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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13 02:38:40

비류수 전투

고구려의 대외 전쟁·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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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류수 전투
沸流水戰鬪
Goguryeo–Wei War
파일:attachment/서안평전투.gif
<colbgcolor=#C00D45,#600823><colcolor=white> 시기 244년 (동천왕 18년) 8월[1]
장소 고구려, 비류수[2]
원인 동연 멸망 이후, 고구려의 관계 악화
고구려 동천왕의 서안평 공격
교전 세력
(공세)
고구려
(수세)
주요 인물[3]
지휘관

[[위(삼국시대)|
]] 관구검 (유주자사)
지휘관

파일:고구려 군기.svg 동천왕 (고구려 국왕)
참가자

[[위(삼국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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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삼국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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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가자

파일:고구려 군기.svg 명림어수[5] (국상)
파일:고구려 군기.svg 득래 (패자)
파일:고구려 군기.svg 밀우
파일:고구려 군기.svg 유옥구
파일:고구려 군기.svg 유유
병력 위군: 10,000명 (보ㆍ기병) 고구려군: 25,000명
- 보병ㆍ기병: 20,000명
- 철갑기병: 5,000명
피해 사상자: 6,000명 ↑ 사상자: 18,000명 ↑
결과 위의 승리
영향 * 전시 수도 환도성 함락
* 동천왕의 옥저 몽진

1. 개요2. 배경3. 발발 및 전개4. 결과5. 기타6. 관련 기록
6.1. 한국 측 기록6.2. 중국 측 기록
7. 대중매체8. 관련 문서9. 외부 링크

[clearfix]

1. 개요

244년, 고구려의 제11대 동천왕조위의 장수 관구검에게 대패한 전투. 수도인 국내성이 함락되고, 왕이 북옥저로 피신해야 했을 정도로 고구려 역사를 통틀어 최악의 패배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2. 배경

제10대 산상왕의 뒤를 이어 즉위한 동천왕은 치세 초기에는 위나라와 우호관계를 유지했다. 233년 3월, 오나라손권요동을 지배하던 공손씨 정권에게 사절단 400명을 보내 동맹을 맺으려고 했다. 그러나 공손연은 손권을 배신하고 총책임자 장미허안을 처형한 뒤, 사신들을 잡아 요동 각지에 분산시켜 가둬버렸다. 이때 현도군 지역에 감금되어 있던 사신들 중 진단과 황강(黃疆)[6]이 탈출하여 도망친 끝에 고구려까지 왔는데, 그들은 "폐하께서 고구려에게 줄 선물을 준비했는데, 요동의 공손연이란 놈이 선물을 빼앗아서 빈손으로 왔습니다."라고 거짓으로 전하였다.

이에 동천왕은 사신들을 잘 대접하고 검은담비 가죽 1,000장과 멧닭 가죽 10장, 호위무사인 조의(皁衣) 25명을 딸려서 오나라로 도로 보내주었다.[7] 죽은 줄 알았던 사신들이 천신만고 끝에 돌아오자, 손권은 슬프면서도 기뻐하며 동연 대신에 고구려와 동맹을 맺기로 하고 235년, 다시 고구려에 사신 사굉(謝宏), 중서(中書), 진순(陳恂) 등을 보냈다. 우연한 계기로 고구려와 교섭하게 되었던 지난번과 달리, 각종 옷감과 보배를 사여하고 동천왕선우에 책봉하는 등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서안평에 정박한 이들은 교위 진봉(陳奉)을 국내성에 파견해 동천왕을 직접 알현하도록 했는데, 이 과정에서 위나라 유주자사가 고구려에 보낸 "오나라 사신을 붙잡아 공을 세우라"는 교지를 우연히 염탐하게 되었다. 위나라와 고구려 양국 간의 교섭이 있었음을 알게 된 진봉은 서안평으로 황급히 돌아가 사굉 일행에게 첩보 내용을 보고했고, 이를 눈치챈 동천왕주부 착자(笮咨)와 대고(帶固) 등 수십 명의 관리들을 오나라 사절단에게 보내 해명하도록 했다. 그러나 사굉은 고구려에게 배신감을 느꼈는지, 그 자리에서 갑자기 고구려 관리 30여 명을 사로잡아 밧줄로 묶고 인질로 삼았다.

당황한 동천왕은 다시 사람을 보내 마지못해 사죄의 뜻을 전하며 군마 수백 필을 바쳤다. 사굉은 그제서야 관리들을 풀어주고는, 그들로 하여금 오나라의 조서와 사여품을 사절단을 대신하여 동천왕에게 전달하도록 했다. 더욱 가관이었던 것은, 오나라의 사절단이 돌아갈 때 선박의 크기가 너무 작은 탓에 동천왕에게 받은 말들 중 고작 80필밖에 가져가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그렇게 오나라고구려의 공식적인 첫 번째 교섭은 도발적 행각과 크고 작은 해프닝 끝에 외교적 실패로서 씁쓸하게 마무리되었다.

이렇듯 손권이 눈치없게 동연과 고구려에게 계속 교섭을 시도하자, 위나라도 자극을 받아 동북방 요동 지역이 전략적으로 큰 위협이 될 수 있다고 인지하게 되었다.[8] 때문에 고구려는 오나라보다 세력이 강했던 위나라로부터 조금씩 압박을 받고 있던 상황이었다. 안 그래도 충돌이 잦았던 공손연을 견제하기 위해 조위와 가까워져야 했던 고구려는 아예 친위 노선으로 갈아타 234년에 위나라와 화친 관계를 맺었고, 236년 7월에는 손권이 동년 2월에 보냈던 사신 호위(胡衛) 등을 처형하여 그 목을 유주에 보냄으로써 위나라에 충성을 맹세했다.

또한 238년에는 위나라가 사마의[9]를 보내 요동의 동연을 토벌하자 주부(主簿)와 대가(大加) 및 군사 1,000여 명을 보내 위나라를 도왔다.[10] 그해 8월 공손연은 아들 공손수와 함께 참수되었고, 그 밑에서 일했던 관원과 장군 2,000명 및 15세 이상 남자 7,000명이 싸그리 참살당하며[11] 동연은 완전히 와해되었다. 이때까지 위나라와의 화친 관계는 위나라를 정탐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완충 지대로 작용하던 동연이 망하자 고구려는 위나라와 직접 국경을 맞대게 되었고, 두 나라의 관계는 험악하게 변했다. 고구려는 공손연 토벌을 도와주고도 위나라에게서 그 어떠한 보상도 받지 못했다. 당장 장수 사마의조차 고구려한테 의례적인 감사 인사를 표하지도 않았다. 당연히 같이 피 흘리고 얻은 게 없었던 고구려 국내의 정치 불안은 심화되었고, 동천왕 역시 위나라한테 불만을 가졌다. 전성기를 누리던 위나라 측에서도 요동뿐만 아니라 한반도 북부 일대까지 세력권을 확장하려는 야욕을 점차 드러내기 시작하며 양국 간의 갈등은 더욱 고조되었다.

