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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왕 관련 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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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제30대 국왕 무왕 | 武王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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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왕 정부표준영정 (2001년, 최웅 作) | |||
<colbgcolor=#008080><colcolor=#fbe673> 출생 (음력) | 581년 이전 추정[1] | ||
백제 금마저 (現 전북특별자치도 익산시) | |||
사망 (음력) | 641년 3월 (향년 60세 이후) | ||
백제 금마저 왕궁[2] (現 전북특별자치도 익산시) | |||
능묘 | 쌍릉(雙陵) | ||
재위기간 (음력) | 백제 제30대 국왕 | ||
600년 5월 ~ 641년 3월 (40년 10개월)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008080><colcolor=#fbe673> 성씨 | 부여(扶餘) | |
휘 | 장(璋)[3] | ||
이칭 | 서동(薯童) | ||
부모 | 부왕 법왕(?), 모후 미상[4] | ||
왕후 | 사택왕후[5], 선화공주(?)[6] | ||
자녀 | 3남 | ||
종교 | 불교 | ||
신장 | 161~170.1cm[9] | ||
아명 | 일기사덕(一耆篩德)[10] | ||
시호 | 무왕(武王) | ||
별호 | 무강왕(武康王) | ||
무광왕(武廣王) | }}}}}}}}} |
[clearfix]
1. 개요
大王陛下年壽與山岳齊固, 寶曆共天地同久. 上弘正法, 下化蒼生.
대왕 폐하(大王陛下)의 연수(年壽)는 산악(山岳)과 같이 견고하시고, 보력(寶曆)[11]은 천지(天地)와 같이 영구하소서. 위로는 정법(正法)[12]을 널리 알리시고, 아래로는 창생(蒼生)을 교화하소서.
미륵사를 세우며 무왕을 위해 바친 기도문. 미륵사 사리함기에서 발췌.
대왕 폐하(大王陛下)의 연수(年壽)는 산악(山岳)과 같이 견고하시고, 보력(寶曆)[11]은 천지(天地)와 같이 영구하소서. 위로는 정법(正法)[12]을 널리 알리시고, 아래로는 창생(蒼生)을 교화하소서.
미륵사를 세우며 무왕을 위해 바친 기도문. 미륵사 사리함기에서 발췌.
백제의 제30대 건길지.
<서동요>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현재 유골이 남아있는 유일한 백제 왕이기도 하다.[13]
2. 생애
자세한 내용은 무왕(백제)/생애 문서 참고하십시오.3. 평가
3.1. 긍정적
40년 10개월간 즉위하여 혜왕 - 법왕 때의 불안한 정국을 수습하고, 백제의 중흥기를 구축했다는 호평을 받는다.[14] 다만, 이와 반대로 무리한 토목 공사와 정복 전쟁으로 백제의 국력을 소모시켰다는 부정적인 평가 또한 받고 있다. 그러나 의자왕 치세 전반기까지도 신라와의 전쟁에서 번번이 승리를 거두었다는 점까지 생각하면 이러한 국력 소모를 백제의 멸망과 관련짓는 것은 다소 지나친 지적이라 할 수 있으며, 전반적으로 탁월한 정치적 역량을 바탕으로 한 능수능란한 외교술로 국가의 위상을 드높였고 군사력을 크게 증강시킨 준수한 치적을 남겼다.결론적으로 동성왕 - 무령왕 - 성왕의 부흥기 이후로 쇠락해져만 가던 백제의 국력을 되살린 명군으로 평가받고 있다.
