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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03-09 05:45:52

옥산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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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blewidth=100%><tablebordercolor=#315288> 파일:정부상징.svg 대한민국 사적 제154호
<colbgcolor=#315288> 경주 옥산서원
慶州 玉山書院 | Oksanseowon Confucian Academy
위치 경상북도 경주시 안강읍 옥산서원길 216-27
(옥산리)
분류 유적건조물 / 교육문화 / 교육기관 / 서원
수량 / 면적 95,681㎡
지정연도 1967년 3월 8일
건축시기 1572년 (선조 5년)
관리자
(관리단체)
옥산서원 }}}}}}
<colbgcolor=#7a3a2c> 옥산서원 영상
1. 개요2. 역사적 흐름3. 구조
3.1. 역락문(亦樂門)3.2. 무변루(無邊樓)3.3. 구인당(求仁堂)3.4. 체인묘(體仁廟)3.5. 민구재(敏求齋), 암수재(闇修齋)3.6. 경각(經閣)3.7. 전사청(典祀廳)3.8. 신도비(神道碑)
4. 책과 문서5. 관람6. 관련 영상

[clearfix]

1. 개요

경상북도 경주시 안강읍 옥산리에 있는 서원이다. 최초로 문묘 종사와 종묘 배향을 동시에 이루고 영남학파의 정신적 지주로 추대된 이언적을 주향하는 서원으로서 도산서원과 함께 영남 남인의 정신적 본산이며, 조선시대 서원 건축의 대표 양식을 보여준다.

1967년 사적 제154호로 지정되었다.

병산서원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중복으로 등재되어 있는데 2010년 7월 31일 양동마을의 일부로 먼저 등재되었으며 2019년 7월 6일에는 한국의 서원 중 하나로도 등재되어 세계유산 2관왕이 되었다.

하회마을 바로 옆에 있는 병산서원과는 달리 옥산서원은 양동마을에서 직선거리 8km 정도로 꽤 멀리 떨어져 있지만, 이 서원에 배향한 이언적의 고택인 무첨당과 그의 가문인 여강 이씨의 본진이 양동마을에 있기 때문에 그런 관련성으로 인해 세계유산에 함께 등재되었다.

2. 역사적 흐름

이언적조선시대 최초로 체계적인 성리학 저술을 다수 남긴 주리론의 선구자였다. 을사사화 2년 후의 정미사화(양재역벽서사건)로 평안도 강계로 유배된 후 유배지에서 생을 마친 뒤 약 14년이 지나서 선조 조에 처음 신원되고 그 유문을 수집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이후 차례로 1568년(선조 1) 영의정 추증, 1569년(선조 2) 종묘 배향이 이루어졌다. 그리하여 그의 학덕을 추모하기 위하여 1572년(선조 5년) 경주부윤 이제민 및 회재의 제자 군수 권덕린 등 관료 및 유림(선비들의 집단)이 처음으로 서원을 세웠으며, 1574년(선조 7) 선조로부터 '옥산'이라는 이름으로 사액을 받았다.

1610년(광해군 2) 문묘 종사에 따라 위상이 더욱 높아졌다. 이에 경주시지역 향촌사회를 실질적으로 대표하면서 지역 유림들의 교육 및 정치사회적 활동의 중심지로 역할 하였을 뿐만 아니라 이언적이황과 함께 영남 남인의 정신적 지주로 추앙됨에 따라 안동의 도산서원과 더불어 영남의 수원(首院)으로 자리매김 하였다.

갑술환국 이후 노론이 정권을 잡게됨에 따라 침체를 겪었으나 그런 가운데 18세기 말에 이언적의 학문이 영조정조에 의해 주목 받으면서 그를 제향하는 옥산서원 역시 다시금 중앙정부의 관심을 끌게 되었다. 특히 정조의 관심은 지대하여, 1781년(정조 5) 옥산서원으로 중앙관료를 보내 노론의 대표 서원인, 송시열을 주향하는 화양서원(華陽書院)의 사례에 준하여 치제하도록 명했다. 이후 1792년(정조 16)에도 치제를 명했으며, 1794년(정조 18)에는 옥산서원에서 빌려온 이언적의 <속대학혹문(續大學或問)>을 읽고 돌려보내면서, <회재선생 ‘속대학혹문’의 서문에 제하여(題先正晦齋續大學或問卷首)>라는 글을 직접 지어 옥산서원에 보내 이를 소장하게 하였다.

