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 삼도수군통제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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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2대 삼도수군통제사 원릉군(原陵君) 원균 元均 | Won Gyun[MR] | |
| 원균의 사당에 있는 영정 | |
| <colbgcolor=#c00d45,#c00d45><colcolor=#fff> 출생 | 1540년 2월 12일 (중종 35년 / 음력 1월 5일) |
| 충청도 진위군 여방면 내리 (現 경기도 평택시 도일동 내리마을) | |
| 사망[2] | 1597년 8월 27일 (향년 57세) (선조 30년 / 음력 7월 15일) |
| 경상도 거제현 거제도 칠천량 앞바다 (現 경상남도 거제시 거제도) | |
| 재임 기간 | 2대 삼도수군통제사 |
| 1597년 3월 14일 ~ 1597년 9월 3일 | |
| 체중 | 초고도비만, 100kg 전후[3] |
| 부모 | 부친 - 원준량(元俊良)[4] 모친 - 남원 양씨 양희증(梁希曾)의 딸 |
| 형제자매 | 8남 1녀 중 장남 남동생 - 원연(元埏)[5], 원전(元塼)[6], 원용(元墉), 원지(元墀), 원감(元堪), 원곤(元坤), 원해(元垓) 여동생 - 창녕 성씨 성대충(成大忠)의 처 |
| 부인 | 윤차심(尹次深, 1546 ~ 1642)[7] |
| 자녀 | 1남 5녀 장남(승적[8]) - 원사웅(元士雄, 1575 ~ 1646 이전) 장녀 - 청주 한씨 한억(韓嶷)의 처 서녀 - 이신춘(李新春)의 측실 서녀 - 원정일(元貞一)[9] 서녀 - 조정견(趙廷堅)의 측실 서녀 - 정항(鄭沆)의 측실 |
| 본관 | 원주(原州)[10] |
| 자 | 평중(平仲) |
| 주요 참전 | 임진왜란
|
1. 개요
한산의 패배에 대하여 원균은 책형(磔刑)을 받아야 하고 다른 장졸(將卒)들은 모두 죄가 없다. 왜냐하면 원균이라는 사람은 원래 거칠고 사나운 하나의 무지한 자로서 당초 이순신(李舜臣)과 공로 다툼을 하면서 백방으로 상대를 모함하여 결국 이순신을 몰아내고 자신이 그 자리에 앉았기 때문이다. 겉으로는 일격에 적을 섬멸할 듯 큰소리를 쳤으나 지혜가 고갈되어 군사가 패하자 배를 버리고 뭍으로 올라와 사졸들이 모두 어육(魚肉)이 되게 만들었으니 그때 그 죄를 누가 책임져야 할 것인가. 한산에서 한 번 패하자 뒤이어 호남(湖南)이 함몰되었고 호남이 함몰되고서는 나랏일이 다시 어찌할 수 없게 되어버렸다. 시사를 목도하건대 가슴이 찢어지고 뼈가 녹으려 한다.[원문]
선조실록 선조 31년 무술년 (1598) 4월 2일 기사 중 사관의 논평.#[12]
선조실록 선조 31년 무술년 (1598) 4월 2일 기사 중 사관의 논평.#[12]
5월 8일. (전략)[13] 이경신(李敬信)이 한산에서 와서 원흉(元兇)의 일에 대해 많이 이야기하였다. 또 말하기를 그가 데리고 온 서리(書吏)에게 육지로 가서 곡식을 사오라며 내보내 놓고는 그의 처를 겁탈하려고 하자 그 여자가 악을 쓰며 듣지 않고 밖으로 뛰쳐나가 고함을 질렀다고 하였다.[14] (중략) 원이 온갖 계략을 다 써서 나를 모함하려 하니 이 역시 운수 탓인가. 그가 바치는 뇌물 짐이 서울로 가는 길을 연달아 잇고 있으면서도 날이 갈수록 나를 헐뜯고 있으니 그저 때를 잘못 만난 것이 한스러울 따름이다.
난중일기 중
조선의 제2대 삼도수군통제사.난중일기 중
임진왜란 시기 '졸장'의 대표격으로 회자되는 인물로, 칠천량 해전의 졸전과 패배, 그 외의 여러 전투에서도 줄줄이 패전 그리고 온갖 삽질들과 파탄난 인간성으로 인해 한국사는 물론이고 세계사에 몇 없는 역사상 최악의 똥별로 평가받는 인물이다.
옥포 해전, 사천 해전, 부산포 해전 등 여러 해전을 이순신과 함께 치렀으나 이순신과의 불화로 잠시 전라병사로 제수되었다가, 파직된 이순신의 뒤를 이어 전라좌수사 겸 삼도수군통제사의 자리에 올랐다. 그러나 칠천량 해전에서 대패하여 전임자가 공들여 육성해 온 조선 수군이 와해되고 자신도 전사했다. 이 패배는 당시 전황을 크게 악화시켰으며, 이순신이 다시 통제사에 올라 명량 해전에서 기적적인 압승을 거두고서야 전황이 다시 뒤집어질 수 있었다.
오늘날에는 전공을 탐내 아군을 해칠 정도의 탐욕, 칠천량 해전에서의 이해할 수 없는 전략, 군 운용, 나태함, 오만함과 이순신에 대한 지나친 시기 등이 비교적 잘 알려져 있지만 이미 당시에도 전반적으로 능력에 비해서 높은 지위에 오른 인물로 알려져 있었으며, 장수로서는 지나치게 큰 도덕적 결함을 지닌 인물로 평가받았다. 이로 인해 원균을 매국노라 평하는 사람도 있지만, 엄밀히는 매국 행위조차 한 적이 없고 그냥 철저히 무능하고 탐욕스러웠을 뿐이다. 다만 결과적으로 조선이 멸망할 뻔한 피해를 끼쳤다는 점에서 조선을 청나라에 팔아넘기려고 시도한 김자점, 나라 지키는 군인들의 봉급을 하인들을 시켜 횡령하고 모래와 겨를 섞어서 임오군란을 발생시킨 민겸호와 함께 악질적인 간신으로 분류된다.[15] 이러한 자질 문제에도 불구하고 당시 선조는 그에게 삼도수군통제사라는 중책을 맡겼으며, 결국 이는 큰 대가를 치르는 결과로 이어졌다.
