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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6-21 12:42:40

이뇌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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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87CEEB><colcolor=#3d428b> 왕명 <colbgcolor=#fff,#1f2023>이뇌왕(異腦王) / 기부리지가(己富利知加)
생몰년도 ? ~ ?
재위기간 494년 혹은 524년 ~ 6세기 중엽 추정
(미상)

1. 소개2. 친신라 노선의 시도와 실패3. 관련 항목

1. 소개

반파국의 8대 혹은 9대 군주.

일본서기》에 등장하는 이름으로는 기부리지가/고오리치카(己富利知加, コオリチカ)라고도 한다.

대가야 역사에서 이름과 행적이 어느 정도 알려진 몇 안 되는 군주. 중흥기를 맞은 백제의 섬진강 방면 세력 확장에서 밀리자 이를 막기 위해 대안으로 친신라 노선을 택하였으나 결국 판단 미스로 가야의 맹주격 국가라는 위치도 잃어버리고, 결국 가야 소국들의 멸망을 앞당긴 인물로도 평가받는다.
석순응전(釋順應傳)에는 대가야국 월광태자(月光太子)는 곧 정견모주의 10세손으로 아버지는 이뇌왕이라 하는데 신라에 구혼하여 이찬 비지배의 딸을 맞아 태자를 낳았는데 이뇌왕은 뇌질주일의 8세손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고령현(高靈縣)

아들은 신라 여자와 사이에서 낳은 월광태자가 있다. 다른 왕자가 있는지는 불명. 월광 태자가 정견모주의 10세손이라고 하고 있으니 이진아시왕의 9세손이다. 뒤에 이뇌왕은 이진아시왕의 8세손이라고 했으므로 잘 맞아떨어진다.

신라와 가야[1]에선 지(知)가 존경의 의미인 "님"과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기에 기부리지가(己富利知加)에서 실제 이름을 나타내는 부분은 기부리(己富利)일 것이다. 한편, 이뇌(異腦)의 뇌(腦)는 누리의 음차이다.

2.신라 노선의 시도와 실패

파일:attachment/godangconference2.png
당시 한반도 남부의 정세. 백제와 신라는 가야를 먼저 차지하기 위해 혈안이었다.

이뇌왕의 재위 시기 삼국의 정세는 더욱 치열해져 갔다. 전성기 고구려의 남진 정책으로 백제가 동네북이 됐던 5세기경 대가야마한침미다례 세력이 버티고 있던 지금의 전라도 일부 지역까지 차지하며 잘나갔지만, 6세기 부터 고구려의 남진 정책이 나제동맹에 계속 막혀 동력을 잃고 점차 수그러 들고 있었고, 반대로 백제는 개로왕의 죽음으로 시작된 혼란을 동성왕이 수습하고 왕권을 강화하며 정국을 평안케 했고 그 뒤를 무령왕이 이어받아 강력한 중앙 집권 체제를 유지했다. 당시 국제 정세가 백제에게 유리한 상황임을 파악한 무령왕은 가야 일대에 대한 영향력을 확장하기 위해 가야 연맹을 압박하기 시작했는데, 일본 측 기록에 의하면 6세기 중엽에는 중요한 항구였던 다사진, 그리고 섬진강 유역 여러 지역을 백제에 빼앗긴 것으로 나온다.

