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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무신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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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무신왕 | 大武神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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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무신왕릉으로 추정되는 마선구 626호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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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사망
(음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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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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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씨 고(高) / 해(解)(?)
무휼(無恤) / 주류(朱留) / 미류(味留)[4] / 막래(莫來)[5]
부모 부왕 유리명왕
모후 왕후 송씨[6]
형제자매 6남 1녀 중 3남[7]
왕후 원비[8], 차비 해씨[9]
자녀 2남[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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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호 대무신왕(大武神王)[12]
대해주류왕(大解朱留王)
대주류왕(大朱留王)[13]
별호 북국신왕(北國神王)[14]
군사경력
지휘 고구려군
참전 부여 정벌
낙랑 정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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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이름3. 생애
3.1. 왕자 시절3.2. 왕위에 오르다3.3. 정복 전쟁
3.3.1. 부여 정벌3.3.2. 개마국 & 구다국 정벌3.3.3. 낙랑 정벌3.3.4. 신라 침공과 중원 공격?
3.4. 통일제국 후한과의 관계
4. 후계5. 대중매체에서6. 기타7. 《삼국사기》 기록8. 참고 항목9.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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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구려의 제3대 왕.

고구려에서 태어난 첫 번째 왕이자,[15] 고구려 초기 팽창 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해 개마국, 구다국을 복속시켰으며, 최씨낙랑국을 멸망시키고 후한 요동군의 침입을 막는 등 대외적으로도 세력권을 굳건히 함과 함께, 내부적으로는 좌보와 우보를 임명하고 권세가들의 탐학을 제어하는 등 다양한 치적을 남긴 왕이었다.#

2. 이름

시호의 뜻이 참 거창한데 풀이하면 전쟁의 신, 큰 무예의 신이라는 의미다. 최씨낙랑국의 군주 최리는 아예 북국신왕(北國神王)이라고 불렀으며, 휘는 '무휼'이었다.[16]

호와 휘는 여러 가지가 전해져 오는데 유래는 다음과 같다
왕호 출처 시기 비고
대주류왕
大朱留王
광개토대왕릉비 고구려
414년
고구려 공식 기록.
대해주류왕
(大解朱留王)
삼국사기 고려
1145년
《삼국사기》의 기록.
대무신왕
(大武神王)
삼국사기》, 《삼국유사 고려
1145년, 1281년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기록.
출처 국가 비고
주류
朱留
광개토대왕릉비 고구려 광개토왕릉비에 나오는 시호인 '대주류왕'에서 주류가 이름이라는 주장이 있다.
무휼
無恤
《삼국사기》 고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의 기록.
미류
味留
《삼국유사》 고려 《삼국유사》의 기록.
막래
莫來
위서 북제 위서》 권100 <고구려>
이 중 무휼은 현대에 와서 발음이 와전된 것으로, 광운식 발음을 적용하면 실제 이름은 무술에 가까워진다. 막래는 세자(世子)를 뜻하는 고구려어 마카리요모(まかりよも)와 어원이 같은 것으로 보이고, 후대의 막리지와도 관계가 있어 보인다.

참고로 '무신'(武神)과 대무신왕의 이름인 '막래'(莫來)는 중국 상고음 발음{*ma-Cə.li[n], *mo-Cə.li[n], *mak(a)rək}이 정확히 일치한다. 이를 보면 대무신왕의 '무신'은 대무신왕의 이름인 '무휼' 혹은 '막래'의 이표기일 가능성이 있어 보인다.

그리고 '무신'(武神)과 대무신왕의 이름인 '무휼'(無恤)은 중국 중고음 발음(*mu-shin, *mu-shut 객가음 : *mu-shṳ̀n, *mu-shin, *mu-sut)이 정확히 일치한다.

3. 생애

3.1. 왕자 시절

제2대 유리명왕의 장남이었던 도절이 요절하고, 차남인 해명은 부왕과의 불화끝에 자결하는 바람에 3남인 무휼이 태자에 옹립되었다.[17]

삼국사기》에 첫 등장한 것은 유리명왕 재위 28년 8월인데, 부여대소왕이 사신을 보내 고구려에게 복속을 명령하자 고구려의 세력이 아직 약한 것을 염려한 유리명왕은 복속하겠다는 회답을 보냈다. 하지만 어린 나이의 무휼은 동부여의 사신을 만나 대소왕에게 중국 고사인 누란지위에서 따온 경고를 남겼다.[18]

그로부터 4년이 지난 유리명왕 32년 겨울 11월에 부여가 쳐들어오자 무휼은 적은 군사로 복병전술을 활용해 학반령 전투에서 부여군을 격파하고 모두 죽였다.

