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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의 도립공원 | |||
문경새재 (조령) 聞慶새재 (鳥嶺) Mungyeong Saejae | |||
<colbgcolor=#6ab048> 위치 | 경상북도 문경시 충청북도 괴산군 | ||
높이 | 642m | ||
좌표 | 북위 36° 46′ 1.46″ 동경 128° 4′ 27.29″ | ||
면적 | 5.3㎢ | ||
위성사진 | |||
문경새재 도립공원 | |||
지정일 | 1981년 6월 4일 | ||
관리주체 | 경상북도 | ||
홈페이지 |
문경새재의 제1관문인 주흘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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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새재 또는 조령(鳥嶺)은 충청북도 괴산군 연풍면과 경상북도 문경시 문경읍 사이를 잇는 해발 642m의 고개로, 소백산맥의 조령산(1,017m)을 돌아 간다.새재의 '재'는 고개를 의미하는 순우리말이며, 새에 대해서는 두 가지 어원이 있다. '나는 새도 넘어가기 힘든 고개'라는 의미에서 새재라 불렸다는 설과, 억새풀이 많아서 새재라 불렸다는 설이 있다. 조령은 전자의 의미를 한자로 옮긴 것으로, 조선 전기에는 후자의 의미를 한자로 옮긴 '초점[1]'이라는 지명이 널리 쓰인듯 하나, 점차 조령이라는 단어가 더 널리 쓰이게 되었다. 전통적으로 충청도(호서)와 경상도(영남) 지역의 도계였으며, '영남(嶺南)'이라는 명칭 또한 '조령과 죽령의 남쪽'이라는 의미에서 붙여진 것이다. 오늘날에도 새재의 관문 일대는 충청북도와 경상북도의 도계를 이룬다. 경상북도에서는 이 곳을 문경새재 도립공원으로 지정하여 관리하고 있으며, 이 밖에 명승 제32호와 사적 제147호(새재에 설치된 관문들('문경 조령 관문'))로도 지정되어 있다.
2. 역사
문경새재의 험준함은 예로부터 유명해서, 삼국시대 때는 신라 초기에 고구려 장수왕의 남진을 막는 국경선이었고, 임진왜란 당시 신립이 충주 탄금대가 아닌 이곳에서 결진하여 매복했다면 왜군 선봉장 고니시 유키나가의 부대를 더 효과적으로 막았을 것이라 보기도 한다. 파견 온 명나라 장군 이여송은 문경새재의 지형을 보고 "이 험준한 고개를 지킬 생각을 못 하다니 신 총병도 참 지략없는 사람이다."하고 신립을 비웃었다고 한다. 심지어 일본마저 이곳에 매복이 있을까봐 긴장했으나 아무도 없단 보고에 이런 명당을 비우다니 조선엔 인재가 없다고 비웃었다. 그가 조령에서 적을 막지 않은 이유에 대해서 여러가지 추측이 난무하고 있다. 자세한 내용은 탄금대 전투 문서의 6번 문단으로.한양과 동래를 연결하는 영남대로의 중추로 추풍령(좌로), 죽령(우로)과 함께 낙동강 유역(경상도)과 한강 유역(경기도)를 잇는 가장 중요한 경로였다. 전근대 시절에는 죽령은 자체가 험한데다 단양의 남한강 협곡때문에 한산했고, 추풍령은 우회길인데다 옥천과 영동사이에 있는 금강의 협곡들 때문에 각광을 받지 못했으나, 조령은 고개가 험한 것을 빼면 한성과 경상도를 직선거리에 가깝게 이었고 협곡과 같은 방해물이 적었다. 그 덕분에 청주에서 회인과 보은을 거쳐 상주로 가는 고개인 화령과 함께 주요 고개로 자주 이용이 되었다.
특히 과거를 보러 가는 경상도의 선비들이 화령과 함께 그야말로 사랑해 마지않았는데, 죽령으로 향하면 죽죽 미끄러지고 추풍령을 넘어가면 추풍 낙엽처럼 떨어지는 데 반해, 문경새재를 넘으면 말 그대로 경사를 전해듣고(聞慶) 새처럼 비상하리라는 미신이 있었기 때문.
후삼국시대 견훤과 왕건의 격돌이 있었던 격전지 가운데 하나이며(929년 가은성 공방)[2]
지금도 복원이 잘 되어있어 꽤 준수한 트레킹 코스로 3개 관문(주흘, 조곡, 조령관)이 있다.