3. 발발 및 전개

王遣將襲破遼東西安平.
왕께서 장수를 보내시어 요동 서안평(西安平)을 쳐서 깨뜨렸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동천왕 16년(242년)
242년, 고구려는 위나라 요동의 서안평[12]을 기습 공격하여 점령하였다. 이때 패자의 벼슬을 지내던 고구려의 관리 득래(得來)는 단식투쟁까지 하면서 동천왕에게 전쟁을 일으켜서는 안 된다고 수 차례 간언하였는데, 동천왕이 습격을 강행하자 "이 땅이 곧 쑥대밭이 되겠구나."라는 말을 남기고는 그대로 굶어 죽었다고 전한다.[13] 하여간 이로 인해 244년[14] 8월 유주자사 관구검이 오환족선비족을 동원해 고구려를 침공했다.

비록 전성기를 누리던 막강한 위나라의 군대였으나, 당시 상황으로는 여러모로 고구려가 유리한 상황이었다. 관구검의 침공 바로 직전인 244년 초, 위나라가 촉한을 대대적으로 침공했다가 흥세 전투에서 굴욕적인 패배를 겪었기 때문이다. 당시 위나라 최대의 척신인 조상사마의와의 권력 투쟁이 절정에 달하는 등 정치적 위기[15]에 몰리자 패전을 만회하고 분위기를 반전시키고자 했다. 위나라의 고구려 공격에는 이 같은 배경이 있었기 때문에 위군의 위력 역시 평소보다는 덜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동천왕은 위군의 2배인 20,000명의 보병과 기병을 동원했고, 자국에서 벌어지는 전투였으므로 지형적 이점을 활용할 수도 있었다. 과연 고구려군은 비류수 위에서 싸워 위군을 격파했는데, 베어버린 머리가 무려 3,000여 급(級)이나 되었다. 양맥(梁貊)의 골짜기에서도 싸워 또다시 격파했는데, 목을 베거나 사로잡은 것이 3,000여 명이었다. 전사자와 포로만 6,000여 명에 달하는 엄청난 피해를 위군에게 입힌 것이다. 이런 엄청난 대승에 고무된 동천왕은 자신감이 흘러넘쳐 다음과 같은 말을 한다.
魏之大兵, 反不如我之小兵, 毋丘儉者, 魏之名將, 今日命在我掌握之中乎.
위의 대병력이 도리어 우리의 적은 병력보다 못하고, 관구검이란 자는 위나라의 명장이지만 오늘은 그의 목숨이 내 손 안에 있구나!
이렇게 신이 난 동천왕은 철갑기병 5,000기를 거느리고 나아가 마지막 남아있던 위나라 군을 격퇴하러 진격했다. 그러자 관구검은 이번에는 보병 방진을 쳐서 고구려군의 기세를 꺾고, 그 틈을 노려 결사적으로 싸워 고구려 기병을 대파했다. 여기서 잘 짜여진 보병방진의 대기병 위력을 볼 수 있다. 이때 위나라군은 만 명 중 60%가 전사한 전멸에 가까운 상황의 보병 4천뿐이었는데, 고구려군은 철갑기병만 5천명의 총 병력 20,000명 중 무려 18,000여 명이 전사하는 참패를 당했다. 동천왕은 겨우 1,000여 명의 병사와 처자식을 이끌고 옥저로 달아나야 했다.

4. 결과

이 전투에서의 대패로 고구려는 위태로운 상황에 놓였다. 병력 차이가 2배나 컸음에도 불구하고 고구려는 무려 90%의 병사가 죽었으니, 말 그대로 전멸한 것과 다름없는 셈이다. 심지어 이게 왕이 친정한 전투라는 점을 고려하면 이때 잃은 병사 대부분이 정예병이었을 가능성이 높아서 실제 타격은 더 컸을 것이다. 애석하게도 고구려는 이 전투에서만 피해를 입은 것이 아니었다.

고구려군은 제대로 수습도 못하고 도망다니기 바빠서 10월에는 도읍인 환도성이 함락되었고, 도성 안에 있던 사람들 중 10,000명 가까이 되는 인원이 학살당하는 비극을 겪었다. 이후 245년, 관구검의 명령으로 현도태수 왕기(王頎)가 고구려 전역을 맡아 옥저로 도망가는 동천왕을 끈질기게 추격했다.[16] 동천왕은 위군에게 추격당하는 내내 쫓기면서도 246년에 이르러서야 겨우겨우 패잔병을 수습하고, 밀우[17]유유[18], 유옥구[19]의 활약으로 왕기의 선봉장을 죽이며 기습을 감행, 추격해온 위군을 물리쳤으며 첫 승전 이후 각지의 병력을 최대한 모아 환도성에 주둔한 왕기의 위군을 패퇴시켜 고구려를 지켰다.

최종적으로는 전쟁에서 이기긴 했으나 이후 고구려는 도저히 승전국으로 볼 상황이 아니었다. 상술했듯 비류수 전투 한방에 엄청난 수의 정예 병사 중 태반이 전사했고, 환도성과 국내성[20][21]은 관구검이 제대로 박살내고 가서 도저히 수습할 만한 상황이 아니라 247년 2월 평양성으로 천도해야 했다.[22] 기록상 국내성 재천도가 제12대 중천왕 재임 이후인 것을 보면 수복 자체도 상당히 오래 걸렸다.

비류수 전투 때부터 여러모로 이상한 싸움이었는데, 상술했듯 기록에 따르면 이 둘의 병력은 20,000명 대 10,000명, 그것도 위나라가 10,000명이라 단순계산이면 고구려 측이 2대 1로 싸우는 격이었다. 심지어 아무리 그래도 일개 장수의 군대를 상대하는데 왕 본인이 나설 정도면 그 20,000명도 대부분 상술한 대로 친위대 같은 정예병으로 구성되어 있었을 텐데, 냉병기로만 이루어지는 고대 싸움에서 이 정도의 경이적인 살상률이 나온 것이다. 물론 양측 간 차이의 여러 가지 변수가 있기도 했고[23] 이 당시 위나라가 한창 중국을 정리해 가면서 내외로 힘을 떨치던 시기임을 고려하면 아예 못 봐주는 것도 아니지만.

다만 동천왕 본인이 "위의 큰 병력이 도리어 우리의 적은 병력보다 못하다"라고 언급했다는 점, 고구려의 호수나 당시 국력을 생각하면 20,000명을 동원했다는 기록 자체가 위나라 측에 의해 과장되었을 가능성도 충분하다. 철기가 포함된 고구려의 병력이 수적으로도 위나라 군대보다 훨씬 적었을 수 있다는 추측이다.