후세 사람들에게는 이러한 원균의 실책이 이후에 있었던 기적과 같은 승리와 더욱 뚜렷한 대조를 이루며 이순신의 신화와 같은 업적을 두드러져 보이게 하지만 당시로서는 나라를 큰 위기에 빠트린 것에 지나지 않았다. 일부 사람들이 실제로는 원균이 좋은 장수였다는 주장을 펼치기도 해서 논란이 되기도 했던 인물이다. 하지만 해당 주장은 이미 근거가 없는 것으로 사실상 결론이 내려졌으며, 이는 정치적 또는 다른 목적으로 역사를 왜곡하고 충무공을 모욕하는 저질스러운 행위에 불과하다.
2. 직위
증[16] 효충장의협력선무공신 숭록대부, 의정부좌찬성 겸 판의금부사 원릉군(贈 效忠仗義協力宣武功臣 崇祿大夫 議政府 左贊成 兼 判義禁府事 原陵君)
같은 선무공신 1등이라도 권율과 이순신의 경우 정1품 대광보국숭록대부의 품계를 받은 반면 원균의 경우는 종1품 숭록대부의 품계를 받았다. 대광보국숭록대부와 숭록대부의 사이에 정1품 보국숭록대부가 있다. 당시 권율과 이순신에게 각각 영의정과 좌의정 및 부원군의 작호가 추증된 반면 원균은 좌찬성 겸 판의금부사, 군의 작호가 추증되었다. 임금 선조에 의해 억지로 선무공신 1등이 되었는데도 종1품에 머무른 점을 보면 조정에서도 원균의 평가가 좋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
정치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간단하다. 임금이었던 선조는 올려주고 싶은데 이에 호응하는 신하가 단 1명도 없고 전부 반대했기 때문인데 그래도 임금의 명령이니 마지못해 올릴 수 있는 최소한의 추증만 올린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래도 칠천량 해전에서 이순신 장군이 피땀 흘려 부강하게 키워 놓은[17] 조선 최정예 수군의 판옥선을 12척만 남기고 모조리 침몰시키는 대패를 당하고 공적을 위해 인간 백정 행각[18]까지 저지른 주제에 부총리에 해당하는 좌찬성과 검찰총장 및 기무사령관에 해당하는 판의금부사를 제수받았다니 분에 차고 넘치는 처사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선조가 이토록 원균 추증에 매달린 이유는 그가 본인이 직접 발탁하고, 본인이 시키는 대로 하다가 죽은 자였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원균의 칠천량의 대패의 소식을 듣자마자 "이 패전은 원균의 잘못이 아니라, 하늘이 돕지 않아서 그렇게 된 것이다."라는 현실도피를 했고, 전후에는 원균을 집요하게 1등공신으로 추증하여 잘못된 인선과 잘못된 작전명령의 최종책임자인 선조 본인의 과오를 희석시키려 한 것이다.[19]
3.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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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원균/생애#|]] 부분을}}} 참고하십시오.4. 기록
4.1. 난중일기
보통 어린이용 위인전이나 대중매체 등지에서는 이순신이 원균의 무능과 흉폭함도 넓은 아량으로 감싸주는 모습으로 묘사될 때가 많으나, 이순신도 불세출의 영웅이기 이전에 사람이다. 실제 이순신은 원균뿐만 아니라 타인이나 부하들에 대해 매우 엄격하고 깐깐한 잣대를 세워 평가하였으며, 논공행상도 그에 맞춰 철저하고 공정하게 하는 인물이었다.[20] 그런데 원균은 장군으로서 단순히 무능하기만 한 것도 죄이건만 성격조차 포악하고 옹졸한 소인배였기에 진작 이순신의 눈 밖에 날 수밖에 없었다. 거다가 나중에는 자신을 모함하여 기어이 억울하게 옥살이를 시키고, 백의종군이라는 크나큰 치욕까지 겪게 만들었기에 이순신도 그를 누구보다 혐오하였다.[21]이 때문인지 전체적으로 진중하고 침착한 문체로 서술되어 있는 난중일기의 내용 중에서, 유독 원균과 관련된 날의 일기에서는 이순신답지 않게 격앙된 감정을 보이는 대목이 많다. 원균과 처음 만났을 때는 그의 실책을 지켜보면서도 일단은 '원 수사', '경상수사', 또는 원균의 호를 따서 '원평중'이라고 품위있게 써 주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원균을 가리키는 호칭이 점점 경멸적으로 바뀐다. 특히 1594년까진 그래도 원 수사라고 불러주었지만, 1595년을 기점으로 그런 직함도 날리고 그냥 원균이라고만 기록했고, 그 후 이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몰라도 1597년 4월에는 원공으로 바뀌어 있었으며, 원균의 모함을 받아 서울로 압송된 뒤 백의종군을 당하는 신세가 되어 온갖 고생을 겪던 5월 초부터는 그냥 '원'[22]으로 적었다가, 5월 6일부터는 일말의 인내심도 사라졌는지 아예 '흉측한 자(兇公)', '원흉(元兇)'등으로 이르는 지경이 되었다. 당시에는 선술된 '원'이라는 표현도 상당히 강한 수위의 멸칭이었음을 감안하면, 대놓고 '흉측하다'는 식의 표현을 사용했다는 것은 현대 기준으로 보면 쌍욕을 한 수준이다.
물론 개인의 주관적 시선이 크게 들어가는 일기 형식의 기록물인 난중일기를 근거로 이순신과 서로 사이가 나빴던 원균에 대한 평가를 내리는 것에 한계가 있지 않겠느냐는 반론도 있지만, 난중일기는 이순신의 올곧고 깐깐한 성향에 따라 쓰여진 것이라 원균에 대한 주관적인 가치판단 부분을 제외하면 대부분 역사적으로도 사실로 검증된 일들만을 다루기에 실록 못지않은 훌륭한 자료로 평가받는다. 아래 실록과도 비교해 봤을 때 일치하는 사실이 매우 많으니, 그 부분에 초점을 맞추어 원균을 평가하자. 이순신은 원균이 각종 패악질을 일삼는 꼴을 바로 옆에서 목격했지만, 일기라고 해도 대놓고 욕설을 적는 것은 껄끄러워서인지[23] 오히려 난중일기는 실록보다도 원균을 더 점잖게 표현한 축에 속한다. 본인의 사견이 잔뜩 들어갈 수 있는 일기임에도 불구하고, 단순히 원색적이고 감정적인 비난이 아닌 신뢰성 높은 증거들을 바탕으로 하여 합당한 비판적 시선을 견지하고 있다.[24] 실록은 원균이 올린 말 그대로 원흉들과 방관적 공범자들의 책임 회피가 난무하는 형국이다.