3.2. 부정적
외교적으로 국제적 신의를 잃어버렸다는 평가가 있다. 분명히 백제 역시 수, 당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려고 계속 노력했지만 나중에 당나라는 백제의 주적 신라와 국가 간 동맹을 맺게 되는데, 위덕왕 때에 비해[15] 무왕은 간을 보는 타산적인 행보를 이어나갔고, 그것이 백제의 대중 외교 신뢰도를 깎아먹은 것 아니냐는 평도 있다. 그러나 당나라를 돕겠다고 하면서도 신라를 공격하기만 했던 이중적인 모습을 당나라가 문제삼기 시작한 것은 무왕이 아닌 아들 의자왕 때다. 의자왕 초창기까지도 당-백제는 그럭저럭 나쁘지 않은 관계 정도는 유지하고 있었는데, 이후 백제가 당과의 약속을 져버린 채 여제동맹을 맺어 신라를 집요하게 공격하면서 고구려를 기필코 멸망시키고자 했던 당과의 사이가 파탄나고 말았다.[16] 특히 655년 백제가 고구려, 말갈과 대놓고 연합해 신라 북방 전선을 초토화시켰는데, 이 시점부터 당은 고구려를 정복하려면 이전에 신라와의 동맹에 훼방을 놓는 백제를 손봐줘야겠다고 결심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말년에 정사에 흥미를 잃어버려 왕비가 정치의 실권을 장악하게 만든 것도 부정적으로 평가받는다.[17]《동국통감》의 평가는 강성함을 믿고 교만함으로 전쟁을 일으키고, 사치에 빠진 점으로 부정적으로 평가했다.
"무왕(武王)은 강성함을 믿고 교만하여 신라를 침략하였으므로 거의 편안한 해가 없이 전쟁을 일으키어 많은 시체가 들판을 덮었는데, 당나라 황제가 조서(詔書)를 내려 군사를 거두라고 효유하자, 겉으로는 비록 사과하면서도 안으로는 사실 그렇지 않았으며, 만년에는 궁궐 남쪽에 연못을 파고 망해루(望海樓)를 세웠으며, 사비하(泗沘河)에서 놀았는데, 즐겁게 노는 데 빠져 게으르고 오만하여져서 오직 시일이 부족하였으니, 나라가 망하지 않은 것이 다행이었습니다."
4. 기타
- 백제 때부터 만들어지기 시작되었다고 추정되는 술인 한산소곡주와 관련된 기록이 삼국사기에 남아있다. 무왕 37년(636년), 신하들과 고란사(皐蘭寺) 부근의 사비하(泗沘河, 현 백마강) 북포(北浦)에서 연회를 가졌는데, 소곡주를 마신 뒤 기분이 즐거워 북을 치고 거문고를 켜며 노래를 부르고 여러 번 춤을 췄다는 기록이 있다. #
5. 《삼국사기》 기록
삼국사기(三國史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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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석문 및 문헌기록상 신라 최초로 성씨를 사용한 왕은 진흥왕임 * 29~31권까지 연표 * 32~40권까지 잡지 |
{{{#!folding [ 열전(列傳) ]
}}} ||《삼국사기》 <무왕 본기>
一年夏五月 무왕이 즉위하다
三年秋八月 신라의 아막 산성을 공격하다
六年春二月 각산성[18]을 쌓다
六年秋八月 신라가 동쪽 변경을 공격하다
七年春三月 서울에 흙비(토우)가 내리다
七年夏四月 가물어 기근이 들다
八年春三月 수에 한솔 연문진을 사절로 파견하다
八年夏五月 고구려가 송산성과 석두성을 공격하다
九年春三月 수에 사절을 보내 조공하다
九年春三月 수 사절이 왜국으로 가면서 백제의 남쪽 길을 통과하다
十二年春二月 수에 사절을 보내 조공하다
十二年春二月 수에 국지모를 보내 고구려 공격을 논의하다
十二年秋八月 적암성을 쌓다
十二年冬十月 신라의 가잠성을 함락하다
十三年 수가 고구려를 공격하자 양단책을 펼치다
