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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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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구성과 연혁3. 역할

1. 개요

백제 16관등 중 제1등. 국무위원급에 해당하는 벼슬이다.

2. 구성과 연혁

백제 초에는 좌보(左輔)·우보(右輔)라고 하는 직책이 있었다. 좌보와 우보는 재상에 견줄 만한 최고위직으로 국정과 군사 등 국내외의 중대사를 맡았다. 『삼국사기』에서는 고이왕 시기인 260년에 16관등제도가 정비되면서 6좌평이 설치됐다고 하는데, 6좌평의 분화는 그보다 후대일 것이라고 생각된다. 중국의 사서에서는 『북사』나 『주서』에서는 좌평의 인원이 5명이라고 하며, 『구당서』에서 비로소 6좌평을 설명한다. 408년부터는 부여신을 시작으로 재상에 해당하는 상좌평이 임명되기도 했다.

백제 말에는 657년 의자왕의 서자 41명이 한번에 좌평에 임명되거나, 백제의 속국인 탐라국의 왕 도동음률[1]이나 왕자들도 좌평을 칭하는 등 구성 인수에 큰 변화가 생긴다.

『삼국사기』 직관지에 따르면 삼국통일 이후 달솔 이하 장덕까지의 백제 여섯 관등이 일길찬 이하 대오까지의 신라 관등으로 편입되는데, 좌평은 따로 언급되지 않는다. 그러나 신라본기 태종 무열왕 7년(660) 11월 22일 기사를 보면 충상, 상영 등 좌평에게도 일길찬의 관등이 주어진 것을 볼 수 있다. 좌평 아래 달솔부터는 신라 제도상 5두품 취급인데 좌평 이상은 6두품급으로 적용한 것이다. 이후 충상은 신라 17관등 중 6등인 아찬까지 승진한다.

3. 역할

이름 역할
내신좌평(內身佐平) 왕명의 출납[2]
내두좌평(內頭佐平) 창고와 재정 관리[3]
내법좌평(內法佐平) 예법, 의례 담당[4]
위사좌평(衛士佐平) 왕궁의 숙위[5]
조정좌평(朝庭佐平) 형벌, 감옥 담당[6]
병관좌평(兵官佐平) 지방의 군사 담당[7]

『삼국사기』에서 설명하는 각 좌평의 역할로 『구당서』의 서술과 같다. 좌평은 여러 귀족 중에서도 으뜸으로 재상을 뽑거나 정사를 의논하는 귀족 회의에 참여하기도 했으며, 『삼국유사』에는 이러한 귀족 회의[8]에서 재상을 선출하는 과정이 묘사돼 있다.
[1] 그는 사태를 관망하다 백제부흥운동이 승산이 없자 신라에 항복하는데, 신라 항복 당시 좌평을 칭했다.[2] 오늘날 대통령비서실장의 격이다. 좌평 중 가장 서열이 높았다는 점에서 고려 및 조선시대의 이부와 이조에도 대응된다.[3] 고려 및 조선시대의 호부와 호조, 오늘날 기재부장관의 격이다.[4] 고려 및 조선시대의 예부와 예조, 오늘날 외교부장관문체부장관의 격이다.[5] 오늘날 대통령경호처장의 격이다.[6] 고려 및 조선시대의 형부와 형조, 오늘날 법무부장관의 격이다.[7] 고려 및 조선시대의 병부와 병조, 오늘날 국방부장관의 격이다.[8] 사비시대부터는 정사암에서 진행돼 '정사암 회의'라고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