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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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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blewidth=100%>[1] 졸본성이 구체적으로 어떤 성곽인지는 아직 알려지지 않음
[2] 졸본의 평지성으로 추정되는 토성
[3] 평양 천도 이전에 존재했던 평양의 평지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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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지도와 평양성의 위치
파일:attachment/PYcastle.jpg
평양성. 고구려는 장안성(長安城)이라고 했다.
북한의 국보 제1호
<colbgcolor=#ED1C27> 평양성
平壤城 | Pyongyang Castle
<colcolor=#fff> 주소 평양직할시 중구역, 보통강구역, 평천구역 일대
면적 약 -㎡
둘레 약 15km
건축시기 고구려 양원왕 (추정)
지정연도 1994년(추정)
관리 중앙문화유물보존지도기관
1. 개요2. 역사
2.1. 배경 설명2.2. 제24대 양원왕 이전2.3. 제24대 양원왕 이후2.4. 남북국시대2.5. 후삼국시대2.6. 고려 시대2.7. 조선 시대2.8. 북한
3. 구조
3.1. 외성3.2. 중성3.3. 내성3.4. 북성
4. 전투 목록5. 또 다른 고구려의 평양성6. 관련 문서7.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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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구려의 수도 평양성
북한 평양시에 있는 .

고구려 왕조의 마지막 수도이자 첫번째로 일원화된 수도이다. 평양성은 산성의 역할과 평지성의 역할을 동시에 수행했다. 고구려 제24대 양원왕이 지었으며, 제25대 평원왕 때 이전했다. 당시엔 장안성(長安城)으로 불렸다.

2. 역사

2.1. 배경 설명



본래 고구려 수도 제도는 평시에 수도 노릇을 하는 평지성(平地城)과 전시에 방어를 담당하는 산성(山城)으로 구성된 이중성 체제였다.[1]

평양 일대는 고조선의 영토였으며 고조선이 기원전 108년에 멸망하고 난 이후, 낙랑군의 치소가 있었던 곳이라고 추정하는 것이 남한 학계의 유력한 학설이다.[2][3] 훗날 고구려 제15대 미천왕이 중국 군현들을 축출하고, 평양 일대를 획득했다.

이후 고구려는 평양성을 당시 수도인 국내성 다음으로 중요하게 여겼다. 평양성은 고구려의 제2의 도시이자 제2의 수도로서 남쪽의 중심지로 자리잡았다.
그래서 백제와의 평양성 전투때 고구려 제16대 고국원왕이 목숨을 걸고 막으려고 했던 것이다.

2.2. 제24대 양원왕 이전

고구려의 수도는 초기에 졸본성에서 국내성[4]으로 옮긴 이후 계속 국내성이었지만, 국내성은 첩첩산중의 좁은 땅에 있었고[5] 교통이 좋은 지리적 결절점이라고 보기도 어려워서, 영토가 넓어진 고구려에 적합한 수도는 아니었다.

결국 제19대 광개토대왕이 평양을 다지고[6][7] 제20대 장수왕대에 국내성환도성에서 안학궁대성산성으로 천도했다.

보통 평양성이라고 하면 지금 이 문서의 장안성을 의미한다. 그래서 광개토대왕 - 장수왕 두 임금이 장안성에 천도했을거라 생각하지만 처음은 장안성 동쪽의 안학궁 - 대성산성으로 갔다. 장수왕은 해자와 궁성으로 둘러진 안학궁과 대성산에 성을 지어 수도 체제를 잡았다. 안학궁과 장안성은 둘 다 현재의 평양시 범위 안에 있으며, 거리도 그렇게 멀지 않다. 정확하게 말하면 장안성이 안학궁의 서쪽에 있다.

하지만 최근 국내외 학자들에 의해서 장안성 이전의 평양성의 위치에 대한 재검토가 이루어지고 있다[8]. 특히 중국학계에서는 현 집안 국내성이 전기 평양이었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는데, 이에 따르면 사서를 해석함에 있어서 '국내'와 '국내성'을 구별해야 하며[9], 현 국내성과 전기 평양성의 이름이 혼용되었을 가능성을 제기하였다. 또한 평양 역시 고구려의 도읍을 가리키는 보통명사로서 해석해야[10] 전기 평양성의 위치에 대해서 파악할 수 있다는 입장 역시 주장되었다. 비록 중국 학계의 한계상 장수왕이 현 지역으로 천도했다면 그 지역의 낙랑계 중국 한족들의 세력이 건재했기 때문에 무리가 있었을 것이었다 등의 억지스러운 주장을 깔고 가는 학자들도 있지만, 연구에 참여한 만주 지역 학자들의 주장에 중국 학계에서 별다른 이견을 제시하지 않았다는 점과, 일제강점기 연구를 통한 지리적 고증을 반박하여 전기 평양의 위치를 현 평양 이외의 지역에서 찾고자 한 것은 국내 고구려 도성 연구에도 큰 의미를 준다.