十三年夏四月 대궐 남문에 벼락이 치다
十三年夏五月 홍수가 일어나 인가가 유실되다
十七年冬十月 신라의 모산성을 공격하다
十七年冬十一月 서울에 지진이 일어나다
十九年 신라가 가잠성을 공격하다
二十四年冬十月 당에 사절을 보내 과하마를 보내다
二十四年 신라의 늑로현을 공격하다
二十四年春一月 당에 대신을 보내 조공하다
二十四年秋七月 당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다
二十五年冬十月 신라의 속함성 등을 공격하여 함락시키다
二十六年冬十一月 당에 사절을 보내 조공하다
二十七年 당에 사신을 보내 명광개 등을 선사하다
二十七年秋八月 신라의 왕재성을 공격하다
二十七年冬十二月 당에 사절을 보내 조공하다
二十八年秋七月 신라 서부 변경의 두 성을 공격하여 함락시키다
二十八年秋八月 당에 복신을 보내 조공하다
二十九年春二月 신라의 가잠성을 공격하다
三十年秋九月 당에 사절을 보내 조공하다
三十一年春二月 사비의 궁전을 중수하다
三十一年 가뭄이 들어 궁전 중수를 중단하다
三十一年秋七月 왕이 웅진에서 돌아오다
三十二年秋九月 당에 사절을 보내 조공하다
三十三年春一月 의자를 태자로 책봉하다
三十三年春二月 마천성을 개축하다
三十三年秋七月 신라를 공격하다
三十三年 왕이 생초원에서 사냥하다
三十三年冬十二月 당에 사절을 보내 조공하다
三十四年秋八月 신라의 서곡성을 공격하여 함락시키다
三十五年春二月 왕흥사를 준공하다
三十五年春三月 대궐 남쪽에 연못을 파다
三十七年春二月 당에 사절을 보내 조공하다
三十七年春三月 사비하 북쪽 포구에서 연회를 열다
三十七年夏五月 장군 우소가 신라의 독산성을 공격하다
三十七年夏六月 가뭄이 발생하다
三十七年秋八月 망해루에서 잔치를 벌이다
三十八年秋二月 지진이 일어나다
三十八年秋三月 지진이 일어나다
三十八年秋十二月 당에 사절을 보내 조공하다
三十九年秋三月 궁녀를 데리고 뱃놀이를 하다
四十七年秋十月 당에 사절을 보내 조공하다
四十一年秋一月 혜성이 나타나다
四十一年秋二月 당에 자제들을 국학에 입학시켜 줄 것을 요청하다
四十二年秋三月 무왕이 죽다
58줄로 기록이 상당히 많다. 백제에서 온조왕 다음으로 기록이 많이 남아 있는 군주다.
6. 대중매체에서
- 1992년 KBS 드라마 <삼국기>에서는 고(故) 최정훈[19]이 맡았다. 신라 왕이었던 장인 진평왕이 죽자 신라 왕위 계승권이 자신에게 오지 않음을 한탄하며 그리됐다면 자신이 백제와 신라 양국의 왕이 되었을 것이라고 한다. 호방했다는 사서에 기록된 성격과는 다르게 근엄한 이미지이고 대부분의 정벌은 의자왕자와 그 측근들이 한 것으로 묘사되었다.
드라마 서동요에서의 무왕 |
- 2005년 SBS 드라마 <서동요>에서는 배우 조현재가 연기했다. 드라마를 이끌어나가는 주인공으로 이병훈 PD 사극의 주인공답게 온갖 역경을 강인하고 지혜롭게 이겨내고 왕이 된다. 그러나 하필 가장 소수설인 <북사>의 기록을 근거로 한 위덕왕의 아들설을 따라 위덕왕의 서자이자 아좌태자의 이복동생으로 나오며 오히려 역사적으로 무왕의 아버지임이 가장 유력하다고 인정받는 법왕은 위덕왕과 아좌태자를 위협하는 악역이자 서동의 적으로 나온다.[20] 결국 법왕의 손에 위덕왕과 아좌태자가 암살당하지만 서동은 와신상담 끝에 법왕을 물리치고 백제의 왕이 되어 백제를 부흥시킨다. 이 사극에서 선화공주[21]는 설화대로 실제 신라의 공주이자 진평왕의 셋째 딸이며 선덕여왕과 천명공주(김춘추의 어머니)의 동생으로 나온다. 서동이 어린 시절 법왕이 일으킨 정변 때문에 신라에 피신해 있을 때 선화공주를 만나 사랑에 빠졌다는 설정. 서동이 속해 있는 백제의 기술 집단 태학사가 정변으로 신라에 망명한 뒤 백제인이라는 것을 숨기고 신라 궁궐에 납품을 해 백제인에다 평민인 서동이 신라 궁궐에 들어갈 수 있게 된 것. 