어쨌든 제일 큰 문제는 전투에 대패했고 수도를 포함한 대부분의 국토가 쑥대밭이 되었다는 것이다. 한국사에서의 주요 패전으로 손꼽히는 칠천량 해전이나 현리 전투 등은 나라 전체를 초토화시킬 만한 파급력이 없었던 반면, 이 싸움은 수도 함락은 물론 전 국토가 쑥대밭이 되었다. 동천왕 본인도 무리해서까지 수도를 포함한 대위 방면 군사를 싸그리 끌어모아 왔을 가능성이 높고, 결국 이 참패로 위나라 방면을 수비할 군대가 죄다 날아가면서 그대로 도망자 신세가 된 셈이다. 그나마 제16대 고국원왕전연에 패배한 후의 상황과 유사하다 생각하면 그보다 더 과거인 이때를 이해하지 못할 상황은 아니다.

사실 고구려가 현대 한국인들에게 익숙한 동북아시아의 군사 강국으로 올라선 건 이보다 한참 뒤의 일이었고, 이 당시 고구려는 압록강 유역과 동해안 일부만을 차지하여[24] 생각보다 규모가 작았던 시절이다. 고구려와 격전을 벌인 삼국시대의 위나라는 조사된 인구만 해도 663,423호 4,432,881명으로 동원한 병력이 인구의 1%도 채 되지 않았으나, 고구려의 당시 인구는 30,000호[25]에 불과했기에 동천왕은 전체 인구의 10%가 넘는 대규모 병력을 동원한 셈이다. 이렇듯 나라의 존망을 걸고 전국에서 탈탈 긁어모은 군대를 전투 한 번에 날려먹었으니, 이후 위군에게 맥없이 밀리며 국가가 초토화된 것도 납득 가능한 수준이다.

여담으로 고구려 원정에서 승전한 관구검은 전공을 새긴 비석을 환도산에 세웠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 〈관구검 기공비〉는 땅 속에 묻혀있다가 1906년 길림성 집안현 환도산성 서북쪽 판석령(板石嶺) 부근에서 도로 공사 중 일부 파편으로 발굴되었다. 비석의 내용은 본 문서의 '관련 기록' 문단에도 기재되어 있으며, 비록 소략하나 기존 사서들의 기록과 크게 상충되는 부분이 없어 교차검증 수단의 일환으로 작용하고 있다.[26]

한편 이 전투의 승전국 위나라는 이 전쟁으로 남진을 노리던 고구려의 기세를 꺾고, 그동안 고구려에 복속되어 있던 옥저동예에 간접 지배 수준의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되었다. 이윽고 고구려를 상대하느라 분산되어 있었던 한군현의 역량을 당시 대방군과 갈등을 빚던 마한 세력에 투자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마한이 고구려보다 약체임에도 위나라는 기리영 전투에서 이전만큼 압승하지 못했다. 위나라가 마한을 만만하게 보고 병력을 상대적으로 덜 동원한 것도 원인이지만, 고구려의 참패에 국력 차이보다는 동천왕의 전술적 실수로 인한 우발적 요인이 더 크게 작용했음 또한 무시할 수 없다. 비록 때문에 한군현이 향후 마한 내부 사정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지는 못하게 되었으나, 마한 북부의 강국인 신분고국을 멸망시킴으로써 그 일대[27]의 마한 소국들을 놓고 목지국과 벌어진 관할 다툼에서 위나라의 입장을 관철하는 데 성공했다. 한군현과 진한의 직교역 경로 역시 위나라의 계획대로 개통되어 이후 서진 시기까지 유지되었다.[28]

신분고국 몰락 후 근방에 있던 백제국이 강성해짐에 따라 위나라에 붙은 마한 소국들이 결국 흡수당하고 말지만, 이는 30년에 걸쳐 비교적 천천히 진행된 과정이었다. 백제국이 목지국과 그 지지 세력 타격에 우선 순위를 뒀기도 했으나, 백제국 또한 기리영 전투를 염두에 두면서 어느 정도 중국의 눈치를 본 정황이 강하다.[29]

상술했듯 촉한과의 흥세 전투에서 쓴맛을 본 조상 정권은 고구려 정벌을 통해 흔들리는 조정 내 패권을 바로잡고자 했으며, 실제로 위나라는 이 전투와 뒤이은 기리영 전투를 통해 간접 세력권을 확장하고 진한과의 무역로를 회복했다. 물론 흥세 전투에서 당한 참패가 워낙 심각했기에 한반도에서 거둔 승전들로 그걸 온전히 만회할 수는 없었으나, 이는 분명코 말해 동한이 혼란해져 낙랑군의 삼한, 동예, 옥저에 대한 영향력이 크게 후퇴했던 상황을 회복한 것을 넘어 거의 서한 시기 낙랑군 최전성기에 거의 가까운 영향력에 도달한 것이었다. 게다가 두 한나라 당시에는 중원 당국이 마한 체면을 생각해서 마한의 우위를 인정하였으나 이 시기 위-서진은 진한을 마한과 거의 대등하게 대우했기에 적어도 한반도 방면에서는 결코 적다고 할 수 없는 성과였으니, 흥세 전투로 크게 위신이 손상된 조상 정권이 이 성과로 어깨를 펼 수 있었을 개연성은 높다. 이는 향후 중국 왕조들의 대(對)삼한 정책에 있어 중요한 전환점이 된 것에서도 드러난다.[30]

또 하나 대단히 주목해볼만한 사실은, 고구려가 이 전투에서 패배하면서 두만강 유역 및 함경북도 일대의 통제를 잠깐 잃어버렸는데 고고학적으로는 그 시기에 퉁구스계 부족들이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치고들어와 부여인 및 옥저인이 정착해 살고 있던 두만강 유역에 뿌리를 내려, 현지인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백산말갈을 형성한 걸로 나타난다. 물론 많은 오해와는 달리 이 퉁구스계 부족들은 속말말갈 지역과는 달리 워낙 소수라서 그랬는지 수렵 채집적 특성을 거의 잃으면서 예맥화되었고, 고구려 또한 불과 수십 년 안에는 통제를 회복하여 그 일대를 도로 예맥화한 건 물론 정체성을 완전히 고구려인화하였기에 백산말갈이야말로 다른 말갈 부족과는 확연히 다른 이른바 '예맥말갈'이었음이 확실한 부류다. 하지만 백산인으로서 고구려 내부에서는 정체성이 어느 정도 있었던 것으로 보이기에 의미가 없다고는 할 수 없다. 이로부터 수백 후에도 퉁구스계인 여진인들이 고구려보다 훨씬 강력한 통제력을 갖고 있었던 조선 왕조의 두만강 일대, 함경북도 일대에 꾸준히 정착을 시도했음도 눈여겨볼 부분이다.

