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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lbgcolor=#c00d45><colcolor=#fff> 조선 삼도도순변사 증 영의정 평양부원군(平陽府院君) 충장공(忠壯公) 신립 申砬 | |
| <nopad> | |
| 출생 | 1546년 11월 16일[1] |
| 사망 | 1592년 6월 7일[2] (향년 45세) |
| 조선 충청도 충주 탄금대 남한강 | |
| 봉호 | 평양부원군(平陽府院君) |
| 시호 | 충장(忠壯) |
| 본관 | 평산 신씨 |
| 이름 | 입(砬) |
| 자 | 입지(立之) |
| 호 | 신임(申臨) |
| 부모 | 부친 - 신화국(申華國, 1517 ~ 1578)[3] 모친 - 윤회정(尹懷貞)의 딸 파평 윤씨 |
| 형제자매 | |
| 부인 | 정부인 이담명(李聃命)의 딸 전주 이씨 계부인 최필신(崔弼臣)의 딸 전주 최씨 |
| 자녀 | |
1. 개요
조선 중기의 무신.최전방에서 여진족 토벌로 이일과 함께 용맹을 떨친 당대 최고의 용장이자 맹장이었으나, 임진왜란 때 파죽지세로 한양으로 향하는 일본군에 대한 오판으로 충주 탄금대 전투에서 패배하고 자결했다.
2. 생애
명종 1년(1546) 10월 23일 성균관 생원을 지낸 아버지 신화국(申華國)[6]과 어머니 파평 윤씨 윤회정(尹懷貞)의 딸 사이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위로는 신잡과 신급(申礏) 등 형 2명, 아래로는 신할(申硈) 등 남동생 1명이 있었다. 그의 집안은 본래 문반 가문으로, 조부 신상(申鏛)은 연산군 9년(1503) 별시 문과에 3등 5위로 급제하고# 이조판서(정2품)에 올랐으며, 증조부 신말평(申末平)은 성종 11년(1480) 식년시 진사시에 3등 30위로 입격하고# 개성부 경력(開城府經歷: 종4품)에 올랐다. 고조부 신자준(申自準)도 음보로 충청도 관찰사(忠淸道觀察使: 종2품)에까지 올랐다.신립은 22살이 된 선조 즉위년(1567) 식년시 무과에 병과 14위로 급제한# 이래 여러 무관직을 거쳤다. 선조 16년(1583) 함경북도 온성 부사로 있을 때 북쪽 변경에 침입해온 여진족 니탕개를 격파하는 등 야인 토벌에서 큰 두각을 나타냈다.
적호(賊胡)가 훈융진(訓戎鎭)을 포위하고 충교(衝橋)를 만들어 사면으로 성을 공격하니, 첨사 신상절(申尙節)이 밤낮으로 항거하며 싸웠으나 화살이 떨어지고 힘이 다하여 성이 장차 함락될 지경이었다. 그때 온성 부사 신립이 유원 첨사(柔遠僉使) 이박(李璞)과 황자파(黃柘坡)에서 사잇길로 달려와 포위를 뚫고 들어가 한 개의 화살로 적의 추장을 쏘아 죽였다. 이에 신립의 얼굴을 알아보는 호인들이 서로 놀라며 말하기를 ‘온성(穩城)의 영공(令公)이다.’하면서 활을 휘두르며 물러갔다. 상절도 문을 열고 나와 공격하면서 신립과 합세하여 기세를 타고 적을 추격해서 70급을 베고, 곧바로 그들의 부락까지 쳐들어가 소굴에 불을 지르고 돌아왔다. 이때 경원(慶源)·종성(鍾城)·회령(會寧) 등 진(鎭)의 번호가 모두 배반하였으나 온성의 번호만은 배반하지 않았는데, 그것은 신립의 무용(武勇)에 승복했기 때문이었다. 신립은 평소에 철기(鐵騎) 5백여 명을 훈련시켜 사냥을 하며 전술을 익히게 하고 연안에서 치돌(馳突)하는 연습을 시켰는데 그 빠르기가 귀신같았다.
선조수정실록 선조 16년(1583) 2월 1일자 기사
선조수정실록 선조 16년(1583) 2월 1일자 기사
적호의 대추(大酋)인 율보리(栗甫里)와 니탕개(尼湯介)가 1만여 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길을 나눠 종성(鍾城)의 요새지에 들어왔다. 우후 장의현(張義賢), 판관 원희(元喜), 군관 권덕례(權德禮) 등이 기병과 보병 1백여 명을 거느리고 강 여울을 지키며 한참동안 대항해 싸웠으나, 중과부적인데다가 권덕례가 피살되자 나머지는 모두 도망해 돌아와 성으로 들어가니, 적호가 성을 몇 겹으로 포위하였다. 병사(兵使) 김우서(金禹瑞)가 군사를 거두어 성을 지켰는데, 해가 저물어 적이 물러가자 부사(府使) 유영립(柳永立)이 나가 공격하기를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아니하였다. 영립이 몰래 원희에게 영을 내려 기병장(騎兵將) 김사성(金嗣成)을 인솔하고 동문(東門)을 열고 나가게 하여 적의 머리 5급을 베어 왔는데, 김우서는 오히려 명령을 어겼다고 하여 원희 등에게 장형(杖刑)을 가하였다. 이튿날 적이 또 와서 포위하였는데 해가 질 무렵 온성도호부 부사(穩城府使) 신립(申砬)이 날랜 기병을 거느리고 와서 구원하자 적이 허둥지둥 도망갔는데, 강까지 추격하고 돌아왔다. 김우서가 사람을 시켜 성으로 맞아들여 서로 만나보자고 하였는데, 신립이 응하지 않고는 북 치고 피리 불면서 성을 지나쳐 가버리니, 김우서가 크게 부끄럽게 여겼다.
