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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6-02 14:47:28

안라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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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함안군 충의 공원 내에 위치한 대형 건물을 복원한 미니어쳐. 학계에서는 당시 안라회의가 열린 건물로 추정하고 있다.

1. 개요2. 당시 상황3. 안라회의 개최4. 안라회의 이후5. 관련 항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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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安羅會議 또는 高堂會議

529년 3월에 안라국[1]이 주도해 백제, 가야, 신라, 가 참가하여 수 개월간 지속된 국제 회의.

삼국시대 중반 남부의 세력권을 자세히 알 수 있는 사건으로 고당(高堂)을 새로 지어 그곳에서 회의를 했다 하여 '고당회의'[2]라고도 한다. 한국 역사서에는 등장하지 않으며, 《일본서기》에 상세하게 등장한다.

2. 당시 상황

신라와 백제는 북으로는 장수왕 때부터 계속된 고구려의 남진 정책에 대응하기 위해 나제동맹을 맺어두고 왕가끼리 혼인하기도 하며 서로 싸움은 자제하는 상태였지만, 후방으로는 서로 가야 권역의 소국들을 먼저 차지하기 위해 물밑경쟁을 벌이고 있었다.

529년, 반파국(대가야)의 군주였던 이뇌왕이 신라와의 동맹을 위해 신라 김씨 왕실의 사람을 받아 들였다. 이때 이찬 비조부의 누이동생이었던 왕후는 100여명의 종자를 데리고 왔는데 반파국에서 신라와의 동맹(or 결혼을 알리기 위해)을 알리기 위해 이 100여명의 종자들을 가야 곳곳에 배치했다. 문제는 이 종자들이 스파이 노릇을 했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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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한반도 남부의 정세. 백제와 신라는 가야를 먼저 차지하기 위해 혈안이었다.
가라왕(加羅王)이 신라 왕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여 드디어 아이를 가졌다. 신라가 처음 여자를 보낼때 100인을 아울러 보내 그녀의 시종으로 삼았으므로, 받아들여 여러 현에 나누어 배치했는데, 신라의 의관을 입도록 하였다. 아리사등은 그들이 복장을 바꾸어 입었다고 성내며 사자를 보내 돌아가게 하라고 시켰다. 신라는 크게 부끄러워 그녀를 도로 돌아오게 하려고 했다.
"전에 그대가 장가드는 것을 받아들여 나는 즉시 혼인을 허락했으나, 지금 이미 이처럼 되었으니 왕녀를 돌려주길 바라오"
가라(加羅) 기부리지가(己富利知伽)[3]가 대답하였다.
"부부로 짝지워졌는데 어찌 다시 헤어질 수 있겠소? 또한 아이가 있으니 그를 버리면 어디로 가겠소?"
결국 (신라는) 지나가는 길에 도가(刀伽), 고파(古跛), 포나모라(布那牟羅)의 세개 성을 함락시키고, 또한 북쪽 변경의 다섯 성을 함락시켰다.
일본서기》<계체기> 23년 3월조.
 
몇 년 후 신라 측에서 비밀리에 종자들에게 신라 의관을 입게 하여 신라의 정치적인 위엄을 가야 연맹에 과시하려고 했다. 이에 가야 연맹의 소속국들은 반파국 군주가 신라와 굴욕적인 밀약을 맺었다고 의심하기 시작했으며, 이에 탁순국 군주 아리사등이 반파국 왕의 허락없이 종자들을 쫒아냈다.

이때의 가야는 신라보다 국력이 열세였기에[4] 신라를 자극하는 행동을 하지 않아왔으나 신라의 가야에 대한 복속이 가시화되자 아리사등을 필두로 한 대신라 강경파들이 행동을 시작한 것이었다.

이걸 빌미로 신라는 탁순국을 공격해서 탁순국의 북경 5개 성과 도가(刀伽)(아마 큰 규모의 제철소가 있었던 것으로 보임) 등 3개 성을 함락시켰다. 그 결과 탁기탄국은 멸망했고, 탁순국은 영토의 반이 날라가 버렸다.

3. 안라회의 개최

이 사건으로 인해 가야 연맹 내의 남부 가야는 맹주국 반파국을 불신하게 되었고, 반파국 다음으로 강력한 세력을 유지하고 있었던 안라국(安羅國)을 중심으로 뭉치기 시작했다. 가야 제국(諸國)[5]에 대한 백제, 신라 양국의 간섭으로 부터 벗어나기 위해 안라국은 신라, 백제, 왜를 초청해 안라회의를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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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함안 충의공원을 건설하다 발견된 6세기에 건설된 것으로 추정되는 대규모 건물지. 길이 48m, 폭 15m의 규모로 학자들은 이곳을 안라회의가 열린 고당(高堂)으로 추정한다.
(중략) 이 달에 오후미노 케누노 오미(近江 毛野臣)를 안라로 보내 조칙으로 신라에 권하여 남가라(금관국. 이때 금관국은 멸망하지 않았다), 탁기탄을 다시 건립토록 했다. 백제는 장군군 윤귀(將軍君尹貴), 마나갑배(麻那甲背), 마로(麻鹵) 등을 보내 안라에 가서 조칙을 듣도록 했다. 신라는 번국의 관가를 부순 것이 두려워 대인을 보내지 않고, 부지내마례(夫智柰麻禮), 해내마례(奚柰麻禮) 등을 보내 안라에 가서 조칙을 듣도록 했다. 이에 안라는 새로이 고당(高堂)을 지어 칙사를 인도하여 올라가는데, 국주는 따라 올라갔고, 국내의 대인으로써 미리 당에 올라와 있는 사람도 하나 둘 있었으며, 백제 사신 장군군(將軍君) 등은 당 아래에 가 있었다. 그 뒤로 몇달 동안 두세번 당위에서 모의했는데 장군들은 뜰에 있었음을 한스럽게 여겼다.
일본서기》<계체기> 23년 3월조.

