일본에서 통용되던 개념 어느쪽을 취해서 해석해도 이상한 점이 많다. 또 왜왕은 이를 두고 황제에게 정정을 요구하지도 않고 후에는 아예 자기가 먼저 임나와 가야를 넣어 7국 제군사를 중국측에 먼저 제안한다. 이를 보면 왜왕이 허상뿐인 작위를 원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임나일본부설에 대해 제일 적극적으로 반박한 일본사 연구자 김현구 교수 또한 임나는 가야의 일국일 뿐이라고 못 박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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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수서 왜국전의 내용

그 외에도 《수서왜국전 등에 "신라, 백제 모두 를 대국으로 여겼는데, 귀한 물건이 많아 또한 숭앙하였고, 항시 사신을 통하게 해 왕래했다."(新羅、百濟、皆以倭爲大國、多珍物、並仰之、恒通使往來。)라는 기록 역시 존재한다.

하지만 위의 문장만으로 임라일본부설의 근거이자 종속관계의 증거라고 해석하는 것은 지나친 비약이다. 以~爲 용법을 보면 ~를 ~로 삼다. ~를 ~라 여기다 두 가지 해석이 다 가능한데 여기서는 '여기다'라고 해석할 수 있으며 '섬기다'라는 뜻은 어디에도 없다. 즉, "신라와 백제가 왜를 대국이라고 여겼는데 보배가 많고 아울러 그것을 부러워했다. 그리하여 항상 사신을 통하고 왕래했다."라고 해석한다. 요약하면 단지 신라와 백제가 일본을 보배가 많아 큰나라라고 여겼다는 소리일뿐 종속적인 관계로서 섬긴다는 소리와는 거리가 멀다.

또한 수서에는 왜의 부용국을 분명 한정하고 있다. 이로서 전문맥의 백제와 신라가 왜를 보배가 많아서 그러한 기준에서만 대국으로 여긴다일뿐 왜를 섬기는 것과는 관계가 없으며 그냥 보물이 많이나는 국가라 대국이라고 여긴다고 할 뿐이다. 무엇보다 《수서》 왜국전에서는 죽사국 동쪽만이 왜에 부용한다고 명백히 나와있다.
裴世清使倭國度百濟行至竹島南望耽羅國經都斯麻國逈在大海中又東至一支國又至竹斯國又東至秦王國其人同於華夏以為夷洲疑不能明也又經十餘國達於海岸自竹斯國以東皆附庸於倭倭王遣小徳何軰臺從數百人設儀仗鳴鼓角來迎後十日又遣大禮哥多毗從二百餘騎郊勞既至彼都其王與世清来貢方物此後遂絶

다음 해인 대업(大業) 4년 (서기 608) 황제는 문림랑(文林郞) 배청(裴淸)을 사자로 왜국에 파견하였다. 백제를 건너 죽도(竹島, 珍島?)에 닿았다. 남으로 ○羅国 (제주도?)을 바라보며 쓰시마국(都斯麻国)을 거쳐 멀리 대해로 나섰다. 다시 동으로 이키국(一支國)에 이르고, 다시 쯔쿠시국(竹斯國)에 이르고, 또 동으로 진왕국(秦王國)에 닿았다. 그곳 사람들은 중국인과 같아서 중국의 변방의 땅(夷洲)이라 하여도 믿을 정도였다. 다시 십여국을 지나 해안에 닿았다. 쯔쿠시국(竹斯國) 동쪽은 모두 왜의 지배하에 있다고 한다

근데 여기서 주목할 점은 쓰시마국을 지나 이키국을 지나면 다시 쯔쿠시국 동쪽 진왕국이 나오는데 일본열도 깊숙히 뜬금없이 "중국인과 같아서 중국의 변방의 땅(夷洲)이라 하여도 믿을 정도였다" 이런 소리가 갑자기 나온다. 배세청이 가는 도중 중국인 같아보이는 사람들과 이야기 해본적은 만무하고 지나가던중 그곳의 복색과 문화가 중국의 변방지방 같이 선진적으로 보였다는 다소 뜬금없는 지역으로 즉, 이곳이 키비국이든 사이토바루든 백제계나 신라계의 분국으로 생각해볼 수 있다.

참고로 역사 갤러리에서는 2006년에 이 기사의 新羅、百濟、皆以倭爲大國 부분을 두고 한 때 '신라와 백제가 왜를 통해 대국이 되었다'라고 해석해야 한다는 주장이 있었으나 그냥 개드립. '以 A 爲 B'는 'A를 B로 삼다, 여기다'로 해석한다. 다른 용법은 없다. 차라리 이걸 까고 싶다면, 《수서》가 편찬된 시기를 고려해서 정치적 목적이 강하게 반영된 것으로 보거나, 아니면 본문에도 나오지만 편찬 과정이 엄밀하지 못한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더 신빙성이 있다.

실제로 수서에는 신라를 고구려의 패잔병들이 세웠다느니, 신라 왕이 백제 출신이라느니 같은 잘못 알려진 사실들도 다 사실인 것처럼 서술되어 있으니 교차검증이 반드시 필요한 사서라고 할 수 있겠다. 즉, 수서에 나오는 기록들을 전부 다 사실로서 볼 수 만은 없다는 것이다. 패잔병들에 대한 기록을 자세히 살펴보면, 고구려 동천왕 시절에 위나라 관구검이 고구려를 격파하자, 남쪽으로 도망간 이들이 옥저에 거주하다가 후에 더 남하하여 신라를 건국했다고 기록하고 있으며[116] 또 후에는 백제에게 고구려가 침략당하자, 고구려인들이 신라로 도망갔다라고 기록되어 있기도 하다. 그리고 삼국지 동이전에는 마한 출신의 사람이 진한에서 왕이 되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추정컨데 이 기록들을 재편집하면서 마한=백제 진한=신라로 확대해석하여 잘못 기록된 게 아닐까 하는 해석도 있다. 결국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수서의 내용들중 일부는 오해와 오류를 바탕으로 기록을 하였다고 볼 수 있겠다.

또한 《수서》에는 쇼토쿠 태자수양제에게 "동천자가 서천자에게, 잘 지냄?ㅋ(日出處天子日沒處天子)[117]" 하는 패기넘치는 사례도 등장하는데, 학계에서는 고구려 승려 혜자가 당시 쇼토쿠 태자의 스승으로 자문 역할을 하고 있었고 일본 열도가 아닌 한반도 중심의 지리관이라는 점에서 고구려의 전략적 의도가 반영된 것으로 해석하는 견해가 강한 지지를 얻고 있다.[118] 어쨌든 《수서》의 기록에 대해서는 일본 자신의 정체성이 국제질서 이상으로 표출되던 시절이라, 여기에 고무된 일본의 허세가 기록에 반영된 것이 아니냐는 해석이 많다.
三十餘國(서른여 나라가 있는데) 皆自稱王(우두머리들마다 자신을 임금이라고 일컫는다.) 夷人不知里數(오랑캐들(왜)은 거리를 잴 때 리(里)를 쓰는 법은 모르고) 但計以日(다만 걸린 날수로만 셈할 뿐이다.)

중략..

人庶多跣足(백성은 대부분 맨발로 다닌다.)

중략..

漆皮為甲(가죽을 칠하여 갑옷을 만들고) 骨為矢鏑(뼈를 갈아 화살촉을 만든다.) 雖有兵(비록 군대가 있지만) 無征戰(이웃나라를 빼앗기 위한 싸움은 벌이지 않는다.)

중략..

沒水捕魚。(물속에 들어가 고기를 잡는다.) 無文字(글자는 없고)、唯刻木結繩。(나무에 금을 새기거나 새끼줄을 묶어 기록할 뿐이다.) 敬佛法(불교를 높이 받들어)、於百濟求得佛經(백제에서 불경(佛經)을 구하니)、始有文字。(비로소 글자를 알게 되었다.) [119]知卜筮(점칠 줄 알고)、尤信巫覡。(무당과 박수를 굳게 믿는다.)

중략..

俗無盤俎(민가에는 쟁반과 도마가 없는 대신) 藉以檞葉(겨우살이 이파리를 음식 밑에 깐다.) 食用手餔之(음식은 손으로 집어 먹는다.)
수서(隋書) 왜국전(倭國傳)

애초에 당시 쇼토쿠태자의 이런 허파에 바람든 행동은 수나라 쪽에서도 (진위를 파악하기도 전에) 어느정도 인정을 해줬고, 또 진위 파악을 하기 위해 문림랑(文林郞), 배세청(裵世淸)[120] 등을 왜국에 파견하기도 했다. 무엇보다 그 수서에서는 왜국의 수준을 거리조차 제대로 잴 줄 모르고 백성들은 대부분 맨발로만 살며 뼈로 만든 화살촉이나 사용하고 백제에게 배우기 전까지는 문자도 전혀 없었고 물고기를 수렵하며 식기대신 이파리를 사용하고 손으로 음식들을 먹는 족속이라고 명확히 설명하고 있다. 즉, 이러한 구체적인 서술들은 "신라와 백제가 모두 왜를 대국으로 여겼다."[121] 라는 추상적인 문구보다는 수나라에서 직접 파견한 문림랑(文林郞), 배세청(裵世淸)이 직접 체험한 경험들을 통해 증언한 내용들에 의해서 작성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크므로 당대 일본의 실상을 훨씬 더 정확히 반영한다고 볼 수 있으며, 훨씬 더 신빙성이 높은 내용들이라고 볼 수 있겠다. 그러므로, 신라와 백제가 모두 진귀한 물건이 많아서 왜국을 대국으로 여기고 섬겼다라고 해석하는 것은 누가봐도 모순적인 것이다. 무엇보다 중국의 사서들은 옛 사서들을 복붙하거나 저자가 옳다거나 틀렸다고 생각하는 부분들은 조금 고치되, 개괄적인 내용은 받아쓰기 형식으로 쓰는 경우가 흔했었는데, 상기의 "신라와 백제가 모두 왜를 대국으로 여겼다."라는 내용은 수서에서만 처음으로 등장하는 내용으로 그 이전과 그 이후의 사서들에서는 똑같은 내용들이 전혀 반복적으로 등장하지 않는다.

또한 수 양제가 쓴 편지에서는 왜왕이 아닌 왜황(倭皇)[122]이라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일본의 이러한 언론 플레이가 어느정도 먹혀들어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 황제라고 자칭하고 나니 번국을 만들어내고 백제와 신라가 자국을 섬기고 있다고 떠들었을 개연성도 크다. 또한 수서의 기록을 온전히 따르자면 당시 왜국의 인구는 10만 호였는데[123], 당대 백제의 인구는 20~30만 호[124]로 추정한다. 순전히 국력 규모만 놓고봐도 신라와 백제가 왜국을 대국으로 섬길만한 수준의 작고 약한 나라들은 결코 아니었다는 것이다.

참고로 문제의 전문은 이러하다.
其王朝會,必陳設儀仗,奏其國樂。戸可十萬。俗,殺人,强盜及姦,皆死,盜者計贓酬物,無財者沒身爲奴,自餘輕重,或流或杖。毎訊寃獄,不承引者,以木壓膝,或張强弓,以弦鋸其項。或置小石於沸湯中,令所競者探之,云理曲者卽手爛,或置蛇瓮中,令取之,云曲者卽螫手矣。人頗恬靜,罕爭訟,少盜賊。樂有五弦,琴,笛。男女皆黥臂,點面,文身。沒水捕魚。無文字,唯刻木結繩。敬佛法,於百濟求得佛經,始有文字。知卜筮,尤信巫覡。毎至正月一日,必射戲飲酒,其餘節,略與華同。好棊博,握槊,樗蒲之戲。氣候温暖,草木冬靑。土地膏腴,水多陸少。以小環掛鸕鷀項,令入水捕魚,日得百餘頭。俗無盤俎,藉以檞葉,食用手餔之。性質直,有雅風。女多男少,婚嫁不取同姓,男女相悅者卽爲婚。婦入夫家,必先跨火,乃與夫相見。婦人不淫妬。死者斂以棺槨,親賓就屍歌舞,妻子兄弟以白布製服。貴人三年殯,庶人卜日而瘞。及葬,置屍船上,陸地牽之,或以小輿。有阿蘇山,其石無故火起接天者,俗以爲異,因行祭禱。有如意寶珠,其色靑,大如鷄 卵,夜則有光,云魚眼精也。新羅•百濟皆以倭爲大國,多珍物,並仰之,恒通使往來。

왕이 조회할 때는 반드시 의장(儀仗)을 진설하고, 그 나라의 음악을 연주한다. 호(戶)는 10만 정도이다. 습속이 사람을 죽이거나, 강도 및 간음하면 모두 죽이며, 도둑은 훔친 물건을 헤아려 재물로 변상하고, 재물이 없는 자는 본인을 노비로 삼으며, 그 나머지는 죄의 경중에 따라서 유배를 보내거나 몽둥이로 때린다. 억울함을 호소하는 고발사건[冤獄]을 조사할 때 죄를 인정하지 않는 자는, 나무로 무릎을 누르거나 강한 활에 줄을 매고 그 활줄로 목을 톱처럼 켠다. 혹은 끓는 물 속에 작은 돌을 넣어두고 다투는 자들로 하여금 찾게 하여 이치에 어그러진 쪽이 손을 데인다고 하며 혹은 항아리 안에 뱀을 넣어 두고 이를 잡게 하여 그릇된 쪽이 손을 물린다고 한다. 사람들은 아주 얌전하여, 소송으로 다투는 일이 드물고, 도적이 적다. 악기에는 5현(絃), 금(琴), 피리가 있다. 남자들은 모두 어깨에 문신을 하고, 얼굴에도 점을 찍고, 몸에도 문신한다. 물에 들어가 고기를 잡는다. 문자는 없으며, 나무에 새기고 끈을 묶을 뿐이다. 불법을 숭경하여, 백제에서 불경을 구하여 얻어서, 비로소 문자가 있게 되었다. 점을 칠 줄 알며, 특히 무당을 믿는다. 정월 초하루가 되면, 반드시 활을 쏘고 놀며 술을 마시며, 다른 절기는 거의 중국[華]과 같다. 바둑과 장기, 쌍륙[握槊], 주사위와 같은 놀이를 좋아한다. 기후가 온난하여 초목이 겨울에도 푸르다. 땅이 기름지며, 물이 많고 땅이 적다. 가마우지의 목에 작은 고리를 걸고, 물에 들어가 고기를 잡게 하는데, 하루에 백 여 마리를 잡는다. 풍속에 큰 쟁반이나 도마가 없고, (음식을 담을 때) 떡갈나무 잎을 쓰고, 먹을 때는 손을 써서 먹는다.[125] 성품이 질박하고 솔직하며, 우아한 기풍이 있다. 여자가 많고 남자가 적으며, 혼인할 때는 같은 성(姓)을 취하지 않는다. 남녀가 서로 좋아하면 곧 혼인한다. 부인이 지아비의 집에 들어가며, 반드시 먼저 불을 타넘고 가서 지아비와 서로 만난다. 부인들은 음란하거나 질투하지 않는다. 죽은 사람은 관곽에 넣으며, 친척이나 손님들은 시신 앞에서 노래하고 춤추며, 처자형제들은 흰 베로 상복을 만든다. 귀한 사람은 3년 동안 빈례를 행하고, 일반 사람들은 날을 점쳐서 묻는다. 매장할 때에 이르러, 시신을 배 위에 두고 육지에서 배를 당기거나, 때로는 작은 수레로 한다. 아소산(阿蘇山)이 있는데, 그곳의 돌은 까닭없이 불이 일어나 하늘에 닿는데, (아럴때) 사람들은 이상하게 여겨서, 그 때문에 제사와 기도를 행한다. 여의보주가 있는데, 그 색은 푸르고 크기가 달걀만 하며 밤에는 빛이 나므로 물고기 눈의 정기[眼精]이라고 한다. 신라와 백제는 모두 왜를 큰 나라로 여겨 진기한 물품이 많고 아울러, 그것을 우러러 보고 항상 사신을 통하여 왕래한다.
출처: http://contents.nahf.or.kr/item/item.do?levelId=jo.k_0015_0094_0090_0040 동북아역사넷 -중국정사외국전

3.7. 삼국지 위지한전(魏志韓伝)의 기록

韓在帯方之南 東西以海為限南與倭接 方可四千里 有三種一曰馬韓二曰辰韓三曰弁韓 辰韓者古之辰國也
한(韓)은 대방(帶方)의 남쪽에 있으며, 동서쪽으로는 바다를 경계로 삼으며, 남쪽으로는 왜(倭)와 접(接)하는데, 그 둘레가 4천리에 이른다. 3종족이 있으니, 첫째는 마한(馬韓)이요, 둘째는 진한(辰韓)이며, 셋째는 변한(弁韓)이다. 진한은 옛날의 진국(辰國)이다.

즉, 동과 서로는 바다로 되어있는데 반해, 남쪽의 접경지역이 왜와 접하고 있다는 것을 근거로 韓과 倭는 육지로 연결되어 있으므로, 한반도 남부에서 활동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러나, 접(接)을 국경에 접하고 있다고 해석하는 것은 무리이다는 주장도 있으며, 삼국지 위지(魏志) 오환선비동이전(烏丸鮮卑東夷傳) 왜국에 대한 기사는 대방국 동남쪽의 큰 바다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으므로 서로 상충된다. 삼국지 위지한전(魏志韓伝)이 아닌, 오환선비동이전의 왜국에 대한 기사를 인용해보자.
倭人在帶方東南大海之中,依山島爲國邑。舊百餘國,漢時有朝見者,今使譯所通三十國。從郡至倭,循海岸水行,歷韓國,乍南乍東,到其北岸狗邪韓國,七千餘里, 始度一海, 千餘里至對馬國。其大官曰卑狗,副曰卑奴母離。所居絶島,方可四百餘里,土地山險,多深林,道路如禽鹿徑。有千餘戶,無良田,食海物自活,乘船南北市糴。又南渡一海千餘里,名曰瀚海,至一大國,官亦曰卑狗,副曰卑奴母離。方可三百里,多竹木叢林,有三千許家,差有田地,耕田猶不足食,亦南北市糴。又渡一海,千餘里至末盧國,有四千餘戶,濱山海居,草木茂盛,行不見前人。好捕魚鰒,水無深淺,皆沈没取之。東南陸行五百里,到伊都國,官曰爾支,副曰泄謨觚•柄渠觚。有千餘戶,世有王,皆統屬女王國,郡使往來常所駐。東南至奴國百里,官曰兕馬觚,副曰卑奴母離,有二萬餘戶。東行至不彌國百里,官曰多模,副曰卑奴母離,有千餘家。南至投馬國,水行二十日,官曰彌彌,副曰彌彌那利,可五萬餘戶。南至邪馬壹國,女王之所都,水行十日,陸行一月,官有伊支馬,次曰彌馬升,次曰彌馬獲支,次曰奴佳鞮,可七萬餘戶。自女王國以北,其戶數道里可得略載,其餘旁國遠絶,不可得詳。次有斯馬國,次有已百支國,次有伊邪國,次有都支國,次有彌奴國,次有好古都國,次有不呼國,次有姐奴國,次有對蘇國,次有蘇奴國,次有呼邑國,次有華奴蘇奴國,次有鬼國,次有爲吾國,次有鬼奴國,次有邪馬國,次有躬臣國,次有巴利國,次有支惟國,次有烏奴國,次有奴國,此女王境界所盡。其南有狗奴國,男子爲王,其官有狗古智卑狗,不屬女王。自郡至女王國萬二千餘里。

왜인(倭人)은 대방군(帶方郡)동남쪽의 대해(大海) 중에 살고 있는데, 산이 많은 섬에 의지하여 나라와 마을(國邑)을 이루었다. 이전에는 100여 나라였는데, 한대(漢代)에 이들 중에서 한의 조정에 알현(朝見)하는 나라가 있었고, 지금은 사역(使譯)이 통하는 곳이 30개 나라이다. 대방군(帶方郡)에서 왜(倭)까지는, 해안을 따라 물길로 가서 한국(韓國)을 거쳐 때로는 남쪽으로 때로는 동쪽으로 나아가면 그 북쪽 대안(北岸)인 구야한국(狗邪韓國)에 도착하는데, 거리가 7천여 리(里)이며, 처음으로 바다 하나를 건너는데, 1천여 리를 가면 대마국(對馬國)에 도착한다. 그 대관(大官)은 비구(卑狗)라 부르고, 그 부관(副官)은 비노모리(卑奴母離) 라 부른다. 살아가는 곳은 절도(絶島)로서, 사방이 4백여 리 정도이고, 토지는 산이 많아서 험하고 우거진 수풀이 많으며, 도로는 새와 사슴과 같은 짐승들이 다니는 길과 같다. 1천여 호(戶)가 있으나, 좋은 농경지가 없어서 해물을 먹으며 생활하면서, 배를 타고 남쪽과 북쪽으로 가서 곡물을 사온다. 또 대마국에서 남쪽으로 바다 1천여 리를 건너는데, 이 바다의 이름은 한해(瀚海)라고 한다. 1천여 리를 건너면 일대국(一大國) 주에 이른다. 그 대관(大官) 역시 비구(卑狗)라 부르고, 부관(副官)도 비노모리(卑奴母離)라 부른다. 사방은 3백 리 정도이고, 대나무와 울창한 숲이 많으며, 3천 정도의 가(家)가 있다. 약간의 전지(田地)가 있지만, 농사를 지어도 여전히 먹고 살기에 부족하므로, 역시 그 남쪽과 북쪽으로 다니면서 곡물을 사온다.

또 바다 하나를 건너서 1천여 리를 가면 말로국(末盧國)에 이른다. 이 나라에는 4천여 호(戶)가 있는데, 사람들은 산과 바다를 따라서 거주하고 있고, 초목이 무성하여, 길을 가면서 앞에 가는 사람을 볼 수 없다. 이 사람들은 물고기와 전복을 잘 잡는데, 바닷물이 깊든 얕든 간에, 모두 물속으로 들어가서 그것들을 잡는다. 말로국에서 동남쪽으로 육상으로 5백 리를 가면, 이도국(伊都國)에 도착한다. 이 나라에서 대관(大官)은 이지(爾支)라 부르고, 부관(副官)은 설모고(泄謨觚) 혹은 병거고(柄渠觚)라 부른다. 1천여 호(戶)가 있는데, 대대로 왕(王)이 있었지만 모두 여왕국(女王國)에 통속되어 있어서, 군사(郡使)가 왕래하면서 항상 주재(駐在)하는 곳이다. 이도국에서 동남쪽의 노국(奴國)에 이르는 거리는 1백 리이다. 그 대관(大官)은 시마고(兕馬觚) 주라 부르고, 부관(副官)은 비노모리라 부른다. 이 나라에는 2만여 호가 있다. 노국에서 동쪽으로 가면 불미국(不彌國)에 이르는데, 그 거리는 1백 리이다. 그 대관(大官)은 다모(多模)라 부르고, 부관(副官)은 비노모리(卑奴母離)라 부른다. 이 나라에는 1천여 가(家)가 있다. 불미국에서남쪽으로 가면 투마국(投馬國)에 이르는데, 바닷길로 20일을 간다. 그 대관(大官)은 미미(彌彌)라 부르고, 부관(副官)은 미미나리(彌彌那利)라 부른다. 5만여 호 정도이다.

투마국에서 남쪽으로 가면 야마일국(邪馬壹國)에 이르는데, 여왕(女王)이 도읍(都邑)한 곳으로 바닷길로 20일 동안 가고 육상으로 1개월 동안 간다. 그 대관(大官)으로 이지마(伊支馬)가 있고, 그 다음은 미마승(彌馬升)이라 부르며, 그 다음은 미마획지(彌馬獲支)라 부르고, 그 다음은 노가제(奴佳鞮)라 부른다. 7만여 호 정도가 있다. 여왕국(女王國)의 이북(에 있는 나라)은 그 호구의 숫자(戶數)와 여왕국에서의 거리를 대략적이라도 기재할 수 있지만, 그 나머지 주변국은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상세한 것을 얻을 수 없다. 다음으로 사마국(斯馬國)이 있고, 다음으로 이백지국(已百支國)이 있으며, 다음으로 이사국(伊邪國)이 있고, 다음으로 도지국(都支國)이 있으며, 다음으로 미노국(彌奴國)이 있고, 다음으로 호고도국(好古都國)이 있으며, 다음으로 불호국(不呼國)이 있고, 다음으로 저노국(姐奴國)이 있으며, 다음으로 대소국(對蘇國)이 있고, 다음으로 소노국(蘇奴國)이 있으며, 다음으로 호읍국(呼邑國)이 있고, 다음으로 화노소노국(華奴蘇奴國)이 있으며, 다음으로 귀국(鬼國)이 있고, 다음으로 위오국(爲吾國)이 있으며, 다음으로 귀노국(鬼奴國)이 있고, 다음으로 야마국(邪馬國)이 있으며, 다음으로 궁신국(躬臣國)이 있고, 다음으로 파리국(巴利國)이 있으며, 다음으로 지유국(支惟國)이 있고, 다음으로 오노국(烏奴國)이 있으며, 다음으로 노국(奴國)이 있는데, 이것이 여왕의 경계(境界) 안에 있는 것을 다 열거한 것이다. 그 여왕국 남쪽에는 구노국(狗奴國)이 있는데, 그 관직으로는 구고지비구(狗古智卑狗)가 있고, 여왕에 소속되지 않았다. 군(郡)에서 여왕국에 이르는 거리는 1만 2천여 리이다

애초에 같은 사서에 수록 되어있는 왜에 대한 기사에는 대방국 동남쪽 大海에 있다고 했지, 어디에도 왜국이 변한과 접하고 있다고 언급되어 있지 않다. 또 북안(北岸)[126]은 바다 북쪽(바다나 강기슭) 건너편이라는 뜻이지, 왜국의 북쪽의 바다 건너편이라고 해석할 수 없다. 애초에 글의 맥락을 파악하면 왜와 구야한국까지의 거리와 위치를 설명하고 있지, 구야한국이 왜국의 영토라고 해석할 여지는 없다.

3.8. 양직공도 신라 제기(題記)

2011년에 새로운 버전의 양직공도 신라 제기(題記)가 발견되었다. # 이건 국립고궁박물원에 2본(새로운 버전)이 있는건데 양직공도의 모사본(원본을 배껴서 본뜬 책)이다. 양직공도는 중국 남경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원래 양직공도에는 백제 사신의 모습만 볼 수 있었지만 대만에 있는 고궁박물관의 모사본에는 신라고구려의 사신의 모습도 볼 수 있다. 그 내용에 혹속한 혹속왜(或屬韓或屬倭: 한때는 한에 속하기도 하고, 한때는 왜에 속하기도 하였다.)란 구절이 있어 언론에서는 이것이 '임나일본부설의 증거가 아니냐는 논란이 일고 있다'고 보도했다. 고궁박물관에 있는 2본의 모사본은 2011년이 돼서야 대만에서 나타났다.

그러나 큰 맥락에서 볼 때 '혹속왜'라는 구절은 앞에서 말한 책봉 내용에 근거한 것으로 추정되며[127], '혹속한'이라는 구절 또한 삼한 시대를 가리키는 서술이거나 백제언론플레이로 추정된다. 그도 그럴 것이 양서(梁書)는 신라 사신이 중국어를 못하였기 때문에 백제 사신의 통역을 거쳐야 말이 통했다 하고, 신라를 문자도 없고 한자도 엉터리로 쓰는 허접한 나라로 표현했다.[128] 애초에 양나라에 조공하러 갈 때 신라는 백제에게 부탁해, 양나라에 데려달라고 부탁하여 동행했다. 이것이 신라의 최초 중국 남조와 통교한 기록이다.[129]
語言待百濟而後通焉

신라의 언어는 백제의 통역을 거쳐야 중국과 통한다

이를 미루어 보건대, 백제가 신라 사신의 말을 의도적으로 오역하여, 자신들의 영향력이나 정치력을 과대포장한 듯하다. 이를 뒷받침하는 근거는 이후 백제 무령왕이 영동대장군(寧東大將軍)이라는 작위를 하사받았다는 것이다.[130] 무령왕이 신라의 사신을 데려와 양나라에 조공을 바치게 했다고 황실에서는 인식을 했던, 아니면 백제가 신라를 부용국이라고 언론플레이하여 황실로부터 인정을 받았던간에, 양나라는 백제의 행동에 상당히 뿌듯해 했던 것이다.[131] 사실 여부를 차치하고도 북조와 정통성 경쟁을 하는 남조로써는 자신들에게 조공을 바치는 손 아래의 나라가 강성하다고 하면 정치적으로도 유리한 것이다.