백제의 성장으로 인해 대가야의 영향력이 축소 되었고 이에 위기감을 느낀 이뇌왕은 신라와 손을 잡기로 결심한다. 당시 신라는 법흥왕이 율령 반포와 공복 제정 등을 통해 중앙 집권 국가 체제를 완성해 나아가고 있었고 이뇌왕은 성장해가는 신라의 국력에 힘입어 백제를 견제하고자 하였다.
九年 春三月 加耶國王遣使請婚 王以伊湌比助夫之妹送之
9년 봄 3월에 가야국 왕이 사신을 보내 혼인을 청하였으므로, 왕이 이찬 비조부(比助夫)의 누이[2]를 그에게 보냈다.
삼국사기》 본기 법흥왕 9년(522년)
신라는 이뇌왕의 제안을 받아들이고 이찬 비조부의 누이를 100여명의 종과 함께 이뇌왕에게 보낸다. 하지만 법흥왕은 가야 연맹과의 손을 잡기 위해서가 아니라 낙동강 유역으로의 진출을 노리고 혼인 동맹을 체결한 것이었다. 이는 《일본서기》에 자세하게 나타난다.
가라왕(加羅王)이 신라 왕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여 드디어 아이를 가졌다. 신라가 처음 여자를 보낼때 100인을 아울러 보내 그녀의 시종으로 삼았으므로, 받아들여 여러 현에 나누어 배치했는데, 신라의 의관을 입도록 하였다. 아리사등은 그들이 복장을 바꾸어 입었다고 성내며 사자를 보내 돌아가게 하라고 시켰다. 신라는 크게 부끄러워 그녀를 도로 돌아오게 하려고 했다.
"전에 그대가 장가드는 것을 받아들여 나는 즉시 혼인을 허락했으나, 지금 이미 이처럼 되었으니 왕녀를 돌려주길 바라오."
가라(加羅) 기부리지가(己富利知伽)[3]가 대답하였다.
"부부로 짝지워졌는데 어찌 다시 헤어질 수 있겠소? 또한 아이가 있으니 그를 버리면 어디로 가겠소?"
결국 (신라는) 지나가는 길에 도가(刀伽), 고파(古跛), 포나모라(布那牟羅)의 세성을 함락시키고 또한 북쪽 변경의 다섯 성을 함락시켰다.
일본서기계체기 23년(529년) 3월조.
그러나 탁순국을 포함한 여러 가야 소국들은 맹주 대가야의 친 신라 정책에 반발했고, 탁순국왕 아리사등이 신라인 시종들을 쫓아낸 것은 신라 입장에서는 결례와 모욕으로 여겨졌다. 쫓아낸 것은 탁순국이지만 결국 거기에 배치한 건 대가야 이뇌왕의 책임이었던 것. 이뇌왕은 결국 법흥왕에게 동맹 파기와 다름없는 "누이를 돌려달라"는 이야기를 듣게되고, 이를 이뇌왕이 어린 아들까지 있는데 파혼은 할 수 없다고 거절하자 결국 신라군이 투입돼 강제로 이들을 빼내게 되고 그 과정에서 가야 북쪽 변경 5개성과 그 외 3성을 신라가 빼앗았다.

그리고 위 소개 단락에서 언급했던 기능말다간기와 이뇌왕이 동일인이란 설을 따른다면, 이 때 왕이 직접 일본에 넘어가 지원군을 요청했다. 그러나 이후 계속된 기록을 보면 일본에서는 제대로 된 지원을 해주지 않았고, 일본에서 앞서 527년 파견되었던 오미노 케누(近江毛野臣, 혹은 줄여서 모야신毛野臣으로도 기록)는 가야 땅에 자리잡고 별의별 민폐만 끼쳐 없느니만 못한 존재라 오히려 530년 백제군과 신라군을 다시 끌어들여 쫓아내야 했다.
十一年 秋九月 王出巡南境拓地 加耶國王來會
11년 가을 9월에 왕이 남쪽 변방의 새로 넓힌 지역을 두루 돌아보았는데, 이때 가야국 왕이 찾아왔으므로 만났다.
삼국사기》 본기 법흥왕 11년
이후 법흥왕의 순시때 직접 찾아가 정상회담이 있었으나 이때의 일은 자세히 기록되지 않아 알 수가 없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 이후 가야 연맹의 소국들은 반파국이 맹주로서 백제와 신라 사이에서 제대로 대처할 수 없다고 판단했는지, 대신 반파국과 맞먹는 힘을 가진 안라국[4]을 대표격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안라국은 가야 연맹의 자주권과 영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백제, 신라, 왜국까지 이해관계가 있는 모든 주변국 대표를 가야 땅으로 초청해 안라회의를 추진한다. 대가야도 이후 안라국이 주도하는 외교에 동참은 하는데 비교적 소극적으로 마지못해 참여하는 느낌이다.[5]

