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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lbgcolor=#315288> 익산 미륵사지 益山 彌勒寺址 Mireuksa Temple Site\, Iksan | ||
| 소재지 | <colbgcolor=#ffffff,#1c1d1f> 전북 익산시 금마면 기양리 32-2번지 | |
| 분류 | 유적건조물 / 종교신앙 / 불교 / 사찰 | |
| 수량/면적 | 12,958,688㎡ | |
| 지정일 | 1966년 6월 22일 | |
| 시대 | 백제시대 | |
| 소유단체 | 익산시 등 | |
| 관리단체 | 익산시 | |
| | ||
| <colbgcolor=#000> 백제역사유적지구 Baekje Historic Areas Aires historiques de Baekje | ||
| <colcolor=#fff> 국가·위치 | <colbgcolor=#ffffff,#1c1d1f> 전북특별자치도 익산시 | |
| 등재유형 | 문화유산 | |
| 지정번호 | 1477 | |
| 등재연도 | 2015년 | |
| 등재기준 | (ⅱ)[1], (ⅲ)[2] | }}} |
| |
| <colbgcolor=#008080> 미륵사지 전경[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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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륵사지 |
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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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륵사 복원 모형. |
백제의 절로는 최대 규모의 호국사찰이다. 신라의 황룡사, 고구려의 금강사와 함께 삼국시대의 각국을 대표하는 절 중에 하나라고 할 수 있다.[4] 또한 가장 거대한 백제 석탑이 있는 절터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커다란 절은 현재는 터만 남아, 반쯤 남은 미륵사지 석탑과 당간지주만이 휑하니 서 있다.
1966년 6월 22일 미륵사지가 대한민국의 사적으로 지정되었다.[5] 또한 2015년 7월 4일에는 독일 본에서 개최된 제39차 세계유산위원회(World Heritage Committee)[6]에서 공주·부여·익산 일대에 분포한 백제의 다양한 유적들과 함께 백제역사유적지구라는 명칭으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
2. 역사
삼국유사에는 미륵사와 관련된 설화가 2번 나온다. 하나는 법왕이 부여에 처음 짓기 시작하여 무왕이 마무리를 했다는 것과, 나머지 하나는 서동이 무왕이 되어 선화공주와 함께 용화산 아래에 만들었다는 이야기다.하루는 왕[7]이 부인과 함께 사자사(獅子寺)에 가다가 용화산(龍華山) 아래의 큰 못가에 이르자, 못 가운데서 미륵 삼존(彌勒三尊)이 나타나므로 수레를 멈추고 경례(敬禮)하였다. 이를 보고 부인은 그 곳에 큰 절을 세우면 좋겠다고 하였다. 왕이 허락하고 지명법사(知命法師)에게 가서 못을 메울 것을 물었더니, 신력으로 하룻밤에 산을 무너뜨려 평지를 만들었다. 미륵 삼상(彌勒三象)과 회전(會殿), 탑(塔), 낭무(廊惫)를 각각 3곳에 세우고 액호(額號)를 미륵사(彌勒寺)라 하니, 진평왕은 백공(百工)을 보내서 도왔다. 지금까지 그 절이 남아 있다.
《삼국유사》 서동 설화 중
《삼국유사》 서동 설화 중
미륵삼상은 미래불인 미륵이 3번 설법하여 미래의 중생을 모두 제도한다는 용화삼회설에 입각한 것이다. 전, 탑, 낭무를 각각 3곳에 세우고 미륵사라고 하였다는 것은 기록과 실제 미륵사 터의 흔적이 일치한다. 이 때문에 익산 미륵사가 무왕이 세운 절이라는 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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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륵사 3원 가람 디지털복원도 문화유산기술연구소 제작 |
2.1. 왕흥사와 미륵사
왕흥사의 터가 부여군에서 발굴되기 전에는 미륵사와 왕흥사 사이의 관계에 대해 여러 의견이 오갔다.법왕(法王)이 부여에 왕흥사(王興寺)를 처음 짓기 시작하고, 무왕(武王)이 35년에 걸쳐 왕흥사를 완성하니 이 절이 미륵사다.
《삼국유사》 3권 흥법(興法) 법왕금살(法王禁殺)편
《삼국유사》 3권 흥법(興法) 법왕금살(法王禁殺)편
왕흥사의 별명을 미륵사라고 한다면, 익산의 미륵사와 부여의 미륵사가 같이 존재했던 셈이다. 그러나 삼국사기에는 법왕이 600년에 왕흥사를 창건했다는 기록이 있다. 왕흥사와 미륵사의 관계를 헷갈리게 하는 기록이다.
2007년에 발견된 왕흥사 사리함에는 왕흥사가 삼국사기에 기록된 600년보다 23년 앞선 577년에 창건되었다는 명문이 있다.
丁酉年二月 十五日百濟 王昌爲亡王 子爲刹本舍 利二枚葬時 神化爲三
정유년 2월 15일 백제왕 창이 죽은 왕자를 위해 절을 세우고 본래 사리 2매를 묻었을 때 신의 조화로 셋이 되었다.
《왕흥사 사리함 음각문》
정유년 2월 15일 백제왕 창이 죽은 왕자를 위해 절을 세우고 본래 사리 2매를 묻었을 때 신의 조화로 셋이 되었다.
《왕흥사 사리함 음각문》
백제왕 창이 바로 위덕왕이고, 위덕왕 재위시기 중 정유년은 서기 577년이다. 따라서 왕흥사 창건주는 무왕이 아니다. 이미 당대에도 기록에 오류가 있었던 것이다. 부여 왕흥사 창건은 무왕과 전혀 관계가 없음이 명확해졌다.
