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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 하북위례성 또한 존재만 전할 뿐 정확한 위치가 알려지지 않았다. ||
[b] 하북위례성 또한 존재만 전할 뿐 정확한 위치가 알려지지 않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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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8080> 공산성 금서루. 오늘날 충청남도 공주시의 공산성 유적은 웅진성으로 비정된다. |
1. 개요
위례성[1]에서 천도한 백제의 2번째 수도. 현재의 충청남도 공주시에 있었다. 제22대 문주왕이 도읍하고 제26대 성왕 때 사비성으로 천도하였다. 이후 웅진성은 제2 수도 기능을 하였다.웅진성의 정확한 범위는 미상이고, 공산성이 웅진성으로 추정되고 있다. 공산성 문서에도 보이듯 공산성 자체가 웅진성이 아니라 공산성을 포함한 부지 일대를 웅진성이라 통칭했을 가능성도 크다.
2. 역사
백제는 고구려 장수왕의 남진 정책으로 하남위례성을 빼앗기고 475년에 개로왕이 살해당했으며, 이에 따라 차기 국왕 문주왕 원년에 이 곳으로 쫓기다시피하며 천도하였다. 웅진성은 아랫동네 사비성으로 다시 도읍을 옮기는 538년까지 63년 동안 백제의 수도로 기능을 하였다.위기 상황에서 급하게 새 수도로 정해진 데서 알 수 있듯 방어에 유리한 지형[2]이었기에, 사비성 천도 후에도 전시에 수도 사비성이 위험할 경우 왕이 이 곳으로 피난가는 등 잊혀지지 않고 멸망하는 그 날까지 제2수도로서의 기능과 여전한 존재감을 자랑했다. 실제로 백제의 마지막 군주 의자왕도 나당연합군을 피해서 이 곳에 피난을 오게 되지만, 웅진성의 방어를 맡은 방령 예식진이 의자왕을 체포해서 나당연합군에 팔아넘기고 그 대가로 자신은 당나라에서 대당좌위위대장군이라는 벼슬을 받았다.
백제 멸망 후에는 당나라의 웅진도독부가 잠깐 존재했으며, 나당전쟁으로 676년에 완전히 당군을 쫓아낸 통일신라 때는 웅주(웅천주)로 개편되었다. 신라는 부여군 대신 여기를 충청 일대 웅천주의 행정 중심지로 삼았는데, 백제 때는 평지가 좁아서 한 나라의 수도로는 적합하지 않아서 천도했다지만, 이제 더 이상 수도가 아니기에 드넓은 부여 대신 공주시로도 지역 행정 중심지 역할은 충분하다고 보았던 듯 하다.
김헌창의 난 때 잠시 장안국의 수도였다. 이후 공주로 명칭이 바뀌고 고려, 조선 시기에도 충남 지역의 중심도시 역할을 했다.
3. 어원
고대 한국어(백제어)로는 고마나리라고 불렀다. '고마[koma]'는 곰을 뜻하며, '나리'는 현대 한국어의 '내(시내)'와 '나루'로 이어지는 순우리말이다. 백제어에는 한자를 빌려 우리말을 표기하는 훈독이 존재하여 '곰 웅(熊)' 자를 적고 '고마', '내 천(川)' 또는 '나루 진(津)' 자를 적고 '나리'라고 부르는 식의 지명 조어법이 통용되었다.《삼국사기》, 《삼국유사》 및 《신증동국여지승람》 등의 사서에서는 모두 '웅진'의 표기를 따르고 있는 반면, 《양서》에는 '고마(固麻)'라고 적혀 있어 그 실제 음가를 추정할 수 있다. 또한 《일본서기》에서는 문주왕이 천도한 백제의 수도를 '구마나리(久麻那利)'라고 기록했는데, 이는 백제어로 된 지명을 원형 그대로 싣고 있는 셈이다. 같은 문헌의 백제부흥운동 관련 기사에는 구마노리성(久麻怒利城)으로도 나온다.
백제가 멸망하고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이후 경덕왕 시기인 757년 지명 한화 정책이 시행되어, 전국의 지명이 오늘날과 같은 중국식 한자음, 즉 음독으로 통일되었다. 이에 따라 고마나루 일대 역시 '웅천주(熊川州)' 또는 '웅주(熊州)'로서 신라 9주의 일부로 재편되었다. '웅천'과 '웅진'은 각각 '고마+나리(川)', '고마+나루(津)'의 조합에 대응되므로, '웅주'가 '웅진'이라는 이름에서 유래했음은 자명하다.
