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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수림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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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000><colcolor=#c5b356> 고구려 제17대 국왕
소수림왕 | 小獸林王
파일:천추총.jpg
소수림왕릉으로 추정되는 천추총 전경.
출생
(음력)
<colbgcolor=#fff,#1f2023>355년 1월 이전[1]
고구려 국내성
사망
(음력)
384년 11월 (향년 29세 이상)
고구려 국내성
능묘 소수림(小獸林)[2]
재위기간 고구려 왕태자
355년 음력 1월 ~ 371년 11월 17일[3] (16년 10개월)
고구려 제17대 국왕
371년 음력 10월 ~ 384년 음력 11월 (13년 1개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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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호 소수림왕(小獸林王)
소해주류왕(小解朱留王)
해미류왕(解味留王)
연호 건시(建始)?[4], 태녕(太寧)?[5] }}}}}}}}}

1. 개요2. 생애
2.1. 태자 시절 및 위기 상황에서의 즉위2.2. 국제 정세2.3. 내정의 안정화2.4. 숙적 백제에 대한 반격
3. 평가4. 《삼국사기》 기록5. 대중매체에서6. 둘러보기

[clearfix]

1. 개요

고구려의 제17대 태왕이자 중흥지주였다. 광개토대왕의 큰아빠, 장수왕의 큰할아버지가 되는 임금이다. 유교불교를 통치이념으로 삼고 율령을 반포하고 태학도 지음으로써 후대 왕들의 통치에 큰 영향을 끼쳤다.

'소해주류왕'(小解朱留王) 또는 '해미류왕'(解味留王)이라고도 하며,[6] 태자 시절의 이름은 구부(丘夫)로 추정된다.

조카인 광개토대왕에게 가려져서 그렇지 알고 보면 뛰어난 능력을 가진 군주였다. 특히 아빠 고국원왕 시절 전연모용황백제 근초고왕의 외침으로 인해 여러 치명타를 입으면서 하마터면 멸망의 길로 빠질 수도 있었던 고구려를 단기간에 부흥시켜, 제19대 광개토대왕 ~ 제22대 안장왕 때까지 이어지는 전성기 시대의 줄기를 마련한 군주로서, 백제고이왕, 신라법흥왕, 통일신라신문왕과 함께 나라의 기반을 마련한 개혁 군주들 중 한 명이다.

이 시기 국력을 축적한 고구려는 광개토대왕장수왕 시기에 이르러 크게 팽창했으며 분열 상태였던 중원 왕조들에게도 밀리지 않는 동아시아 최강국으로 떠오르게 되었다.

2. 생애

2.1. 태자 시절 및 위기 상황에서의 즉위

삼국사기》에는 소수림왕 고구부에 대해 신체가 장대하고, 웅대한 지략을 가진 매우 뛰어난 인물이었다며 좋은 평가를 내리고 있다. # 355년 1월에 태자에 책봉되었다.

그리고 신흥 강국 전연의 침략 이후 고구려의 태자가 사신으로 갔다 왔다는 이야기가 있으나, 고구부였는지는 불분명한데 당시 고구려 태자가 고구부였을 가능성은 낮다. 고국원왕 10년에 태자를 사신단으로 보냈다는 기록은 340년인데, 당시는 고구부가 태어나기도 훨씬 이전이거나 갓난아기때였다. 관례성년이 되는 나이는 15세이고, 그때 즈음에 태자로 책봉되기 때문에 추정컨데 340년에 사신으로 보내진 태자는 일찍 요절하고, 후대에 고구부가 태자로 책봉되었을 것이다. 애초에 고국원왕 10년에 나온 태자가 15년 후에 나오는 태자 ‘구부’와는 다른 인물일 수 밖에 없고, 구부를 소수림왕이라고 비정한다면 고국원왕 10년 기록의 태자는 소수림왕의 이복형이거나, 동복형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371년 10월 23일, 노년의 고국원왕평양성 전투에서 근초고왕이 이끄는 백제군의 한 병사가 날린 화살에 맞고 전사하자 그 뒤를 이어 존망의 위기에 처한 고구려의 제17대 왕위에 올랐다. 일각에서는 고국원왕이 부상을 입자 대신 전투를 지휘했을 것이라는 의견도 있지만 확실하지는 않다. 고국원왕이 쓰러졌는데도 평양성이 백제에게 함락당하지 않은 것을 보면 소수림왕이 있든 없든 간에 소수림왕이 이끄는 고구려 군사의 결사 항전이 맹렬하여 근초고왕이 물러났을 가능성이 크다.

