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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열 | 관등명 | ||||||||
장관 | 9주 | 5소경 | 차관 | 군 | 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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五頭品
1. 개요
신라 골품제의 일종.2. 지위
주로 신라에 편입된 옛 부족장, 촌장 계층 출신이 5두품에 들었을 거라고 추측된다. 윗 등급인 6두품 문서에도 비슷한 설명이 있지만 일반인 기준으로는 우습게 볼 만한 위치는 아니었던 게 5두품 역시 최고위 귀족계층에는 들지 못했다지만 한 지역을 아우르는 고위 인사가 포함된 계층으로 은수저~동수저 정도는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1]3. 역사
사서와 고고학적 기록을 합쳐 보아 본래는 사로국이 3~5세기 진한 거수국을 중심으로 한 삼한 소국들의 지배층을 사로국의 산하에 흡수하면서 부여된 계급으로 추정된다.[2] 6두품의 가장 위인 대아찬 관등이 법흥왕 대에 가서야 등장한 것과 찬(飡)이라는 명칭이 간(干)=왕(王)으로도 쓰였던 것을 감안하면[3] 진골과 6두품이 완전히 분리된 것은 법흥왕 대에 가서였고, 원래는 2급 지배층이었는데 골품제가 세분화되는 과정에서 1급 지배층이 성골-진골-6두품으로 세분화되었고, 이 과정에서 2급 지배층들이 5두품으로 내려가며 피해를 봤을 가능성이 높다. 골품제가 체계화되기 전인 초기 사로국은 지배층들과 관등의 분화가 덜 되어 있었다.신라의 17등급으로 나뉘는 관위에서 10등급인 대나마까지만 올라갈 수 있었다.[4] 그러나 삼국통일을 전후하여 중위제가 실시되면서 5두품도 7중대나마까지 진급할 수 있게 되었다. 중위제를 통해 진급할 수 있게 되어 5두품의 불만이 '어느 정도'는 누그러졌다.
삼국통일전쟁 후 멸망한 옛 백제계들의 경우 충상 같은 일부를 제외하면 신라의 관등 체계에 편입되면서 받은 최고 관등이 5두품이었는데, 이는 역시 신라 중앙 귀족이나 옛 고구려 귀족에 비하면 차별대우였지만 백제계가 자초한 측면도 분명히 있었음을 알아둬야 제대로 된 상황 인식이 될 것이다.[5] 백제계의 경우 나당전쟁을 거치며 상대적으로 협조적으로 응한 고구려계 귀족과 달리 부흥운동과 웅진도독부를 통해 신라에 저항을 더 오래 했기 때문에 백제계 귀족의 골품 기준을 5두품 이하로 낮춘 것이다. 처음에 순순히 항복하면 좀 더 좋게 쳐주고 계속 저항하다 패하면 대우가 깎이는 것은 몽골의 정복이나 일본 전국시대에도 그랬던 것처럼 세계사 어디에나 그랬다. 신라 문무왕은 673년 백제계에게도 기존 백제에서의 지위와 벼슬에 견주어 그에 상응하는 신라의 벼슬과 관등을 내렸지만 최고위 단계는 분명히 5두품이었다.
물론 이러한 차별이 백제 유민들에겐 더 아프게 다가왔겠지만, 신라도 분명히 할 말은 있었다. 신라 입장에선 초반에 신라가 사정이 어려울 때 반감을 억누르고 회유하고자 했을 때 비협조적이었고, 나당전쟁 때도 고구려 유민들보다 공헌이 적은 것도 사실이었으니, 이 정도도 꽤 후하게 대접한 것이라 생각했을 개연성은 분명하다. 고구려계가 진골[6]이나 6두품으로 편입된 것은 차별이 아니라 안승이 원래 왕족이었고, 6두품을 받은 고연무는 고씨 성에서도 알 수 있듯이 태생부터 6두품에 준하는 고위 귀족이었고 나당전쟁에서 큰 공을 세우기도 했다.
그래도 태종 무열왕계가 백제계 이반을 막고자 나름대로 백제계 민심 포섭에 힘쓴 기록이 있고, 이 때문에 태종 무열왕의 후손인 김헌창이 백제계 유민들을 선동해 김헌창의 난을 일으킨 것을 고려하면 무열왕계가 백제계의 불만을 진정시키기 위해 나름대로 이런저런 노력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반면 원성왕계는 고구려계 이반은 경계했지만 백제계에 대해서는 소홀했는데 이것이 후삼국시대의 원인 중 하나가 된다.