그러나 이후에도 백제 유민이었던 현지인들은 일종의 사투리로써 계속 웅주 땅을 '고마나루', '곰나루'라고 불러 왔다. 조선 초기에 집필된 《용비어천가》에서도 공주의 지명이 고마ᄂᆞᄅᆞ로 표기되어 있다. 또한 웅주를 '곰주'로 부르기도 했는데, 이 발음이 다시 한자로 음차되어 오늘날 공주시의 유래가 되었다.
그리고 어쩌다 이곳의 지명이 곰(熊)과 얽혔는고 하니, 다음과 같은 설화가 전해진다.
과거 백제 시절, 웅진 북부 지역 연미산에 사람의 말을 하는 암컷 곰이 있었다. 이 곰은 혼자였기에 늘 외로웠고, 항상 자신과 함께 있어줄 이를 소망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곰은 남자 몇 명이 금강을 건너와 물고기를 잡고 나무를 베어 배에 싣고 있는 것을 보았다.
곰이 그들에게 다가가자 남자들은 혼비백산해 도망쳤으나, 그중 한 명은 너무 놀라 그만 기절해 버렸다.
곰은 기절한 남자를 자신의 동굴로 데려와 깨어나기를 기다렸다. 남자가 깨어나자, 곰은 "나는 당신을 해치려고 하지 않습니다. 다만 당신과 내가 벗이 되기를 바랍니다." 라고 말했다.
남자는 곰이 사람의 말을 하는 것에 짐짓 놀라면서도 두려움 탓에 곰의 부탁을 거부하였다. 하지만 곰은 기껏 데려온 남자를 잃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곰은 한동안 남자에게 먹을 것을 주면서, 사냥을 나갈 때면 동굴 입구를 큰 바위로 막아 가두어 두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자, 곰은 남자에게 사랑의 감정을 느꼈다. 남자도 처음에는 곰을 두려워하였으나 곰의 친절에 점점 감화되었다.
결국 남자와 곰은 통정(通情)[3]하게 되었고, 둘 사이에는 새끼가 태어났다. 새끼는 분명 남자의 자식이었으나 생김새는 영락없는 곰이었다.[4]
곰은 둘째가 태어나고부터는 더 이상 남자를 가두지 않았다. 그와 새끼를 둘이나 가진 데다 남자가 새끼들을 끔찍이 귀여워하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던 어느 날, 곰이 사냥을 하다가 강가를 바라봤는데, 하필 남자가 금강을 건너 도망치려던 것을 목격하고 말았다.
곰은 남자를 말리려다가 단념하고 황급히 동굴로 뛰어갔다.
자신이 아니라 새끼들이어야 그를 말릴 수 있으리라 믿어서였다.
"아버지! 돌아오세요! 저희를 두고 가지 마세요!"
곰이 데려온 두 새끼들은 강에 뛰어들어 첨벙거리면서 애타게 남자를 불렀다. 그러나 그는 끝내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인간은 정말 잔인한 존재로구나. 자신을 사랑해준, 자신이 사랑했던 이를, 거기에 제 새끼들까지 버리고 떠나다니!"
곰은 일갈하고 서럽게 울부짖더니, 새끼들을 껴안고 강으로 뛰어들었다. 새끼들은 살려고 허우적거렸지만, 곰은 발버둥치는 새끼들을 물속으로 짓눌렀고, 목숨 셋이 그대로 영원히 가라앉았다.
그리고 곰의 원한이 금강에 남아, 그때부터 금강을 지나는 배의 태반이 갑작스러운 물살에 휩쓸려 침몰했다. 거기다가 연미산 일대에서는 해마다 흉년이 들었다.
이 소식은 백제의 왕에게 알려졌다. 왕은 인근에 작은 사당을 짓고 제사를 지내 곰의 혼령을 위로했다. 그러자 얼마 후 금강이 다시 잠잠해져 배가 침몰하는 일이 잦아들었다. 그리고 이 일로 인해 이곳이 웅진(熊津, 곰나루)으로 불리게 되었다.
1500년 전 백제가 고구려에게 밀려 도읍을 충청남도 공주시 웅진성으로 옮긴 시절의 이야기이다.그러던 어느 날, 곰은 남자 몇 명이 금강을 건너와 물고기를 잡고 나무를 베어 배에 싣고 있는 것을 보았다.
곰이 그들에게 다가가자 남자들은 혼비백산해 도망쳤으나, 그중 한 명은 너무 놀라 그만 기절해 버렸다.
곰은 기절한 남자를 자신의 동굴로 데려와 깨어나기를 기다렸다. 남자가 깨어나자, 곰은 "나는 당신을 해치려고 하지 않습니다. 다만 당신과 내가 벗이 되기를 바랍니다." 라고 말했다.