선조수정실록 선조 16년(1583) 5월 1일자 기사
위 기록들은 이일이 정리한 <제승방략>에서 수록된 전훈들을 <선조수정실록>에서 재수록한 것이다. 기록에서 알 수 있듯이 용맹과 무예만큼은 당대 최고였다. <선조수정실록>에서는 "포위된 상태에서 화살 1발로 적장을 사살해 적들이 물러가게 했다.", "혼자서 수십 명을 쳐죽였다.", "신립의 용맹이 무서워서 감히 적들에게 항복하지 못했다." 등 서술로 신립의 용맹을 칭찬하였다.선조수정실록 선조 16년(1583) 5월 1일자 기사
신립은 백마에 탄 적장을 일격에 쏘아죽여 적을 물러가게 한거나(경원진 전투) 아군을 포위한 여진족 기병 1만 명에게 돌격해 적장을 사살하고 퇴각하는 적 수십 명을 쏘아 죽이는(훈융진 전투) 무시무시한 무용을 떨쳤다. 신립은 기병의 달인이었는데 마치 조아킴 뮈라처럼 신립이 말을 타고 적진을 돌격하면 그대로 길이 생길 정도였다. 당시 신립이 이렇게 싸우고 이기자 포상을 위해서 한성에 입성했는데 선조가 어찌나 놀라고 감동했는지 자기가 먼저 신립을 마중나갔고, 심지어는 자기가 직접 곤룡포를 벗어서 신립에게 입혔을 정도로 신립의 공훈을 매우 높게 평가했다.
공을 인정받아 이듬해(1584) 3월 북도병사(北道兵使)에 임명되었다. 선조 20년(1587) 흥양에 왜구가 침입해 녹도 만호 이대원이 전사하는 피해가 발생하자, 우방어사가 되어 군사를 인솔해 토벌에 나섰으나 이미 왜구가 철수했으므로 돌아왔다. 이 시기 양가의 처녀를 첩으로 삼았다고 삼사(三司)가 탄핵하여 파직되었지만 여진족 토벌에서 워낙 용명을 쌓았던지라 같은 해 12월 함남 절도사에 다시 등용되었다. 선조 21년(1588) 적호부락(賊胡部落)을 공격해 포로 20명과 말 3필을 참획하는 공을 세웠으나 하극상을 일으킨 수졸을 독단적으로 참한 죄로 파직되면서 중추부동지사의 한직으로 전임되었다.[7] 이에 대해 조헌은 "잘못이 없다고 할 수는 없으나 몸사리지 않고 세운 공이 중국 한나라의 이광에 비할 만하니 형벌이 과하다." 하고 주장했다. 탄핵되기는 했지만 여진족 토벌에서 워낙 용명을 쌓았던지라 당대 조선 최고의 맹장으로 칭송받던 인물이었다.[8]
니탕개의 난 이래 전시 상황이던 조선은 다시 왜침에 대비하기 시작했다. 선조 24년(1591) 7월 비변사에서 국방을 논의하였는데, 비변사에서는 "왜적은 수전에는 능하지만 육지에서는 민활하지 못하다. 그러니 육지 방비에 주력하자." 하고 주장했다. 이때 신립은 한술 더 떠 "왜적들은 수전에 강하고 육전에 약하니 아예 수군을 폐해야 한다."라고 주장했으나, 전라좌도 수군절도사 이순신이 "바다로 침입하는 왜적을 저지하는데는 수전이 제일이므로 수군을 폐해서는 안 됩니다."라고 극렬 반대하여 무산되었다. [9]
비변사와 신립이 이런 주장을 한 배경에는 명종 10년(1555) 을묘왜변의 경험이 있었다. 을묘왜변에서 왜군은 바다에서는 맹선을 주력 전선으로 삼은 조선 수군을 농락했지만 이어진 지상전에서 조선군의 궁시에 전멸했다. 이 때의 경험으로 조선은 신형 전함인 판옥선을 개발했으나 흥양 왜변에서 판옥선은 만족스러운 전과를 내지 못했다. 이는 녹도만호 이대원에게 사사로운 원한을 품고 지원을 해주지 않은 전라좌수사 심암(沈巖)의 탓이 컸지만, 조선 조정이 수군의 전력을 신뢰하지 못하게 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원래 조선의 왜구 대응은 원래 해상에서의 요격과 기병을 동원한 토벌로 정리할 수 있었다. 진포에서 황산까지 이어진 고려 말 왜구 토벌을 보면 이런 점이 잘 드러나는데 황산대첩에서 승부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건 이성계가 거느린 가별초의 기병들이었다. 신립은 왜군이 특성상 기병을 동원할 수 없다는 것까지는 그런대로 잘 예측하고, 기병 전력을 신뢰하였기에 기병을 강화하자는 취지에서 이런 의견을 낸 듯하다.
그러나 문제는 임진왜란 시절의 왜군은 고려 말 왜구처럼 약탈이 목적인 게릴라군이 이니라 점령을 목표로 한 군대였다는 점이다. 센고쿠 시대를 거치며 전란으로 단련되었고 병법을 익힌 무사들이 지휘하는 일본군 정규군이 영구적인 조선 점령을 목적으로 침략해오는 전면전 상황에는 전혀 맞지 않는 대책이었다. 신립 본인의 자만심도 문제였다. <징비록>의 기록을 보면 류성룡이 왜군의 조총을 언급하며 걱정하자 신립이 "조총이라는게 어디 쏘는 대로 맞는답니까"하며 거들먹거려 류성룡이 혀를 차며 패전을 걱정했다는 기록도 나온다.
조총의 성능을 떠나서 화기가 가진 압도적인 위력과 화기의 집단운용이란 개념은 조선 초기부터 정립되어 조선에도 전혀 낯선 개념이 아니었다. 그러나 신립의 군사 커리어나 기록에 남은 그의 전투 방식을 보면 신립은 고전적인 기병 전술에만 매달렸을 뿐, 화기를 집단으로 운용하는 전술은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머지 않아 변고가 생기면 공이 마땅히 그 일을 맡아야 할 텐데 공의 생각으로는 오늘날 적의 형세로 보아 그 방비가 충분하오?"
내(류성룡) 물음에 신립은 간단하게 대답했다. "그건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내가 말했다. "그렇지 않소. 예전에는 왜적이 창, 칼만 믿고 있었지만, 지금은 조총과 같은 우수한 병기가 있으니 가볍게 생각할 일이 아니요."
신립은 황급히 "비록 조총이 있다고는 하나 그 조총이라는 게 쏠 때마다 사람을 맞힐 수 있겠습니까?"
내가 다시 말했다. "태평세월이 너무 길었소. 그래서 병사들은 겁이 많고 나약해졌으니... 매우 걱정스럽소."