2.2. 서동과 무왕
<서동요>의 서동 설화가 실제인지, 서동이 진짜 백제 무왕이었는지는 아직까지도 확실한 답이 안 나오는 문제이다. 물론 지금까지는 백제 무왕이 서동이라는 것이 정설이었고, 7세기에 무왕이 미륵사를 창건했다고 보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 여러 가지 새로운 정황이 나오면서 점점 서동이 실제 역사의 무왕이란 설은 정설의 자리를 위협받고 있었다.| |
| 해체 중인 미륵사지 서탑의 기초. 가운데 있는 돌이 첫 번째 심주석(心柱石) |
| |
| 사리병과 금제사리봉영기[8] |
미륵사지 서탑(서쪽의 석탑)을 해체하던 중 2009년 1월 첫 번째 심주석(心柱石)[9] 안에 봉안된 사리병[10]과 금제사리봉영기, 구슬 등 사리장엄구[11] 9900여 점이 나왔다. 학자들은 만약 유물이 나온다면 심초석에서 나오리라 예상했기 때문에, 심주석에서 유물들이 쏟아져 나오자 상당히 놀란 반응을 보였다. 이때 나온 유물 중 특히 주목받은 것이 바로 사리봉영기로, 금판에 음각하여 주칠(朱柒: 붉은 칠)한 글씨로 미륵사 창건에 관한 기록을 새겼다. 봉영기의 뒤편에 새긴 글씨에는 주칠이 대부분 사라졌다. 발굴팀은 아직 주칠한 글씨가 제대로 마르지 않은 상태에서 봉영기를 안에 넣어 봉안했고, 천수백 년 동안 습기에 시달리며 뒤편 글씨에 있던 안료가 녹아내렸다고 판단했으며, 녹아내린 안료는 사리공 바닥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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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제사리봉영기金制舍利奉迎記 원문 | |
| (앞면) 竊以法王出世隨機赴 感應物現身如水中月 是以託生王宮示滅雙 樹遺形八斛利益三千 遂使光曜五色行遶七 遍神通變化不可思議 我百濟王后佐平沙乇 積德女種善因於曠劫 受勝報於今生撫育萬 民棟梁三寶故能謹捨 淨財造立伽藍以己亥 | (뒷면) 年正月卄九日奉迎舍利 願使世世供養劫劫無 盡用此善根仰資 大王 陛下年壽與山岳齊固 寶曆共天地同久上弘 正法下化蒼生又願王 后卽身心同水鏡照法 界而恒明身若金剛等 虛空而不滅七世久遠 并蒙福利凡是有心 俱成佛道 |
| 가만히 생각하건대, 법왕(法王)께서 세상에 출현하시어 근기(根機)에 따라 부감(赴感)하시고, 중생에 응하여 몸을 드러내신 것은 마치 물 가운데 비치는 달과 같았다. 이 때문에 왕궁(王宮)에 의탁해 태어나 사라쌍수(娑羅雙樹) 아래에서 열반에 드셨는데, 8곡(斛)의 사리(舍利)[12]를 남겨 삼천대천세계(三千大天世界)를 이익되게 하셨다. 마침내 찬란히 빛나는 오색(五色)(사리)으로 7번을 돌게 하였으니,[13] 그 신통변화(神通變化)는 불가사의(不可思議)하였다. 우리 백제왕후(百濟王后)는[14] 좌평(佐平) 사택적덕(沙乇積德)의 딸로서 오랜 세월[광겁曠劫] 동안 선인(善因)을 심으시어 금생에 뛰어난 과보[승보(勝報)]를 받으셨다.[15] (왕후께서는) 만민(萬民)을 어루만져 기르시고 삼보(三寶)의 동량(棟梁)이 되셨다.[16] 때문에 삼가 깨끗한 재물을 희사하여 가람(伽藍)을 세우고, 기해년(己亥年) 정월 29일에 사리를 받들어 맞이하셨다. 원하옵건대, 세세(世世)토록 공양하여 영원토록[겁겁(劫劫)] 다함이 없어서 이 선근(善根)으로 우러러 대왕폐하(大王陛下)의 수명은 산악과 나란히 견고하고, 왕위(王位[寶曆)][17]는 천지와 함께 영구하여, 위로는 정법(正法)을 크게 하고 아래로는 창생(蒼生)을 교화하는데 도움이 되게 하소서. 다시 원하옵건대, 왕후의 몸에 나아가서는,[18] 마음은 수경(水鏡) 같아서 법계(法界)를 항상 밝게 비추시고, 몸은 금강(金剛)과 같아서 허공과 같이 불멸(不滅)하시어, 칠세(七世)를 영원(永遠)토록 다함께 복이(福利)를 받고, 모든 중생들이 다함께 불도(佛道)를 이루게 하소서. | |
| 번역문 출처: 김상현, "금제사리봉영기", 익산 미륵사지 석탑 사리장엄, 국립문화재연구소 (2014), 59. | |
봉영기 덕분에 미륵사는 백제 무왕 재위 기해년(639)에 창건되었음이 확실해졌다. 왕흥사와 달리 이쪽은 무왕의 재위와 일치한다. 게다가 법왕의 재위기간이 599년부터 600년이기 때문에 무왕이 대략 35년 이상 공사를 해서 639년에 세워졌다고 하면 말이 된다! 즉 삼국유사에 있는 충청남도 부여군 왕흥사와 얽힌 기록은 잘못 섞이긴 했어도 익산 미륵사의 역사와 관계가 있었다.
그러나 이 경우에는 전북특별자치도 익산시 미륵사에 얽힌 기록이 문제가 된다. 일단 창건은 무왕이 한 것은 확실하지만 공사의 시작은 법왕이 한 것이 아닌가 의심스럽게 되었다. 물론 법왕의 재위가 워낙 짧았기에 사실상 무왕의 의도대로 공사가 진행되었을 가능성도 다분하니 큰 오류는 아니다.
하지만 진짜 크게 문제가 되는 부분은 왕후다. 기록에 따르면 무왕이 미륵사를 세운 까닭은 왕후가 사찰 창건을 요청했기 때문이다. 사리봉영기에 따르면 무왕의 왕후는 좌평 사택적덕의 딸 사택씨이다. 사택적덕은 백제의 귀족 가문인 대성팔족 중 사택씨 가문의 인물로 후기 백제에서 왕후를 배출할 만큼 권력이 막강했다고 추정한다. 이 정도 대형사찰을 지을 정도면 어마어마한 권력과 재산이 뒤따라야 한다. 결국 사택왕후는 원래부터 백제 사람이기 때문에 미륵사를 창건한 무왕이 신라의 선화공주와 결혼했다는 설화와는 맞지 않아 '서동 설화'와 '서동요'가 거짓일 가능성이 커졌다.
서동 설화가 단순한 픽션이었다고 하면 간단한 일이지만, 불국사 창건설화처럼 허구 속에 진실이 섞였을 수 있고 워낙 인기 있는 이야기이기 때문에 많은 연구자들은 다른 쪽으로 해석하려 노력한다. 그래서 '무왕의 왕후가 2명 이상이 있었는데, 사택왕후는 선화공주가 일찍 죽고 새로 들어온 후처'라는 해석도 나왔다. 정실왕후 1명에 그 외는 모두 후궁 체제는 조선 시대부터 정립된 것이고 고대에는 정실왕후가 여러 명인 사례도 많았다. 당시 왕의 결혼이란 곧 정치적 활동이기도 했음을 감안하여 여러 왕후를 두었다고 보더라도 크게 무리한 해석은 아니다. 국내 안정을 위해 호족의 딸을 아내로 맞아들이고, 동시에 이웃 국가의 왕족도 아내로 맞아들이는 것 역시 당대 기준으로는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닌 것.
아무튼 서동이 무왕이라고 가정하면 '무왕의 왕후는 신라의 선화공주이거나 호족 사택 집안의 딸이거나 둘 중 하나여야 하고, 하나가 맞으면 다른 하나는 틀렸다.'고 보는 것은 현대적인 결혼관을 바탕으로 당시 왕의 결혼을 이해하려 드는 오류일 수도 있다. 게다가 해당 발굴조사 당시 미륵사의 구조가 (서동 설화를 소개한) 삼국유사의 내용과 일치하고, 건설시기도 무왕 재위기임이 확인되어 삼국유사의 무왕 및 서동, 선화공주 관련설화의 신빙성이 오히려 높아졌다고 보는 관점도 있는 터라 더욱 그렇다.
당시 상황을 상상 또는 가정해 보자면, 선화공주의 요청으로 짓기 시작한 사찰이 백제 내의 정치적 투쟁의 결과로서 사택비의 공적으로 둔갑했다거나, 삼국통일로 신라의 정통성이 확립된 시기의 인물인 일연이 사택비의 공적을 선화공주의 공적으로 흡수했을 수도 있다. 여하간, 정확한 것은 알기 어려우나 '사택비가 무왕의 왕후'라는 것이 '선화공주는 왕후가 아니다'라고 직결되지 않으므로 아직은 단정할 수 없다는 것.