남자는 곰이 사람의 말을 하는 것에 짐짓 놀라면서도 두려움 탓에 곰의 부탁을 거부하였다. 하지만 곰은 기껏 데려온 남자를 잃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곰은 한동안 남자에게 먹을 것을 주면서, 사냥을 나갈 때면 동굴 입구를 큰 바위로 막아 가두어 두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자, 곰은 남자에게 사랑의 감정을 느꼈다. 남자도 처음에는 곰을 두려워하였으나 곰의 친절에 점점 감화되었다.
결국 남자와 곰은 통정(通情)[3]하게 되었고, 둘 사이에는 새끼가 태어났다. 새끼는 분명 남자의 자식이었으나 생김새는 영락없는 곰이었다.[4]
곰은 둘째가 태어나고부터는 더 이상 남자를 가두지 않았다. 그와 새끼를 둘이나 가진 데다 남자가 새끼들을 끔찍이 귀여워하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던 어느 날, 곰이 사냥을 하다가 강가를 바라봤는데, 하필 남자가 금강을 건너 도망치려던 것을 목격하고 말았다.
곰은 남자를 말리려다가 단념하고 황급히 동굴로 뛰어갔다.
자신이 아니라 새끼들이어야 그를 말릴 수 있으리라 믿어서였다.
"아버지! 돌아오세요! 저희를 두고 가지 마세요!"
곰이 데려온 두 새끼들은 강에 뛰어들어 첨벙거리면서 애타게 남자를 불렀다. 그러나 그는 끝내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인간은 정말 잔인한 존재로구나. 자신을 사랑해준, 자신이 사랑했던 이를, 거기에 제 새끼들까지 버리고 떠나다니!"
곰은 일갈하고 서럽게 울부짖더니, 새끼들을 껴안고 강으로 뛰어들었다. 새끼들은 살려고 허우적거렸지만, 곰은 발버둥치는 새끼들을 물속으로 짓눌렀고, 목숨 셋이 그대로 영원히 가라앉았다.
그리고 곰의 원한이 금강에 남아, 그때부터 금강을 지나는 배의 태반이 갑작스러운 물살에 휩쓸려 침몰했다. 거기다가 연미산 일대에서는 해마다 흉년이 들었다.
이 소식은 백제의 왕에게 알려졌다. 왕은 인근에 작은 사당을 짓고 제사를 지내 곰의 혼령을 위로했다. 그러자 얼마 후 금강이 다시 잠잠해져 배가 침몰하는 일이 잦아들었다. 그리고 이 일로 인해 이곳이 웅진(熊津, 곰나루)으로 불리게 되었다.
요약하자면 곰나루에서 뱃사공으로 일하던 한 남자는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암곰에게 납치되어 그 곰의 굴로 끌려가 꼼짝없이 곰과 같이 살게 되었으며 곰은 먹이를 구하러 나갈 때도 굴 입구를 바위로 막아 놓았다. 그러던 어느 날 보름달이 뜬 밤 강가 백사장에서 곰은 너울너울 춤을 추더니 사람으로 변했다. 어여쁜 여인으로 변한 곰은 굴로 돌아와 뱃사공에게 사연을 말한다. "나는 본래 사람이 되고 싶었고 그래서 봉황산 신령에게 빌어 이렇게 사람이 되었으니 앞으로도 잘 살자"고 이야기했지만 뱃사공은 여러 차례 도망을 시도했고, 그 때마다 곰이 길목에서 귀신같이 나타나 다시 잡아오길 반복했다가 곰이 자신의 혈육을 가진 것을 알고는 도망치기를 그만두지만 곰이 출산을 하던 날 뱃사공은 마음이 변해 다시 배를 타고 강 건너로 도망을 갔다. 이 때 뒤에서 곰이 아기 둘을 양손에 안고 "가지 말라"며 애원했지만 뱃사공은 뒤돌아 보지도 않고 강 건너로 사라지자 곰은 아기들과 함께 강으로 뛰어들어 자결했다. 그 후 강을 건너는 배가 있으면 거센 풍랑이 일어 배가 뒤집히는 일이 계속 생기자 사람들이 곰의 원혼을 달래는 사당을 짓고 제를 지내자 강이 원래 모습을 되찾았다.
전설이라 구전되었기 때문에 여러 버전이 있다. 좀 더 짧은 판본도 있는데 여기선 곰이 더 독하게 굴지만 결말은 같다.
보물찾기 시리즈 중 백제 시대 보물찾기에 나왔다.
잡지에 나온 학습만화로 묘사된 설화. 그리고 누가 이 만화를 리메이크했다.
2023년 아주 사적인 여행에서 광희가 이 설화를 안 후 놀란 적이 있다.
[1] 오늘날의 서울특별시 송파구 일대.[2] 위성지도로 공주시의 지형을 보면 알겠지만, 평지가 별로 없이 산과 강으로 둘러싸여 있다.[3] 성교[4] 하지만 뒷내용으로 보아 사람의 말을 배우고 말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