징비록 중에서
내(류성룡) 물음에 신립은 간단하게 대답했다. "그건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내가 말했다. "그렇지 않소. 예전에는 왜적이 창, 칼만 믿고 있었지만, 지금은 조총과 같은 우수한 병기가 있으니 가볍게 생각할 일이 아니요."
신립은 황급히 "비록 조총이 있다고는 하나 그 조총이라는 게 쏠 때마다 사람을 맞힐 수 있겠습니까?"
내가 다시 말했다. "태평세월이 너무 길었소. 그래서 병사들은 겁이 많고 나약해졌으니... 매우 걱정스럽소."
징비록 중에서
신립은 조총의 존재는 알았으나 궁시를 훨씬 능가하는 조총의 위력과 이것을 집단 운용하는 적을 마주할 가능성에 대한 고려는 전혀 없었다. 이 기록 이외에도 신립의 오만함과 거친 성정에 대한 기록은 굉장히 많은데 신립이 난폭하고 아랫 사람을 함부로 다룬 것은 <징비록>, <상촌집>, <기재사초>, <난중잡록>, <계갑일록> 등 여러 사료에서 공통적으로 확인된다.
대장(大將) 신립(申砬)과 이일(李鎰)을 제도(諸道)에 보내어 병비(兵備)를 순시(巡視)하도록 하였다. 이일은 양호(兩湖) 로 가고, 신립은 경기(京畿)와 해서(海西)로 갔다가 1달 뒤에 돌아왔다. 그러나 순시하며 점검한 것은 궁시(弓矢)와 창도(鎗刀)에 불과할 뿐이었으며 군읍(郡邑)에서도 모두 형식적으로 법을 피하기만 하였다. 신립은 본래 잔포(殘暴)하다고 일컬어졌으므로 수령들이 두려워하여 주민들을 동원하여 길을 닦고 공장(供帳)하는 비용도 대신의 행차와 같이하였다. 당시 조야(朝野)에서는 모두 신립의 용력과 무예를 믿을 만하다고 하였고, 신립 자신도 왜노(倭奴)들을 가볍게 여겨 근심할 것이 못 된다고 생각했는데, 조정에서는 그것을 믿었다.
선조수정실록 임진년(1592) 2월 1일 기사#
선조수정실록 임진년(1592) 2월 1일 기사#
선조 25년(1592)에 드디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자원해 나섰으며 삼도도순변사로 충청북도 충주로 출진했다. 이때 선조로부터 조선 최고의 명검이자 임금의 권한을 상징하는 상방검을 하사받았다.
혹 말하기를 “적의 세력이 지극히 성대하니 그 예봉에 직접 맞서기는 어렵다. 조령에 나아가 협곡 안에 군사를 매복하고 적이 골짜기 입구로 들어오기를 기다렸다가 우리가 양 쪽 언덕에 의거하여 높은 곳에서 활을 쏘면 승리를 거둘 수 있다.” 하였으나, 신립은 말하기를 “그들은 보병이고 우리는 기병이니 넓은 들판으로 끌어들여 철기(鐵騎)로 짓밟아버리면 성공하지 못할 리가 없다.” 하였다.
신흠, 상촌집, 제장사난초함패지
신립은 조령을 보고는 '지세가 좋지 않다.'는 이유를 들어 왜병을 넓은 들판에 끌어내 기병으로 무찌르려 했다. 조령은 병사 하나로 천 명을 무찌를 수 있는 천혜의 요새로 함정을 파놓으면 왜병들을 전부 묻어 버릴 수 있는 곳이었다. 여기를 버린 것은 실로 큰 실책이었다. 애써 탄금대에서 진을 친 조선군이 왜군에게 효과적인 타격을 가하거나 치열한 공방전이라도 전개해서 향후 고니시 유키나가군의 진격에 지연을 줄 정도 타격을 입힌 것도 아니며, 핵심전력인 경군의 정예병 수천 명을 날려버렸기에 전략적으로도 지대한 악영향만 주었다. 반면 추풍령 방면의 조선군은 소수 병력으로 거창에서부터 구로다 나가마사의 선봉 부대를 몇 번이나 저지하였고 전술적 퇴각을 하면서 조령의 신립보다도 왜군을 오래 지연시키는 전략적인 성과도 거뒀음을 생각하면 아쉬운 일이다.신흠, 상촌집, 제장사난초함패지
신립이 조령을 택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고 배수진과 논은 전투 전개 과정을 모르는 사람들이 단편적으로 전해듣고 하는 비판이라는 반론도 있다. 신립이 자만하고 대군을 다루어본 경험이 없어서 논에서 기병을 이용하고 배수진으로 정면 대결을 시도한 후 죽었다는 것이 널리 알려진 이야기인데, 신립이 조선의 구원 투수로서 선조조차 인정한 시정잡배에 가까운 잡병들을 끌고 여러 전략을 시도하였으나 여러 복합적인 이유로 실패로 돌아갔다는 것이 반론의 논지이다. 옹호론자들은 조령을 택하지 않은 이유에 대해서는 샛길이나 우회로가 많은 산의 특성상 요새화나 물자, 지리 전문가도 없는 상황에 유대감이나 훈련도가 없는 병사들을 길목마다 뿌려놓고 싸우기란 불가능하다고 판단했을 것이라는 견해 등을 든다. 충주 탄금대 전투 문서 참고. 그렇지만 조령을 지키던 조방장 변기가 신립이 조령을 포기하고 탄금대로 물러나면서 따라가버렸던 사실은 반론을 제기한 사람들이 알아야할 사실이다.
| | |
| 회전이 벌어진 달천 평야의 모습. | 신립이 투신 자살한 구초대의 모습. |
패색이 완연해지자 홀로 기를 휘둘러 조선군을 지휘하면서 탄금대에 올라가 활을 당겨 일본군을 쏘아죽였는데 활을 하도 쏴대서 깍지를 낀 손에 열이 나자 남한강에 뛰어들어 식히고 다시 올라가 쏘고 하는 식으로 수십 명 가까이 되는 일본군을 죽인 뒤 화살이 다 떨어지자 남한강에 뛰어들어 자살했다. 이 때 손을 식히러 강에 몸을 던지고 나오는 것을 총 9번 했다 하여 그 곳을 구초대(九超臺)라 불렀다고 한다.[10][11] 이후 어느 어부가 남한강에서 잡은 큰 잉어의 배를 가르다 옥관자를 발견했는데, 달천강에서 죽은 사람 중 망건에 옥관자를 달 정도로 지체가 높았던 양반은 신립밖에 없었기 때문에 신립의 유물로 밝혀졌고, 신립의 자손은 찾지 못한 시신 대신 옥관자를 묻었다고 한다.