하지만 중국의 역사서 《수경주》(515년), 《위서》(559년), 《수서》(656년), 《북사》(659년), 《통전》(801년), 《구당서》(945년), 《구오대사》(974년), 《신당서》(1060년) 등에 고구려가 586년 장안성으로 천도하기 이전의 평양성은 예전 낙랑군 조선현이 있던 지금의 평양을 가리킨다고 분명하게 명시하고 있기 때문에 전기 평양성이 국내성(중국 지린성 지안시)일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인다. 특히 《수경주》의 저자는 고구려 평양성을 감싸는 패수가 지금의 대동강이 맞다고 결론내렸고, 직접 고구려 사신한테 지금의 고구려 국치(수도)가 있는 곳이 예전 낙랑군 조선현이 있는 곳이 맞느냐고 직접 물어보고 답변을 받아 적은 것이기 때문에 신뢰성이 매우 높다. 물론 동천왕 대의 평양성은 고구려 후기 수도였던 평양성과는 별개의 성일 가능성이 높은데, 미천왕 3년인 302년에 현도군을 침공해 잡아 온 8천명의 포로를 평양(平壤)으로 옮겼다는 기록이 나오고(미천왕의 낙랑군 점령은 313년에 이뤄졌으므로, 미천왕 3년의 평양은 지금의 평양일 수가 없다), 고국원왕 때 기록을 보면 평양성(平壤城)과 평양(平壤)을 구별하고 있으며, 평양에 있는 성은 '평양 동황성(東黃城)\'이라고 구체적으로 언급되기 때문. 국내성 또한 대무신왕 11년(28년) 기사에 언급된 국내 위나암성의 지세[11]와는 부합하지 않아 위나암성과는 별개의 성으로 추정되며, 오히려 고국원왕 12년인 342년에 축조된 성일 가능성이 높다.

다만 지금의 평양 이전의 이른바 '전기 평양'이 요동 어딘가에 있었을 가능성은 조선의 실학자들도 제기하는 사람이 있었다. 조선 후기의 연암 박지원도 평양은 우리가 알고 있는 그 평양 한곳만 있었던 것이 아니고 요동에도 '평양'이라는 이름이 붙은 곳이 존재하고 있었다고 했으며, 그 전기 평양성의 위치는 봉황성(鳳凰城)[12]이라고 지목했다.[13]