이하의 번역본은 원문에 해석이 덧붙여져 있으므로, 이를 감안하고 참고하길 바란다.
- 1592년
- 5월 2일. 삼도 순변사 이일과 우수사 원균의 공문이 왔다. 군관 송한련이 남해로부터 돌아와서 하는 말이 "남해 수령 기효근, 미조항 첨사 김승룡, 상주포, 곡포, 평산포 만호 김축 등[25] 이 왜적의 소문을 한번 듣고는 벌써 도망쳤고, 온갖 군기 등 쓰던 물건도 모두 버려서 남은 것이 없다"라고 했다. 참으로 경악할 일이다.
- 5월 3일. 방답[26]의 판옥선이 첩입군을 싣고 오는 것을 보고 우수사가 온다고 좋아 했으나 군관을 보내어 알아보니 방답의 배였다. 크게 실망했다.
- 5월 29일. 전라 우수사 이억기가 오지 않아 혼자 여러 장수들을 거느리고 새벽에 떠나서 곧장 노량에 도착했다. 미리 만나기로 약속한 곳에서 경상 우수사(원균)와 만났다.
- 1593년
- 2월 8일. 아침에 영남 우수사가 내 배로 와서 전라 우수사의 기약 늦어진 잘못을 몹시 탓하며 지금 곧 먼저 떠나겠노라고 하였다.[27]나는 애써 말려 기다리게 하고 "오늘 해 안으로는 당도할 것"이라고 약속하였다. 그랬더니 과연 정오에 돛을 달고 들어오므로 온 진중이 바라보고 기뻐 뛰지 않는 이가 없었다.
- 2월 22일.[28] (중략) 곧이어 진도(珍島) 상선(上船)이 또 적에게 둘러싸여 거의 구할 수 없게 되었는데 우후가 바로 들어가 구원해 내었다. 경상 좌위장과 우부장은 보고도 못 본 척하며 끝까지 돌아서서 구원해내지 않았으니 그 어이없음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참으로 통분하다. 이 때문에 경상 수사에게 따져 물었지만 가히 한탄스럽다. 오늘 통분한 것은 무슨 말로 다하랴. 모두 경상 수사 때문이다.
- 2월 23일. 원 수사가 와서 보았다. 그 음흉함은 말로 표현할 길이 없다.
- 2월 28일. 김해강 아래쪽 독사이항[29]으로 향하는데 우부장(김득광)이 변고를 알려왔으므로 여러 배들이 돛을 달고 급히 가서 작은 섬을 에워싸고 보니 경상 수사 군관의 배와 가덕 첨사(전응린)의 사후선(척후선) 등 2척이 섬에서 들락날락하면서 태도조차 수상하므로 묶어서 원 수사에게 보냈던 바, 수사가 크게 성을 내는 것은 그 본의가 군관을 보내어 고기 잡는 사람들의 머리를 베어오는 데 있었던 까닭이다.[30]
- 3월 2일. 비. 종일 비가 왔다. 배 봉창 밑에 앉았노라니 온갖 생각에 가슴이 치밀어 올라 회포가 어지럽다. 이영남, 이여념이 왔다. 그들에게 원 수사의 비리(非理)를 들으니 한탄스럽다[31].
- 5월 8일. 흐리되 비는 오지 않았다. 새벽에 출항하여 사량 바다 가운데에 이르니, 만호 이어념이 나오므로 우수사가 있는 곳을 물었더니 지금 창신도(남해군 창선도)에 있다고 하며, 군사들이 모이지 않아 미처 배를 타지 못했다고 하다. 곧바로 당포에 이르니, 이영남이 와서 보고 수사 원균의 망령된 짓이 많음을 자세히 말하다.
- 5월 14일. 선전관 박진종(朴振宗)과 선전관 영산령(寧山令) 복윤(福胤)이 임금의 분부를 가지고 같이 왔다. 그들에게서 명나라 군사들의 하는 짓을 들으니 참으로 통탄스러웠다. 내가 우수사의 배로 옮겨 타고 선전관과 이야기하며 술을 두어 순배 나누고 있을 때 영남 수사 원균이 와서 술주정을 부렸는데 배 안 장병들 중 분개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그 속이고 망령됨은 말할 길이 없다.
- 5월 15일. 아침에 낙안 군수 신호가 와서 보았다. 윤동구(尹東耈)가 그 대장의 장계 초본을 가지고 왔는데 그 고약스러움은 말할 길이 없다.
- 5월 21일. 원 수사가 허위 내용으로 공문을 돌려 대군을 소동케 하였다. 군중에서조차 속임이 이러하니 그 고약스러움을 말할 길이 없다.
- 5월 27일. 영남 우병사 최경회의 답장이 왔는데 원 수사가 송 경략[32]이 보낸 화전(火箭)을 혼자 쓰려고 꾀하고 있다니, 매우 가소롭다.
- 5월 30일. 원 수사가 송 경략이 보낸 화전(火箭)을 혼자 쓰려고 꾀하였으나 병사(兵使)의 공문에 따라서 나눠 보내라고 하였더니 공문을 인정하지 않는 심한 언사로 무리한 말만 많이 하니 우스웠다. 명나라 고관이 보낸 화공(火攻) 무기인 화전 1,530개를 나눠 보내지 않고 독차지해서 쓰려고 하다니, 도저히 말이 되지 않는 일이다. 남해 기효근이 배를 내 배 곁에 대었는데 그 배 속에 어린 색시를 싣고서는 남이 알까봐 두려워하니 가소롭다. 이 같이 나라가 위급한 때를 당하고도 예쁜 색시를 태우기까지 하니 그 마음 씀씀이야말로 이루 다 말할 길이 없다. 그러나 그 대장인 원 수사 또한 그러하니 어찌 하랴.[33]
- 6월 10일. (전략) 축시(새벽 2시)에 원 수사의 공문이 왔는데 '내일 새벽에 나가 (적을) 치자'고 하였다. 그의 시기(猜忌)와 흉모(凶謀)는 형언할 길이 없다.[34] 이날 밤으로는 대답하지 않았다.