반면 탄금대 전투 후 살아남은 병사들이 물에서 신립을 건져내자 신립의 두 눈은 부릅뜬 상태에다가 두 주먹을 꽉 쥐고 호령할 듯한 기세를 하고 있었다는 전설도 전한다. 그만큼 나라를 지키겠다는 충성심이 죽어서도 나타난 것이다. 나중에 신립을 장사를 지내게 되자 경기도 광주시 곤지암읍 신대리에 묻혔는데, 이곳에 묘가 생기자 말이 못 움직여서 말에서 내려 걸어서 가야만 했다. 언젠가 한 지나가던 선비가 이곳을 지나다 말이 못 움직이자 선비는 "아무리 장군의 원통함이 크다 할지라도 무고한 행인들을 불편하게 함은 온당치 못하다." 하고 호통을 치자 뇌성벽력과 함께 바위 위에 벼락이 내리쳐 바위 윗부분이 없어지고 그 옆에 큰 연못이 생겼다고 한다. 그 후로는 괴이한 일이 일어나지 않았고 이 바위가 훗날 곤지암으로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3. 가족
큰형인 신잡(申磼)은 문신으로 선조의 몽진을 호종해 호성공신 2등에 책록되었으며 광해군때까지 살았다. 둘째형인 신급(申礏) 역시 문신으로 동인인 홍혼, 김응남, 우성전 등이 이이, 성혼, 박순)을 공격하자 이들을 탄핵하는 상소를 올렸다. 이후 이천으로 낙향해 모친을 모시며 은거하다가 임진왜란 때 일본군의 공격을 받자 모친을 업고 절벽에서 뛰어내려 자결했다. 동생인 신할(申硈)은 도원수 김명원을 따라 임진강 전투에 참전해 전사하였다.선조의 서자들 중 하나인 신성군의 장인으로, 선조와는 사돈지간이 된다. 게다가 임란 전까지만 해도 죽은 공빈 김씨의 아들인 광해군과 3살 차이밖에 안 나고, 어머니 인빈 김씨 역시 총애를 받았던지라 신성군은 그야말로 차기 세자로 점쳐지고 있었다. 차기 국구였다는 이야기다.[12]
누나 신지향은 구사맹(具思孟)에게 시집갔는데, 낳은 딸이 선조와 인빈 김씨의 아들 정원군에게 시집가 인조를 낳았다. 훗날 인조는 인조반정을 일으켜 즉위했고, 자신의 친부모를 '원종'과 인헌왕후로 추숭했다. 즉 신립은 인헌왕후 구씨의 외삼촌이 된다. [13]
행주대첩을 승리로 이끈 권율의 사위이자 오성 이항복과는 동서지간이라는 말이 있으나 이는 야사의 잘못된 기록이다. 이항복 항목 참조.
신립의 아들이 바로 인조반정의 공신이기도 한 신경진이다. 재미있게도 탄금대에서 같이 죽은 부장 김여물의 아들이 바로 인조반정의 주모자인 김류다. 이 두 집안은 대를 이어 생사를 같이 한 셈으로 탄금대에서는 신립이 대장, 김여물이 부장(문관 출신 종사관)이었지만, 인조반정 때는 김류가 주모자, 신경진은 행동대장 역이었다. 이 아들 덕에 신립도 영의정 평양부원군으로 추증되었다. # 그밖에도 신경유, 신경인이 있고 딸 하나는 광해군 때 권신 이이첨의 장남 이대엽의 아내였다.[14] 3형제는 아버지가 전사한 국가 유공자라 혜택을 입고 무과 급제하고 반정에도 참여해 출세가도를 달렸다. 신경진은 무인임에도 영의정까지 올랐다. 그러나 부전자전이라고 신경진과 신경유는 아버지처럼 탐욕스럽고 포악했다고 기록되었으나, 막내 신경인은 두 형과 달리 실무직을 지내면서 묵묵히 일하고 청렴해 칭송을 받았다. 여담으로 제3대 대통령 선거에서 급서한 해공 신익희는 신경인 쪽으로 남계 후손이다.
또한 탄금대에서 전사할 때, 외조카도 참전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외조카가 전황이 불리한 것을 알고 목숨을 건지기 위해 도주하려고 하자, 신립은 외조카의 머리칼을 붙잡고 "네가 어찌 살려고 하느냐" 하며 꾸짖고 함께 빠져 죽었다고 한다. 선조 수정 실록 권26 선조 25년 4월 14일 계묘 16번째 기사
4. 평가
여진족들을 상대로 활약하며 수많은 전공을 쌓았고, 기병을 다루는 능력이 대단했으며 조선에서 최고의 용맹과 무예를 보여준 기병대장이자 용장이었으나, 하필 자신의 능력과 전혀 맞지 않는 총사령관 보직을 떠맡은 탓에 크게 실패했다.
신립은 전형적인 프로이센 기병대장 같은 유형이었다. 기병은 기본적으로 정예병에 해당하는 병력으로, 정예부대 자체가 그렇지만 (전근대적인 훈련법인) 까라면 까 식으로 부하들을 가혹하게 몰아붙여도 어느 정도 용인되는 곳이다.
하지만 보병, 기병을 통솔하는 총사령관으로서는 얘기가 달라지는데, 탄금대 전투 당시 병력의 절대다수를 차지했던 한량이나 하삼도 농민들은 이런 혹독한 '기강 잡기'를 감내하기 힘들어했던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임란 당시 기록들을 보면 신립의 포악한 성정에 대한 기록이 많이 남아 있다.
신립 또한 이런 (한량과 농민 위주로 구성된) 자신의 징집병들을 별로 신뢰하진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신립은 오직 자신의 100인 철기대만을 신뢰했다. 신립이 부장들과의 논의에서 '기병은 평야에서 싸워야 한다'며 오직 기병에만 기대를 걸고 있었던 것은 널리 알려져 있다.[16] 또한 군관이 일본군이 이미 조령을 건너고 있다고 보고하자, (확인이야 했지만) 그 군관이 왜군의 첩자일 거라는 섣부른 판단만으로 문답무용 베어버리기도 했다.