열하일기 도강록에 다음과 같이 나와 있다.
나는 당 태종이 안시성에서 눈을 잃었는지 않았는지는 상고할 길이 없으나, 대체로 이 성을 ‘안시’라 함은 잘못이라 하겠다. 《당서》에 보면, 안시성은 평양서 거리가 5백 리요, 봉황성은 또한 왕검성(王儉城)이라 한다 하였으므로, 《지지(地志)》에는 봉황성을 평양이라 하기도 한다 하였으니, 이는 무엇을 이름인지 모르겠다. 또 《지지》에, 옛날 안시성은 개평현(蓋平縣)[14]의 동북 70리에 있다 하였으니, 대개 개평현에서 동으로 수암하(秀巖河)까지가 3백 리, 수암하에서 다시 동으로 2백 리를 가면 봉황성이다. 만일 이 성을 옛 평양이라 한다면, 《당서》에 이른바 5백 리란 말과 서로 부합되는 것이라 본다.
그런데 우리나라 선비들은 단지 지금 평양만 알므로 기자(箕子)가 평양에 도읍했다 하면 이를 믿고, 평양에 정전(井田)이 있다 하면 이를 믿으며, 평양에 기자묘(箕子墓)가 있다 하면 이를 믿어서, 만일 봉황성이 곧 평양이다 하면 크게 놀랄 것이다. 더구나 요동에도 또 하나의 평양이 있었다 하면, 이는 해괴한 말이라 하고 나무랄 것이다. 그들은 아직 요동이 본시 조선의 땅이며, 숙신(肅愼)ㆍ예(穢)ㆍ맥(貊) 등 동이(東彝)의 여러 나라가 모두 위만조선에 예속되었던 것을 알지 못하고, 또 오라(烏剌)ㆍ영고탑(寧古塔)ㆍ후춘(後春) 등지가 본시 고구려의 옛 땅임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하, 후세 선비들이 이러한 경계를 밝히지 않고 함부로 한사군(漢四郡)을 죄다 압록강 이쪽에다 몰아 넣어서, 억지로 사실을 이끌어다 구구히 분배해 놓고 다시 패수(浿水)를 그 속에서 찾되, 혹은 압록강을 ‘패수’라 하고, 혹은 청천강(淸川江)을 ‘패수’라 하며, 혹은 대동강(大同江)을 ‘패수’라 한다. 이리하여 조선의 강토는 싸우지도 않고 저절로 줄어들었다. 이는 무슨 까닭일까. 평양을 한 곳에 정해 놓고 패수 위치의 앞으로 나감과 뒤로 물리는 것은 그때그때의 사정에 따르는 까닭이다.
나는 일찍이 한사군의 땅은 요동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마땅히 여진(女眞)에까지 들어간 것이라고 했다. 무엇으로 그런 줄 아느냐 하면 《한서(漢書)》 지리지(地理志)에 현도(玄菟)나 낙랑(樂浪)은 있으나, 진번(眞蕃)과 임둔(臨芚)은 보이지 않는다. 대체 한 소제(漢昭帝) 시원(始元) 5년(B.C. 82)에 사군을 2부(府)로 합치고, 원봉(元鳳) 원년(B.C. 76)에 다시 2부를 2군(郡)으로 고쳤다. 현도 세 고을 중에 고구려현(高句麗縣)이 있고, 낙랑 스물다섯 고을 중에 조선현(朝鮮縣)이 있으며, 요동 열여덟 고을 중에 안시현(安市縣)이 있다. 다만 진번은 장안(長安)에서 7천 리, 임둔은 장안에서 6천 1백 리에 있다. 이는 김윤(金崙)[15]의 이른바,
“우리나라 지경 안에서 이 고을들은 찾을 수 없으니, 틀림없이 지금 영고탑(寧古塔) 등지에 있었을 것이다.”
라고 함이 옳을 것이다.
이로 본다면 진번ㆍ임둔은 한말(漢末)에 바로 부여(扶餘)ㆍ읍루(挹婁)ㆍ옥저(沃沮)에 들어간 것이니, 부여는 다섯이고 옥저는 넷이던 것이 어떤 것은 변하여 물길(勿吉)이 되고, 어떤 것은 변하여 말갈(靺鞨)이 되며, 어떤 것은 변하여 발해(渤海)가 되고, 어떤 것은 변하여 여진(女眞)으로 된 것이다. 발해의 무왕(武王) 대무예(大武藝)가 일본(日本)의 성무 왕(聖武王)에게 보낸 글월 중에,
“고구려의 옛 터를 회복하고, 부여의 옛 풍속을 물려받았다.”
하였으니, 이로써 미루어 보면, 한사군의 절반은 요동에, 절반은 여진에 걸쳐 있어서, 서로 포괄되어 있었으니, 이것이 본디 우리 강토 안에 있었음은 더욱 명확하다.
그런데 한대(漢代) 이후로, 중국에서 말하는 패수가 어딘지 일정하지 못하고, 또 우리나라 선비들은 반드시 지금의 평양으로 표준을 삼아서 이러쿵저러쿵 패수의 자리를 찾는다. 이는 다름 아니라 옛날 중국 사람들은 무릇 요동 이쪽의 강은 죄다 ‘패수’라 하였으므로, 그 이수가 서로 맞지 않아 사실이 어긋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옛 조선과 고구려의 지경을 알려면, 먼저 여진을 우리 국경 안으로 치고, 다음에는 패수를 요동에 가서 찾아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패수가 일정해져야만 강역이 밝혀지고, 강역이 밝혀져야만 고금의 사실이 부합될 것이다. 그렇다면 봉황성을 틀림없는 평양이라 할 수 있을까. 이곳이 만일 기씨(箕氏)ㆍ위씨(衛氏)ㆍ고씨(高氏) 등이 도읍한 곳이라면, 이 역시 하나의 평양이리라 하고 답할 수 있을 것이다. 《당서》 배구전(裴矩傳)에,
“고려는 본시 고죽국(孤竹國)인데, 주(周)가 여기에 기자를 봉하였더니, 한(漢)에 이르러서 사군으로 나누었다.”
하였으니, 그 이른바 고죽국이란 지금 영평부(永平府)에 있으며, 또 광녕현(廣寧縣)에는 전에 기자묘(箕子墓)가 있어서 우관(冔冠 은(殷)의 갓 이름)을 쓴 소상(塑像)을 앉혔더니, 명(明)의 가정(嘉靖 명 세종(明世宗)의 연호) 때 병화(兵火)에 불탔다 하며, 광녕현을 어떤 이들은 ‘평양’이라 부르며, 《금사(金史)》와 《문헌통고(文獻通考)》에는,
“광녕ㆍ함평(咸平)은 모두 기자의 봉지(封地)이다.”
하였으니, 이로 미루어 본다면, 영평(永平)ㆍ광녕의 사이가 하나의 평양일 것이요, 《요사(遼史)》[16]에,
“발해(渤海)의 현덕부(顯德府)는 본시 조선 땅으로 기자를 봉한 평양성(平壤城)이던 것을, 요(遼)가 발해를 쳐부수고 ‘동경(東京)’이라 고쳤으니 이는 곧 지금의 요양현(遼陽縣)이다.”
하였으니, 이로 미루어 본다면, 요양현도 또한 하나의 평양일 것이다. 나는 기씨(箕氏)가 애초에 영평ㆍ광녕의 사이에 있다가 나중에 연(燕)의 장군 진개(秦開)에게 쫓기어 땅 2천 리를 잃고 차츰 동쪽으로 옮아가니, 이는 마치 중국의 진(晉)ㆍ송(宋)이 남으로 옮겨감과 같았다. 그리하여 머무는 곳마다 평양이라 하였으니, 지금 우리 대동강 기슭에 있는 평양도 그 중의 하나일 것이다. 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저 패수도 역시 이와 같다.
고구려의 지경이 때로 늘기도 하고 줄기도 하였을 터인즉, ‘패수’란 이름도 따라 옮김이 마치 중국의 남북조(南北朝) 때에 주(州)ㆍ군(郡)의 이름이 서로 바뀜과 같다. 그런데 지금 평양을 평양이라 하는 이는 대동강을 가리켜, “이 물은 ‘패수’다.” 하며, 평양과 함경(咸鏡)의 사이에 있는 산을 가리켜, “이 산은 ‘개마대산(蓋馬大山)’이다.” 하며, 요양으로 평양을 삼는 이는 헌우낙수(蓒芋濼水)를 가리켜, “이 물은 ‘패수’다.” 하고, 개평현에 있는 산을 가리켜, “이 산은 ‘개마대산’이다.” 한다. 그 어느 것이 옳은지 알 수는 없지만 반드시 지금 대동강을 ‘패수’라 하는 이는 자기네 강토를 스스로 줄여서 말함이다.
당(唐)의 의봉(儀鳳) 2년(677년)에 고구려의 항복한 임금 고장(高藏)을 요동주도독(遼東州都督)으로 삼고, 조선왕(朝鮮王)을 봉하여 요동으로 돌려보내며, 곧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를 신성(新城)에 옮겨서 이를 통할하였으니, 이로 미루어 보면 고씨(高氏)의 강토가 요동에 있던 것을 당이 비록 정복하기는 했으나 이를 갖지 못하고 고씨에게 도로 돌려주었은즉, 평양은 본시 요동에 있었거나 혹은 이곳에다 잠시 빌려 씀으로 말미암아 패수와 함께 수시로 들쭉날쭉하였을 뿐이었다. 그리고 한의 낙랑군 관아(官衙)가 평양에 있었다 하나 이는 지금의 평양이 아니요, 곧 요동의 평양을 말함이다.
그 뒤 승국(勝國)[17] 때에 이르러서는, 요동과 발해의 일경(一境)이 모두 거란(契丹)에 들어갔으나, 겨우 자비령(慈悲嶺)과 철령(鐵嶺)의 경계를 삼가 지키면서 선춘령(先春嶺)과 압록강마저 버리고도 돌보지 않으니, 하물며 그 밖에야 한 발자국인들 돌아보았겠는가. 고려는 비록 안으로 삼국(三國)을 합병하였으나, 그의 강토와 무력이 고씨의 강성함에 결코 미치지 못하였는데, 후세의 옹졸한 선비들이 부질없이 평양의 옛 이름을 그리워하여 다만 중국의 사전(史傳)만을 믿고 흥미진진하게 수ㆍ당의 구적(舊蹟)을 이야기하면서 이것은 패수요 이것은 평양이오 한다. 그러나 이는 벌써 말할 수 없이 사실과 어긋났으니, 이 성이 안시성인지 또는 봉황성인지를 어떻게 분간할 수 있겠는가.

