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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문서 | 칠성산 871호 | ||
기타 | 해씨 고구려설 |
1. 소개
고구려 초기 군주들의 성은 해(解)씨였으나, 이후 고(高)씨로 교체되었다는 학계 일각의 가설.2. 내용
삼국유사에는 동명성왕이 성을 고(高)로 정하기 전에는 본래 해(解)였다는 언급이 있다. 삼국유사 왕력 유리왕, 대무신왕, 민중왕 부분에서는 성을 해씨(解氏)라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 초기 고구려 왕족들은 유달리 이름에 해(解)자가 자주 들어간다. 대무신왕은 대해주류왕(大解朱留王)이라고도 하며, 민중왕은 해색주(解色朱), 모본왕은 해우(解憂) 혹은 해애루(解愛婁), 소수림왕은 소해주류왕 혹은 해미류왕이다. 유리명왕의 아들 중에는 해명태자(解明)가 있었다. 그리고 동명성왕의 아버지는 바로 해모수(解慕漱)다.따라서 본래 고구려의 국성은 해씨였으나 나중에 고씨에 의해서 역성혁명이 일어났고, 고씨 왕가가 전대의 왕들까지 소급하여 기록을 조작, 해씨를 고씨로 고쳐놓았다는 주장이 해씨 고구려설이다. 모본왕이 석연치 않은 암살을 당한 후 왕위에 오른 태조대왕이 '태조'라는 시호를 부여받은 것도 또다른 정황 증거로 제시된다. 보통 태조는 창업군주에게 올리는 호칭이기 때문에 6번째 왕에게 태조가 붙은 것은 상당히 부자연스럽다.[1] 이에 따르면 고구려가 처음 해씨 주도로 건국해서 모본왕은 해씨의 마지막 왕, 태조대왕은 고씨의 첫 번째 왕이 된다. 실제로 그랬다면 고구려에선 계루부 고씨가 아니라 연노부 해씨가 원래 왕가였던 셈이다.
노태돈 교수는 동명성왕계와 태조대왕계가 별개의 왕가일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자신의 저서 『고구려사 연구』에서 태조대왕대 이후 기록에서는 나(那)라는 이름이 붙는 정치체가 꽤 등장하는데, 그렇다면 모본왕 이전 기록에 '나'가 더 많이 등장하여야 하지만 그렇지 못한 점, 인명을 기술할 때 모본왕 이전 기록에서는 부명을 표기하지 않고 '매구곡인 상수(買溝谷人 尙須)[2]'라는 식으로 지명을 표기하는 점, 부여 관계 기사가 동명성왕-유리명왕-대무신왕 3대에 나뉘어 기술되어 있는 점을 들어 모본왕 이전 기록은 태조대왕 이후 기록보다 기록으로써 정착하는 과정이 늦은 것으로 보인다면서 원래는 설화처럼 구전되던 이야기가 나중에 기록된 것으로 추정되며, 따라서 동명성왕계와 태조대왕계는 별개의 왕가일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두 왕가를 이어붙인 인물은 소해주류왕이라는 별칭을 가진 소수림왕으로 추정된다고 하였다.
3. 반론
위에서 언급했듯이 고구려 중기의 왕인 소수림왕의 또 다른 왕호가 소해주류왕 또는 해미류왕인데, 해씨에서 고씨로 역성혁명이 일어났다기 보다는 해씨=고씨라는 것이 학계의 일반적인 시각이다.[3] 고구려의 왕성이 어떤 단어였는데, 해(解)는 고구려어로 그 단어의 소리를 한자로 음차한 것이고, 고(高)는 그 단어의 뜻을 한자로 훈차한 것이라는 가설이다. 해(解)는 지금 그 "해(태양)"와 뜻이 동일할 가능성이 크고,# "고(高)"는 높은 곳, 하늘, 해라는 뜻도 가지고 있으므로 설득력이 있는 주장이다.적어도 통일신라시대 이전까지 만주와 한반도는 완전한 한자문화권은 아니었다는게 정설이다. 고구려, 백제, 신라 시기의 인물들 대부분은 사서에 전해져 내려오는 인명은 '한자 음차'이며, 같은 인물도 '음차명'을 여러가지 사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국가명, 인명, 지역명 모두 비슷하다. 정해진 규칙이 있는 것도 아니고 사람마다, 상황에 따라, 시기에 따라 다른 음차명을 사용했던 것.