선화공주는 서동이 평민인데다[22] 백제인이라는 것을 알고도 서동과의 사랑을 포기하지 않고 함께 백제로 건너간다. 그 뒤 서동이 온갖 역경 끝에 백제 왕이 되자 왕으로서 신라의 공주인 선화공주에게 정식 청혼해 백제의 왕비[23]가 된다. 그런데 친정 아버지인 진평왕이 선화공주가 백제 왕후가 된 뒤에도 계속 백제에 전쟁을 걸어 백제 신료들이 선화공주를 폐비하고 사형에 처하자고 아우성치는 상황이 벌어진다. 결국 무왕은 이 상황에서 선화공주를 지키기 위해 친히 신라와 전쟁을 선포한다. 무왕이 전쟁에 나갈 때 눈물을 흘리며 안타깝게 지켜보는 선화공주와 괴롭게 뒤를 돌아보는 무왕의 모습이 인상적. 이후는 실제 역사대로 무왕은 신라와의 전쟁에서 연전연승하는 한편 각종 기술들을 연구하여 나라를 부강하게 했지만 선화공주는 아버지와 남편의 나라가 싸우는 것을 지켜보며 마음의 병을 얻게 되어 요절하고 말았다. 다만 드라마의 목적이 무왕의 치세를 다루는 것이 아니라 서동과 선화공주의 사랑 이야기를 다루는데 있었던 점을 생각하면 적절한 결말인데다가 신라 공주라는 설정과 무왕 재위 기간 중 신라와 자주 전쟁을 벌였다는 역사적 사실 둘 다에 부합했다고 할 수 있다.
드라마 계백에서의 무왕 |
- 2011년 MBC 드라마 <계백>에서는 배우 최종환이 연기했다. 드라마 계백에서도 초반부에 선화공주가 등장하는데 사택비를 필두로 한 반신라파에게 간첩으로 몰리면서 선화공주는 계백의 아버지와 더불어 신라로 달아나다시피 출궁된다. 그러다가 추격하는 위제단(사택비 휘하 자객단)에게 따라잡히고 종국에는 아들 의자를 살리기 위해 자결한다.[24] 위 부분에서 단적으로 볼 수 있는 것처럼 여기서의 부여장은 실제 역사와 전혀 다르게 나약한 군주 포지션으로서 지못미라는 한 마디로 모든 설명이 가능하다. 그렇지만 마지막에 혼수상태에 빠지는 약을 먹고 죽은 척하여 책략을 꾸며 자신을 암살하려한 사택비를 속인 후 통수쳐서 역전승을 이룬 점에서는 선덕여왕의 진평왕이나 주몽의 금와왕보다 나은 듯. 마지막에 최후의 순간 아들인 의자왕에게 자신보다 강인하고 훌륭한 임금이 되기를 바라며 나름대로의 군주론을 유언으로 남기고 눈을 감는 모습은 시청자들에게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부성(父性)을 잘 표현했다는 호평을 듣기는 했다. 그마저도 권력을 쥐고 있던 사택비와 대립하고 살며 사택 가문의 전횡 아래서 자기 권력을 지키기 급급했던 무왕의 피해 의식에 불과하다며 까이는 평이 더 많기는 했다.[25]
대왕의 꿈에서의 무왕 |
- 2012년 KBS 대하드라마 <대왕의 꿈>에서는 배우 박철호[26]가 연기했다. 신라에 대해 파상공세를 펼쳤던 역사 속 무왕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 재위 내내 신라를 호시탐탐 노릴 만큼 호전적이며 현명한 아들 의자를 매우 신임하고 있다. 위 작품들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용맹스럽고 호방한 기질을 지녔던 실제 무왕의 모습을 잘 표현했다고 할 수 있다. 단순히 호전적인 것 뿐만 아니라 처세술과 지모 역시 뛰어나서 아들 의자조차 생각하지 못한 계략을 간파하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신임하는 장수에게는 막대한 병권을 선뜻 쥐어주는 쿨가이스러운 모습 역시 보여준다. 결국 숙업인 신라 정복의 뜻을 이루지는 못한 채 아들 의자왕에게 자신의 과업을 물려주고 눈을 감는다.