2.2. 국제 정세

370년, 동호선비족 모용씨가 지배층이었던 전연은 티베트계 저족의 황제였던 부견이 군림한 전진(前秦)에 의해 멸망했다. 관중에서 세력을 키운 끝에 화북 일대를 통일한 전진은 남쪽의 한족 왕조인 동진을 멸망시키기 위해서는 배후를 안전하게 해야 한다는 판단하에 고구려에게 제법 유화적인 태도를 취했다. 당연히 고구려 입장에서도 전진은 미천왕과 고국원왕의 원수인 전연을 멸망시킨 나라였고, 화북을 통일하고, 온건한 자세를 취해오니 친선 외교로 일단락시킬 수 있었다.

한편 남쪽의 백제전성기를 이끈 근초고왕 초고가 건재하게 버티고 있는 상황이었고, 국력도 강력했던 탓에 고구려가 함부로 접근하기 힘든 상황이었다. 이러한 위기 상황에서 소수림왕이 선택한 것은 중앙집권체제를 구축해 나가는 과정의 일환으로 전진으로부터 불교, 유교, 율령을 받아들이는 변화를 선택함으로써 내치를 안정시키는 것이었다.

2.3. 내정의 안정화

二年 夏六月 秦王苻 堅 遣使及浮屠順道 送佛像經文。 王遣使廻謝 以貢方物。 立大學 敎育子弟。
2년 여름 6월에 진(秦)나라 왕 부견(苻堅)이 사신과 중 순도(順道)를 파견하여 불상과 경문(經文)을 보내왔다. 왕은 사신을 보내 답례하고 토산물을 바쳤다. 대학(大學)을 세우고 자제들을 교육시켰다.

三年 始頒律令。
3년에 율령(律令)을 처음으로 반포했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소수림왕조-
최초로 고등교육기관인 태학을 세워 유교 이념을 바탕으로 한 교육체제를 완성시키는 동시에 율령을 반포하여 국가의 기틀을 바로 잡아 훗날 번영의 초석을 확고하게 마련했다. 일련의 이러한 정책들은 이전의 고구려에서는 볼 수 없었던 문치주의(文治主義)를 표방했던 것으로, 법치국가로서의 면모를 보여주며 중앙집권체제를 강화시키기 위한 것들이었다. 율령 반포와 태학의 설립도 불교처럼 전진의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크다.[7]
四年 僧阿道來
4년에 중 아도(阿道)가 왔다.

五年 春二月 始創肖門寺 以置順道。 又創伊弗蘭寺 以置阿道。 此海東佛法之始。
5년 봄 2월에 처음으로 초문사(肖門寺)를 세우고, (그곳에) 순도를 두었다. 또 이불란사(伊弗蘭寺)를 세우고 (그곳에) 아도(阿道)를 두었다. 이것은 우리나라 불교의 시작이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소수림왕조-

