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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rowcolor=#fbe673,#fbe673> 서열 | 관등명 | ||||||||
| <rowcolor=#000,#ddd> 장관 | 9주 | 5소경 | 차관 | 군 | 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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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아찬(大阿飡)은 신라의 17관등 중 제5등에 해당하는 관등이다. 제4등인 파진찬의 아래이며, 제6등인 아찬의 바로 위 단계이다.이 관등부터는 신라의 공복 색상 중 가장 높은 등급인 자색(紫色, 보라색) 관복을 착용할 수 있었다. 이는 대아찬이 진골 귀족의 특권이 시작되는 고위 관등임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1.1. 명칭 및 유래
대아찬의 명칭 유래는 하위 관등인 아찬(阿飡)의 어원에 '크다'는 수식어가 붙은 형태다.고대 한국어 재구음은 *han-ar-kan(*한알간)으로 추정된다.
이는 '크다(大)'는 뜻의 고유어 접두사 *han(한)과, 아찬의 원형인 *ar-kan(알간)이 결합한 구조다. 앞서 아찬 문서에서 다루었듯 '아(阿)'는 고대어에서 '아래(下)' 또는 '알(卵/Source)'을 뜻하는 *ar(*알)의 음차로 분석된다. 따라서 대아찬은미상 "큰 아찬" 혹은 "아찬(하위 지배자)들의 우두머리"라는 뜻을 갖는다.
이러한 해석은 문헌상의 이표기를 통해 강력하게 뒷받침된다. 대아찬은 한아찬(韓阿飡), 한찬(韓粲), 대아간(大阿干) 등으로도 표기되는데, 여기서 '대(大)'와 '한(韓)'이 혼용되는 것은 당시 '대(大)'를 고유어 한(*han)으로 훈독했음을 보여주는 결정적인 증거다. 즉, 대아찬은 본래 6두품의 상한선인 아찬(*ar-kan) 계열의 관등 중에서도, 진골만이 오를 수 있는 '가장 큰(*han) 아찬'이라는 차별화된 지위를 나타내기 위해 만들어진 명칭으로 해석할 수 있다.
1.2. 역사적 기록
《삼국사기》에는 제3대 유리 이사금 시대에 제정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실제 기록상 인물에게 처음 수여된 사례는 418년(눌지 마립간 2), 박제상이 죽은 뒤 추증되었을 때이며, 살아서 활동한 인물 중에서는 525년(법흥왕 12) 사벌주 군주로 임명된 이등(伊登)이 최초이다.1.3. 신분 제한
대아찬은 골품제의 가장 견고한 벽이자, 진골 귀족의 특권이 시작되는 관등이었다.오직 진골만이 오를 수 있었으며, 바로 아래 등급인 아찬(6등)이 6두품의 승진 상한선이었으므로, 대아찬은 6두품이 아무리 뛰어난 공을 세워도 결코 넘을 수 없는 '신분의 벽'이었다. 신라는 6두품의 불만을 무마하기 위해 아찬 등급을 세분화한 중위제(중아찬, 4중아찬 등)를 운영했으나, 본질적으로 대아찬으로의 승진은 불가능했다. 이러한 구조적 모순은 훗날 나말여초 시기 6두품 지식인들이 반신라적 성향을 띠거나 지방 호족과 결탁하는 주요 원인이 되었다.
1.4. 외부 세력 수여 사례
신라는 타국의 왕족이나 외부 세력의 수장을 포섭할 때, 이들을 진골 귀족에 준하는 대우를 해주기 위해 대아찬 관등을 수여하기도 했다.대표적으로 발해 건국 후 신라가 대조영에게 대아찬 관등을 제수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는 발해 왕족을 신라의 진골 귀족과 동급으로 인정했다는 외교적 제스처로 해석된다. 이외에도 금관국의 왕족들이 신라에 투항했을 때나, 고구려 멸망 후 세워진 보덕국의 왕족(안승 등)에게도 진골 귀족의 대우를 하며 높은 관등을 수여했다. 대가야의 마지막 왕 도설지왕의 경우 창녕 척경비에 사찬(8등)으로 기록되어 있어 6두품 대우를 받았는지 진골 대우를 받았는지에 대한 논쟁이 있으나, 일반적으로 타국 왕족은 대아찬 이상의 대우를 통해 포섭하는 것이 관례였다.
2. 관직 진출 및 정원
대아찬은 중앙 관청의 장관(령)이 될 수 있는 최소한의 자격 요건이자, 군사·행정의 최고 책임자가 될 수 있는 시작점이었다.2.1. 경관직 (중앙)
《삼국사기》 〈직관지(職官志)〉에 따르면, 대아찬은 집사부, 병부 등 최고 권력 기구에서는 임명될 수 있는 최하위 관등이었고, 창부·예부 등 행정 실무 기구에서는 오를 수 있는 최상위 관등이었다. 구체적인 부서별 직책과 정원은 아래와 같다.||<tablewidth=100%><tablebgcolor=#fff><tablebordercolor=#4a2d5b><rowbgcolor=#4a2d5b> 소속 관청 || 직책 || 관등 || 정원 ||
| 집사부(執事部) | 시중(侍中) | 대아찬 ~ 이벌찬 | 1명 |
| 병부(兵部) | 령(令) | 대아찬 ~ 태대각간 | 2명 이상 |
| 창부(倉部) | 령(令) | 급찬 ~ 대아찬 | 2명 |
| 예부(禮部) | 령(令) | 급찬 ~ 대아찬 | 2명 |
| 사정부(司正部) | 령(令) | 대아찬 ~ 태대각간 | 1명 |
| 예작부(例作部) | 령(令) | 급찬 ~ 이찬[1] | 2명 |
| 선부(船部) | 령(令) | 급찬 ~ 대아찬 | 1명 |
2.2. 외관직 (지방)
지방 행정에 있어서도 대아찬은 최고 책임자인 9주의 도독을 역임할 수 있었다.||<tablewidth=100%><tablebgcolor=#fff><tablebordercolor=#4a2d5b><rowbgcolor=#4a2d5b> 지역 및 기구 || 직책 || 관등 || 비고 ||
| 9주(九州) | 도독(都督) | 이찬 ~ 급찬[2] | 지방 장관 (군단장 겸직) |
종합하면 대아찬(5등)은 자색 관복을 입는 '성골·진골의 리그'에 진입했음을 알리는 관등이었다. 실무 책임자(차관)를 넘어 정책 결정권자(장관)로서 국정을 주도하는 위치에 있었으며, 특히 국방을 담당하는 병부의 장관(령)이 될 수 있는 하한선이라는 점에서 그 중요성이 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