전반적으로 봤을 때 나머지 기록 또한 다른 신라 관련 기록과 거의 일치하고 이렇게 차이가 나는 부분 또한 큰 맥락에서 기존 기록과 거의 일치하니, 예전 사서에서 그저 발췌한 내용 이상을 넘을 수 없다고 추정한다. 또 단순히 왜왕 무(武)가 남조 송나라에게 일방적으로 자칭한 관직과 그 상표문을 가져온 사신의 말에 전적으로 의존한 기록을 후대에 와서 재인용하여 기록했을 가능성도 있다.

일각에서는 혹속한 혹속왜(或屬韓或屬倭)란 구절에서 속(屬)이 '복속되다', '속국'이란 뜻이 아니라 '혹(或)은 진한(韓)의 족속(屬)이거나 혹(或)은 왜(倭)의 족속(屬)이다.'라는 뜻으로 해석해야 한고 보기도 한다. 그러나 이는 오류로, '屬'은 '속하다', 즉 속국이란 뜻이다. 즉, 어느때는 한(진한 추정)에 속하였고 어느때는 왜에 속하였다는 뜻이다. 이어지는 글은 "그래서 신라왕이 사신을 보낼 수 없었다."이다. 이것은 신라 사신이 백제 사신을 통해 통역을 했는데 백제인으로서 신라를 오해하여 말했거나, 당시 백제는 왜의 힘을 빌어 신라를 공격했다가 고구려에 발렸는데 그때 미사흔을 인질로 보낸 신라를 속국이라 표현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위에서 설명했듯 백제 사신이 악의적으로 통역했을 가능성이 존재한다.

게다가 양직공도 백제 부분에는 가야로 보이는 국가들(반파, 전라 등)과 사라(신라)라는 국가가 백제의 '부용국'이라는 기록도 있다. # 임나일본부설은 왜가 한반도 남부에 영향력을 가졌다고 주장하는데, 양직공도는 오히려 백제가 영향력을 가졌다고 적혀있어 반박이 된다.[132] 그리고 이것만으로는 임나일본부를 주장하기가 매우 어려운 게 당시에는 사실 관계와 전혀 다르게 각국의 역학 관계를 서술하고 책봉하는 경우가 매우 흔했기 때문이다.[133]

그리고 북사의 구절을 살펴보면 아래와 같은 내용들도 나온다.
「新羅」者,其先本「辰韓>種也。地在「高麗」東南,居「漢」時「樂浪」地。「辰韓」亦曰「秦韓>。相傳言「秦」世亡人避役來適,「馬韓」割其東界居之,以「秦」人,故名之曰「秦韓」。
新羅는 그 선조가 본래 辰韓의 종족이었다. 그 땅은 高[句]麗 동남쪽에 있는데, 漢나라 때의 樂浪 지역이다. 辰韓을 秦韓이라고도 한다. 대대로 전해오는 말에 의하면 秦나라 때 流亡人들이 役을 피하여 [馬韓으로] 가자, 馬韓에서는 그 동쪽 지경을 분할하여 그들을 살게 하고, 그들이 秦나라 사람인 까닭에 그 나라 이름을 秦韓이라 하였다고 한다.

其言語名物,有似中國人,名國爲邦,弓爲弧,賊爲寇,行酒爲行觴,相呼皆爲徒,不與「馬韓>同。又「辰韓」王常用「馬韓」人作之,世世相傳,「辰韓」不得自立王,明其流移之人故也。恒爲「馬韓」所制。
그들의 언어와 물건 이름은 중국 사람이 쓰는 것과 비슷하니 나라(國)를 邦이라 하고, 활(弓)을 弧, 도둑(賊)을 寇, 연회석에서 술잔을 돌리는 것(行酒)을 行觴이라 한다. 서로 부르는 데는 모두 徒라고 하여 馬韓과 같지 아니하다. 또 辰韓의 王은 항상 馬韓 사람을 세워 대대로 이어가고, 辰韓 스스로 왕을 세울 수 없었으니 그들이 분명히 흘러 들어와 산 사람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辰韓은] 항상 마한의 지배를 받았다.


「辰韓」之始,有六國,稍分爲十二,「新羅>則其一也。或稱魏將毋校勘 丘儉討高麗破之,奔沃沮,其後復歸故國,有留者,遂爲新羅,亦曰斯盧。其人雜校勘 有華夏•高麗•百濟之屬,其人雜有華夏高麗百濟之屬 諸本 「雜」 訛作 「辯」, 據隋書卷八一新羅傳改. 兼有沃沮 •不耐 •韓 •濊 之地. 其王本百濟人, 自海逃入新羅, 遂王其國。
진한은 처음 6國이었다가 차츰 나뉘어져 12국이 되었는데,註 128 신라는 그 중의 한 나라이다. 일설에 의하면 魏나라 장수 毋丘儉이 고[구]려를 토벌하여 격파하니, [고구려인들은] 沃沮로 쫓겨 갔다가 그 뒤 다시 고국으로 돌아갔는데, [이 때에 따라가지 않고] 남아 있던 자들이 마침내 新羅를 세웠다고 한다. [신라는] 斯盧라고도 한다. 그 나라는 중국•고[구]려•백제의 족속들이 뒤섞여 있으며, 沃沮•不耐•韓•濊의 땅을 차지하고 있다. 그 나라의 王은 본래 百濟 사람이었는데, 바다로 도망쳐 신라로 들어가 마침내 그 나라의 왕이 되었다.


初附庸于百濟,百濟征高麗校勘 ,不堪戎役,後相率歸之,遂致强盛。因襲百濟,附庸於迦羅國焉。傳世三十,至「眞平」 以「隋」「開皇」十四年,遣使貢方物。「文帝」拜「眞平」上開府•「樂浪郡公」•「新羅王>。
당초에는 백제에 附庸하였는데, 백제가 고[구]려를 정벌하여 [고구려 사람들이] 軍役을 견디지 못하고 무리를 지어와 신라에 귀화하니, [신라는] 마침내 강성하여졌다. 그리하여 백제를 습격하고, 迦羅國을 附庸國으로 삼았다. 왕위가 대대로 전하여져 30世인 眞平에 이르렀는데, 隋나라 開皇 14년 (A.D.594; 新羅 眞平王 16)에 遣使하여 方物을 바쳤다. 文帝는 眞平을 上開府 樂浪郡公 新羅王에 拜授하였다.#

북사에서는 본래 진한의 사람들은 중국 진나라의 사람들인데 이 진한도 12개국으로 갈렸고 그중 하나가 신라이며 이 신라는 고구려인의 후예라고 설명하고 있다.[134][135] 그리고 처음엔 신라가 백제의 부용국이었다가 백제를 버리고 가야의 부용국이 되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즉, 여기선 초기 신라가 혹속백제 그리고 혹속가야였었다고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근데 '양직공도 신라재기'에서는 이와는 전혀 다르게 신라는 혹속한 혹속왜라는 구절이 나오게 된다. 즉 韓의 속국이거나 倭의 속국이라는 구절이 나오는데 여기서 왜는 가야를 왜로 오해하여 쓴 표현일뿐이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실제로 후한서 한전 변진조를 보면
弁辰與辰韓雜居,城郭衣服皆同,言語風俗有異。其人形皆長大,美髮,衣服絜淸。而刑法嚴峻。其國近倭,故頗有文身者。

변진은 진한과 의복 성곽이 같으나 언어와 풍속이 좀 달랐는데 왜와 가까이 접하여 몸에 문신을 한 사람들이 좀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즉, 가야는 왜와 교류가 많은 곳이기에 양직공도에서 가야를 왜로 오해하여 이런 오류가 발생했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사서들의 발간순서를 살펴보면

후한서 ㅡ> 양직공도 ㅡ> 북사 순인데

결국 연대순서대로 그 내용이 사실에 맞춰져서 점차 업데이트 즉, 수정됨을 알 수 있다.

요약하면 처음 후한서 변진조에서는 변진의 풍습에서 왜와 비슷한것이 있다고 밝히고 있고 이에 양직공도는 신라 성립 때 백제와 가야가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韓과 倭라는 추상적 정보를 써서 기록하였으나 이후 북사에서 이러한 오류들이 모두 정정되고 업데이트(수정)되어 부용우백제 부용어가락국으로 업데이트 정정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3.9. 구당서

중국의 사서인 《구당서》 동이열전 일본 기사에서는 이런 내용이 있다.
日本國者倭國之別種也以其國在日邊故以日本爲名或曰倭國自惡其名不雅改爲日本或雲 日本舊小國倂倭國之地其人入朝者多自矜大不以實對故中國疑焉又雲 其國界東西南北各數千裏西界南界鹹至大海東北界有大山爲限山外卽毛人之國

소국이었던 일본이 왜를 합병하고 국호를 일본으로 지었다고 한다. 이때 나오는 일본을 무엇으로 해석하는지 문제가 된다. 예군의 묘비를 보면 주변국을 이름을 백제일본, 고구려풍곡, 신라반도, 부상으로 적었으므로, 당나라에서 백제를 일본이라고 불렀다고도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신당서》는 또 왜가 소국이었던 일본을 합병했다고 하여 사서로서 한계를 보여준다.

3.10.광개토대왕릉비』의 내용

광개토대왕릉비(廣開土王陵碑)』도 임나일본부설을 뒷받침하는 사료로 거론되었다. 비문의 신묘년(391년) 기사를 "왜가 바다를 건너와 백제와 임나•신라 등을 격파하고 신민(臣民)으로 삼았다"고 해석하여, 당시 왜국의 한반도 남부 지배를 알려주는 결정적 증거라고 주장하였다. 그 외에도 399년에 왜군이 신라에 대규모 공격을 감행했을 때 왜군의 거점이 임나가라의 종발성인것처럼 기록되어 있기도 하다.

광개토대왕릉비』의 기록은 후대 일본에 의한 과장이나 왜의 언론플레이를 통한 윤색이 들어갔을 가능성이 낮기에 큰 논란이 되어 왔으나, 『광개토대왕릉비』의 주체를 누구로 보느냐에 대한 문제로 일단 일본의 주장은 지적받고 있다.

광개토대왕릉비』에서 논란의 중심에 있는 신묘년조는 관용적으로 신묘년(391년, 영락 1년)조라고 불릴 뿐, 정확하게 말하면 병신년(396년, 영락 6년)조의 일부분이다. 호태왕비에는 호태왕의 치적에 대한 기사는 을미년(395년, 영락 5년)조의 비려 정벌에서 시작하며 정확한 의미에서 신묘년조는 없다. 다시 말하면 문제의 '신묘년조'는 을미년조와 병신년조 사이에 끼었고, 문맥상 을미년의 비려 정벌과는 전혀 연관되지 않으므로 일반적으로 병신년조에 붙는 것으로 본다. 병신년에 호태왕이 백제를 공격한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서 신묘년(391년)의 일을 언급했다고 하면 문맥상 연속성이 있고 자연스럽기 때문이다. 고로 395년에 거란의 일족인 패려를 공격한 일과 신묘년 이래로 서술되는 문장은 결이 다르며, 신묘년과 병시년의 기사는 일맥상통하는 기사들 임을 알수 있다.[136]

문제의 신묘년조는 다음과 같다.
百殘新羅 舊是屬民 由來朝貢 而倭以辛卯年來 渡海破百殘○○○羅 以爲臣民
백잔과 신라는 예로부터 속민으로서 조공을 해 왔다. 그런데 왜가 신묘년 이래로 바다를 건너와 백잔○○○라를 격파하고 신민으로 삼았다. (기존의 번역)

신묘년조의 해석은 지금까지도 논란거리다. 일본인 학자들이 최초로 한 해석에서도 해독하기 어려운 세 개의 글자가 무엇인지를 놓고 논란이 많았다. 신(新), 라(羅), 가(加)[137]가 들어간다고 보고 "백잔, 신라, 가라[138]를 파해서 (신민으로 삼았다)"라고 해석하는 것이 보통이었지만, "백잔, 임나, 신라를 파해서"로 보거나 해독되지 않는 부분에 동사가 들어가는 것으로 간주하고 "백잔을 파하고 신라를 ○○해서"라고 보는 것도 가능하다. 도쿄대 사학과 교수인 다케다 유키오 또한 신라 앞에 파손된 문자를 東으로 파악하고 있으며, 이는 광개토대왕릉비의 중국인 연구자 왕건군이 그곳에서 탁본업을 하던 초균덕 부자에게 광개토대왕릉비의 원문이 오물이 발라져 불태워져 훼손 되기전에 필사했다는 필사본 내용과도 동일하다. 덧붙여 다케다 유키오[139]는 그렇게 주장하는 바를 북한학자 손영종의 학설과 같이하고 있다. 아래 첨부된 사진은 김진명이 주장하는 왕건군의 연구 서적에서 발견 되었다는 초균덕 부자의 필사본이며 초기에는 진위 논란이 있었지만[140] 일본학자들도 東[141]이라고 판독 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어느정도 근거는 튼튼하다고 볼수 있다. 그러나 다케다 유키오 또한 다른 일본사학자들과 다르지 않게 대전치문설을 지지하는 학자로, 왜가 백제를 도해파 하여, 동쪽에서는 신라를 ○ 했다라고 해석한다.

김진명의 한국사 X파일에 의하면, 초씨 부자에게 만들어진 저본은 원래 이끼를 제거 하기위해 광개토대왕릉비에 동물의 분면을 바르고 불지르기 전에 훼손될 경우를 대비하여 자신들이 보이는 대로 필사 했다고 밝혔다. 이 저본은 초씨가 죽고 조카 딸에게 맡겨졌으며 왕건군은 저서를 발간할 때 부록으로 첨부한 모양이다. 이것을 발견한 김진명이 왕건군의 저서를 갖고 도쿄대 동양사학과 교수 다케다 유키오를 방문하고 다케다 유키오는 이에 부끄러움을 느끼고 그 후로 東이라고 해석하고 있다고 밝혔지만 진위는..(?). 이것은 김진명의 일방적인 주장이므로 100% 신뢰할 수 없지만, 다만 선술했듯이 다케다 유키오가 東으로 판독하고 있는 것은 맞다. 안동대 임세권 교수가 발간한 논문에서도 초균덕 부자의 필사본[142]을 언급하며 東일 가능성이 크다라고 밝혔다.

다만 주의해야할 점은 참고된 논문 廣開土王碑의 硏究 -청명본 원석탁본의 검토-은 1997년에 발간한 논문으로, 김진명이 최초 소설에서 첨부한 사진은 1995년에 출판된 가즈오의 나라라는 책이므로 임세권 교수가 이것을 보고 논문을 집필 했을수도 있으므로 김진명이 첨부한 사진의 진위여부를 판단해줄수 있는 자료는 아니다. 논문 273,274쪽 참고 http://db.history.go.kr/download.do?levelId=kn_074_0060&fileName=kn_074_0060.pdf 단순히 초천주 초균덕 부자의 수초본에 東 자가 있다더라에 입각한 결자 예측이 아니라, 실제로 東의 7,8획에 해당하는 사선과 日자의 형태를 근거로 東나 更로 판독하고 있는 점에서 의의가 높다.

임세권 교수의 논문 274쪽에 첨부된 내용인데 白崎昭一郞는 훼손된 비석의 탁본을 보고 백잔의 다음 결자는 更로 추정했다. 일본측에서는 更討新羅로 해석하는 학자들이 菅・三宅을 비롯하여[143] 더럿 있는데 내용은 신라를 같이 치다라고 해석할 수 있다. 백제와 연합하여 친것이거나 백제를 치는김에 신라를 쳤다라고 해석할 수 있다. 공교롭게도 更와 東는 외관상 비슷하다. 이것이 릉비가 훼손되기 전의 탁본을 기초로 한 해석이라면 두 글자는 매우 흡사 하기 때문에 두 글자중 하나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제2차 한일역사공동연구회의 토론에서도 일본측 사학자로 참여한 하마다 고사쿠도 일본사학계의 최근 트렌드는 백제의 다음 결자는 東으로 읽는 것이다라고 발언한바 있다. https://www.jkcf.or.jp/wordpress/wp-content/uploads/2010/10/1-allk.pdf 582쪽 참고.

일본학계에서는 이렇게 해석한다고 하마다 고사쿠가 발언 하였다.
왜가 백제를 무찌르고 동쪽으로 가서 신라를 신민으로 삼았다

그러나 왜가 하필 본국에서 먼 백제를 왜 먼저 격파하고 동쪽으로 진군해서 신라를 신민으로 삼았는지 동선상으로는 납득이 안된다.

이를두고 한국측 사학자들 중에서는 고구려 주체설의 근거로 보고, 고구려가 백제를 (수군으로) 도해파하고 군사를 동쪽으로 보내, 신라를 (구원하여) 신민으로 (보호) 삼았다라고 해석한다.

파일:초균덕 부자의 석문(필사본).jpg

한때 『광개토대왕릉비』 조작설이 화제가 되었지만 중국 학자 왕건군의 연구 이후 조작은 없었다는 것이 대세가 되었다. 탁본시 더 잘 되도록 석회를 바르기는 했지만 글자를 석회로 덮어 변조하지는 않았으며, 지워진 글자는 풍화작용과 비문 발견시 이끼를 제거하기 위해 불을 붙여 태울 때 떨어지고 훼손된 것이라고 한다. 신묘년조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를 놓고 한국, 중국, 일본의 학계에서 이런저런 다른 해석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지만 아직 정설은 없다.

유명한 해석 중 하나는 정인보의 설로 신묘년조의 재해석 중에서 상당히 이른 시기에 나온 설이기도 하다. 여기서는 백제와 신라를 격파했다는 부분의 주어는 '고구려'인데 주어가 고구려인 것은 당연하므로 생략되었다고 본다. 이에 따르면
...그런데 신묘년에 왜가 왔으므로 (고구려가) 바다를 건너 백잔, ○○, ○라를 격파하고 신민으로 삼았다.

정도가 된다. 위키백과에는 이 설이 정설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그 근거로 삼을만한 글이 바로 다음에 이어진다.
...영락 6년 병신년에 왕이 몸소 수군을 이끌고 잔국(백제)을 토벌하였다. (우리) 군은 영팔성, 구모로성, 각모로성, 간저리성, □□성, 각미성, 모로성, 미사성, □사조성, 아단성, 고리성, □리성, 잡진성, 오리성, 구모성, 고모야라성, 혈□□□□성, □이야라성, 전성, 어리성, □□성, 두노성, 비□□리성, 미추성, 야리성, 태산한성, 소가성, 돈발성, □□□성, 루매성, 산나성, 나단성...

以六年丙申 王躬率水軍討伐殘國。軍□□首攻取 寧八城,臼模盧城,各模盧城,幹氐利城,□□城,閣彌城,牟盧城,彌沙城,□舍蔦城,阿旦城,古利城,□利城,雜珍城,奧利城,勾牟城,古模耶羅城,頁□□□□城,□而耶羅城,瑑城,於利城,□□城,豆奴城,沸□□利城,彌鄒城,也利城,太山韓城,掃加城,敦拔城,□□□城,婁賣城,散那城,那旦城,細城,牟婁城,于婁城,蘇灰城

고구려의 수군(水軍)을 이용했으므로 바다를 건너서 백제를 격파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3.10.1. 고구려 주체설에 대한 의문점과 그에 대한 반박


고구려는 육로로 백제 신라와 연결되어 있기에 왜에 비해 바다를 건너와 공격할 가능성이 적다라고 언급했지만, 이는 완전히 잘못된 지적이다. 당장 신묘년 다음 기사인 396년 병신년 기사에 왕이 몸소 수군을 이끌고 백잔을 정벌했다라고 기록 되어 있고, 또 다른 기사에서 수군으로 백제를 격파 했다는 정황을 증언하는 기사가 있다.

삼국사기의 기록으로도 광개토대왕이 수군으로 신묘년에 4면이 바다인 관미성을 공격한 내용이 나온다. 삼국사기 392년 백제 본기와 고구려 본기에 기록되어 있는 기사는, 광개토대왕 즉위 원년의 기사인데, 릉비에서 渡海破 했다는 기록도 같은 년도에 일어난 사건이다. 삼국사기의 기년 문제로 인해 392년으로 오기 되어있지만, 즉위 원년에 발생한 일로써 신묘년의 渡海破와 완전히 교차검증 된다. 삼국사기와 광개토대왕릉비에 대놓고 백제를 수군을 공격했다고 다른 기사에 나오니 이 지적은 완전히 무효하다.[144]
以六年丙申 王躬率水軍討伐殘國
396년에 대왕이 몸소 수군을 이끌고 백제를 토벌하였다.
冬十月,攻䧟百濟關彌城。其城四面峭絶,海水環繞,王分軍七道,攻撃二十日,乃拔。
겨울 10월에 백제 관미성(關彌城)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그 성은 사면이 가파른 절벽으로 바닷물이 둘러싸고 있어 왕이 군사를 일곱 길로 나누어 20일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삼국사기 고구려본기 391년)

즉, 391년은 광개토대왕 즉위 원년이다. 아들인 장수왕으로써는 부왕의 즉위 원년에 실행한 군사 원정을 공덕비에서 빼놓는 것은 사리상 맞지 않는다. 그러므로 삼국사기의 백제를 격파한 기록과 신묘년의 도해파 기록은 동일한 사건을 서술하고 있으므로 왜국이 주체가 될수 없다는 것이다.

광개토대왕릉비에 주어가 생략된 부분은 비단 신묘년조 기사만이 아니다.
十年庚子 敎遣步騎五萬 往救新羅.
영락 10년 경자년, (왕이 혹은 고구려가) 보병과 기병 5만을 보내 신라를 구원하게 했다

병신년조와 신묘년조에 대한 중복 논란은, 391년에 백제를 격파한 것은 왜국과 연합전선을 꾸린 백제를 격파하고 군사를 신라로 돌려 왜구를 격파했다는 의미로, 백제에 대한 예속의 관계를 내포하지 않는다. 오직 신라에 대한 예속관계 (신민)로 서술할 뿐이다. 이에 대한 근거로, 신라는 391년 이후로 고구려에게 완전히 복속하고 저자세가 되지만 백제는 릉비의 원문상 396년에도 저항한 모양이다. 후에 나오는 396년 기사에서 고구려가 완전히 백제를 속민에서 신민으로 만들었다고 해석한다. 즉, 391년에 신라를 왜국과 백제의 침략에서 방어하고 보호하기 위해 신민으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실제로 삼국사기에 의하면 신라는 393년에도 왜구의 공격에 시달린다. 앞선 해석처럼 신묘년 (391년)에 신라가 왜국의 신민이 되었다면 393년에 또 침공할 이유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3년후인 396년에 이번에는 고구려가 백제를 (이미 391년에 신민으로 복속시킨 신라가 아니라) 정복하여 신민으로 만들었다는 뜻이다. 실제로 396년의 기록에 아신왕이 스스로 고구려의 노객이 되겠다고 맹세했다는 구절이 나온다. 고로 고구려 입장에서는 이를 두고 완전히 백제를 복속시키고, 신민으로 삼았다고 생각할만 하다. 하지만 뒤의 릉비의 기록에서 백제가 약조를 어기고 왜와 재화통 했다는 기록이 나오는데, 이는 391년에 백제를 격파하고 신라로 군사를 돌려서 신라를 왜구로부터 구원했다는 해석과 일맥상통한다. 고구려 광개토대왕 입장에서는 백제와 왜국의 공동전선이 매우 신경쓰인 모양이다. 다음은 396년의 기사다.
而殘主困逼 獻出男女生口一千人細布千匹 王自誓。「從今以後永爲奴客。」
백잔(百殘)이 의(義)에 복종치 않고 감히 나와 싸우니, 왕이 크게 노하여 아리수를 건너 정병(精兵)을 보내어 그 수도에 육박하였다. (백잔군이 퇴각하니 … ) 곧 그 성을 포위하였다. 이에 잔주(殘主)가 곤핍(困逼)해져, 남녀(男女) 생구(生口) 1천 명과 세포(細布) 천 필을 바치면서 왕에게 항복하고, 이제부터 영구히 고구려 왕의 노객(奴客)이 되겠다고 맹세하였다. 태왕은 잔주의 잘못을 은혜로서 용서하고 뒤에 순종해 온 그 정성을 기특히 여겼다. 이에 58성 700촌을 획득하고 잔주의 아우와 대신 10인을 데리고 수도로 개선하였다.
391년 신라를 속민에서 신민으로 예속관계를 강화하고 신라를 백제나 왜국의 침입으로부터 보호 해줬다는 기록은 삼국사기의 기록과 광개토대왕릉비 기사로 교차검증 되며 그 비슷한 시기에 신라를 고구려에 볼모를 보낸다.[145]
九年己亥 百殘違誓與倭和通。王巡下平穰。而新羅遣使白王云。「倭人滿其國境 潰破城池 以奴客爲民 歸王請命。」 太王恩慈 矜其忠誠 □遣使還告以□計.
영락 9년 (399) 기해년, 백잔이 맹세를 어기고 왜와 화통[146][147]하였다. (이에) 왕이 평양으로 내려가 순시하였다. 그러자 신라가 사신을 보내 왕께 아뢰기를 "왜인이 신라의 국경에 들어차 성지(城池)를 부수고 노객(신하, 즉 신라 내물왕)은 고구려의 민(民)으로써[148] 왕께 귀의해 구원을 청합니다."라고 하였다. 태왕은 은혜롭고 자애로와서 그 충성심을 갸륵히 여겨, 신라 사신을 보내면서 계책을 (알려주어) 돌아가 고하게 하였다.
三十七年,春正月,髙句麗遣使。王以髙句麗強盛,送伊湌大西知子實聖爲質。
37년(392) 봄 정월에 고구려에서 사신을 보냈다. 왕은 고구려가 강성했으므로 이찬(伊湌) 대서지(大西知)의 아들 실성(實聖)을 보내 볼모로 삼았다.

실례로 삼국사기에서 제일 신묘년에 제일 근접한 왜국의 신라 침공 기사(393년)를 보면, 왜국이 침공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결국 신라에게 패퇴당하는 모습이 기록되어 있으므로 왜국이 백제와 신라를 신민으로 삼았다는 기사는 교차검증 되지않는다. 만약 고구려인들이 진짜로 392년을 391년 신묘년으로 착각하여 광개토대왕릉비에 오기했다면, 이 삼국사기의 신라본기 내용은, 일본측에서 해석하는 바에 따르면 왜국이 신라와 백제를 신민으로 삼은 후, 바로 이듬해의 일이다. 반대로 삼국사기의 고구려본기의 광개토대왕의 즉위기사가 실제로는 391년에 있었던 일이라면, 신묘년조 기사와 2년의 차이를 두고 생겨난 일이다.

백번 양보해서 일본측 주장이 맞다고 상정해도 백제와 신라를 신민으로 삼고 1~2년만에 어떻게 신라에 대한 통제력을 잃고 또 다시 침공 했는지가 의문이다.
게다가 今賊弃舟深入, 즉 배를 버리고 쳐들어왔다고 기록 되어있는데, 진짜 신라를 신민으로 삼았거나 가야를 지배하고 있다면 배를 타고 재침공을 할 하등의 이유도 없다. 백제와 신라를 스스로 복종시키고[149] 신하로 삼았는데 왜 저항하고 있는가. 게다가 단순 교전의 기록이 아니라 심지어 패주까지 한다.
三十八年,夏五月,倭人來圍金城,五日不解。將士皆請出戰,王曰,「今賊弃舟深入,在於死地,鋒不可當。」 乃閉城門。 賊無功而退, 王先遣勇騎二百, 遮其歸路, 又遣歩卒一千, 追於獨山, 夾擊大敗之, 殺獲甚衆

38년(393) 여름 5월에 왜인을 포위하고 5일 동안 풀지 않았다. 장수와 병사들이 모두 나가 싸우기를 청하였으나, 왕이 “지금 적들은 배를 버리고 깊숙이 들어와 사지(死地)에 있으니 그 날카로운 기세를 당할 수 없다.”고 말하고 이내 성문을 닫았다. 적이 아무 성과없이 물러가자 왕이 용맹한 기병 2백 명을 먼저 보내 그 돌아가는 길을 막고, 또한 보병 1천 명을 보내 독산(獨山)까지 추격하여 합동으로 공격하니 그들을 크게 물리쳐서 죽이거나 사로잡은 사람이 매우 많았다.