다음해인 유리명왕 33년 봄 정월에 태자에 책봉되었는데 이때 나이가 11세였다. 근데 이 기록이 뭔가 이상하다. 전해인 32년에 부여군을 학반령에서 대파했다고 기록했는데, 그럼 불과 10세의 어린 나이에 뛰어난 전술을 써서 적을 죽였다는 말이 된다. 다만 알 수 있듯이 11세는 아닌 것으로 보아 이때 왕자 무휼의 나이는 20~21세로 추정된다. 물론 진짜 10세 때 무휼이 소년병으로 참전했다면, 일국의 왕자였던 만큼 직접 최전선에서 싸웠다기보다는 휘하의 장성한 부하를 통해 부여군을 격파했다고 볼 수도 있다.

무휼의 어머니는 고구려의 땅인 다물도의 영주이자, 비류국의 전 왕인 송양의 딸이었다라고 기록에 나오지만 나이 문제와 얽혀 신뢰하지 않는 여론도 꽤 있다. 정확히 말하면 무휼의 어머니가 다물후 송양의 딸이라고 했는데, 정작 같은 《삼국사기》의 기록에서 송양의 딸인 왕후 송씨는 유리명왕 3년에 사망한다. 만약 유리명왕 3년에 무휼이 태어났다면 태자일 때의 나이는 이미 장성한 30세이고, 왕위에 올랐을 때의 나이는 37세이다. 또한 왕후 송씨가 사망했다는 기록 직후에 화희치희를 후궁으로 받아들였다는 기록이 있기 때문에 사망 기사는 왕후의 추가 책봉을 정당화하기 위한 조작이라는 해석도 있다. 학자들에 따라서는 유리명왕이 송양의 다른 딸과 다시 결혼해 무휼을 낳았다는 의견을 제기하기도 한다.[19] 하지만 〈황조가〉에 있는 기록에는 송양의 딸이 아닌 다른 이가 왕후였으므로 연구가 더 필요하다.

앞서 언급된 것처럼 유리명왕의 손자라면 차라리 해석하기가 더 쉬운데, 이 경우라면 장남인 태자 도절의 아들일 가능성이 있거나 송씨가 속한 비류부(후대의 소노부)가 고구려의 왕후족이니[20] 후계자였던 여율이 송양의 딸 또는 손녀와 결혼해서 대무신왕 무휼을 낳았을 수도 있다.

반대로 대수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 단서가 되는 기록도 있는데, 앞서 등장한 유리명왕 28년 8월 조에 따르면...
時 王子無恤 年尙幼少 聞王欲報扶餘言 自見其使曰 我先祖神靈之孫 賢而多才 大王妬害 讒之父王 辱之以牧馬 故不安而出 今大王不念前愆 但恃兵多 輕蔑我邦邑 請使者 歸報大王 今有累卵於此 若大王不毁其卵 則臣將事之 不然則否
이때 왕자 무휼(無恤)은 나이가 아직 어렸으나, 임금이 부여에 회답하려 한다는 말을 듣고 스스로 그 사신을 만나 말했다.
“나의 선조는 신령의 자손으로서 어질고 재능이 많았다. 그런데 대왕이 시기하여 해치려고 부왕(父王)에게 말이나 기르는 직위를 주도록 참언하여 욕되게 했으므로 불안하여 피해 나온 것이다. 지금 대왕(부여의 대소왕)이 지난 날의 잘못을 생각하지 않고, 다만 병사가 많은 것을 믿으며 우리나라(고구려)를 업신여기고 있다. 사신은 돌아가 대왕에게 '지금 여기에 알들을 쌓아 놓았으니, 대왕이 만약 그 알들을 허물지 않는다면 신은 왕을 섬길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섬기지 않을 것이다.'라고 아뢰어라.”
이와 같이 왕자 무휼이 초대 왕 추모를 '부왕'이라고 칭하는 기록이 있는데, 이에 따르면 대무신왕 무휼은 유리명왕과 같은 대수의 인물이 되며, 나이 문제도 해결된다. 그러나 《삼국사기》의 부여 관련 기록에 대해 당시의 사실이 아니거나, 후대에 첨부되었다고 보는 의견도 많기 때문에 사료는 참고만 해 두는 것이 좋다.

