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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둔도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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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둔도 전투
鹿屯島 戰鬪
<colbgcolor=#C00D45,#01454F><colcolor=#f0ad73,white> 시기 1587년 (선조 21년) ~ 1588년 (선조 22년)
장소

조선 함경도 경흥부 녹둔도
원인 여진의 침입
교전세력 <rowcolor=black> 조선
(수세)
여진
(공세)
주요 인물
지휘관

[[틀:깃발|
기 명칭
]][[틀:깃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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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록|]] (경흥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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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휘관

[[여진족|
女眞
]] 마니응개
[[여진족|
女眞
]] 사송아
[[여진족|
女眞
]] 갑청아
전력 규모 불명 규모 불명
피해 사상자: 11명
포로: 160여 명
규모 불명
결과 조선의 승리
영향 * 녹둔도 경계 강화
* 시전부락 전투 발발
* 이순신, 이경록백의종군
1. 개요2. 결과3. 시전부락 전투4. 미디어에서

[clearfix]

1. 개요

조선왕조실록「북병사 이일이 녹둔도가 함락되었다고 치계하다.」
「불멸의 이순신 녹둔도 전투」

1587년(선조 20년)과 그 이듬해 조선여진족 사이에 벌였던 두 차례 전투. 두만강 하류 강 가운데 위치한 녹둔도에 여진 부족 중의 하나인 시전부족이 몰래 습격해온 것을 막기 위한 조선군과의 충돌이다.

2. 결과

당시 녹둔도 둔전관 겸 조산보 만호였던 이순신은 열악한 상황에서 상당한 선전을 보여줬기에 상부에 꽤 깊은 인상을 남겼다.

이 전투에서 조선인 11명이 전사하고 군민 160여 명이 납치되며 15필의 말도 약탈당했다. 하지만 1,000명 이상의 기마병에게 기습당한 상황에서 불과 수십 명으로 방어에 성공하고 반격까지 감행, 절반 이상의 포로를 구출해 피해를 최소화해서 할 수 있는 대처는 다 했다고 인정받았다. 이 전투에서 이순신과 이경록은 용맹을 제대로 보여줬으며 이순신이 단지 훌륭한 전투지휘관으로 끝나는 인물이 아니라 무예도 뛰어났음을 증명했다. 저 정도 병력 차이라면 장수의 무예가 뒷받침되지 않고서는 절대 이길 수 없는 전투이다.

북병사 이일은 일단 패전의 책임을 물어 경흥부사 이경록과 조산만호 이순신, 선전관 이운룡 등을 잡아 가두었으나 조정은 경흥부의 녹둔도가 야인 지역과 너무 가까워 처음부터 소수의 병력으로 방어하기 힘들었음을 파악하고 있었고 이순신과 이경록의 보고를 종합한 이일의 장계를 통해 이순신이 열세한 상황에서 충분히 분전했음을 인정하고[1] 국왕인 선조가 이순신은 패배한 것과는 다르다며 구분 짓고 장형을 친 후 백의종군으로 마무리지었다. 이 전투는 선조와 조정에 이순신의 이름이 알려지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2]

이순신이 당사자라서 유독 인지도가 높아 많이 왜곡되어 있는 전투인데 함경도 지역 진보들은 이 무렵 준동하기 시작한 여진족 약탈부대와 비교하면 수적으로 충분했던 경우가 없다. 북도 제승방략 부터가 이점을 감안해서 진보에서 버티면 주변에서 즉시 구원하는걸 주요한 방어전략으로 채택하고 있다. 그러니까 이일이 무능해서 녹둔도에 병력을 더 보내지 않은게 아니라 조선의 방어전략 자체가 대규모 방어병력을 상시 주둔시키지 않았고,(전근대에 함경도에 대규모 방어병력을 주둔시키기도 힘들고) 그 병력이 위에서 정한 인원이었다. 병력 충원을 해주지 않았다는 이순신의 항의는 어디까지나 일선에 나간 현장 지휘관의 의견으로 봐야한다. 이일이 비판받아야 할 지점은 사전에 병력 지원을 안해준 게 아니라, 적은 병력으로 방어는 성공적으로 했으니 참작을 해줘야 하는데 손실이 났으니 패전으로 처벌하겠다며 융통성 없이 군 대목이다.

3. 시전부락 전투

시전부락 전투
時錢部落 戰鬪
<colcolor=#000> 시기 1588년 2월 11일[3]
장소 명국야인여진 시전부락 (현 러시아 하산 지역)
원인 녹둔도 전투
교전국 파일:조선 어기.svg 조선 여진
지휘관 북병사 이일
종성부사 원균
경흥부사 이경록
우화열장 이순신
이운룡
우을기내
사송아
갑청아
병력 2500명 불명
피해 전사자 없음 380명 전사
결과 조선군의 승리.