눈치 챘을수 있지만, 광개토대왕릉비에 백제 아신왕이 스스로 奴客이 되겠다고 칭하며 광개토대왕 앞에사 약조하는 기사, 또 그후에 신라 내물왕이 스스로 고구려의 奴客으로 청하며 왜군으로부터 방위를 해달라고 부탁하는 기사가 나오고 있다. 상술한 고구려 주체설 해석이 맞다면 奴客이라는 단어가 고구려가 백제 신라를 신민으로 삼았다는 근거가 될수도 있다. 실제로 아신왕과 내물왕이 스스로 고구려의 노객을 자처했든 고구려가 과정과 윤색을 덧붙였든간에 奴客이라는 단어를 신묘년조의 신민이라는 단어를 의식해 '의도적'으로 선택해 백제 신라가 노객을 자청하고 굴복 했다고 언급했다면 고구려 주체 해석론이 힘을 얻고 설사, 그것이 과장과 윤색이라고 해도 이것은 신묘년조의 왜구가 신라와 백제를 신민으로 삼았다는 내용은 공존할 수 없으므로 일본측에서 주장하는 신묘년 해석은 말이 되지 않는다.

실제로 학계에서 노객을 당대에 사용하던 신하[150]라는 뜻을 가진 단어라고 의역하는데 백제와 신라를 고구려의 臣民으로 만들었다고 해석하면 신묘년조 기사와도 썩 어울린다. 광개토대왕릉비 원문에 나온 속민과 신민의 용례를 조사하자면, 속민은 조공을 바치는 상대국의 왕이나 백성들을 뜻하고, 신민은 신하로써 복종하여 상대국 왕이 직접 대왕께 조공을 바치거나 항복한 주체로 해석할 수 있는 것이다. 백제의 아신왕과 신라의 내물왕은 그들 스스로가 대왕을 직접 알현하고 아신왕의 경우에는 노객이 되겠다고 스스로 선언 했고, 내물왕 또한 사신을 보내어 대왕의 노객으로써 왕께 귀의한다고 말하였으며, 후에는 직접 대왕을 알현하고 조공까지 바쳤다. 그러므로 신민은 속민보다 예속성이 더 강하다고 결론 지을 수 있다.

고로, 이 노객이라는 단어를 의도적으로 부각 시켰다면 왜국이 신묘년에 바다를 건너와 백제와 신라를 신민으로 삼았다라는 해석은 모순이다. 즉 노객이라는 단어와 백제왕의 광개토대왕에게 복속하며 했던 대화 내용등 전부 신묘년 기사의 신민이라는 단어를 의식해서 의도적으로 삽입한 프로파간다라는 것이다.

실제로 전근대의 인질이란 지금과 같은 단순한 볼모의 의미가 아닌 외교관이나 보증의 증표 같은 역할도 표현하는 그런 단어였었다. 가령 일본인들이 임나일본부설의 근거로 주장하는 백제가 일본에 보냈다는 인질들만 보아도 정작 당사국들인 백제삼서의 기록[152]과 일본 쪽의 기록[153]들 중에서는 그 어디에도 인질을 보냈다고 하진 않는다. 즉, 일본서기에도, 또 일본서기에서 인용했다는 백제의 기록에도 '인질'이라는 표현은 없고, 정작 한참 후대인 고려시대에 쓰인 삼국사기 이런 표현이 나올 뿐이다. 문제가 되는 삼국사기조차도 해당 구절을 살펴보면 결호(結好)라고 하여 상하관계에 따른 인신공납이 아닌 단순히 우호관계를 맺기 위해 일종의 외교관으로서 파견되었음을 알 수 있고, 인질(質)의 의미도 상하관계와 무관함을 밝히는 견해를 나행주를 위시한 학자들이 제시하여 설득력을 얻었다. 실제로 일본측은 외교관으로서 일본을 방문했었던 김춘추도 인질이라고 표현했기 때문에 그 당시 인질이란 단순히 볼모가 아닌 외교관이었음을 알 수 있다.

가령 덴쇼 14년(1586)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자신의 어머니인 오만도코로를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인질로 보냈지만 당시 히데요시가 이에야스에게 굴복을 선언한 것이 아니듯, 전근대의 인질은 지금처럼 단순한 볼모로서의 의미가 아니라 외교관 또는 보증의 증표 같은 여러 의미들을 모두 포함하는 포괄적인 개념이었다.

2004년에 정인보의 해석을 뒷받침하는 유물이 발견되었다고 해서 화제가 되었는데, 이 유물은 '호태왕'과 '신묘년'이 적힌 방울이다. 방울을 만들었으므로 중요한 일이 있었을 것이고, 그 중요한 일은 신묘년에 백제와 신라를 굴복시킨 것이 틀림없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반대측에서는 그 정도로 중요한 일을 병신년조에 끼워서 언급하는 것은 말이 되지 않고, 방울을 만들었음 → 중요한 치적이 있었음 → 신묘년에 백제와 신라를 굴복시켰음 으로 해석하는 것은 지나친 확대해석이라고 본다. 즉위 1년에 방울을 새로 만드는 것은 특별한 일이 아니지 않느냐는 것. 다만, 주어 교체설의 옳고 그름을 떠나서 후술한 삼국사기와 광개토대왕릉비의 1년 격절에 대한 의문을 해소 시켜줄 중요한 단서로 작용한다.

그 외에도 해(海)가 매(每)를 잘못 읽은 (혹은 변조한) 것이라고 보기도 하며, 이 경우 "왜가 바다를 건너왔지만 (고구려가) 매번 격파하고 백잔, ○○, 신라를 신민으로 삼았다", 혹은 "왜가 바다를 건너왔지만 (고구려가) 매번 격파하자 백잔이 신라를 ○○하여 신민으로 삼았다" 등으로 해석한다. 단 이러한 설 역시 정인보의 설과 같은 약점이 있다.

그 외에도 渡海破(도해파)가 入貢于(입공우)를 변조한 것이라는 주장[154]도 나왔지만, 이 주장에 따르면 원래의 글자 중 入은 높이가 다른 글자의 절반 정도였어야 하고 于는 오른쪽 2/3 정도에 몰려있었어야 하며, 변조 과정에서 획을 채워 없애기까지 해야 하는 등 치명적인 문제들이 있어서 진지하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신묘년조 해석에 큰 문제가 없다고 보는 사람도 있다. 신묘년조 이후에도 백제가 맹약을 어기고 왜와 화통했기 때문에 왕이 평양성까지 몸소 나갔다는 언급이 나오는 등 백제와 왜의 관계가 매우 중요하게 다루었다. 왜도 신라를 공격하거나 고구려를 직접 공격하는 등의 활발한 활동을 보이고 있기 때문에 기존의 신묘년조 해석이 문맥상 잘 맞는다는 것. 이러한 쪽에서는 신묘년조 앞부분에 백제와 신라가 원래부터 고구려의 속민이었다고 하는 부분에 주목하며 '신민'의 의미가 잘못 해석되었다고 본다.

신묘년조 해석에 큰 문제가 없다고 보는 사람도 있다. 신묘년조 이후에도 백제가 맹약을 어기고 왜와 화통했기 때문에 왕이 평양성까지 몸소 나갔다는 언급이 나오는 등 백제와 왜의 관계가 매우 중요하게 다루어지고 있고 왜도 신라를 공격하거나 고구려를 직접 공격하는 등의 활발한 활동을 보이고 있기 때문에 기존의 신묘년조 해석이 문맥상 잘 맞는다는 것. 이러한 쪽에서는 신묘년조 앞부분에 백제와 신라가 원래부터 고구려의 속민이었다고 하는 부분에 주목하며 '신민'의 의미가 잘못 해석되었다고 본다. 백제와 신라가 원래부터 고구려에 복속했다고 보는 사람은 없다. 호태왕비를 세울 당시에는 신라는 고구려에 복속했다고 할 수 있겠지만, 영락 1년인 신묘년의 시점에서는 신라가 고구려에 복속한 일이 없었다. 이는 단순히 《삼국사기》 등을 통한 해석이 아니고, 『광개토대왕릉비』 자체의 영략 10년 경자년조에서도 "지금껏 신라 매금은 스스로 와서 명령을 청하고 조공논사하지 않았다. 광개토경호태왕에 이르러 신라 매금은 명령을 청하고 조공하였다." 라고 서술하고 있다. 조공의 기록은 없지만, 선술했듯이, 삼국사기와 광개토대왕의 1년의 격절[155][156]이 있는 것을 염두에 두고 사료를 찾아보면, 신라본기의 기사[157]로 신라가 이찬(伊湌) 대서지(大西知)의 아들[158]을 볼모로 보내는 기사가 나온다. 이는 삼국사기에 따르면, 광개토대왕의 즉위 이전의 일이다.[159] 고구려 입장에서는 이를 두고 속민이라고 칭했을수도 있다.

또 삼국사기에 따르면 245년 고구려가 신라를 침공하여 신라측에서는 석우로를 내세워 방어 했으나, 패배한 기록도 나온다. 고로 고구려가 신라를 신묘년 이전부터 강하게 몰아세운건 맞다. 또한 백제의 근초고왕이 신라에게 말 두필을 선물하며 우호를 싹트던 신라 백제의 관계도 근초고왕의 사망 전후부터 고국양왕 시절 신라가 인질을 보내기까지 일련의 사건들을 보면 삼국간의 역학관계에 대변혁이 감지되고 있다. 실제로 근초고왕 사망직후와 광개토대왕 즉위 직전까지 신라는 백제와 결탁하던 모습이 사라지고 이제는 고구려와 결속하는 모습이 나타는데, 그 근거는 377년과 382년의 신라사신의 전진 황실 입조가 있다. 이는 고구려 사신과 같이 동행한 정황이 포착되고 있다. 덧붙여 흥미로운점은 신라와 백제가 우호를 쌓고(366년) 백제의 근초고왕이 말 두필을 신라에게 선물을 보내며(368년) 친선을 도모하기 전후에는 삼국사기의 기록으로 왜국의 침입은 없었지만, 다시 극성을 부리기 시작한 것은, 고구려와 결속이 강해진 (고국양왕 치세기로 볼수도 있다. 왜냐하면 고국양왕의 죽기 직전에 신라는 고구려에 인질을 보냈기 때문이다) 광개토대왕 즉위 직후이다. 하마다 고사쿠는 이를 두고 백제가 배후에서 왜국을 포섭하여 고구려와 결탁한 신라를 괴롭히라고 사주한게 아닌가하고 추정하기도 한다.https://www.jkcf.or.jp/wordpress/wp-content/uploads/2010/10/1-04k.pdf

본론으로 돌아와서, 혹자들은 '신민'은 '속민'보다 오히려 예속의 정도가 약하기 때문에 왜가 백제와 신라를 '신민'으로 삼았다는 말도 별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혹은 이런 점 때문에 아예 신묘년조의 서술 전체가 역사적 사실보다는 일종의 정치적 구호에 불과하다고 보는 사람도 있다(1974년에 일본의 하마다 고사쿠(濱田耕策)가 제기한 주장). 그러나 광개토대왕비석의 원문을 보면 속민이라는 단어가 한번 더 등장하지만.[160] 용례를 따져보면 단순히 조공을 수취하는 꽤 느슨한 관계로 정의하는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실제로 396년이나 399년의 기사를 보면 백제의 아신왕과 신라의 내물왕이 고구려의 노객을 자칭하고 있으며, 아신왕 같은 경우에는 스스로 무릎 꿇고 알현 하며 자신의 동생을 인질로 보냈고, 내물왕은 후에 직접 대왕을 알현 했거나 왕자 복호를 시켜 알현하며 조공을 바쳤다.[161] 단순히 조공을 바치는 신묘년에 등장하는 속민의 관계보다는 앞서 언급한 396년이나 399년 기사가 예속성이 더 강하다고 볼수 있는 것이다. 즉 하마다 고사쿠의 주장을 정면으로 반박하는 셈이다.

신묘년조를 병신년조와 또 이후에 등장하는 왜와 신라 백제 가야 등 한반도 남부의 기사들을 위해 꾸몄다는 대전치문설에 대한 한국 학계의 반응은 가야사 전문가 김태식 교수가 제1차 한일공동역사연구회에서 개인이 투고한 논문에서 알수 있다.

일본측 신묘년 해석에 대한 한국학계의 대표적인 반론은 대체적으로 이러하다
다만 요즘 학계에서 대체로 인정되는 것은 신묘년 기사가 광개토대왕의 '王躬率'(왕의 친정) 즉 원정 이유를 설명하는 전치문이거나 혹은 영락 6년 백제 토벌의 '전치문'일 뿐만 아니라 이후 모든 원정 기사의 導論(명분)이 되는 '대전치문'이며, 왜가 강하다는 것은 사실과 다를수 있으나 고구려는 왜를 트릭스타로 사용하였다는 등의 견해이다. 광개토대왕릉비의 왜는 왜구일 뿐이나 과장되게 표현되었다고 보는 견해도 그와 마찬가지이다. 이 견해들은 비문을 통해 (왜국의) 남한경영론 (임나경영설)을 주장할 수 없다는 점에는 동의 했다고 보이나, 고구려가 주목할 만한 왜의 실체가 있다는 것을 입증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이 기사가 원정의 '전치문'이라면 고구려가 - 자신에게 적대행위를 한 왜가 아니라- 백제를 공격한 이유라고 보기에 합당치 못하다. 이 기사가 모든 남정의 '대전치문'이라고 한다면 그 바로 뒤에 백제를 공격한 기사가 나오는 것을 변명할 수 있어도, 이 기사가 어째서 이곳에 위치하고 있는가의 문제가 여전히 남는다. 왜냐하면 영락 6년조 뒤에 이어 나오는 8년조는 숙신(息愼)에 대한 것으로 방향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비문의 구조상으로는 신묘년 기사를 '王躬率' 형태를 띠는 영락 6년 백제 討置文의 '전치문'으로만 보는 것이 가장 논리적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 문장의 뜻은 백제와 신라가 옛날부터 속민이었으나 신묘년에 왜가 어떤 방식으로 작용하여 백제가 여기서 이탈하고 신라만이 그대로 신민이 되었다는 내용이 되어야 한다.

여기서 辛卯年 기사의 原文을 다시 살펴보자.

B. 百殘新羅 舊是屬民 由來朝貢 而倭以辛卯年來渡□破百殘□□新羅以爲臣民。

가장 문제되는 것은 '百殘□□新羅'가 왜의 신민이 되었다고 볼 수 있는 문제이다. 혹은 사실 여부를 떠나 고구려가 그렇게 인정했는가의 문제도 포함된다. 그러나 비문 자체의 용례만 분석해 볼 때, 여기에는 세 가지 문제점이 있다.

첫째는 왜가 백제를 신민으로 삼았다면 영락 6년조에 고구려가 백제를 공격할 때 왜의 면모가 보여야 하나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특히 백제가 항복하는 장면에서 그 타협을 왜의 총독(總督)이 아닌 백제왕이 주도하고 있으므로, 고구려가 백제를 왜의 신민이라고 인정할 여지가 없다.

둘째로 영락 9년조로 보아 왜는 백잔과 화통의 대상이라는 점이다. 이는 영락 6년에 백제왕이 고구려의 노객이 되기로 맹서한 이후의 상황이기는 하나, 만일 그 전에 왜가 백제를 신민으로 삼았거나 또는 고구려가 그렇게 인정하였다면 비문의 이 대목에서도 그 위세의 차이가 드러나야 한다. 그러나 '화통'이란 대등한 상대 사이의 협약을 의미하는 단어이다.

셋째로 비문에 나오는 民의 개념에는 오로지 고구려의 民만 있을 뿐이고, 다른 나라의 백성을 '民'으로 표기한 사례가 없다는 점이다. 백제왕조차도 노객일 뿐인데 왜국의 民을 奴가 아닌 신민으로 표기하였을 리가 없다. '民'의 용례는 비문에 모두 11회 나오는데, 그 중에 신민 외에 고구려의 民이 아니라는 논란이 있는 것은 영락 9년조의 '以奴客爲民'[162][163]뿐이나, 그에 대해서는 후술한다. 또한 사실의 문제로서 접근해 볼 때, 백제와 신라가 옛날부터 조공해왔다는 것은 허구이다. (하략)
출처: https://www.jkcf.or.jp/wordpress/wp-content/uploads/2019/11/1-02k.pdf 제1차한일역사공동연구회 4세기 한일관계사 19-21쪽 -김태식
그가 제기하는 문제를 이해하려면 광개토대왕릉비의 정복전쟁 부문에 대한 구조를 알아야한다. 정복전쟁 부분의 첫번째로 등장하는 기사는 395년의 비려(稗麗) 정벌 기사이다. 그 다음에 391년 신묘년으로 돌아와 문제의 기사를 서술하는 구조이다. 즉, 신묘년 391년의 기사는 연대순서에서 열외된 기사임을 알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중국인 고구려사 연구자 왕건군은 정확한 의미에서 신묘년 기사는 없고, 후에 등장하는 남정 기사들의 명분과 프로파간다를 기록한 이른바 '전치문'으로 봤고, 하마다 고사쿠를 위시한 일본학계에서는 더 나아가 이후에 나오는 대부분의 기사들을 수식하는 '대전치문'[164]으로 해석하였다.

그러나 김태식 교수의 주장에 의하면 6년조 백제 정벌 직후에 등장하는 8년조의 숙신에 대한 원정은 일본측이 신묘년 대전치문설을 주장하는 근거로 이용하는 왜에 대한 내용 혹은 백제와 신라 가야등 한반도 남부의 정세와 하등 관련 없는 내용이므로 '대전치문'설에 흐름이나 연속성이 깨진다며, 광개토대왕 원년부터 17년 정미년[165]까지 수식한다는 '대전치문설'에 대해 문제를 제기 했고, 오직 6년 백제 원정의 명분만 프로파간다로 활용 했다는 것이다.[166]
고로 '대전치문설'이 아닌 '전치문설'이 합당하고, 이 전치문은 6년 병신년의 백제 원정만 수식하고 있으므로, 신묘년의 도해파 주체는 왜와는 아무 관련 없는 세력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396년의 기사 직후는 신묘년 전치문의 수식이 종결상태 혹은 완결 상태다. 즉, 백제 정벌 396년 직후의 문장들은 신묘년 전치문이 종결된 상태이므로 396년 기사의 직후의 기사인 398년 숙신 정벌부터 시작해서 광개토대왕릉비의 정벌 마지막 기사까지는 신묘년과 아무 관련 없는 내용이라는 것이다. 직접적으로 얘기하지는 않았지만, 그렇게되면 또 신묘년의 주체는 왜국이 아니라는 문제의식이 생기고, 그것을 고구려가 실시한 원정 혹은 신라 구원으로 볼수 있는 것이다.[167]

또 이런 식으로 해석할 경우 신묘년에 고구려가 부각 시키고 있는 주동 세력은 왜가 아닌 백제로, 왜는 단순히 백제의 지원 세력이다. 왜냐하면 신묘년에 왜가 백제나 신라를 신민으로 삼았거나 백제를 격파하고 군사를 동쪽으로 돌려 신라를 신민으로 삼았다고 하면, 직후의 병신년 기사에는 백제을 정벌 하는게 아니라 왜를 공격해서 고구려 중심의 질서에서 백제를 이탈시킨 왜에게 응징하는 내용이 나와야만 의미가 통하며, 설사 고구려가 (왜가 아닌) 백제를 공격 하였다고 해도, 백제를 신민 혹은 복종 시킨 왜의 존재가 어떤 형식로든 도출 되어야 하는데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신묘년조에서 파손된 문자가 갱토신라(更討新羅)라고 해석할 경우에도 마찬가지로, 왜와 백제가 같이 신라를 침략 했다라고 해석해도, -선술된 398년 숙신 정벌의 기사 문제로 인해 396년 후의 기사들은 신묘년/병신년의 맥락과 닿아있지 않기 때문에- 신묘년은 병신년의 기사만 수식하는 '전치문'이고 병신년에 나오는 정벌의 대상은 '오직' 백제이므로 문제의 신묘년 전치문에서 부각하는 주동 세력은 백제이고 왜는 단지 백제의 지원세력이라고 해석한다.

또한 그가 언급했듯이 릉비에 등장하는 다양한 민(民)을 포함한 단어들이 등장하는데, 그것들은 신민(臣民), 속민(屬民), 구민(舊民), 신민(新民) 등인데, 각각 속민은 고구려에게 조공을 바치는 국가, 구민은 원래의 고구려 백성들, 신민(新民)은 정복 사업에서 새로 얻은 백성들을 뜻한다. 즉, 전부 고구려를 주체로 해석해야 의미가 통한다. 고로 같은 '민(民)'자가 들어가는 신민(臣民)은 그 용례에서 벗어날수 없다는 것이다. 후에 제2차 한일공동역사구회에 참가하게 되는 조법종 교수 또한 신묘년 호태왕 방울이 발굴된 이후로 신묘년에서 신라를 신민으로 삼은 주체는 고구려가 되어야 하지 않냐는 발언을 한적이 있다.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163509

한국 주류 학계에서도 일본의 신묘년 대전치문설을 비판없이 모두 수용한다라는 일부 재야학계의 주장과 다르게 일본측 해석에 문맥이나 내용상에 이의를 제기하고 있는 것이다. 다만 개찬설을 주장하다가 일부 보기좋게 논파 당하였으니, 확실한 증거나 연구가 진전될때 까지 신중하게 접근한다는 느낌이다.

사실 그냥 일본 측 해석대로 보더라도, 신묘년조의 내용이 반드시 임나일본부설에 유리한 것만도 아니다. 만약 임나 지역이 오래전부터 일본부 영토였다면 왜 신묘년에 임나를 백제 및 신라와 나란히 '신민'으로 삼았다는 기록이 나오는가 하는 점 때문이다. 즉, 파백제, 파신라(신라와 백제를 공격)해서 신민으로 삼은 시기가 391년이고 광개토대왕의 원군으로 격퇴된 시기가 400년이니 왜군이 점령했던 기간은 길게 봐야 9년이다. 즉, 기존의 임나일본부설이란, 왜국이 서기 4-6세기에 걸쳐 한반도 남부 지방에 일본부라는 통치 기구를 세워서 이를 오랫동안 식민지로 삼았다는 주장인데, 일본이 원하는 대로 신묘년조를 해석하면 오히려 기존의 임나일본부설을 부정하는 내용이 되어버린다.

반대로 임나가 언급되지 않았다고 보면 임나일본부설과는 별로 관계가 없는 것이 된다. 혹은 임나가 이미 일본 영토이면 왜가 '바다를 건너'올 이유가 없다며 임나일본부설을 부정하는 쪽으로 해석하기도 하는데, 《일본서기》에도 왜군이 바다를 건너서 임나 지역에 있는 세력과 합세하는 식으로 기술했기 때문에 다소 무리가 있다. 하지만 고구려에서 왜군이 일본 영토 내부에서 한반도로 이동한 것까지 기록하고, 과연 그런 일본 내부의 이동 상황들까지 당시에 세세하게 알 수 있었을까? 그래서 단정하기가 어렵다. 이와 비슷한 예로 일본측의 주장하는 신묘년조 해석을 수용하고 진짜 있었던 일이라고 가정하여 왜국이 진짜 신라를 391년 혹은 392년에 신민으로 만들었다고 가정하보자. 그러나 이 해석을 곧이 고대로 받아들이자니 393년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적혀있는 今賊弃舟深入 문장을 보면 적들이 배를 버리고 깊숙이 들어왔다라고 명기 되어있는 내용이 공존할 수 있냐에 의구심을 지울수 없다. 정말 신라를 391년에 신민으로 만들었다면 다시 배를 타고 재침공할 하등의 이유도 없다. 또 신민 즉, 스스로 복종 시켰는데 왜 신라는 왜국에 대항하고 또 이 기록에서는 심지어 왜군이 패주까지한다. 짧은 문장 하나가 그야말로 전방위적으로 논란이 되는 형국이다.

사실 전쟁, 외교 관련해선 뻥카가 심해서 유력집안 전설까지 끼워넣으며 평원왕 대에 고구려 왕이 도망가고 고구려 궁궐까지 털어먹었다고 기술하는 《일본서기》391~396년 기사에서 백제 침략기사가 전혀 없음 또한 광개토대왕릉비와 임나일본부를 끼워맞추는 논리의 크나큰 약점이다. 《일본서기》에서 해당되는 기간의 백제 관련 서술은 '백제 왕(진사왕)이 천황에게 예의가 바르지 않아 사신 4명을 보내 책망하니 부끄러워서 진사왕이 죽고 아신왕을 왕위에 옹립했다.'는 것, '아신왕이 왕자를 일본에 보내 우호를 닦았다.'것, 딱 둘이다. 첫 번째 서술에서 천황 관련한 개드립을 지우면 아신왕이 진사왕을 일본세력을 끌어들여 암살하고 왕위에 옹립했다고 해석할 수 있는데, 광개토대왕릉비의 破百殘○(파백잔x)은 바로 이를 설명하는 구절로 볼 수 있다.
우선 5세기 초의 상황을 대변하고 있는 廣開土王碑文의 경우 그 해석과 관련하여 많은 연구가 이루어지기는 했지만, 한반도 내 倭의 활동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 및 고구려에 대항하는 주체에 대한 문제는 여전히 논란이 되고 있다.

하지만, 그동안 369년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아왔던 七支刀(칠지도)의 銘文을 재고찰하면 七支刀는 369년이 아니라 408년 11월16일 백제의 腆支王 4년에 만들어진 것을 알 수 있기 때문에, 七支刀를 통해 5세기 초 百濟와 倭의 관계를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즉, 七支刀 銘文에 나오는 「泰四年」 및 「宜供供侯王」 등은 百濟가 주체가 되어 倭王인 侯王이 百濟에 신속하고 있던 侯王이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기 때문에 5세기 초 百濟와 高句麗의 전쟁에서 倭가 주도적으로 활동한 것이 아니라 百濟가 주체가 되어 수행한 전쟁에 倭가 지원군의 형태로 왔던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宋書』에서 5세기의 소위 倭 5王이 한반도 남부에 대한 諸軍事權을 자칭하고제수를 요청했던 문제가 쟁점으로 남아있다. 하지만, 이는 당시 야마토 정권이 한반도 남부를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에 나타난 것이 아니라 百濟가 관할하고 있었던 영역을 倭가 자신의 영역으로 주장하려 했기 때문에 나타난 현상임을 알 수 있다.

즉, 이러한 요청은 倭王 珍에 있어서나 武에게 있어서 百濟와 軋轢이 있었던 毗有王 시기 또는 웅진 초기 등 百濟의 정국변동이 있었던 경우에 요청되었다는 특징을 보이고 있다. 이는 기본적으로 腆支王 이래 百濟와 야마토 倭가 양국 왕족 간 혼인에 의한 혈연, 인척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촉발된 사건이며, 이처럼 백제 왕실과 야마토 왕실은 4세기말 이래 지속적인 인적교류를 통해 화친을 맺음으로써 정치적, 군사적으로 유대감을 강화했음을 알 수 있다.
- 홍성화, 5세기 百濟의 정국변동과 倭 5王의 작호, 한국고대사연구, 2010, vol., no.60, pp. 75-115 (41 pages)

호태왕 10년에 신라를 구원한 사건 역시 논란의 대상이다. 대한민국 학계에서는 그 전해부터 신라를 공격한 것을 백제 - 왜 - 가야의 연합군으로 간주하고 백제가 공격을 주도했다고 보고 있지만, 실제로 비문에서는 왜군만이 언급되어 있다. 백제군이 주력이었다면 왜 백제군이 언급되지 않는지가 문제가 되며, 가야군이 참전했으리라는 것 역시 왜군이 패주할 때 임나로 달아났다는 점 이외에는 근거가 없으므로 임나일본부설에 맞서기가 좀 애매하다. (이에 대해 노중국 교수와 김태식 교수의 견해는 가야나 백제의 행색과 전혀 이질적인 왜군의 존재를 부각 시켰다고 추정하고 있다. 당연히 고구려 자신들이 오랜 속민이었다던 백제와 신라보다 새로운 세력과도 전쟁을 하여 복속 시켰다고 말하는게 부왕의 공덕을 찬양하는 공덕비에도 더욱 어울리는 서사다.) 왜군의 규모는 기록되지 않아서 알 수 없지만, 이때 고구려는 5만명을 동원했으므로 왜군도 상당한 규모였을 것이다.