5. 기타

6. 관련 기록

6.1. 한국 측 기록

二十年, 秋八月, 魏遣幽州刺史毋丘儉, 將萬人, 出玄菟來侵. 王將歩騎二萬人, 逆戰於沸流水上, 敗之, 斬首三千餘級. 又引兵再戰於梁貊之谷, 又敗之, 斬獲三千餘人. 王謂諸將曰, "魏之大兵, 反不如我之小兵, 毋丘儉者, 魏之名將, 今日命在我掌握之中乎." 乃領鐵騎五千, 進而擊之, 儉爲方陣, 決死而戰, 我軍大潰, 死者一萬八千餘人. 王以一千餘騎, 奔鴨淥原.
동천왕 20년(246년) 가을 8월에 위나라가 유주자사 관구검을 보내 10,000명을 거느리고 현도로부터 침략해왔다. 이 보병과 기병 20,000명을 거느리고 비류수(沸流水)에서 싸워 패배시키니 베어버린 머리가 3,000여 급(級)이었다. 또 병력을 이끌고 다시 양맥(梁貊)의 골짜기에서 싸워 또 패배시켰는데 목을 베거나 사로잡은 것이 3,000여 명이었다. 왕이 여러 장수들에게 말하기를, "위의 대병력이 도리어 우리의 적은 병력보다 못하고, 관구검이란 자는 위의 명장이나 오늘은 그의 목숨이 내 손 안에 있구나."라고 하고, 철갑기병 5,000명을 거느리고 나아가 공격하였다. 관구검이 방진(方陣)을 치고 결사적으로 싸우므로 우리 군사가 크게 궤멸하여 죽은 자가 18,000여 명이었다. 왕이 기병 1,000여 기(騎)를 거느리고 압록원(鴨淥原)으로 달아났다.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 동천왕 20년(246년) 8월조

秋八月, 魏幽州刺史毋丘儉與樂浪大守劉茂·朔方大守王遵, 伐高句麗. 王乘虛, 遣左將眞忠, 襲取樂浪邊民, 茂聞之怒. 王恐見侵討, 還其民口.
가을 8월에 위나라 유주자사 관구검낙랑태수 유무, 삭방태수 왕준과 함께 고구려를 쳤다. 왕이 빈틈을 타서 좌장(左將) 진충(眞忠)을 보내 낙랑의 변경 주민을 습격하여 빼앗으니 유무가 듣고 노하였다. 왕이 침략당할 것을 염려하여 그 주민들을 돌려주었다.
삼국사기》 〈백제 본기〉 고이왕 13년(246년) 8월조

冬十月, 儉攻䧟丸都城, 屠之, 乃遣將軍王頎追王. 王奔南沃沮, 至于竹嶺, 軍士分散殆盡, 唯東部密友獨在側, 謂王曰, "今追兵甚迫, 勢不可脫. 臣請決死而禦之, 王可遯矣." 遂募死士, 與之赴敵力戰. 王間行脫而去, 依山谷聚散卒自衞, 謂曰, "若有能取密友者, 厚賞之." 下部劉屋句前對曰, “臣試往焉.” 遂於戰地, 見密友伏地, 乃負而至. 王枕之以股, 久而乃蘇.
겨울 10월에 관구검환도성을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성 안을 도륙하였으며 장군 왕기를 보내 왕을 추격하였다. 왕이 남옥저로 달아나 죽령(竹嶺)에 이르렀는데, 군사들은 흩어져 거의 다 없어지고, 오직 동부(東部)의 밀우만이 홀로 옆을 지키고 있다가 왕에게 말하기를, "지금 추격해오는 적병이 가까이 닥쳐오니, 이 형세를 벗어날 수 없습니다. 청컨대 신이 결사적으로 막을 것이니 왕께서는 달아나소서."라고 하였다. 마침내 결사대를 모아 그들과 함께 적진으로 가서 힘껏 싸웠다. 왕이 샛길로 달아나 산골짜기에 의지하여 흩어진 군졸을 모아 스스로 방비하면서 말하기를, "밀우를 데려오는 사람에게는 후하게 상을 주겠다."라고 하였다. 하부(下部)의 유옥구가 앞으로 나아가 대답하여 말하기를, "신이 가보겠습니다."라고 하였다. 마침내 전투가 벌어진 곳에 밀우가 땅에 쓰러져 있는 것을 발견하고 곧 업고 돌아왔다. 왕이 그를 무릎에 눕혔더니 한참 만에 깨어났다.

王間行轉輾, 至南沃沮, 魏軍追不止. 王計窮勢屈, 不知所爲, 東部人紐由進曰, "勢甚危迫, 不可徒死. 臣有愚計, 請以飮食牲犒魏軍, 因伺隙, 刺殺彼將. 若臣計得成, 則王可奮擊, 決勝矣." 王曰, "諾."
왕이 샛길로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남옥저에 이르렀으나 위군(魏軍)은 추격을 멈추지 않았다. 왕이 계책이 궁하고 기세가 꺾이어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는데, 동부 사람 유유가 나서서 말하기를, "형세가 매우 위태롭고 급박하나 헛되이 죽을 수는 없습니다. 신에게 어리석은 계략이 있습니다. 청컨대 음식을 가지고 가서 위나라 군사에게 대접하면서 틈을 엿보아 저들의 장수를 찔러 죽이겠습니다. 만일 신의 계략이 성공하면, 왕께서는 힘껏 공격하여 반드시 승리를 거두소서."라고 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그렇게 하겠다."라고 하였다.

紐由入魏軍詐降曰, "寡君獲罪於大國, 逃至海濱, 措躬無地, 將以請降於陣前, 歸死司寇, 先遣小臣, 致不腆之物, 爲從者羞." 魏將聞之, 將受其降. 紐由隱刀食器, 進前拔刀, 刺魏將胷, 與之俱死, 魏軍遂亂. 王分軍爲三道, 急擊之, 魏軍擾亂, 不能陳, 遂自樂浪而退.
유유가 위군에 들어가 거짓으로 항복하여 말하기를, "우리 임금큰 나라에 죄를 짓고 달아나 바닷가에 이르렀으나 몸 둘 곳이 없습니다. 장차 귀국 진영 앞에서 항복을 청하고 죽음을 사구(司寇)에게 맡기려 하는데, 먼저 소신(小臣)을 보내 변변치 못한 물건이라도 드려 군졸들의 음식거리나 되고자 합니다."라고 하였다. 위나라의 장수가 이 말을 듣고 그 항복을 받으려 하였다. 유유가 식기에 칼을 감추고 앞으로 나아가 칼을 빼서 위나라 장수의 가슴을 찌르고 그와 함께 죽으니, 위군이 마침내 혼란해졌다. 왕이 군사를 세 길로 나누어 빠르게 이들을 공격하니, 위군이 어지러워져서 싸우지 못하고 드디어 낙랑에서 퇴각하였다.