후삼국시대 견훤처럼 원신라 출신 5두품은 대거 이탈하여 후백제(!)나[7] 고려에 출사하였지만 서라벌 기습 전까지 신라의 편을 든 5두품 호족들도 있었다. 그러나 이들도 진골의 관등을 자칭하는 등 지위에 대한 불만은 매우 컸던 걸로 보이며, 진성여왕 이래 친신라 성향 원신라 지역 호족들에 한해서는 진골의 관등을 암묵적으로 인정한 듯한 정황이 있기 때문에 말기에는 간접적인 골품 상승이 된 가문들이 있었을 듯하다. 견훤도 처음부터 후백제를 건국하려던 것이 아니라 원래는 신라 최고 사령관, 그러니까 진골로의 지위 상승이 본래 바람이었는데 일이 꼬여서 후백제 건국을 하게 된 것이다. 후백제가 신라 관등을 그대로 갖다 썼지만 호족 연합과 신 왕조의 특성상 후백제의 진골급 관등은 대체로 통일신라 기준 5두품 가문이 대부분이었을 듯하다.
4. 기타
진골이라고 알려진 밀양 박씨 세력은 성덕대왕신종에 따르면 가장 높은 관등이 대나마로 나와서, 중대에 들어서는 이미 5두품으로 강등당한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물론 후대에 신덕왕이 박씨 국왕으로서 즉위한다는 점을 미루어보면 이는 일시적인 것으로 박씨는 기본적으로 진골로 취급된 것이 맞아 보인다. 다만, 태종 무열왕의 직계라든지 김씨 왕족들 중에도 6두품으로 족강된 사례가 존재함을 생각하면 모든 박씨가 진골 대우를 받은 게 아니라 김씨 왕족들과 혼맥을 형성하면서 왕의 친족지위를 유지했던 박씨들만 진골 신분을 유지했을 가능성이 더 크다.[8]속일본기에서 일본 사신 중 대나마 석양절(昔楊節)이라는 인물이 있었던 것을 보아 석씨 또한 전원 5두품이거나 대부분 5두품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9] 통일신라시대 진골이 6두품으로 족강된 사례가 여러 번 있었음을 고려하면 세월이 흘러 6두품에서 5두품으로 족강된 가문들도 있었을 듯하다.
죽령과 추풍령 출신 5두품 호족들은 눌지 마립간 이래 김씨 왕조의 친위대로서 독점 편성되어[10] 김씨 왕조의 절대권력과 중앙집권화, 삼국통일에 크게 기여하였으나 통일신라시대에도 5두품으로서 지위 개선이 되지 않자 후삼국시대에 불만이 폭발하여 견훤을 중심으로 후백제의 건국 세력이 되는(!) 참사를 부르고 만다. 그 절정이 다름 아닌 서라벌 기습.[11]
여기서 주목할 부분은 후삼국시대 후백제 VS 고려의 대립은 나주 일대에서 나주 세력과 광주 세력의 해묵은 대립으로 나주공방전으로 비화된 반면, 경북 일대에서는 김씨 족단이 육성했던 두 친위 정예 부대들간 대결 양상이 되었던 것이다. 추풍령 호족들은 아자개나 흥달처럼 신라에 대한 충성심을 간직한 부류가 없진 않았으나 결국은 채찍과 당근이란 수단을 무려 최소 20년 이상 쓴 견훤에게 기울어졌는데, 죽령 호족들 역시 마찬가지로 신라에 대한 충성심을 여전히 간직했으면서도 결국은 신라를 버리고 고려를 택한 부류가 많았음이다.
죽령보다 무려 반세기 넘게 신라 왕실에게 우대를 받아온 추풍령 일대가 후백제에게 기울어진 건 견훤의 존재로 대부분 설명되고 이는 추풍령 충북-경북 일대 특유의 고고학적 요소가 10세기 초중반에 전주와 광주에서 갑자기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것으로 입증되지만, 죽령 일대의 5두품 가문들은 어떤 이유로 신라를 저버리게 되었는지는 여전히 설명되지 않는 부분으로 남아 있다.[12] 죽령 일대는 궁예의 태봉이 신라를 공격할 때 가장 극악한 공격과 탄압을 받았었고, 견훤이 서라벌 함락 후 기세를 올릴 때 역시 후백제에게 가장 큰 타격을 받은 지역이었음도 재미있는 부분이다. 아무래도 죽령 일대는 이런 절박한 상황에서 아무 것도 하지 못한 신라와는 달리 초지일관 적극적 도움을 줬던 고려의 왕건에게 큰 호감을 느꼈을 개연성은 있으나, 현재로서는 추측의 영역이다.