2.3. 제24대 양원왕 이후

(양원왕 재위) 8년, 장안성을 건축하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양원왕-. 1,000년이 넘는 동안 유지될 성곽의 시작이지만 기사는 심플하기 그지없다.
(평원왕 재위) 28년, 수도를 장안성으로 옮기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평원왕-
《삼국사기》엔 제24대 양원왕 8년(552년)에 장안성을 쌓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리고 34년 뒤, 태자였던 제25대 평원왕 28년(586년)에 드디어 장안성으로 이전한다.

양원왕이 짓기 시작한 이후로 지속적인 수도 이전이 진행됐을 것으로 추정되고, 평원왕이 대대적으로 천명, 이후 3대의 군주들을 거쳐 제28대 보장왕 대까지 수도로서 존재했다.

이곳에서 668년에 벌어진 평양성 전투를 끝으로 고구려가 멸망했다.

양원왕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양원왕 대엔 고구려의 황금기가 끝나가고, 귀족 간 내전이 벌어져 국가가 휘청거리고 있었다고 추정된다.[18] 이러한 상황에서 양원왕은 평양 서쪽으로 가 평산성을 새로 지어 국정을 다잡으려 했을 것이라 추측된다. 그리하여 30년이 넘는 긴 시간동안 준비를 한 뒤, 양원왕의 후계자인 평원왕이 천도에 성공했다.

2.4. 남북국시대

이후 고구려 부흥운동이 일어나자 당나라안동도호부를 설치하여 점령지를 통치하려 했지만 평양 인근에서 워낙 거세게 부흥운동이 일어나 공격을 받자 요동으로 전부 철수하여 옮기게 되었고, 이후 남북국시대에 들어서며 평양은 발해•신라 양국의 접경지에 놓이게 되었는데 정확한 국적은 현재로선 알 수 없다.