- 6월 11일. 아침에 적을 토벌할 일로 공문을 만들어 영남 수사에게 보냈더니 술이 취하여 인사불성이라고 하였다.[35]
- 7월 21일. 경상 우수사와 정 수사가 한꺼번에 와서 적을 토벌할 일을 의논하는데 원 수사의 하는 말은 극히 흉측하고 말할 수 없는 흉계이다. 이러하고서 일을 같이 한다면 뒷걱정이 없을까?
- 7월 28일. 사도 첨사가 복병했을 때 잡은 보자기[36] 10명이 왜복으로 변장해 입고서 하는 짓들이 수상하다고 하므로 자세히 추궁했더니 경상 수사가 시킨 일이라고 하였다. 족장(발바닥을 때림) 10대만 때리고 놓아주었다.
- 8월 2일. 어두워질 무렵에 우수사가 배에 와서 전하기를 "원 수사가 허망한 말을 하며 나에 대하여 좋지 못한 말을 많이 하더라"고 하였다. 모두 망령된 짓이다. 무슨 상관이 있으랴.
- 8월 6일. 저녁에 원 수사가 왔다. 이경수, 영공, 정 수사도 와서 일을 의논했는데 원 수사의 주장에는 자주 모순이 생긴다. 한심한 일이다.
- 8월 7일. 저녁에 경상 수사의 군관 박치공(朴致公)이 와서 적선이 물러갔다고 전하였으나 원 수사와 그 군관은 본시 헛말 전하기를 잘하니 믿을 수가 없다.
- 8월 26일. 원 수사가 왔다. 얼마 뒤에 우수사, 정 수사도 모두 모였다. 흥양(배흥립)이 오므로 막걸리를 대접했는데 원 수사는 술을 먹겠다고 하므로 조금 주었더니 잔뜩 취해서 망발을 하는 것이었다. 우스웠다.
- 8월 30일. 원 수사가 와서 영등(永登)으로 가자고 독촉한다. 그가 거느린 25척의 배는 모두 내어 보내고 다만 7척, 8척을 가지고 이런 말을 하니 그 마음 쓰고 일 처리하는 것이 모두 이런 식이다.[37]
- 1594년
- 2월 11일. 식후에 활터로 올라가니 경상수사와 우수사 조방장도 왔는데 같이 술에 취해 있었다.
- 8월 17일. 원수(권율)가 오정에 사천에 이르러 군관을 보내어 이야기하자고 했다. 그래서 곤양의 말을 타고 원수가 머물고 있는 사천현감이 맞아주는 곳으로 나아갔다. 교서에 숙배한 뒤에 공사 간의 예를 마치고, 그대로 함께 이야기하니 오해가 많이 풀리는 빛이다. (권율이) 원균수사를 몹시 책망하니, 원 수사는 머리를 들지 못하였다. 우습다.
- 8월 18일. 식사를 한 뒤에 원수가 청하므로 나아가 이야기했다. 또 조촐한 술잔치를 벌였는데 잔뜩 취해서 아뢰고 돌아왔다. 경상수사 원균은 취해 일어나지도 못하고 드러누워 오지 않았다.
- 10월 17일. 어사가 와서 조용히 이야기하는데 원 수사의 속이고 무고하는 말들을 많이 이야기하였다. 참으로 해괴한 노릇이다.
- 1595년
- 2월 27일. 원균이 포구에서 수사 배설(裵楔)과 교대하려고 여기에 이르렀다. 교서에 숙배하라고 했더니 불평하는 빛이 많더라고 한다. 두세 번 타일러 억지로 행하게 했다고 하니 너무도 무식한 것이 우습기도 하다.
- 1597년
- 4월 27일. 일찍 떠나 송치[38] 밑에 이르니 (중략) 저녁에 부사[39]가 와서 보았다. 정사준(鄭思俊)도 와서 원공의 망령된 짓을 많이 말하였다.
- 4월 30일. (전략) 병사 이복남이 식전에 와서 보며 원공의 일을 많이 이야기하였다.
- 5월 2일.[40] 진흥국(陳興國)이 좌수영으로부터 와서 눈물을 뿌리면서 원의 일을 이야기하였다.[41]
- 5월 5일. 늦게 충청우후 원유남(元裕男)이 한산에서 와서 원의 못된 짓을 많이 전하고 또 도(道)와 진(陣)에 속한 진중의 장졸들이 모두 다 (원균을) 배반하므로 앞으로 일이 어찌 될지 알 수 없다고 하였다.
- 5월 6일. (전략) 정원명이 한산에서 돌아와서 흉측한 자(兇人)의 못된 짓을 많이 전하고 부찰사가 여수로 나와서 병으로 조리하고 있다고 전하였다.
- 5월 7일. (전략) 송대기, 유몽길이 와서 보았다. 서산 군수 안괄(安适)도 한산에 와서 흉측한 자(兇公)의 일을 많이 전하였다.
- 5월 8일. (전략)[42] 이경신(李敬信)이 한산에서 와서 원흉(元兇)의 일에 대해 많이 이야기하였다. 또 말하기를 그가 데리고 온 서리(書吏)에게 육지로 가서 곡식을 사오라며 내보내 놓고는 그의 처를 겁탈하려고 하자 그 여자가 악을 쓰며 듣지 않고 밖으로 뛰쳐나가 고함을 질렀다고 하였다.[43] (중략) 원이 온갖 계략을 다 써서 나를 모함하려 하니 이 역시 운수 탓인가. 그가 바치는 뇌물 짐이 서울로 가는 길을 연달아 잇고 있으면서도 날이 갈수록 나를 헐뜯고 있으니 그저 때를 잘못 만난 것이 한스러울 따름이다.