王復國論功, 以密友·紐由爲第一. 賜密友巨谷·靑木谷, 賜屋句鴨淥·杜訥河原, 以爲食邑. 追贈紐由爲九使者, 又以其子多優爲大使者. 是役也, 魏將到肅愼南界, 刻石紀㓛, 又到丸都山, 銘不耐城而歸.
왕이 나라를 회복하고 공을 논하는데, 밀우유유를 으뜸으로 삼았다. 밀우에게 거곡(巨谷)과 청목곡(靑木谷)을 주고, 유옥구에게 압록원(鴨淥原)과 두눌하원(杜訥河原)을 주어 식읍으로 삼게 했다. 유유를 추증하여 구사자(九使者)로 삼고, 그의 아들 다우(多優)를 대사자(大使者)로 삼았다. 이 싸움에서 위나라의 장수가 숙신의 남쪽 경계에 이르러 그 공을 돌에 새기고, 또 환도산(丸都山)에 이르러 불내성(不耐城)을 새기고 돌아갔다.

初其臣得來, 見王侵叛中國, 數諫, 王不從. 得來嘆曰, "立見此地, 將生蓬蒿." 遂不食而死. 毋丘儉令諸軍, 不壞其墓, 不伐其樹, 得其妻子, 皆放遣之. 括地志云, "不耐城即國內城也. 城累石爲之." 此即丸都山與國內城相接. 梁書以, "司馬懿討公孫淵, 王遣將襲西安平, 毋丘儉來侵." 通鑑以, "得來諫王, 爲王位宮時事." 誤也.
처음에 신하 득래(得來)는 왕이 중국을 침략하고 배반하는 것을 보고 여러 차례 간언하였으나 왕이 따르지 않았다. 득래가 탄식하며 말하기를, "이 땅이 (폐허가 되어) 장차 쑥이 자라나는 꼴을 보겠구나."라고 하고 마침내 음식을 먹지 않고 죽었다. 관구검이 모든 군사들에게 명령하여 그의 무덤을 허물지 말고, 주변의 나무를 베지 못하게 하였으며, 그의 처와 자식을 포로로 잡았으나 모두 놓아서 보내주었다. 《괄지지(括地志)》에는 "불내성이 곧 국내성이다. 성을 돌로 쌓아 만들었다."라고 하였다. 이런즉 환도산과 국내성이 서로 가까이 접하였을 것이다. 《양서》에는 "사마의가 공손연을 토벌하자 왕이 장수를 보내 서안평(西安平)을 습격하였는데 관구검이 침략해왔다."라고 하였다. 《자치통감》에는 "득래가 왕에게 시정을 건의한 것은 왕 위궁(位宮) 때의 일이다."라고 하였는데, 이는 잘못이다.[31]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 동천왕 20년(246년) 10월조

6.2. 중국 측 기록

正始三年, 高句驪反. ... 督七牙門, 討句驪. 五年 ... 無復遺寇. 六年五月旋. 討寇將軍 魏烏丸單于 ... 威寇將軍 都亭侯 ... 行裨將軍 領玄(菟太守) ... ▨裨將軍...
정시 3년(242년), 고구려가 반란을 일으켰다.[32] ... 7개의 병영을 통솔하여 구려를 토벌하였다. 정시 5년(244년), ... 남은 적이 없게 하였다. 정시 6년(245년) 5월에 개선하였다. 토구장군(討寇將軍)인 위나라오환선우 (구루돈), … 위구장군(威寇將軍)인 도정후(都亭侯), … 행비장군(行裨將軍)인 영현도태수(領玄菟太守) (왕기), … ▨비장군(▨裨將軍) ... (등이 참전하였다.)
관구검 기공비〉

正始三年, 宮寇西安平, 其五年, 爲幽州刺史毌丘儉所破. 語在儉傳. 【儉傳, 正始中, 儉督諸軍, 討高句驪. 六年, 復征之. 齊王紀, 七年, 儉討高句驪, 破之. 蓋用兵數年, 此傳記其始, 齊王紀記其終也.】
정시 3년(242년) (宮)이 서안평(西安平)을 침범하였고, 정시 5년(244년)에 유주자사(幽州刺史) 관구검(毌丘儉)에 의해 격파되었다. 그 때의 사실은 관구검의 열전에 실려 있다. 【관구검전에서는 정시(240~248) 연간에 관구검이 제군을 지휘해 고구려를 치고 정시 6년(245년)에 다시 쳤다고 하였다. 제왕기(齊王紀)에서는 정시 7년(246년)에 관구검이 고구려를 쳐서 격파했다고 하였다. 아마도 용병술에 수 년이 걸려 고구려전은 그 시작을, 제왕기는 그 끝을 기록한 것으로 보인다.】
삼국지》 〈위서〉 오환선비동이전 中 고구려

正始中, 儉以高句驪數侵叛, 督諸軍步騎萬人出玄菟, 從諸道討之. 句驪王宮將步騎二萬人, 進軍沸流水上, 大戰梁口, 宮連破走. 儉遂束馬縣車, 以登丸都, 屠句驪所都, 斬獲首虜以千數.
정시(240~248) 연간에 관구검고구려가 수 차례 침범하고 반란을 일으키자 보병과 기병 10,000명을 지휘해 현도(玄菟)를 나가 여러 길로 고구려를 쳤다. 구려(宮)이 보병과 기병 20,000명을 거느리고 비류수(沸流水) 가로 진군하여 양구(梁口)에서 크게 싸웠으나, 궁이 연달아 격파되어 패주했다. 그리하여 관구검은 말발굽을 싸매고 수레를 서로 매단 뒤[33] 환도에 올라 구려(句驪)의 도읍을 도륙하고 수천 명을 참획했다.

句驪沛者名得來, 數諫宮, 【臣松之案, 東夷傳: 沛者, 句驪國之官名.】 宮不從其言. 得來歎曰, "立見此地, 將生蓬蒿." 遂不食而死, 擧國賢之. 儉令諸軍不壞其墓, 不伐其樹, 得其妻子, 皆放遣之. 宮單將妻子逃竄. 儉引軍還.
구려의 패자(沛者)로 그 이름이 득래(得來)인 자가 있어 수 차례 궁에게 간언했으나 【신 배송지가 보건대, 동이전(東夷傳)에 의하면 패자는 구려국의 관직 이름이다.】 궁이 그의 말을 들어주지 않았다. 득래가 탄식하며 말했다, "이 땅이 (폐허가 되어) 장차 쑥이 자라나는 꼴을 보겠구나." 그리고는 음식을 먹지 않고 죽으니 온 나라에서 그를 현명하게 여겼다. 관구검이 모든 군사들에게 명해 그의 무덤을 허물지 않고 그곳의 나무를 베지 못하게 하였고 그의 처자들을 모두 풀어서 보내주었다. 궁은 홀로 처자를 거느리고 달아나 숨었다. 관구검이 군을 이끌고 돌아왔다.