7.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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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명성왕 | ─ | ─ | 동명왕(?) | 구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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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남 | 13대 근초고왕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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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타태자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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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법사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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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좌태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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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교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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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선광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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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문사 | 부여문선 | 부여덕장 | 부여사 | 부여창성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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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례] 실재 혈통 기준 세로선(│) 부자, 부녀, 사위관계 가로선(─) 형제, 자매관계 | }}}}}}}}} |
[1] 쌍릉에서 발견된 무왕의 유해의 나이가 60대 이상이였는데 뼈연령으로 역산한 출생연도이다.[2] 학계에서는 무왕이 익산 왕궁에서 사망한 것으로 보고있다.#[3] 《삼국유사》 <왕력> 편에 기록된 '헌병(獻丙)', '일기사덕(一耆篩德)'이라는 이름도 있는데 헌병이라는 이름은 잘못된 것으로 원래는 파른본에서 或云武康名璋(혹은 무강이라 하며, 이름은 장이다.)으로 새겨져 있었으나, 후에 임신본에서 잘못 인쇄하여 或云武康獻丙(혹은 무강, 헌병이라 한다.)이라고 하여 잘못 전해진 것이다. # '일기사덕'의 경우 어릴 때의 이름이라는 설도 있지만 '덕' 계통의 백제 관직과 관련있는 것으로 보인다.[4] 《삼국유사》에 기록.[5] 대성팔족 중 하나인 사씨. 금석문에서 등장.[6] 《삼국유사》 <기이>편. 《삼국사기》에 등장하는 동성왕비 김씨와 동일인일 가능성이 높다.[7] 부여새성(扶餘塞城)이라고도 한다. 의자왕의 동생, 《일본서기》에만 등장.[8] 부여교기의 아버지다.#[9] 출처 유골 조사 결과에서 나온 키이다.[10] 어릴때 사용했던 이름[11] 무왕의 치세.[12] '올바른 법도'로 해석이 가능하지만 '올바른 불교'를 뜻할 수도 있다.[13] 무령왕릉에서 발견된 무령왕의 유해로 추정되는 뼛조각이 있지만 불행하게도 이 뼛조각은 사료 측정 불가를 받은 상태이다.