- 5월 11일. 맑다. 전 광양 현감 김성(金惺)이 체찰사의 군관을 데리고 살대 구할 일로 순천에 왔다가 와서 보았다. 소문을 많이 전하는데, 그 소문이란 모두 흉측한 자의 일이다. (후략)
- 5월 13일. (전략) 지난 밤 부사가 말하기를 "체찰사가 보낸 편지에 영공(令公)에 대한 일을 많이 탄식하더라"고 하였다. (후략)
- 5월 28일. 늦게 출발하여 하동(河東)에 이르니 현감[44]이 서로 만나보게 된 것을 반가워하면서 성 안의 별사(別舍)로 맞아들여 간절한 정을 베풀어 주었다. 그리고 원이 미친 짓을 많이 한다고 말했다.
- 6월 19일. 새벽닭이 세 번 울 때 문을 나서서 원수진에 이르니 원수와 황 종사관이 나와 앉아 있었다. 원수가 내게 원균의 일을 말하기를 "통제사의 일은 그 흉측함을 다 말할 수가 없다. 안골포와 가덕의 적을 모조리 무찌른 뒤에 수군이 나아가 토벌해야 한다고 하니 그게 무슨 심보인가. 질질 끌면서 나가지 않으려는 생각에 불과하기 때문에 사천으로 가서 독촉하겠다"는 것이었다. (후략)[45]
- 6월 17일. (중략) 휘하의 여러 장수 중 다수가 다른 마음을 품은 사실과, 통제사가 장수들과 더불어 의논하지 않는 상황으로 볼 때 일이 잘못된 것을 알 수 있다.
- 7월 7일. 오늘 칠석(七夕)을 맞으니 슬프고 그리움을 어찌 다 말하랴. 꿈에 원공과 만났다. 내가 원공의 윗자리에 앉아 밥상을 받는데 원공이 기쁜 기색을 띠는 것 같았다. 무슨 징조인지 모르겠다. 박영남(朴永男)이 한산도로부터 왔는데 그 주장[46]이 실책과 과오로 죄를 받기 위해 원수에게 붙들려갔다고 하였다.[47]
- 7월 18일. 정미, 맑다. 새벽에 이덕필과 변홍달이 와서 전하길 "16일 새벽에 수군이 대패했습니다. 통제사 원균과 전라 우수사 이억기와 충청 수사 최호와 뭇 장수들이 다수 살해당했습니다."라고 하였다. 통곡을 이기지 못했다.
4.2. 실록
이제 실록의 기록을 보자.- 원균의 등급에 대해 의논하다. 선조 163권, 36년(1603년 계묘 / 명 만력(萬曆) 31년) 6월 26일(신해) 2번째 기사
- 전라 좌수사 원균이 수륙 양군의 동시 출병을 청하다. 선조 87권, 30년(1597년 정유 / 명 만력(萬曆) 25년) 4월 19일(기묘) 5번째 기사.[48]
- 선전관 김식이 한산의 사정을 탐지하고 돌아와서 보고하다. 선조 90권, 30년(1597년 정유 / 명 만력(萬曆) 25년) 7월 22일(신해) 2번째 기사
- 원균이 지휘한 수군의 패배에 대한 대책을 비변사 당상들과 논의하다. 선조 90권, 30년(1597년 정유 / 명 만력(萬曆) 25년) 7월 22일(신해) 3번째 기사
- 선조실록 권82 선조 29월 기해(1596년 11월 9일)기사에는 이런 이야기도 나온다. 윤근수가 상소를 올린 회의에서 선조가 "원균은 어떤 사람인가?" 하고 물으니 류성룡은 "원균은 용감히 싸우는 것은 장점이나 지친 군졸을 위로하는 법을 모릅니다. 이런 일을 할 줄 아는 다른 사람이 있다면 (원균을 제하고 그를) 써야 합니다"라고 했고 정탁은 "수전이 그의 장기이니 이제 그 단점을 버리고 장점을 쓰는 것이 좋겠습니다."라고 했다. 그러자 류성룡이 "원균이 힘껏 싸운다는 것은 다 아는 바이나 영남의 수군 중에는 원망하고 배반하는 자가 많으니 원균에게 맡길 수 없는 것은 분명합니다."라고 답했다. 이어 이원익이 "올라온 뒤에 들으니 원균이 이순신에게 분한 말을 매우 많이 하였다 합니다. 이순신은 결코 한산도에서 옮길 수 없으니 옮기면 일마다 틀어질 것입니다"라고 전하자 선조는 "원군을 청해 수전한 것은 원균에게 공이 많고 이순신은 따라간 것이라 하며 이의 공이 원균보다 나으나 공을 이룬 것은 실로 원균에게서 비롯되었다고 한다"고 하였다. 이원익이 "원균은 당초 많이 패하였으나 이순신만은 패하지 않았고 공이 있었으므로 다투는 시초가 여기서 일어납니다."라고 했다.
사헌부가 아뢰기를, “원균은 사람됨이 범람하고 게다가 탐욕스럽고 포악하기까지 합니다.
또 무리한 형벌을 행하여 잔혹한 일을 자행하여 죽는 자가 많고 앓다가 죽는 이도 또한 많아서 원망하고 울부짖는 소리가 온 도(충청도)에 가득합니다.
이와 같은 사람은 통렬히 다스리지 않을 수 없으니 파직하고 기용치 마시옵소서.”
선조 "원균의 사람됨은 범람하지 않다. 이런 시기에 명장을 이처럼 해서는 안 된다. 윤허하지 않는다. 나머지는 아뢴 대로 하라."
선조실록 1595년 8월 15일
또 무리한 형벌을 행하여 잔혹한 일을 자행하여 죽는 자가 많고 앓다가 죽는 이도 또한 많아서 원망하고 울부짖는 소리가 온 도(충청도)에 가득합니다.
이와 같은 사람은 통렬히 다스리지 않을 수 없으니 파직하고 기용치 마시옵소서.”
선조 "원균의 사람됨은 범람하지 않다. 이런 시기에 명장을 이처럼 해서는 안 된다. 윤허하지 않는다. 나머지는 아뢴 대로 하라."
선조실록 1595년 8월 15일
사헌부가 원균을 파직하고 서용하지 말 것을 연달아 아뢰니, 상이 그렇게 할 수 없다고 답하였다.
선조 1595년 8월 16일
선조 1595년 8월 16일
사헌부가 원균의 일을 연달아 아뢰고, 또 아뢰기를,
(....)
선조: 원균의 일은 따를 수 없다.
선조 1595년 8월 17일
(....)
선조: 원균의 일은 따를 수 없다.