고구려 제17대 해미류왕(解味留王)【혹은 소수림왕(小獸林王)이라 한다.】 여름 6월에 진(秦)왕 부견(符堅)이 사신과 승려 순도를 시켜 불상과 경문을 보내었다. 이에 임금과 신하들은 예의를 갖추어 성문까지 나가 맞아들였으며, 정성을 다해 믿고 공경하니 감격과 경사가 널리 퍼졌다. (중략) 마등후한에 들어온 때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200여 년인데, 그 뒤 4년(374년)에 신승(神僧) 아도(阿道)가 위(魏)에서 들어왔으며【옛 글에 있음.】 처음으로 성문사(省門寺)를 창건하여 순도를 머무르게 했다. 기록에 말하기를 “성문을 절로 만들었다.”고 했으니 지금의 흥국사가 그것이며, 뒤에는 잘못 기록하여 초문(肖門)이라 했다. 또 이불란사(伊佛蘭寺)를 창건하여 아도를 머물게 했으니, 《고기》(古記)에는 흥복사가 그것이라고 했다. 이것이 해동불교의 시작이다.
해동고승전
또한 전진 부견이 보낸 순도를 통해 불교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였고, 내부를 안정화시키는데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이러한 정책들이 성공적으로 진행됨에 따라 고국원왕 때 고갈되었던 고구려의 국력은 점차 회복되기 시작했다. 단 5년 만에 흔들리던 나라를 붙잡고, 예전의 모습을 되찾기 시작하자 소수림왕은 아버지 고국원왕과 할아버지 미천왕의 원수를 갚기 위해 백제에 대한 복수를 시도하게 된다. 다만 여러 기록들을 통해 불교는 이미 고구려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소수림왕은 이를 국가적으로 "공인"한 것으로 보인다.[8] 제15대 미천왕 때 멸망시킨 옛 낙랑군대방군 일대의 한족 유민들을 통해서 알음알음으로 전해졌을 것이라고 한다.

소수림왕이 처음으로 세웠다는 초문사와 이불란사의 위치는 어디인지 확실하게 알 수 없다. 《해동고승전》에는 지금의 흥국사와 흥복사라고 했는데 이는 고려를 기준으로 한 것으로 모두 수도 개경에 있었던 사찰들의 이름이었다. 일연 역시 《삼국유사》에서 이를 지적하면서
"그때 고구려의 수도는 압록강 북쪽에 있었는데, 여기까지 와서 절을 세웠을 리가 있냐."
며 부정했다.

2.4. 숙적 백제에 대한 반격

五年 秋七月 攻百濟水谷城。
5년 가을 7월에 백제의 수곡성(水谷城)을 공격했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소수림왕조-

三十年 秋七月 高句麗來攻北鄙水谷城。 陷之 王遣將拒之 不克。 王又將大擧兵報之 以年荒不果。
30년 가을 7월, 고구려가 북쪽 변경의 수곡성(水谷城)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임금이 장수를 보내 방어하게 했으나 승리하지 못했다. 임금이 다시 병사를 크게 동원하여 보복하려 했으나 흉년이 들었기 때문에 실행하지 못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근초고왕조-
앞서 서술된 일련의 개혁 정책들을 통해 고구려의 국력이 회복되자 소수림왕은 자신감을 갖게 되었는지, 마침내 재위 5년만인 375년 7월, 백제와 싸워볼 만하다고 판단하고는 군대를 보내 수곡성을 공격하여 무너뜨렸다. 갑작스러운 공격을 당한 근초고왕은 고구려에 반격하려고 했으나 흉년이 들어 하지 못했다고 하니 소수림왕으로써는 조금이나마 아버지 고국원왕의 원한을 풀 만한 복수였을 것이다.[9] 1년 후인 376년 근구수왕 부여구수가 즉위하자마자 고구려는 백제의 북쪽 변경을 다시 공격했으나 소득을 거두지는 못했다.
六年 冬十一月 侵百濟北鄙。
6년 겨울 11월에 백제의 북쪽 변경을 침략했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소수림왕조-