이 부분도 한국 학계에서는 왜군은 1만 명 정도로 훨씬 적었고 단지 압도적으로 쓸어버리기 위해 대군을 동원했다고 보는 경우가 많지만, 실제 결과가 신속한 승리라는 것 이외의 근거도 없고, 당시 고구려 서북면의 국경도 그다지 안정된 상태가 아니었기 때문에 의문이 있다. 실제로 고구려군이 신라를 원정하는 동안 후연의 공격으로 신성을 비롯한 땅 700리를 잃었고, 고구려군은 신라에서 급히 돌아와야 했다. 하지만 다르게 생각해보자면, 오히려 서북면의 국경이 안정된 상태가 아니었기 때문에 오히려 더 더욱 신속하게 한반도 남부에서 최대한 빨리 왜군을 쓸어버리기 위해서라도 당시 왜군보다 훨씬 더 많은 대군을 동원했을 수도 있다. 그래서 이런 주장 또한 완전히 근거가 없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애당초 이 부분은 가야의 역사가 아직 제대로 밝혀진 부분이 별로 없다기 때문에 어떠한 설명도 별 근거가 없다는 꼬리표를 떼기가 어렵다. 가야의 역사를 가장 자세히 서술한 사료, 아니, 유일하게 서술답게 서술한 사료가 다름아닌 《일본서기》이다. 이걸 그대로 믿을 수도 없고, 부정하자니 다른 기록도 마땅치 않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당시 왜가 진짜로 백제, 가야, 신라를 모두 자신들의 신민으로 삼았다고 보기에도 일본측의 해석과 주장은 그 근거가 매우 약하다. 삼국사기는 실제 금석문의 년도보다 1년 늦은 오차가 있다. 삼국사기에서는 392년 사건들이 비석의 신묘년(391년)이 된다. 1년 오차를 보정해 백제본기의 기록을 보면 진사왕 8년이 392년이므로 이때가 비석의 신묘년 즉, 실제 391년의 사건이다.

삼국사기와 백제의 실전된 사서인 백제삼서를 인용한 일본서기와 광개토대왕릉비에서 기년에서 차이가 나는 것을 볼수 있는데 이는 칭원법에서 기인한 오차로 보인다. 당대에는 두가지 원년 기산 문제가 있었는데, 간단히 말해서 선왕이 죽고 새로운 왕이 즉위하면, 그 새로운 왕이 즉위한 년도를 원년으로 지정할 것이냐 아니면 해당년도를 선왕의 마지막 년도로 계산하고 그 이듬해를 원년으로 계산할 것이냐이다.

또 삼국사기의 백제본기 395년 기록을 보면, 백제가 먼저 선공을 했고 이에 고구려는 방어에 성공하고 광개토대왕이 몸소 군대를 이끌고 한강을 건너서 크게 백제를 대파 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 기사는 광개토대왕릉비 396년과 동일한 기사로 추정하는 견해도 있다.

삼국사기에서는 왕의 기년를 단독표기로 기사가 써져있는 반면에 광개토대왕릉비에서는 육십갑자와 광개토왕의 기년을 병기하고 있으므로 (ex, 영락5년 병신년=396년 / 영락8년 무술년 = 398년 etc) 광개토대왕릉비에서 당대 고구려인들이 계산에 착오가 있었다고 이해하기 어렵다. 고로 삼국사기에의 기록을 1년씩 당겨와야 한다. 광개토대왕이 즉위한 년도부터 사망한 년도까지 계속 1년씩 어긋나기 때문에, 적어도 광개토왕의 치세기에 한해서는 삼국사기의 오기가 지속 되고 있다. 그렇지만 광개토대왕릉비의 년도가 맞고 삼국사기의 기록을 1년 당겨오면, 백제본기 395년의 기사가 광개토대왕릉비 병신년의 기사와 2년씩 격절이 나오기 때문에 의문점이 생긴다. 그렇지만 같은 사건을 두고 기록을 한 것이라고 하는 것은 단순히 추정의 영역이지 확실하지는 않다.

혹자는 일본서기와 삼국사기가 연대가 일치하니깐 광개토대왕릉비의 기년을 1년 뒤로 당겨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신묘년 호태왕이라는 문구가 기록된 청동 방울이 발굴되면서 광개토왕의 원년은 391년[168]이라는게 중론이고, 이렇게 되면 삼국사기의 기록이 1년 오차가 있다는 것으로 결론 내려진다. https://news.joins.com/article/283056 임나일본부설과 관련된 광개토대왕릉비의 자세한 기년 문제는 해당항목 광개토대왕릉비를 참조하길 바란다.

파일:호태왕:신묘년.jpg
파일:호태왕:신묘년2.jpg
<삼국사기 백제본기 392년조 진사왕>
八年,夏五月丁卯朔,日有食之。秋七月,「高句麗」王「談德」,帥兵四萬,來攻北鄙,陷「石峴>等十餘城。王聞「談德」能用兵,不得出拒,「漢水」北諸部落,多沒焉。冬十月,「高句麗」攻拔「關彌城」。王田於「狗原」,經旬不返。十一月,薨於「狗原>行宮。
<해석>
8년 여름 5월 초하루 정묘일에 일식이 있었다. 가을 7월, 고구려왕 담덕이 4만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북쪽 변경을 침공하여 석현성 등 10여 성을 함락시켰다. 왕은 담덕이 용병에 능통하다는 말을 듣고 대항하기를 회피하였다. 한수 북쪽의 여러 부락을 빼앗겼다. 겨울 10월, 고구려가 관미성을 쳐서 함락시켰다. 왕이 구원에서 사냥하며 열흘이 지나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11월, 왕이 구원의 행궁에서 사망하였다.

그런데 그 어디에도 왜가 백제를 신민으로 삼았다는 기록은 전혀 없다.또한 광개토대왕릉비 신묘년 바로 앞 기사를 보면, 백제와 신라는 과거에 고구려에 조공해왔다고 적혀있다. 하지만, 고구려는 광개토대왕이 즉위하기전 까지 오히려 백제에게 신나게 털렸으면 털렸지, 고구려가 우위에 입던 입장이 아니었다. 고국원왕이 백제와의 전투중 전사한 사실을 상기해보자. 광개토대왕이 즉위한 391년 신묘년까지 혹은 백번 양보해서 그 이전까지 고구려가 백제를 지배하고 조공을 받았다고 볼만한 껀덕지가 하나도 없다. 당장 광개토대왕의 부왕인 고국양왕대의 기록을 보면, 백제에게 신나게 털리는 모습을 어렵지 않게 볼수 있다. 즉 백제를 침공한 이유는 명분 쌓기용 거짓말과 과장이라는게 중론이다

거기다 위에서도 설명했듯이 일본서기의 기록에서도 고구려와의 전쟁에 관한 내용은 전혀 없고[169], 삼국사기의 백제왕 사망사건의 단편만이 기록되어 있을 뿐이다.

일본서기에서 전승이 되지 않는 이유는 일본서기는 각 지방 호족이나 혼재하던 국가들의 구승을 일본이 통일을 이룩한뒤 집대성 하고, 이것을 마치 통일된 왕조에서 있었던 일인양 소급적용 했는데, 광개토대왕릉비에서 왜군의 실체는 통일왕조의 정규군이 아닌 이 소규모 국가들에서 파견한 용병 내지는 해적이었기 때문에 기록에서 누락 되었다는 학설이 있다. 게다가 당대에 문자가 없던 일본은 구전에 전적으로 의존할 수밖에 없었으니 중간에 누락 된다고 이상할게 하등 없다. 간혹 일본인들중에 중국인 학자 왕건군도 일본의 학설에 동조 했다는 식으로 말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는 사실이 아니다. 왕건군은 광개토대왕릉비가 개찬되지 않았고 일본측의 판독을 지지하는 것일 뿐 일본측 해석을 지지 하는 것은 아니다. 왕건군도 상기한 점에 주목 했는지, 당시 한반도 남부에서 전횡을 일삼은 것처럼 묘사되는 왜구의 존재를 규슈 일대에 본거지를 둔 해적 수준이라고 말했다. 즉 정규군도 아니고 지방 호족이나 국가의 군대나 해적 수준으로 한반도 남부를 경영하거나 경영할만한 능력이 있는 주체로 본 사실이 없으므로 임나일본부설과 배치 되는 이론이다.

그리고 일본측 해석되로 신민이 되었다는 신라는 신묘년 이후 비문이나 삼국사기의 기록에서도 여전히 왜에 적대적이다. 신라가 왜의 신민이었다면 왜에 적대적일 이유가 없으니 논리적인 모순 상황이다. 전략적으로 볼 때도 왜가 백제와 신라를 '깨뜨리고' 신민으로 삼았다는 해석이 납득이 안 가는 게, 강대한 고구려가 남하하고 있는 시점에서 신라 뿐만 아니라 평소 우호적 동맹 관계였던 백제까지 뜨금없이 공격해서 신민으로 삼는 것은 삼국 전체를 적으로 돌리는 어리석은 짓이다. 그리고 당시 왜가 진짜로 백제와 가야, 신라를 모두 정복하고 지배할 수 있는 역량이 있었는가 하면 그것도 아니다. 당시 왜국의 역량은 가야 하나 조차도 자신들의 신민으로 삼을 수 없었을 정도였고 엄연히 백제 + 가야 + 신라 삼국의 국력 총합을 뛰어넘을 정도로 그렇게 압도적으로 강대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일본측 주장대로 신묘년조를 해석 했을 때 가장 크게 착각하는 것중 하나가 당시 일본에 고구려 같은 아주 강대한 세력이 있었다고 가정하는 것이다. 하지만 당대 일본에 그런 강대한 세력이 있었다는 유물적 증거는 전혀 없는 상황이다. 실제로 일본의 사학가 나가스카(中塚氏)는 “당시 일본은 통일이 완성되지 못했다. 그런데 대군을 보내었다함은 이해할 수 없다”라고 평가하였으며 다른 일본측 사학자인 와가모리타로(和歌森太郞) 교수 또한 “확실히 4세기에 일본이 군을 조선에 보내는 것은 용이한 일이 아니다”라고 주장했다.[170] 무엇보다 저 사건 이후에도 백제와 왜는 멀쩡히 협력 관계를 잘 유지했다.

애당초 《일본서기》에서의 391~396년 기사들에도 일본이 백제를 침략했다는 기록이 전혀 없음 또한 광개토대왕릉비와 임나일본부를 끼워맞추는 논리의 크나큰 약점이다. 광개토대왕 비문의 중요한 특성중 하나가 정복한 명분과 이유를 설명하고, 정복했다는 기사가 나오는 서술구조이다. 즉 명분과 이유를 정복전쟁에서 아주 중요시 여겼다는 것인데, 일본측 해석을 따르자면, 왜국에게 신묘년에 얻어맞고 신민이 된 불쌍한 녀석(백제와 백제왕)을 왜 396년에 쳐들어와 노객으로 삼았냐는 것이다. 즉 광개토대왕은 일본측 해석을 온전히 따르자면, 애꿎은 녀석을 괴롭힌 악마로 인식 되는 것이다. 가야사 연구자 김태식 교수도 이러한 점을 한일역사공동연구회에서 지적한바 있다. 또 그에 따르면, 속민과 구민(舊民)등 '民'이 들어가는 단어는 전부 고구려가 주체로 해석하기 때문에 '신민'도 마찬가지로 고구려의 '신민'을 뜻하는 것이라고 발언한바 있다. 또 비문 396년과 407년[171] 기사를 보면, 광개토대왕은 백제를 매우 강하게 밀어부쳤고, 백제왕의 고구려에 굴종하는 것에 대해 매우 길고 섬세하게 서술 했고 백제왕과 광개토대왕의 대화 내용까지 기록하며 신하로써 복종했다고 부각 시키고 있지만, 이에 반해 침략의 주체이자 백제와 신라를 신민으로 만든 왜구는 침략하자 격파하였다, 종발성까지 몰아부쳤다 정도의 무미건조한 서술 밖에 없다.

즉, 신묘년조를 일본식으로 해석하면 가장 큰 문제점은 그 주장을 뒷받침할 다른 기록들이 한국과 일본 양측의 그 어떤 사서들에서도 전혀 없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신묘년조의 해석은 말 그대로 일본측의 자의적인 해석만 있지, 그 어떤 근거 사료도 전혀 없다는 점이 일본 해석의 큰 약점이다.

현재 역사가들은 경주시 호우총에서 발견된 호우명 그릇 등과 '왜'라고 기록된 침공기록이 있으므로, 당시 고구려가 신라에 군사를 파견해서 그 정체가 어찌되었든 당시 '왜'라고 불린 세력을 격퇴하고 그 대가로 신라에 영향력을 행사했으리라 주장한다.

한 가지 고려해야할 점은, 광개토대왕릉비』는 광개토대왕의 업적을 객관적으로 기술하기 위한 것이 아닌, 용비어천가처럼 광개토대왕 찬양을 위해 세워진 것이라 업적을 과장할지언정 훼손하는 쪽으로는 쓰여질 수는 없었다는 것이다. (1974년에 일본의 하마다 고사쿠(濱田耕策)가 제기한 주장) 이 때문에 업적 예찬을 위해 과장과 은폐, 혹은 곡해된 내용 등이 섞였을 가능성도 충분히 있다. 즉, 《일본서기》가 기록상으로 가치가 크지만 자국을 과장하고 사실을 왜곡했다는 논란이 큰 것처럼, 『광개토대왕릉비』 역시 무조건적으로 사실만을 바탕으로 했다고는 단언할 수 없다. 사료는 쓰여진 내용을 곧이곧대로 수용해선 안 되고, 당대 타 사료나 유물들 등과 비교/대조하는 등 비판적으로 엄격하게 교차검증해야만 한다.

3.11. 주구묘와 장고형무덤(전방후원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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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나일본부설에 대한 이론적 반론이 확립될 즈음 한일 양국 사학계를 긴장시킨 것이 바로 주구묘와 장고형무덤(전방후원분) 발굴이었다.

전방후원분은 본래 일본에서 발견되던 무덤 양식으로 3세기부터 7세기까지 발견되며, 주변에 하니와로 대표되는 많은 부장품들이 묻혀 있는 수백 미터 단위 크기의 거대 무덤이다(고훈 시대 문서 참고). 모양은 앞부분이 네모 혹은 사다리꼴로 생겼고(前方), 뒷부분은 원형(後圓)인데 뒷부분에는 사람을 매장하고 앞부분에서는 제사를 지낸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고대 일본에서 군장제의 발전을 보여주는 무덤 양식으로 서서히 거대해지는 양상을 보이나, 6 ~ 7세기 일본이 중앙집권화의 과정을 거치면서 서서히 소멸했다.

한편 주구묘는 전방후원분의 초기 양식으로 추정되는 무덤 양식이다. 일본에서는 주구묘 중 방형 주구묘가 전방후원분으로 발전했다고 보지만, 논란의 여지는 아직 많다. 무덤이 장구 모습이 아니고 주변에 해자 형태로 홈만 있다.

그런데 1991년에 전방후원분이 전라남도 함평 영산강 지역, 그러니깐 백제의 남쪽 즉, 마한 지역에서 발견되면서 한일사학계가 발칵 뒤집혔다. 재미있는 사실은 마을에서는 전방후원분을 그저 산으로 알았지만, 오래 전부터 '장고산'이라고 불렸다고 한다. 이곳에서 장고묘라는 이름이 파생됐다.[172] 이들의 등장은 대체적으로 5 ~ 6세기 경으로, 그 연대가 일본보다 늦고 임나일본부설의 시기와 거의 일치해 큰 논란이 되었다. 이 기사에서 등장하는 장고묘(전방후원분)가 바로 이 무덤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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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에 나온 그 무덤들. 광주광역시 광산구 월계동 소재. 전형적인 '전방후원'의 양식이다.

저 전방후원분이 처음 한반도에서 나왔을 때, 일본 역사학계에서는 임나일본부의 강력한 근거라는 주장이 나오게 되었다. 게다기 이전에는 분명 일본에서 전방후원분의 초기형 무덤인 주구묘가 일본에서만 독자적으로 발견되었으니, 주구묘 → 전방후원분 → 남한 지방에 전파(≒ 임나일본부설)라는 연결고리에 태클을 걸 논리가 없었고, 이때 우리나라의 높으신 분들이 관련 전공 사학자들에게 전화를 걸어 이것저것 캐묻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그런데 1996년 이후 마한 지방(전남 영광 군동리, 충남 보령 관창리)에서 일본보다 최소 한 세기 이상 앞선 시대의 주구묘가 대량으로 나와버렸다. 정확히는 지금까지 일본에만 있었던 주구묘가 한국의 발굴기법 발달로 주구묘가 청동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는 놓쳤던 사실을 파악하게 된 것이다. 국사 교과서를 달달 외웠던 사람들이라면 기억할 지도 모르겠지만 주구묘는 국정 국사 교과서 시절 마한 파트에 떡하니 사진까지 나와있다. 자세한 설명은 없지만, 한국 사학계가 식민사관의 극복에 얼마나 노력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 중 하나. 고대 삼한세력과 당시 왜와의 교류가 있었다는 것은 한일역사학계가 인정하고 있으니, 결론은(...) 이 사건으로 당시 일본학계 전체는 상당한 충격을 받아서, 한국에 NHK 방송사가 헬기까지 띄워 영상자료를 찍어가고, 일본학자가 직접 발굴현장에 찾아와 한국산 주구묘를 바라보며 '평생의 연구가 다 날아갔다'며 눈물까지 흘렸다. 더욱이 전라도에서 기원전 3세기경의 대형 주구묘들이 발굴되면서 기존의 설은 더욱 흔들리게 되었다.[173]

하지만 어쨌든 저 전방후원분이 '전라도'에서 발견되었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주구묘의 기원이 한반도라 하더라도 4-5세기 전라도에 나타나는 전방후원분은 확실히 왜계 유물이 있는 왜인식 무덤이다. 하지만 왜인식 무덤이 발견되었다는 것이 곧 그 지역을 당시 왜국이 지배했다는 증거는 아니다. 애시당초 왜인식 무덤이 발견되는 지역은 전통적으로 '임나일본부설'에서 '임나'로 비정하는 가야 인근과는 상당히 거리가 먼, 백제 남부(지금의 전라도 지역) 마한 지역이인데, 특히 서해안 및 남해안의 해안 지방에 집중되었다. 이를 임나일본부설과 연결 짓기에는 이미 논조 자체가 다른 문제로 넘어가 버리는 상황이 되어서, 이미 해당 문제는 임나일본부설과는 별개의 문제로 다루는 경향이 더 크다. 일본 규슈에서 발견되는 가야계 유물들과 마한 양식의 대형 독무덤들을 가지고 가야와 마한이 일본을 지배했다고 주장하기에는 그 근거가 빈약하듯, 저 왜계 무덤들 만으로는 임나일본부를 주장하기에는 일본측이 주장해온 기존의 임나일본부설과도 일치하지 않는 면들이 많다. 저 무덤의 주인들이 어떤 과정으로 전라도 지역에 묻혔는지도 아직 의문이다. 단순히 전라도 마한 지역으로 이민, 이주한 왜인들이 묻혔는지도 몰라도 아직 확실한건 없다.

전방후원분의 발견 이후 강원도 평창을 비롯해 한반도 중부에서도 청동기 시대로 추정되는 주구묘가 발견되었다.[174] 중국의 경우 주구묘 자체는 없고, 일본보다 훨씬 앞선 3세기 후반의 무덤인 타후팅 고분이 전방후원분과 유사하다는 주장이 있지만, 어디까지나 생긴 게 좀 비슷한 수준이라 논란이 많았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전라도 남부 지역에서 발굴된 독자적인 금관[175]], 영산강 유역에서 옹관 문화 및 돌방무덤의 독자적 양식이 주목받으며 분명 백제와는 다른 -이주한 목지국으로 비정되기도 하는- 전남의 독자 세력 혹은 마한 잔존 세력에 대한 주목도가 높아졌다. 그리고 이러한 점에서 기인하여 마한에서 주구묘 → 장구형 무덤의 발전으로 나타나지 않았느냐는 견해도 제시된 바 있었다.

하지만 주구묘가 전방후원분으로 발전하는 양상은 오히려 일본에서 잘 나타나고 있으며 한국에서 확인되는 주구묘로는 호남의 전방후원분과의 관련성은 떨어지는 편이다. 호남지역에서 주구묘가 발현하여 일본으로 넘어갔거나 영향을 주었다는 것은 일리가 있을 지라도 호남의 주구묘가 전방후원분의 조형이라고 보기에는 어렵다는 것이다. 즉, 일본에는 주구묘에서 전방후원분으로 무덤 양식이 바뀌어가는 모든 과정이 뚜렷이 남아있으나, 한국의 전방후원분은 너무나도 갑작스럽게 반짝 등장했다가 사라진다는 것이다. 호남지방에서 5 ~ 6세기에 갑작스럽게 그것도 거의 반세기 가량만 산발적으로 등장하는 것으로 보는 게 고고학계의 견해다.

도대체 왜 갑자기 영산강 유역에 이런 무덤들이 등장했는지, 그리고 묘주가 어느 세력인지에 대해서는 마한이라는 잔존세력이 정치적 필요성 아래에 이주한 왜인, 왜의 지원을 받은 현지인, 파견된 왜인 등의 형태로 교류, 교역, 지원 등의 활동을 했다는 견해 등으로 정리될 수 있다. 하지만 비교적 다양한 설이 존재하는 것에는그도 그럴 것이 일제강점기부터 연구 성과가 축적된 다른 무덤 양식과는 달리 말 그대로 급작스럽게 나타나게 된 양식이라 해석의 난점이 있다.

호남지역의 전방후원분에 대해서는 백제에서 끌어들인 왜의 토호나 군장 세력[176]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475년 개로왕장수왕에게 참패해 참수당한 뒤로 북쪽으로의 진출이 사실상 가로막히자, 동성왕무령왕 대의 백제는 완전히 병합되지 않았던 전남 지역의 잔존 마한제주도[177]를 복속시키는 선택을 하는데 이 때 일본 세력을 끌어들였다는 것이다. 두 왕은 즉위 이전 일본에 체류하고 있던 왕으로, 무령왕과 당시 게이타이 덴노의 관계 또한 매우 밀접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따라서 일본에서 군사력을 지원받아 정복을 행했을 가능성이 충분하고, 이것의 결과물이 일본색이 밴 장고형 무덤이라는 것이다. 물론 이것이 임나일본부설과 같이 행정 기관으로서의 장악이 아님 또한 분명한 전제이다.

해남과 반남 일대에서 발견되는 전방후원분에 대한 시각은 아래 첨부된 제2차 한일역사공동연구회 토론부분과 모리 기미유키의 4~6세기 논문에서 알수 있는데, 일본측에서 직접 마한 세력을 통치했다고 주장하지는 않는다고 한다. 다만, 광개토왕의 남하로 인한 백제의 입지축소에 대한 만회로 백제측에서 6세기 즈음에는 마한 세력을 직접 통치하기 위해 왜인들을 끌여들였을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또 마한에서 토착화된 왜인의 경우로 보는 학설이 일본에서는 압도적이라고 한다. 애초에 정치적 집단이나 강력한 통치 세력이라고 해석하기 어려운 이유가, 고분이 발굴되는 위치들이 산발적이고 작위적이며 상호 관련성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이 경우, 마한의 멸망 시점으로 4세기 경으로 보는 학설은 폐기 될수 밖에 없다.

또 한편으로는 초기엔 철기 문화로 왜국보다 우위를 점하고 있고 상대적으로 동질감이 있다고 보여지는 삼한은 물론 고구려의 금석문에서도 보이듯, 삼한이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있던 백제국이 남하하며 마한 왕에게 영토를 얻은 후에 한반도 남부 토착 국가들[178]과는 달리 세력이 약했던 백제계가 한반도 남부에 정착하여 백제와 왜의 동맹으로 일어난 침미다례국 전쟁으로 백제와 왜가 동시에 한반도 남부의 삼한에 대한 지배력과 영향력을 미쳤다고도 보는 가설도 있다.

또는 고구려의 남하로 인해 한성 백제가 멸망하여 약체화된 백제가 왜국에 인질의 형태로 왕자들을 파견하여 군사적으로 도움을 받아 고구려에 대항하게 되어 한반도 남부가 왜의 영향력에 있던 증거라고도 보는 시각이 일본측에 일부 있지만 막상 백제가 보냈다는 인질에 대해서는 그 속까지 파고 들어가봐야 하는 게, 정작 '백제'와 '왜'라는 양 당사자 간에는 "선왕이 쌓은 우호를 잇기 위해 방문하였다"라는 백제삼서의 기록과 "내조하였다"[179]라는 일본 쪽의 기록만이 있지, 인질을 보냈다는 기록은 전혀 없다. 즉, 일본서기에도, 또 일본서기에서 인용했다는 백제의 기록에도 '인질'이라는 표현은 전혀 없고 오직 한참 후대에 쓰인 '삼국사기'에만 나오는 표현일 뿐이다.[180] 또, 개로왕의 동생인[181] 부여곤지 또한 인질이라는 언급이 없다. 다만, 의자왕의 아들의 부여풍의 경우에는 일본서기에도 인질이라는 표현이 나오고 삼국사기에도 인질이라고 나와서 교차검증이 된다. 하지만 실제로는 백제가 보낸 왕자는 인질이 아닌 야마토 조정 내에서 백제계를 대표하는 외교관으로 봄이 더 설득력 있다.

일본어에서 인질에 해당하는 질의 훈독은 무카하리(人力)라고 읽는데, 그 뜻은 왕의 대리인이라는 뜻이므로 일본에서 당대 받아들여지는 인질의 개념은 인신공납의 개념이 아님을 알수 있다.

물론 이주갑인상 같은 왜곡, 날조와 천황가 찬양의 프로파간다식의 서술이 심한 일본서기에서는 백제 왕족은 외교관보다는 조공을 하러가는 인질의 역할로 거의 대부분 묘사했지만, 교차검증을 해보면 거의 대부분 말이 안 된다. 막상 한국 기록과 중국 사서들에서는 백제왕족이 조공했다는 것과 관련된 일본서기의 서술과 일치되는 내용들이 전혀 없다.

일본서기에서 백제의 왕족으로 인질로 파견 되었다는 기록은 의자왕의 아들 부여풍[182] 뿐이다. 그마저도 거의 동시대의 김춘추의 반례를 보면 진짜 인질이었는지도 의구심이 생긴다. 그 밖에 일본인들이 인질이라고 주장하는 동성왕[183][184] 유년 시절을 일본에서 보내다가 부왕이 죽자 천황이 백제왕으로 삼아[185] 본국으로 보냈다고 기록했다. 또 개로왕의 동생으로 나오는 부여곤지 또한 천황을 섬기라고 왜에 파견되었을 뿐 인질이라는 표현 역시 없다.[186] 직지왕(전지왕) 또한 태자 시절 일본으로 파견되었다고만 할 뿐 인질이었다는 기록은 없다.[187] 다만 선왕의 우호를 쌓기 위해 천조 天朝에 보냈다고 한다.