선조 1595년 8월 17일
사헌부가 원균·이여온의 일로 계속 아뢰니, 답하였다.
선조: 오늘날의 장수로서는 원균이 으뜸이다.
선조 1595년 8월 18일
선조: 오늘날의 장수로서는 원균이 으뜸이다.
선조 1595년 8월 18일
원균을 추고하고 최덕순의 종사관 칭호를 없애소서.
선조: 병사는 추고할 수 없다. 칭호를 없애는 일은 아뢴 대로 하라.
선조 1596년 1월 21일
선조: 병사는 추고할 수 없다. 칭호를 없애는 일은 아뢴 대로 하라.
선조 1596년 1월 21일
이원익이 아뢰기를, "원균은 전공이 있기 때문에 인정하는 것이지 그렇지 않다면 결단코 기용해서는 안 되는 인물입니다." 하고, 김순명이 아뢰기를, "충청도(忠淸道)의 인심이 대부분 불편하게 여긴다고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마음은 순박한데 고집이 세기 때문이다."
하니, 원익이 아뢰기를, "원균에게는 군사를 미리 주어서는 안 되고, 전투에 임해서 군사를 주어 돌격전을 하게 해야 합니다. 평상시에는 군사를 거느리게 하면 반드시 원망하고 배반하는 자들이 많을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전일에 원균을 탐오하다 하여 대론(臺論)이 있었다. 원균은 지극히 청렴한데 탐오하다고 하는 까닭은 무엇인가?"
하니, 김수(金睟)가 아뢰기를, "전에 조산 만호(造山萬戶)로 있었을 때는 어사(御史) 성낙(成洛)이 장계하여 포장(褒奬)하였습니다."
하고, 원익이 아뢰기를, "원균이 어찌 지극히 청렴하기까지야 하겠습니까."
하고, 조인득(趙仁得)이 아뢰기를, "소신이 일찍이 종성(鍾城)에서 그를 보니, 비록 만군(萬軍)이 앞에 있다 하더라도 횡돌(橫突)하려는 의지가 있었고, 행군(行軍)도 매우 박실(朴實)하였습니다. 탐탁(貪濁)한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와 같은 장수는 많이 얻을 수 없다." 하니, 원익이 아뢰기를, "이후로 어떻게 될 지는 모르겠습니다."
선조실록 81권, 선조 29년 10월 21일 갑신 3번째기사#
상이 이르기를, "마음은 순박한데 고집이 세기 때문이다."
하니, 원익이 아뢰기를, "원균에게는 군사를 미리 주어서는 안 되고, 전투에 임해서 군사를 주어 돌격전을 하게 해야 합니다. 평상시에는 군사를 거느리게 하면 반드시 원망하고 배반하는 자들이 많을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전일에 원균을 탐오하다 하여 대론(臺論)이 있었다. 원균은 지극히 청렴한데 탐오하다고 하는 까닭은 무엇인가?"
하니, 김수(金睟)가 아뢰기를, "전에 조산 만호(造山萬戶)로 있었을 때는 어사(御史) 성낙(成洛)이 장계하여 포장(褒奬)하였습니다."
하고, 원익이 아뢰기를, "원균이 어찌 지극히 청렴하기까지야 하겠습니까."
하고, 조인득(趙仁得)이 아뢰기를, "소신이 일찍이 종성(鍾城)에서 그를 보니, 비록 만군(萬軍)이 앞에 있다 하더라도 횡돌(橫突)하려는 의지가 있었고, 행군(行軍)도 매우 박실(朴實)하였습니다. 탐탁(貪濁)한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와 같은 장수는 많이 얻을 수 없다." 하니, 원익이 아뢰기를, "이후로 어떻게 될 지는 모르겠습니다."
선조실록 81권, 선조 29년 10월 21일 갑신 3번째기사#
이후 이원익의 예측은 정확히 들어 맞았고 이순신이 선조와 원균의 모함으로 파직당하고 처형당할 위기에 처하자 정탁, 권율 등과 같이 이순신을 구명한다. 이 때문에 후 인조 시기에 와서도 이원익은 원균을 박하게 평가한다.[49]
이 외에도 해당 홈페이지에서 원균으로 검색 후 선조실록 & 선조수정실록을 클릭하면, 무수히 많은 선조의 사랑과 대신들의 디스를 볼 수 있다. 심지어 실록을 기록하는 사관도 악평을 남겨놓은 것을 볼 수 있다.
사신은 논한다. 한산의 패배에 대하여 원균은 책형(磔刑)을 받아야 하고 다른 장졸(將卒)들은 모두 죄가 없다. 왜냐하면 원균이라는 사람은 원래 거칠고 사나운 하나의 무지한 위인으로서 당초 이순신(李舜臣)과 공로 다툼을 하면서 백방으로 상대를 모함하여 결국 이순신을 몰아내고 자신이 그 자리에 앉았기 때문이다. 겉으로는 일격에 적을 섬멸할 듯 큰소리를 쳤으나, 지혜가 고갈되어 군사가 패하자 배를 버리고 뭍으로 올라와 사졸들이 모두 어육(魚肉)이 되게 만들었으니, 그때 그 죄를 누가 책임져야 할 것인가. 한산에서 한 번 패하자 뒤이어 호남(湖南)이 함몰되었고, 호남이 함몰되고서는 나랏일이 다시 어찌할 수 없게 되어버렸다. 시사를 목도하건대 가슴이 찢어지고 뼈가 녹으려 한다.
선조실록99권, 선조 31년 4월 2일 병진 2/6 기사
선조실록99권, 선조 31년 4월 2일 병진 2/6 기사
4.3. 난중잡록
- 원균은 체구가 비대하고 식사에 밥 한 말, 생선 5마리, 닭이나 꿩을 3마리 ~ 4마리씩을 먹으며 평소에 배가 무거워 제대로 걷지 못한다.
- 원균이 권율에게 불려가 곤장을 맞고 임금을 버린 놈이라며 꾸짖음을 당했다.
4.4. 달천몽유록[50]
- 원균은 배가 볼록하고 입은 비뚤어지고 얼굴빛은 흙빛이다.