冬十一月 高句麗來侵北鄙
겨울 11월, 고구려가 북쪽 변경을 침략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근구수왕조-
이러한 침략이 거듭 이뤄지자, 근구수왕은 이를 묵과할 수 없었는지 고구려에 대대적인 역공을 가했다. 30,000명의 병사를 이끌고 평양성을 향해 재차 진격해 들어간 것이다.[10]
七年 十一月 南伐百濟。
7년 11월 백제가 (군사 30,000명을 거느리고 평양성을) 침공해 왔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소수림왕조-

三年 冬十月 王將兵三萬 侵高句麗平壤城。
3년 겨울 10월 임금이 병사 30,000명을 거느리고 고구려의 평양성(平壤城)을 침범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근구수왕조-
하지만 소수림왕은 이를 막아냈고, 그해 11월에 백제에 대한 역공을 감행했다. 하지만 이 또한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백제와 아웅다웅하며 서로에 대한 견제를 시도하는 사이, 동호계 거란족이 소규모 침공을 해온 기록이 남아있다. 더군다나 이 시기에 가뭄이 들어 백성들이 서로 잡아 먹을 지경에 이르렀다는 기록도 남아 있어 당시 고구려가 또다시 군사를 일으키긴 힘들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후 별다른 침공 기록이 없다가 재위 14년째인 384년 11월에 소수림왕이 승하하여 소수림(小獸林)에 묻혔다.

3. 평가

고구려가 절체 절명의 위기에서 무릎을 꿇지 않고 다시 일어날수 있었던 그 계기, 그 계기는 소수림왕이 있었기 때문이더라, 소수림왕이야 말로 위기를 극복했던 왕이더라, 라는 이야기입니다. 개혁군주, 변화의 군주. 나중에 보시면 아시겠지만 5세기는 고구려의 전성기라구요. 광개토태왕, 여러분이 잘 알고 좋아하는 왕의 시기에요. 그런데 광개토태왕에게 꽂히면 안 된다고. 그 광개토태왕이 고구려의 전성기를 이끌기 위해서는 정말 (소수림왕의) 뼈를 깎는 변화와 고통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어요. (중략) 소수림왕이 그걸 한 거야. 이 위기에서 무릎꿇지 않고 일으킨 왕이 소수림왕입니다.
최태성 한국사 강의 중 영상 6:25부터
많은 한국사 책과 교과서에서 고구려의 기틀을 세운 왕으로 묘사되듯 나라가 멸망할 위기를 극복하고 전성기의 기틀을 마련한 훌륭한 수성형 군주이다.[11] 기존에 뒤쳐진 체제를 완벽하게 정비해 발전을 모색하는 길을 열어주면서도 본인 세대에서 이미 국력을 회복시켜서 전쟁을 일으킬 수가 있었다. 대단한 점은 기본적으로 체제가 무너지면 필요한 것이 군사와 자금인데 이 두 가지는 결국 인구수가 뒷받침이 되어 그 후 인재가 나와 주어야 한다. 그러나 소수림왕은 백제전진 등 고구려보다도 더욱 인구수와 자연 조건이 좋은 나라들에 둘러싸여 있으면서도 고구려라는 나라를 개혁하는데 성공했다. 이는 정말 고평가를 받을 만한 대단한 업적이라고 할 수 있는데 소수림왕 시대의 고구려와 비슷한 상황이었던 고려 말 정도전과 같은 급진파 신진사대부들은 뛰어난 인재들이었지만 개혁을 포기하고 새로운 나라를 건국하는 것을 선택했다. 기존의 것을 뜯어고치는 개혁은 새로운 것을 세우는 혁명보다도 어려웠던 것이다.[12]