남북국시대에는 과거 수도로서의 번영은 사라지고, 한동안 황폐화되었다. 평양이 유독 남북국시대에 몰락한 원인으로는 크게 두 가지가 있는데 첫번째는 신라와 발해의 접경 지역이라는 애매한 위치 때문이었다. 신라가 대동강 맞은편의 중화군 땅까지 군현을 설치했고 발해도 한두번 가볍게 다툰 정도 말고는 본격적으로 남침해 전선을 밀어내는 시도는 하지 못했기 때문에 평양 강변의 평양성은 오늘날의 판문점마냥 두 세력의 접경지이자 언제든 소규모 전투가 일어날 수 있는 불안정한 땅이 되었다.

두번째는 명목상 당나라의 영토인지라 양국 모두 평양을 온전히 수복하는 일에 소극적으로 나섰기 때문이다.[19] 다만 기록으로 보아 완전히 몰락하지는 않고 헌덕왕 등이 대동강까지 올라가 성을 쌓기도 하는 등 나름의 요충지였던 듯 하다.

신라 후기 서북방 전초기지였던 패강진의 중심지는 평주라는 것이 통설이나, 평산군이 아닌 평양에 있었다는 설도 있다. 이 설에 따르면 신라 말기에 이르면 옛 고구려의 수도였던 평양성 지역까지 신라가 잠깐이나마 직접 통치했던 것이 된다. 다만 기록이 모호해 확실하지는 않고, 어느 나라의 영향권이었든 당시 평양은 사람이 많이 살지 않는 쇠락한 지역이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2.5. 후삼국시대

"옛날 신라가 당에게 병을 청해 고구려를 파했다. 이에 평양 구도(平壤 舊都)가 풀만 무성하게 됐으니, 난 반드시 이를 복수할 것이다!"
《삼국사기》 <궁예 열전>. 평양성이 언급됐는데, 901년 때 일이다. 근데 이 땐 아직 평양을 수복하지 못했다.
'''...평양성주장군(平壤城主將軍) 검용(黔用)이 항복했다....
《삼국사기》 <궁예 열전>. 성책(聖冊) 원년(905년) 때 일이다.
후삼국시대에 평양성주를 자칭하던 검용이란 호족궁예에 투항했는데 검용이 신라인인지 발해인인지 원래 독립적이던 토착민인지는 기록이 부족해 알기 어렵다.

2.6. 고려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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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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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고도(平壤古都)는 황폐하게 된지 오래지만 그 기지(基址)[20]는 그대로 남아있다. 그러나 풀과 가시가 무성하고 번인(蕃人)이 그 사이에 와 사냥하니 변읍(邊邑)을 해치고 있다."
고려사》 <태조 세가> 원년(918년) 중 발췌. 당시 평양의 상황을 알 수 있다.
초대 대왕 태조 왕건은 평양을 매우 중시해 성을 쌓고 백성들을 이주해 도시를 채웠다. 고구려의 뒤를 이었다고 선포하며, 고구려계 호족을 끌어모았으니 당연한 처사였다.[21] 곧이어 평양은 서경(西京)으로 개칭되어 제2의 수도로 격상된다. 오죽하면 후대 임금들에게 남긴 10가지 중요한 훈수인 <훈요 10조> 중 5조항에 서경을 중요시하라는 당부를 넣었을 정도였다.

서경은 제2수도 답게 매우 우대받았는데 서경에 세워진 장락궁은 평양성 안에 세워졌다고 추측된다. 평양성문의 이름이 장락궁문의 이름으로 등장하기 때문. 이 장락궁(평양성?)은 황성, 나성으로 둘러싸여 개경의 본궐처럼 천자식 궁궐 제도를 이루었다. 자세한 건 장락궁 문서 참조.

제3대 정종왕식렴을 보내 아예 제1수도로 삼을려고 했지만 무산되었으며 이후 여요전쟁에서 주된 전장터가 되었고, 과거의 명성과 달리 수차례 함락되기도 했다.

제17대 인종은 서경을 매우 중시해 서경 천도가 대세적 주장이 되지만 지나치게 권력이 쏠리는 걸 싫어한 인종은 서경 세력을 억제했다. 결국 1135년에 폭발한 묘청이 서경을 중심으로 반란을 일으키면서 분사제도가 폐지되어 서경은 수도의 지위를 잃었다. 이후 몽골 침입 이후 동녕부에 속해 원나라의 영토가 되었지만 충렬왕 때 되돌려 받았다.

2.7. 조선 시대

파일:attachment/daedongmoon.jpg
평양성 동문인 대동문. 구한말의 모습이며 크게 훼손된 상태.
파일:external/www.eknews.net/0c1625c6f8a33778bbe5302218d105bc.jpg
평양성 서문인 보통문.
조선 시대에도 평양부의 중심지이자 북방의 주요 요충지로 중요시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 때는 일본군에게 함락되었다가 조•명연합군이 되찾았으며, 1894년 청일전쟁시 또다시 청군과 일본군이 평양부에서 싸웠다. 외성 부분은 농경지로, 중성과 내성 부분은 평양시의 중심지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북성은 평양에 오면 꼭 가보는 유명한 장소가 되었다.