즉 장수와 부하들끼리 서로 불신하고 있었다는 얘기인데, 전장에서 이런 행동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특히 당시 신립군이 상대해야 했던 고니시군, 가토군, 구로다군은 30년 가까이 동고동락한 영주+사병들이었다. 지휘체계나 전술기동 등 조직력 면에서 어느 쪽이 우위였는지는 말할 필요조차 없다.
물론 이순신도 군법을 엄중하게 다스리는 무서운 상관으로 유명했지만, 훈련이나 전장에서만 엄격했을 뿐 훈련이나 전투가 끝난 뒤엔 부하들과 술로 회포를 풀거나 씨름 대회를 여는 등 풀어줘야 될 땐 또 풀어주는 모습 또한 많이 보여줬다. 기병대장이면 시종일관 엄격해도 되지만 총사령관 직책에선 (징집병들을 배려해서라도) 덕장의 모습 또한 보여줄 필요가 있었는데, 신립은 이런 면모가 참 부족했다.
전술적인 면에서도 문제가 있었다. 이미 직전에 왜군을 상대해 본 이일이나 병법에 능한 김여물 등의 조언을 모두 묵살하고 오직 자신의 계책만을 고집하다 참패했다. 물론 탄금대 전투 문서에서도 언급하듯 신립도 나름대로의 생각은 있었던 것으로 보이지만, (승산없는 전투였다곤 해도) 결과적으로 진 전투이니만큼 부장들의 의견을 무시한 신립 본인이 고스란히 책임을 질 수밖에 없다.
4.1. 옹호
다만 일반적인 통념과는 달리 신립이 조령을 지켰어도 신립군의 몰살과 조정의 몽진은 피할 수 없었을 거란 게 통설이다. 만약 1군(고니시군)이 조령에서 발이 묶였다면 2군(가토군)도 방향을 돌려[17] 양각으로 포위해 말려 죽이면 (보급도 사실상 불가능하던) 신립군은 그냥 끝장이고, 나머지 3군(구로다군)이 한양으로 북상해 버리면 그만이다.현재 학계에선 신립이 사실상 조령에서 하산하는 게 강제되었을 것이라 보고 있다. 다만 그 이유를 두고 보급 문제였는지, 탈영병 통제 문제였는지, 고니시군의 위치를 모르는 상태에서 진 건지, (1군·2군·3군의 위치를 파악한 상태에서) 북상 중인 세 군대를 모두 잡기 위해서였는지가 논쟁의 대상이 될 뿐이다.
또한 신립 본인은 자신만만해하며 출병한 것으로 보이지만, (지금 와서 보면) 애초에 신립이 맡은 임무 자체가 누가 와도 수행 불가능한 임무였다는 게 통설이다. 일반적으로 신립의 기병 숫자만 보고 정예병이었다고 오해하지만 기실 그 중 제대로 된 상비군은 100명 남짓이었고, 실제 기병 중 절대다수는 그냥 말 탈 줄 아는 한량들이었다. 일반적으로 이런 병력을 '정예병'이라 부르진 않는다.[18][19]
또한 신립의 병력은 8000, 아무리 많이 잡아도 16,000명인데 고니시군, 가토군, 구로다군 전부 합쳐 최소 4만이 넘는 병력을 막아야 했고 그나마 각개격파해보려 해도 구로다군을 제외하면 모두 수적 열세이다. 방어전 위주로 시간이라도 끌면 좀 낫지만, 신립의 임무는 애초에 시간 지연이 아닌 섬멸이었다. 활과 조총의 격차, 그리고 두 병력의 숙련도 차이 등의 요소는 말할 것도 없다.
이 패배의 근본적인 원인은 사실 조선의 상비군 숫자가 너무 적었다는 것인데, 제승방략 문서에서도 언급하듯 이런 징병 시스템이 여진족을 상대할 땐 최선이긴 했다. 그러나 모두가 알다시피 부족 단위의 여진족과 30년 가까이 싸움만 한 일본군의 전투력은 하늘과 땅 차이였다.
역사학자 임용한은 신립이 가장 잘못한 걸 꼽으라면 임진왜란 이전까지 정예병을 키우지 않은 것이라 평가했는데, 실제로 이순신의 활약도 전라좌수사 시절 밑바닥부터 다지며 조선 수군을 강건하게 키워냈기에 가능했던 것이고, 권율이 성공한 것도 근접 사격, 목책 설치 같은 기초 중의 쌩기초적인 훈련으로 징집병들의 전투력을 상비군 수준으로 끌어올렸기에 가능한 것이었지만 신립은 왜군이 쳐들어 올 것임을 알고 있었으면서도 기병을 육성하긴커녕 허송세월만 하고 있었다.[20]
조선 조정이 8000 정예병만 믿고 있었다는 일반적인 인식과는 달리, 충주가 묫자리나 다름없다는 건 당대 조정 대신들도 전부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21] 누군가는 출병해야 하는 상황에서 전부 눈치만 보면서 도망칠 궁리만 하고 있었기 때문. 그리고 (일반적인 인식과는 달리) 신립도 승산이 없는 전투임은 알고 있었다.
당시 외방의 군사는 모이지 않고 도성에는 전후하여 대부분의 장정들이 거의 징발되었으므로 도원수(김명원) 역시 군사가 없었다. 상주에서 (이일이) 패배한 보고가 이르고 신립(申砬) 또한 비밀히 아뢰기를 ‘적의 기세가 매우 드세니 도성으로 후퇴하여 지키도록 하소서.’ 하였다.
ㅡ 《조선왕조실록》 선조 수정 실록 25년 4월 14일(계묘) 10번째 기사. 기사
신립이 겉으로는 시종일관 오만하게 왜군을 무시했던 것과는 달리, 실제로는 일본군을 그리 만만하게 보지 않았다는 증거라고 하겠다.ㅡ 《조선왕조실록》 선조 수정 실록 25년 4월 14일(계묘) 10번째 기사. 기사
신립이 충주로 내려간 건 무슨 관직의 탐욕 같은 것도[22] 적을 만만하게 봐서도 아닌, 순수하게 군인의 책임감으로서 총대를 멘 것이고, 패전의 책임을 깨끗하게 자신의 목숨으로 갚은 걸 보면 적어도 졸장이니 잡장이니 소리를 들으며 폄하될 인물은 아니다. 그저 총사령관 직책에 맞지 않았을 뿐이다.
