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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사적 제447호 | ||
원주 영원산성 原州 領願山城 | ||
{{{#!wiki style="margin: 0 -12px; border-right: 2px solid transparent; border-left: 2px solid transparent"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1px; margin-top: -6px; margin-bottom: -5px" | 소재지 | 강원도 원주시 판부면 금대리 산50-2번지 외 1필 |
분류 | 유적건조물 / 정치국방 / 성 / 성곽 | |
면적 | 221,644㎡ | |
지정연도 | 2003년 6월 2일 | |
제작시기 | [1] | |
위치 |
<colbgcolor=#344c3c> 영원산성 |
영원산성 안내판 |
[clearfix]
1. 개요
강원특별자치도 원주시 판부면에 있는 통일신라 시기에 포곡식으로 축조한 산성으로 치악산에 위치하고 있다. 사적 제447호로 지정됐다.2. 상세
영원산성은 고려 충렬왕 17년(1291년)에 몽골의 일족으로 세력다툼에서 밀려난 합단족의 침입을 물리쳐 나라를 구한 성지이다. 충렬왕은 강화도로 피신하고 합단적은 원주 이북을 모두 점령하여 고려는 큰 위기에 처했다. 고려사의 기록에 따르면 원주의 향공전사 원충갑, 홍원창 판관 조신, 별장 강백송, 주리 원현, 부행란 원종수 등과 원주 주민들은 치악성에서 10여 차례에 걸쳐 적과 싸워 이겼다. 전쟁이 끝나고 충렬왕은 합단적으로부터 나라를 구한 공으로 원주 주민에게 3년동안 세금과 부역을 면제해 주었다.조선 선조 25년(1592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에는 원주 목사 김제갑이 왜군 장수 모리 요시나리가 이끄는 왜적과 맞서 싸우다 전사했고, 아들 김시백, 부인 이씨도 함께 순절했다. 〈속삼강행실도〉에는 김제갑 목사가 순절한 영원산성을 '충,효,열이 이루어진 현장'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3. 외부 링크
4. 사적 제447호
영원산성은 원주의 치악산(해발 1,288m)에 위치한 돌로 쌓은 산성이다.
이 산성은 축조연대를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신라말 가장 큰 지방세력이었던 북원(北原)의 양길(梁吉)·궁예(弓裔)와 관련되어 있는 사적으로 인식되어 왔다. 또한 고려 충렬왕 17년(1291) 원충갑(元冲甲)이 지역의 방위군과 합단(哈丹)의 침략군을 통쾌히 무찌른 곳일 뿐만 아니라, 조선시대에는 임진왜란 때 목사 김제갑의 지휘 아래 원주 일대의 주민들이 끝까지 항전하다가 함락되어 수많은 장졸들이 목숨을 잃은 비극의 현장이기도 하다. 그 후 이 산성은 한강 상류의 요진(要鎭)으로 한동안 경영되다가 폐허가 되었다.
이 성의 전체적인 평면은 삼각형에 가까운 불규칙한 부정타원형으로, 성벽의 총 연장은 약 2.4㎞이며, 다듬지 않은 돌덩이를 차곡차곡 쌓아올린 모습이 비교적 많이 남아 있다. 동북 모서리에서 보다 높은 산봉우리를 이어서 꼬리처럼 된 용도(甬道)를 만들었는데, 이 곳은 다른 지역과의 연락에 유리한 곳일 뿐만 아니라, 남대령(南台嶺) 방면에서 능선을 타고 접근하는 적을 쉽사리 관찰하고 공격할 수 있는 곳이다. 한편 능선상에 성벽이 꺾어지는 곳은 능선을 타고 진입하는 적을 방어하기 위하여 곡성(曲城)을 마련하였는데, 동남쪽 성벽에 4곳, 북쪽 성벽에 4곳, 서쪽 성벽에 4곳이 있다.
옛 기록에 의하면 ‘영원성은 석축성으로 둘레 3,749척, 성내에 우물 1개, 샘이 5곳 있었으나, 지금은 폐하였다’고 한다. 지금 성안에는 남·북·서문터와 성안의 물이 배수되는 수구(水口)가 남아 있는데, 북문의 동쪽에는 치성(雉城)을 설치하여 방어력을 높이고 있다. 또한 성안에는 여러 곳에서 건물터가 확인되었으며, 세 곳에 숯가마가 남아 있다. 수습된 유물들은 고려·조선시대에 사용되었던 도자기와 기와류 등으로 그 종류와 수량은 많지 않다.