2.8. 북한

6.25 전쟁 초반인 1950년 10월 평양 탈환작전 당시 북한군 일부 병력이 평양성에 들어가 농성을 벌이다 유엔군에게 소탕되었는데 이는 한국사에서 벌어진 마지막 공성전이다.[22] 이후 북한의 국보 제1호로 지정되었으며, 안타깝지만 지금으로서는 남한 사람들은 갈 수 없는 곳이기도 하다. 평양시 문서 참고.

3. 구조

파일:external/contents.nahf.or.kr/map.jpg
도성도

대동강보통강이라는 자연 해자가 둘러쳐져 있고 북쪽에 산을 끼고 있다. 외성, 중성, 내성, 북성으로 나뉘어져 있다. 평양성의 둘레는 17,000m 정도인데 태봉국 철원성이 12,600m, 고려 개경 나성이 23,000m, 조선 서울 한양도성의 둘레가 18,600m이다. 얼추 한양도성과 비슷한 셈.

평양성은 평지성과 산성이 결합된 평산성(平山城)이다. 국내성이나 안학궁 시절처럼 전시에는 평지성을 버리고 산성으로 피난하는 기존의 방식과 차이가 있다. 후대의 개경한양의 경우에도 성벽을 이중으로 하는 나성(羅城)과 도성이 산지로 둘러싸인 평산성 형태가 각각 나타나는데 원(原)모델에 해당하는 평양성은 이중, 삼중의 나성과 평산성 형태를 모두 지니고 있다.

그러나 평산성의 구조가 우주방어급의 완벽함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이는 고려와 조선의 왕들이 외침 시 수도를 버리고 몽진을 간 일을 보면 알 수 있다. 따라서 평양성에서 농성전이 발생한 것은 성의 방어력이 뛰어나서가 아니라 신라와 당나라군이 남과 북 모든 방향에서 공격을 가해 마땅히 피난을 갈 장소가 없었기 때문으로 봐야 한다.

정치적인 이유 또한 빼놓을 수 없다. 고구려고려조선과는 달리 왕권이 그리 강하지 못했기 때문에 왕이 자신의 세력권인 수도를 버리기는 힘든 일이었다. 고구려의 5부 체제가 제9대 고국천왕 이후로는 행정적인 5부로 바뀌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부족적인 색이 강했기 때문에 수도에 심대한 타격이 있을 경우, 왕권 또한 심각한 타격을 받을 수 있었다. 고려도 초기에는 전제왕권이 그리 강하지는 않았으나 제4대 광종 이후로는 제법 호족들을 제압했기 때문에 왕이 피난하더라도 왕권 자체가 흔들릴 일은 그다지 없었다. 그럼에도 제8대 현종은 피난길에 여러 도적 내지는 지방 세력들의 반란을 접했다. 조선의 경우 전제왕권과 관료제가 이미 완성되어 왕이 피난가더라도 별다른 저항은 일어날 수가 없었다.

다만 평양성이 개경과 한양보다는 수성에 유리했던 것이, 둘러싼 지형은 개경이나 한양보다 평탄하지만 자연 해자인 보통강과 대동강의 존재가 있기 때문이었다. 산은 어쨌든 오르거나 포위해서 무력화가 가능하지만 강은 그러기 어려운 천혜의 방벽이다. 비교적 작은 보통강은 몰라도 대동강은 메우거나 하기가 불가능한 크기라, 그쪽에 면한 동쪽과 남쪽은 성벽 길이에 비해 방어측 부담이 적을 수밖에 없다. 그리고 평양성의 경우 임진왜란 때를 비롯해 수도가 아닌 기간에도 역사적으로 농성전이 여러 차례 일어났고, 고구려처럼 수성에 성공하거나 고니시가 협상할 여유를 벌 만큼 오래 버티기도 했었던 걸 보면 평양성의 방어력 또한 상당한 수준이라고 보아야 한다.

즉 평양성에서의 농성전은 단순히 정치적인 이유만이 아니고 평양성 자체로도 상당한 방어력이 갖추었기에 성립한 것이다. 오히려 한양도성 쪽이 농성전 자체가 고려된 적이 없을 정도로 기형적으로 방어능력이 떨어지는 사례라고 볼 수 있다. 다만, 평양성은 어디까지나 평저성으로, 삼년산성처럼 방어에 특화된 요새가 아니었던지라 난공불락급 요새는 아니었기 때문에 역사적 사례들만 봐도 평양성이 함락된 사례는 꽤 많이 나온다.

3.1. 외성

가장 바깥에 있는 성이다. 평양성은 나성(외성)→ 황성(내성) → 궁성(궁궐) 순인 중국 왕조식 도성제를 따른 성이 아니다. 그렇지만 까다로운 당시 기준이 없는 현대엔 내부 성벽을 뺸 평양성의 외성에 전체 바깥 성벽 길이를 합친 외성을 대충 나성으로 본다. 외성엔 총 4개의 문이 있었다.
외성에는 일반인, 즉 평민들이 살았다. 허나 도성 안에 살 정도의 여유를 가진 나름 고위층들이었을 것이다. 지금도 서울에 자기 집 있는 사람들은 그 땅값을 감당할 수 있는 이들뿐이었다. 《삼국사기》 기록엔 고구려-당 전쟁보장왕태대막리지 연남산을 내보내 항복을 요청할 때 98명의 수령'을 같이 내보냈다고 한다. 이들은 귀족인지 알 수 없으나 만일 귀족이 아니라면 외성에 살았을 것이다. 크기는 일반인 거주구역인 외성이 압도적으로 넓을 것 같지만 그렇지는 않고, 귀족 거주구역인 중성보다 좀 넓은 수준이었다. 외성 안엔 천연 해자인 대동강을 충분히 활용한 작은 운하가 외성 시가지를 관통했다. 이 운하를 다루기 위해 수구문들도 있었다고 한다.