그러나 사리봉영기가 발견됨으로써 선화공주설의 신빙성이 크게 낮아졌음은 사실이다. 또한 미륵사의 구조가 삼국유사의 내용과 일치한다는 점이 서동 설화의 신빙성을 높여주었다는 것에 모든 사람들이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만약 일연 및 해당 내용을 전한 사람들이 미륵사에 대한 정보를 오로지 서동 설화를 통해서만 알 수 있었다면 서동 설화 전체의 신빙성이라는 측면에서 평가할 수도 있겠지만, 일연의 시대까지도 미륵사는 멀쩡하게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즉 미륵사 창건주에 대하여는 설명을 엉터리로 했다더라도, 미륵사의 구조는 일연 당시 현존하는 미륵사의 형태를 보고 정확히 묘사할 수 있다.
한편 서동의 정체를 두고도 다양한 주장이 다시 떠올랐다. 아예 서동이 무왕이 아니라 5세기 동성왕(479-501) 등 다른 인물일 가능성도 있다.
2016년 무왕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익산의 쌍릉 대왕묘 출토 유물들을 일본인들이 발굴한 지 99년 만에 재조사해보니 20대~40대 여성의 치아 유골과 신라제 토기가 확인되었다. 무왕 시기에 신라 왕실 여인이 시집온 것 자체는 사실일 가능성이 높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하지만 신라 양식 토기는 당대 보편적이었고, 이것들이 꼭 신라산이라는 보장은 없다는 반박이 곧장 제기되었다. 이후 무왕의 인골임이 판명되었다. 무왕(백제)/생애 항목 참조.
2.3. 백제 이후 미륵사의 역사
창건 후 미륵사의 역사는 자세하지 않으나 단편적인 사료들로 비추어 볼 때 통일신라, 고려시대는 물론, 조선 초기까지는 사찰이 유지되었던 것으로 보인다.미륵사지에는 당간지주[19]가 남아있는데 통일신라의 기법으로 보인다. 따라서 불교가 융성하던 통일신라 때에도 미륵사는 꾸준하게 유지보수, 증축되었던 모양이다.[20]
신라 성덕왕 18년(719) 9월 금마군 미륵사에 벼락이 쳤다는 기록이 삼국사기에 있고, 성덕왕 29년(730) 6월에 뇌진이 쳐서 '서쪽 석탑'이 반쯤 무너졌으므로 옛 모습대로 고쳐놓았다는 기록이 연려실기술에 있다.
"고려 태조 5년(922) 고려의 승려 혜거가 미륵사탑을 개탑했다." 하는 내용이 혜거국사 비문에 있다. 또 미륵사지에서 출토된 기와에는 980년, 1267년, 1317년, 1330년에 해당하는 명문이 있다. 기와의 연도는 그해에 새 기와로 보수했다는 흔적이다. 또한 미륵사지에서 고려청자 파편도 무수히 수습되었기 때문에, 고려 시대에도 사찰의 명맥은 계속 이어졌음을 알 수 있다.
이후 조선 시대에도 태종 7년(1407) 나라에서 여러 고을의 자복사찰을 정할 때 다른 사찰들과 함께 자복사찰로 지정되었으므로 이 때까지만 해도 사찰이 건재하였음을 알 수 있다. 조선 초 16세기에는 신증동국여지승람과 양곡집에 미륵사지 석탑 기록이 나오는데, '석탑의 규모가 동방 최대'라는 말은 여기서 나온 문구이다. 다만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는 석탑은 언급하되 절 자체를 두고는 말하지 않으므로, 빠르게 추정한다면 조선 초기에 지금과 비슷하게 석탑만 남고 사찰은 소실되었을 수도 있다.
18세기 무렵 편찬된 와유록(臥遊錄)에 미륵사의 폐허를 보며 쓸쓸한 감정에 잠기는 사설시조가 있으므로, 조선시대의 어느 시점에 미륵사가 폐사되었음은 확실하다.[21] 와유록에는 17세기 이전에 벼락 때문에 석탑이 무너졌다는 기록도 있지만, 기록과는 달리 석탑의 구조를 살펴본 결과 석탑의 1층 부분에서 구조에 이상이 생겨 상층부가 붕괴되었을 수 있다는 설이 나왔다. 또한 석탑을 지으면서 강도보완을 위해 군데군데 흙을 채워 넣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흙이 씻겨나가자 점점 탑이 흐트러지다가 무너졌으리란 설도 있다. 이후의 기록은 전하지 않고, 미륵사 역시 재건되지 못하고 폐사지로 남았다.
절이 사라진 뒤에는 서탑과 당간지주만 남은 채 일대에 경작지와 민가가 조성되었다. 그나마 남은 서탑의 반쪽마저 무너질 위기에 처하자 일본인들이 콘크리트를 잔뜩 부어 구조를 안정시켰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임시조치라 오래 유지될 수는 없었다. 이후 1974년 동탑지 발굴을 시작으로 1980년부터 1996년까지 절터 전체를 대상으로 발굴조사를 진행하였다. 1991년부터 93년까지는 동탑을 복원했지만 동서 양탑의 형태가 똑같다는 증거가 나오지 않았다는 재현 문제, 기계로 깎은 화강암 때문에 유적과의 이질감이 너무 커졌다는 재질 문제 등으로 비판이 끊이지 않았다. 결국 '문화재를 이런 식으로 복원하면 안 된다'는 반면교사의 사례가 되었다. 이후 그나마 남은 유적들을 문화재로 지정하여 미륵사지 석탑이 국보 제11호, 미륵사지당간지주가 보물 제236호, 절터 전체는 사적 제150호가 되었다.
1999년부터는 콘크리트로 범벅이 된 서탑을 해체하기 시작했다. 동탑을 반면교사로 삼았는지 작업은 매우 신중하게 이뤄졌는데[22], 속도가 하도 느려서 2007년에는 혹시 비용을 횡령한 것은 아닌지 감사를 받기도 했지만 그런 사실은 없었다. 해체작업은 2010년까지 진행되었고, 그 과정에서 서동요 진위 여부 논란에 불을 지핀 금제사리봉영기 등 사리장엄이 심주석에서 발굴되기도 했다.
해체와 조사가 완료된 뒤에는 붕괴원인에 대한 조사가 이뤄졌지만 명확한 결론에는 도달하지 못했고, 복원과정에서도 층수나 형태를 두고 약간의 대립이 있었다. 기나긴 토론 끝에 복원 형태는 흔히들 알던 형태를 최대한 구현하기로 했고, 석재 역시 원래 있던 것들을 최대한 쓰기로 해 대략 80 % 정도를 충당할 수 있었다. 공사는 2015년 12월에 시작되었고, 당초 계획은 2017년 11월 완공예정이었으나 조금 연장되어 2018년 6월에 복원공사를 완료하였고, 그 후 주변 정리를 거쳐 이듬해 4월 30일에 준공식을 개최하였다.