문묘 종사 대현을 주향하는 영남의 대표서원이자, 세도정치에 대항할 정치적 동반자로서의 영남 남인의 구심점이라는 성격탓에 흥선대원군서원 철폐령에도 훼철되지 않은 47개소 중 한 곳이다.

3. 구조

옥산서원의 건축철학은 "내부지향"이다.
(1) 핵심건물인 강당, 기숙사, 무변루의 처마가 거의 붙어 있다. 공공건물을 이렇게 지으면 화재시 불이 번질 위험이 높아 건물간 거리를 두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강당인 구인당에 앉은 학생이 공부에 집중할 수 있도록 앞에 있는 자옥산과 무변루만 볼 수 있게 시선을 차단하였다.
(2) 유식공간인 무변루의 편액이 내부에 걸려 있다. 외부 사람이 아닌 내부의 유생에게 "마음의 경계를 짓지 말고, 마음을 넓고 쾌활하게 가져 아무런 거리낌이 없이 살라."는 무변루의 편액을 항상 볼 수 있게 했다.
(3) 구인당이나 무변루의 방문이 외부로 향해 있지 않고, 모두 내부의 마루를 향해 있다.
(4) 서원이 울창한 숲 속에 자리잡고 있고 있어, 외부 노출을 꺼린다. 멀리서 길을 걷거나 차를 타고 지나가면 서원 건물이 보이지 않는다.

3.1. 역락문(亦樂門)

파일:경주_옥산서원_외삼문_(촬영년도___2015년) 문화재청.jpg
<colbgcolor=#7a3a2c> 역락문
옥산서원에 들어가기 위한 출입문. 논어의 첫 부분 구절인 '벗이 먼 곳으로부터 오는 것이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有朋而自遠方來 不亦樂乎)'에서 따 지었다. 이는 도산서원의 역락서재와 같다.
특이하게 서쪽(왼쪽)에 계단이 없다. 이는 옥산서원의 출입례가 동쪽으로 들어가서 동쪽으로 나오는 '동입동출東入東出'이라는 것을 암시한다. 영남의 옥산서원, 도동서원, 도산서원, 병산서원은 모두 '동입동출'의 예를 따른다.
평상시에는 오른(동)쪽 문만 열어둔다. 1년에 2번 봄과 가을에 향사를 지낼 때만 가운데(중)문이 열리고, 왼(서)쪽 문은 열리지 않는다.

3.2. 무변루(無邊樓)

파일:경주 옥산서원 무변루.jpg
<colbgcolor=#7a3a2c> 무변루
역락문을 들어서면 나오는 누각이며 올라가는 계단이 통나무를 깎아 만든 특이한 형태다. 공부하던 유생들의 휴식 공간이었다.
2층의 좌우에 난방용 함실 아궁이와 고상식 온돌이 놓여있는 특이한 구조이다.
끝이 없는 누각이라는 의미인데 본래 이름은 납청루였으나 노수신이 '스승이 남긴 뜻에 맞지 않다'고 하여 주희가 주돈이의 인품을 평한 '풍월무변(風月無邊)'을 따서 무변루로 고쳤다.
일반적인 누각은 들어오는 곳(외부)에 편액이 걸려 있으나, 무변루의 편액은 서원 내부를 향하여 걸려 있다.
현판 글씨는 한석봉의 친필이다.

우리나라 서원 중에서 최초로 세운 누각이면서 지붕에는 수리 년도를 기록한 기와가 있으므로 2022년 7월에 대한민국의 보물로 지정되었다.