[1] 진골은 금수저, 6두품은 은수저 상위, 4두품은 동수저~철수저 정도. 평민은 오늘날로 치면 나무수저, 흙수저, 똥수저로 볼 수 있다.[2] 다만 사로국 6부에 속하는 몇몇 부가 신라에 편입된 진한 소국이나 마한 소국 망명집단(김씨 족단)으로 추정됨을 고려하면 거수국의 규모에 따라서는 최상위 지배층에 들어갈 수 있었고 후의 진골~6두품이 된 것으로 추정된다. 가야도 금관국처럼 가야 내 서열이 높은 나라는 진골로 편입되었다.[3] 신라 왕계가 일원화되는 4세기 말 내물 마립간 재위 이전, 3~4세기 신라 찬들의 명칭은 관등이 아니라 간의 역할에서 기인하는 명칭에 더 가까웠고 신라 특유의 6부 체제 특성상 일정 이상의 세를 가진 간들은 다 왕이라 불릴 수 있었다.(서라벌이 아니라 양산이 근거지였던 박제상도 간이라 불렸다)[4] 4두품은 대사, 6두품은 아찬까지만 올라갈수 있었다.[5] 예외 사례가 없지는 않은데, 충상은 백제의 최고위직인 좌평 신분으로 백제 멸망 직후에 신라에 투항하고 신라군의 선봉장 노릇을 해서 6두품 아찬 대우를 받은 것이다.[6] 대표적으로 통일신라에서 진골 품계를 수여한 인물로 안승과 대조영 등이 있다. 다만 진골 대우는 이용가치가 떨어지자 곧 철회한 것으로 보인다.[7] 후백제는 엄밀히 말하면 반란 진압하라고 보낸 5두품 친위대들이 수백 년간 섬기던 신라 왕조를 통수치고 현지인들과 손잡고 나라를 세운 것이다.[8] 애초에 500년 왕조의 김씨 족단도 통일신라시대 6두품, 5두품이 수두룩한 판국에 내물 마립간 이래 수백 년간 왕위에서 배제되어 있던 박씨 족단의 전부가 진골일 리가 없다.[9] 석씨가 아무리 몰락해도 한때 신라 3왕가 중 하나였던 만큼 기림 이사금이나 흘해 이사금의 직계에 한해서는 진골이나 6두품이었을 수도 있다. 후기 박씨 왕조가 최후의 박씨 왕인 아달라 이사금의 후손이라 전해짐을 고려하면 직계에 한해서는 어느 정도 배려가 있었을 듯하다.[10] 정확히 말하면 추풍령이 눌지 마립간계 친위대였고 죽령 호족들은 복호계인 지증왕이 본인 왕조를 위해 새로 육성한 친위대였다. 하지만 지증왕계 왕실은 눌지 마립간계 친위대가 존재 자체가 불편했을텐데도 지혜롭게 추풍령 일대도 변함없이 우대해줘서, 이런 경우 늘 벌어지는 신구 정권의 친위대 대립과 다툼, 내전은 벌어지지 않았다. 그렇게 지역과 연원이 다른 두 친위대 계열은 합심해서 김씨 족단만을 위한 친위대로 재탄생했던 것이다. 이후 진흥왕 대 친위대의 반란을 경계한 진흥왕이 진골과 서라벌 출신을 친위대에서 배제하고 죽령과 추풍령 출신만 친위대에 편성하면서 두 계열은 진정 합심하게 된다.[11] 웃긴 건 견훤과 친위대의 이탈로 김씨 왕조의 힘이 약화되자 박씨 족단이 후기 박씨 왕조로 김씨의 왕위를 받아가는데 성공했지만 견훤의 서라벌 기습으로 인해 후기 박씨 왕조가 몰락하고 김씨 왕조가 복위하면서 신라 최후의 왕이 된다.[12] 굳이 말하면 죽령 일대는 5세기 초중반 시기에 고구려령이었다는 과거가 있었고 그 이유로 소지 마립간 당시 다른 신라 구성원들에게까지 경원받은 역사가 있긴 했으나, 그건 10세기 시점에선 사백 여년 전 일이었고 딱히 신라 왕실이 죽령만 섭섭하게 대한 적은 없었다. 오랜 봉사에도 불구하고 유리 천장과 차별이 여전했다는 건 추풍령과 마찬가지였지만. 훗날 신라부흥운동이 일어날 때 추풍령 일대는 가담도 공격도 하지 않고 잠잠한 것과 달리, 오히려 죽령 일대에서 신라부흥군을 공격하는 고려 왕조의 근왕군이 조직된 것도 눈여겨볼 대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