이 산성에서 가장 특징적인 것은 체성(體城)과 여장(女墻)이 확실히 구분되면서도 성의 외벽에서는 구분이 불가능하다는 점이며, 또한 여장에 사혈(射穴)이 없다는 점이다. 아울러 축성의 형식에 있어서도 우리나라 산성 축조방식에 있어서 가장 전형적인 산성의 완전한 모습을 보여 준다. 즉, 위치의 선정, 용도 시설의 활용, 여장의 완전한 잔존, 성문과 치성의 구조 등에서 고려시대 산성의 특징을 가장 잘 알 수 있다.
원주 영원산성은 학술적으로는 중세 산성의 특징(여장, 치성, 성문 등)을 잘 보여주는 산성이며, 역사적으로는 고려·조선시대를 걸쳐 전란시 치열한 격전이 벌어졌던 역사교육의 현장으로 귀중한 유적이다.
이 산성은 축조연대를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신라말 가장 큰 지방세력이었던 북원(北原)의 양길(梁吉)·궁예(弓裔)와 관련되어 있는 사적으로 인식되어 왔다. 또한 고려 충렬왕 17년(1291) 원충갑(元冲甲)이 지역의 방위군과 합단(哈丹)의 침략군을 통쾌히 무찌른 곳일 뿐만 아니라, 조선시대에는 임진왜란 때 목사 김제갑의 지휘 아래 원주 일대의 주민들이 끝까지 항전하다가 함락되어 수많은 장졸들이 목숨을 잃은 비극의 현장이기도 하다. 그 후 이 산성은 한강 상류의 요진(要鎭)으로 한동안 경영되다가 폐허가 되었다.
이 성의 전체적인 평면은 삼각형에 가까운 불규칙한 부정타원형으로, 성벽의 총 연장은 약 2.4㎞이며, 다듬지 않은 돌덩이를 차곡차곡 쌓아올린 모습이 비교적 많이 남아 있다. 동북 모서리에서 보다 높은 산봉우리를 이어서 꼬리처럼 된 용도(甬道)를 만들었는데, 이 곳은 다른 지역과의 연락에 유리한 곳일 뿐만 아니라, 남대령(南台嶺) 방면에서 능선을 타고 접근하는 적을 쉽사리 관찰하고 공격할 수 있는 곳이다. 한편 능선상에 성벽이 꺾어지는 곳은 능선을 타고 진입하는 적을 방어하기 위하여 곡성(曲城)을 마련하였는데, 동남쪽 성벽에 4곳, 북쪽 성벽에 4곳, 서쪽 성벽에 4곳이 있다.
옛 기록에 의하면 ‘영원성은 석축성으로 둘레 3,749척, 성내에 우물 1개, 샘이 5곳 있었으나, 지금은 폐하였다’고 한다. 지금 성안에는 남·북·서문터와 성안의 물이 배수되는 수구(水口)가 남아 있는데, 북문의 동쪽에는 치성(雉城)을 설치하여 방어력을 높이고 있다. 또한 성안에는 여러 곳에서 건물터가 확인되었으며, 세 곳에 숯가마가 남아 있다. 수습된 유물들은 고려·조선시대에 사용되었던 도자기와 기와류 등으로 그 종류와 수량은 많지 않다.
이 산성에서 가장 특징적인 것은 체성(體城)과 여장(女墻)이 확실히 구분되면서도 성의 외벽에서는 구분이 불가능하다는 점이며, 또한 여장에 사혈(射穴)이 없다는 점이다. 아울러 축성의 형식에 있어서도 우리나라 산성 축조방식에 있어서 가장 전형적인 산성의 완전한 모습을 보여 준다. 즉, 위치의 선정, 용도 시설의 활용, 여장의 완전한 잔존, 성문과 치성의 구조 등에서 고려시대 산성의 특징을 가장 잘 알 수 있다.
원주 영원산성은 학술적으로는 중세 산성의 특징(여장, 치성, 성문 등)을 잘 보여주는 산성이며, 역사적으로는 고려·조선시대를 걸쳐 전란시 치열한 격전이 벌어졌던 역사교육의 현장으로 귀중한 유적이다.
[1] 문화재청은 원주 영원산성의 축조시기를 밝히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