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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영은문 주초 서울 迎恩門 柱礎 Plinths of Yeongeunmun Gate, Seoul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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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 유적건조물 / 인물사건 / 역사사건 | |
면적 | 1,111㎡ | |
지정연도 | 1963년 1월 21일 | |
제작시기 | 조선 시대 | |
위치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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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은문 전경 | 흑백에 색을 입힌 사진 |
1. 개요
조선 태종 7년인 1407년에 태종이 명나라에서 내려오는 사신을 몸소 맞이하기 위하여 세운 문. 현재 영은문 주초가 대한민국 사적 제33호로 지정되어 있다.2. 역사
1407년에 조선 태종이 "조금이라도 사대(事大)의 예(禮)를 잃어서는 안되며, 마땅히 왕보다 높여 지성(至誠)으로 천사(天使)를 섬겨야 한다"는 사대주의적인 입장에서 조선으로 내려오는 명나라 사신을 위하여 건립한 대형 문이다.태종이 명나라 사신을 영접하던 모화루(慕華樓)를 세우며 함께 건립한 문으로, 이후 중국 사신이 조칙을 가지고 오면 임금이 친히 모화관까지 영접 나오는 것을 상례로 삼도록 하였다.
명나라 멸망 이후 청나라가 들어서도 계속 유지하여 영은문은 대한제국 시기까지도 존속하였으나, 이후 고종 때 중화 사대주의의 대표 상징물이라 하여 아예 허물어버리고 그 옆에 독립문을 세웠다.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고 주초는 지금도 독립문 앞에 남아있다. 영은문의 현판 또한 국립고궁박물관에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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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공 직후 독립문과 영은문 주초 | 영은문 주초 |
현재 위치한 자리는 영은문이 서있던 본래의 자리는 아니며, 도로 공사로 인해 독립문과 함께 옮겨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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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은문 현판 |
3. 여담
영은문, 모화관 등을 이유로 조선이 청나라의 속국이라는 잘못된 해석을 내리는 경우도 있다. 비교하자면 중세 유럽에서는 왕(King, Rex)이라는 타이틀을 받으려면 무조건 로마 교황의 윤허를 받아야 했는데 이런 논리대로 따지면 중세 유럽 가톨릭권은 다 교황령의 식민지라는 엉뚱한 해석이 가능해진다. 다만 임오군란 이후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을 맺으면서 청 상인을 대거 침투, 전통적 주종 관계를 근대적 주종 관계로 치환을 꾀하는데 이때부터 청일전쟁까지는 청나라의 간섭이 심해진다.문루를 복원하자는 얘기도 있지만 사대주의의 상징이라는 의미를 배제 하더라도 실질적으로 어려운게, 자료가 별로 남아있지도 않고 제한적이며 한국 전쟁을 걸치면서 주초 부분에 많은 총알자국으로 인해서[1] 손상이 상당히 심한데다가 설사 복원을 한다 해도 독립문을 가려버릴수도 있다. 그래서 사실상 문루를 복원하는 일은 가능성이 거의 없을 것이다.
4. 외부 링크
5. 사적 제33호
조선시대에 중국의 사신을 맞아들이던 모화관 앞에 세웠던 주춧돌이다.
개화기에 우리민족의 자유와 독립을 다짐하는 의미로 영은문(迎恩門)을 헐고 그 자리에 독립문을 세우면서 그 기둥을 받치던 밑돌인 주초만 남게 되었다. 모화관은 조선 태종 7년(1407)에 처음 세우고 모화루라 하였는데 그 뒤 세종 12년(1430)에 모화관이라 이름을 바꾸고 그 앞에 상징적인 의미의 홍살문을 세웠다. 중종 32년(1537)에 홍살문보다 격식을 갖춘 형식의 문을 만들고 ‘영조문’이라 하였다가 중종 34년(1539)에는 중국 사신의 건의로 영은문이라 이름을 고쳤으며, 연주문·연은문이라고도 하였다.
중종 때 만들어진 문은 1칸 규모이며 두 개의 긴 주춧돌 위에 원기둥을 세우고 우진각지붕을 얹었는데, 지붕은 청기와로 덮고 각종 동물 모양을 조각한 잡상을 배치하였다. 남아 있는 2개의 주초는 2단의 사각형 받침돌 위에 기둥처럼 길게 세워져 있다. 위에 놓인 받침돌에는 2개씩의 안상(眼象)이 조각되어 있다.
1896년 독립문이 세워지면서 주초만 그 앞에 세워두었는데, 1979년 성산대로 공사로 인해 독립문과 함께 지금의 자리로 옮겨졌다.
개화기에 우리민족의 자유와 독립을 다짐하는 의미로 영은문(迎恩門)을 헐고 그 자리에 독립문을 세우면서 그 기둥을 받치던 밑돌인 주초만 남게 되었다. 모화관은 조선 태종 7년(1407)에 처음 세우고 모화루라 하였는데 그 뒤 세종 12년(1430)에 모화관이라 이름을 바꾸고 그 앞에 상징적인 의미의 홍살문을 세웠다. 중종 32년(1537)에 홍살문보다 격식을 갖춘 형식의 문을 만들고 ‘영조문’이라 하였다가 중종 34년(1539)에는 중국 사신의 건의로 영은문이라 이름을 고쳤으며, 연주문·연은문이라고도 하였다.
중종 때 만들어진 문은 1칸 규모이며 두 개의 긴 주춧돌 위에 원기둥을 세우고 우진각지붕을 얹었는데, 지붕은 청기와로 덮고 각종 동물 모양을 조각한 잡상을 배치하였다. 남아 있는 2개의 주초는 2단의 사각형 받침돌 위에 기둥처럼 길게 세워져 있다. 위에 놓인 받침돌에는 2개씩의 안상(眼象)이 조각되어 있다.
1896년 독립문이 세워지면서 주초만 그 앞에 세워두었는데, 1979년 성산대로 공사로 인해 독립문과 함께 지금의 자리로 옮겨졌다.
6. 관련 문서
[1] 현재 색이 다른 부위가 있는데 이는 시멘트로 메워 놓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