유리명왕 36년 고구려의 태자로서 국정에 참여했다.

3.2. 왕위에 오르다

신한교체기로 인해 중국 대륙이 혼란스러웠을 때인 서기 18년, 유리명왕이 승하하자 태자 무휼이 15세의 어린 나이로 신생 국가 고구려의 제3대 왕위에 올랐다.

왕위에 오르고 재위 3년째 되던 해 봄 3월에 동명왕묘를 건립했고, 가을 9월에는 골구천(骨句川)에서 사냥을 하다가 신마(神馬)를 얻어 그 이름을 '거루'(駏䮫)라고 했다.

3.3. 정복 전쟁

3.3.1. 부여 정벌

재위 3년 10월 부여의 대소왕이 사신편으로 붉은 까마귀를 보내왔는데 머리 하나에 이 둘이었다. 처음에 부여 사람이 잡아서 대소왕에게 바친 것이었는데 어떤 사람이
까마귀는 검어야 정상인데 붉게 되었으니 기이한 일이다. 그리고 몸은 둘인데 머리가 하나인 것은 두 나라가 한 명의 왕 아래에 합쳐진다는 의미이니, 장차 부여가 고구려를 차지할 징조가 아니겠는가?
라고 말하자 왕이 이를 듣고 기뻐서 고구려에 보내고 그 말도 알려준 것이었다. 그런데 고구려에서는 이를 보더니
까마귀의 검은색은 북방을 뜻하는데 남방을 뜻하는 붉은색을 띠고 있으니, 이는 천명이 남쪽으로 흐른다는 말이다. 또한 상서로운 물건을 부여가 받아놓고 우리에게 내어주다니 이제 둘(부여와 고구려)의 앞날을 쉬이 알 수 없을 것이다.
라고 풀이했다. 대소왕은 그 말을 전해 듣자 크게 후회했다.[21] 남방이 붉은색이라든가, 북방이 검은색이라든가 하는 것은 오행설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해석된다.[22]

대무신왕은 재위 4년 겨울에 군대를 규합하여 숙적인 부여를 공격했다. 이때 여러 가지 기이한 일이 일어났다. 비류수 가에서 물가를 보니 마치 여인이 솥을 가지고 있는 듯했는데, 가까이 가보니 솥만 있었다. 그 솥은 불을 피우지 않아도 스스로 열이 나서 밥을 지어[23] 군대를 먹일 수 있었다. 나중에 한 장부가 나타나 그 솥은 자신의 누이가 잃어버린 것인데 왕이 찾았으니 자신이 솥을 지고 따를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하여 대무신왕이 '부정(負鼎)씨'라는 성을 하사했다.

이후 이물림(利勿林)에서 잠을 자는데, 밤에 쇳소리가 들려서 밝은 뒤에 찾아보게 하니 금도장과 병기를 얻었으며, 대무신왕은 이를 하늘이 내린 것이라고 했다. 이윽고 길을 떠나려 할 때 북명(北溟) 사람 괴유라는 기인이 나타났다. 그는 키가 9척에 이르렀고, 얼굴이 하앴으며, 눈에 광채가 있었다. 그는 왕이 부여 정벌을 하러 떠난다니, 자신은 부여 군주의 머리를 베어 오겠다고 하여 대무신왕이 따르도록 했다. 또 적곡(赤谷) 사람 마로(麻盧)라는 자가 나타나 왕을 따라서 창으로 길을 열겠다고 하자 그렇게 하도록 했다.

