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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4a2d5b><colcolor=#fedc89> 신라의 주 무주 (무진주) 武州 (武珍州) | |
하위 행정구역 | 14군 44현[1] |
주둔 정 | 미다부리정 |
설치 | 686년 |
폐지 | 940년 |
후신 | 광주 |
현재 | 전라남도 일대 |
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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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통일신라의 행정구역 체계였던 9주 5소경 중 하나로 지금의 광주광역시인 무주군(武州郡)에 치소가 있었으며[2] 현재 광주광역시+전라남도 지역 14군 44현을 관할했다. 수부도시인 무주의 다른 이름인 '무진주(武珍州)'라고도 했는데, 당시 珍이 '돌'로 훈독되었으며 광주 지역에 무등산이라는 산이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원래 발음은 '무돌주' 정도로 추정할 수 있다. 무주의 지방군으로 검은색 옷깃의 미다부리정(未多夫里停) 부대와 백적·백황(白赤白黃) 만보당 부대가 지금의 나주시에 주둔했다.참고로 현재 전라북도에 있는 무주(茂朱)와는 한자가 다르다. 현재 전북 무주군의 신라 때 지명은 단천현(丹川縣)이었다.
청해진이 이곳에 있었다. 민애왕 시기 무주에서 민애왕이 보낸 군대와 청해진 + 김우징 세력 간 격전이 벌어지기도 했다.[3]
후삼국시대에서는 견훤이 무진주를 수도로 하여 후백제를 개국했으며, 얼마안있어 완산주[4]로 천도한다.
[1] 경덕왕 당시[2] 이 영향인지 광주에는 '무진' 이라는 단어가 현재도 남아있다. 대표적인게 무진대로.[3] 이후 장보고는 문성왕 시기에 반란을 꾀하다가 염장에게 람살당했다는 기록(삼국사기)과 장보고 사후 그의 수하인 이창진이 반란을 일으켰다는 기록(속일본후기)으로 갈린다. 장보고 사후 청해진은 점차 약화되다가 851년 해체된다.[4] 현재의 전주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