3. 교통
오늘날 충주 - 문경간의 교통은 이화령을 지난다. 서울 - 부산의 지름길인 중부내륙고속도로 문경새재 나들목으로 접근할 수 있으며, 3번 국도와 34번 국도가 지나가긴 하지만 엄밀히 따지면 이화령을 넘어간다.그런데 중부내륙선 철도는 이화령이 아니라 조령산을 직접 돌파한다. 처음에는 이화령으로 계획됐으나 지질 조사 결과 문경새재를 직접 돌파하는 것으로 계획이 바뀌었다. 그래서 문경새재도립공원 입구에 교각을 세우고 있다. 이곳에 연풍역이 들어설 예정이다.
문경새재의 인지도가 워낙에 높은지라 이화령을 지나는 도로에도 문경새재 이름을 붙이고 있다. 과거에는 매우 붐볐으나 이제는 한산한 자전거도로이자 트레커들의 코스가 된 3번 국도(신작로)의 이화령 고갯길이 새재 자전거길로 불리며, 중부내륙고속도로의 터널도 이화령을 지나는데 문경새재터널로 이름지어졌고, 근처에 있는 나들목의 이름 역시 문경새재 나들목이다.
3관문에서 수안보와 충주로 가는 버스는 배차간격이 길고, 막차가 17:10에 있는데 실제로는 5분 일찍 도착하여 출발하므로 막차 시간에 주의를 요구한다. 그 외 소조령(확장되기 전 2차선 3번 국도)까지 나가면 '신혜원'이라는 정류장이 있는데 여기서 괴산군에서 수안보를 오가는 군내버스를 탈 수 있다.
3.1. 시내버스
문경새재도립공원(359000520) | |
문경시 시내버스 | |
일반 | |
좌석 |
고사리(280000216·280000749)/원풍리(280000446·280000652)/신혜원(280000148·280000812) | |
괴산군 농어촌버스 | |
농어촌 |
조령(64615) | |
충주시 시내버스 | |
일반 |
충주시 시내버스의 조령정류소는 괴산군 농어촌버스의 원풍리정류소와 같은 곳에 있다.
4. 매체
- 김영철의 동네 한 바퀴: 태조 왕건에서 궁예로 열연한 김영철이 이곳을 찾는 에피소드가 나왔다. 후술하듯이 태조 왕건을 촬영한 세트장이 근처에 있다.
- 문경고개: 1950년에 작곡된 북한 노래의 배경이다.
- 전국노래자랑: 2005년 문경시 편을 문경새재 제1관문 근처에서 녹화했었다.
- 진도 아리랑: '문경 새재는 웬 고갠가 구부야 구부구부가 눈물이 난다.'라는 가사가 있으며, 2000년대 중3 음악 교과서에도 수록되었다.
- 동네 한 바퀴(KBS): 2023년 12월 30일 이만기가 이 곳을 방문하는 장면이 방송되었다.
5. 기타
- 새재 3관문인 조령관의 경우 새재 안은 경상북도 문경시 관할이지만 그 밖으로는 충청북도 괴산군 관할이기 때문에 행정구역에 따라 다르게 나올 수 있다. 조령관 새재 안에 구급상황이 발생하면 경북지방 소방에서 구조 및 지원을 하지만 그 밖의 괴산군 지역은 충북지방 소방에서 구조 및 지원을 하게 되기 때문에 조령관 관외지역에서 사고 등이 발생하여 구조를 요청할 경우 소방 출동에 차이가 있을 수 있다. 치안상으로도 조령관문 안은 경북경찰청 산하 문경경찰서에서 조사를 나오게 되지만 그 밖의 괴산군 지역은 충북경찰청 산하 괴산경찰서에서 조사를 나올 수 있다.
- 새재길을 걷다 보면 소나무들이 파여 있거나 흠이 나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 이는 과거 일제강점기 시절 부족한 연료를 보충하려고 송진을 추출했던 흔적이다.
- 문경에서 양평 방향으로 중부내륙고속도로를 타고 가다 보면 어느 순간 문경새재 전체가 한눈에 조망되는 구간이 있는데, 주변의 높은 산세 가운데에 푹 꺼진 고개 양 옆으로 바위산이 삐죽삐죽 솟아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군사 쪽에는 문외한인 사람이 봐도 정말 입구 틀어막고 방어하면 되겠구나 싶은 천혜의 요새임을 한 눈에 알 수 있다.
- 제1관문인 주흘관 인근에는 드라마 태조 왕건을 비롯해 고려시대와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촬영한 사극 세트장이 있다. 태조 왕건 이후에도 고려시대를 다루다가 2008년 이후부터는 여말선초와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한 KBS 사극 드라마를 촬영하고 있다.
- 경상도를 이르는 또다른 말인 '영남(嶺南)'은 이곳 문경새재, 즉 조령(嶺)의 남(南)쪽에 위치한 지역이라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 지형 특성상 옛날부터 산적이 많았는데, 1980년대까지도 산적이 존재했다. 지나가는 트럭에 뛰어들어 짐을 약탈하는 방식으로 산적질을 했는데, 길이 험해 차량이 제 속도를 내지 못해서 가능한 일이었다.