六年, 復征之, 宮遂奔買溝. 儉遣玄菟太守王頎追之, 二過沃沮千有餘里, 至肅愼氏南界, 刻石紀功, 刊丸都之山, 銘不耐之城. 諸所誅納八千餘口, 論功受賞, 侯者百餘人. 穿山漑灌, 民賴其利.
정시 6년(245년), 다시 고구려를 치자 궁이 매구(買溝)로 달아났다. 관구검이 현도태수(玄菟太守) 왕기를 보내 추격하게 하니, (왕기가) 옥저를 지나 1,000여 리를 가서 숙신씨(肅愼氏)의 남쪽 경계에까지 이르러 돌에 공적을 새겨 기록하고 환도산(丸都山)과 불내성(不耐城)에 글자를 새겼다. 주륙하거나 받아들인 이가 모두 8,000여 명에 이르렀고, 공을 논해 상을 주어 후(侯)로 봉해진 자가 100여 명에 달했다. 산을 뚫고 물을 대니 이로써 백성들이 이로움을 얻었다.
삼국지》 〈위서〉 관구검전

七年春二月, 幽州刺史毌丘儉討高句驪, 夏五月, 討濊貊, 皆破之. 韓那奚等數十國各率種落降.
정시 7년(246년) 봄 2월에 유주자사 관구검이 고구려를 치고, 여름 5월에 예맥을 쳐서 이들을 모두 격파했다. 한나해(韓那奚) 등 수십 개국이 각기 무리를 이끌고 항복했다.
삼국지》 〈위서〉 삼소제기

毌丘儉討句麗, 句麗王宮奔沃沮, 遂進師擊之. 沃沮邑落皆破之, 斬獲首虜三千餘級, 宮奔北沃沮. 北沃沮一名置溝婁, 去南沃沮八百餘里, ... 王頎別遣追討宮, 盡其東界.
관구검이 구려를 치자 구려왕 (宮)이 옥저로 달아났고 이에 군대를 진격시켜 공격하였다. 옥저의 읍락을 모두 격파하고 3,000여 급을 참획하니 궁이 북옥저(北沃沮)로 달아났다. 북옥저는 일명 '치구루(置溝婁)'[34]로 남옥저와 800여리 떨어져 있고 … 왕기가 따로 군대를 보내 궁을 뒤쫓아 공격하여 북옥저의 동쪽 경계 끝까지 다다랐다.
삼국지》 〈위서〉 오환선비동이전 中 동옥저

正始六年, 樂浪太守劉茂·帶方太守弓遵以領東濊屬句麗, 興師伐之, 不耐侯等擧邑降.
정시 6년(245년)에 낙랑태수 유무와 대방태수 궁준단단대령 동쪽의 (濊)가 고구려에 복속하자 군대를 일으켜 정벌했는데, 불내후(不耐侯) 등이 고을을 들어 항복했다.
삼국지》 〈위서〉 오환선비동이전 中 예

正始中, 幽州刺史毌丘儉討句麗, 遣玄菟太守王頎詣夫餘, 位居遣大加郊迎, 供軍糧. 季父牛加有二心, 位居殺季父父子, 籍沒財物, 遣使簿斂送官.
정시(240~248) 연간에 유주자사 관구검구려를 토벌하면서 현도태수 왕기부여에 파견하였다. 위거는 대가(大加)를 보내어 교외에서 왕기를 맞이하게 하고 군량을 제공하였다. 위거의 막내 삼촌인 우가(牛加)가 딴 마음을 품자 위거는 그 부자(父子)를 죽이고 그들의 재물을 몰수한 뒤, 조사관을 파견하여 재산 목록을 만들어 관청에 보냈다.
삼국지》 〈위서〉 오환선비동이전 中 부여

正始三年, 位宮寇西安平, 五年, 幽州刺史毋丘儉將萬人出玄菟討位宮, 位宮將步騎二萬人逆軍, 大戰於沸流. 位宮敗走, 儉軍追至峴, 懸車束馬, 登丸都山, 屠其所都, 斬首虜萬餘級, 位宮單將妻息遠竄. 六年, 儉復討之, 位宮輕將諸加奔沃沮, 儉使將軍王頎追之, 絶沃沮千餘里, 到肅愼南界, 刻石紀功; 又到丸都山, 銘不耐城而還.
정시 3년(242년), 위궁(位宮)이 서안평을 침범했다. 정시 5년(244년), 유주자사 관구검이 10,000명을 거느리고 현도를 나가 위궁을 쳤다. 위궁이 보병과 기병 20,000명을 거느리고 군을 역격하여 비류(沸流)에서 크게 싸웠다. 위궁이 패주하니 관구검군이 추격하여 고개에 이르러 수레를 서로 매달고 말발굽을 싸맨 뒤 환도산에 올라 그 도읍을 도륙하고 10,000여 급을 참획하였고, 위궁은 홀로 처자식을 거느리고 멀리 달아나 숨었다. 정시 6년(245년), 관구검이 다시 고구려를 치니 위궁이 가벼운 차림으로 제가(諸加)를 거느린 채 옥저로 달아났다. 관구검이 장군 왕기를 시켜 이를 추격하게 하여 옥저를 가로지르며 1,000여 리를 가서 숙신의 남쪽 경계에 이르러 돌에 공적을 새겨 기록하였다. 또한 환도산(丸都山)에 이르러 불내성(不耐城)에 글자를 새기고 돌아왔다.
양서》 〈동이열전〉 고구려

王頎遂北. 銘勳不耐之城. 高麗記曰. 不耐城. 今名國內城. 在國東北六百七十里. 本漢不而縣也. 漢書地理志曰. 不而縣屬樂浪郡. 東部都尉治處. 後漢省. 魏志曰. 正始中. 毋丘儉征高句驪. 遂束馬懸車. 以登丸都. 屠句驪所都. 斬獲首虜以千數. 六年. 復征之. 王宮遂奔買溝. 儉遣玄菟太守王頎追之. 過沃沮千有餘里. 至肅愼南界. 刻石紀功. 刊丸都之山. 銘不耐之城.
왕기가 마침내 북으로 가 불내성에 공훈을 새겼다. 《고려기》에서 말하기를 불내성의 현 이름은 국내성이다. 나라 안 동북쪽 670리에 있으며 본디 한(漢)나라의 불이현이었다. 《한서》 〈지리지〉에서 말하기를 불이현은 낙랑군에 속하며, 동부도위가 다스리던 곳이다. 후한 때 사라졌다. 〈위지〉에서 말하기를 정시(240~248) 연간에 관구검이 고구려를 공격하였다. 마침내 말을 묶고 수레를 매달아 환도에 올라 구려도읍을 파괴했다. 참하여 머리를 얻은 것이 수천을 헤아린다. 정시 6년(245년), 다시 고구려를 쳤다. 왕인 은 마침내 매구로 도망쳤다. 관구검은 현도태수 왕기를 시켜 그를 추적하게 했다. 이에 옥저를 지나 1,000리를 넘어 숙신의 남쪽 경계에까지 이르렀다. 돌에 공적을 새겨 환도의 산에 불내의 성이라 새겼다.
《한원(翰苑)》[35]