안라는 안라회의를 통해 신라에게 압박을 가해 탁기탄국을 재건하고, 안라의 국제적 지위를 올려 반파국의 압력에서 자유로워지기를 원했다.

4. 안라회의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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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중앙박물관 지도의 가야 세력 범위

하지만 백제와 신라는 이 회의를 안라 진출을 위한 발판으로 이용하려 했을 뿐이었다. 백제와 신라의 이 회의에 대한 관심도 차이도 위의 기사를 통해 알 수 있는데, 백제가 보낸 3인은 백제 관등 체계 제1위에 해당하는 좌평이었지만 신라가 보낸 3인은 신라 17관위 체계 중 불과 제11위에 해당하는 내마급이었다.

게누노 오미는 친안라적인 인물로써 안라 독립을 유지할 수 있는 외교적 지지를 바라며 초청한 왜국 사신이었지만 백제의 강경 외교 정책 때문에 결국 실패로 돌아갔고, 이후 안라 가야에서 쫒겨났다. 이후 안라국의 주도로 웅진회의가 열리기 전, 탁순국의 아리사등의 요청을 받았으나 이에 응하지 않고 가야 내에서 자신의 세력을 늘리는 데 급급했다.

안라회의 이후 백제는 군사력을 동원해 안라국의 걸탁성(乞卓城)을 빼앗아 안라국을 자신들 영향권에 복속시키는데 성공한다. 이때 《일본서기》를 보면 고구려는 안장왕이 시해당해 나라가 혼란스러웠고[6], 왜국 또한 나라가 혼란스러워 쉬이 나서지 못했던 것 같다.
"태세(太歲) 신해 3월, 군대가 나아가 안라에 이르러 걸탁성(乞乇城)을 영위했다. 이 달에 고려(高麗)가 그 왕 안(安)을 시해했다. 또 듣건대 일본 천황과 태자, 황자가 모두 죽었다고 한다."
일본서기》 <계체기> 25년(531년) 12월조. 이 기사는 백제 역사서인 《백제본기》에서 인용해 《일본서기》에 실린 문구다.

남부 가야에서 가장 강력했던 안라국이 백제의 영향권에 들어가면서 남가라(금관국)와 탁순국만이 남부 가야권 중 유이한 독립 세력으로 남게 되었다. 그리고 백제가 안라국을 자신의 손에 넣고, 남부 가야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하자 가야 영토를 모두 뺏길 것을 우려한 신라는 1년 뒤인 532년 이사부에게 3,000명의 군사를 내어주고 남가라(금관가야)를 치게 하여 결국 남가라는 멸망하게 되었다. 이를 보면 가야 연맹의 생존을 위해 주최한 안라회의가 오히려 가야의 멸망을 앞당긴 셈이 돼버렸다.

이후 안라국이 또다시 회담을 주최하는 웅진회의와 백제 주도의 1차 사비회의(541. 4), 2차 사비회의(544. 11)가 열렸지만 이 모두 수포로 돌아가고 가야 북부의 반파국도 맹주 자리를 잃은 후 위에서 따로 놀다가 신라의 공격으로 562년에 멸망하면서 가야는 역사 속에서 사라졌다.

5. 관련 항목


[1] 지금의 경상남도 함안군에 있었던 가야의 족속.[2] , 간의 회의가 아니다. 이 둘과 아무 상관없다.[3] 명칭은 정확하지 않다. 뜻은 '가라의 큰벌의 간(干)', 즉 가야의 대읍군(大邑君)을 말하는 것으로 보이며, 이뇌왕을 의미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비슷한 명칭으로 '우류조부리지간(宇流助富利知干 ; 우루소호리치칸)'이 있다. 석우로의 지위인 서불한(舒弗邯)을 소부리라고 적은 것으로 추정된다. '기부리'는 '코호리'로 읽혀 우리말 '고을'의 옛말로 추정된다.[4] 백제는 물론이고 신라도 6세기쯤 오면 수도를 중심으로 중앙 집권화해서 율령을 반포하고, 체계적인 영역 국가가 된 상태였는데, 가야는 편의상 가야라고 부르지만 이게 1개 나라가 아니라 도시 크기의 크고 작은 소국들이 여럿 있는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다.[5] 황제국(帝國)이 아니라 나라의 집합이라는 뜻[6] 다만 이건 다른 역사서엔 일체 나오지 않는 내용이라(더 정확하겐 일본서기가 아닌 일본서기가 인용한 백제본기 내용), 안장왕이 시해당하지 않았다고 보는 견해도 만만치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