재위 5년 봄 2월에 대무신왕 휘하의 고구려군은 부여의 남쪽으로 진군했는데, 진흙이 많은 땅의 평지를 골라 군영을 만들어 쉬었다. 그때 부여의 대소왕이 병력을 동원하여 출전했으나 군대가 진창에 빠져버리고 말았다. 그때 괴유가 공격을 개시하자 부여의 모든 군대가 무너졌고, 급기야는 괴유가 대소왕의 머리를 참수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왕의 죽음에 격노한 부여의 군대는 쉽게 굴복하지 않고, 계속 고구려군을 격렬하게 공격하여 둘러싼 뒤 위기에 빠뜨렸는데, 이에 위급함을 느낀 대무신왕이 하늘에 영험을 빌자 안개가 피어올라 7일 동안 지척을 분별할 수 없게 되었다. 이 틈을 타 대무신왕은 풀로 만든 허수아비에 무기를 쥐게 한 거짓 군사를 군영에 만들어 놓은 다음, 샛길로 군대를 이끌고 도망쳐 나올 수 있었다. 이때 신마 거루와 비류수에서 얻은 신묘한 솥을 잃어버렸다. 하지만 거루는 이듬해 3월에 부여의 말 100필을 거느리고, 고구려로 돌아왔다.

가을 7월에는 부여 군주의 사촌동생이 부여 사람 10,000여 명과 함께 투항해왔다. 이에 대무신왕은 그를 왕작에 봉하고, 연나부(掾那部)에 두었다. 이 연나부는 이후 절노부로 바뀌어 대대로 고구려의 왕후를 배출했으며, 고추가라는 높은 지위를 얻는 등, 전 왕족인 소노부와 함께 계루부 왕권에 버금가는 세력의 2톱을 달리게 되었다. 부여 왕의 사촌동생의 등에 줄무늬가 있어 왕은 '낙(絡)' 씨를 하사했다.[24]

3.3.2. 개마국 & 구다국 정벌

재위 9년 대무신왕은 개마국(蓋馬國)[25]을 정벌하고, 구다국(句茶國)의 항복을 받았다.

3.3.3. 낙랑 정벌

재위 15년, 최리가 통치한 낙랑국의 항복을 받았다. 호동왕자낙랑공주의 비극적인 사랑 이야기는 이때의 일화로, 이후 호동은 계모의 참소로 자결했다.

재위 20년에는 신생 통일제국 후한 휘하의 낙랑군을 정벌하여 멸망시켰다. 그러나 대무신왕이 승하하기 직전 도로 후한에게 빼앗겼다.

낙랑 정벌 기록이 두 개가 나온다. 즉, 낙랑이 두 번 멸망하는 이상한 내용이다. 낙랑국과 낙랑군은 완전히 별개라는 주장도 있고, 연계가 있지만 다르다는 말도 있으며, 같다는 말도 있는 등 말 그대로 온갖 설이 난무하고 있다. 낙랑군, 최씨낙랑국 항목 참조.

3.3.4. 신라 침공과 중원 공격?

고려시대 후기 일연이 쓴《삼국유사》에선 서기 42년, 신라에 고구려군이 쳐들어왔다는데, 이전에 김부식이 쓴《삼국사기》에는 그런 내용이 없다.

그리고 단재 신채호로부터 후한의 초대 황제인 세조 광무제 유수와 9년 동안 전쟁을 벌인 고구려의 군주로 지목받았는데, 이 또한 《삼국사기》에는 기록이 없다.참고 대충 낙랑을 빼앗고, 다시 후한에게 털리는데 걸린 기간이 7년여 정도이니 이 즈음해서 전쟁을 벌였을 가능성은 있다.

하지만 고구려는 제2대 유리명왕때 이미 시라무렌 강에서부터 난하에 걸쳐 존재한 동호선비족들을 정복한 적이 있었고, 제5대 모본왕이 시해된 다음에 즉위한 제6대 태조대왕 때는 10개의 성을 요서 지역에 건설했다. 《후한서》에 고구려가 선비족을 이끌고 한나라를 공격한 기록이 있다는 점 때문에 무조건적으로 틀렸다고 볼 수도 없는 상황이다.[26] 이 부분만 해도 오래된 떡밥이다.

게다가 제4대 민중왕 때 동해인이 고구려에 고래를 바쳤다고 하니 동해 부근의 영토를 이미 차지했어야 했는데, 역시 《삼국사기》에는 없다. 동예옥저 세력이 고구려에 복속한 흔적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가장 중요한 점은 서기 32년 이후 10년 동안의 기록이 《삼국사기》에 나와있지 않다는 것이다.

3.4. 통일제국 후한과의 관계

재위 11년에는 후한의 요동태수가 공격해왔으나, 을두지의 지략으로 위나암성을 굳게 지키며 막아냈다.

