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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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權俊
1547년(명종 2년)[1] ~ 1611년(광해군 3년)

1. 개요2. 생애3. 대중매체

[clearfix]

1. 개요

조선 중기의 인물. 자는 언경(彦卿), 호는 원당(元堂), 본관은 안동(安東)[2]이다.

이운룡, 어영담, 정운, 무의공 이순신[3]이순신이 가장 아꼈던 장수 중 한 명이다.

2. 생애

1547년 아버지 권눌(權訥)과 어머니 하빈 이씨[4] 사이에서 4형제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 권눌은 조선 개국공신 권근(權近)의 6대손으로, 어모장군(禦侮將軍) 행(行) 금갑도 만호(金甲島萬戶)를 지냈다. 권준이 현달하면서 사후 자헌대부(資憲大夫) 병조판서 겸 지의금부사(知義禁府事)에 추증되고 안천군(安川君)에 봉해졌다.

첫 부인은 여산 송씨(礪山 宋氏) 송달기(宋達器)의 딸이며, 두 번째 부인은 창녕 조씨(昌寧 曺氏) 조휘원(曺輝遠)의 딸로 도원수 권율의 첫 번째 부인의 여동생이다. 권율과 권준은 계급상으로는 상하 관계에 있었지만,[5] 사적으로는 같은 안동 권씨 추밀공파(樞密公派) 문중으로, 족보상으로는 13촌 숙질(叔姪)지간이면서 동서지간이 되기도 하는 셈이다.

내금위에 소속되어 있다가 1579년(선조 12) 식년시 무과에 갑과 3위 (탐화랑)으로 급제하였다.# 임진왜란 당시에는 종3품 순천도호부사[6]로 재직하며 이순신 휘하에서 여러 해전에 참전, 큰 공을 세웠다. 당시 전라 좌수영의 5관 5포 중 가장 큰 고을인 순천 도호부의 부사였기 때문에 실질적인 좌수영 내 2인자의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이며, 이를 증명하듯 가장 최상급자인 전라 좌수사의 명을 직접 받아 전달하는 중위장의 역할을 권준이 맡았다.[7]

당포 해전에서는 적장 도쿠이 미치유키를 화살로 쏘아 맞추고, 연이은 출전에서도 계속 공을 세워 1595년 원균의 뒤를 이어 경상 우도 수군 절도사(정3품)에 임명되었으나[8] 이후 원균이 삼도수군통제사(종2품)에 임명되자 사직하였다. 그러나 칠천량에서 조선 수군이 궤멸되고, 이순신이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복직되자 같이 충청도 수군 절도사(정3품)로 임명되어 이순신의 막하에서 다시 재직하였으나, 경기도 지역 방어가 주 임무였던지라 해전에 나가는 일은 드물었다.[9] 전란이 끝난 이후에는 경기도 방어사(종2품), 충청도 병마 절도사(종2품) 등을 지냈고 1604년 선무공신(宣武功臣) 3등으로 책록되었으며 안창군(安昌君)의 작호를 받았다.[10]

다만 임진왜란이 끝난 뒤 명나라 해랑도라는 섬에서 활동한 해적 해랑적에게 병선과 물자를 약탈당해 큰 곤경을 겪었다.

임진왜란이 터지기 전부터 이순신과 함께 했던 사람으로, 사적으로도 매우 친밀했던 사이였다. 난중일기엔 권준이 잠깐 한산도를 비우는 시기와, 이순신의 파직 이후를 제외하면 권준의 이름이 등장하지 않은 날을 찾기 힘들 정도.[11] 같이 식사를 하며 여러 일을 논의하는가 하면 술도 자주 마시고, 바둑을 두거나 활을 같이 쏘았다.[12] 항상 많은 사람들이 이순신을 찾아오지만 가끔 아무도 찾아오지 않으면 직접 권준을 초청해 같이 식사를 하기도 했다. 또 권준의 생일에는 여러 장수들이 모여 같이 술과 음식을 먹으며 즐겼다는 기록도 있다.
추가로 권숙(權俶), 권위(權偉), 권사(權徙) 등 남동생이 세 명 있는데, 이순신의 난중일기를 읽어보면 이순신은 권준과 함께 권준의 첫째 남동생인 권숙과도 자주 어울려 노는 모습이 보인다. 어떤 경우에는 둘이서 술 마시고 있는데, 동생이 사라져서 권준이 찾아오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동생의 경우에는 영상 매체에서 등장한 적이 없어 그 인지도가 매우 낮다.[13]