사실 이는 '현대'도 마찬가지다. 외국어 인명의 표기법은 통용되는 표기가 있어도 다르게 쓰는 경우가 있고 그 통용 표기가 정해지기 전엔 여러 표기가 난립하는 경우도 있다. '버락 오바마'를 예전에는 '배럭 오버마', '바락 오바마'라고 쓰기도 했으며 일본어도 같은 성씨를 '코이즈미', '고이즈미' 다양하게 쓴다. 다시 말해 '해씨 고구려'설은 마오쩌둥과 모택동이 동일 인물임을 알지 못하고 '마오씨'와 '모씨'가 따로 있다고 착각한 수준의 오류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
대체적으로 현재 학계에서는 추모왕부터 이미 고구려의 정치적 중심이 계루부로 넘어갔다고 본다. 애초에 첫 수도이자 동명왕묘가 있는 오녀산성은 계루부에 속하는데 연노부가 그런 데서 왕 노릇을 했을까? 고구려 왕족과 귀족의 성씨 자체가 당시에는 없다가 중국과의 오랜 지속적인 교류로 한자 문화를 도입한 후 정하고 나서 선대로 소급한 것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너무 몰입하지 않는게 나은 문제일 수도 있다. 다만 고구려에서도 왕가 교체가 있었던 게 사실이라면 해씨도 계루부 소속이라 계루부 내의 긴밀한 친척 관계였던 왕가 내 분파 사이의 교체일 가능성이 훨씬 높다. 고대 동북아시아에서는 같은 부계 계통이라도 거리가 너무 멀어지거나 할 때 성씨를 달리하는 경우가 흔했다[4]. 왕가 교체에 대해서는 이렇게 석연찮은 암시가 사서에도 남아있는 반면 부 단위의 세력 교체는 동명성왕 이후로는 사서상으로도 전혀 암시된 바가 없다. 사서에서 시기는 명시해놓지 않았지만 연노부에서 계루부로의 세력교체를 기술해놓긴 했는데 이건 동명성왕 대의 졸본부여설>고구려의 일을 나타낸 것일 가능성이 훨씬 높다.
또한, 후대에 북위(北魏)의 효문제가 탁발씨(拓跋氏)에서 원씨(元氏)로 한화(漢化)하여 성씨를 바꿨던 것처럼 고구려도 해씨에서 고씨로 성씨를 바꾼 것으로 본다면 소수림왕의 사례도 합리적으로 설명 가능하다.[5] 사실 기원전 시대에는 해라는 칭호든 고라는 칭호든 현대적 의미의 성씨가 아닐 수 있다. 성씨로 언급한 것은 당대의 내용이 아니라 모두 후대의 기록을 조합한 것이며 비교적 비슷한 시기의 중국 정사 기록에는 성씨가 나타나지 않는다.
덤으로 백제의 경우에도 삼국유사 제2권 기이 제2에서 '그 세계(世系)는 고구려와 마찬가지로 부여에서 나왔기 때문에 씨(氏)를 해(解)라고 했다.'라는 언급이 있다. 근데 나중에는 부여씨가 되었다.[6] 이 역시 해라는 명칭이 단순히 현대적 성씨로 이해하기엔 무리가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참고로 백제의 경우에도 고이왕계의 우(優)씨에서 초고왕계의 부여씨로 왕가가 교체된 것이 아니냐는 의심이 있다.
解를 풀다의 사음훈차로 보고 '불' 즉 부여의 다른 표기라는 설도 있다.
[1] 물론 무조건 첫 임금이 태조가 되는 것은 아니고, 실질적으로 건국 준비를 다 해놓은 뒤에 즉위와 건국만 아들이 한 경우에는 임금이 되지 못하고 죽은 아버지를 태조로 추존하는 경우도 있다. 삼국지로 유명한 조위의 조조, 서진의 사마소가 이런 케이스다. 허나 고구려의 태조대왕은 제6대 왕이라 특이한 케이스긴 하다.[2] 대무신왕 13년(기원후 30년)에 사촌 우도와 함께 귀순해온 인물.[3] 이 두 글자는 오늘날에는 전혀 다른 발음이지만 상고시대에는 각각 ke, kew로 비슷한 발음이었다[4] 가장 대표적인 경우가 일본의 공가 가문인 후지와라와 중국 주나라의 왕실 가문이다. 후지와라는 본래는 하나의 단일 가문이었으나, 오랜 기간을 거치면서 방계 가문들로 대거 분화되면서, 결국 가문 내에서 종가에 해당하는 최상류층 가문들인 고셋케로 최종 분화되었다. 주나라 왕실은 희씨 성을 칭했는데, 주나라가 상나라를 정복하는 과정에서 함께 정복한 주변 지역들을 왕족들에게 분봉해준 뒤로는, 이렇게해서 형성된 제후 가문들 간의 혈연 관계가 갈수록 멀어지자, 결국 성(姓)과 씨(氏)를 분리하여 칭하여 서로의 가문을 구분하는 관습이 생겼다.[5] 청나라 황실인 아이신기오로(황금의 기오로)씨가 김(金)씨로 바뀐 사례도 있다. 여기서는 아이신기오로의 뜻은 물론이고, 청나라의 이전 국호인 금나라의 의미도 포함한 중의성을 담고 있다. 후금은 이전의 금나라와 구별하기 위해 후대에 소급한 것이고, 당시 정식 국호는 대금이었다. 대청으로 개칭된 건 숭덕제 연간.[6] 일본서기 위덕왕에 대한 기록을 보면 고구려장수에게 위덕왕이 일기토를 걸면서 고구려(의 국성)와 성이 같다고 언급했다. 중국식 엄격한 성씨 개념을 적용하면 백제와 고구려는 해성이고 촌수가 멀어지면서 고씨와 부여씨로 나뉘었다고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