미륵사지 정비와 서탑 복원 준비가 한창이던 2015년 7월, 미륵사지가 인근의 왕궁리 유적과 공주시, 부여군의 다른 백제시대 유적들과 함께 백제역사유적지구라는 이름으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이로 인하여 미륵사지의 학술적 가치가 상승하였다. 그 덕분인지 미륵사지의 한 켠에 있었던 미륵사지 유물전시관이 2019년 초에 국립익산박물관으로 이름을 바꾸었고, 서탑이 복원공사에 들어갔을 때에는 복원이 완료되면 관광객의 유입이 늘어난다고 판단했는지 익산 관내를 비롯한 전라북도 서북부의 유물들을 한데 모아 전시하고 관리할 수 있도록 바로 옆에 새로운 건물을 짓기 시작했다. 옛 전시관은 어린이박물관과 보존과학시설로 바꿔 이듬해(2020) 개관하고, 장기적으로는 교육·문화행사가 열리는 복합문화단지로 나아갈 계획이라고 밝혔다. 그리고 2020년 1월 10일, 국립익산박물관이 새로운 건물에서 개관하였다.
3. 명칭
미륵사는 명칭에서 드러나듯 미륵신앙과 관련된 절이다. 불경에 따르면 미륵은 수미산 위쪽 도솔천(兜率天)에 거하지만, 석가모니가 열반하고 56억 7천만 년 뒤 인간들이 사는 사바세계에 현신한다. 미륵은 지상에 나툰 뒤 부처로서 용화수(龍華樹)라는 나무 아래에서 단 3번 설법하여 모든 중생이 깨달음을 얻게 한다고 한다. 미륵이 도래한 세상을 용화세계(龍華世界)라 부르는데, 마치 이상향과 같아 사시사철이 화창하고 사람들은 모두가 평등하고 화목하게 지낸다고 한다. 현실의 고난에 스러지던 사람들은 죽어서 미륵이 있는 도솔천에 태어나거나,[23] 또는 미륵불이 가까운 미래에 현세에 내려오기를 바랐다. 이러한 바람에서 미륵불신앙이 탄생하여 널리 유행하였다. 익산 미륵사지의 뒷산 이름이 지금은 '미륵산'이지만 고서에 따르면 옛 지명은 '용화산(龍華山)'이었다. 용화수 아래 미륵이 있듯, 용화산 아래 미륵사가 있도록 배치한 것이다.미륵사 역시 이러한 신앙과 관련이 있었을 것이다. 당시 백제는 몰락의 길을 걷는 중이었다. 수도를 2번이나 옮겼지만 외세의 위협은 사라지지 않았고, 국력을 키우기에는 상황이 여의치 않았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지배층이건 민초건 미륵불에 매달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금당에는 미륵불상을 모시고 금당의 지하에는 물을 채울 수 있도록 만든 것이 미륵불이 내려오기를 바라는 의도를 반영한 것이라는 가설은 이러한 추측에서 비롯되었다. 미륵사는 규모가 장대하거니와 거대한 탑도 3기나 배치하여 공력을 기울였으므로, 웬만큼 강한 권력이 없다면 세울 수 없을 절이었다. 무왕 시기에 이런 절을 지은 것에는 부처의 힘으로 나라가 도움받기를 바랄 뿐만 아니라 약해지는 왕권을 강화하려는 목적도 있었던 듯하다.
4. 구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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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륵사 가람배치도 |
가람배치와 면적에서 거대한 규모를 자랑한다. 가람은 사찰, 사찰 건축물이 배치된 형식, 즉 탑이 1개가 있고 금당이 1개가 있으면 1탑 1금당식이라고 하는데, 미륵사는 다른 백제의 절들인 왕흥사나 정림사 등이 1탑 1금당인 것과는 달리 3탑 3금당식으로 건물들을 지었다. 정확히는 1탑 1금당을 나란히 3중으로 배치한 삼원식의 형태로, 문-탑-금당이 하나의 공간을 형성했다. 3군데 공간은 회랑으로 구분되지만 뒤편의 강당에 이르러서는 다시 합쳐진다. 이러한 배치는 왕이 용화산 밑 연못을 지나갈 때 연못에서 미륵삼존이 나타났다는 창건설화와 연관 있는 듯하다. 통일신라시대 사찰의 보편적인 양식인 쌍탑식, 황룡사나 청암리사 등의 1탑 3금당식과는 달리 3탑 3금당식은 현재까지는 미륵사지가 유일하다.
이러한 가람배치는 동양 고대가람 연구에서 밝혀진 바 없는 새롭고도 특수한 가람이다. 그동안 백제의 가람은 그동안 1탑 1금당이 일렬로 늘어선 것이 전형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미륵사가 새로운 형식을 따르는 가람으로 확인된 것이다. 좀더 구체적으로 미륵사지 가람배치를 보면, 북서 방향에 중원을 배치하여 남에서부터 중문, 좌우로 복도에 가까운 남회랑·목탑·금당을 배치하고, 주위는 동회랑·서회랑·북회랑으로 둘렀다.
미륵사에는 중앙에 목탑이, 동서 양쪽으로 석탑이 있었으리라 추정한다. 학자들이 처음에는 석탑을 7층짜리라고 추정했지만, 근처 동탑지에서 새로운 파편[24]이 발견되어 9층이라고 설을 바꾸었다. 목탑의 정확한 높이는 알 수 없지만 비율 등으로 봐서 석탑과 같은 9층이라고 추측한다. 중앙에 있는 탑이 양쪽의 쌍 석탑보다 층이 낮은 것은 좀 이상하기 때문이다. 목탑의 높이는 약 60 m 정도로 상당히 크고 높았다고 추정한다. 하지만 관련기록이나 석축 등이 제대로 남지 않아 많은 부분이 추측일 뿐이다. 아무튼 지금은 홀로 남은 석탑으로 유명하니 세월이 무상하다.
석탑은 한반도에 석탑이 들어와 만든 초기 작품인 듯하다. 목탑의 형태를 직설적으로 모방하여 과도기적인 원초적 형태라고 평가를 받는다. 일반적으로 새로운 무언가를 도입할 때는 일단 기존에 존재하던 재료나 방식으로 시도해 보는 경향이 있는데, 예를 들면, 파르테논 신전처럼 초기에 세워진 석조건축물은 목조건축물의 구조를 장식으로 따라한 모습이 보인다. 이 미륵사지 석탑 뒤에 세운 한국의 석탑들은 계속 크기가 작아지며 독자적인 양식이 생겼다. 백제시기의 유물로서 또다른 석탑인 정림사지 석탑이 훨씬 작고, 신라의 감은사지 석탑이 불국사 석탑으로 작아지는 등 시간이 지날수록 표현이 간결해지고 크기는 점점 작아진다. 그런데 미륵사지 석탑과 정림사지 석탑의 조영시기가 불확실하고, 백제석탑은 이 둘밖에 제대로 남지 않았으므로 진짜 원초적인 형태인지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도 있다.
미륵사지 석탑이 정말 그 당시 양식이었는지는 확신하기 힘들다. 탑의 구체적인 형태과 내력에 대한 기록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현재 미륵사지의 두 석탑 중 동탑은 재현을 뒷전으로 미루고 2년 만에 올린 것이고, 서탑은 해체작업을 하던 중에 개축의 흔적이 발견되었다. 이 때문에 백제시대의 원형을 추정하는 것에 애로사항이 꽃폈다. 이후 서탑을 복원하고 붕괴원인을 조사하는 과정에서도 외형 면에서는 동탑을 참고해야 했다.
