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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26 20:18:09

안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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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3. 겁쟁이설4. 대중매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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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安衛

1563년(명종 18) ~ 1644년(인조 22)


조선 중기의 무장. 본관은 순흥(順興)[1], 자는 대훈(大勳).

명량해전의 향방을 결정지은 인물로 유명하다.

2. 생애

1563년 전라도 김제군 백석면 학당리(現 전라북도 김제시 백산면 하정리 학당마을)[2]에서 아버지 안경신(安敬信)과 어머니 조양 임씨(兆陽 林氏)[3] 사이에서 3남 1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 1589년(선조 22) 기축옥사 당시 정여립의 5촌 조카라는 이유로 무고되어 평안도 용천군에 유배되었는데, 임진왜란으로 도성이 함락되자 배소를 이탈한 뒤 평양부에 도착해 어느 병사의 막하에 배속되었다.

1592년 영유무과(永柔武科)에 급제하여 군인으로 발탁되었다. 이항복의 특천으로 대동찰방 겸 조방장(大同察訪兼助防將)이 되었다. 1594년(선조 27)에는 거제현령에 제수되었으며, 당항포 해전에서 적의 중선 한 척을 불태우는 전공을 세웠다.

1597년에는 부산에 침투, 방화해서 적군의 건물과 군수 물자들을 태워버리는 공을 세웠다. 그런데 이 부산 왜영 방화는 희한하게도 불똥이 튀었는데, 이걸 선조가 이순신을 삼도수군통제사에서 끌어내리는 핑계 중 하나로 적용된 것이다. 이때에 악연이 된 인물이 이원익. 거기에 직접적은 아니지만, 이원익과 더불어, 조정에서 이순신을 처벌을 말리는 노대신인 정탁은 정여립을 밀어주었던 경력이 있어, 다른 의미로도 악연이다.

이순신(李舜臣)이 삼도수군통제사명량대첩에서 적선 30여 척을 격침시키고 대승을 거둘 때 대활약하여 큰 공을 세웠다. 이때 이순신이 타고 있던 대장선을 제외하고는 12척의 배 모두 뒤로 빠져서 지켜보고만 있었는데, 이후 이순신의 대장선 1척으로 일본을 상대로 분투하던 중 초요기[4]를 올려 다른 함선을 부를 때 안위가 가장 먼저 이순신을 도우러 갔다. 이때 이순신이 크게 꾸짖었다.
安衛、欲死軍法乎?汝欲死軍法乎?逃生何所耶?
안위야, 군법에 죽고 싶으냐! 네가 군법에 죽고 싶으냐! 달아난다고 살 수 있을 것 같으냐![5]
『정유일기』 9월 16일

그러자 안위는 서둘러 가세했다. 이때 일본군 함선 3척에 포위되어 격침될 위기를 겪기도 했지만 구원온 대장선이 3척의 왜선을 격파해서 위기를 넘겼다. 안위가 합류한 이후 나머지 장수들도 안위를 따라 전투에 참가했기에 먼저 나선 안위의 공은 매우 컸다. 이어서 노량해전에도 참전하여 큰 공을 세웠다. 그러한 전공이 이순신의 장계 덕분에 널리 알려져 선조 31년(1598)에 전라우수사로 제수되었다. 1599년에는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가 되었고, 1600년에는 전라병사에 제수되었다.

1602년(선조 35년) 전라수사에 임명되었고, 1605년에는 충청병사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1606년 경상수사가 되었다가, 1608년에는 전라수사로서 수군을 통제하였다. 1619년에는 평안방어사로 임명되었다. 1623년(인조 1년) 인조반정 이후 다시 대장으로 임용받으려 하였으나 반대파의 시론에 부딪혀 향리로 돌아와 조용히 지냈다.