5. 대중매체
원균옹호론이 일어났다가 가라앉을 때까지도 원균의 시기와 졸전은 반박하기 힘든 사실이었기 때문에 창작물에서도 대체로 원균은 이순신을 시기하고 모함하는 악역으로 묘사된다. 다만 원균 옹호론이 사그라든 후에도 원균을 현실보다 긍정적이게 묘사하는 작품이 왕왕 있는데, 변호를 하자면 사극은 어디까지나 관객의 흥미를 유도하기 위해 사실을 기반으로 한 허구의 작품이며 각색이 들어갈 수밖에 없다. 물론 그 각색이 아예 사실과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면 각색이 너무 심하다고 비판을 받겠지만, 오로지 사실만 반영하여 원균이라는 캐릭터를 만들겠다고 사서를 아무리 뒤져 봐도 이 인간의 기록이 이순신 모함하고, 부패하고, 민간인 학살하고 졸전한 것밖에 나오지 않기 때문에 평면적인 악역으로 전락하고[51], 이 정도로 뻔한 악역을 가지고 맛깔나는 스토리를 쓰기란 꽤 힘들다. 임진왜란을 다루는 사극이면 결국 원균을 공대 내부의 적같은 포지션으로 비중 있게 그려야 하기 때문에 요즘은 주로 사서에 적히지 않은 원균의 내면 묘사에 비중을 두어 '자신이 이순신, 권율보다 그릇이 작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시기와 질투를 이기지 못하고 모함과 무리한 군사 운용을 거듭한 끝에 조선 수군과 함께 파멸하는 악역 캐릭터' 같은 식으로 캐릭터에 입체감을 주는 편이다.- 1978년 영화 <난중일기>에서는 배우 최성호가 연기했다.
- 1985년 MBC 드라마 <조선왕조 오백년> 임진왜란 편에서는 배우 신충식[52]이 연기했다. 뭐든지 신중하고 철저한 사전 준비와 검토를 거치는 이순신과는 달리 성격이 엄청 급한 인물로 묘사된다. 원균옹호론이 반영되어 원균이 단독으로 첫 승리를 거두었다거나 당파 전술을 사용하였다는 등의 내용이 나오며 이순신보다 지략은 떨어지지만 용맹한 장수라는 소위 원균맹장론에 가까운 묘사다. 하지만 극이 진행되면서 이순신에 대한 열등감을 보이더니 결국 칠천량 해전에서 무모한 전투로 다 말아먹게 된다.— 삼도수군통제사가 된 직후의 이순신에게 내뱉은 대사
- 1980년대에 나온 삼성당 출판사의 위인전 만화 <이순신>에서는 무능하게 등장한다. 작중에서도 공을 세우는 데만 미쳐서 도움되는 게 하나도 없었다고 대차게 깠다. 최후도 칠전량 해전에서 기생 데리고 술이나 마셔서 부장들이 원균을 한심한 놈 보듯이 보고 수군 병사들마저 "이순신 장군이 있을 땐 이러지 않았는데. 한심하다, 한심해."라며 깐다. 결국 해전에서 패하자 육지로 달아났으나 왜장의 칼에 베여 죽는다.
- 1981년 한국 극장 애니메이션 <구국의 태양, 성웅 이순신>에서는 이순신에게 패해 죽은 왜군의 시체를 끌어올리고는 자기가 해치웠다고 조정에 올리라고 하는 찌질한 모습을 자주 보인다. 칠전량 해전에서 패해 뭍으로 올라가다가 총에 맞아 죽으며 조선 수군을 망친 천하의 무능한 장수라고 내레이션으로 대차게 깠다.
- 1992년 KBS 다큐멘터리물 <역사에의 초대 임진왜란>에서도 찌질함은 여전한데 왜군이 쳐들어오자마자 싸워보지도 않고 가덕진에 불을 지르고 도망친다. 이후 이순신의 등 뒤에 숨어있다가 이순신이 삼도 수군 통제사에서 파직당하자 그 자리를 꿰찼다. 하지만 아무 것도 안 하고 세월만 죽이고 있자 분노한 권율에게 곤장을 맞고 출전하는데 거기서도 제대로 작전 지휘는 하지 않고 잠을 자고 있다. 왜구가 불화살로 원균의 함대를 공격하자 부장이 "장군, 배 한 척에 불이 났사옵니다"라고 말하며 원균을 깨웠다. 이에 원균은 갈팡질팡 하다가 배를 버리고 육지로 도망쳤다. 그런데 거기서 추격하는 왜병을 2명까지 죽이고, 3번째 왜병의 손에 사살당하는 대우를 받는다.
- 1993년 오세영의 소설 <베니스의 개성상인>에서 주인공 유승업이 왜군에 의해 가족을 모두 잃은 후 분의 복수군으로 칠천량 해전에 참전한 후 일본에 포로로 끌려간다. 그런데 여기서 대놓고 '이순신은 지장이요 덕장이면 원균은 용장이요 맹장이다'라고 적어 영구까임권을 자초했다.
- 1997년 한국 극장 애니메이션 <난중일기>에서는 성우 문관일이 연기했다. 능력과 인성 모두 명장으로 묘사되는 이순신과 능력&인성 모두 정말 비교되는 무능하고 찌질한 장수로 나온다. 옥포 해전에서 이순신이 승리하고 이순신 덕분에 목숨을 건진 다음 "이만한 병력과 무기와 병선만 있었어도 왜놈들을 그냥 두지 않았을 거"라며 징징거리고 옥포 해전에서 이순신에게 패해 죽은 왜군들의 시체를 건져 차지하는 일에만 열을 올리며 승리를 모두 자기 공으로 돌리려 한다. 이순신을 질투하여 모함하여 쫓아내고 벌 받게 만들고 삼도수군통제사 자리를 차지한 뒤에는 "적이 파도가 매우 거센날 기습할 줄 모를 테니 그걸 이용해 승리할 것"을 장담하면서 "내가 이순신만 못할 거 같냐"고 큰소리를 치며 이순신에 대한 열등감에 찌든 모습을 보여준다. 그렇게 풍랑이 몰아치는 날 무리하게 칠천량으로 진격했다가 이순신이 6년간 키워놓은 모든 함대를 전멸시킨다. 최후에도 "병선이 조금만 더 있었어도 자기도 이순신처럼 이길 수 있었다"며 끝까지 남의 탓과 핑계만 늘어대고 육지로 도망치다가 앞에는 다테 마사무네와 병사들에게 포위되어 결국 그들 손에 비참하게 죽는다.
