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충렬사 경내에 비각을 세워 보호하고 있는데 비신 앞뒤면에 총 1,420 여자가 새겨져 있다.
전면 상단에 좌행으로'어제달천충렬사비(御製達川忠烈祠碑)'라 전각(篆刻)하였는데 비제 다음 바로 본문을 쓰고 끝에 이 비문의 서자와 전자를 쓴사람을 밝히고 있다. 자헌대부 예조판서겸 직제학 이병모(李秉模)가 글을 쓰고 이조판서 윤동섬(尹東暹)이 전자를 썼다.
===# 충주 정렬비 #===
<colbgcolor=#315288> 정부인완산이씨 정렬비
사당 앞에는 임경업의 아내 완산 이씨(진안대군의 7세손)의 정렬비가 있다. 그녀는 남편과 같이 청나라 감옥에 수감되었을 때, 남편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청나라의 옥중에서 자살했다. 청나라에서는 아내의 명나라를 향한 충성심에 감동하여, 시신을 정중히 조선으로 돌려 보내주었다고 한다. 그녀의 절개를 기리기 위해 정렬비가 세워졌으며, 정렬비의 정식 명칭은 '대명충신 조선 임 장군 경업 처 정부인 완산 이씨 정렬비(大明忠臣 朝鮮林將軍 慶業 妻貞夫人完山李氏貞烈碑)' 이다. 정렬비는 임경업을 복권한 숙종 때에 세워졌다.
충민공 임경업(1594∼1646)장군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세운 사당이다. 숙종 23년(1679)에 사당을 세웠고, 1706년에 장군에게 충민이라는 이름을 내렸다. 영조 3년(1727)에는 사당 이름을 충렬사라 했다.
임경업 장군은 선조 27년(1594) 충주에서 태어나 인조 2년(1624) 이괄의 난 때 큰 공을 세웠다. 특히 병자호란 때 백마산성과 의주성을 다시 쌓아 국방을 강화하는 등 나라에 이바지한 바가 컸다. 명나라를 숭상하던 장군은 인조 30년(1642) 명나라가 청나라에게 위협을 받게되자 명군과 협력해 청에 대항하고자 했으나 계획이 탄로나 청군에게 붙잡히고 말았다. 청나라는 장군에게 여러 제의를 하면서 포섭하려 했으나 끝까지 뜻을 굽히지 않았다. 그 후 1646년 국내의 ‘심기원의 모반 사건’에 억울하게 연관되어 감옥에서 혹독한 고문을 받고 피살되었다.
현재 충렬사에는 장군이 사용했던 유품을 전시하고 있으며, 사당 앞 왼쪽에는 장군 부인의 곧은 절개를 기리기 위해 세워진 ‘정부인완산이씨 정렬비’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