무령왕부여곤지개로왕의 첩과 같이 일본으로 항해하다가 도중에 출산해, 친모와 함께 바로 백제로 송환되었다. 이밖에도 일본서기에만 등장하는 무령왕의 아들 순타태자 역시 유아 시절부터 일본으로 보내졌지만, 인질이라는 소리는 일본서기에 없다. 신라의 인물을 살펴보면 김춘추도 일본서기에는 인질이라고 기록되어 있지만, 김춘추 역시 일본에 외교사절로 갔다가 1년 만에 당나라로 다시 파견된 적이 있다. 즉, 일본서기에서 말하는 인질이 사전적 의미로 인질인지 의문스럽다. 특히나 김춘추는 외교사절로서 활동한 것이 명백히 확인되므로, 일본서기에서 인질이라고 주장한 인물들은 실제로는 외교사절(외교관)이었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이밖에도 백제 조정과 왜 조정에 대한 서술은 일본서기에 백제 진사왕이 왜국에서 보낸 사신들이 문책하자, 이에 백제인들이 진사왕을 죽여 사죄 하였다는 식의 서술이 있다.
是歲,百濟辰斯王立之失禮於貴國天皇。故遣紀角宿禰•羽田矢代宿禰•石川宿禰•木菟宿禰,嘖讓其无禮狀。由是,百濟國殺辰斯王以謝之。紀角宿禰等,便立阿花爲王而歸。

이 해에 백제 진사왕(辰斯王)이 즉위하여 귀국(貴國) 천황에게 무례하였다. 그래서 기각숙녜(紀角宿禰;키노츠노노스쿠네), 우전시대숙녜(羽田矢代宿禰;하타노야시로노스쿠네), 석천숙녜(石川宿禰;이시카와노스쿠네), 목토숙녜(木菟宿禰;츠쿠노스쿠네) 를 파견하여 그 무례함을 꾸짖었다. 이에 백제국은 진사왕을 죽여 사죄하였다. 기각숙녜 등은 아화를 왕으로 세우고 돌아왔다

기존의 연구성과를 정리하면 피장자의 출신에 대해서는 현지세력(마한/백제)인지 왜계세력인지로 구분된다. 전방후원분이 생겨나는 동인에 대해서는 마한이 존재했다는 가정 아래에서 왜인의 지원, 왜계 관료의 지원이 필요했다 또는 백제의 구 마한지역의 점령과정에 있어서 왜인의 지원, 왜계 관료의 지원이 필요했다라는 견해로 나뉘며, 전방후원분의 묘주에 대해서는 왜인의 지원을 받은 현지인 또는 왜계 관료(왜인)이라는 식으로 크게 나뉘고 있다.[188]

임나일본부와 관련해서는 《일본서기》 상에서 4세기 후반에 설치된 기구이고 4세기 후반을 묘사한 호태왕비 해석 문제도 이와 얽혀 있는데, 장고형 무덤의 등장은 이보다 1세기 가량이 늦다. 5세기 후반부터 6세기 초반까지 백제와 일본 사이에는 군사적 충돌은 커녕 관계가 좋았음을 암시하는 기록만 있으니 '백제의 일본 구축'으로 보기에도 무리가 크다.

요약하면 다양한 학설이 세워져 각자의 설득력을 강화해 나가고 있지만, 뚜렷한 정답이라고 할 만한 설이 수립되지는 않았다. 다만 애시당초 왜인식 무덤이 발견되는 지역은 전통적으로 임나일본부설에서 '임나'로 비정하고 있던 가야 인근과는 상당히 거리가 먼 백제 남부(지금의 전라도 지역) 마한쪽 지역이며, 특히 서해안 및 남해안의 해안 지방에 집중되어 있다. 이를 임나일본부설과 연결 짓기에는 이미 논조 자체가 다른 문제로 넘어가 버리는 상황이 되어서, 이미 해당 문제는 임나일본부설과는 다른 별개의 문제로 다뤄지는 경향이 더 크다. 전방후원분 자체를 두고 해석이 분분할지언정, 기존의 임나일본부설의 자체는 전방후원분의 해석과는 상관이 없다. 오히려 전방후원분은 기존 임나일본부설의 오류를 부각시킬 뿐이다.

일본 위키백과에서는 가야 항목에서 한국의 민족사관 때문에 실증유물을 부정한다고 써놓는 황당한 주장을 써놓았다. #
파일:방산리 장고분.png
한가운데 보이는 열쇠 구멍 비슷한 것이 방산리 고분이다.

국립광주박물관에서 2000년 처음 도굴 갱도를 확인한 해남 북일면 방산리 장고봉 고분이 20년만인 2020년 가을부터 2021년 초까지 발굴 작업에 들어갔으나, 발굴 도중인 2월 말 다시 묻힌 것으로 알려졌다. ("한반도서 가장 큰 고대 무덤, 열자마자 덮은 까닭은…") 연구진 측은 "코로나 방역을 위한 조치이다. 추가 발굴 뒤 공개하겠다."고 밝혔으나, 이 소식이 한겨레 일본어판 보도를 통해 일본 넷우익 진영에 전해지자 일부 우익들은 "이 무덤이야 말로 임나일본부의 물증.", "한국이 진실을 덮으려고 다시 묻었다."는 식의 주장을 하기도 하는 모양. 칠지도 문구는 애써 부정하시는 분들이.. 일본 넷우익의 음모론 포스트.

이에 대해 임나일본부설의 빌미가 될 수 있다고 발굴조사를 중단하고 은폐하는 것이 오히려 일본 극우세력에게 빌미를 제공할 수 있으므로 결과가 어떻게 나오든 공개적인 발굴조사를 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의견도 있으나, 의구심 해소는 필요하지만 발굴조사 은폐 운운하기엔 이미 발견된 전방후원분들이 많기 때문에 은폐와 거리가 멀다. 게다가 본 항목에도 있듯 이게 양측의 인적, 물적, 문화적 교류가 활발했다는 근거로 쓰일 순 있어도 임나일본부설 운운하기엔 나머지 근거가 너무 빈약하다.

3.12. 구마모토의 편두 유골

김해 예안리에서 편두를 한 유골들이 발견되었고, 구마모토에서 발견된 유골 6구 중 여성 유골 한 구도 편두였다. 편두를 한 유골들은 고된 노동이 있었는지 척추가 눌린 상태여서 노예였음을 알 수 있다.[189] 대한민국 측은 이 유골을 무당 계열이었다고, 일본 측은 가야에서 데려온 여자 노예일 것이라고 주장한다. # 하지만 이 유골들 만으로는 임나일본부의 실재성을 논하는 것은 무리일 것이다.

3.13. 경남 서부 내륙지역 및 남해안 일대의 왜계 석실

고성 송학동1B-1호분은 일본에서만 발견되는 채색 고분이다. 그리고 거제 장목고분, 사천 선진리고분, 사천 향촌동Ⅱ-1호분, 의령 경산리1호분, 의령 운곡리 1호분, 마산 진동 대평리M1호분은 왜계 요소가 뚜렷히 보이는 왜계 석실묘이다. 일본 규슈 지역 日本 九州 有明海연안에서 만들어진 석실과 매우 유사하다. 석실의 구조가 각기 다른 것은 피장자의 다양한 출신과 관계있고,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지 않은 상태에서 거의 동시기에 축조되었다. 이에 지역 간의 교류에 목적을 둔 日本 九州지역 출신의 倭人에 해당한다.
홍보식. 2006.

규슈 지역의 왜인들이 경상남도에 진출하여 지배권을 얻고 무덤이 만들어진 것이 아닌가라는 학설이 있다. 《일본서기》에 의하면 3~6세기에 안라회의, 제1, 2차 사비회의, 아리사등카츠라기노 소츠히코, 오오토모노 카네무라[190]의 경상남도 남해안 파견, 일라[191]의 파견등과 관련이 있다고 볼 수도 있다. 이 중 일부는 일본인과 가야인의 혼혈이라고 기록된 인물들도 있어서, 고대 한반도 사회에 왜인도 일부 섞여살았음이 나타나고 있다.

하지만 《일본서기》 자체가 일라(日羅)라는 왜국의 관료를 왜 열도 본국으로 송환할 시 한(韓)부인이 왜 조정의 명령을 듣고 그를 찾아온 왜인 길비해부직우도(吉備海部直羽嶋)에게 '너의 뿌리를 내 뿌리에 넣어라' 라는 대화등 한반도 남부 지역을 매우 열등하고 천시하게 보는 성향이 보이는 역사서로서 경상남도 남해에 발견되는 왜계 요소의 왜계 석실묘와 《일본서기》에 쓰여진 사실이 해당되는 것엔 의문점이 있다.# 다만 일라는 왜인이 아니라 왜의 부탁으로 보내진 가야계 백제인이다. 아리사등의 아들이기도 하다.

즉, 대성동 고분이 있었던 3세기 후반에서 4세기 중반의 '대문자Ⅰ류' 덧널무덤이 나타 났을 땐 변한의 선진화된 제철기술과 당시 가야의 철갑옷, 투구와 검들 그리고 그 발굴되는 유물 숫자의 규모를 봐선 중앙집권 국가가 되지 않았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높은 수준의 제철 기술을 볼 수 있고 많은 갑옷과 무기가 발견된다. 특히 철제 갑옷의 경우엔 신라, 백제와는 다른 독특한 양식이며 가야의 강력한 군사력을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규슈에 발견되는 가야양식 토기인 스에키(須惠器)와 규슈에 발견되는 옹관묘를 보면 그때 당시는 마한[192]과 변한이 왜국에 대해 영향력과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는 것을 추정할 수 있다. 당시 왜 열도에 제철 기술이 2000년도 전까진 7세기에서 부터 시작되었다고 보았으며[193] 출토되는 유물들이 한반도에 비해선 매우 빈약했고 철제 유물은 삼한에 비해서는 매우 열등한 수준에 있었다. 가야에서 중국과 질적으로 맞먹는 철재를 생산하고 철갑옷을 만들어 사용할 때[194] 야요이 시대 일본에서는 왜인들이 나무로 만든 '목갑'을 사용하고 있었을 정도로 왜 열도의 빈약한 유물들은 삼한의 고수준의 유물들과 기술적 수준에서 전혀 상대가 안된다고 평가할 수 있을 정도로 그 기술적인 수준 차이가 매우 크다.

또한 당시에는 전라남도 남부에는 대형 옹관묘등 마한의 독자적인 양식이 유지되고 있었고 그 지역에 가야의 고분양식과 유물이 같이 발굴되는 것으로 보아 남부 일부는 변한의 지역으로도 볼 수 있다. 이것은 서기 400년 무렵으로 접어들면서 김해와 부산지역에 출토되던 철갑옷이 급격히 줄어 들었다는 점으로 추정해볼 수 있다.

하지만 《일본서기》에 나오는 근초고왕과 왜의 연합에 의한 침미다례국과의 전쟁과 가야 정벌, 그리고 광개토대왕의 남하가 있고 나서 부터는 대성동 고분에는 가야의 전통적인 Ⅰ류덧널무덤이 사라지고 Ⅱ류 덧널무덤이 나타나 의도적으로 Ⅰ류 덧널무덤을 파괴시키며 축조되며 또한 돌덧넛무덤이 축조되어진다. 그리고 4세기말부터 5,6세기에 왜계 석실로 보이는 묘가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 백제와의 동맹으로 왜국은 그 동안에는 없었던 영향력을 마한, 변한에 가질 수 있었다고 본다. 백제 문화의 전파와 고구려와 백제, 왜 동맹의 전쟁에 의한 가야 유민들의 자의적 또는 강제적인 이주 또는 납치로 인해 왜국은 큰 성장을 할 수 있었고 야마토 정권이 일본 열도의 동정(東征)을 진행하면서 열도 각지에 나타나는 전방후원분과 그 크기가 대형화되는 5세기부터는 중국 사서에 나타나는 왜5왕이 백제를 자신의 번국으로 인정해달라는 내용[195]과 《수서》에 나온 동쪽의 천자 운운등이 나타나는 것을 볼땐 백제에 까지도 영향력을 줄려고 하는 국가로 됐다는 걸로 보는 견해도 일부 있다.

변한(가야)지역에 옹관묘가 발견되는 것도 예전 임나흥망사와 같은 1949년에 편찬된 식민사관적인 책을 쓴 일본인 사학자 쓰에마스[196]의 주장에 의하면 옹관묘가 야요이의 전통적 고분 양식이며 규슈에 발견되는 것이 변한(가야)지역에도 발견되므로 왜인들의 진출의 결과로서 보고 있었으나 최근 고고학적인 조사에 의하면 마한 지역에 대형 옹관묘가 발견되는 등 변한(가야)지역에 발견되는 옹관은 마한의 옹관묘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하는 견해도 있다. 대체적으로 문화적 동질감이 보여지는 마한, 변한 지역에 삼한으로서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지만 상대적으로 진국(辰國)과는 동질감이 적었고 세력을 넓혀야만 했던 백제 세력의 남하로 인한 세력 약화 그리고 백제와 왜의 동맹에 의한 남부 세력의 약화를 추정하는 견해도 있다.

3.14. 일본의 당대 항해력

일본은 한반도 남부를 여름에만 약탈했다.[197] 선술된 삼국사기의 기록을 보면 일본의 침략이 여름 특히 음력으로 4월부터 8월까지 집중되는 것을 볼 수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해적이라는 집단은 항구적으로 타 지역을 지배할 수 있는 능력도 없고 또 항구적으로 지배하는 주체로 해석할 수 없다. 해적은 단지 바다를 건너서 노략질을 일삼다 본거지로 돌아가는 집단들이다.

아래는 제2차 한일역사공동연구회에서 조법종 교수가 투고한 논문이다. (페이지 50~52쪽 참조)

https://www.jkcf.or.jp/wordpress/wp-content/uploads/2010/10/1-allk.pdf
파일:삼국사기 왜 침공1.png
파일:삼국사기 왜침공2.png
파일:삼국사기 왜침공3.png

파일:계절풍.png

절기별 계절풍. 좌측 상단부터 우측 상단, 좌측 하단, 우측 하단 순으로 봄 여름 가을 겨울에 부는 계절풍이 다르다.
여름에는 일본쪽에서 한반도로 바람이 불어오고 겨울에는 한반도에서 일본쪽으로 바람이 분다.

<삼국사기, 193년 6월>
六月,倭人大饑,來求食者千餘人。
6월에 왜인(倭人)이 크게 굶주려 먹을 것을 구하러 온 사람이 1천여 명이나 되었다.

294년으로 기록된 기사만 겨울로 되어있지 나머지 절기가 기록된 기사에서는 죄다 여름이거나 4월~8월이다.

또한 다른 삼국사기 기록을 보면 2월에 대마도에 군영을 두고 군량미를 쌓아두고 신라를 호심탐탐 노리자, 신라가 정벌을 감행 하려고 했다는 기록도 있다.
七年,春二月,王聞倭人於對馬㠀校勘 置營,貯以兵革資粮,以謀襲我,我欲先其未發,㨂精兵擊破兵儲。舒弗邯未斯品曰,「臣聞『兵㓙校勘噐,戰危事。』」况渉巨浸以伐人, 萬一失利, 則悔不可追。不若依嶮設䦕, 來則禦之, 使不得侵猾, 便則出而禽之。此所謂致人而不致於人, 䇿之上也。」 王從之。

7년(408) 봄 2월에 왕이 왜인(倭人)이 대마도(對馬島)에 군영을 두고 무기와 군량을 쌓아 두어 우리를 습격하려고 한다는 말을 듣고서, 그들이 일어나기 전에 우리가 먼저 정예 군사를 뽑아 적의 군영을 격파하고자 하였다. 서불한(舒弗邯) 미사품(未斯品)이 말하기를, “신이 듣건대 ‘무기는 흉한 도구이고 싸움은 위험한 일이다.’라고 합니다. 하물며 큰 바다를 건너서 남을 정벌하는 것은 만에 하나 이기지 못하면 후회해도 돌이킬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험한 곳에 의지하여 관문(關門)을 설치하고 오면 곧 그들을 막아서 침입하여 어지럽힐 수 없게 하다가 유리해지면 곧 나아가 그들을 사로잡는 것만 같지 못합니다. 이것이 이른바 남을 유인하지만 남에게 유인당하지 않는다는 것이니, 가장 좋은 계책입니다.” 하니, 왕이 그 말에 따랐다.

정황상 대마도를 전진기지 삼아서, 준비하고 있다가 여름에 노략질을 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7세기의 백촌강 전투에서도 왜국의 군대는 4~8월까지 순차적으로 출정했지 겨울에 출정하지 않았다.

신공황후의 삼한정벌 기사도 신화나 망상에 불과하지만 흥미로운점은 겨울10월에 출정했는데 이 기사를 쓴 사관이 이를 의식했는지 항해를 하자마자 풍신이 도와 훈풍이 불어왔다라고 신공황후를 신격화 시키는 기록을 했다. 즉 당대 일본에서도 한반도를 침략할 때 계절풍의 도움이 있는 여름에 출정해야 손쉽게 한반도 남부에 당도할 수 있었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었다. 하타다 다카시(旗田巍)의 논문 참조 하자. 즉 계절풍을 이용해 침략하지 않으면 한반도에 자력으로 당도할 수 없었던 것이다. 또한 왜구의 산발적으로 이루어진 침략은 포로를 사로잡아 데려가는데 목적을 두고 있지, 직접적인 통치를 하기 위해 침략한 것은 아니다라는게 중론이다. 여담으로 만약에 광개토대왕비석의 신묘년 왜구의 침공 기사가 사실이라면 여름일 개연성도 매우 크다. 광개토대왕릉비의 원문의 한국측 해석을 따르자면, 신묘년에 왜가 나타나자, 백제를 渡海破하였다고 해석하는데, 삼국사기의 기록을 보면 5월에 고국양왕이 승하하고, 광개토대왕이 즉위한다. 그 해 여름 7월에 고구려가 백제의 황해도 일대를 침공했고, 10월까지 여러곳에서 전선을 밀고 내려와 강화도로 추정되는 관미성을 빼앗았다. 7월에 백제의 군대에 왜구 용병들이 편입되어 같이 싸웠을 개연성은 적지만, 적어도 왜구가 신묘년에 쳐들어온 것은 서술 구조상 그 해 여름일 가능성이 크다.[198]

또 일본은 당시에 중국 남조와 교류할 때 꼭 백제와 동행 하였는데, 물론 백제에서 황해를 건너면 바로 중국이므로 지리적 이점이 있는 것도 분명하지만, 백제의 선박에 동승하거나 얻어타고 같이 입조한 정황이 드러난다.[199]

예를 들자면, 왜5왕 중 한명인 武가 송나라 천자에게 보낸 서신에는
道逕百濟,裝治船舫,而句驪無道,圖欲見吞,掠抄邊隸,虔劉不已,每致稽滯,以失良風
가는 길이 백제를 거쳐야 하므로 큰 배를 준비하였는데, 구려(句驪)가 무도하여 (우리를) 집어삼키려 하고, 변방의 속한 곳을 노략질하며 살육을 그치지 않으니, 매번 지체되어 좋은 바람을 놓치게 됩니다.

라고 기록 되어있다. 즉 선술 했듯이, 왜의 항해술은 계절풍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고, 통교할 때는 백제의 배를 빌려타고 온게 명확하다.

또 백제의 선박에 승선하여 동행했다는 간접증거로는 7세기에는 수나라에 서신을 보내려 파견한 왜국의 사신단이 돌아오는 길에 황제가 내린 국서를 백제인에게 빼앗겼다는 기록이 있다. 즉, 적어도 왜국의 사신단은 백제를 기착지로 삼아 머물러, 백제의 선박을 이용해 중국과 교류 했다는 정황이 드러난다.

파일:nihonshoki23.png
是日以飾船卅艘,迎客等于江口安置新館。於是以中臣宮地連烏摩呂•大河內直糠手•船史王平爲掌客。爰妹子臣奏之曰,臣參還之時,唐帝以書授臣。然經過百濟國之日,百濟人探以掠取。是以不得上。於是群臣議之曰,夫使人雖死之,不失旨。是使矣何怠之失大國之書哉。則坐流刑。時天皇勅之曰,妹子雖有失書之罪,輒不可罪。其大國客等聞之,亦不良。乃赦之不坐也。

이 날에 장식한 배 30척으로 객들을 강 하구에서 맞이하여 새로 지은 관에 안치하였다. 그리고 중신궁지련오마려(中臣宮地連烏摩呂;나카토미노미야도코로노무라지오마로) 와 대하내직강수(大河內直糠手;오호시카우치노아타히아라테), 선사왕평(船史王平;후네노후비토오우헤이)을 장객(掌客)으로 삼았다. 이때 매자신이 “신(臣)이 귀국할 때에 당제가 국서를 신에게 주었습니다. 그런데 백제국을 지날 때 백제인이 찾아내서 탈취하여 갔기 때문에 이를 올리지 못합니다.”라고 주상하였다. 이에 군신이 의논하여 “무릇 사자는 죽는 한이 있더라도 임무를 다하여야 한다. 이번 사자는 어찌 태만하여 대국의 국서를 잃었는가.”라고 말하고, 매자를 즉시 유형(流刑)에 처하였다. 이때 천황은 “매자가 비록 국서를 잃는 죄를 범하였으나 경솔하게 단죄할 수는 없다. 저 대국의 객들이 이것을 들으면 또 좋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즉시 사면되어 단죄되지 않았다.

일본서기에는 임나일본부를 지배했다는 5~6세기보다 훨씬 후대인 8-9세기에도 항해력이 미천해 신라에게 선박을 구걸하는 등의 내용이 기록 되어 있기 때문에, 그보다 훨씬 앞선 시기인 5~6세기에 대량의 병력을 어떻게 수송 했는지도 의문이다.

<일본서기 639년>
秋九月,大唐學問僧惠隱•惠雲,從新羅送使入京。
가을 9월에 대당(大唐)의 학문승 혜은(惠隱)과 혜운(惠雲)이 신라의 송사를 따라 입경하였다.

<일본서기 654년 2월>
智宗,以庚寅年,付新羅船歸
지총(학문승)은 경인년(690년에) 신라 배를 타고 귀국함

위 기사에서는 당으로 가는 길을 신라의 연안을 거쳐, 항해해 중국 내주(萊州)에 상륙한 것으로 기록 되어있다.
지총이라는 학문승은 귀국하는 길에 신라 배를 타고 귀국했다.

<일본서기 657년>
是歲,使使於新羅曰,欲將沙門智達•間人連御廐•依網連稚子等,付汝國使,令送到大唐。新羅不肯聽送。由是, 沙門智達等還歸。
이 해에 신라에 사신을 파견하여 “승려 지달(智達;치다치츠), 간인련어구(間人連御廐;하시히토노무라지미우마야), 의망련치자(依網連稚子;요사미노무라지와쿠고)등을 너희 나라에서 파견되는 사신에 딸려서 당에 보내고자 한다.”라고 말하였으나 신라는 이를 거절하였다.이 때문에 승려 지달 등은 돌아왔다.

<일본서기 658년 7월>
是月,沙門智通•智達,奉勅,乘新羅船,往大唐國,受無性衆生義,於玄奘法師所。
이 달에 승려 지통(智通;치츠)과 지달이 명을 받들어 신라의 배를 타고 당에 가서 무성중생의(無性衆生義)를 현장법사(玄奘法師)에게 배웠다.

<속일본후기 812년 1월>
(弘仁三年春正月庚申朔)甲子 勅「大宰府去十二月廿八日奏云『對馬嶋言 今月六日 新羅船三艘 浮□西海 俄而一艘之船著於下縣郡佐須浦 船中有十人 言語不通 消息難知 其二艘者 闇夜流去 未知所到 七日船廿餘艘在嶋西海中 燭火相連 於是遂知賊船 仍煞先着者五人 五人逃走 後日捕獲四人 卽衛兵庫 且發軍士 又遙望新羅 每夜有火光數處 由玆疑懼不止 仍申送者』爲問其事 差新羅譯語幷軍毅等 發遣已訖 且准舊例 應護要害之狀 告管內幷長門 石見 出雲等國訖者 所奏消息 旣是大事 虛實之狀 續須言上 而久移年月 遂無所申 又要害之國 必發人兵 應疲警備 解却之事 期於何日 宜言其由 不得更怠 又量事勢 不足爲虞 宜令停出雲 石見 長門等國 護要害事。」

(弘仁 3년, 812, 봄 정월 庚申 초하루) 甲子 칙을 내려 “大宰府에서 지난 12월 28일에 아뢰기를 ‘對馬島에서 말하기를 이번달 6일에 신라배 3척이 西海에 떠 있다가 잠시 후에 그 중 1척의 배가 下縣郡 佐須浦에 다다랐습니다. 배 안에는 10명이 있었는데, 말이 통하지 않아 그 사정을 알기가 어려웠습니다. 나머지 2척은 어둠속으로 떠 갔는데 어디에 도착했는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7일에 20척의 배가 섬의 서쪽 바다 가운데 있으면서 횃불로 서로 연락하기에 마침내 그들이 賊船인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먼저 표착한 사람 5명을 죽이고 5명은 도망해 달아났으나 후일에 4명을 붙잡았습니다. 그리고 武器庫를 지키고 또 군사를 내었습니다. 또 멀리 新羅를 바라보니 매일 밤에 여러 곳에서 불빛이 빛났다고 합니다. 이로 말미암아 의심스럽고 두려운 마음이 그치지 않아 사람을 보내어 아룁니다’라고 하였다. 그 일을 물어보기 위하여 신라어 통역관과 軍毅 등을 뽑아 보내도록 하고 또한 옛날의 例에 따라 요충지를 지키는 상황에 응하여 管內와 長門, 石見, 出雲 등의 나라에 알리도록 하라. 아뢴 바의 소식은 나라의 큰 일이니 사실인지 그렇지 않은 지의 상황을 계속하여 아뢰어야 하는데도 오랜 기간이 지나도록 아뢰는 것이 없다. 또 요충지의 나라들은 반드시 백성과 군사를 내어 경비하는데 피곤함에 대응하라. 경계를 푸는 날을 언제로 할 것인가 하는 것은 마땅히 그 사유를 말하여야 하며 문득 게으를 수 없는 일이다. 또 일의 정세를 헤아려 큰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면 出雲과 石見, 長門 등의 나라로 하여금 요충지를 지키는 일을 중지하도록 하라”고 하였다.

<入唐求法巡禮行記 839년 3월 17일>
十七日。運隨身物載第二舩,与長判官同舩。其九隻舩分配官人各令舩頭押領押領,夲國水手之外更雇新羅人諳海路者六十餘人。每舩或七或六或五人。亦令新羅譯語正南商可畄之方便。未㝎淂否。
개인 휴대품을 운반해 제2선에 싣고 장잠 판관과 함께 같은 배를 탔다. 그 9척의 배에 관인을 나누어 배치하여 각각 선두(船頭)로서 지휘 통솔하게 했는데, 본국의 수수 외에 바닷길에 익숙한 60여 명의 고용한 신라인을 통솔하였다. 이들은 각 배에 7명 혹은 6명 혹은 5명씩 배치되었다. 또한 신라인 통역 김정남으로 하여금 당에 머물러 있을 수 있는 방도를 생각해보게 했다. 그러나 아직 그 가능성 여부는 확실하지 않다.

<속일본후기 839년 8월 20일>
(八月庚戌朔) 己巳 勅大宰大貳從四位上南淵朝臣永河等 得今月十四日飛驛所奏遣唐錄事大神宗雄送大宰府牒狀 知入唐三箇船嫌本舶之不完 倩駕楚州新羅船九隻 傍新羅南以歸朝 其第六船 宗雄所駕是也 餘八箇船 或隱或見 前後相失 未有到着 艱虞之變不可不備 宜每方面重戒防人 不絶炬火贏貯糧水 令後着船共得安穩 其宗雄等安置客館 得待後船。

(8월 庚戌 초하루) 己巳 大宰大貳 從4位上 南淵朝臣永河 등에게 조를 내리기를 “이번달 14일에 말을 달려 아뢴 바의 견당사 錄事 大神宗雄이 大宰府에 보낸 牒狀을 받고서 당에 들어갔던 3척의 배는 원래의 배가 온전하지 못한 것을 꺼려 楚州의 신라 배 9척을 빌려 타고 신라의 남쪽을 거쳐 되돌아 왔는데, 제 6선이 바로 宗雄이 탄 배이고 나머지 8척의 배는 서로 보였다 보이지 않았다 하면서 항해하던 중 앞뒤를 서로 잃어버려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았다. 고생스럽고 근심되는 變故에 대비하지 않으면 안되니 마땅히 모든 방면에서 지키는 사람들에게 거듭 경계시키고 횃불을 꺼트리지 말며 양식과 물을 저장하였다가 뒤에 도착하는 배들이 모두 무사할 수 있도록 하라. 그 宗雄 등을 객관에 안치하여 다음에 이를 배를 기다릴 수 있도록 하라”고 하였다.

<속일본후기 840년 9월>
(九月癸酉朔) 丁亥 大宰府言 對馬嶋司言 遙海之事 風波危險 年中貢調 四度公文 屢逢漂沒 傳聞 新羅船能凌波行 望請新羅船六隻之中 分給一隻 聽之。

(9월 癸酉 초하루) 丁亥 大宰府에서 “대마도의 관리가 말하기를 ‘먼 바다의 일은 바람과 파도가 위험하고 年中 바치는 調物과 네 번 올리는 公文은 자주 표류하거나 바다에 빠진다’고 합니다. 전해 듣건대 신라 배는 능히 파도를 헤치고 갈 수 있다고 하니, 바라건대 신라 배 6척 중에서 1척을 나누어 주십시오”라고 말하였다. 이를 허락하였다.