祖木延, 從毋丘儉征高麗有功, 加號左賢王.
조부 목연(木延)은 관구검을 따라 고려(高麗)를 정벌하여 공을 세워, 호 좌현왕(左賢王)을 더해줬다.
위서》 〈열전〉 제83권 中 모용외

7. 대중매체

소설 우리나라 삼국지에서 동천왕이 5천 철기병을 이끌고 공격하자 관구검이 장창 부대를 앞줄에 세우고 중간에 궁노수, 뒷줄에 기병을 세운 방진을 배치했으며, 고구려의 철기병이 오자 위군이 장창으로 꿰어내 고구려의 철기병을 공격해 대열을 무너뜨렸다.

대열이 무너지면서 고구려의 철기병이 달아나면서 관구검이 좌우에 배치한 선비족 기병들로 이들을 포위하면서 고구려군을 압박했으며, 밀우가 동천왕을 호위하고 뒤늦게 나타난 명림어수의 군사가 동천왕을 구원하면서 동천왕이 간신히 빠져나갈 수 있었다.

8. 관련 문서

9. 외부 링크



[1] 고구려-위 전쟁 전체의 기간은 비류수 전투가 시작된 244년 8월부터 위나라의 개선군이 돌아간 245년 5월, 혹은 동천왕이 왕기군을 격퇴한 246년까지로 추정된다. 삼국지에는 246년 2월에 고구려를 공격했다는 기록도 있으므로 그때쯤 끝난 것으로 보기도 한다.[2] 위치는 불명으로, 현재 중국 랴오양시 태자하 상류 또는 중국 랴오닝성 번시 시에 위치한 오녀산성의 서측 혼강의 지류인 부이강(富尒江) 부근으로 추정하고 있다.[3] 사료가 부족한 관계로 비류수 전투뿐만 아니라 제1차 고구려-위 전쟁 전반에 걸쳐 참여한 인물들이 모두 기재되어 있다.[4] 오환족의 일원으로, 왕국유 등 학자들은 〈관구검 기공비〉에 등장하는 토구장군(討寇將軍) 위오환선우(魏烏丸單于)가 구루돈을 지칭하는 것이라고 추정한다.[5] 직접 참전했다는 기록은 없다. 그러나 《양서》에 따르면 동천왕은 패전 이후 왕기의 군대가 추격해올 때 제가(諸加)를 거느리고 옥저로 달아났으므로, 제가회의의 수장인 국상 역시 왕을 따라 피신했으리라 추정된다. 실제로 명림어수는 230년 7월 국상에 임명되어 전쟁 이후인 254년 4월까지 재임하다가 사망했는데, 국내성을 포함한 나라 전역이 쑥대밭이 되어가는 상황에서 2인자로서 죽음을 면하려면 필사적으로 몸을 숨겨야 했을 것이다. 한편 중천왕 대인 250년 2월 병마 업무를 겸하여 맡았다는 기록을 참고하면 그 이전인 고구려-위 전쟁에서도 군사 방면으로 어느 정도 관여했을 가능성이 있지만, 사료가 워낙 부족한 탓에 확인할 수 없다.[6] 당시 진단, 장군(張群), 두덕(杜德), 황강 등 60명의 관리 및 병사들이 현도군에 억류되어 있었는데, 그들은 민가에서 묵으며 먹고 마시는 것을 의존해야 했을 정도로 누추하게 살아갔다. 그들은 구금된 지 40여 일이 지났을 때 의논을 거쳐 현도군의 성곽을 불태우고 고위 관리들을 죽여 나라를 위해 설욕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렇게 8월 19일 밤에 거사를 치르기로 했으나, 그날 낮에 장송(張松)이라는 자에게 계획이 발각되어 현도태수 왕찬이 군사를 이끌고 오자 진단 일행은 황급히 성을 넘어 필사적으로 도망쳤다. 네 사람은 공손연이 보낸 추격자들을 따돌리고 동쪽으로 계속 이동했는데, 이때 장군의 무릎에 종기가 발병해 가지 못하게 되자 두덕은 장군과 함께 스스로 낙오하여 산속에 숨어 있게 되었다. 진단과 황강은 6~700리의 험한 여정 끝에 마침내 고구려에 도착하였다.[7] 이때 사인(使人)을 보내 산골짜기에 낙오되어 있던 장군과 두덕도 찾아와 같이 돌아가게 하였다고 한다.[8] 하필이면 이 시기가 남방의 촉한에서 주도한 제갈량의 북벌이 막 끝났을 시점이라, 위나라는 더 이상 남쪽의 위협에 한눈 팔리지 않고 요동 방면에 보다 집중할 수 있게 된 때였다. 그러던 참에 오나라손권이 괜히 무리하게 원교근공 전법을 시도한답시고 어그로를 끄니 위나라 입장에서는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9] 이후 서진 왕조 창건의 기반을 만들어 황제로 사후 추존된 인물이다. 웬만한 《삼국지연의》 팬이면 모르는 사람을 찾기가 더 어렵겠지만(...).[10] 신채호는 수만여 명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11] 당시 위군이 공손연 측 전사자들의 해골을 산처럼 수북히 쌓은 경관(京觀)을 만들어 승전을 기념했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로 인명 피해가 막대했다.[12] 대체로 오늘날의 단둥시로 추정된다.[13] 이후 관구검이 고구려에서 승전했을 때 군사들에게 명령하여 득래의 무덤을 허물지 말고 주변의 나무도 베지 못하게 하였으며, 포로로 잡혀 있던 그의 처와 자식도 모두 풀어서 보내주었다. 전쟁이 끝난 이후 고구려 사람들도 득래를 현명한 사람이라 여겼다고 한다.[14]관구검 기공비〉, 《삼국지》, 《양서》 등 중국 측 사료에서는 244년이고, 《삼국사기》에서는 246년이다. 관구검기공비에 관련해서 논란이 있다고 주장하는 이도 있는데, 巍라는 글자를 썼다고 '한족 관료가 아닌 오환족이 세운거 아니냐'는 것이다. 그러나 해당 글자는 정확히는 '魏' 자 전체가 아니라 '鬼' 상단에 '山'이 얹힌 형태인데, 이승호는 이를 '巍'가 아니라 '魏'의 이체자로 판독했다.[36] 즉 논거 자체가 성립하기 어렵다.[15] 249년에 터진 고평릉 사변사마의조상으로부터 권력을 어느 정도 빼앗았다고 확신한 시점에서 터진 것이다.[16] 이때쯤 왕기의 군대를 제외한 나머지 위군은 승전을 기념하기 위해 본국 위나라로 돌아갔을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관구검 기공비〉에서는 정시 6년(245년) 5월에 개선군이 위나라로 돌아왔다는 기록이 존재한다.