선조 21년 1월, 북병사 이일은 조정에 보낸 계본[4]에서 함경도의 군사 2천 5백명을 동원해 15일 새벽 녹둔도를 노략했던 부락을 야습하여 1명도 죽지 않고 그들의 주거지 200여 채를 불태우고 수급 380개를 취하여 돌아왔다고 하였다.[5] 이를 일명 '시전부락 전투'라고 한다. 이때 이순신은 승자총통 부대 지휘관인 우화열장(右火烈將) 직책으로 참전, 여진 추장인 우을기내(于乙其乃)를 생포하는 공을 세우고 백의종군을 끝낸 후 아산으로 가서 가족들과 함께 지냈다. 또한 원균도 당시 종성부사로 후방 지원부대 지휘관인 일계원장으로 참전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후 북병사 이일이 집필한 병서 제승방략에 이 전투의 전모가 상세히 기록되어 전해져 내려왔다. 전투 경과와 이순신의 맹렬한 분전 모두 이 제승방략의 기록에 근거한 내용이다.

지금도 전투 현장 부근인 서번포 기슭에는 이 전투를 기념하는 비각인 승전대(勝戰臺)가 남아 있다. 또한 이일의 후손들이 이 전투를 상상해서 그린 그림인 '장양공정토시전부호도'라는 그림이 남아있는데 이 그림에 참전한 조선군 장교들의 명단이 첨부되어 있고 그 안에 이순신이 우화열장으로 참전했다는 것도 남아있다.#

4. 미디어에서

불멸의 이순신에 두 화에 걸쳐져 나온다. 여진족들의 대규모 연합을 눈치챈 이순신이 병력 보충을 위해 이일과 극심하게 대립하며 상황이 최악으로 몰리고, 결국 이경록에게 병력을 지원받기 위해 녹둔도를 비운 사이 그걸 눈치챈 여진족의 습격으로 지옥도가 펼쳐진다. 군민들이 합심하여 여진족의 1차 공격을 막아내지만 2차 공격에는 역부족으로 패배하고 대다수가 죽거나 포로로 끌려간다. 뒤늦게 병력을 지원받은 이순신이 급히 달려가지만 이미 불타고 부임한 이래 친분을 쌓은 군관들과 병사들 그리고 백성들이 거의 다 죽거나 끌려갔다.

나레이션은 11명 전사라고 설명하지만, 여기서는 규모를 좀 과장해서 수백명이 전사한 대규모 전투로 연출했다. 압도적인 수의 적에게 기습당해 병력을 거의 다 잃었고 뒤늦게 복귀한 이순신은 철수하던 여진족의 뒤를 쳐서 복수를 하지만, 이일은 자신이 이순신의 지원요청을 씹은 것이 문책을 당할까 두려워서 일부러 이순신이 패전을 했다고 몰아간다. 다행히 조정에서 진상을 파악하고 백의종군으로 처벌을 끝내며, 이순신은 이후 시전부락 전투에서 여진족 추장을 잡는 공을 세워 다시 관직으로 복귀한다.

실제로는 패전도 아니었고 작중에서도 공을 세워 패전의 굴욕을 씻었지만, 그럼에도 패전지장의 낙인이 안 지워지고 이순신 개인에게도 트라우마가 된 것으로 표현한 것은 아쉽다.

그리고 이후 KBS 역사저널 그날에도 불멸의 이순신 전투씬을 편집한 장면과 함께 등장하는데 어김없이 패전으로 묘사되었다. 신병주 건국대 교수도 패전이지만 잘 싸운 전투라고 언급하는데 선조실록의 기록과 수책거적도에서 보듯 피해는 컸지만 엄연히 조선군이 승리한 전투이다.

이순신이 최전방에서 여진족과 싸우던 시절이다. 그렇기에 육지전을 볼 수 있다.

영화 <한산: 용의 출현>에서도 한산도 대첩을 앞둔 전라좌수사 이순신이 꿈을 꾸는 장면으로 살짝 묘사되는데, 이 전투 전반을 묘사하는 것은 아니고 이순신이 학익진을 전략으로 채택하는데 영향을 준 것으로 나온다.


[1] 이일이 패전한 책임을 물어 이순신을 출두시켰을 때, 이순신은 "저의 지원 요청을 거듭 묵살하신 것은 북병사 어른이 아닙니까? 또 싸우다 전사한 이는 있을지언정, 오랑캐를 물리치고 백성들도 구해내었으니, 제가 지원을 요청한 문서를 전하께 올리면 북병사께서도 문책을 면하지 못하실 것입니다."라며 논리정연하게 이일에게 항변했다.[2] 이경록(李慶祿)과 이순신(李舜臣) 등을 잡아올 것에 대한 비변사의 공사(公事)를 입계하자, 전교하였다. "전쟁에서 패배한 사람과는 차이가 있다. 병사(兵使)로 하여금 장형(杖刑)을 집행하게 한 다음 백의 종군(白衣從軍)으로 공을 세우게 하라."-선조 20년 10월 16일 신미년 기사[3] 음력 1월 15일.[4] 조선시대 왕에게 올리던 중대한 일을 보고 할 때 작성하던 문서의 양식이다, 외방의 계본은 그 지방의 관찰사·병마절도사·수군절도사 등이 중요한 일을 왕에게 보고하는 데 쓰는 문서로서 이두를 섞어 썼다.[5] 세계 최강 미군조차 모가디슈 전투에서 훈련과 장비 모두 비교가 불가능할 정도로 열악한 소말리아 민병대를 상대로 사상자가 아예 없지는 않았다는걸 감안하면 기습이었다고는하나 정말 엄청난 전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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