3.3. 구인당(求仁堂)

옥산서원에서 강의와 토론이 열렸던 강당. 서원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건물이다. 마루 동쪽의 양진재는 원장실이고 서쪽의 해립재는 교사들이 지내는 곳으로 현대 학교의 교무실에 해당한다. 강당 앞마당 좌우에는 공부하는 유생들이 기거하는 동재와 서재가 마주보고 있는데 동재 쪽에 더 나이가 많은 유생들이 기거했다고 한다.

구인당 정면에 걸려 있는 옥산서원 현판 글씨는 추사 김정희제주도유배되기 직전 54세에 쓴 글씨다. 1839년 구인당이 화재로 전소됨에 따라 새로 사액받은 현판이다.
구인당의 안쪽에는 아계 이산해가 1574년 최초 사액 때 쓴 현판이 걸려 있다. 불에 탄 후에 원본 글씨를 구해다가 모사한 것이다.

3.4. 체인묘(體仁廟)

파일:경주_옥산서원_체인묘_정면_(고도보존육성과,_2017) 문화재청.jpg
<colbgcolor=#7a3a2c> 체인묘
이언적의 사당이다. 사당은 신성한 공간이므로 추가로 담장을 둘렀다. 보통 서원에서 제향을 하는 사당에는 사(祠)자 또는 묘(廟)를 쓰고 있다. 사(祠)와 묘(廟)의 명칭에는 높낮이의 차이가 없다. 참고로 소수서원은 문성공묘文成公廟, 옥산서원은 체인묘體仁廟, 금오서원金烏書院은 상현묘 尙賢廟, 화양서원은 만동묘萬東廟 등이고, 도산서원은 상덕사尙德祠, 병산서원은 존덕사尊德祠, 돈암서원은 숭례사崇禮祠 등이며, 도동서원과 남계서원은 사당의 이름이 없다.

3.5. 민구재(敏求齋), 암수재(闇修齋)

동·서재 기숙사이다.
민구재는 동재東齋라 부르는 상급생上級生 기숙사寄宿舍이다.
≪논어論語≫「술이述而」에 공자孔子께서 스스로를 “나는 나면서 아는 자가 아니라 옛 것을 좋아하여 민첩하게 그 것을 구하는 자이다[子日 我非生而知之者 好古敏以求之者也].”에서 취했다. 어질고 착한 마음을 마음속에 간직하는 데 그쳐서는 아무런 의의가 없으며, 학문하는 궁극적인 목적은 민첩하게 잠시도 머무름 없이 실천하여 힘써 행하는 실천궁행實踐躬行에 있음을 밝힌 것이다. 명명자命名者는 성균관 대사성大司成 초당草堂 허엽許曄[1517-1580]이고 글씨를 쓴 사람은 모정慕亭 배대유裵大維[1563-1632]이다.

암수재는 서재西齋라 부르는 하급생下級生 기숙사이다. 주희朱熹[주자朱子]의 자찬自贊 중에 “드러내지 않은 가운데 날마다 자신을 닦는다[闇然而自修].”는 뜻을 취했다. 가만히 남모르게 부지런히 자신을 닦는다는 자수自修의 의미이다. 명명자와 글씨를 쓴 사람은 민구재와 동일하다

3.6. 경각(經閣)

파일:경주_옥산서원_경각_정면_(고도보존육성과,_2017) 문화재청.jpg
<colbgcolor=#7a3a2c> 경각

어서각이라고도 한다.
옥산서원의 각종 서적과 책판 및 임금이 내린 어서를 보관하던 곳이다. 지금은 비어 있는데, 이들 모두 입구에 있는 옥산서원유물관 수장고에 보관되어 있다.

3.7. 전사청(典祀廳)

체인묘 옆에 있는 제사에 사용하는 제기제구를 보관하는 건물.