3. 대중매체


[1] 기묘문무과방목(己卯文武科榜目). 1541년(중종 36년) 생이라는 기록도 있다.[2] 추밀공파(樞密公派) 23세.[3] 우리가 알고 있는 충무공 이순신과는 동명이인이다.[4] 부장(部將)을 지낸 이윤우(李允耦)의 딸이다.[5] 임진왜란간 세운 공으로 인해 경상 우수사 → 충청 수사를 연달아 맡았으며 전란 후에는 경기도방어사로 승진한다. 임진왜란 전에도 전라 좌수영 관할 5관 중 가장 큰 순천도호부의 부사로 종3품의 꽤 높은 벼슬에 있었다.[6] 현재의 순천시와 여수시를 모두 관할한다.[7] 단 1차 출동이 있던 옥포해전 때는 육군 조방장으로 차출되었기 때문에 해전에는 참가하지 않지만 2차 출동 때는 복귀했기 때문에 이후 벌어지는 모든 전투에서 중위장으로 참전, 공을 세운다. 이를 두고 당시 이순신은 난중일기에 수군의 중위장을 육군으로 데려갔다고 한탄하는 내용이 있다.[8] 원균의 바로 뒤를 이은 것은 배설이고, 권준은 배설의 뒤를 이어 수사가 된다. 다만 배설은 부임 후 6개월이 채 못되어 권준과 교대된다.[9] 칠천량 해전으로 조선 수군 대다수가 사라지자 이에 놀란 선조는 충청 수군은 한강을 막아야 한다고 붙들어두고 있었다. 삼도수군통제사로 복직됐지만 휘하에 충청 수군 없이 경상과 전라 2도만으로 싸우고, 명량해전 이후에는 명나라 진린의 수군이 투입된 것.[10] 이순신 휘하의 장수 중 선무공신에 책봉된 자는 권준과 동명이인의 이순신(무의공)이 있다.[11] 이와 비슷한 사람은 무의공 이순신과 전라우수사 이억기가 있으며, 원균 역시 등장 빈도가 많은 편이긴 하나 이순신과 우호적인 관계는 아니었다.[12] 활솜씨가 뛰어나서, 일기엔 '순천부사가 가장 잘 맞혔다'는 대목이 종종 있다.[13] 그도 그럴 것이 권준의 동생이 등장하는 시기는 전란이 터지기 전이었고, 전란이 터진 후에는 등장이 없다.[14] 다른 장수들은 비축해야 할 군량미가 부족하거나 무기들의 상태가 형편없거나 상비 병력이 부족하는 등의 잘못이 있었다. 심지어 김완은 이순신의 환심을 산답시고 기생들을 불러다 놓고 있었는데 이순신이 정운의 진영에 들렀다가 무기나 함선 점검 등은 일체 하지 않고 병사와 장기를 두고 "자네가 알아서 잘 했겠지"라며 그냥 갔다는 소식을 미리 접했던 것. 물론, 기생은 거들떠도 안 보고 무기고로 직행한 이순신에 의해 무기 관리 태만이라는 잘못이 바로 드러나 곤장을 맞았다. 녹도 만호인 정운 또한 권준과 마찬가지로 책잡히지 않기는 했는데 문제는 전라좌수영 군사들을 창과 칼 등 근접전 위주로만 훈련시킨 것에 대해서 이순신이 불편한 기색을 보인다. 나중에는 대놓고 문제를 제기하며 후에 첩자로 붙잡힌 일본인 포로들과 녹도군과 싸우게 하여 정운의 육전 고집을 단념케 했다.[15] 조선 시대의 순천은 현대의 순천시와 행정 구역이 조금 차이가 있다. 낙안읍성꼬막으로 유명한 보성군 벌교읍을 아울렀던 옛 낙안군(樂安郡) 지역이 별개로 있는 대신에 조선시대의 순천은 도호부로서 그 지휘관인 부사는 종3품이었으며 범위는 현재의 순천시에서 옛 낙안군 지역이었던 낙안면과 외서면 및 별량면 일부 지역을 제외한 현재의 순천시 전 지역은 물론 전라좌수영이 있었던 여수시까지 포함하던 큰 고을이었다. 어찌되었든 순천 도호부와 낙안군 모두 임진왜란 당시에는 전라좌수영 휘하 고을로 당시 종4품이던 낙안군의 군수는 신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