자세한 내용은 을두지 문서 참고.

재위 15년에는 사신을 파견해 후한에 조공을 바쳤고,[27] 광무제가 고구려 왕의 호칭을 회복시켰다.

4. 후계

《삼국사기》에 따르면 첫째 왕후 소생이어서인지, 일단 그 아들이 태자를 했지만, 대무신왕이 승하했을 때 워낙 나이가 어려서 대무신왕의 동생인지, 친척인지 헷갈리는 민중왕이 대신 제4대 왕으로 즉위했다.

5. 대중매체에서

삼국통일전쟁 시기, 고려 시기, 조선 시기에 비해 기록이 비교적 상세하지 않은 고대의 국왕치고는 꽤 드라마틱하면서도 튀는 행적을 많이 남긴 군주인지라 대중매체에서 다루기에 매우 적합하다. 왕자 시절에 두 형과 한 명의 동생을 잃었고, 특히 형인 해명은 부왕인 유리명왕과의 갈등으로 비극적인 최후를 맞았는데, 정작 대무신왕 본인 역시 아들 호동을 끝내 죽게 만들었다는 비극의 연쇄성이라던가, 신마 거루 및 용사 괴유 같은 뭔가 기이한 요소가 정벌에 나서는 젊은 왕을 도왔다는 점이 있다거나, 조부인 동명성왕 때부터 고구려를 괴롭힌 숙적이었던 대소왕을 전사시킨 점 등 가정 내의 비극에 초점을 둔 묘사나, 선대 왕들의 시대부터 이어진 끈질긴 악연을 끊는 영웅담에 초점을 둔 묘사 등이 스토리를 짜기 매우 좋은 요소를 갖추고 있고, 시호인 대무신왕이나 휘인 무휼, 그리고 별호인 북국신왕 등 거창하고 간지나는 이름 때문에 대게는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경우가 많다.

6. 기타

7.삼국사기》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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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석문 및 문헌기록상 신라 최초로 성씨를 사용한 왕은 진흥왕임
* 29~31권까지 연표
* 32~40권까지 잡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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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 〈대무신왕 본기〉
一年秋冬十月 대무신왕이 즉위하다
二年春一月 국내성에 지진이 일어나 대사면을 실시하다
二年春一月 백제인이 투항해오다
三年春三月 동명왕 사당을 세우다
三年秋九月 왕이 신령스러운 말을 얻다
三年冬十月 부여왕이 붉은 까마귀를 보내오다
四年冬十二月 부여를 정벌하려고 출발하여 세 사람을 얻다
五年春二月 부여 정벌에 실패하다
五年春三月 신마 거루가 부여말을 데리고 오다
五年夏四月 부여 왕 대소의 동생이 압록곡에 와서 갈사국을 세우다
五年秋七月 부여 왕의 사촌 동생이 투항해오다
五年冬十月 북명인 괴유가 죽다
八年春二月 을두지를 우보로 삼다
九年冬十月 개마국을 정벌하여 군현으로 삼다
九年冬十二月 구다국이 항복해오다
十年春一月 좌보와 우보를 임명하다
十一年秋七月 잉어를 적진에 보내 포위를 풀다
十三年秋七月 매구곡 사람이 투항해오다
十四年冬十一月 겨울에 천둥은 치는데 눈은 오지 않다
十五年春三月 백성들이 원망하는 구도 등 세 사람을 서인으로 삼다
十五年夏四月 최리의 낙랑을 정복하다
十五年冬十一月 왕자 호동이 자살하다
十五年冬十二月 왕자 해우를 태자로 삼다
十五年冬十二月 후한에 조공하니 광무제가 왕호를 회복시키다
二十年 낙랑을 멸망시키다
二十四年春三月 국내성에 우박이 내리다
二十四年秋七月 서리가 일찍 내려 곡식이 피해를 입다
二十四年秋八月 가을에 매화가 피다
二十七年冬九月 광무제가 낙랑을 정벌하다
二十七年冬十月 대무신왕이 승하하다

8. 참고 항목

9. 둘러보기

파일:고구려 군기.svg
고구려 왕실의 계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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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제 하백
 
 
해모수
 
유화
 
 
 
부여 왕실 1대
동명성왕
 
 
 