목탑은 신라 황룡사와 비견할 만하다. 황룡사가 미륵사보다는 먼저 창건되었지만, 정작 얼굴마담인 황룡사 9층 목탑은 미륵사 창건 뒤에 완성되었기에 미륵사가 창건할 때 목탑을 세웠다면, 미륵사 목탑이 더 먼저 세워졌을 가능성이 있다. 특히 백제의 아비지가 황룡사 9층 목탑의 건설을 도왔다는 기록을 보면 정황상 그러했을 가능성이 높아진다. 바로 미륵사지 목탑은 황룡사 목탑의 프로토타입일 수가 있다는 것이었으며 백제 장인들은 신라, 일본까지 건너가서 건축물을 만들 정도로 기술이 뛰어났기 때문인데, 일단은 미륵사 창건시에 신라에서도 인력이 파견되었다는 설화도 있으니 추측의 영역이다. 추후에 발굴조사를 하다가 목탑지 인근에서 기와를 잔뜩 발굴했는데, 대부분이 백제시대와 통일신라시대였고 8-9세기 이후 기와는 출토되지 않으므로 목탑의 소실시기를 짐작케 해 준다. 또한 목탑지 기단의 북쪽에서 1~1.5 m 떨어진 곳에 기와가 일정한 선을 이룬 채 출토되었다. 목탑이 모종의 이유로 무너질 때 해당 방향으로 쓰러진 듯하다.
현재의 목탑 모형과 복원안은 2021년 미륵사 학술심포지엄 : 미륵사 복원고증 기본연구의 성과와 과제 참고. 5*5칸 평면규모, 동서석탑과 동일하게 초반석과 장초석이 있는 구조, 9층 약 31 m 높이의 탑신, 하앙구조를 기준안으로 잡고 있다.
각 탑의 북편에는 금당[25] 격 건물이 하나씩 있음이 확인되었다. 이들 탑과 금당을 한 단위로 구분하는 회랑이 있어 동쪽은 동원, 서쪽은 서원, 중앙은 중원이라고 삼원식 가람형태임을 알았다. '삼원식'이라고 하는 것은 마치 절이 3개가 모인 듯하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이는 미륵하생경을 기반으로 한 미륵신앙을 반영한 것이다. 미륵이 이 세상에 내려와 3회 설법을 하여 모든 중생을 구제하기 때문이다. 또한 각 금당의 터에서는 특이하게도 경주의 감은사지처럼 기단에서 지하 구조가 발견되었다. 감은사지는 인근의 문무대왕릉과 관련이 있다는 이유가 제시되었지만, 미륵사는 아무런 기록도 전해지지 않으므로 조성한 이유 역시 모른다. 현재로서는 혹시 미륵불이 하늘에서 지상으로 내려오길 바라는 마음에서 만든 구조가 아닌가 추측하는 정도일 뿐이다. 또는 서동요에 서동의 아버지가 용이라는 내용이 있으므로 용 신앙과 관련 있지 않을까 추측하는 이들도 있다.
강당지와 승방지에서는 공통적으로 방들을 띄엄띄엄 두고 그 사이를 바깥과 안을 오갈 수 있는 복도로 사용했던 흔적이 확인되었다. 강당 자체에는 방 2개가 있었다고 확인했는데, 발굴조사결과 방 크기가 계속 변했다고 추측한다. 강당의 양쪽에는 동서승방과 이어지는 접랑지가 있고, 북쪽 중간에는 북승방으로 연결되는 복도 시설의 초석이 남아있다. 면적은 부여 능산리사지의 금당보다 2배 가까이 넓지만, 광대한 면적에도 불구하고 석축이 잘 남아 연구에 편리했다.
승방은 강당의 좌우에 위치했던 동서승방과 강당 뒤편의 북승방으로 구성되었는데, 동서승방지에서 각각 2개 1조인 방이 4조씩 발견되었다. 또한 동승방 터에서는 불완전하긴 했지만 구들과 아궁이의 흔적이 발견되었고, 그 밖에도 도자기, 불에 탄 곡식 등 여러 생활유물들이 발굴되었다. 특히 남쪽에서 출토된 항아리들 중 하나에 미륵사 명문과 연도가 새겨져 유물들의 편년을 확인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또한 북쪽 기단 외부에서는 지붕 끝에 올리는 장식인 치미가 출토되어 승방의 규모가 어느 정도였는지 추측할 수 있었다.
북승방은 미륵사지 내의 단일건물로는 가장 큰 규모로, 구조는 동서승방과 비슷하며 방의 구성방식 역시 똑같지만, 개수는 8개로 좀 더 많았다. 북승방지의 서편에서는 후대에 증축한 흔적이 발견되었는데, 승방과는 평면구조가 달랐다. 조사를 통해 발견한 물품들로 보아 이곳은 물건들을 만들던 공방 혹은 창고로 쓰였던 장소로 판단되었다. 그 외에도 남동쪽 모서리에서는 통일신라시대에 쓰인 듯한 자그마한 우물이 발견되었다.
이외에도 서승방지의 서쪽에서 발견된 공방지와 좀 떨어진 곳에 있는 조선시대 건물지가 있는데, 공방 유적은 인근의 왕궁리 유적이나 부여군의 능산리 사지에서도 발견되는 유적으로, 이곳 공방지의 숯 층에서는 동물 뼈와 쇠 찌꺼기가 발견되어 바깥에서 가져온 쇳덩어리를 녹여 도구를 만들던 곳이라고 추측한다. 이곳에서는 그 밖에도 기와, 토제 도가니 등 9세기경의 유물들이 출토되었다. 조선 시대 건물지는 발굴 전에도 흔히들 '법당 밭'이라고 부르던 곳이다. 고려 시대부터 이곳에 건물을 지었으며 조선시대에도 유지되긴 했지만 규모가 많이 줄어들었다. 금당과 중문, 부속건물의 터가 발견되었고, 명문기와와 1500년대 후반의 백자 등 유물 여러 편이 출토되었다. 아마도 그 무렵 전성기를 맞고 1600년대 무렵에 불이 나서 폐사가 되었다고 추정한다.
4.1. 동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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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탑처럼 사리함이 존재했는지는 불명. 백제 당시에 있었다 하더라도 천 년이 넘는 세월이 흐르며 동탑은 거의 없어지다시피 해체되었기 때문에 소실되었을 것이다.
4.1.1. 복원
동탑이 저렇게 복원된 사연은 이렇다. 1970년대 들어 무령왕릉이 우연히 발견되면서 전국의 고대 유적 정비가 유행처럼 번졌고, 당시 민족문화 창달을 기치로 내건 박정희 정권도 이를 적극적으로 지원하기 시작했다. 특히 경주시의 신라 문화재들에 대한 보수 및 복원사업이 진행되자, 익산군(당시)에서는 "미륵사지 석탑도 저렇게 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의견이 나왔다. 당시 미륵사지 석탑은 일제가 임시조치로 부어놓은 콘크리트 때문에 상태가 영 아니었기에, 어떻게든 손을 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당시로서는 기술 수준과 예산이 매우 부족했기에 섣불리 시도할 수 없었고, 그러던 중 1974년부터 1975년까지 원광대학교 마한백제문화연구소에서 미륵사지를 조사하던 중 동탑지를 발굴해냈다.[26] 하지만 석탑 복원까지는 가지 못했기에 미륵사지 석탑 복원은 익산군의 숙원사업이 됐고, 그러던 차에 미륵사지 석탑 복원을 대통령 선거 공약으로 내세운 노태우가 당선되었다.대통령이 된 노태우는 공약대로 미륵사지 석탑을 복원하려 했는데, 서탑을 복원하자니 당시로서는 여러 문제로 인해 복원하려다가 되려 훼손시킬 염려가 컸다. 이에 차라리 터만 남은 동탑을 복원하여 나중에 서탑을 해체한 후 복원할 때 참고할 수 있도록 하자는 의견이 나왔고, 큰 반발 없이 수용되어 얼마 지나지 않아 동탑이 복원 대상으로 낙점되었다. 그 후 탑을 어디다 복원할지 정하는 과정에서 탑의 터를 훼손시키지 않기 위해 현재의 국립익산박물관 자리에 탑을 복원하자는 얘기가 나오기도 했지만, 멀쩡한 터가 있는데 왜 다른 곳에 복원하냐는 격렬한 반발에 부딪히면서 본래의 자리에 복원하기로 했다.
