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養牛法. 조선 세조 8년, 1462년 4월 13일에 편찬된 한우에 대한 개량과 의학 지식 등을 담은 책이자 이 책을 바탕으로 시행된 한우 증식 계획. 책의 경우 양우법초(養牛法抄)라고도 부른다.2. 내용
이 부분은 한국전통지식포탈 : 축우정책과 한국 수의사학 개관을 참조하였습니다.조선은 국가의 창건 이래로 "농상은 왕정의 근본"이라는 취지 하에 소의 개량과 증식, 육우 확보에 큰 노력을 기울였다. 가장 먼저 스타트를 끊은 인물은 정종으로 최초의 수의학 문헌인 신편집성마의방우의방을 편찬케 하였다.
정종 이후 태종 7년, 1407년에는 처음으로 우적(牛籍)을 작성케 하였고, 태종 13년, 1413년 8월에는 혜민국 조교 김경진 등 4인을 사복시에 속하게 하여 마의방을 습득케 하였다.
이후 세종 9년 2월에는 우마방서를 전의감 의원들에게, 마의방을 제주도민들에게 교육하였고, 세종 13년, 1431년에는 "소는 나라에 쓰임이 심히 크므로 공공장소가 아닌 곳에서 기르고 증식하되 정성을 다 할 것이며 권장규정에 위배됨이 없게 하라"는 명을 내렸다. 세종 28년, 1446년에는 함경도에 콩 3천 섬, 평안도에 콩 1만 섬, 전라도에 콩 8만 섬을 보내 소의 사료로 지급하게 하였다.
그러다 세조 8년, 1462년 4월에는 유구 왕국에서 물소 2마리를 진상하였는데 처음에는 웅천(熊川)에 두고 기르다가 사복시 윤(司僕寺尹) 박서창(朴徐昌)이 물소의 상태가 좋지 않으며 그 성질이 더위를 두려워하고 물속에 깊이 엎드려 있으려 한다는 것을 알리자 급히 왕명으로 창덕궁(昌德宮) 후원(後苑)에서 기르게 하였다.[1] 그러나 물소는 결국 죽고 말았는데, 이때 소에 대한 연구의 중요성을 깨닫고 기술보급서 양우법을 만들게 하였고, 12년 4월에는 서거정에게 명하여 마의서를 편찬케 하였다.
그리고 동해 1462년에 우찬성 구치관(具致寬)과 병판 윤자운(尹子雲) 등을 불러 가축증식책인 육축자식등사(六畜孶息等事)를 논의한 끝에 서울에는 대호에 소 7마리, 말 5마리, 돼지 15마리, 중호에는 소 5마리, 말 4마리, 돼지 10마리, 소호에는 소 3마리, 말 2마리, 돼지 5마리씩을 기르고, 지방에서는 대호에 소 10마리, 말 8마리, 돼지 15마리, 중호에서는 소 7마리, 말 6마리, 돼지 10마리, 소호에는 소 4마리, 말 3마리, 돼지 5두씩을 기르되 이를 따르는 자는 잡부금 부과를 면제하는 복호(复戶)의 특전을 주지만 이행치 않는 자는 논죄하되, 사육두수는 기록하여 보고토록 하였다.
각 가정당 개인적으로 기르는 가축 외에도 국립 관영목장의 건립에 크게 힘썼는데 세조 2년에 진강(鎭江), 중장(中場), 길상(吉祥)의 세 목장을 연하여 설치한 후 하나로 합쳤고, 세조 3년에는 경기 강화(江革)의 장봉도 목장(長峯島牧場)을 증설하였다. 세조 7년에는 교태전에서 황수신(黃守身), 이극감(李克堪), 성임(成任), 김국광(金國光), 한계희(韓繼禧), 김종순(金從舜) 등과 함께 대규모 목장 설치에 관해 의논하였고 조선 팔도의 관찰사들에게 어찰을 보냈으며 "나라의 굳세고 약함이 말(馬)에 있다. 그런 까닭으로 국군(國君)의 부(富)를 물으면 말을 헤아려서 대답하였다. 예전 원나라 세조(世祖)가 강남(江南)을 목장(牧場)으로 만들고자 하였으니, 나도 강원도(江原道)와 황해도(黃海道)의 사람이 없는 땅에 사람이 사는 것을 철거하고 아울러 합해서 한 큰 목장을 만들고자 한다. 그러나 사람이 사는 곳을 말이 사는 곳으로 바꿀 수는 없다. 지금 또 여러 고을로 하여금 각각 한 산에 물과 풀이 모두 풍족한 곳을 점령하여 10필 내지 천 필을 기르게 하면, 어찌 일이 이루어지지 못할 것을 근심할 것인가? 경은 속히 아무 고을 아무 산을 살펴서 9월 그믐날을 한정하고 아뢰라." 라고 유시하였다.