2대
유리명왕
비류 온조
백제 왕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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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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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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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익 6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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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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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대왕
고인고
 
 
 
 
 
 
고추안 9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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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계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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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천왕
 
 
 
12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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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예물 고사구
 
 
 
 
 
13대
서천왕
고달가 고일우 고소발 공주
 
 
14대
봉상왕
고돌고
 
15대
미천왕
 
 
 
16대
고국원왕
고무 고림
 
 
17대
소수림왕
18대
고국양왕
 
 
고강 19대
광개토대왕
 
20대
장수왕
고익
 
 
 
 
 
고조다 고승우 공주 고승천
 
21대
문자명왕
 
 
 
22대
안장왕
23대
안원왕
고안학
 
 
24대
양원왕
왕자
 
25대
평원왕
 
 
 
 
26대
영양왕
27대
영류왕
평강공주 대양왕
 
 
고환권 28대
보장왕
 
 
 
 
 
고복남 고임무 고덕남 고덕무 공주
 
부흥
보덕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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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러나 고구려 왕릉의 명칭들 가운데 촌(村)이 붙은 경우가 없다는 점을 생각하면 대수촌(大獸村)은 '대수림'(大獸林)을 잘못 기재한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2] 마선구 626호 추정.[3]삼국사기》 <유리명왕본기> 기록.[4] 일반적으로 '수류'(殊留)를 오기한 것으로 본다. 이 경우 〈광개토왕릉비문〉에 나오는 이름인 '주류'(朱留)와 음운적인 유사성을 찾을 수 있다.[5]위서》와 《북사》에 나오는, 주몽-(여달)-여율의 뒤를 이어 즉위해 부여를 병탄한 왕이다. 막래의 행적이 대무신왕과 일치하므로 막래를 대무신왕으로 보는 설이 있다. 반대로 조선 후기 한치윤의 《해동역사》는 “이른바 여율과 막래는 지금 상고할 수 있는 것이 아니지만, 막래는 '모본' 글자가 와전된 것 같다."(所謂如栗莫來今未可考而莫來似是慕本之字訛者也)라는 주장을 실어, 서로 다른 두 설이 양립하고 있다.[6] 비류의 수장 송양의 딸. 《삼국사기》의 기록이지만 연대 논란이 있다.[7]고도절, 고해명, 동생 고해색주, 고재사, 고여진, 누이 1명[8] 첫째 왕후, 제5대 모본왕의 어머니. 만화 《바람의 나라》에서는 이지라는 이름으로 나온다.[9] 둘째 왕후, 호동 왕자의 어머니.[10] 태자 고해우, 왕자 고호동[11]위서기준. 정확한 세대수는 누락되어 있다.