파일:견당사.jpg

입당구법순례행기(17차) 839년의 기사를 보면, 아예 신라 번역관을 고용하여, 신라인들을 고용하여 항해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돌아오는 길에는 배가 파손 되어서 신라의 배를 임차해서 한반도 연안을 항해해 귀국했다.

사진에서 보듯이 왜국에서 중국으로 향할 때는 보통 세 루트가 있었다. 북로는 고구려를 통한 항로로 7세기 이전으로는 고구려의 방해로 사용된적이 없는 루트이고 사진에는 없는 고구려를 통한 육로의 교류도 있다. 일본서기에 오나라에 공녀를 구하러 갈때 고구려를 통한 육로로 교류를 한 것으로 기록 되어 있으며, 왜의 여왕 히미코 또한 위나라에 조공하러 갈때 한반도의 대방군을 통하여 사신이 입조한다. 또, 선술했듯이 413년에 대한 논란은 많지만, 그것이 진짜 왜국의 사절단이었다면, 고구려를 통한 육로로 북조와 통교를 한 것이다. 또 3세기에 규슈 일대를 다스리던 奴國王이 후한 광무제에게 받은 금표 또한 낙랑군에서 제조한 것으로 추정된다.[200] 후한서에는 규슈 일대에서 정기적으로 낙랑군에 조공을 보내왔다고 기록 되어 있을만큼 오래된 루트 였지만, 5세기 이후로 왜왕 武가 송나라 천자에 보낸 국서에 의하면 고구려가 통교하는 길을 막고 해로 또한 장악 했으므로, 조공하는데 어려움이 있다고 토로한 적이 있다. 남로의 경우에는 7-8세기에 개척된 루트이지만 여러번 조난 당하고 난파 되고 또 제주도에 있던 주민들에게 나포 당해 약탈 당하는 등 위험이 따르는 루트였다. 정조시대의 실학자 한치윤은 그의 저서 해동역사에 의하면
왜는 대대로 晉과 宋에 조공하는데, 반드시 한반도를 경유했다. 국경을 달리하면서 길이 막히지 않이 한 것은 백제와 서로 결호를 맺었기 때문이었다

라고 밝힌바가 있다. 왜왕 武가 언급한 루트는 대마도를 건너 제주도를 바라보며,[201] 한반도 연안을 항해해 서해안을 따라 북상해 기다려 황해를 횡단해 산동반도에 이르는 길이다. 실제 이시기는 고구려가 종종 백제의 중국과의 통교를 방해하기도 했다. 문주왕 2년 (476년), 동성왕 6년 (484년)에 파견한 思若思가 고구려군의 방해로 되돌아 왔다.[202] 626년의 기록에도 백제가 당나라와 통교하고자 했으나 고구려가 방해했다는 기록이 있다.
遣使入唐 獻明光鎧 因訟高句麗梗道路 不許來朝上國
27년(626) 사신을 당나라에 보내어 명광개를 선물하면서 '고구려가 길을 가로막고 당과의 교류를 막고 있다'고 호소하였다.

뭐..당시 한강일대를 장악하고 있던 신라는 당과 통교하기 수월했기 때문에 신라에 접근 했을수도 있지만, 9세기의 속일본후기의 기록을 보면 단지 지리적 근접도와 이점 때문은 아니고 신라가 당시에 왜구보다 앞선 항해력과 조선기술을 지닌 것은 명확한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여진다. 일본에 조선술을 가르쳐준 이나베(猪名部)라는 사람은 신라인이다. 신라인들의 당대 항해력은 상당히 수준 높았으며, 7세기에 백촌강 전투에서는 3만명이라는 대규모 병력을 한반도에 상륙 시켰지만, 이것은 임나일본부설의 전제로 하는 4-6세기와는 시간적 거리도 멀고, 백제 기술자들의 덕도 과소평가 할 수 없다.사실 신라에게 부탁한 것도 웃긴게 당시 신라는 백제 말갈 고구려 연합군의 파상공세로 상당히 수세에 몰렸었고, 백제 멸망직전 (660년)까지 신라는 대구인근까지 백제에게 내주며 풍전등화의 위기였다. 한강이고 뭐고 당장 수도가 위협 받고 있는 상황에서 당나라로 파견하는 외교사절의 배를 얻어타려고 그것도 10년전에 김춘추가 외교사절로 찾아갔을 때도 하대하던 그 신라에게 빌붙어서 당과 통교하고자 했다는 점이다.

물론 일본이 자력으로 당나라에 견당사를 파견하지 못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백제 멸망과 나당 전쟁 이후에는 불안정한 한반도 정세 때문에 한반도 연안을 거쳐 항해하는 것을 중단하고 남로를 개척했으나, 여러번 조난 당하고 난파 당하는 등 고생을 한다.

왜 하필 신라에게 부탁 했냐에 대해선 여라가지 학설이 있다. 백제는 처음엔 수나라, 당나라와 국교를 맺고 친선을 도모 했으나, 상대적으로 자신들이 만만히 보던 고구려에게 연달아 깨지는 것을 보고, 우습게 여겨서 그 이후로는 중국에 대한 관심이 줄었다. 일례로 당나라 소정방이 백제를 침범한 것도 백제의 영토에 상륙하고나서 알았다고 한다. 또 왜국 측에서도 백제가 자신들이 당나라와 통교하는 것에 대해 고깝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 봤다는 것을 의식했을 것이고, 선술 했듯이 백제인이 수나라 황제에게 받은 국서를 탈취하기도 했다. 이것을 계기로 백제와 왜국의 관계는 냉각기를 갖는다.

파일:백제 멸망전 영토.jpg

또한, 임나일본부설이 존재 했다고 전해지는 4-5세기보다 훨씬 후대인 백강전투의 왜국의 군사 수송선의 숫자를 총 파병 병력을 토대로 계산을 하면 한척당 25-30명[203] 정도를 태울수 있었다고 추정한다. 이 정도의 배 크기로는 4세기 경에 신라나 가야를 공격하여 점령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수천에서 수백척의 배가 필요한데, 당시의 일본의 기술력과 국력으로 가능했겠냐는 반문이 있다. '한일공동역사연구회의 제1권 보고서'를 보면, 삼국사기의 신라측 왜군 대응 병력을 보면 200-300명이며 405년의 기사에는 살획한 왜병의 숫자가 300명임에 주목하며, 일본이 신라와 가야를 지배할만한 군사를 수송할 능력이 없었을 것이라고 의견을 모았다. 관산성 전투에서 왜국이 파병한 군인은 불과 1,000명이었다.[204]

추정컨데 왜구가 가장 근 큐모로 한반도 남부를 노략하거나 용병으로 참전한 경우는 상술된 삼국사기의 462년의 기록일 것이다. 왜구의 규모가 어느정도라고 명시되어 있지 않지만, 신라측에서 포로로 사로잡힌 군사만 1,000명이라고 증언하고 있으니, 그의 수배에 이르지 않는가 하는 추정이다. 온전히 국력 규모에서 분석하자면, 왜왕이 송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자신이 통일 왕조를 이룩 했다고 떠들던 시기는 5세기이다. 왜왕이 언론플레이와 허영을 부렸다고 파악 되긴하지만, 그의 말을 진실이라고 상정 해놓고 봐도 5세기에야 통일 왕조를 이룬 왜국이 어떻게 4세기에 그 많은 병력을 수송해 신라와 가야를 정복 했다고 일본서기에서 전하는 그대로 믿을수 있냐는 백제사 전공자 노중국 교수의 주장이다.

어쨋거나 임나일본부설이 존재했다고 주장하는 4-6세기보다 한참 후대인 9세기에 조차 신라인들의 선박을 얻어타고, 당과 통교하는 수준인데 4~6세기에 과연 가야나 신라를 정복할 만한 군대를 수송이 가능했는지는 의문이 남는다.

4. 임나일본부설과 가야

가야는 일본이 한반도 남부를 통치했다는 주장(남조선경영론)의 핵심이 되는 지역이기 때문에, 광복 이전에는 임나일본부의 입증을 위해서만 연구되었고 광복 이후 1980년대까지는 감히 건드리지도 못하는 시기를 거쳐왔다. 그 과정에서 학계를 지배했던 것은 초기의 김해의 금관국 중심의 연맹체가 금관국 멸망 이후 후기의 대가야 중심으로 이동하였다는 학설이었다. 그런데 90년대 이후 자신감을 다소 회복한 학계에서 본격적인 발굴을 시작한 결과, 이전의 생각과는 전혀 다른 발굴 결과가 보고되고 있다.

현재로서는 굵직굵직한 발굴 몇 개가 마감될 때마다 학설이 생겼다가 뒤집어지는 양상이 있다. 대표적으로 대성동 13호 고분에서 일본 지배자들의 무덤에서만 발굴되는 일본계 유물인 파형동기[205]가 발굴된 일이다. 심지어는 일본의 파형동기들보다도 더 크다.# 그래서인지 2011년 현재까지 고대 일본과 가야의 관계에 대해 상당한 논란이 일고 있다. 때문에 아래 각 지역에 대한 소개에도 이전의 학설과 현재 학설이 뒤엉겨 있다. 어느쪽이 옳다고 확실하게 단언하기 곤란한 관계로 약간의 추가는 하지만 삭제는 할 수 없는 혼란스러운 상황이다. 최근에는 금관국이 고구려의 침략으로 5세기 초에 멸망했다는 주장에 정면으로 반박되는 유물까지 나왔다. 금관국 유적인데, 5세기 후반부의 것이라고 한다.

다만 어느 쪽이든 일본의 왜국이 임나일본부설의 주장따나 가야를 직접 지배했을 가능성은 낮다. 일반적으로는 백제가 가야를 오랫동안 자신들의 세력권에 넣었고, 같은 백제 세력권이었던 왜가 그 기록을 차용해서 관계를 뒤집어 《일본서기》를 꾸몄을 것으로 추정된다. 실제로 《일본서기》에는 4세기 근초고왕의 시기에 백제의 장군으로 가야를 정벌한 목라근자라는 장군이 나온다. 이 때 가야가 백제의 세력권으로 편입된 것으로 보인다. 목라근자 기록에서 보이는 남가라는 금관국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이는데, 당시 변진 지역에서 독보적인 국가였던 금관국이 가라라는 이름을 대가야에 넘겨주고 남가라로 통칭되었다고 볼 수 없기 때문에 더 후대의 관념이 부회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노중국은 이에 대해서 백제를 중심으로 가까운 고령을 가라로, 먼 김해를 남가라로 생각하는 관점이 반영되었다고 설명하지만, 후대의 관점이 반영되었다는 것에는 동의한다.[206]

왜국이 이것을 자신들의 기록으로 편입하여 진구황후의 기록으로 바꿨을 수가 있다는 것이다. 진구황후는 3세기의 인물로 기록되어 있어 시기가 차이나는 것은 고질적인 이주갑인상 문제다. 보통 가야(및 백제-신라 등지)에서 건너가서 일본에 자리잡은 한반도 출신 이주민들이랑 가야인들의 제휴, 일본인의 집단 거주지 및 일본의 가야 외교부 내지는 가야랑 일본이 문화-군사력을 서로 주고받은 전형적인 기브 앤 테이크 관계로 여겨지고 있다. 아주 잘해봐야 일본의 군사적, 외교적 영향력이 가야 지방에 일시적, 부분적으로 끼쳤을 것이다.

게다가 《일본서기》에서 보여지는 성왕의 가야에 대한 재건 의지를 보면 6세기경 가야는 친백제계 지역이었고, 고구려에게 박살난 가야를 수습하여 신라에 연합하여 대항하려던 정황이 엿보인다. 그러나 결국 성왕의 죽음으로 백제는 가야에 대한 주도권을 잃고, 신라가 가야를 흡수하게 된다.

다만 왜국이 가야와 친밀했던 점은 사실로 보인다. 고고학적으로 봐도 가야에서 건너간 유물이 많이 나오며, 인적 교류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일본서기》에 등장하는 일본부라는 정체불명의 기관은 같은 세력권이었던 가야와 왜국이 서로 혹은 백제랑 연락하기 위한 외교창구 정도에 그쳤으리라 추정한다. 《일본서기》는 긴메이 덴노기에서 성왕과 왜국의 관계를 거꾸로 기술하여 일본의 종주권을 강조했다는 의심을 많이 받는다. 당시 정황을 고려하면 실제로는 왜가 가야를 지배했다는 것은 믿기 어렵기 때문이다.

임나 이름 자체는 가야의 별칭으로 쓰여졌으나 이 일본의 임나일본부설 때문에 임나의 역사적 용어가 급속히 부정적인 의미로 전락했다.

하치만(八幡大菩薩: 팔번대보살)이 가야를 침공했다는 이야기는 있었다.

5. 반도 일본어설과의 관계

임나일본부설에서 연상될 법한, 혹은 임나일본부설이 연상될 법한 다른 학설로 반도 일본어설이 있다. 이는 러시아계 미국인 언어학자 알렉산더 보빈이 본격적으로 제시해 한국어와 일본어의 연구와 관련해 큰 주목을 끈 학설로, 언어학적 지식과 역사적 지식이 얕은 사람들은 임나일본부설과 연관지어 곧잘 잘못 이해하기 쉽다.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보빈의 반도 일본어설에 따르면 한반도 중남부에는(지역 오지를 포함해 늦게 잡으면 기원후 5~6세기 무렵까지, 대체로는 그보다 이른 시기까지) 일본어족의 고대 언어를 쓰던 부족들이 살았는데, 이 학설에서 비정하는 반도 일본어의 대략적인 범위가 공교롭게도 가야의 영역은 물론이고 백제신라의 영역과도 많은 부분에서 겹친다. 즉, 언어적으로만 따지면 일본계라고 할 수 있는 집단이 지냈다는 것이다.

이는 얼핏 보기에 임나일본부설과 엮기에 충분해서 한국인들에게는 불쾌감을[207], 일본인들에게는 사람에 따라 불쾌감[208]이나 솔깃한 소식으로 다가올 수 있는데[209], 정작 제대로 보빈의 논지를 살펴보면 임나일본부설과는 거리가 매우 멀다.

대표적으로 참조할 만한 논문으로는 '고구려에서 탐라까지(2013)'(번역), '고구려어와 백제어: 다른 언어였는가, 고대 한국어의 방언이었는가?(2005)(번역)', '이주민인가, 지배자인가?(2012)(번역) 등이 있다.

읽어 보면 알겠지만, 보빈의 반도 일본어설 및 그에 바탕을 둔 학설 및 주장들은 모두 임나일본부설에서 주장하는 바와는 그 성격이 다르며, 오히려 정반대에 가깝다. 앞서 예로 든 논문 중 2005년의 것에서는 '', '구지', '무레' 등의 옛 한반도 삼국의 어휘들 상당수가 서부 고대 일본어로 차용되었다고 설명하고 있으며, 2013년의 논문에서는 그간 주장해 온 반도 일본어설을 전체적으로 종합한다는 느낌으로 고대 한국어족 사용자들이 한반도 중남부의 일본어족 사용자들을 일본 열도로 밀어내거나 한국어족으로 동화시켰다는 골자를 분명히 했다. 2012년의 논문에서는 아예 한국인들이 봐도 급진적으로 보일 법한 주장으로 일본 황실이었던 오진 덴노와 그 어머니로 기록된 진구 황후마저 고대 한국어를 쓰던 한국계 일본인이었다고 주장했는데, 특히 주목할 만한 점은 이 두 인물은 삼한정벌 등과 관련해 일본 우파들에 의해 허구한 날 임나일본부를 비롯해 일본의 한반도 남부 정복 및 지배•경영설의 핵심 인물로 거론된다는 것이다. 반도 일본어설은 보빈의 방대하고도 실증적인 연구 방법으로 인해 그 동안 베일에 싸여 있던 한국어와 일본어의 계통적 관계에 큰 진전을 준 학설로, 정치적 입맛에 따라 쥐락펴락되는 여타 한일 양국의 분쟁 사안에 대한 주장과는 궤를 달리한다. 보빈의 주장에서 나타나는 바와 같이, 일본에서 한반도로 영향을 미쳤다기보다는 그 반대로 한반도에서 일본으로 영향을 미친 게 합당한 흐름이며, 이는 고대 일본이 어떤 형태로든 고대 한반도의 영향을 '받는' 쪽에 있었다는 기존 사학계의 이해와도 궤를 같이한다.

이쯤에서 '임나일본부'가 정확히 무엇인지 다시 보자. 임나일본부란 '야마토 정권'에서 한반도 남부의 특정 지역에 설치한 '통치 기구'를 가리킨다. 즉, 이는 일본 열도의 고대 일본 정부에서 직접 한반도 남부에 설치한 일종의 지방 정권 내지는 식민지라는 것이다. 하지만 반도 일본어설에서는 이 같은 흐름을 전혀 읽을 수 없고, 오히려 한국계 통치자가 일본 황실까지 장악했을 가능성마저 열어 두었다.[210] 한반도 남부에 반도 일본어 화자, 즉 일본어족 집단이 살았던 시기는 지방 구석구석까지 포함해서 늦게 잡아 봐야 6세기 언저리까지이고, 대부분은 그보다 몇백 년 앞서서 거의 삼한시대 및 초기 삼국시대 중으로 일본 열도로 이주하거나 부여계 한국어족 집단에 동화되어 현실적인 의미에서의 '한국인'이 되었다. 반도 일본어 집단이 한반도 남부에서 활발히 생활하던 시기는 원삼국시대 이전으로, 임나일본부설과는 전혀 관련이 없으며, 이 시기에는 '일본인'이라는 개념마저 소급 적용하기 힘들다.

결론적으로 임나일본부설과 반도 일본어설은 일반인들이 보기에 얼핏 연관되어 보일 수는 있으나 실제로는 전혀 관련이 없으며, 오히려 고대 한일 양국 언어에 대한 심도 있는 연구를 통해 삼국시대에 문화적으로 우위에 있던 쪽은 한국계였음을 역으로 뒷받침하는, 일본 우익 측 주장과는 완전히 반대되는 증거만을 내놓는다.

양직공도의 '혹속한 혹속왜(或屬韓或屬倭)' 역시 '한때는 한(韓)에 속했으며, 한때는 왜(倭)에 속했다'라기보다는 '어떤 이는 한(韓)인이며, 어떤 이는 왜(倭)인이다'로 보는 게 더 적절할 수 있다. '혹자(或者)' 등의 표현에서 볼 수 있듯이 '혹(或)'에는 '어떤'이라는 부정칭의 의미도 있는데, 반도 일본어설과 연계하면 여기서 말하는 '왜인인 어떤 이들'은 백제, 신라, 가야 등 한반도 남부에 잔류하던 일부 토착민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6. 종합

결과적으로 임나일본부설은 근거가 전혀 없다는게 주류 역사학계의 정설이다.

종합하자면 대부분의 기록들은 왜의 과장과 허세에서 비롯되었으며, 통치기관으로서의 임나일본부는 없었다는 것이 결론이다. 이 결론에 대해 한국 사학계뿐만 아니라 일본 사학계에서도 점차적으로 인정해나가다가, 2010년 한일역사공동위원회에서 임나일본부설을 근거 없음으로 결론 내렸으며 '임나일본부'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기로 공동 합의를 맺음에 따라 임나일본부설은 일단 양국 사학계에서 배제된 상황이다. # # #

다만 이건 어디까지나 사학계에서일 뿐 일본 정부가 공식적으로 임나일본부설을 폐기한 적은 없으며, 여전히 상당수 일본 교과서와 외국 교과서에 버젓이 실려나오는 상황이기에 임나일본부설에 대한 논쟁이 언제 최종적으로 종결될지는 장담하기 어렵다. 게다가 일본은 교과서와 학계가 따로 논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일본의 주류 정치세력이 교체되기 전까지는 이 문제가 해결될 가능성은 희박하다.

7. 현재진행형 수정설

7.1. 제1차 (2005), 2차 (2010) 한일역사공동연구 보고서의 고대사 부분(제1분과)의 내용과 토론부문 발췌

설명에 앞서 보고서는 한일 양국의 각자 개개인의 논문을 투고하는 형식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양측이 상호의 의견에 동의 했다고 말하긴 어렵다. 서로 자신의 주장을 논문으로 투고했기 때문에 상대측의 의견에 동의 하는지, 동의하지 않았는지는 별개의 문제다.

양측이 서로 각기 다른 쟁점에 어떻게 생각하는지, 동감을 이루었는지 알고 싶다면, 보고서의 맨 마지막 부분인 좌담회 토론 부분을 참조하기 바란다. 이 토론 부분에서는 매우 직설적인 질문과 답변이 오갔기 때문에 한일 양측에서 생각하는 임나일본부설에 대해 자세히 알 수 있다.

제2기 한일 역소 공동연구회의 좌담회 토론을 주도한 사람은 한국측의 가야사 전문가 김태식 교수이고 일본측에서 주도적으로 임나일본부설에 대해 방어한 사람은 하마다 고사쿠(濱田耕策) 규슈대 교수이다.

김태식 교수가
1) 신공황후 49년(369년), 목라근자와 사사노궤[211] 등을 주축으로 하는 백제의 가야 정벌은 신공황후와 왜국이 주도적으로 했다고 볼 수 없다라고 발언하며, 전형적인 의미의 임나일본부설은 붕괴 되었다고 발언.
2) 광개토대왕릉비에 나오는 왜군은 백제와 왜 양국이 대등한 관계에서 파견된 용병이며, 가야-왜 연합군 중 복식이나 행색이 이질적인 왜군을 크게 과장했다.
3) 후기 가야의 주도 세력인 고령가야는 6세기에 고대국가의 틀을 잡았기 때문에, 일본학계에서 가야를 약소국 취급하는 인식에 대해 수정을 요구.

이에 대해 하마다 고사쿠 교수는, 신공황후 49년 가야 정벌의 기사는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어려운 것이 맞다고 수긍했다.[212] 이에 대해 일본측에서는 왜국이 주도적으로 정벌을 했다고 믿을 순 없지만 어떤 식으로든 근초고왕의 가야 평정전에 왜군이 참여 내지는 관여 했을거고 이걸 후대에 자신들이 유리한 기사로 바꾸어 기록 했다고 추정한다고 밝혔다. 그리고 광개토대왕릉비에 나오는 왜구 세력이 상당히 과장 되었다는게 통념이긴 하지만, 5만의 군사를 동원한 광개토대왕이 한반도 남부에서 왜군을 완전히 몰아내지 못한 점을 주목했다. 그리고 가야가 저평가 받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가야가 왜국의 문화 형성에 매우 큰 역할을 한 것은 맞다라고 대답했다.

김태식 교수는 사비회의에서 성왕이 근초고왕 시절, 백제와 가야는 형제관계를 맺고 있었다는 발언에 주목하며, 근초고왕 치세기 시절 김해의 금관가야와 교류를 하며, 금관가야의 중개를 통하여 백제와 왜가 통교를 맺었다고 발언했다.[213] 덧붙여 백제가 칠지도를 보낸 이유를 가야를 평정할 때 왜군이 원조를 보낸 것에 대한 보답이라고 한 하마다 고사쿠의 발언을 두고 가야7국 평정에 대해 상당히 사실성이 높다고 평가하는 것 같은데 사실이냐고 몰아 붙였다. 이에 하마다 고사쿠는 이에 대해 오해라고 해명했다. 덧붙이자면 김태식 교수는 각자 개인이 투고한 논문에서 칠지도를 무령왕릉에서 발굴된 청동거울과 동시대의 유물이라고 발언하며, 6세기경의 물건이라고 추정하였다.

또한 김태식 교수는 투고한 논문에서 관산성 전투에서 파견한 왜군의 병력 규모에 주목하면 1000명[214] 수준의 상대적으로 소규모 부대가 한반도에서 이산적으로 활동 했을거라고 봤고, 또 그들의 병기나 무기 수준을 언급하며 주력부대는 아니었을거라고 단언 했다. 또 고고학과 수반된 가야-왜국 간의 관계 연구가 임나일본부설의 실체에 접근하는데 절실하다고 말했다.

가야사 전문가 김태식 교수는 제1차 한일역사공동연구회에서 가야와 백제 왜군의 무기 수준이나 착용 갑옷 수준에 대해 심도있게 서술했다
백제나 가야에 비하여 일본 열도에서는 4세기대에 소급할 수 있는 금촉제마구가 한점도 출토되지 않았으며, 5세기가 되어서야 가야로부터 개별적으로 수용되는 양상을 보여주었다. 일본 고분시대의 마구에 대한 연구로서 小野山節는 일찍이 편년 작업을 하여, "오로지 수입품에 의존한 시기"를 설정하고 발걸이 형태의 차이를 가지고 제1기를 구식과 신식으로 나누어 보았다. 이에 대하여 中村潤子는 5세기 전반의 제1차 도입기 (구식)에 전해진 한반도 낙동강 하류욕 마구는 결국 일본에서 뿌리내리지 못하고 끝났으며 5세기 후반의 2차 도입기 (신식)에 검릉형 또는 편원검미형 말띠드리개와 f자형 재갈멈추개로 표상되는 川脥 玉田 계통의 마구가 들어와 그것이 비로소 일본에서 계승 발전되었다고 하였다. 즉 일본에 4세기대의 기마문화는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중략) 또한 왜는 4세기대에 단검,단도, 두께가 얇은 양날창과 쇠화살촉 등의 무기를 주로 사용하고 5세기에 와서야 공격구(攻擊具)의 주류로서 장검을 채택할 정도였다. 두께가 얇은 양날창과 쇠화살촉은 어느정도의 갑옷과 방패만 있으면 치명상을 입힐수 없을 정도로 가벼웠다. 그러므로 왜의 무장은 일부 射兵이 부가되어 있으나 개인의 능력을 중시하는 短兵器가 주력이고, 실전적인 무기로서보다는 과시적인 威信財로서의 성격이 강하다고 보인다.

출처 https://www.jkcf.or.jp/wordpress/wp-content/uploads/2019/11/1-02k.pdf (pg40.)

그의 견해는 왜국의 부대는 단언코 주력부대가 아니고 소규모 부대로 가야 군대에 편입되어 용병으로 참가 했으나, 복색이 백제 신라 가야와 이질적인 왜군의 부대를 고구려가 크게 과장 하였다는 것이다.

이밖에도 김태식 교수는 광개토대왕릉비에 써져있는 병신년(396년)의 기사를 두고, 왜가 신묘년에 백제와 신라를 신민으로 삼았다고 해석하면, 396년 병신년에 고구려가 백제를 공격할 명분이 없다며, 기존 일본측에서 주장하는 해석론에 의문을 제시하는 내용을 논문에 투고 하였다.[215][216]

제 1차 1분과 고대사
하마다 고사쿠 4세기 https://www.jkcf.or.jp/wordpress/wp-content/uploads/2019/11/1-01k.pdf
김태식 4세기 https://www.jkcf.or.jp/wordpress/wp-content/uploads/2019/11/1-02k.pdf
이시히 마사토시 5세기 https://www.jkcf.or.jp/wordpress/wp-content/uploads/2019/11/1-03k.pdf
노중국 5세기 https://www.jkcf.or.jp/wordpress/wp-content/uploads/2019/11/1-04k.pdf
사토 마코토 6세기 https://www.jkcf.or.jp/wordpress/wp-content/uploads/2019/11/1-05k.pdf
김현구 6세기 https://www.jkcf.or.jp/wordpress/wp-content/uploads/2019/11/1-06k.pdf
제1차 한일공동역사연구회 좌담회 토론 https://www.jkcf.or.jp/wordpress/wp-content/uploads/2019/11/1-07k.pdf
제 2차 1분과 고대사 논문 + 좌담회 토론 https://www.jkcf.or.jp/wordpress/wp-content/uploads/2010/10/1-allk.pdf

7.2. 일본 학계

예전처럼 한반도 남부에 대한 식민지 경영과 같은 주장은 현재는 일본학계 주류에서도 거의 사라졌다. 대신 일본서기에 기록된 '왜곡된 임나일본부'의 존재를 좀 더 현실적으로 해석해서 기내(畿內)의 야마토 조정과는 무관한 규슈의 지방 호족에 의해 설치되었다고 보는 견해로부터, 대마도 설치설, 일본의 '출장소' 또는 '출장기관'과 같은 출선기관설(出先機關說) 등을 계속 주장하였다. 그러나 그것의 신빙성이 의심받자 이제는 선사시대부터 가야지역과 일본열도의 활발한 교류를 들어, 가야지역에 일부의 왜인들이 집단적으로 거주했고, 이러한 왜인들을 통제하는 행정기관이 임나일본부였다는 '가야의 왜(倭)'설[217]이나 왜의 식민지 지배기관이 아니라 가야에 파견된 왜의 사신들로 이해하는 외교사절설(外交使節說) 등 다양한 견해가 나왔다. 이런 견해들은 공통된 특징이 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임나일본부의 영역과 성립시기는 작아지고, 군사적 침략의 가능성은 옅어진다.[218] 2017년 6월 경 심용환 역사작가가 국내와 일본학계의 동향을 설명하며 학설 중 하나로 외교사절설을 언급하며 인터뷰한 적이 있다.