무능한 아버지 고국원왕의 치세 때는 할아버지였던 미천왕 시기의 영광은 어디갔는지, 전연에게 털려 수도가 그대로 함락되고, 왕비가 포로가 되었으며 미천왕의 능도 도굴되고 왕 자신마저 백제와의 전쟁에서 전사하는 등 치욕적이라고 해도 할 말이 없는 시기였고, 그대로 나라가 망했어도 이상하지 않았지만 소수림왕은 단 5년만에 국가의 기틀을 잡아 백제를 공격하고 성을 함락시킬 정도로 나라를 재건해내는 실로 대단한 업적을 이룩했다. 멸망의 위기 이후에 전성기를 맞이할 수 있게 한 소수림왕의 능력은 세계사에서도 비교 대상이 거의 없을 정도로 대단했다.[13] 그래서인지 광개토대왕보다 소수림왕을 높게 쳐주는 시각도 보이는데, 대표적으로 설민석도 <어쩌다 어른>에서 소수림왕이 없었다면 광개토왕도 없었다고 이야기했다.

고국양왕의 형, 광개토대왕의 큰아버지, 장수왕의 큰할아버지로 어떻게 보면 6대에 걸쳐 내려온 명군 혈맥의 시조라고 할 수 있다. 고구려는 왕복이 꽤나 좋은 나라였는데 당시의 라인업이 특히 후덜덜했다. 소수림왕 → 고국양왕광개토대왕장수왕문자명왕[14]안장왕[15]에 이르기까지 6대하고 정확히 160년이었다.

이 군주들의 치세 동안 고구려는 전반적으로 내내 상승세를 이어 나가며 전성기를 구가했고, 개털이 되어 오늘 내일하던 산골짜기 막장 국가에서 동북아시아의 지역 강국으로 각성했다. 소수림왕 고구부가 고구려의 기틀을 닦지 않았다면 광개토대왕도 대왕(大王)이라는 칭호를 얻어내기 힘들었을 것이다. 소수림왕은 그야말로 동생인 고국양왕 고이련과 함께 조카의 위업을 달성할 수 있도록 정치적, 군사적 초석을 탄탄히 다져놓았다. 당시 후연과 백제의 침입으로 고구려는 완전히 만주의 동쪽 산골짜기로 밀려나갔는데, 한반도 북부는 도저히 사람이 살 곳이 안되어 인구도 한반도 내의 백제신라에 비해 밀도가 적은 데다가 대부분 산지였다. 이런 암울한 상황에서 소수림왕이라는 명군이 나타난 것이었다.
고구려가 나라를 세운 지 400여 년 만에 처음으로 태학을 세웠으니, 어찌 그리 학교를 세워 교육을 시키는 것이 늦었는가? 지금 왕은 비록 보람 있는 일을 할 만한 자질이나, 중을 받들고 절을 지어서 고구려에서 부처를 믿는 첫 임금이 되어 자손들이 그 허물됨을 본받아서 그 앙화(殃禍)가 널리 퍼짐은 이루 다 말할 수 없었다. 비록 태학을 세웠다 하나 인재를 성취하는 효과(效果)를 거두지 못하였으니, 어찌 학문을 좋아하는 마음이 불교를 좋아하는 데에 미치지 못하는 것이 아니랴!
동사강목》 권2하 임신년 신라 내물왕 17년, 고구려 소수림왕 2년, 백제 근초고왕 27년(동진 간문제 함안 2년, 372년)[16]
소수림(小獸林)은 태학을 세워 자제를 가르치니 자못 공업이 있는 듯 했으나, 이단과 사설에 현혹되어 동진(東晋)의 중을 맞아들여 절(佛寺)를 창건하고 받들기를 더욱 삼갔으니, 동한(東韓)에서 부처에 아첨한 최초의 임금이다.
《동사강목》 <도상> -고구려전세도-
조선 시대에는 평가가 매우 좋지 않았다. 불교를 최초로 도입했기 때문인데, 숭유억불의 시대인 조선에서는 신라법흥왕[17], 백제침류왕과 함께 불교를 들여와 삼한을 어지럽힌 불교 3형제로 꼽혔다.