외성을 쌓을 때 구간을 나누어 담당자를 정했는데 이를 비석에 기록했다. 발견된 비석엔 566년에 11리 구간을 소형(小兄)[23] 상부(相夫)[24] 약모리(若牟利)가 담당했다고 한다. 569년엔 12리 구간을 물성(物省)[25]의 소형(小兄)이 맡았다고 한다.

이 비석들의 발견으로 이 평양성이 바로 제24대 양원왕이 쌓은 장안성이라는 것이 증명되었다. 《삼국사기》 기록엔 양원왕이 552년부터 장안성을 쌓기 시작해 30년 뒤인 제25대 평원왕이 천도하기 때문.[26]

3.2. 중성

중성에는 귀족의 사택과 정부 관사들이 있었다. 외성보다 조금 작았으며 총 5개의 문이 있었다.
고구려 동부[27], 서부, 남부, 북부, 중앙부 5부의 귀족들이 살았으며 고구려 정부조직의 관사들이 밀집해 있었다.

3.3. 내성

궁궐은 내성에 위치했다. 내성은 왕궁만 있어서 좁을 것 같지만 거의 중성만한 크기이다.
아쉽게도 중성, 내성은 고려, 조선시대에 시가지로 광활하게 사용됐기에 고구려의 흔적을 찾기 힘들다. 이곳에 제25대 평원왕부터 평강공주, 제26대 영양왕, 제27대 영류왕, 대양왕, 제28대 보장왕과 기록되지 않았던 고씨 왕족들이 살았을 것이다. 별궁의 흔적이 남아있다. 안학궁은 남아있는 건물터를 보면 매우 크고 화려했을 것으로 보이는데 평양성 내성의 궁궐도 매우 화려했을 것이다.

3.4. 북성

파일:을밀대.jpg
북성의 을밀대

평양성의 산인 금수산을 감싸는 성이다. 부벽루, 을밀대 등 유명한 누각과 대가 있었으며 조천석, 기린굴 등 유명한 전설 속 장소가 있었다. 영명사가 이 북성 밑에 있었다.

4. 전투 목록

4.1. 평양성 전투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평양 전투 문서
번 문단을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5. 또 다른 고구려의 평양성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에는 본 문서가 설명하는 고구려의 세 번째 수도인 평양성 외에도 또 다른 평양성이 등장한다. 첫 번째는 동천왕 21년(247년)의 삼국사기 기록으로, 비류수 전투의 여파로 환도성까지 개털이 되었기 때문에 도읍으로 삼을 수 없어 이에 평양성을 쌓고 백성과 묘사(廟社)를 옮겼다는 기록이다. 이 기록에는 선인 왕검(仙人 王儉)의 택(宅)이라하며 또 전하기를 왕의 도는 왕검이다라고 한다는 주가 달려있다. 또 다른 하나는 고국원왕 13년(343년)의 삼국사기 기록으로 평양 동황성(平讓東黃城)으로 이거(移居)하였다는 기록으로 서경의 동쪽 목멱산이다라는 주가 달려 있다.

두 기록 모두 비교적 단발적인 기록인데다 상응하는 성곽 유적들의 발굴조사가 미진하기 때문에 이렇다할 정설이 없다. 247년, 343년의 두 평양성 모두 여러 설들이 있지만 크게 구분하자면 본 문서에서 설명하는 진짜 평양 일대(또는 그 인근)로 천도를 했다는 측과 그렇지 않은 측으로 구분할 수 있다. 전체적으로는 진정한 천도가 이루어진 건 아니라보는 견해가 많은데, 진짜 평양으로 천도하였다고 했을때 각 동천왕, 고국원왕의 정세와는 너무 동떨어진 기록이기 때문. 또 실제로 천도하였다고 하더라도 일시적 거처의 이동 정도라고 이해된다. 물론 동천왕 대의 평양성은 몰라도 고국원왕 대의 평양 동황성은 백제본기 기록을 참고해 보면 진짜 평양에 있었던 성일 가능성이 높다.

문헌기록이 단발적이기도 하지만 성곽 유적들도 그 후보들이 마땅치 않은 것 역시 문제점이다. 동천왕대를 위시한 3세기 이전이라고 말할만한 성곽 유적들은 대부분 발굴조사가 미진하기 때문에 이 평양성은 커녕 국내 천도 이후 줄곧 언급되는 환도성과 국내성과 실제 국내천도 및 축성시기와 비정에 대해서도 각론들이 펼쳐진 상황이다. 고국원왕대는 그나마 실제 평양으로 천도했을 일말의 가능성이 있음에도, 청암리 토성이나 평양일대의 토성들이라고해서 조사가 잘 이뤄진 것이 아니기 때문에 비정된 성곽 본연의 고고학적 정보가 문헌기록에 대한 보충이 사실상 이뤄지지 않고 있다.