결국 이뇌왕 시대에 대가야는 후기 가야 맹주 자리도 잃어버리고, 이후 백제에 다시 붙었다가 관산성 전투에서 크게 털리고, 결국 신라에게 잡아먹히는 신세가 되고 만다. 이뇌왕이 괜히 친 신라 한 번 해보려 했다가 신뢰도 잃고, 가야의 몰락에 한몫 한 셈. 이 이후의 일들에 대해선 기록이 남아있지 않다. 가족 관계는 신라에서 넘어온 양화 부인과 아들인 월광 태자가 알려져 있다. 아들 월광 태자가 대가야 마지막 군주 도설지왕과 동일 인물이라는 설이 있는데, 이에 따르면 도설지왕이 대가야 군주가 된거는 561년 ~ 562년 정도일 것인데 그 때까지 이뇌왕이 재위하고 있었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그놈의 기록이 부족해서.. 그래도 이뇌왕 시대 정도면 가야의 어느 한 나라 군주치고는 이래저래 행적이 많이 남은 편.

3. 관련 항목



[1] 신라와 가야(진한과 변한)의 언어는 거의 똑같다고 삼국지 등의 여러 기록에 써 있다.[2]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이찬 비지배의 딸이라고 적혀있다. 위서논란이 있는 《화랑세기》에는 양화라는 이름을 가졌다고 기록되어 있다.[3] 이뇌왕을 가리킨다. 기부리(己富利)는 지명으로 볼 수도 있다. 근거로 능비기부리(能備己富利)라는 지명이 일본서기에 보인다. 기부리는 코호리로 읽혀 우리말 고을의 옛말로 추정된다. 비슷한 예로 우류조부리지간(宇流助富利知干 ; 우루소호리치칸)이 있다. 석우로의 지위는 서불감(舒弗邯)이었으므로 소부리라 적은듯 하다. 백제에서 왕성을 거발성(居拔城)이라고도 하므로 기부리지가는 왕성의 수장, 왕이라는 뜻으로 볼수도 있다.[4] 사실 안라국의 자체 국력은 반파국보다 훨씬 적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고고학적으로 함안계 유물이 타 지역에서 출토되는 사례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일본서기의 내용을 참조해 보면, 안라국의 주도적 위치는 국력 자체가 강하기보다는 외교적 수 싸움으로 얻어낸 성과에 가까워 보인다. 고고학으로 알아낸 물리적 국력으로는 알 수 없는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있긴 있었던 듯한데 그게 뭐길래 다른 가야소국들이 안라국의 외교를 순순히 잘 따라다니는지는 이 시기의 미스테리 중 하나.[5] 안라가 사비회의에 대표자를 2~3명 보내는 데 반해 반파는 상수위(上首位) 고전해 1명만 보낸다. 이 상수위(上首位)라는 직위도 얼마나 높은지 알기는 힘들지만, 추정하자면 안라가 백제에 파견한 2~3명은 하한기(下旱岐) 지위인데, 여기에서 한기는 가야에서 왕을 뜻하는 말이라 즉 부왕(副王)급, 왕통 2인자격으로 여겨지며, 다른 가야 소국들은 한기가 직접 백제에 가거나 한기의 아들급을 보냈기 때문에, 상수위가 대략 재상급이라 해도 아무래도 다른 나라의 왕과 왕자보다는 상수위가 급이 낮을 가능성이 높다. 이렇게 지위가 낮은 사람을 사신으로 보내서 우리나라는 여기에 참가는 하지만 적극적이지 않다는 의견을 내비치려 한 것. 그리고 참석자 명단 순서도 가라(반파국)보다 안라가 앞에 기록되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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