그리고 신립이 총사령관으로서 무능할진 몰라도 최소한 비겁하게 도망치진 않았고 신립을 비판하는 기록을 남긴 사람들은 스스로 출병하지 않고 도망칠 궁리만 하던 조정 대신들이다. 검증되지 않은 인사가 총사령관 자리까지 오른 이유는 간단하다. 그 누구도 책임지려고도 죽을 각오를 하지도 않았으니까. '누가 맡았으면 더 나았다' 이런 논쟁이 의미가 없다. 적어도 그 시점에서 눈치만 보고 떠넘기지 않던 사람이 신립밖에 없는데 이걸 갖고 무슨 조선의 인사체계를 논한단 말인가.[23]
5. 여담
- 신립과 관련해서 전해내려오는 전설이 있는데, 이 전설에 따르면 신립은 무과를 보기 위해 한양으로 상경하는 중에 어느 산 속에서 길을 잃었다. 산길을 헤매다가 큰 기와집을 발견하고 들어갔는데 아름다운 처녀가 혼자 우는 모습을 보고는 사연을 물어보니 이러하였다. 본래 그 집은 처녀의 가족들과 하인들 수십 명이 사는 집이었으나 어느 날 머슴이[24] 집에 살던 모든 식솔들을 하나 둘씩 죽여 댔고 처녀만 마지막으로 남았다. 머슴은 그날 밤 처녀에게 같이 살지 물어보려고 올 것이기에[25] 처녀는 슬퍼서 울고 있었던 것이다. 신립은 분노하여 처녀를 안심시키고 머슴을 물리쳐주기로 한다. 그는 병풍 뒤에 숨어 있다가 머슴이 나타나자 바로 칼로 목을 쳐 처녀를 구하고 처녀의 원수를 갚아주었다.
날이 밝자 죽은 머슴을 보니 아주 큰 지네였다. 처녀가 감사해 하면서 자신을 아내로 맞아달라고 청하자 신립은 이미 아내가 있기에 나중에 데리러 오겠다하고 떠났다. 처녀는 자기 집 대문위에 올라 신립을 크게 부른 뒤 신립이 보는 앞에서 자살하였다.
그 후 시간이 흘러 장군이 된 신립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왜군을 격퇴하기 위해 부대를 이끌고 이동하는 중이었다. 꿈 속에서 죽은 처녀가 나타나 (혹은 처녀의 유품인 방울에서) 탄금대에 진을 치면 크게 이길 것이라고 알려주었다. 신립은 그 말에 따라 탄금대에 진을 치고 적을 맞이하였으나 크게 패하였고, 자신에게 한을 품고 죽은 여인의 말을 믿었음을 후회하며 자살하였다고 한다. 비슷한 전설이 남송의 장수 악비에게도 있으므로 당대 전설계에서 널리 알려지던 단골 스토리로 보면 될 듯하다.
6. 대중매체
6.1. 소설
- 조선 중순, 임진왜란 끝나고 나온 소설인 '달천몽유록'(達川夢遊錄)에선 귀신들이 신립을 멍청이 졸장이라고 적나라하게 비난했다. 지은이 윤계선(1577~1604)은 연도를 봐도 알겠지만 임진왜란을 호되게 겪었다.
- 소설에서 중립적인 시각으로 나오는 작품은 김성한의 소설 <7년전쟁>과 이번영의 임진왜란 소설 <징비록>. 조령을 버린 이유에 대해 탄금대 전투가 벌어지기 전날 밤에 평지에 진을 쳤는데 이날 밤 다수의 병사들이 사라지자 "평지에서도 이 정도인데 조령에 진을 쳤다면 더욱 많은 병사들이 도망갔을 것"이라며 결국은 평지에서 적을 맞기로 결정했다는 묘사가 나온다.
- 이우혁의 소설 <왜란종결자>에서는 어마어마한 상향을 받고 출연한다. 탄금대에서 전사하는건 역사와 같지만 그곳을 전장으로 택한 것은 마수들의 농간이었다. 원래 임진왜란을 조선의 승리로 이끌 사람인 왜란 종결자는 신립이었으나 마수들의 농간으로 전장을 탄금대로 정했던 것이다. 결국 신립이 전사하자 대타로 임진왜란 종결자가 된 사람이 바로 이순신. 설정상 신립은 이순신급 활약을 했어야 했다.
- 고전 전쟁 소설 <파이어 데이>에서는 금강 지역에 대규모 기갑 부대가 도강할 수 있는 다리로 신립대교가 등장한다. 일본 육상 자위대의 북상을 막기 위해[26] 다른 다리는 전부 파괴했지만 신립대교는 자위대의 진격 방향에서 떨어진데다 나중에 반격용으로 쓰려고 파괴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신립대교를 지키는 한국군 부대가 2선급 부대임을 간파한 자위대가 기습해 넘어가고 서울까지 위험할 정도로 전황이 심각해진다. 다행히 한국 해군의 특수부대가 폭파하는데 성공해 보급을 차단시키고 한국군의 역습으로 자위대가 패하게 된다.
6.2. 게임
- 게임 <천하제일상 거상>에서는 조선의 장수로 등장한다. 기마궁수(천하제일상 거상) 항목 참고.
- 엠파이어즈 근대사회의 여명에서는 황윤길과 김성일 대신 일본에 다녀왔으며 서인 출신으로 나온다. 역사와 달리 류성룡을 탈출시키기 위해 얼마 안되는 병력[27] 조령에서 필사항전하다가 죽는다.
6.3. 드라마
- 1983년 MBC 드라마 <조선왕조 오백년>에서는 연극 배우 김영인[28]이 연기했다. 실록의 기록에 충실한지 말을 듣지 않는다고 휘하 장졸들을 손수 찔러 죽이는 역으로 나온다. 문경새재에서 장졸들이 도망가는 바람에 배수진을 친 것으로 나오고 제작비의 문제인지 탄금대 전투는 나레이션과 함께 스스로 배를 찔러 사망하는 장면만으로 처리되었다.