일부에서는 백제의 치적을 일본이 가져다 썼다는 말도 있다. 정확하게는 원래는 백제가 주도한 것인데 나중에 기록을 정리하면서 왜왕이 명령해서 왜가 주도한 것처럼 주어를 바꿨다는 설로 앞에서 언급한 대로 천관우가 제기한 주장이다.

7.3. 한국 학계

《일본서기》는 과장이 많지만 백제, 가야에 대해 한국 기록에 없거나 자세하지 않은 부분에 대한 정보가 많아 백제사, 가야사 전공 학자들에게 연구가 많이 되고 있는데, 일본서기에 기록된 '통치기구 임나일본부' 그 자체는 한국 학계에서는 대체로 존재 자체를 부정하고 있다. 대신 가야를 지배했다고 하는 《일본서기》의 '왜'가 실제로는 백제라는 견해와 앞서 말한 한반도 내 일본 군사 세력의 잔영이라는 백제군사령부설이 있다. 최근에는 임나일본부는 왜의 통치기관이나 백제의 군사령부와 같은 것이 아니었으며, 임나(任那)와 안라국(安羅)에 파견된 왜의 사신인 기비노오미와 가와치노아타이였다는 주장도 나왔다. 아무튼 기존의 일본 사학계가 주장하던 식민지설은 점차적으로 폐기되는 추세이다.

일본인들이 지진, 태풍, 화산 폭발 등의 재앙을 피해 떼를 지어 한반도로 도망쳐온 것이 임나일본부의 실체라는 설도 있으나, 민간인이 아니라 통치 기관이 자연 재해 때문에 머나먼 타지인 한반도로 이주했다는 말은 아귀가 맞지 않는다. 그냥 '이런 설도 있다'는 차원에서만 보는 것이 맞을 듯. 다만 이 설을 차용한다면 6세기 초반에 갑자기 임나일본부의 기록이 사라진것도 '한반도에 피난온 일본인들이 재해가 끝난 일본으로 돌아갔다'는 식으로 설명이 가능하긴 하다.

일본서기의 서기 534~540년 시기에 안라국에 어떤 하나의 기관을 설치하고 왜인을 파견하는 부분이 있다. 《일본서기》에서는 이 기관의 이름을 임나일본부 또는 안라일본부라고 기록하고 있지만 위 서술처럼 임나일본부 식민지경영설로 악용되었기도 했고 일본부라는 용어 자체도 당대에 사용되지 않은 등 문제가 있어 현대의 한국 학자들은 이 기관의 이름을 임의로 '안라왜신관'이라고 부르고 있다. 안라국에 설치된 왜인들로 이뤄진 기관이란 의미다. 게다가 《일본서기》 기록상 이 안라왜신관에 최초로 파견된 인지미(印支彌)라는 왜인을 파견한 것이 백제 성왕이었던 것으로 묘사되는데, 안라왜신관이라는 기관은 왜국이 아니라 백제에서 설치했다고 보는 게 한국 학계의 의견이다. 그리고 정작 《일본서기》의 내용을 살펴보면 안라왜신관의 왜인들은 왜국의 이익을 위해 활동하지 않고 때로는 왜왕의 의도와 반대되는 짓을 해서 왜왕이 당황하는 상황까지 나오는 등 왜국의 통제를 받지 않는 기관이란 모습이 자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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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라국[219]에 존재했던 안라제왜신을 가리켜 임나일본부라고 부른다는 주장도 있다. 《일본서기》에 나온 기록에 의하면 부(府)를 "미코토모찌"라고 불렀는데 이는 관청이 아닌 "사람"을 뜻하는 것이라고 한다.

8. 한국 유사역사학자들의 주장

한국에서도 이런 사례가 있다. 왜인 한반도 남부 지배설 참고.

9. 기타

2005년에도 서울 강동과 하남에 전방후원분이 발견됐다고[220] KBS 9시 뉴스에서 대대적으로 보도해서 웹상의 재야사학자들과 수많은 일뽕, 환빠들을 설레게 했으나 강동의 것은 한달도 안돼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전방후원분이라 볼 근거가 없다"고 밝혔고, 하남의 것은 선사시대와 조선시대의 유물들이 무더기로 나와 전방후원분과는 연관이 없다는 것이 밝혀지기도 했다. 애초에 전문적인 고고학 조사기관이 아니라 무려 다우징을 사용해 찾아냈다고 주장하는 민간단체에서 제기한 의혹이었다. 그러나 일빠와 환빠 모두에게 매력적인 소재인지라 2010년대까지도 블로그 등지의 역사 전문가들이 '식민사학자들이 백제 최고(最古)의 유적을 은폐한다.' 또는 '국뽕사학자들이 왜가 백제를 지배했다는 근거를 은폐한다.'는 소리도 있었다.

유명 역사게임인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1편에서 해당 내용을 야마토문명 시나리오에 넣었다가 여론의 뭇매를 맞고 시나리오를 수정했고, 이는 결정판에서도 유지했지만 등장 문명은 크게 바뀌지 않아 임나일본부설을 넣은 흔적을 알 수 있다.