6. 조령 산불됴심 표석
조령 산불됴심 표석 (경상북도 문화재자료[3] 제226호)
표석의 설치연대는 확실치 않으나 대체적으로 조선 후기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며 원추형 화강암 자연석에 음각된 순수 한글비석이다. 현재 문화재 위치는 처음 세워질 당시의 장소로 보여지며 많은 사람들이 오고가는 길목에 산불예방과 주흘산(主屹山)의 자연에 대한 중요성을 널리 알리고자 세운 것으로 보여진다. 현재 국내에 고어(古語)로 된 한글비석은 모두 4점이나 "조령 사물도심 표석"을 제외하곤 모두 국한문 혼용으로 되어 있어 국내 유일의 순수한글 비석이라 할 수 있다.
표석의 설치연대는 확실치 않으나 대체적으로 조선 후기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며 원추형 화강암 자연석에 음각된 순수 한글비석이다. 현재 문화재 위치는 처음 세워질 당시의 장소로 보여지며 많은 사람들이 오고가는 길목에 산불예방과 주흘산(主屹山)의 자연에 대한 중요성을 널리 알리고자 세운 것으로 보여진다. 현재 국내에 고어(古語)로 된 한글비석은 모두 4점이나 "조령 사물도심 표석"을 제외하곤 모두 국한문 혼용으로 되어 있어 국내 유일의 순수한글 비석이라 할 수 있다.
오래 전에 세워진 산불 조심 표석이 이곳에 있는데, 특이하게도 '산불됴심'이라고 쓰고 '산불조심'이라고 읽는다. 이 표석이 언제 세워졌는지는 확실히 알려져 있지 않으나, 구개음화가 활발해진 18세기 이후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조]를 의도한 표기가 '됴'라는 것 자체가 이미 구개음화가 상당 부분 진행된 시기에 이 비석이 세워졌음에 대한 방증. 즉 발음은 [조]로 하면서도 쓸 때에는 "원래 '됴'로 써야 맞는 것이겠거니" 하며 지레짐작을 해 버린 경우이니, 일종의 과도교정에 해당한다. 사실 '조심'의 '조(操)'의 중고한어 및 현대 표준 중국어 발음은 [t͡sʰɑu]로, 초성이 무성 치경 파찰음이기 때문에 'ㄷ'이 올 이유도 접근음 [j]가 올 이유도 없다. 아마 조선 초기에는 '조'가 [t͡so]라고 발음됐던 것이 나중에 [t͡ɕo]라고 읽히게 되었는데[4], 이를 '됴'라고 인식해서일 것이다. 즉 [t͡so]와 [tjo]가 모두 [t͡ɕo]로 뭉개진 상황에서 [t͡ɕo]라는 발음에만 기대어 원음이 [tjo]였을 것이라고 잘못 판단하여 새긴 것. 또한 山의 순우리말인 '뫼' 혹은 '메'가 잘 쓰이지 않는 시기라는 것도 알 수 있다.
옛한글로 쓰인 비석이 총 5기가 남아있는데, 그 중에서 순한글로 쓰인 유일한 비석인데다 자연보호에 관한 당시의 시선도 알 수 있어 역사적 가치가 높다.
표기가 독특한 느낌으로 보여서인지 이곳 주변에서는 팻말 등을 설치할 때도 비석처럼 쓰는 것이 불문율이다.
6.1. 외부 링크
6.2.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226호
산불조심의 경각심을 일깨워주기 위해 세운 비로, 자연석을 다듬지 않고 그대로 사용하였다.
서쪽면에 ‘산불됴심’이라는 순 한글 글자를 세로로 큼지막하게 새겨 놓았다. 조선시대에는 국경 수호와 산성 등을 지키기 위해서는 일반인의 통행을 금지하고 산불을 조심하는 것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었으므로 이를 서민들이 잘 알 수 있도록 한글비를 세웠던 것으로 보인다.
순수 한글비라는 점에서 큰 가치가 있는 이 표석은 ‘조심’을 ‘됴심 ’이라고 기록한 것으로 보아 조선 영·정조 시대에 세운 것으로 짐작된다.
서쪽면에 ‘산불됴심’이라는 순 한글 글자를 세로로 큼지막하게 새겨 놓았다. 조선시대에는 국경 수호와 산성 등을 지키기 위해서는 일반인의 통행을 금지하고 산불을 조심하는 것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었으므로 이를 서민들이 잘 알 수 있도록 한글비를 세웠던 것으로 보인다.
순수 한글비라는 점에서 큰 가치가 있는 이 표석은 ‘조심’을 ‘됴심 ’이라고 기록한 것으로 보아 조선 영·정조 시대에 세운 것으로 짐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