1636년(인조 14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74세 고령으로 왕의 수레를 모시고 따라가기 위해 올라가던 중 은진(恩津)에 머물고 있었으나 길이 막힌 상황이어서 남한산성에 들어가지 못하였다. 마침내 강화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고향에 돌아와 조용히 보내다가 1644년(인조 22년) 향년 82세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3. 겁쟁이설

명량 해전에서 이순신에게 호통을 들었다는 기록으로 인해 겁쟁이라고 오해를 받기도 하는데, 사실 안위는 해전이 소강상태에 빠진 강화협상기에 수군으로 배속되어 2차 당항포 해전 외에는 해전 경험이 없었다.[6] 칠전량 해전 이후의 다 무너져버린 수군 상황과 명량 해전 당시의 절망적인 전력차를 보면 충분히 이해가 되는 행동이라는 것이 중론이다. 이때는 임진년부터 수많은 전투에서 공을 세웠던 수군절도사 배설은 전투 직전 아예 정신이 무너져 탈영해버렸고, 수군절도사 김억추, 중군장 김응함 등 이순신을 곁에서 호위하거나 명령을 하달받아 같이 싸워야 할 임무가 있는 베테랑 수군 장수들조차도 겁을 먹고 다가오지 못하는 풍전등화의 상황이라는 것을 감안할 필요가 있다. 특히 해전 경험도 거의 없는 젊은 장수가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두려움을 무릅쓰고 이순신의 부름에 가장 먼저 응한 것은 용기가 있기에 가능한 행동이라고 봐야 한다. 이는 먼 훗날 걸프전에서 활약한 미 육군 명장 노먼 슈워츠코프가 말한 용기의 정의[7]에도 부합한다. 두려움을 극복하고 장수로서 의무를 다했기에 더욱 의미가 있다.

실제로 안위 다음으로 합류한 김응함의 경우, 안위 이상으로 더욱 호되게 꾸짖음을 들었다. 대장을 보필하는 중군장이라는 직책을 가진 사람이 일개 현령보다도 늦게 나섰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이순신은 제일 먼저 합류한 안위의 공을 잊지 않고 보고를 올려, 3년간이나 만년 종5품 거제현령에 머물던 안위는 그제야 승진할 수 있었다. 이후로도 전라수사, 경상수사에 임명되고 정3품까지 올라가는 등, 성공적인 커리어를 쌓았다.[8]

4. 대중매체


파일:안위 명량.jpg

[1] 안원군파(安原君派) 13세.[2] 순흥 안씨 집성촌이다.[3] 임핍(林愊)의 딸이다.[4] , 대장이 휘하 장수들을 자신 곁으로 부르는 것을 의미하는 북두칠성이 그려져 있는 깃발. 크기나 색깔은 대장의 직품에 따라 달랐다.[5] 명량 해전은 패배하면 조선은 치명타를 입고 일본에게 장악당할 가능성이 매우 높은 전투였다. 어차피 탈영에 성공해도 배설처럼 처형당하거나 일본군한테 잡혀 죽거나 둘 중 하나지만 죽기살기로 싸우면 이겨서 살 수도 있다.[6] 안위 입장에서는 불운하게도 수군배속 이후 공을 세울만한 해전 자체가 없었기에 진급도 못한 채 3년째 거제현령에 머물렀다. 당시 거제는 임진년 이후 일본군에게 넘어가 안위는 임지에 부임도 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7] 용기란 두려운 와중에서도 먼저 나서서 의무를 다하는 것이다(True courage is being afraid, and going ahead and doing your job anyhow).[8] 반면 김억추와 김응함은 이순신을 도와 역사에 남을 전공을 세웠음에도 전투에 적극 참여하지 않은 과실도 컸기에 품계를 현상유지하는 선에서 그쳤다.[9] 이순신이 안위가 탄 배에 직접 올라와서 "내 손에 죽을래? 장수답게 전장에서 죽을래?"라며 목에 칼까지 겨누며 엄포를 놓았지만 그렇게까지 했음에도 여전히 떨고 있었다. 물론 안위만 그랬던 것은 아니고 휘하의 모든 장수들이 돌격해서 합세해야 함을 알고 있으면서도 왜선은 여전히 수백 여 척이 남아있었기에 망설이고 있었다.[10] 이 부하가 이순신이 전라좌수사로 부임한 당시부터 격군 지휘병으로 있다가 전공으로 군관까지 진급한 고참 캐릭터이기도 하고 장면 자체도 극적이기는 했는데 고증에 신경을 쓴다는 말이 무색해지는지라 오히려 평가가 떨어지는 부분. 극중에서도 각성한 이후 이순신의 듬직한 수하가 되는 장면이라도 나오면 모를까 아예 증발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