[14] 우리역사넷[15] 다만 위덕왕대와 무왕대는 상황이 많이 달랐음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위덕왕대는 바로 전 왕인 성왕이 신라군에게 참수되었으므로 내실을 다질 필요가 있었던 반면 무왕대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16] 당은 고구려멸망전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한반도 남부 국가의 공조가 필요하다는 것을 절실히 느끼고 있었고 백제의 신라에 대한 공세가 지속되면 신라의 협조를 받기 어렵다고 판단하여 백제를 침공한 것이다.[17] 백제 무왕의 出系와 천하관[18] 현재 학계에서는 전라북도 임실군 관촌면에 위치한 성미산성으로 추정하고 있다.[19] 1989년 MBC 드라마 <제2공화국>에서는 이한림 장군 역, 1993년 MBC 드라마 <제3공화국>에서는 백남억 민주공화당 당의장 역, 1995년 MBC 드라마 <제4공화국>에서는 정일권 전 국무총리 역, 최근작이 2010년 SBS 드라마 <인생은 아름다워>의 할아버지 역이다. 2023년 5월 폐렴으로 작고하였다.[20] 드라마 상의 설정만으로 보자면 무왕은 혜왕의 조카이자 법왕의 사촌동생이 된다.[21] 배우 이보영이 연기했다. 아역은 최진리인데 이후 설리라는 예명으로 유명해졌으며 이 작품이 데뷔작이다.[22] 이 때는 서동도 자신의 아버지가 누구인지 몰라 자신이 평민인 줄 알았다.[23] 본작에서는 신라나 백제의 군주를 황제라고 불렀기 때문에 극 중에서는 황후라 불린다.[24] 이런 전개는 선화공주와 대립하는 사택비라는 인물이 무왕 대 세워진 미륵사지 석탑을 2009년에 해체하다가 밑에서 발견된 금제사리봉안기의 내용 중 백제 무왕의 왕비가 사택왕후라고 쓰여있는 것을 바탕으로 하는 등장 인물이다. 그래서 기존의 무왕 왕비로 알려진 선화공주와 최근에 밝혀진 무왕의 왕비 사택왕후의 대립 설정으로 하여 2005년에 제작된 드라마 서동요의 혜안을 엿볼 수 있는 대목.[25] 여기서 무왕은 아들 의자왕에게 작중 아들의 절친한 친구이자 의동생인 계백에 대해 이야기하며 "계백은 강렬한 용맹과 현명한 지혜로써 전쟁과 외교에서 승리하면서도 자애로운 인격과 의로운 성품으로 남녀노소를 불구하고 모든 백성들에게 존경받는 신비스런 힘을 가지고 있다. 그건 오직 나라의 주인인 임금 한 사람에게만 허락되어야 할 능력이고 신하된 자가 가져서는 안될 능력이다. 또 아비는 너의 마음 속에 친동생처럼 생각하면서도 너보다 뛰어난 계백에 대한 우애심과 질투심이 동시에 존재한다는걸 아는데 네가 아비의 뒤를 이어 임금이 된 다음에는 너의 왕권을 위해서 그 둘 중 하나를 반드시 버려야만 한다. 계백이 만고의 영웅이 되었어도 백성들이 임금님인 너를 제일 따르고 좋아한다면 그럴 필요 없겠지만 백성들이 임금님인 너보다도 계백을 더 따르고 좋아한다면 마음이 아파도 선택을 분명히 해야할 것이다. 나라의 우두머리인 임금이 중심에 있던 질서가 무너질 때 모든 혼동은 시작되는 법이다. 너는 이 아비가 평생 사택 가문과 권력을 두고 싸우고 살며 어떤 고통과 치욕을 감내했는지 누구보다도 가까이서 보지 않았더냐."라는 유언을 남긴다. 겉보기에는 대의명분을 내세우며 멋져보이는 군주학으로 보일지 몰라도 속뜻을 풀이해보면 '백성들이 왕인 너보다 유능하고 훌륭한 충신을 좋아하면 너의 왕권을 위해 상대가 절친한 친구거나 아무리 존경받는 충신이라고 해도 죽이도록 해라. 넌 왕이니까 너의 권력을 지키기 위해서는 그게 정당화될 수 있다.'라는 뜻이다. 인륜적으로 생각해보자면 어떠한 미사여구로 치장해도 임금의 왕권을 위해서라면 계백처럼 훌륭한 의인을 죽이는 것도 불사해야 한다는 결론이 올바를 수는 없다. 물론 위덕왕, 혜왕, 법왕 때까지 3대에 걸쳐 무너져가던 백제 왕의 왕권을 되찾기 위해 혼자서 모든 권력을 쥐고 있던 막강한 사택 가문과 30년이 넘게 싸우고 살며 홀로 무거운 짐을 짊어져야 했던 무왕의 입장에서는 정말로 피해 의식이라 할지라도 본능적으로 그런 생각이 들 수밖에 없는 것도 사실이기는 하다. 하지만 아무리 왕이라도 완벽할 수 없고 그렇기 때문에 신하가 있는건데 오히려 이 유언 때문에 의자왕이 능력있는 충신들인 계백, 흥수, 성충을 믿지 못하고 독단적으로 나라를 다스리고 "장군이 계백뿐이냐, 어째서 그에게 모든 것을 맡기느냐"는 궤변으로 계백을 사실상 유배보내 12년 동안 김유신에게 털린다. 정작 악역으로 나온 무열왕 김춘추는 어린 아이들이 왕인 춘추를 몰라도 유신은 안다고 김유신의 군사적 능력을 부러워하지만 유신이 "허면 폐하께서 신의 칼을 잡고 직접 전장으로 뛰시지요?"라고 말하자 그럴까라며 서로 웃으며 농담하는 사이다. 무왕 논리의 가장 큰 헛점을 보여주는 대사인 셈.[26] 2015년 KBS 드라마 <징비록>에서는 김성일 역할을 맡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