- 2004년 KBS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에서는 배우 차기환이 연기했다. 조선의 장수들 중에서도 취급이 상당히 좋지 않은데 원균은 초기 설정이 원균 맹장론이라 미화돼서 그렇다 쳐도 북병사 시절 잠깐이나마 이순신을 인정해줬던 이일보다도 못한 취급이다. 등장 인물들은 선조를 필두로 해서 명장이라고 열심히 띄워주지만 연출은 거진 조선 제일가는 졸장. 그의 대표 발언인 "조총이 어디 쏘는대로 맞는답니까" 드립도 치고 임진왜란 직전에는 원균과 함께 왜국 정벌론을 주장하는 정신나간 행보를 보인다. 탄금대 전투에서도 조령을 시원하게 버리면서 소 요시토시의 입을 빌려 "바보 멍청이"라고 까였다. 소 요시토시가 조령이 텅 비었다는 보고를 듣고 "그런 천혜의 요새를 버릴 바보 멍청이가 어디있다는 말이냐"라고 말한 후 바로 장면이 바뀌어 신립이 "조령은 버린다"라고 선언한다. 이에 휘하 군관이 부하들을 이끌고 사지로 들어갈 수는 없다며 조령에서 싸울 것을 강권하자 펄펄 뛰며 명령 불복종으로 곤장까지 때리는데 그날 밤에 곤장 맞은 부하를 불러내 타이르며 병사들의 낮은 훈련도 때문에 조령을 선택하기는 곤란했다는 변명을 한다. 배수진으로 유명한 한신과 똑같은 논리지만 한신은 (이 드라마 속) 신립처럼[29] 대책 없이 어중이 떠중이들을 절벽을 등지게 하고 전장으로 떠밀지도 않았다. 한신이 배수진을 쓴 것은 딱 필요한 순간에 필요한 역할을 해야하는 부대의 효율을 최대한으로 끌어올리기 위해 사용한 것이지, (드라마 속) 신립처럼 그냥 목적이 배수진인 노빠꾸 전술을 구사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본격적인 전투에서는 잠깐 선전하더니 기병대가 돌격하다가 늪지대에 빠지고 조총 연사에 기병이 대부분 전사하면서 시원하게 말아먹는다. 그래도 마지막은 이도류를 휘두르며 홀로 처절하게 항전하다 자결하는 것으로 최후만큼은 좋게 표현해줬다.[30] 장군 의상이 한계가 있어서 우연히 그랬겠지만 작중 신립의 갑옷의 전체적인 색깔이 이 문서 상단의 신립 그림에 있는 그의 갑옷과 매우 비슷하다.[31]
- 2015년 KBS 드라마 <징비록>에서는 배우 김형일[32]이 연기했다. 대표적인 장면이 임진왜란 전 대마도로부터 바쳐진 조총의 위력을 조선 조정에서 시험하던 자리에서 조총 재발사를 준비하는 동안 화살 3대를 쏘아 보임으로써 "조총은 연사력이 떨어지므로 순간이 급한 전장에서는 활의 상대가 되지 못한다"고 왕을 안심시킨다. 곁에 있던 류성룡이 "허나 그 살상력이 활에 비할 바가 아니므로 가볍게 보아서는 안 된다"고 반론을 제기하자 "가볍게 보아서는 안 되겠지만 지레 겁먹어서도 안 된다"며 재반박. 실제 <징비록>의 "조총이 어디 쏘는 대로 맞는답니까" 기록을 나름대로 현실성있게 해석한 대목인 듯. 캡처 포스팅 그러나 바로 다음 장면에서 가토 기요마사의 지휘하에 3단 연사를 훈련 중인 아시가루들이 나오는데 1열이 발포하는 동안 2열과 3열은 화약넣고 총알재는 재사격 준비 동작을 하게 함으로써 연사력을 크게 높인 것이다. 이후로는 죽기 전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의 정당성만 자상하게 설명하는 설명충으로 전락한다. 대대로 무능하게만 나오던 신립을 조령무용설, 훈련부족설 등 현대 역사학계의 가설을 적용하며 나름 신립의 행동엔 그럴 듯하게 합리적인 인물로 재해석했다.
[1] 음력 10월 23일[2] 음력 4월 28일[3] 외증조부가 계양군이다. 즉 신화국 모친의 할아버지가 세종의 8남인 계양군이니, 신화국은 세종의 외현손이 된다.[4] 인헌왕후의 어머니.[5] 선조의 4남 신성군의 정부인.[6] 1546년(명종 1) 증광시 생원시에 2등 13위로 입격하였다.#[7] 졸개가 부장을 상대로 하극상을 일으켜 신립이 처형한 것이다. 하지만 신립이 조정에 보고를 올리자마자 그날로 사간원에서 '선참후계(전시가 아닌데 보고도 하지 않고 먼저 참형)하였다.'고 3차례씩이나 태클을 거는 바람에 파직되었다. 다만 사헌부가 신립을 잡아 국문하겠다고 요청하자 선조는 "수졸을 벤 일이 비록 지나치기는 하나 사실 수졸의 죄는 당연한 것이다." 하며 윤허하지 않았다.[8] 니탕개의 난은 그 시점에서 조선 건국 이래 최대급 외침으로 조선 전국이 준전시상태에 들어갔다. 그런 전란에서 으뜸가는 전공을 세웠으니 대접이 남다를 수 밖에 없었다. 게다가 신립의 전투 방식은 그야말로 맹장형으로 일신의 무예를 활용한 개인 전술로 적진에 과감히 돌격하는 것이라 눈에 확 들어왔다.[9] 사실, 당시 일본은 100여 년간의 전국시대 내전으로 육지전 경험치가 역대급으로 누적된 상황이었고, 수군은 결코 주력이 아니었다. 섬나라니까 해전에 능할 것이라는 외부의 선입견만으로 실제와는 완전히 반대되는 오판을 한 셈.[10] #[11] 다만 이때 식히려 했다는 것이 깍지손이 아니고 수십 수천 번을 맞부딪히느라 뜨겁게 달궈진 칼이었다는 얘기도 있고, 탄금대의 지형상 애초에 불가능하다는 의견도 있다. ‘열두대’에 얽힌 세 가지 이야기 중 진짜 유래는?, 통플러스, 2016년 7월 8일.[12] 정철이 이산해의 책략에 걸려들었던 이유도 선조가 신성군을 더 아꼈기 때문도 없지 않다. 물론 임란이 터지고 광해군이 급히 세자로 정해지고, 신성군이 난중 요절하면서 신립의 집안이 외척이 될 일은 물 건너간다. 