10. 관련 문서


[1] 물론 위키백과는 언제든지 수정될 수 있다는 점은 유의. 애초에 일본 내에서도 세계사의 창 가야 항목처럼 임나일본부설을 부정하는 글들은 보인다.[2] 일제강점기 식민사관학자 쓰에마쓰 야스카즈가 임나 4현을 현재의 전라도 일대로 비정하면서 시작되었으며, 오늘날 일본 내 일부 교과서는 일본서기상 서술을 그대로 해석하여 '일본이 임나4현을 다스리고 있었으나 후일 백제에게 양도했다'는 내용을 싣고 있다.[3] 광주광역시에서 일본식 무덤인 전방후원분이 발견되면서 재조명된 적이 있으나, 논란이 있다. 하술 '3.11. 주구묘와 장고형 무덤' 단락 참조.[4] 광개토대왕릉비의 신묘년조 내용은 신라 구원과 관련하여 광개토대왕의 업적을 강조하기 위한 수사, 혹은 해석 오류라는 설. 일제의 비문 조작이라는 설도 과거엔 거론되었으나 요즘은 많이 잠잠해진 편이다. 《삼국사기》의 왜군 관련 기록은 단기간의 침략으로 본다.[5] 임나가야 지역을 부르는 다른 이름이다. 한국에서는 주로 가야로 불러서 임나라는 이름은 생소하고 임나일본부설 때문에 거부감까지 가지는 편이지만, 일본 기록에서도 등장할 뿐 한국 측 사료에서도 임나라는 이름은 종종 쓰였으므로 '임나'라는 단어 자체는 본질적으로 일본부의 존재여부와는 관계가 없다. 이를 구분해 이해할 필요가 있다. 가야 문서 참조.[6] 물론 신공황후기는 이주갑인상이라는 논리로 4세기로 끌어내려야 한다.[7] 일본이 마치 상국인양 서술하는 윤색은 백제가 일본과 통교하기 전부터 나타난다.[8] 후술할 임나 10개국도 일본에서 주장하는 자신들이 통치했다는 왜국의 강역이다. 그러나 안라, 다라, 탁순, 탁국, 남가라, 비자발, 침미다례의 7개국은 근초고왕의 가야 원정 때 일본이 그들을 섬멸하고 백제에게 주었다고 기록되었다.[9] 下哆唎 전남 여수로 추정[10] 上哆唎 역시 여수로 추정[11] 裟陀 전남 구례군 혹은 순천으로 추정[12] 牟婁 영광 광양 고창 무안[13] 계체 6년(512) 12월 기사 참조.[14] 원래 백제의 영토인데, 어째서 백제가 왜왕에게 부탁해서 돌려달라고 하는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학자들이 있다. 상식적으로 말이 되지 않는다는 것.[15] 峴南[16] 支侵[17] 谷那[18] 東韓[19] 일본서기에는 분명하게 당대의 서적 백제기를 인용하며 인질이라고 언급하지 않고, 파견했다고 기록 되어있지만, 정작 삼국사기에서는 인질이라고 나온다.[20] 백제의 영토를 빼앗았다는 해석도 백제 유민들이 일본으로 도망간 뒤, 왜 조정에게 잘 보이려고 고구려에게 빼앗긴 영토를 왜국에게 빼앗겼다는 식으로 윤색했다는 게 중론이다. 하지만 지침은 홍성이나 충남 예산으로 비정, 동한은 충북의 괴산이나 음성 일대로 추정하기 때문에 고구려가 빼앗았다고 추정해도 무리가 없지만, 같이 언급 되는 침미다례는 전남 일대, 곡나는 전라도 곡성 혹은 충주, 현남은 전북 익산으로 추정하기 때문에 고구려가 통치하기에는 무리가 있지 않냐는 해석이 있다. 물론 광개토대왕릉비에는 그의 치세시기인 400년에 고구려군이 부산/김해 일대까지 가야와 왜군을 추격해 내려왔다고 기록했다. 그러나 호남 일대까지 도달 했다는 정황은 없다.[21] 428년(일본서기 상으로는 308년의 기사이나 이주갑인상을 고려)에 파견 되었다는 전지왕의 누이 新齊都媛과 동일인물이라는 설도 있다.[22] 이 기사를 기점으로 이주갑인상의 왜곡은 사라지고 정상적인 년도로 돌아온다. 이 시기에 묘하게 맞물려서 비유왕의 치세기는 전부 소거 당했다.[23] 부여곤지와 개로왕의 첩을 일본에 보내는 도중에 첩은 개로왕의 아들 무령왕을 출산하게 되고, 무령왕은 곧바로 백제로 송환되지만, 부여곤지는 일본에 머물렀다.[24] 그렇기 때문에 고구려에게 빼앗긴 영토를 왜왕과 왜국의 국력을 과시하고 포장하기 위해 왜국이 뺏었다고 거짓말한 것이라고 해석하는 학자들이 많다.[25] 장수왕이 백제를 정벌해 없앴다고 기록한다. 일본서기에서는 장수왕 휘하의 장군들이 백제를 완전히 멸망시키자고 제언했지만, 장수왕은 백제는 일본을 섬기는 관가이므로 멸망시킬수 없다고 말하고선 정벌을 멈추었다.[26] 일본서기에선 고마나리는 임나국의 읍이라고 전한다. 충청도 일대도 자신들의 영유지 었다라고 주장하는 것이다.[27] 웅략 21년 (477년) 3월 기사 참조.[28] 일본서기 사비회의 목록을 참고하자. 흠명 5년(544)[29] 흠명 11년[30] 원문에서는 평양 일대라고 적었는데, 평양 일대가 아니다. 한강 이남의 지역을 남평양으로 추정한다[31] 실제로 목만치등 목씨 일가들이 도왜한 시기는 일본서기에서 이르길 백제가 고구려에게 멸망한 5세기 중반 쯤이다.[32] 그 이전에는 나름대로 가야가 백제에 저항하기도 하고 성왕의 명령을 어기는 등 다소 백제왕의 패권에서 벗어나는 행동들을 해왔지만 사비회의를 직후로 가야는 백제가 하자는 대로 끌려 다니기 시작한 것이다.[33] 아마 일본 측에서 임나 = 가야의 통칭으로 당대에 오해한 모양이다. 이게 와전되어 고착되었고 일본서기에서 그렇게 부르니 편의상 임나 = 가야가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지만, 엄연히 말하자면 임나는 가야의 일부이다. 당대에 작성된 광개토왕비를 봐도 어느 쪽이 더 정확한지는 쉽게 알 수 있다.[34] 참고로 중국에서는 구야한국이라고 불렀다.[35] 중국이 금관가야를 부른 명칭 구야한국에서도 구야는 금관에 대응하고 한국은 가야에 대응하는 단어기 때문이다.[36] 임나4현 下哆唎 =전남 여수, 裟陀= 순천, 牟婁 = 영광, 광양, 고창, 무안과 谷那 = 전남 곡성[37] 峴南=익산[38] 支侵 = 충남 홍성 혹은 예산, 또 장수왕에게 백제 개로왕이 죽고 즉위한 문주왕에게 백제를 재건하라며 고마나리 = 웅진을 백제에게 할양했다고 묘사했다[39] 東韓 = 괴산,진천,음성[40] 쉽게 말해 가야연합 10개국 + 침미다례 + 임나4현을 통합한 강역과 비슷하다. 가야 연합은 전남과 경남 일대 침미다례는 전라남도 일대이고 임나4현은 충청북도 근방으로 추정된다[41] 무릇 임나는 안라를 형(兄)으로 여기고 오로지 그 뜻을 따릅니다. 안라인은 일본부를 하늘처럼 여기고 오직 그 뜻을 따릅니다.[42] 夫任那者, 以安羅爲兄. 唯從其意. 安羅人者, 以日本府爲天. 唯從其意[43] 흠명5년 (544년)3월 참고[44] 維鳩. 現 공주시 유구읍.[45] 해표 : 해외를 뜻한다. 어느곳에서는 한반도를 특정하는 단어로도 사용되고 있다[46] 번국 내지는 속국[47] 官家: 천황의 직할령[48] 下哆唎,上哆唎,裟陀,牟婁[49] 상다리 하다리 사타 모로라고 불리는 임나4현을 제외한 10개국[50]삼국유사》가 인용한 《가락국기》에는 아라가야(阿羅伽耶), 고령가야(古寧伽耶), 대가야(大伽耶), 성산가야(星山伽耶), 소가야(小伽耶), 금관가야(金官伽耶), 비화가야(非火伽耶) 6국의 가야가 있다고 하였다.[51] 세계의 교과서들도 이러한 임나일본부설을 여과 없이 수용하여 지도에 표기하고 있는 점이 문제가 되고 있다("영어 역사서의 지도 27% 한국 표기 오류"). 이뿐만 아니라 일부 사이트에도 여전히 명기되어 있다.[52] 광개토대왕릉비에도 백제의 사주를 받아 왜군이 신라나 대방(황해도)을 공격한 것이 나왔다.[53] 일본서기의 텍스트를 그대로 읽어봐도, 이 '일본부' 소속 왜인들(이나사, 마도 등) 마치 가야의 안라국에 매수당한 것처럼 안라국의 이익을 위해 행동하고, 백제가 이에 불만을 가지고 왜국에 따지자 왜국은 우리가 지시한 것이 아니라고 발뺌하는 식으로 나온다. 왜국 중앙정부가 통제하지도 못하고 멋대로 행동하는 기관이라면 당연히 이런 걸 통치기구라고 말할 수는 없다.[54] 한국의 삼국사기는 백제가 멸망하고도 500년 이상 지난 뒤에 편찬되었다. 그동안 남아있었을 백제계 문헌기록은 백제인이 저술한 원형에서 오랜 세월이 지나며 변형되거나 실전되었을 개연성이 높다.[55] 물론 옹관묘는 왜 열도에서 100년 정도 빨리 등장한다. 하지만 옹관묘 자체가 만들기 쉬운 묘제로서 한반도에서 자생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56] 후술하겠지만, 일본은 당대에 기록을 남길수 있는 문자가 없었다.[57] 당연히 구전에 의존한 것으로 역사라고 부를수도 없고 또 신빙성도 기록보다 많이 떨어진다[58] 일본서기에서 천황이 한반도 및 주변부 세력들에게 명령을 내리고 그들이 그 명령을 따르는 위치에 있었다고 설정되어 있다. 즉 백제가[59] 주체교체설 이론 전까지는 일본서기를 연구대상으로 활용하기를 꺼리는 경향이 있었다. 과장된 임나일본부설 관련 기록을 간파하고, 교차검증이 가능한 상황으로 해석이 가능해지고서야 이런 금기에 가까웠던 분위기가 반전된 것이다.[60] 일본 "임나일본부 없다"…근현대사는 인식 차이↑[61] 사실 왜가 고대 한반도 남부를 기구를 두고 '통치'한 게 아니라 '활동'했던 것 자체만 따지면 삼국사기, 광개토대왕릉비 등 다른 근거도 많아서, 왜가 한반도에 발도 못 디뎠다는 식으로 완전히 부정하기는 어렵다. 임나일본부설과는 다른 차원의 논의이다.[62] (여적)임나일본부[63] 연민수, 이영식, 김태식, 백승충, 요시다 아키라, 우케다 마사유키, 스즈키 히데오 등[64] 유의할 점으로, 해당 기록은 중애9년조긴 하지만 중애천황조가 아닌 신공황후조의 기사로 실려있다. 중애천황이 9년 2월 츠쿠시에서 죽고, 신공황후조가 신공1년이 아닌 중애9년으로 선왕의 연호(?)를 이어 받아 시작하기 때문.[65] 지금의 대마도로 추정[66] 고대 일본어에서 하(H)행은 F발음이 났던 것을 주의하면 휘는 Fasa 정도로 추정할 수 있다.[67] 마찬가지로 하행의 F 발음을 주의.[68] 신공즉위전기 200년의 기사를 참고하자. 일본서기의 기술대로라면 서기 200년이지만, 일본서기의 윤색 때문에 연도가 맞지 않자 근초고왕의 사망기록을 교차검증하여 오차 120년이 있음이 발견되었다. 이를 이주갑인상이라 부른다. 그래서 보통 일본서기의 4~5세기의 기록은 120년을 더해야 한다. 그러므로 320년에 일어난 일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69] 고려라는 고구려의 별칭 또한 당대에 존재하지 않는 국명이었다. 고구려의 별칭 고려는 5세기 중반 장수왕대에 이르러 사용하기 시작한 것으로 추정한다[70] 일본서기를 보면 이때, 이주갑인상을 하여 계산한 320년에 최초로 백제와 외교관계를 성립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 삼한정벌 기사에 백제와 고구려왕이 항복하고 나와 이제부터 조공을 하겠다고 말했기 때문이다[71] 물론 366년에도 통교를 맺지는 못했다. 후술한 내용이지만 그 이유는 어떻게 일본에 당도 해야하는지도 몰라서였다.[72] 신공 섭정 44년을 말한다. 일본서기 묘사대로라면 서기 244년이지만, 이주갑인상을 고려하면 364년이라 하겠다.[73] 이 기사에서 백제인이 탁순국에 도착한 시기는 7월이라고 기록 되어있다. 당시 일본은 한반도에 당도할 때 훈풍이 부는 여름에만 항해 했는데, 반대로 한반도에서 일본으로 항해할 때는 겨울이 적합한 시기임을 알수 있다.[74] 일본서기 묘사대로는 246년. 이주갑인상을 고려하면 366년[75] 일본서기의 묘사대로는 서기 200년. 이주갑인상을 고려하면 320년[76] 자세한 항목은 일본서기이주갑인상 항목을 참조[77] 정벌은 일본측에서 먼저 하긴 하는데 군사가 부족해서 백제에 원군을 요청하는등 가야를 정복한 주체가 일본 이라고 말하기 어렵다[78] 다만 목라근자의 아들 목만치와 소가만지가 동일인물이라는 설은 김현구 학자의 학설로 근거가 미약하다.[79] 근거로는 소가노 이루카의 이름과 관직으로 제시되는 鞍作大郎, 林大臣, 我 入鹿에서 언급되는 작위 鞍作이 扶桑略記에 의하면 백제불공(百濟佛工)이라고 하고, 일본 고대 황족의 족보인 신찬성씨록에서는 林씨가 백제의 목씨에서 나왔다고 기록했기 때문이다.[80] 박적은 고구려를 가리키는 표현이다. 狛은 글자 외관상에서도 알 수 있듯이 맥족이라는 뜻의 貊과 일맥상통한다. 백제어를 통해 왜 貊을 狛과 연결지었는지 유추할 수 있는데, 웅진이라는 지명을 당대 백제인들이 어떻게 불렀는지 알 수 있는데, '고마나리'라고 일본서기에 기록 되어있다. 고마는 웅진의 熊=곰에 대응 되는 단어이며, 일본에서는 Kuma이다. 공교롭게도 일본어에서도 고려=고구려를 Koma라고 부른다. 백제나 고구려는 고조선과 마찬가지로 곰을 숭상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백제와 고구려 모두 맥족이라는 의식이 당대에도 투철했던 것 같다.[81] 이후에 등장하는 기사가 흠명 10년(549년)에 일본이 백제에 370명을 파견해 득이신에 성을 축조하는 내용이 나온다.[82] 此三け国を三韓と云ふ。正は新羅にかぎるべきか。辰韓・馬韓・弁韓をすべて新羅と云也。しかれどふるくより百済・高麗をくはへて三韓と云ならはせり[83] 다만 당대에 통용되던 삼한의 뜻은 마한, 진한, 변한 혹은 세 개의 한국 고구려, 백제, 신라를 지칭하는게 아니라 한반도 남부 일대를 일컫는 지명이라는 의견도 있다. 삼국사기에도 무열왕의 공로로 삼한일통이라고 나오는데, 명백히 고구려까지 멸망시키고 삼국통일을 이룩한 것은 문무왕이다. 무열왕 당대에는 백제가 멸망한 직후이므로 고구려는 아직 존속되고 있는 나라였으므로, 삼한이 한반도 남부 일대를 일컫는 지명이라는 설이 힘을 얻었다. 자세한 내용은 삼한일통을 참고하자. 이 경우라면 옛 마한 진한 변한의 강역을 통합함 지역을 삼한이라고 부른 듯하다.[84] 601년 3월 5일 기사[85] 후쿠오카로 비정된다.[86] 실제로, 이들 언급된 섬과 구야한국 (김해나 부산)까지 거리를 3으로 상정하고 최단거리 바닷길을 구글맵에서 찍으면 나머지는 1의 비율로 딱 맞아떨어지는데, 이는 40~50 km이다. 이로 미루어보아, 육지에선 1里를 400 m쯤, 바닷길에선 1里를 40-50 m쯤으로 삼아 계산한 것 같다. 말로국(지금의 카라츠시)에서 이키섬을 거쳐 대마도까지 거리를 재면 약 80 km인데, 1里를 40 m로 간주하면 2천 里가 나온다.[87] 같은 기사에 나오는 기사인데, 실제 거리로 계산해보면 값이 서로 다르다.[88] 일본 측 공식기록만이 아니라 한중의 기록을 포함하여[89] 貴国[90] 臣國[91] (井上秀雄, 朝鮮史入門92面).[92] 『日本書紀』は日本の現存最古の「正史」とされるが、その編纂までには日本における文字の使用と歴史的記録の登場の長い歴史があった。日本(倭)における歴史、即ち過去の出来事の記憶についての記録としてまず言及されるのは「帝紀」(大王家/天皇家の系譜を中心とした記録)と「旧辞」(それ以外に伝わる昔の物語)である. これらは津田左右吉が継体・欽明朝(6世紀半ば)の頃に成立したと提唱して以来、様々な議論を経つつも、元々は口承で伝えられていた伝承が6世紀にまとめられたものと一般的には考えられている[93] 일본서기에는 헌상했다는 말은 없다. 다만 헌(獻)이라는 글자가 나올 뿐이다.[94] 공교롭게도 왜국의 중국과의 최초 통교 기록은 마찬가지로 진나라며 이후에 아무 관계도 없다가 5세기 초반에 고구려를 통해 동진과 통교하는 정황이 사서에 기록되어 있다[95] 이 기록에 대해서는 413년에 왜국의 사신이 고구려의 특산물인 인삼과 담비 가죽을 바쳤다고 적혀 있으므로, 실제 왜국이 파견한 사신이 아니라 광개토대왕의 남진 정책에서 전리품으로 사로잡은 왜구 포로를 데려와 왜국 사신인척 위장시키고 고구려에게 유리한 증언을 시키게 하여 고구려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시켰다는 해석도 있다[96] 애당초 수서에는 신라를 고구려 패잔병이 세웠다느니, 신라 왕이 백제 출신이라느니 같은 잘못 알려진 사실들도 다 사실인것 처럼 서술되어 있으니 교차검증이 반드시 필요한 사서라고 할 수 있다.[97] 438년에 안동장군을 하사 받는다. 왜왕 진(珍)은 안동대장군을 자칭했을뿐 안동대장군을 받은 적은 없다. 안동대장군을 하사받은 것은 무(武)의 치세기(478)의 일이다. 무(武)는 후에 정동대장군으로 승급한다.[98] 그리고 고구려는 이보다 두 단계 더 높은 '정동대장군'이라는 직위를 받기도 했다.[99] 鎭東將軍 中軍將軍 鎭軍將軍 撫軍將軍 安東將軍[100] 일본서기에서는 가야 10개국과 전라도 일대 충청도의 일대 지역을 통칭하는 개념으로 임라라고 부른다. 그러므로 '가라'와 '임나'를 같이 언급하며 신라 모한 진한 왜 가야=임나를 6개국제군사로 임명한 것은 분명한 오류다. 한국측 서적에서는 임라와 가야가 같이 불리는게 일반적이며 가야를 나라라고 부르는 일반명사로 추정하고 임나는 지역명으로 칭하는 용례가 많다. 광개토대왕릉비에도 삼국사기에도 임나가야가 같이 불리면 금관가야 즉, 가야의 일부분을 칭한다. 그러므로 일본서기의 기록이나 광개토대왕릉비 + 삼국사기의 기록 어느쪽을 봐도 임나 혹은 가야를 별개의 명칭으로 부르는 것은 말이 되지만 임나 가야를 같이 언급하면서 다른 국가로 취급하는 것은 어느쪽의 정보를 취한다고 해도 이치에 맞지 않다.[101] 다만 임나가 가야의 연맹체 국가의 일부라는 해석은 가능하지만 "국가"라고 칭하며 임나와 가야을 동렬로 병기하고 있다.[102] 六國 = 6국 = 여섯 나라[103] 1992년에 한국어로 발간된 "임나일본부와 왜의 요청", 출판사 -가야문화 참조[104] 한일공동역사연구회 단락에 첨부된 1차 한일공동역사연구회 5세기 노중국 교수의 논문 내용이다.[105] 아래 항목에 첨부된 한일공동역사연구회 1기 고대사 - 5세기 노중국 교수의 논문 pg 182쪽 참조[106] 실제로 이 학설은 일본학자들의 지지를 얻는 학설이다. 제2차 한일역사공동연구회 하마다 고사쿠가 투고한 논문에 내용이 있다.[107] 임나=금관가야 혹은 임나가라 = 금관가야의 용례는 삼국유사 광개토대왕릉비 등 도처에서 발견된다. 그러나 그것은 고대 한국인인들의 인식이지 일본인들의 가야,임나의 정의와는 차이를 보인다.[108] 이 경우도 대가야로 추정됨[109] 노중국 교수 또한 김태식 교수와 의견을 같이하여, 일본 학자들이 주장하는 고구려가 왜의 변방(백제의 영토)의 속한 곳을 약탈하려고 한다가 아닌 왜가 황실에 보낸 遣使船으로 해석했다. 노중국 교수의 1차 한일공동역사연구회 5세기 논문 207쪽을 참고[110] 두 나라는 고구려와 신라를 말한다.[111] 어쩌면 훨씬 더 이전일수도 있다. 신라가 고구려를 따라 북조에 조공하는 모습이 기록에 남겨져 있기 때문이다.[112] 다만, 통합이 이뤄졌다하여 중앙집권국가가 출현했다는 의미는 아니다. 4~5세기의 왜를 일본 열도 전체 단위의 수장 연합정권으로 보는 것은 문헌사학과 고고학계 불문하고 현재 일본 학계의 통설적 견해이다.[221][113] 노중국 교수의 논지는 일본은 5세기 이르러 통일의 초석을 마련했으므로, 임나일본부설을 부정하고 광개토대왕릉비에 기록된 왜군의 존재를 축소하려고 했고, 일본측은 최대한 일본열도가 통일된 시기를 빠르게 잡아, 최대한 왜군의 영향력을 인정받으려는 취지이다.[114] 왜국 자신들에게 당면한 위협은 조공을 하기 위한 보물선 등이 약탈 당하는데 위험이 있다는 것이지, 고구려가 왜국에 대한 직접적인 위협은 아니라고 해석하는 것이다. 즉, 왜국과 고구려는 국경을 맞대지 않고 있으니, 일본측이 주장하는 고대 한반도 남부에 대한 일본의 영향력을 축소하려는 목적의 발언이다.[115] 현재에 와서는 이런 일본서기의 와전을 받아들여 편의상 임나=가야라고 하는 편이다[116] 모용족의 침입으로 동부여가 세워진 연유와 비슷하다.[117] 일출의 천자가 일몰의 천자에게[118] 김후련, 「동아시아에 있어서의 고대일본의 자타인식」, 『역사문화연구』21, 2004[119] 물론 구마모토 철검명이 5-6세기의 물건으로 소급할 수 있기 때문에 그 이전에 문자가 있었다고 반론 하겠지만, 이 뜻은 체계적인 사관제도와 문서행정이 없었다고 해석하는게 옳다. 왜국 소수의 상류층이나 왕족에서 한자를 사용하기는 오래전부터 사용 했을 것이다. 당연히 중국계 왜인도 상당히 이른 시절부터 들어와서 살았을 것이고, 삼한 및 백제 가야 신라인들도 많이 이주 했었을 테니깐.. 중국과 야마타이의 최초 통교는 1세기 경이다. 그러나 이를 두고 당시 왜국 내에서 한자를 사용했다고 주장하는 것은 어리석은 주장이다. 더 후대로 가면 왜5왕 중 한 사람이 남송에 보낸 국서를 보면 상당히 유려한 한문을 구사하는 것으로 반추할 수 있지만, 학자들 다수는 이 국서는 개로왕이 북위에게 보낸 국서와 유사점을 들어 백제계 혹은 중국계 백제 출신이 작성 한 것으로 짐작하고 있다.[120] 수서에는 배청이라고 기록되어 있고 일본서기에는 배세청이라고 되어있다. 삼국사기에도 중국 수나라 사절이 백제를 기착지 삼아 일본으로 갔다고 기록 되어있다.[121] 애초에 양서나 송서의 다소 일본에게 유리한 내용을 반복하며, 내용을 살짝 바꿨을 가능성도 있다.[122] 물론 倭皇은 일본서기의 기록이니깐 공식적으로 중국측이 그렇게 불렀는지 안불렀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일본서기에서 쓰는 천황이라는 표현을 쓰지 않고 있기 때문에 혹자들은 倭皇이라는 표현을 중국 황제가 인정했다고 보는 이들도 있다.[123] 그러나 이것은 오기일 가능성이 크다. 3세기인 삼국지에서 이미 야마타이국과 주변국가들의 인구 합산은 15만호 이상으로, 7세기 무렵에 이미 다 일대를 통합했다고 치면 이것보다 훨씬 컸을 것이다.[124] 삼국유사에 의하면 7세기 무렵에 76만호라고 한다. 아마 당나라측에서 집행한 호구조사에 기반한 기사로 추정[125] 대부분 후한서에서 차용한 것들로 6-7세기의 실상을 반영한다고 보기에는 어렵다. 다만 그릇이 없고 손을 사용해서 먹는다는 것과 문자가 없다는 내용은 수서에서 처음 등장하며, 북서에서 차용했다.[126] 岸은 해안할 때의 안이다. 즉 바닷가라는 뜻이다[127] 물론 앞서 말했듯이 이건 왜곡된 것이다.[128] 그러나 이것은 사실에 기반한 발언이긴 하다. 신라의 6세기 초 까지만 봐도 금문석이나 문헌을 보면 신라어의 어순 그대로를 사용해서 한자로 표기하는 등 엉망이었다고 한다. 그에 비해 고구려와 특히 백제는 중국인 이민자들이 많았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높은 문장력과 한자 구사 수준을 보이고 있다. 개로왕이 북위에 보낸 국서를 보면 중국의 고전을 수없이 인용하며 자신들의 세련된 문장력을 한껏 뽐내고 있다. 여담이지만 후에 7세기 경에 중국에서 사망한 흑치상치의 무덤만 봐도 어릴 때부터 중국 고전을 독학하고 있었다는 등의 자뻑을 한다. 이를 보아선 당대 백제인들의 교양 수준은 매우 높았을 것이라고 추정한다.[129] 신라는 381년에 처음으로 중국 전진(북조)에 위두(衛頭)를 파견하여 북조와 통교를 맺은 바 있다.[130] 이는 놀랍게도, 고구려 안장왕이 받은 영동장군(寧東將軍) 직위보다 오히려 위다.[131] 실제로 중국 북조와 남조는 누가 더 많은 조공국을 모으냐를 두고 경쟁을 하고, 입조하고 조공을 한 번국들에게 더 많은 물품을 하사하며 그 조공관계를 유지하려고 안간힘을 썼다. 왜냐하면 서로 누가 더 강대국이고,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냐 등을 통해 대외인식으로 정통성을 확인받고 싶었기 때문이다.[132] 참고로 여기 양직공도에 적힌 '사라(斯羅)'라는 국가가 '신라'가 아니라는 주장도 있다. 하지만 포항 냉수리 신라비에도 신라인들이 자신들의 나라 이름을 분명 '사라(斯羅)'라고 기록하는 등 '사라(斯羅)'는 분명 당대 신라인들이 자신들의 나라 이름을 한자로 음차해 표기하던 또 다른 국명이 맞다. 신라는 원래 초기에는 사로국, 사라, 신라 등 여러 이름이 혼용되었는데, 당시 고유어 이름을 (아직 한글이 없었던 시대이므로) 비슷한 음의 한자를 제각기 끼워맞춰 자신들의 국명을 한자로 음차하여 표기한 것이다. 물론 이를 반박하여 사라가 신라를 뜻하는지 확실치 않고, 양직공도에서는 사라라 하지 않고 신라라 하였으며, 양직공도가 만들어질 무렵에도 백제는 사라가 아닌 신라라는 명칭으로 불렀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당대에 신라를 제외하고 '사라(斯羅)'라는 국명을 쓰는 별개의 국가가 신라와 함께 한반도에 존재했다는 증거가 전혀 없기 때문에, 사라(斯羅)는 신라의 또 다른 음차라고 보는 것이 학계 주류의 의견이다.[133] 이러한 예는 중국의 책봉 사례에서 수도 없이 발견된다. 대표적으로 진덕여왕은 '신라낙랑군왕'으로 책봉되었는데, 낙랑은 정작 고구려의 수도인 평양에 있었다. 백제의 위덕왕 또한 '동청주지사'라는 책봉명을 받았는데, 동청주는 참고로 '중국 산둥지방'이었다. 이러하듯이 남의 영토 이름을 책봉명으로 하사받는 일은 당시에 매우 흔했다.[134] 알렉산더 보빈이 왜 한국어가 부여어족(고구려어)의 직계후손이라는고 설명하는지 이해가 가는 구절이다. 즉, 진한계 언어를 고구려계인 신라가 밀어냈다는 해석이 가능하다.[135] 신라의 기원을 고조선에서 찾는 국내의 사서들과 대조적이다.[136] 별개의 내용이라면 연대 순서대로 391년-395년-396년순으로 서술 되어야 하지만, 395년의 거란의 일족인 패려를 토벌한 기록이 먼저 나오고, 그 다음에 391년으로 되 돌아와 신묘년의 391년 396년.. 404년 순서대로 서사하기 때문이다.[137] 훼손된 부분을 '伽倻新가야신'으로 보고 이어서 '百殘伽倻新羅백잔가야신라'라고 볼 수도 있다.[138] 가야(伽倻)•가락(駕洛)의 다른 이름[139] 석회가 발라지기전의 탁본 여러개를 집중 연구했다[140] 김진명이 유사사학을 주장하는 소설가이기 때문이다. 또한 이 설은 이덕일 일당들이 적극적으로 밀고 있다. 사진의 출처는 김진명의 소설이며 정확한 진위는 알수가 없다. 왕건군의 어느 서적에서 가져왔는지도 찾을수 없다 (찜찜)[141] 제2차 한일공동역사연구회 제1권 고대사 부문에서 이 학설을 채택하고 있다 https://www.jkcf.or.jp/wordpress/wp-content/uploads/2010/10/1-allk.pdf[142] 보통 자신이 본 문자를 자의적으로 판독하여 해석하는 것을 석문이라고 하지만, 논문에 언급 되어 있다 싶이, 초천부 초균덕 부자는 고문서에 일가견이 없는 소시민으로, 자신들의 주관이 개입할 여지가 낮다고 판단하여, 필사본이라고 부르는 모양이다.[143] https://www.i-repository.net/contents/outemon/ir/301/301811209.pdf#search='%E6%9B%B4%E8%A8%8E%E3%80%8C%E8%BE%9B%E5%8D%AF%E5%B9%B4%E3%80%8D+%E6%9D%B1+%E6%B8%A1+%E6%AC%A0%E5%AD%97[144] 고구려가 391년에 관미성을 공격한 사건의 발단은 백제가 먼저 같은 해 8월에 고구려를 침략한 것으로 삼국사기에 기록 돼있고, 이 침공을 막아내고 같은해 10월에 백제에게 보복하러 토벌에 임한것임을 알수 있다[145] 그러나 이것은 정확히 신묘년의 기사이긴 하나, 고국양왕이 승하하기 전의 일이다. 이를 두고 고구려측에선 신라가 신묘년 이전의 속민의 근거라고 생각 했을수도 있다. 실제론 삼국사기에서 조공의 기록은 전해지진 않지만, 누락 되었을수도 있는 노릇이기 때문. 후에 400년 기사에 신라가 고구려에 조공을 해왔다고 분명히 비석에 명기 되어있지만 이 또한 삼국사기에서 전하지 않으니 누락 되었다고 이상한 일은 아니다.[146] 화통은 수직적인 관계가 아니라 수평적인 관계에서 사용하는 단어다[147] 아마 태자 전지왕을 397년 (혹은 광개토대왕릉비 기년 기준으로 396년이다.)에 왜국에 파견해서 군대를 원조 받는 것을 두고 화통이라고 고구려측에서는 이해 했는듯 하다.[148] 종래에는 왜가 노객을 백성으로 삼으려한다는 해석이 있었지만, 최근에는 그렇게 해석하는 학설은 소수 의견이다. 뒤에 첨부된 일본학자 하마다 고사쿠도 신라왕이 자신을 대왕의 노객이라고 자청하며 그의 신분은 고구려의 民이니 왕께 귀의 합니다 라고 해석한바 있으며, 가야사 연구자 김태식 교수 또한 왜가 신라왕을 民으로 삼았거나 삼으려고 했다면 광개토왕에게 사신을 보낼수도 없는 처지니, 모순이라고 발언한바 있다. 일본측에서 이때부터 신라가 고구려에 복속하게 되었다고 해석하고, 일부 한국측에서는 신묘년 고구려 주체설을 내세우며, 그 이전부터 (391년부터) 복속 해석했다고 한다.[149] 신민의 뜻[150] 같은 용례는 도처에서 발견된다. 광개토대왕비릉 말고도, 「모두루묘지(牟頭婁墓誌)」, 「충주고구려비(忠州高句麗碑)」에서도 등장한다[151] 전지왕이 397년에 태자 혹은 왕족 신분으로 왜국에 파견된바 있다. 삼국사기에서는 인질이라고 나오지만, 당대의 사서인 백제삼서중 하나인 백제기를 인용해 기사를 작성한 일본서기에서는 친선을 다지기 위해 보냈다라고 나올뿐이다.[152] 백제'와 '왜'라는 양 당사자 간에는 '선왕이 쌓은 우호를 잇기 위해 방문하였다'[153] '내조하였다.'[154] 2005년 전북대의 김병기 교수가 제기한 주장. 하지만 한국사 전공자가 아닌 한문학자라 설득력이 떨어진다. 2018년 1월 3일 JTBC 차이나는 클라스 방송에서도 이 주장을 사실인 양 내보내서 논란이 되었다.[155] 현재로서는 고구려 광개토대왕비석의 오류가 아니라 삼국사기의 오류라는게 중론이다. 단순히 고구려본기에서만의 오류가 아니라, 고구려와 백제의 교전이 서술되어 있는 백제본기와 눌지왕의 기록을 토대로 역산해보면 신라본기에서도 오류가 나타남을 알수 있다.[156] 백제의 소실된 역사책인 백제삼서를 인용한 일본서기에도 백제삼서를 인용한 아신왕 진사왕에 대한 기록에서 1년 오차가 있음을 알수 있다. 즉 삼국사기와 백제삼서는 기년을 같이하고 있다.[157] 392년 1월 기사이다[158] 401년에 귀국하여 이듬해 402년에 왕위를 이어받은 실성 마립간이다. 정치적 입지도 변변치 않았고 직계도 아니었던 그가 어떻게 왕위에 올랐는지는 의견이 분분하지만, 고구려가 친고구려파의 수장격인 실성마립간을 후견 했을거라는 의견이 대세다.[159] 삼국사기에 따르면 같은 해 5월에 즉위한다.[160] 410년 기사 : 영락 20년 경술년, 동부여는 옛날 추모왕의 속민이었는데, 중도에 배반하여 조공을 하지 않았다.[161] 이에 대해서는 한국 학계에서는 내물왕이 직접 알현하며 조공을 바쳤다고 해석하지만, 일본학계에서는 후에 고구려로 인질로 파견되는 복호를 시켜 알현하며 조공을 했다고 주장한다[162] 이에 대해서는 김태식 교수가 후술하였는데 신라 내물왕이 광개토왕에게 사신을 보내 (신라왕 자신을) 고구려의 노객이라고 칭하며 "(고구려의)노객은 (그 신분이 대왕의)民(백성이니) 귀의하여 구원을 청합니다."라고 해석하였다. 일각이나 일본 측에서는 "(고구려의) 노객을 (내물왕) 왜가 (그들의) 民으로 삼았다." 혹은 "삼으려고 한다."라고 해석하는 경우가 있으나, 그 경우에는 내물왕 스스로가 사신을 보내어 구원조차 요청하지 못하는 처지이기 때문에 의미가 통하지 않는다고 발언 하였다. 같은 학회에서 4세기를 담당한 하마다 고사쿠 역시 개인이 투고한 논문에서 같은 근거를 들어, 김태식 교수와 의견을 같이 했다.[163] 또한 399년의 기록의 바로 앞 기사인 396년 기사를 보면, 아신왕이 스스로 고구려의 노객을 칭하고 있다. 프로파간다적 성격이 매우 짙은 릉비의 기록의 성격상, 내물왕이 자칭하고 있는 노객이란, 백제 아신왕의 경우와 동일하게 고구려의 노객일 가능성이 객관적으로 봤을 때도 높다. 이 경우 신묘년 신민의 고구려 주체설이 더욱 설득력이 있다. 신민은 스스로 복종하여 신하를 자칭하는 처지이며, 단순히 조공을 수취하는 속민의 관계보다 더욱 종속성이 강하다고 볼수 있기 때문이다. 그도 그럴것이 바로 뒤에 등장하는 400년 기사에서는 신라에 구원병을 보내 왜구를 격퇴 시키고 나서, 여태껏 신라왕이 스스로 입조하여 조공한적은 없었지만, 스스로 대왕을 알현하고 조공 했다고 기록 되어 있지 않은가[164] 396년, 399년, 400년, 404년, 407년 기사들은 모두 백제, 왜, 신라, 가야에 관한 기사다.[165] 이해의 정복 기사는 정확히 무슨 세력을 정복했는지는 문자 파손이 너무 심해서 알수 없지만, 지명으로 보아 백제로 추정한다. 즉, 일본학자들은 신묘년조가 407년까지 수식하며, 적극적으로 주장하는 경우에는 신묘년 기사를 활용하여, 407년까지 왜구의 세력이 어떤 방식으로든 주도적으로 개입했다고 주장한다.[166] 일본학계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신묘년 기사가 396년 399년 400년 404년 407년 기사들을 모두 수식하는 것이라면 395년 비려(稗麗)을 정벌한 기사처럼 따로 앞으로 빼내서 서술해야 하는데 8년조의 숙신에 대한 기사의 앞뒤는 396년 백제 정벌과 399년 신라의 내물왕이 노객을 자청하며, 성지에 가득찬 왜군을 격퇴 시켜달라고 요청하는 기사다. 391년 기사와 396년 백제 정벌 기사만 그 맥락이 닿아있고, 그 후에 등장하는 399년 400년 404년은 맥락상 다른 결이라는 것이다.[167] 실제로 최근의 연구에 따르면 충주 고구려비는 당초 알려진것과 다르게 광개토대왕 치세기인 영락 7년 정유(정유년)라는 문자가 써져있음을, 3D 스케닝을 통해 동북아역사재단이 밝혀냈다. 고로, 학계의 기존 정설이던 광개토왕의 치세기 이후에 신라가 속민화 되고 더 나아가서는 신민화 되었다는 주장과 전면 대치되며, 신라의 신민화나 종속화가 된 시점은 영락7년에서 더 이 전일수도 있다. 다만 이는 아직 연구중인 사안이니 더 기다려봐야 한다.[168] 왕의 즉위 원년을 기념하기 위해 그 해에 만들어졌을 공산이 매우 크다. 즉, 1차 사료로써 아주 큰 의미를 지니며, 릉비가 오산으로 오기 되었을 가능성이 현저히 낮은 것이다[169] 일본 주장대로 신묘년조를 해석할 경우 가장 큰 약점이 바로 일본서기에도 5만 대군의 고구려군과 싸운 전쟁기록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170] (日本每日新聞 1971, 8, 9, 日本史の虛像と實像).[171] 407년의 지명에서 백제 원정임을 암시하는 문장들이 있다.[172] HD역사스페셜 - 한일역사전쟁! 영산강 장고형 무덤[173] 출처 : HD 역사스페셜 한일역사전쟁, 영산강 장고형 무덤편.[174] 물론 이는 호남지역에서 확인되는 주구묘와는 다른 개념이며 특히 전방후원분과는 관련이 없다.[175] 국보 295호 나주 신촌리 금관 그러나 이것이 백제 중앙으로부터 하사받은 것이 아니냐는 논란도 크다[176] 대체로 한반도와 활발한 교역관계를 보인 서일본계의 세력으로 추정한다.[177] 498년(문주왕 2년)에 탐라국이 조공을 바쳐왔다는 기사가 등장한다.[178] 변한, 마한, 진한.[179] 내조 외조의 내조가 아니라 來朝 즉, 조공왔다 혹은 朝에 참여했다라는 뜻이다[180] 여기서 언급되는 태자는 후에 백제18대 국왕 전지왕이다. 다만 후술할 내용으로 전지왕은 일본서기에서 인질이 아니다. 일본서기 277년 3월 기사 참조[181] 삼국사기에선 태자라고 기록 되어 일본서기와 충돌한다[182] 부여풍의 경우에는 백제 왕자 중 유일하게 일본서기에 질(質)이라고 표기 되어있다.[183] 일본서기에서는 말다왕이라고 지칭한다.[184] 웅략 23년(479) 4월 기사 참조[185] 전형적인 일본서기식 윤색이다[186] 웅략 5년(461) 7월 기사 참조[187] 응신 277년 기사 참조. 다만 삼국사기에는 인질이라고 적혔다.[188] 다소 장황하지만 이 이상의 분석은 고고학적인 분석만으로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가령 무령왕릉의 예를 들자면 무령왕릉이 만약에 지석이 출토되지 않았더라면 완벽한 중국 남조의 무덤과 동일한 양식의 무덤을 어떻게 해석했을 것인가라는 점이다. 신라왕릉처럼 기존에 유지되었던 무덤의 형태도 아니거니와 새롭게 나타난 형식의 무덤을 과연 왕의 무덤이라고 설정하였을 수 있었을지는 장담할 수 없다. 이처럼 구체적인 피장자의 세세한 성격의 도출은 전방후원분처럼 돌연 나타나는 양식의 무덤에서는 쉽게 판단하기 어렵다. 따라서 문자기록의 존재를 바라야하는 상황인데다 관련 역사적 분석은 필수이며, 자연과학적 분석도 여건이 마련되어야만 더 상세하게 접근할 수 있다. 하지만 문자자료 등이 고분 자체에서 나올 확률은 거의 0에 수렴하기 때문에 이와 같은 해석의 난립이 존재하는 것이다. 무령왕릉이 행운이 따라준 경우라고 할 수 있다.[189] 중앙아시아에는 노예라는 표시로 편두를 시키는 풍습이 있었다. 가야에도 이런 풍습이 있었을 수 있다.[190] 왜의 무인.[191] 日羅, にちら. 아리사등의 아들로 기록되어 있다.[192] 마한에 대형 옹관묘가 발굴되는 것.[193] 지금은 일본 고고학적 조사에서 고고학의 발전에 의해 5세기까지 내려가는 추세다.[194] 일찍이 중국 한사군도 가야의 전신인 변한에서 철을 수입했다고 중국 기록에도 나타나고 있다.[195] 당연하지만 결국 인정받지 못했다.[196] 임나일본부를 옹호했던 학자이다.[197] 놀랍게도 이러한 사실은 훨씬 훗날인 14세기 고려 말 왜구의 침입 때에도 똑같이 되풀이된다! 왜구들 역시 여름에 집중적으로 나타나 고려를 약탈한 반면, 겨울이 되면 그 횟수가 거의 없어지거나 심지어 1350년부터 1375년까지 약 26년 동안 한겨울인 1월에는 아예 왜구가 단 한 번도 나타나지 않았다. 이는 아래에 서술한 대로 겨울이 되면 대한해협에 역풍이 불어 일본에서 한반도로 오는 배가 항해하기 매우 어려워지고 심지어 역풍에 배가 휩쓸려 침몰할 위험성이 높아지기 때문이다.#[198] 일본서기에 기록된 부여곤지가 도왜에 소요된 기간은 2~3개월이다. 일본서기에는 부여곤지가 461년 4월에 파견 되었으며, 무령왕이 태어난 시기는 같은 해 6월1일이다. 물론 여름에는 일본쪽에서 한반도 방향으로 부는 계절풍의 영향을 고려해야 하지만, 무령왕 또한 왜국으로 항해하는 중도에 태어났다고 했다. 정확히는 사가현 인근의 섬에서 태어났는데, 완전히 당도하지 못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앞선 601년 기사에 급박하게 임나를 구하라고 백제와 고구려에 사신을 보냈다면, 백제의 경우에는 2-3개월, 고구려 같은 경우에는 더 많은 세월이 소요되었을 것이다. 수나라 사신 배청이 왜국에 방문할 때도 삼국사기에는 608년 3월에 백제를 경유 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일본서기에서는 같은 해 4월에 일본에 도착 했다고 한다.[199] 고구려의 사신과 함께 북조에 입조한 정황도 드러나는데, 이것은 육로를 통한 교류이고 또 광개토대왕이 신라 구원전에서 사로잡은 왜구를 데려와 왜국 사신처럼 꾸미고 고구려에 유리한 발언을 시켰다는게 중론이다. 문서 왜5왕 413년 기록에 대한 서술을 참고.[200] 후한서 동이전 建武中元2년의 기록을 참조[201] 중국 수나라에서 쇼토쿠 태자의 과대망상적인 헛소리가 담긴 국서를 읽고, "황제는 왜황에게 묻는다(皇帝問倭皇)"의 내용의 국서와 함께 사신을 파견했는데, 수서에는 백제를 경유해, 탐라국을 바라보며 쓰시마섬을 거쳐 이키국을 통해 왜국에 당도 했다고 기록 되어 있으며, 삼국사기 백제본기 무령왕 9년 (608년)백제를 경유 했다고 기록 되어 있는 기사가 있다. 선술된 백제인이 수 황제의 국서를 강탈했다는 일본서기의 기록과 동일한 사건이다.[202] 노중국 교수가 한일역사공동연구회에 투고한 5세기 논문 207쪽을 참고[203] 일본서기 554년의 기록을 보면 백제가 구원병을 요청하는데 왜왕이 1천명의 병력을 40척의 함선에 태워 수송 했다고 전해지며, 백촌강 전투를 봐도 배 한척당 탈수 있는 군인의 수는 25명 정도 였다는 것을 알수 있다.[204] 마찬가지로 이 용병들이 도착한 시기는 554년 6월이다.[205] 지역 시민구단경남 FC의 엠블럼에도 등장한다.[206] 노중국 (2006), 4세기 가야제국과 백제의 관계.[207] '일본인들의 조상이 한반도 남부에 살았다'라는 게 되어 임나일본부설 및 이덕일의 역사 왜곡이 연상되기에 충분하다.[208] 일본 우파는 현대 일본인의 조상이 되는 도래인의 대부분이 한반도에서 유래했다는 설을 의도적으로 무시하고 있다.[209] 당연히 임나일본부설 등 일본인의 한반도 남부 지배 및 경영설을 뒷받침할 수 있어 보이기 때문이다.[210] 물론, 그렇다고 이 시기의 일본사한국사가 되지는 않는다. 대다수 한국인들의 역사관이 민족주의 사관을 바탕으로 하기에 빠지기 쉬운 함정인데, 이런 논리로 치면 중국인위만고조선의 왕위를 찬탈하여 세운 정권인 위만조선중국사라고 할 수도 있는 대단히 무리한 전개다. 알렉산더 보빈의 주장은 이렇게 일본 황실을 장악하고 덴노로 즉위한 한국계 지배층이 피지배층의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일본인들에게 언어적, 문화적으로 서서히 동화되어갔다는 것이다. 세계사적으로 외국계 인물이 타국의 군주로 즉위하는 일은 대단히 흔했고, 외국계 지배층 쪽이 피지배층에 동화된 경우도 청나라의 사례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을 통치한 합스부르크 왕가현대 스페인 왕국의 왕실 가문인 부르봉 왕가의 사례까지 매우 흔했다.[211] 김태식 교수는 사사노궤를 인명에서 백제인이라고 추정하고 보고서 논문에 투고했다.[212] 신공황후의 삼한정벌 기사와 착각해서 잘못 말했지만 지적 당하고 가야7국 평정이라고 수정했다.[213] 일견 타당한 이유가 선술된 일본서기에서도 백제가 왜국과 통교하기전에 왜국과 통교하고 샆다며 먼저 찾아간 곳은 가야의 일부인 탁순국이다.[214] 백촌강 전투를 재외하면, 왜군이 가장 큰 규모로 신라를 침공 했을 때는 삼국사기에 기록된 462년 기록으로 추정된다. 여기서 신라는 왜군에게 패배하여 1000여명이 포로로 잡혔다고 한다. 물론 이듬해에 신라가 반격에 나서고, 그들을 격퇴 시킨다[215] 앞서 선술된 중국 집안에서 발견된 청동거울과 신묘년이라고 적힌 기록을 두고, 토론회에 참석한 조법종 교수도 왜국 주체설에 대해 회의감을 드러낸바 있다. https://news.joins.com/article/283056 고로 한국측 주류사학계에서도 광개토대왕릉비의 신묘년 왜국 주체설에 대한 의구심이 있는건 맞다. 다만 확실히 논박할만한 근거가 아직 빈약하기에 아직 조사나 연구가 진행되거나 확실한 근거가 발견되기 전까지는 신중하게 접근하는 것이다.[216] 그도 그럴것이 개찬설을 주장했다가 이미 일부 보기좋게 논파 당했으니 신중하게 접근하려는 한국학계의 태도를 이해 못하는 것은 아니다. 사실 한국 학계가 광개토대왕릉비에 관심을 가지게 된 시기도 그렇게 오래되지 않았다. 이전에는 전쟁의 풍파와 급속한 변혁기 등을 거치면서 전격적인 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반면에 일본의 광개토왕릉에 대한 조사는 100년이 넘었으니, 지금까지는 수세에 몰렸던게 당연하다. 한국학계가 광개토왕릉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가 이루어진 것은 길어봤자 3-40년 정도이다.[217] 이노우에 히데오가 주장하였다. 다만 고고학적 증거가 미비하다고 한다. 역사비평 편집위원회,'논쟁으로 읽는 한국사1', 역사비평사, 2009, p81-83[218] 역사비평 편집위원회,'논쟁으로 읽는 한국사1', 역사비평사, 2009, p84-85[219] 흔히 말하는 아라가야[220] 링크는 2차 보도이다. 각 지역의 동산들이 전방후원분이라는 주장으로 해당 동산이 정말 전방후원분이라면 일본의 것보다 훨씬 크다는 주장인데, 진상이 다 밝혀진 2016년 현재는 원본기사를 찾아볼 수 없는 상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