[17] 동천왕황초령에 다다랐을 때, 고구려 병사들이 일제히 흩어지는 가운데 홀로 왕의 곁을 지켰던 충신이다. 결사대를 조직하여 추격해오는 위군을 필사적으로 막아 동천왕의 피신을 도왔으며, 산과 계곡으로 숨어들어가 흩어진 병사들을 다시 모을 수 있도록 하였다. 이후 왕의 명을 받은 유옥구가 전장에서 쓰러져 있는 밀우를 등에 엎고 구출하였고, 동천왕이 그를 자신의 다리에 눕혀 보살핀 덕분에 의식을 차리고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전쟁이 끝난 후에는 거곡(巨谷)과 청목곡(靑木谷)을 하사받았다.[18] 적진에 음식을 가지고 들어가 위군에게 항복하는 척하며 왕기의 부하 장군을 살해하였다. 고구려는 위군이 혼란스러워진 틈을 타 군사를 수습한 뒤 세 갈래로 나뉘어 공격을 감행하였다. 사후 구사자(九使者)로 추증되었으며, 아들 다우(多優)는 대사자(大使者)의 관직을 지니게 되었다.[19] 앞서 언급하였듯 밀우를 전장에서 구출해온 용자이다. 전쟁이 끝난 후 압록원(鴨淥原)과 두눌하원(杜訥河原)을 식읍으로 하사받았다.[20] 환도성 자체가 국내성이라는 큰 성 안에 위치한 또다른 성이다. 즉 환도성이 최종 방어선이었고 국내성은 1차 방어선이자 생활구역이었던 셈인데, 환도성이 뚫렸던 시점에서 국내성이 멀쩡할 가능성은 당연히 전무하다.[21] 하지만 실제로는 국내성의 실제 초축시기는 고국원왕 12년인 342년이라 동천왕 재위기에는 존재하지 않는 성이었고 국내성 자체도 유리왕 22년인 서기 3년에 천도했다는 국내 위나암성과는 다른 성일 가능성이 높다. 국내성으로 비정되는 통구성 내에서 3세기 초반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유물이나 유적이 거의 발견되지 않은데다, 대무신왕 11년(서기 28년) 조 을두지의 발언에서 언급되는 위나암성의 지형묘사(암석지대에 있고 물이 나오는 샘이 있다)가 환도성으로 비정되는 산성자산성이나 국내성으로 비정되는 통구성보다는 오녀산성에 가깝기 때문.[22] 이때의 평양성을 지금의 평안도 대동강 유역 평양시 일대가 아니라 독로강(禿魯江) 유역의 강계시로 보거나, 지안(集安)의 평지 지대로 보는 견해가 있지만 분명한 부분은 아니다. 최근에 평양 지역에서 3세기 전반 고구려 유적이 나오기도 했으니... 하지만 이 평양이란 지명이 고구려가 낙랑군을 점령하기 전인 미천왕 시기 현도군 침공 기사에도 등장하며, 고국원왕대의 기록에도 평양성이 등장하고, 고국원왕 본기에서 진짜 평양에 있는 성은 '평양의 동황성[平壤 東黃城\]\'이라고 구별을 하고 있기 때문에 동천왕 시기의 평양성이 지금의 평양 일대에 있는 성일 가능성은 낮다.[23] 다만 우리나라의 기록과 중국의 기록이 달라서 상황이 다를 수도 있다. 관구검 문서로.[24] 서해안의 서안평은 공손씨 동연의 영역, 북쪽 만주 벌판은 부여의 영역이었다.[25]삼국지》 〈동이전〉에 기록된 수치로, 낙랑군의 인구 통계를 참고하여 한 호(戶)당 5~6명을 책정하면 대략 150,000~180,000명으로 추정할 수 있다.[26] 한편 동천왕을 추격하는 역할을 맡은 현도태수 왕기 역시 옥저에서 동북쪽으로 1,000리를 더 진격하여 숙신의 남쪽 경계에 고구려 정복을 새긴 비석을 세우고 돌아갔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실제 유물은 발견된 바 없다.[27] 오늘날의 황해도, 강원도, 경기도 북부 등지로 비정된다.[28] 육군본부 발간 한국군사사 제1권 참조[29] 물론 위나라와 서진도 백제를 지나치게 압박하면 반항할 게 염려되어 무역 조건을 마한 측에 유리하게 조정하면서 크게 양보해주긴 하였다. 백제는 기리영 전투 후 불과 십수 년도 안 되어 경기도 전체 및 충청도 일부 지역을 직접 지배하는 엄연한 고대 국가로 성장하게 되었는데, 그 정도 덩치와 실력이면 물론 여전히 동천왕 때 고구려만은 못했으나 기리영 전투 때 위나라가 상대했던 마한보다는 분명 강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마한과 진한을 대등하게 대한다는 원칙은 변하지 않았다. 이는 백제국을 포함한 마한 세력이 받아들여야 했던 기리영 전투 패배 결과였다.[30] 조상 정권의 몰락 후 출범한 사마씨 정권이 이때의 성과를 그대로 보전하고, 삼한에 대한 정책을 꽤 우호적인 방향으로 튼 사실을 보면 알 수 있다.[31] 여기서 김부식은 《삼국사기》 편찬 당시 위궁(位宮)을 산상왕의 이름으로 오해하여 양서의 기록이 잘못되었다고 주장하였는데, 현대 사학계는 위궁이 동천왕의 이름이 맞았을 것으로 보는 추세이다.[32] 242년 동천왕이 서안평을 공격한 사실과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33] 위험을 무릅쓰고 험한 산길을 행군하는 모습을 묘사한 것이다.[34]삼국지》 관구검전에서 매구(買溝)로 기록되었다는 점을 보면 매구루(買溝婁)를 잘못 적은 것으로 추정된다. 실제로 삼국시대 지명에는 물을 뜻하는 지명어 매(買: *mer)가 자주 사용되었으며, 광개토대왕릉비에 매구루와 같은 것으로 보이는 미구루(味仇婁)라는 지명이 등장한다.[35] 당나라 때인 서기 660년에 저술된 책으로, 본디 30권이었으나 현재는 일본에 국보로 1권만 남아있다. 지금은 유실된 《위략》, 《고려기》에서 내용을 인용한 부분이 많아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는다.


[36] 이승호, 〈「毌丘儉紀功碑」의 해석과 高句麗 · 魏 전쟁의 재구성〉, 《목간과 문자》 15, 2015, 2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