사실 《조선왕조실록》 등에 기록된 조선시대 당대의 역사 인물 평가는 현대와는 다른 점이 아주 많다.[18]

4.삼국사기》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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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석문 및 문헌기록상 신라 최초로 성씨를 사용한 왕은 진흥왕임
* 29~31권까지 연표
* 32~40권까지 잡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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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 <소수림왕 본기>
一年冬十月 소수림왕이 즉위하다
二年夏六月 전진에서 불교가 전래되다
二年夏六月 태학을 세우다
三年 율령을 반포하다
四年 승려 아도가 오다
五年春二月 초문사와 이불란사 두 사찰을 창건하다
五年秋七月 백제 수곡성을 공격하다
六年冬十一月 백제를 침범하다
七年冬十月 백제가 고구려의 평양성을 공격하다
七年冬十一月 백제를 정벌하고 전진에 조공하다
八年 가뭄으로 백성이 굶주리다
八年秋九月 거란이 북쪽 변경을 침범하다
十三年秋九月 혜성이 나타나다
十四年冬十一月 소수림왕이 승하하다

5. 대중매체에서

파일:attachment/소수림왕/17.jpg
태왕사신기에서의 소수림왕
파일:external/pds21.egloos.com/e0017672_4f3b69d7e25a3.jpg
드라마 근초고왕에서의 소수림왕