공사는 1991년에 시작되어 1993년에 완료되었다. 복원 전부터 학계의 논란이 일었던 동탑의 복원은 끝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크나큰 비판 여론에 부딪히게 되었는데, 당시 거의 모든 문화재위원들이 재현이 불가하다며 반대했지만 졸속으로 복원되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복원된 동탑의 형상은 반쯤 쓰러진 서탑의 모습과 사방에 흩어져 있었던 부재들을 연구한 결과물인데, 미륵사의 두 석탑이 쌍둥이처럼 닮았다는 내용은 어느 기록에도 없다. 불국사의 석가탑과 다보탑처럼 두 석탑이 서로 전혀 다른 모습일 수도 있고, 불국사만큼은 아니라도 예를 들면 높이 또는 층수가 달랐거나, 모습이 서탑과 약간 다를 수도 있는데 동탑 복원은 그걸 무시하고 무작정 서탑과 똑같은 모양일 거라 단정하고 시작해 버린 것이다. 그리고 고대의 석조물은 돌을 정으로 일일이 쪼아 만든 거친 맛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턱없이 부족했던 예산[27] 때문에 복원할 때 하얀 화강암을 기계로 깎아내어 탑을 쌓았고, 결국 기존의 서탑과 부조화가 심하고, 표면 질감이 너무 매끈하여 상당히 부담스러운 건축물이 되었다. 이를 두고 유홍준은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에서 '허망과 허상의 복원탑'이라 하였다.
미륵사지 동탑이야말로 20세기 한국 문화재 복원 최악의 사례로 기록될 겁니다.
그걸 보고 있노라면 다이너마이트로 폭파시켜 버리면 좋겠다는 사람도 있을 정도니까요.
유홍준, 2004년 미륵사지석탑(서탑) 해체 조사보고회에서
그걸 보고 있노라면 다이너마이트로 폭파시켜 버리면 좋겠다는 사람도 있을 정도니까요.
유홍준, 2004년 미륵사지석탑(서탑) 해체 조사보고회에서
다만 당시 동탑 복원에 참여했던 문화재 복원 관계자의 말을 들어보면 그들도 많은 고충이 있었다. 터의 부재를 조사해보니 미륵사지 뒤편 미륵산 및 익산 각지에서 채굴했음이 밝혀져, 최대한 원형대로 하기 위해 돌을 운반해왔다. 그런데 돌은 정말 최상급이었으나, 문제는 질이 너무 좋아서 정으로 10~15번 쪼면 다시 갈아야 할 지경이었다는 것이다. 석수가 일일이 쪼는 전통방식대로 했다간 최소 20년 이상 걸린다는 결론이 나왔으며, 이를 완전히 재현하려면 예산이 부족할 뿐만 아니라 익산지역의 숙원사업 자체가 좌초될 수 있었다.
이에 복원이 아니라 북한식 개건(開建)에 가까운 작업이 됨을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현대적인 방식을 사용했다고 한다. 2020년대 이후에는 문화재 복원의 원칙이 생겨 유럽에서 대성당을 건설할 때마냥 수십 년 세월이 걸린다 해도 이해해 줄 수 있지만, 한국이 본격적인 중진국에 진입한 지도 얼마 안 된[28] 시점엔 국민정서상 용납이 안 되었고, 경제발전에 쓸 비용을 수십 년 세월 동안 탑 하나에 투자하는 것이 어려웠다.
참고로 탑을 복원하면서 원 부재 중 35개를 추려 복원에 사용했는데, 탑을 둘러보면 보이는 유난히 거뭇거뭇한 부분들이 그것들이다.
4.1.2. 근황
그런 동탑도 1993년 세워진 지 벌써 [age(1993-01-01)]년이 지났다. 그 동안 탑신과 상륜부에는 때가 타고 달아놓은 풍경은 떨어지는 등 점차 낡아가면서, 초창기의 지나치게 새 것 같은 현대적이고 인공적인 모습에서 점점 주변 풍경에 동화되었다.[29] 또한 복원공사 중인 서탑으로 미륵사지를 소개하긴 좀 그랬는지, 서금당지 안에서 찍은 동탑이 그동안 미륵사지를 소개하는 이미지로 사용되곤 했다. 물론 2019년 5월부로 서탑이 복원공사를 마치고 공개되었으니, 얼마 안 가 바뀔지도 모르는 일이다.'문화재'가 아닌 '복원품'이기에 딱히 보호받지 않으므로 탑 안으로 들어가 볼 수도 있다. 내부도 복원된 서탑과 같은 실내구조로 만들었기 때문에 '이런 느낌'이라고 체험하기 딱 좋다.
4.2. 서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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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익산 미륵사지 석탑#|]] 부분을 참고하십시오.4.2.1. 유물
대한민국 국보 國寶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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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국보[30] 익산 미륵사지 서탑 출토 사리장엄구(금동제사리외호 1점, 금제 사리내호 1점, 금제 사리봉영기 1점, 청동합 6점‐총 9점)이 발굴됐다. 금제사리봉안기 각자 내용은 '좌평 사택적덕의 딸인 백제 왕후가 사찰을 창건하고, 기해년(639년)에 사리를 봉영하여 왕실의 안녕을 기원한다."는 발원문으로 청동합 각자와 함께 건립자를 알려주고 있다. 현재 국립익산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이외에도 금판, 금괴, 금제구슬, 금제고리, 금제족집게, 금동제고리, 은제관식, 은제과대장식, 은괴, 청동합, 유리판, 유리구슬, 진주구슬, 호박, 곡옥 등 사리봉안에 따른 각종 공양품과 장엄구 등이 함께 봉안되었다.※
2025년 물소 뿔 손잡이에 바다거북 등껍데기로 감싼 나무칼집의 백제 왕족 손칼 8점이 봉안된 것이 발굴된 이후 16년 간의 보존처리 끝에 공개됐다.※
5. 찾아가는 방법
- 익산역에서 온다면 익산역 사거리의 대한통운 정류장에서 2100번을 타고 금마공용버스터미널에서 내려서 콜버스(5600, 금마터미널로 돌아갈 때 5601번)을 불러서 미륵사지까지 가야 한다. 아니면 모현동에서 출발하는 41(-1)번을 타면된다.
- 주말과 공휴일에는 익산역 앞에서 시에서 운영하는 순환형 시티투어버스를 타면 된다.