#[12] 고려 표기[13] 고구려 표기[14] #[15] 대무신왕의 할아버지인 동명성왕과 아버지인 유리명왕부여에서 태어났다. 네이티브 고구려인.[16] '휼'(恤)은 '근심하다·걱정하다'라는 뜻인데 앞에 無가 붙었으니 걱정할 일이 없다라는 뜻이 된다. 조선 제3대 왕 태종 이방원의 처남들 중에도 정확히 같은 의미의 민무휼(閔無恤)이 있었다. 흥미롭게도 춘추시대 진(晉)나라 공실의 가신이었던 조씨 가문의 종주 조양자(趙襄子)의 이름도 뜻은 달랐지만 음은 똑같은 '무휼'(毋卹)이었는데, 대무신왕이나 조양자나 나라(단 조양자의 시대에는 국가까지는 아니었다.)의 영토를 크게 넓혔다는 점이 같다.[17] 태자 해명이 자결할 당시 대무신왕 무휼은 6세에 불과했다.[18] 이 부분 때문에 후대의 성호 이익은 해명태자의 일과 연계하여 "해명태자가 황룡국에게 깝쳤다고 죽였다면서 왜 무휼은 안 죽였냐?"라고 유리명왕을 비판하기도 했다. 당시 부여는 고구려보다 압도적인 국력을 지닌 강국으로서 동명성왕과 유리명왕 시절에는 부여에게 눌려 지내는 신세였고, 대무신왕 시절 부여와의 전쟁에서 대소왕을 전사시켰지만 고구려도 꽤나 많은 피해를 입었다. 부여와 고구려의 국력은 초기에는 부여가 강했는데 이 흐름이 역전되기 시작한 것이 서기 3세기 말에 벌어진 모용선비의 수장 모용외에 의한 부여 침공 때였다.[19] 만화 《바람의 나라》에서는 이 설을 채택했다.[20] 아마도 작성자가 서부(연노부/소노부)북부(절노부/연나부)를 착각하여 적은 듯하다. 송양은 왕비족인 북부 출신이 아닌 본래 비류국의 국왕으로 비류국은 후에 다물도로 불리게 되었고, 다시 비류나부(沸流那部)로 불리다가 마침내 연노부(涓奴部)-소노부(消奴部)로 불리게 되었는데 제9대 고국천왕 시기에 5부 체계를 5방위명부 체계로 바꾸게 되면서 서부(西部)로 불리게 되었다. 고구려의 왕비족으로 알려진 건 절노부(絶奴部)-제나부(提那部)로 불리다가 5방위명부 체계가 되면서 북부(北部)가 되는 연나부(椽那部)였다.[21] 시대를 막론하고 전쟁을 일으키려면 명분이 필요했는데, 대소왕은 해당 까마귀를 부여가 고구려를 병합할 명분으로 쓰려고 했지만, 젊은 대무신왕은 이걸 되려 고구려가 부여를 병합할 명분으로 바꿔버린 것이다.[22] 사방신을 운운하면 얼핏 도교라고 생각할 수도 있는데, 해당 시점에서 도교는 종교의 흔적을 보이기 이전이었다. 원시 도교는 휠씬 뒤인 후한 말에 일어난 태평도장각이나 장로의 조부인 장도릉이 일으킨 오두미도에서 시작되었다. 오두미도와 태평도 이전의 도교의 씨앗은 말 그대로 방술을 말하는 무당과 같은 샤머니즘이나 마찬가지였다. 대신 음양가도 5행설을 주장했으니 이것이 도교는 물론이고 유교에도 영향을 주게 되었다. 5행상극설을 5행상생설로 갈아엎은 인물이 전한시대의 대표적인 유학자였던 동중서로, 이름에 5행설을 집어넣는 것은 현대의 항렬자까지 영향을 주었다. 동아시아, 특히 중국에서는 국호·연호·인명 등이 5행설을 벗어나는 경우가 드물었다.[23] 이를 두고 한국사 시간에 역사 선생님들이 시대를 앞서간 전기밥솥이라는 드립을 치기도 한다.[24] 반대로 대소왕의 동생이었던 갈사왕[30]은 자신을 따르는 무리를 이끌고, 해두국의 왕을 죽인 후 갈사수 근처에 새로운 나라를 세웠는데 이것이 바로 갈사국이었다. 갈사국은 제6대 태조대왕의 치세때까지 존속하다가 초대 갈사국왕의 손자였던 도두의 치세 때 스스로 고구려에 귀순하여 멸망했다.[25] 국가명이 '개마'이기 때문에 개마고원 일대의 소국으로 비정하는 설이 있다.[26] 이 주석을 붙인 것이 당고종의 태자로 측천무후의 소생이었던 장회태자 이현이었다.[27] 《후한서》 〈광무제본기〉 건무 8년(서기 32년) 12월자 기사에 "고구려 왕이 공물을 바쳤다"는 내용이 실려 있다.[28] 2006년 MBC 드라마 <주몽>에서는 주몽 역을 맡았다. 송일국의 연기는 이번에도 뛰어나서 오로지 예언만 믿고 자신을 매몰차게 버린 아버지 유리명왕에 대한 애증, 한 여자를 향한 지고지순한 사랑, 친구를 잃은 슬픔 그럼에도 이 모든 것을 버리고 고구려의 군주로써 부왕의 유지를 이어야 했던 복합적인 면모를 지닌 대무신왕을 잘 연기해냈다는 호평을 받았다.[29]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890416&cid=62135&categoryId=62281


[30] 흔히 영포나 충구 등의 이름으로 알려져 있으나 이는 창작물의 설정으로 《삼국사기》에는 '이름은 알려져 있지 않고 금와왕의 막내아들' 이라고 알려져 있다. 금와왕의 막내아들인 만큼 당연히 대소왕보다는 동생이지만 어쨋든 이름은 알려져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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