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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6-02-16 00:30:26

5두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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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인구 및 위상3. 기원과 역사
3.1. 형성 과정3.2. 관등의 한계와 중위제
4. 타 세력과의 관계
4.1. 백제 및 고구려 유민4.2. 족강된 왕족 (박씨 등)
5. 신라 하대의 동향

1. 개요

신라 골품제의 계급 중 하나. 6두품4두품 사이에 위치한 중간 계급이다.

신라 관료 조직의 허리를 담당했던 실무 책임자 그룹이자, 지방의 유력 호족 세력이 중앙으로 편입되는 과정에서 부여받은 마지노선이기도 했다.

2. 인구 및 위상

흔히 6두품에 가려져 주목받지 못하는 경향이 있지만, 5두품은 국가의 실무를 집행하고 하위 관료를 통솔하는 중간 관리자로서 확고한 위상을 가졌다.

직관지(職官志)의 관직 정원 구조를 보면, 5두품은 상위 귀족(진골·6두품)과 하위 실무자(4두품) 사이에서 뚜렷한 중간 계층을 형성하고 있다.

삼국사기 직관지에 기록된 전체 관직(약 4,500개)에서 핵심 지배층인 진골(약 70명)과 6두품(약 200명)을 제외한 나머지 인원(약 4,230명) 중, 상위 20% 정도가 5두품에 해당할 것으로 추정된다.

군사 조직에서 5두품이 주로 맡는 대대감(70명), 제감(63명) 등의 정원과, 4두품이 주로 맡는 하급 장교인 소감(372명), 화척(342명) 등의 정원 비율(약 1:5)을 고려하면 인구 비례를 유추할 수 있다.

이를 토대로 추산한 5두품 관료의 규모는 약 800명 내외로, 전체 관료의 약 18%를 차지한다.

이는 6두품(약 4.5%)보다는 4배가량 많고, 4두품(약 76%)보다는 4배가량 적은 수치로, 전형적인 피라미드 조직의 중간 허리 부분을 구성한다.

실무적으로는 이처럼 중요한 위치였으나, 진골을 위시한 최상위 지배층 입장에서 5두품은 6두품(득난)과 달리 '귀한 성씨(貴姓)'로 대접받지 못하고 4두품과 묶여 멸시받기도 했다.

통일신라 하대의 대표적 금석문인 보령 성주사지 낭혜화상탑비에는 최치원이 골품제를 설명하며 쓴 다음과 같은 구절이 등장한다.
나라에 5품이 있는데 성이(聖而), 진골, 득난(得難, 6두품) 등이다. (득난은) 귀성(貴姓)을 얻기 어려움을 이야기한 것이다. (...) 그러니 4, 5품은 말할 필요도 없다(其四五品不足言).

이는 당시 지식인의 시각에서 진골과 6두품까지는 언급할 가치가 있는 귀족으로 보았으나, 5두품부터는 4두품과 묶여서 "언급할 가치조차 없는(不足言)" 하위 계층으로 인식되었음을 보여준다. 즉, 6두품과 5두품 사이에는 '지배층 중의 지배층'과 '일반 관리'를 가르는 보이지 않는, 그러나 명확한 선이 그어져 있었던 것이다.

그래도 일반 백성(평민) 기준으로는 감히 쳐다보기도 힘든 지역 유력 인사였다. 한 지역을 아우르는 토호 세력이 이 계급에 해당했을 것으로 보인다.

현대에서도 이 표현이 비유적으로 쓰이는 경우가 있다.

3. 기원과 역사

3.1. 형성 과정

현대 학계에서는 성골-진골-6두품의 세분화가 법흥왕 대부터 나타난 것으로 보고 있다.[1] 그 이전에는 단순히 골(骨)-5두품만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즉, 법흥왕 이후 중앙집권적 왕권 강화와 지배계급 세분화 과정에서, 중앙 진출에 성공한 세력은 6두품 이상이 되었고, 지방 호족으로서 한 발 늦거나 세력이 약했던 집단은 5두품으로 고착화된 것(일명 사다리 걷어차기)으로 해석된다.

3.2. 관등의 한계와 중위제

신라의 17등급 관위 중 10등급인 대나마까지만 올라갈 수 있었다. 이는 각 행정 관서의 장(경)이나 주의 장관(도독)이 될 수 없음을 의미했다.

그러나 삼국통일을 전후하여 중위제(重位制)가 실시되면서 5두품도 숨통이 트였다. 대나마 관등 내에 9중(대)나마까지 세부 등급을 두어, 관직 명칭은 그대로지만 실질적인 급여나 대우를 높여주는 방식으로 승진의 길을 열어준 것이다. 이는 5두품 계층의 불만을 무마하고 그들의 실무 능력을 계속 활용하기 위한 고육지책이었다.

4. 타 세력과의 관계

4.1. 백제 및 고구려 유민

삼국통일전쟁 후 멸망한 옛 백제고구려의 귀족들을 편입할 때, 5두품은 중요한 기준점이 되었다.

4.2. 족강된 왕족 (박씨 등)

진골의 일종이라고 알려진 밀양 박씨 세력은 성덕대왕신종 비문에 따르면 가장 높은 관등이 대나마로 기록되어 있다. 이를 통해 신라 중대에 들어서는 왕족 방계 가문들이 5두품으로 강등(족강)당하는 사례가 빈번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후대에 신덕왕이 박씨 국왕으로서 즉위한다는 점을 미루어보면, 왕실과 혼맥을 유지한 핵심 박씨들은 진골을 유지했으나, 권력에서 밀려난 박씨들은 5두품 귀족으로 편입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5. 신라 하대의 동향

신라 말기, 중앙 귀족(진골)들의 권력 투쟁과 지방에 대한 수탈이 심해지면서 5두품 계층의 이탈이 가속화되었다.

특히 5두품은 지방 촌주나 군관 출신이 많았기에 군사적 실권을 쥐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대표적으로 견훤의 경우 최종 승진 계급은 4두품은 절대로 오를 수 없었던 비장 계급이었던데다 아주 당연한 얘기로 두품이 받쳐주지 않으면 입대가 불가능한 서라벌 왕궁근위대에서 경력을 시작했던 만큼, 아버지인 아자개가 상주 호족으로서 5두품 이상 신분이었을 확률은 대단히 높다. 이들 5두품 세력은 6두품 지식인들과 결합하거나, 스스로 호족화되어 후백제고려 건국 세력에 합류함으로써 신라 붕괴의 결정타를 날리게 된다.
[1] 이런 세분화가 완전히 자리잡은 건 진흥왕~진평왕 시기로 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