- 고속버스나 시외버스를 타고 온다면 익산터미널 하차 2100번 탑승> 금마공용버스터미널 하차 콜버스(5600번 호출),또는 택시 이용>미륵사지
- 시간대를 맞출 수 있다면 익산시외버스터미널에서 여산 방면으로 가는 좌석버스(2100번)를 타고 중간 경유지인 금마면의 금마공용버스터미널에 내려서 콜버스(5600번)을 불러야 한다. 위에 언급한 모든 버스들이 금마공용버스터미널에서 미륵사지 앞 정류장까지 운행한다.
- 자가용으로 온다면 호남고속도로 익산 나들목이 더 빠르다. 익산 나들목에서 9 km나 되며, 소요시간은 15~20분 정도 걸린다.
6. 대중문화 속의 미륵사
- 바람의 나라의 미륵사. 석탑과 금당 건축물 등 시설물을 나름대로 고증했다.
- 시인 신동엽의 서사시인 금강(19장)에서는 주인공 금마와 하늬가 미륵사지 석탑 앞에 서서 바라보는 장면을 묘사한다.
7. 여담
- 미륵사지 석탑 덕분에 익산시의 유적지들 중에서는 가장 잘 알려진 곳이다. 익산시의 CI에도 들어가 있을 정도.
- 인근의 왕궁리 유적이 사람이 없어 휑한 것과는 달리 늘상 사람들로 붐비는 편이다.
- 전주권 1990-2000년대생 초등학교 저학년 현장학습장소로 많이 유명했다. 전주권 저학년 학생들이 봄에 현장학습을 간다면 대부분 여기에 갔다.
- 2000년 10월 미륵사지를 보수정비하던 중 익산 미륵사지 금동향로가 발견되기도 했다.
- 기와를 구웠던 가마의 터로 보이는 곳이 2군데 있다. 동탑 옆에 있는 곳은 고려 시대의 흔적이고, 절터 뒤편에 있는 진회색 건물로 보호받는 곳은 조선 시대의 흔적이다. 미륵사가 조선시대까지는 절 노릇을 했음을 보여주는 유적이다.
- 미륵사지 석탑 복원과 국립익산박물관의 건립 등등 여러 가지 사업으로 관광객이 많아지자 익산시에서 유적지 전방의 10만 8천여 ㎡ 부지에 총 386억원을 들여 관광지 조성사업을 벌이기로 했다. 일단은 부족한 주차시설을 보충하는 것을 시작으로 전통문화 체험관, 관광안내소, 편의시설 등이 들어올 예정으로, 2022년 8월 7일 모든 공사를 마치고 정식으로 개장하였다.
- 2020년 익산 미륵사지에서 기와를 물들인 '녹유'가 나와서 세간의 이목을 끌었다. # 그래서 같은 해 11월까지 특별전을 열었다.#
- 관련 유적으로는 쌍릉, 마룡지[31], 왕궁리 유적 등이 있다.
- 인근 고속도로 여산휴게소가 본 유적에서 따온 익산미륵사지휴게소로 개명됐다.
- 만약 이곳에 관광을 간다면 동탑 안에서 서탑 방향으로 난 입구에 걸터앉아 서탑을 배경으로 사직을 찍으면 운치있는 사진을 찍을 수 있다.
8. 외부 링크
- 한국어 위키백과: 익산 미륵사지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익산 미륵사지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미륵사
- 고고학사전: 미륵사지
- 답사여행의 길잡이 1 - 전북: 미륵사터
- 답사여행의 길잡이 1 - 전북: 미륵사지
- 대한민국 구석구석: 익산 미륵사지 유네스코 세계유산
- 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할 국내 여행 1001: 미륵사지
- 신정일의 새로 쓰는 택리지 2 - 전라도: 동양 최대의 절터 미륵사지
- 두산백과: 익산 미륵사지
9. 사적 제150호
익산 기양리에 있는 백제 때의 절터이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백제 무왕 때 왕이 왕비와 사자사(師子寺)에 가던 도중 용화산 밑의 연못에서 미륵삼존이 나타났는데, 왕비의 부탁에 따라 이 연못을 메우고 3곳에 탑, 금당, 회랑을 세웠다고 한다. 기록에 따르면 미륵사는 백제 무왕 때 지어져 조선 시대에 폐사되었음을 알 수 있다.
절의 배치는 동·서로 석탑이 있고 중간에 목탑이 있으며, 탑 뒤에는 부처를 모시는 금당이 각각 자리한다. 이것이 복도(회랑)로 구분되어 매우 특이한 가람배치를 하고 있다. 금당의 규모는 앞면 5칸·옆면 4칸이고 바닥에는 빈 공간이 있는데, 이것은 바닥마루의 습기에 대비한 것으로 보인다. 고려·조선시대 건물터에서 온돌시설이 발견되어 온돌의 발전과정을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출토된 유물로는 기와·토기·금속·목재 등 다양하며 글자를 새긴 기와도 많이 발견되었다. 서쪽 금당 앞의 석탑은 국보 제11호로 지정되었는데, 현재 남아있는 석탑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목조건축의 기법을 사용하여 만들었다. 무너진 뒤쪽을 시멘트로 보강하였던 것을 2019년에 최종적으로 보수정비를 마무리하였다. 현재 국립익산박물관에는 미륵사의 복원된 모형이 전시되고 있다.
미륵사는 신라의 침략을 불교의 힘으로 막고자 지은 호국사찰로서, 백제가 망할 때까지 중요한 역할을 했던 곳으로 여겨지는 역사적 가치가 큰 곳이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백제 무왕 때 왕이 왕비와 사자사(師子寺)에 가던 도중 용화산 밑의 연못에서 미륵삼존이 나타났는데, 왕비의 부탁에 따라 이 연못을 메우고 3곳에 탑, 금당, 회랑을 세웠다고 한다. 기록에 따르면 미륵사는 백제 무왕 때 지어져 조선 시대에 폐사되었음을 알 수 있다.
절의 배치는 동·서로 석탑이 있고 중간에 목탑이 있으며, 탑 뒤에는 부처를 모시는 금당이 각각 자리한다. 이것이 복도(회랑)로 구분되어 매우 특이한 가람배치를 하고 있다. 금당의 규모는 앞면 5칸·옆면 4칸이고 바닥에는 빈 공간이 있는데, 이것은 바닥마루의 습기에 대비한 것으로 보인다. 고려·조선시대 건물터에서 온돌시설이 발견되어 온돌의 발전과정을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출토된 유물로는 기와·토기·금속·목재 등 다양하며 글자를 새긴 기와도 많이 발견되었다. 서쪽 금당 앞의 석탑은 국보 제11호로 지정되었는데, 현재 남아있는 석탑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목조건축의 기법을 사용하여 만들었다. 무너진 뒤쪽을 시멘트로 보강하였던 것을 2019년에 최종적으로 보수정비를 마무리하였다. 현재 국립익산박물관에는 미륵사의 복원된 모형이 전시되고 있다.
미륵사는 신라의 침략을 불교의 힘으로 막고자 지은 호국사찰로서, 백제가 망할 때까지 중요한 역할을 했던 곳으로 여겨지는 역사적 가치가 큰 곳이다.