6. 둘러보기


파일:고구려 군기.svg
고구려 왕실의 계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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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355년 1월에 태자가 되었다는 기록이 있으니, 소수림왕은 355년 1월 이전에 태어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2] 천추총 또는 마선구 2100호 추정.[3] 양력 음력 10월 23일, 율리우스력 11월 16일[4] 북한 학계가 소수림왕의 연호라고 주장하지만 근거는 전혀 없다.[5] 북한 학계가 소수림왕의 연호라고 주장하지만 근거는 건시(建始)와 같이 전혀 없다.[6] 이런 이름 때문에 제3대 대무신왕의 다른 명칭에서 제기되는 해씨 고구려설이 부정되기도 한다. 그리고 이러한 이명으로 소수림왕 시기에 고구려 왕계가 정리된 것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한편으로는 고구려인들이 소수림왕을 어떻게 평가했는지를 알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한데, '대해주류왕'(解朱留王)이라고 불렸던 영웅 대무신왕과 함께 놓고 보면 단번에 드러난다. 고구려인들은 소수림왕을 '소해주류' 즉 '작은 대무신왕'에 비유한 것이다.[7] 전진의 부견은 농경은 물론 유학도 장려했다. 즉 전진에서 온 사신들과 관료들이 유교ㆍ불교 경전과 태학 설립 방법에 관한 책, 율령책도 들고 왔었을 것이다.[8] 각훈(覺訓)이 기록한 《해동고승전》(海東高僧傳)에 동진의 고승 지둔(支遁)(314년 ~ 366년)이 고구려의 도인(高句麗 道人)에게 축법심(竺法深)이라는 스님의 덕행을 찬양하는 서신을 보낸 기록이 나온다.[9] 다만 조선 초기의 권근은 "부모의 원수를 갚을 생각은 안하고, 율령을 반포하며 불사(佛寺)를 창건만 하다가 이제 와서 겨우 수곡성 하나 함락시킨 그것도 복수라고 할 수 있나?"라며 《동국사략》에서 비난했다. 권근이 근본적으로 불교를 괴력난신으로 보는 유학자임을 감안하긴 해야겠지만.[10] 백제 역사상 평양성을 직접 본 것이 확실한 왕은 근초고왕근구수왕 뿐이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성왕이 남평양을 점령했다는 글귀가 있어서 성왕 역시 평양을 직접 본 것이 아닌가 하지만 '남평양'은 고구려에서 지금의 서울 일대를 가리키던 표현이었다. 다만 《일본서기》에서는 한성과 평양을 구분지어 서술하고, 백제-왜의 연합군이 평양을 치자 고구려 왕이 궁의 담을 넘어 도망쳤다라는 기록이 존재한다.[11] 물론 한국사를 본격적으로 시작한 역사학과 학생 정도 된다면 통일신라신문왕, 고려광종, 조선세종대왕 수준으로 수많은 학습 분량을 제공하는 왕이다. 정비한 제도의 숫자만 본다면 세종대왕과 맞먹는 양인데, 세종대왕은 유명하기라도 하지, 소수림왕은 제대로 배우기 전까지 몰랐던 경우가 부지기수다.[12] 당장 고구려 말고도 부여전연에게 침략을 당해 50,000여 명이 포로로 끌려가는 등 엄청난 피해를 입었지만 소수림왕처럼 나라를 부흥시키지 못하고 서서히 쇠퇴해갔다. 이런 두 나라의 격차는 광개토대왕 시기에 더욱 극명하게 드러나게 된다.[13] 한국사에서 찾는다면 고려현종 정도이다. 현종도 거란의 침공으로 전국이 쑥대밭이 되는 와중에 체제를 정비하고, 이후에 이어지는 고려의 전성기를 열었다. 다른 나라 역사 중에서는 중국 춘추시대 말기에 오자서가 이끌던 오나라에게 무릎을 꿇었지만 곧장 나라를 강성하게 만들어 냈던 월왕 구천월나라가 있다.[14] 문자명왕의 치세를 들여다보면 이쪽은 결코 명군이라 할 수 없다. 안장왕이 없었더라면 그대로 나라가 퇴락했을 수준이었다. 말년의 의자왕이나 연산군 같은 폭군은 아니었지만, 최소한 암군의 반열에 들어가며, 고구려가 남쪽으로 더 진출하지 못하게 만든 원흉이다.[15] 보통 문자명왕까지를 전성기로 취급하는 경향이 강하지만 엄밀히 따지면 안장왕의 치세 때까지 전성기가 유지되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오히려 부왕 말기에 있었던 위기를 극복함과 동시에 패수 전투를 시작으로 혈성 및 오곡원에서 백제군을 상대로 연전연승을 거둠으로써 한강 이남 지역으로 그들을 몰아냈고, 과거 후연의 수도이기도 했던 북위의 용성을 침공해 약탈하는 등 활발한 영토 확장을 벌이며 고구려의 국력을 유지시켰다. 또한 양면 외교 정책도 결실을 맺으면서 남북조로부터 동시에 고구려 왕에 임명받기도 했다. 본격적인 쇠퇴기는 안장왕 사후 안원왕, 그것도 왕위 계승을 둘러싸고 내분이 벌어지는 말엽부터 시작되었다.[16] 정확히는 최보가 《동국통감》에서 쓴 사설을 인용한 것이다.[17] 이차돈의 순교로 불교를 공인한 법흥왕 대신, 묵호자에게 상을 내리고 불교를 최초로 긍정적으로 인정하려 한 눌지 마립간이 대신 불교 3형제의 일원으로 언급되기도 한다. 물론 불교 같은 간사한 말(邪說)을 끌어들인 만악의 근원, 원흉 취급이므로 좋은 건 절대 아니다.[18] 예를 들면 신라의 경우, 중대보다 하대 왕들이 대체로 평가가 더 좋다. 물론 어느 역사적 국가든 간에 국교로 정한 종교든 학문이든 후세에 갈수록 타락한다는 점은 변함이 없기에 이건 조선고려를 까기 위해서란 목적이 크다. 근데 모순점은 조선은 말로만 불교를 탄압했지 속으로는 아직도 불교를 믿는 국가이기도 하면서 태조 이성계도 말년에는 불교에 종사했다는 것이다. 그 외에도 세종세조 등도 모두 말년에는 불자가 되었다. 왜 이런지는 숭유억불을 참고하자. 그리고 사실 세조는 한창 집권하던 시기에도 공공연히 호불군주라고 자칭하며, 불교 서적들을 편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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