나중에 인조반정 이후 한 다리 건너서 간접적으로 외척이 되기는 하지만.[13] 그리고 구사맹의 막내아들이 신립의 아들 신경진과 인조반정을 주도했으며 역시 조선 후기 신립의 후손 평산 신씨와 무반 요직을 독차지 하는데 일조했던 무신 구굉이다.[14] 반정 직전 신경진 형제가 인조에게 매부 이대엽은 살려달라는 밀조를 했으나, 형 신경진이 조사를 받느라 정작 반정을 설계해놓고 참여못해 입지가 좁아졌다. 게다가 이대엽도 폐모론에 동조했으니 죽이라는 탄핵을 받아 인조가 입을 싹 닦고 처형하라는 명을 내렸다. 처형 소식을 듣고 이대엽은 옥중에서 자결한다.[15] 패배한 군대의 장수는 자신의 용맹을 말하지 못한다는 뜻이다.[16] 다만 이 판단은 당대 표준에 가깝다. 농민 징집병이란 실상 군량만 소모하는 허수 수준이기 때문이다. 1555년의 가정왜구 사건 당시 천 단위의 남경 수비군은 단 53명의 왜구를 상대로 전투를 시도할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53명에게 포위당한 천 명의 수비군은 성벽 안에서 벌벌 떨며 도시 바깥에서 3개월에 걸쳐 수천 명의 사상자가 발생하는 것을 방관했고, 결국 지원 요청을 받은 정예병이 파견을 와서 왜구를 토벌한다. 왜구에게 탈탈 털리던 남부를 구원한 명나라의 명장 척계광의 진법 또한 징집군과 왜구의 비율을 12:1로 설정하였고, 사실 명나라가 왜구 문제를 해결한 방법이라는 것도 징집병의 전투력 증가 따위보다는 그냥 장군들이 각자 정예사병을 육성하여 이 사병으로 왜구를 상대하는게 핵심이다. 훗날의 이여송 또한 벽제관 전투에서 자신의 사병들이 큰 피해를 입자 일반병들을 전혀 믿지 못해 계속 전투를 거부하다가 해임당했으며, 용인 전투의 5만 조선군은 1500명의 일본군에게 참패하며 와해되었다. 물론 당연히 왜구고 조선 백성이고 같은 인간인 만큼 아무리 징집병이여도 일단 전투에 익숙해지면 이런 어이없는 교환비가 나오지는 않고, 일본군 역시 이런 '익숙해진' 일반병인 아시가루가 주축이다. 하지만 누차 언급되었듯 신립에게는 징집병을 익숙하게 만들 시간이 없었다.[17] 루이스 프로이스의 기록에서도 언급하듯 가토군은 실시간으로 고니시군의 위치를 파악하고 있었다.[18] 징비록에도 언급되지만 신립은 의병을 모집했지만 아무도 모이지 않아 류성룡의 의병을 빌려갔다는 기록이 나온다. 물론 류성룡의 의병들도 훈련된 병력이라 보긴 힘들다.[19] 기마궁수 문서에도 언급되지만, '말 탈 줄 알면서 활 쏠 줄 아는 것'이랑 '말 탄 채 활 쏠 줄 아는 것'은 차원이 다르다. 그리고 징집된 한량들이 후자였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훈련도 안 받았으니 진법에 대한 이해도나 사기 같은 건 말할 것도 없다.[20] 어떻게 보면 자신의 100인 철기대를 과신하고 있었다는 증거라고도 볼 수 있겠다.[21] 선조 또한 전후에 신립이 극히 소수로 다수의 적에게 무모하게 싸웠다고 탄식했을 정도다.[22] 병조판서도 역임한 적이 있는데다 세자 후보의 장인인 조선의 최고 권신이 뭐가 아쉽다고 전장 총사령관을 맡겠는가.[23] 현대 기준으로 본인이 원하지 않아도 그냥 보직에 앉혀 버리면 땡이지만, 적어도 중세 동북아에서 이런 식의 인사배치는 그냥 반란 일으켜 달란 말과 똑같다. 적어도 신립은 충성심이라도 확실히 검증된 인물이다.[24] 머슴이 아니라 요괴인 판본도 있다.[25] 죽이러 온다는 판본도 있다.[26] 1990년대 기준으로도 말도 안 되는 고증이기는 한데 극중에서는 질적은 넘어가고 양적으로 어떻게 키워놨다는 설정. 무인 전차만 존재하는 대체 역사나 그려놓은 꼴로 미사일 러시는 왜 넣었는지 의문인 졸작이다. 어설픈 반전 사상만 들어 있는 덕에 일부에서는 명작이라 부르지만 말이다.[27] 매국노가 된 원균이 병력을 해산시켰다.[28] 1989년 KBS 드라마 <무풍지대>에서는 김두한 역, 2001년 SBS 드라마 <여인천하>에서는 박원종 역. 영화에서는 항상 깡패나 건달 등의 악역을 맡았다. 내가 고자라니의 김영인과는 동명이인.[29] 탄금대 전투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현재 학계에선 신립이 배수진을 쳤다는 관점에 대해선 부정적이다.[30] 그런데 하필 그 직전에 왜장이 "적 장군을 생포하라. 조선의 장수를 사무라이로 만들어보는 것도 좋겠지." 즉 생포해서 전향 시키려는 의도의 말을 하는데 하필은 그 직후 신립이 이도류를 쓰고 있었다.[31] 진지하게 믿는 사람은 없겠지만 신립이 실제로 탄금대 전투에서 영정의 황색 두정갑을 입었을 가능성은 별로 없다. 기록엔 신립이 충청도로 출정하기 직전 선조에게 수은갑과 상방검을 받았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 기록대로라면 신립은 탄금대 전투에선 류성룡 갑옷 유물과 비슷한 양식의 수은 찰갑을 입었을 가능성이 높다. 동래읍성 유물의 예를 볼 때 수은갑을 실전에서 썼던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32] 2000년 KBS 드라마 <태조 왕건>에서는 신립 장군의 실제 가문 시조인 신숭겸을 맡았기 때문에 명예 평산 신씨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