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사기(三國史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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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lding [ 열전(列傳) ]
}}} || 고구려의 구사자 유유 | 紐由 | |
<colbgcolor=#191970> 출생 | 미상 |
사망 | 246년 (향년 불명) |
관등 | 구사자(九使者) |
직위 | 국상(國相) |
부족 | 동부(東部) |
이름 | 유유(紐由) |
자녀 | 다우(多優) |
[clearfix]
1. 개요
고구려의 충신이다. 두음 법칙을 적용하지 않고 이름을 읽으면 '뉴유'가 된다.2. 생애
언제 어디서 태어난지는 기록이 없어 알 수 없다. 246년, 위나라의 장수 관구검이 고구려로 쳐들어왔을 때 활약하였다. 당시 고구려의 수도 환도성이 함락되고 왕인 동천왕이 남옥저까지 파천해야 했을 만큼 위급한 형편이었다. 이때 계책을 꾸미어 위군에게 거짓으로 항복하는 척하며 장수를 죽이고 위군이 혼란스러워진 틈을 타 고구려가 위군을 물리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하였다.…왕은 사잇길로 이리저리 헤매다가 남옥저에 이르렀지만 위군은 추격을 멈추지 않았다. 왕은 계책이 다하고 형세도 기울어 어쩔 줄 몰랐다. 이때 동부 사람 유유가 나와 말하기를 "형세가 매우 위급하오나 그냥 죽을 수는 없습니다. 신에게 어리석은 계책이 하나 있사온데, 음식을 가지고 가서 위군을 대접하는 척하다가 틈을 보아 저네들을 이끄는 장수를 찔러 죽이고자 합니다. 만약 신의 계책이 이루어진다면 이때 왕께서 분격하여 결판을 내소서." 하니 왕이 허락하였다. 유유가 위의 군중에 들어가서 거짓으로 항복하고 말했다. "우리 임금이 대국에 죄를 짓고 달아나 바닷가에 이르렀으나 몸 둘 곳이 없습니다. 장차 귀국 진영 앞에 나와 항복하고 사구(司寇)에게 목숨을 맡기려 하는데, 먼저 저로 하여금 변변찮은 음식으로 종군하는 이들을 대접하게 하였습니다." 위의 장수가 이 말을 듣고 항복을 받아들이려 했다. 유유가 칼을 음식 그릇에 숨겼다가 앞으로 나가면서 칼을 뽑아 위장의 가슴을 찌르고 함께 죽으니, 위군이 갑자기 혼란스러워졌다. 왕은 군대를 세 길로 나누어 급히 위군을 공격하였다. 위군이 어지러워져 진을 정비하지 못하더니 마침내 낙랑으로 물러갔다. 왕이 서울로 돌아와서 전공을 논의했는데 밀우와 유유를 제일로 삼아 밀우에게 거곡(巨谷)과 청목곡(靑木谷)을 하사하고, 옥구에게 압록(鴨綠)의 두눌하원(豆訥河原)을 하사하여 식읍으로 삼게 하였다. 유유에게는 구사자(九使者)[1]를 추증하고, 또한 그이의 아들 다우(多優)를 대사자(大使者)로 삼았다.
…王間行轉輾 至南沃沮 魏軍追不止 王計窮勢屈 不知所爲 東部人紐由進曰 勢甚危迫 不可徒死 臣有愚計 請以飮食 往犒魏軍 因伺隙 刺殺彼將 若臣計得成 則王可奮擊決勝 王曰 諾 紐由入魏軍 詐降曰 寡君獲罪於大國 逃至海濱 措躬無地矣 將以請降於陣前 歸死司寇 先遣小臣 致不腆之物 爲從者羞 魏將聞之 將受其降 紐由隱刀食器 進前拔刀 刺魏將胸 與之俱死 魏軍遂亂 王分軍爲三道 急擊之 魏軍擾亂 不能陳 遂自樂浪而退 王復國論功 以密友紐由 爲第一 賜密友巨谷靑木谷 賜屋句鴨綠豆訥河原 以爲食邑 追贈紐由爲九使者 又以其子多優爲大使者
삼국사기 권제45 열전 제5
…王間行轉輾 至南沃沮 魏軍追不止 王計窮勢屈 不知所爲 東部人紐由進曰 勢甚危迫 不可徒死 臣有愚計 請以飮食 往犒魏軍 因伺隙 刺殺彼將 若臣計得成 則王可奮擊決勝 王曰 諾 紐由入魏軍 詐降曰 寡君獲罪於大國 逃至海濱 措躬無地矣 將以請降於陣前 歸死司寇 先遣小臣 致不腆之物 爲從者羞 魏將聞之 將受其降 紐由隱刀食器 進前拔刀 刺魏將胸 與之俱死 魏軍遂亂 王分軍爲三道 急擊之 魏軍擾亂 不能陳 遂自樂浪而退 王復國論功 以密友紐由 爲第一 賜密友巨谷靑木谷 賜屋句鴨綠豆訥河原 以爲食邑 追贈紐由爲九使者 又以其子多優爲大使者
삼국사기 권제45 열전 제5
비슷한 시기에 함께 활약하여 나라를 구한 밀우와 더불어 고구려의 대표 충신으로 유명한 인물이다. 그래서인지 삼국사기 열전에서도 밀우유유열전으로 함께 언급된다.
일설에 의하면 관구검이 이끄는 위나라 군대가 고구려를 침략했을 무렵에 유유가 음식을 가져가서 위나라 군대한테 바치고 거짓 항복했다가 위나라 장수를 죽였다는 구절을 놓고, 사실 유유가 가져간 건 음식이 아니라 표범이나 호랑이 같은 동물 모피라고 한다. 오히려 이쪽이 더 신빙성이 높을수도 있는데 음식은 쉽게 상하고 식으면 맛이 없기 때문에, 먼 거리를 가는데 음식을 같이 가져가기는 거의 불가능한 반면 동물 모피는 상하지 않는 데다가 중국인들이 무척 탐내는 물건이었으니[2] 유유는 위나라 장수한테 동물 모피를 뇌물로 바치는 척하면서 거기에 숨겨둔 단검을 꺼내 위나라 장수를 죽였다는 것이다.
3. 대중매체에서
삼국전투기에서는 태왕북벌기의 인물로 등장. 비류 전투 (4)편의 타이틀 컷을 장식하기도 했다.비류 전투 편에서 처음 등장. 동천왕을 따라 관구검의 부대와 맞서기도 했고, 관구검에게 대패한 뒤 왕기의 추격대가 동천왕을 죽이기 위해 쫓아오자, 항복을 위장하고 적장을 암살하겠다고 말한 뒤 실제로 위의 장수를 암살하는 데 성공했고[3], 유유가 이렇게 틈을 만들어 준 덕에 동천왕이 추격대에게 타격을 입히며 물리친 것으로 묘사된다.
본작에서는 왕기의 부장이 아니라 왕기 본인을 암살하려 한 것으로 묘사되었다. 그런데 나중에도 나오는 왕기를 사망처리시킬 수는 없기 때문에 암살 시도는 부상만 입히고 실패한 것으로 묘사된다.
[1] 대사자의 오기라고도 한다.[2] 실제로 옥저인들이 중국을 상대로 모피와 중국 동전을 교환하는 무역을 자주 했다. 그래서 옥저인들의 활동 지역이었던 백두산이나 함경도 지역에서 명도전이나 오수전 같은 중국 동전들이 자주 출토된다.[3] 후술한 내용에서 언급되지만 사실 실패한 것으로 묘사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