세조 8년에는 녹양 목장(綠楊牧場)에 기르는 말이 40여필밖에 없다는 소식을 듣고 명을 내려 동반(東班) 6품 이상과 서반(西班) 4품 이상은 모두 3월 안으로 각기 피마(雌馬) 1필씩을 녹양 목장에 기부하도록 하였고, 세조 11년에는 강원도 고성군 영진곶이에 대형 목장을 건립하였다. 12년에는 절이도(折爾島)의 주위가 2백 70리(里)인데, 물과 풀이 모두 풍족하여 능히 말 8백여 필을 방목할 수 있다는 보고를 듣고 회령포(會寧浦), 금갑도(金甲島), 돌산포(突山浦), 남도포(南桃浦), 어란포(於蘭浦) 등에 목장을 건립하게 했고, 동해 11월에는 양주(楊州)에 목장(牧場)을 설치했다. 13년에는 과거 버려졌던 망올리(芒兀里)의 옛 목장터를 다시 재개발하고 크게 증설하였다.
이후 허목의 목장지도에 따르면 세조 대에 강원도 일대에 수십여개의 대형 목장을 설치하였으며, 임진왜란 전까지 159개의 국립목장이 존재하였다고 한다. 또한 기록에 따르면 이때부터 각 가정에서는 아들이 나면 송아지를 사다 길러 결혼비용을 마련하였다고 한다.
3. 고흥 절이도목장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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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기념물 제206호로 세조 시기에 계획되었던 대형 관찬목장 건립 사업 때 만들어진 목장 중 현재까지 남아있는 가장 대표적인 목장 중 하나이다.
세조 12년, 1466년에 축성하였으며 목장성, 목마성(牧馬城)이라고도 부르는데 목장의 말이 울 밖으로 달아나는 것을 막기 위해 쌓은 성을 말한다. 북쪽 유적을 제하고도 그 길이가 4,652m에 이르는 장성이며 너비는 하부 3.2m, 상부는 1.4m이다. 조선 시대에 만들어진 극히 드문 목장성으로 그 형태가 매우 특이하고 드문 경우라서 역사적인 가치가 큰 곳이다.
세조시기에 계획되었던 목장 증설 계획에 대해 연구할 수 있는 실존 유적지 중 하나이다.
3.1. 외부 링크
3.2. 전라남도 기념물 제206호
고흥군 절이도 목장성은 금산면 거금도의 어전리와 석정리 일대에 위치하는데, 절이도는 거금도의 조선시대 지명이다. 이 성은 적대봉(592.2m)과 용두봉(418.6m)의 중간 계곡을 형성하는 부분과 두 봉우리가 연결되는 능선의 움푹 들어간 부분에 위치하고 있으며, 성을 중간으로 나눈 남북방향으로 축성되어 있다. 성은 완만한 구릉이 형성되어 있는 부분의 서쪽 사면 끝자락에 위치하며, 남쪽으로는 해안선까지 이어진다.
절이도 목장성은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조선 세조 12년(1466) 전라도 점마별감 박식의 주청에 의하여 말을 기르기 위해서 절이도 가까이에 있는 선군(船軍)을 동원하여 축성하였음을 알 수 있다. 축성 당시 절이도 목장성에는 물과 풀이 모두 풍족하여 약 800여필의 말을 기를 수 있을 것으로 예측하였으며, 실제로 성종 1년(1470)에는 364필의 말을 방목하고 있는 등 절이도 목장은 조선 전기에 중요한 목장 가운데 하나였음을 알 수 있다.
이 성은 중간을 남북으로 가로질러 축조된 차단성 즉 장성(長城)이며, 돌을 쌓아 만든 성이다. 성벽의 길이는 섬 북쪽 유적이 확인되지 않은 부분을 제하고도 4,652m에 이른다. 너비는 하부 3.2m, 상부는 1.4m이다.
절이도 목장성은 조선시대 초기에 축성된 흔치 않은 목장성이며, 축성시기 등에 대해서 알 수 있는 등 역사적·학술적 가치가 크다.
절이도 목장성은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조선 세조 12년(1466) 전라도 점마별감 박식의 주청에 의하여 말을 기르기 위해서 절이도 가까이에 있는 선군(船軍)을 동원하여 축성하였음을 알 수 있다. 축성 당시 절이도 목장성에는 물과 풀이 모두 풍족하여 약 800여필의 말을 기를 수 있을 것으로 예측하였으며, 실제로 성종 1년(1470)에는 364필의 말을 방목하고 있는 등 절이도 목장은 조선 전기에 중요한 목장 가운데 하나였음을 알 수 있다.
이 성은 중간을 남북으로 가로질러 축조된 차단성 즉 장성(長城)이며, 돌을 쌓아 만든 성이다. 성벽의 길이는 섬 북쪽 유적이 확인되지 않은 부분을 제하고도 4,652m에 이른다. 너비는 하부 3.2m, 상부는 1.4m이다.
절이도 목장성은 조선시대 초기에 축성된 흔치 않은 목장성이며, 축성시기 등에 대해서 알 수 있는 등 역사적·학술적 가치가 크다.
[1] 琉球國所進水牛二頭留養熊川(류구국소진수우이두류양웅천), 至是遣司僕寺尹朴徐昌取來(지시견사복사윤박서창취래), 牛性畏暑(우성외서), 深伏水中(심복수중), 命養于昌德宮後苑(명양우창덕궁후원), 令司僕官員輪次看養(령사복관원륜차간양), 又命抄錄醫經及諸書養牛法(우명초록의경급제서양우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