6.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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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의 도성 및 궁궐
고조선 고구려 고려 조선 대한제국
왕검성 대성산성 안학궁 장안성 구제궁 장락궁 좌우궁궐 대화궁 용덕궁 평양행궁 풍경궁


[1] 이는 경주 월성명활산성을 구축한 신라, 몽촌토성, 풍납토성을 구축했던 한성 시기 백제도 마찬가지였다.[2] 북한 학계에서는 낙랑국의 유적으로 보고 있다.[3] 단, '낙랑군이 있던 곳=왕검성'은 아니기 때문에 왕검성을 평양성 부근으로 비정하는 것은 유력한 학설이라기 보다는 그럴거라고 추정하는 수준에서 그치고 있다. 낙랑군이 평양에 있었다는 것은 사료와 고고학적으로 검증이 되지만, 왕검성이 평양에 있었다는 것은 아직까지 명확하게 입증되지 않았다.[4] 국내성은 평지성, 국내성과 연결된 환도성은 산성.[5] 국내성이 있던 지안 땅은 신라의 수도가 있던 경주 분지의 반의 반도 안 되는 협소한 분지다.[6] 《삼국사기》에는 재위 2년째 되는 해에 평양에 사찰 9개를 지었다고 했으며, 재위 14년차때는 평양으로 대대적인 사민정책을 추진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7] 광개토대왕이 일군 9개의 사찰 중 하나인 영명사는 구제궁이라 불리며 고려시대까지 이어졌다.[8] 《중국 학계의 고구려 도성 연구와 전망》, 박시현 저.[9] 국내에선 노태돈에 의해 주장되기도 했다[10] 원래는 '수도(Capital City)'를 가리키는 보통명사였던 '서울'이 현재의 서울특별시에 위치한 조선의 한성부(한양)를 가리켜 부르는 고유명사로 굳어진 것처럼.[11] 해당 기사에서 위나암성이 암석 한가운데 있고 그 안에는 물이 나오는 샘이 있다고 을두지가 발언하는데, 해당 묘사와 부합하는 성은 흔히 고구려의 첫 수도인 졸본성으로 비정되는 오녀산성이다.[12] 지금의 중화인민공화국 요녕성 단동시 동북쪽의 봉황산성으로 비정된다. 고구려에서는 이 성을 오골성이라고도 불렀다.[13] 다만, 박지원과 같은 실학자들이 활동하던 시기만해도 전근대라는 시대 특성상 현대적인 의미의 고고학이 발달하지 않았던 것을 감안해야 한다. 게다가, 상술한 《수경주》를 비롯한 중국 사서들의 언급의 경우, 동시대 고구려에 관한 기록들이므로 1000여년 후 사람인 박지원의 추론보다는 신뢰성이 높을 가능성이 있다. 열하일기 도강록의 내용도 박지원 개인의 견해인 것을 감안하자.[14] 봉천부(奉天府)에 있다[15] 조선 세조(世祖) 때의 학자[16] 원(元)의 토크토가 편찬했다.[17] 고려를 가리킨다.[18] 《삼국사기》엔 내전의 기록이 없다. 《일본서기》가 인용한 《백제기》 기록.[19] 신라의 경우 나당전쟁 이후에도 개성 이북의 패서 지역에 대한 수복 과정이 굉장히 느리게 진행되었는데, 이는 신라가 승전 이후에도 당나라의 눈치를 보았기 때문이다. 신라가 당나라로부터 확약받은 개성과 황해도 일대도 이러한데 대동강 이북에 위치해 신라가 확약받지 못한 평양 수복은 더욱 눈치가 보였을 수 있다. 발해 역시 기록의 부재로 정확한 내부 사정을 알긴 어렵지만 국호 선정부터 당나라의 눈치를 보아 일본을 제외하면 주변 나라에 '고려'를 칭하지 못했고, 당나라와 비교적 가까운 서북한과 요동 일대에 강력한 행정을 관철하는 대신 당나라와 거리가 먼 동만주~연해주 일대에 중심을 둔 만큼 당나라의 눈치를 보았음이 명백하다.[20] 성, 마을 등 옛 터를 이른다.[21] 본인 또한 고구려계 패서 호족 출신이라는 것이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22] 남한 지역에서의 마지막 공성전은 1950년 7월 국군이 남하하는 북한군을 지연시키기 위해 수원화성에서 벌인 공성전이다.[23] 고구려의 관등.[24] 고구려의 관직으로 추정이 된다.[25] 역시 고구려의 관직이거나 정부 부서로 보인다.[26] 고려 개경 나성이 완성되는데 21년이 걸린걸 보면 얼추 기간이 맞다.[27] 유명한 막리지 연개소문이 동부 출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