3.8. 신도비(神道碑)

체인묘 사당 오른(서)쪽에 있는 이언적의 신도비 비석이다.
고봉高峯 기대승奇大升이 찬撰하고, 아계鵝溪 이산해李山海가 비문 글씨를 썼다. 원래 서원 건립 5년 후인 1577년 세심대의 용추龍湫 위 길가에 신도비가 세워졌다.
1613년 이기李芑[덕수인德水人]의 증손자인 동악東岳 이안눌李安訥이 경주부윤慶州府尹으로 부임하고, 이듬해인 1614[광해군 6]년 6월에 옥산서원 방문하였다. 서원에서 용추龍湫 위의 신도비神道碑에 흰 천을 감아 보지 못하게 하였는데, 결국 자기 증조부인 이기李芑의 악행惡行에 대한 기록을 보게 되었는데, 이안눌의 진심어린 사과와 간청으로 1614년 6월 이후에 서원 경내境內에 비각을 세우고, 그 안으로 옮겨 세웠다.
세심대의 용추 위에 가면 처음 신도비가 세워진 자리가 그대로 움푹 패연진 상태로 남아 물이 고여 있다.

여기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강효석姜斅錫의 ≪대동기문大東奇聞≫ ⸢인조조仁祖朝⸥“이안눌李安訥이 회재晦齋의 비석을 껴안고 울다.”에 보인다.
회재의 서손庶孫 중에 서원 옆에 사는 자가 맨발로 나와서 막으며 말하기를 “성주城主는 우리 조부祖父의 서원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고 했다. 이에 이안눌도 역시 맨발로 사과하고 나서 묘비廟碑를 안고 울었으니 비명碑銘은 곧 고봉高峯 기대승奇大升이 지은 것으로, 이기李芑의 훈작勳爵을 모두 삭탈削奪하게 한 사람이다. 이 때 이안눌은 스스로 말하기를 “만일 이 비석을 고쳐 세운다면 비록 원복院僕[서원 소속의 노비]의 문서에 내 이름을 쓴다고 해도 또한 감히 사양하지 못할 것이오.”라고 하였다. 이내 서원書院 및 고택故宅인 독락당獨樂堂과 계정溪亭을 수리修理하는 데 하나도 정성껏 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매산집梅山集≫

4. 책과 문서

옥산서원에는 다양한 책과 문서가 보관돼 있다.

5. 관람

입장료는 없다.

관광도시로 유명한 경주시에 있지만 대부분의 경주 주요 관광지가 모여있는 동 지역에서는 거리가 꽤 있는 북부 안강읍에서도 서쪽 외곽지역에 있다. 옥산권으로 묶어서 바로 인근에 있는 이언적이 지은 사랑채인 독락당(보물 413호)[1], 통일신라시대의 특이한 석탑 정혜사지 십삼층석탑(국보 40호)과 하나의 코스로 같이 관람하도록 안내되고 있다. 세 장소는 서로 도보이동이 가능할 만큼 가까이 있다. 가장 능역이 잘 보존된 신라왕릉흥덕왕릉도 비교적 가까운 곳에 있는 유적지지만 거기는 대중교통 접근은 거의 힘들고 자가용이 있다면 같이 방문할 만하다.

대중교통은 경주 버스 203이 있다. 자주 다니는 버스가 아니므로 시간표를 참고해야 한다. 203번은 양동마을을 먼저 거치고 옥산서원으로 향하므로 대중교통을 이용한다면 양동마을과 같이 일정에 넣는 게 낫다.

'옥산서원입구' 정류장은 옥산서원에서 엄청 멀다.[2] 옥산서원입구 정류장에 내려 옥산서원까지 가려면 걸어서 무려 2km를 가야 한다.

시외버스는 없지만 가까이 가는 시외버스는 동대구-포항완행 노선으로, '풍산금속' 정류장에서 내려서 4km 정도 걸어가면 옥산서원이 나온다.

6. 관련 영상


[1] 건물 옆쪽 담장에 좁은 나무로 살을 대어 대청마루에서 살창을 통해 앞 계곡의 흐르는 냇물을 바라볼 수 있는 특이한 구조의 조선시대 건축물이다. 옥산서원과 함께 양동마을의 일부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2] 성주군의 '한개마을입구' 정류장도 비슷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