10.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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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오랜 세월에 걸쳐 또는 세계의 일정 문화권 내에서 건축이나 기술 발전, 기념물 제작, 도시 계획이나 조경 디자인에 있어 인간 가치의 중요한 교환을 반영할 것[2] 현존하거나 이미 사라진 문화적 전통이나 문명의 독보적 또는 적어도 특출한 증거일 것[3] 미륵사지 아래 주차장을 끼고 있는 건물이 국립익산박물관이다.[4] 황룡사 담장 밖에서부터 동궁과 월지까지 이어지던 광장을 황룡사 부지에서 제외한다면 황룡사보다 미륵사가 부지면적은 2배나 더 넓다. 이는 황룡사는 경주시내 한복판에 지어진 사찰이지만, 미륵사는 당시 텅 비어있던 산자락에 앞뒤로 길게 늘어선 부지에 지어진 사찰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이에 중심 가람 영역 외에도 진입로와 후원에 많은 별도의 건물 영역이 있었다. 다만 건물 크기는 황룡사에 크게 밀린다. 같은 백제의 사찰 중에서도 건물 하나하나의 규모는 왕궁리 유적 동쪽의 제석사가 더 크다. 일례로 미륵사지 목탑지 한 변의 길이는 18.56 미터이나 제석사지 목탑지는 21.2 미터다. 그나마 목탑지가 황룡사에 비벼볼만한 건물이고, 다른 건물들은 황룡사와 비교가 안 된다. 물론 미륵사 건물도 엄청 크지만. 이렇게 된 이유는 미륵사는 3원 양식을 채택하여 탑도 3개, 금당도 3개가 있었므로 각 건물의 규모는 거대한 절 부지면적에 견줘서 작아진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한국에서 석탑 양식을 처음으로 창안해 낸 미륵사의 어마어마한 역사적 의의가 줄어드는 것은 아니다.[5] 처음 지정될 당시 사적 제150호로 지정되었다. 현재는 문화유산에 번호를 매기는 것이 유산의 중요도로 오인될 수 있음을 고려해 따로 번호를 매기지 않고 있다.[6] 2015년 6월 28일~7월 8일[7] 삼국유사는 무왕이라 기록했다.[8] 사리봉영기가 중앙에 있는 사리병의 남쪽에 놓였다. 즉 이 사진은 심주석의 북쪽에서 남쪽으로 찍은 것이다.[9] 심초석(心礎石)은 탑의 중앙기둥을 받치는 주춧돌, 심주석(心柱石)은 심초석 위에 올리는 돌 기둥이다. (물론 기둥이 나무라면 심주석은 없다.) 미륵사지 석탑은 심초석 위에 레고처럼 네모나게 다듬은 돌을 차곡차곡 올려 기둥을 만들었는데, 그중 심초석 바로 위에 있는 심주석에서 유물이 나왔다.[10] 부처의 유해에서 나왔다는 사리 등을 담은 용기[11] 불교에서는 사찰이나 법구 등을 화려하게 장식하고 꾸민다는 의미로 장엄(莊嚴)이란 말을 사용한다. 그러므로 사리장엄구란 '사리를 꾸미는 도구'란 뜻이다. 사리병 등도 당연히 사리장엄구이다.[12] 원문에선 유형(遺形)이라 하였는데 사리를 가리키는 다른 말이다.[13] 불교에서 사리를 모신 탑을 예배하는 방법은 합장하고 탑을 중심으로 시계 방향으로 도는 것이다. 탑을 자기 오른쪽에 두고 3번을 돈다 하여 우요삼잡(右繞三匝), 줄여서 요잡(繞匝)이라고 한다. 사리 주변을 '돌게 했다'는 표현은 그래서 나왔다. 단, 사리봉영기에서는 3번이 아니라 7번을 돈다고 하였다.[14] 번역문의 출처인 국립문화재연구소의 보고서는 이 부분에서 한국어 번역을 '황후'라 하였지만, 봉영기 원문은 王后가 분명하므로 '왕후'라고 바로잡는다. 다른 부분에서는 다 '왕후'라 하였는데 이상하게 여기에서만 번역자가 '황후'라고 잘못 썼다.[15] 쉽게 말하면 '우리 왕후께선 까마득한 전생부터 공덕을 많이 쌓으신 덕에 현생에서 귀한 몸이 되셨다.'는 것이다.[16] 삼보(三寶)란 불교의 3가지 귀의대상(불법승)을 가리키지만, 불교를 가리키는 의미로도 쓰인다. '삼보의 동량이 되셨다.'는 말은 '불교의 든든한 후원자/지지자가 되셨다.'는 의미로 해석하면 적절하다.[17] 한자 원문은 보력(寶曆)인데 군주의 위, 또는 그 치세를 가리킨다. 문화재연구소의 보고서에선 보력을 풀어서 왕립(王位)이라고 옮겼는데, 왕위(王位)를 잘못 썼다고 판단하여 본 항목의 인용문에서는 바로잡는다.[18] 원문은 왕후즉신(王后卽身)이다. 번역자는 동국대학교 사학과 김상현 교수인데, 김 교수조차도 즉신(卽身)이란 표현을 어찌 해석해야 할지 몰라 번역문을 좀 뭉개었다. 김 교수의 글에 따르면 존칭어 당신(當身)이란 뜻일지도 모른다 생각하였지만 '몸에 나아가서는'이라고 옮겼다 하였다.[19] 불교 사찰에서 깃발의 일종인 '당간'을 세우기 위한 지지대로 쓰이는, 1쌍의 돌기둥 같은 구조물.[20] 신라는 백제 출신 승려 경흥을 나라의 어른(國老)으로 임명하는 등, 불교를 통해 백제 유민을 회유하려는 정책을 펼쳤다. 인접한 익산 왕궁리 유적도 통일신라에서 사찰로 계속 운영되었다.[21] 꼭 전란으로 소실된 게 아니라도 유교국가를 표방하여 숭유억불 정책을 펼친 조선에서는 더 이상 지방의 대형사찰 운영을 지원해주지 않았으므로 재정난으로 절이 문을 닫았을 수 있다. 미륵사는 원래 백제의 국가사찰로 만들었기 때문에 규모가 너무 커서 관리가 매우 힘들었을 것이다. 이런 대형사찰이 규모에 걸맞는 돈을 벌지 못한다면 폐사함은 필연이다.[22] 콘크리트를 뜯어내려 치과용 도구까지 사용했을 정도라고 한다.[23] 아미타불이 있다는 서방정토에 태어나길 바라는 신앙과 다르다.[24] 노반: 탑의 꼭대기에 있는 상륜의 한 부분이다.[25] 불상을 모시는 건물이다.[26] 그 덕에 1980년부터 미륵사지를 본격적으로 발굴할 수 있었다.[27] 본래 견적은 60억 정도였지만, 반영된 예산은 29억이 전부였다. 이마저도 원래는 23억이었다가 더 준 것이다.[28] 민주화가 성사됨과 동시에 1인당 GDP가 세게 평균을 넘긴 것도 공사 시작 4년 전인 1987년이었다.[29] 과거 동탑을 대차게 비판했던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도 개정한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에서 나름 봐줄만해진 동탑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30] 보물 제1991호에서 2022년 국보로 승격[31] 쌍릉에서 3 km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연못. 무왕의 어머니가 이곳의 용과 인연을 맺어 무왕을 낳게 되었다는 전설이 전해져 내려온다. 현재는 연동제란 이름의 저수지로 쓰이고 있으며, 익산시에서는 이곳을 공원으로 정비할 계획을 짜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