- 1998년 이우혁의 소설 <왜란종결자>에서는 마찬가지로 막장 행각인데 칠천량 해전에서 패하고 도망치던 중에 왜병의 손에 죽는다. 죽음에 이르러서야 자신이 마수한테 씌였다고 한탄한다. 하지만 "내가 널 홀렸다고? 천만에. 너 자신이 나한테 혼을 팔았던 거야."라고 비웃는 마수의 모습은 나름대로 명장면이다. 그제서야 이순신에게 진심으로 사과하지만 이미 때는 늦어 있었다. 유언은 "이공... 미안하오! 죽어서도 그대를 뵐 낯이...".
2003년 SBS 시트콤 <똑바로 살아라>에서는 배우 노주현이 극중극인 사극 <난중일기>에서 원균 역을 맡는데 "악역을 재해석하면 인기 오른다"[53]는 말에 혹해서[54] 맡았더니 분장도 사진에 나오는 것과 같이 악의적으로 희화화시킨 데다가 임진왜란 초반에 겁에 질려 경상 우수군을 몽땅 날려버리고 이후 이순신을 몰아내기 위해 모함하는 모습이 적나라하게 나오는 등 실제 원균의 모습 그대로 나왔다. 어찌저찌 귀양을 가는데 귀양지에서 기생을 끼고 술판을 벌였다. 결국 이런 행보에 격분한 노주현이 "세상에 귀양가서 기생끼고 술판을 벌이는 작자가 어디 있냐?"며[55] 작가랑 대판 싸웠고 그만 "이럴 거면 원균에게 사약을 내려라!"라고 윽박지르는 실수를 저지르게 된다. 왜 이게 실수였냐면 원균 배역을 맡은 덕택에 CF 제의도 들어오고 한참 잘나갈 때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작가는 대판 싸운 이후 노주현이 사약을 내리라고 한 대로 시나리오 방향을 잡았으며 각종 매스컴에서는 '원균에게 사약을'이라고 도배된다. 노주현은 뒤늦게 작가와 화해를 하려 했으나 무산되었고 촬영장에서 사약을 엎어버리는데 뒤에 여차저차해서 해결하고 다시 출연한다는 대사가 나온다. <난중일기>에서 이순신 역은 배우 김형일[56], 선조 역은 성우 황일청이[57] 연기했다. 노주현은 이런 원균 연기를 토대로 <불멸의 이순신>에서 원균 역할을 부탁했다고 한다.
- 2012년 단편영화 <삼도수군통제사>에서도 주인공으로 등장했는데 특유의 찌질함이 잘 묘사되었다.
- 2014년 김경진의 소설 <임진왜란>에서는 원균이 "다 이순신 때문이다!" 하는데 작가가 "사관은 논한다"에서 "다 니 때문이다!"라며 대차게 까버린다.
- 2014년 MBC라디오 배한성의 고전열전 <난중일기>에서는 안장혁이 연기했다. 역사 그대로의 찌질한 모습을 보여주며 당연히 작중 내내 까인다. 해설자인 배한성이 사료에 나와 있는 원균의 막장 짓거리들을 지적하며 그를 비난하자 "당대 기록은 정확하지 않아서 믿을게 못된다."며 그것들은 전부 자신을 음해하려는 이순신 빠들의 모함이라고 주장한다. 헌데 그 직후 자신이 시전부락 전투에 참가해 공을 세웠다는 기록이 언급되자 "그건 믿어도 됨. 기록은 정확하거든!"하며 이중잣대를 보여준다. 사람들이 이순신만 옹호해 주는 건 이순신이 일기를 썼기 때문이라며 자기도 일기를 쓸 걸 그랬다고 한탄한다. 또한 칠천량 해전 직전 권율이 보내온 메시지를 삭제했다가 이를 눈치챈 권율에게 지적당하자 아예 무시해버렸고, 결국 열받은 권율에게 곤장을 얻어맞는다. 맞기 전에도 이경규 씨가 어디 숨어있으시나?라고 관찰하는 등 자신을 속인다고 흥분하는 대목이 압권이다.
2014년 일본 웹게임 <시로 크로니클 조커>에도 등장한다. 어째서인지 수노궁을 사용하는 미청년이다. 이순신과 함께 일본군과 싸운 맹장이며 전후 이순신을 모함해 정치적으로 타격을 입혔다고 설명되어 있다.[60] 흡사 한국에서 무다구치 렌야나 도미나가 교지를 독립투사라고 해주는 격과 비슷하다. 물론 무다구치와 도미나가는 원균처럼 똥별이었지만 적어도 민간인 학살만은 하지 않아서 저 둘을 원균과 엮는 건 억울할지도 모른다.
2015년 KBS 드라마 <징비록>에서는 배우 이일재[61]가 연기했다. 6화에서 이일에 의해 이름만 언급되는데 디스당한다. 21화에서부터 정식으로 등장했지만 팀킬과 안하무인격인 태도가 하급자들에게 언급되면서 결국에는 "빼고 출정하자"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이순신 역시 참고 있다가 "언젠가는 엄중히 경고하겠다"고 말할 뿐.
- 2017년 슈타인호프의 웹소설 <명군이 되어보세!>에서는 여진족을 토벌할 때 포로들을 멋대로 참수해서 수급을 베었다고 거짓 보고한 게 들켜서 백의종군 당하고, 이후 일본에 하성군과 임해군을 볼모로 보낼 때 호위무관 명목으로 내보낸다. 여기서 오다 노부나가의 꼬임에 넘어가서 일본군 장수가 된다. 후에 히데요시에 의해 일기도주가 되었는데, 해안방비를 소홀히하면서 주민 중 탈주자가 속출하고 있다. 조선에 온 귀순일본인의 80%가 일기도주민이라고 한다. 악역은 맞지만 개그 캐릭터인 데다 묘하게 인간적인 부분을 자주 드러내서 독자들은 농담삼아 '원균 미화물'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조선이 보복원정을 벌이자, 일기도에서 교묘히 도주했고 이후에 원균으로 보이는 시신이 확인되어, 조선 측은 그를 사망한 것으로 공식 결론내린다. 물론 실제론 살아있었고(동생 원연에게 발각되나 원연이 눈감아주었다), 보복원정에 참여한 여진족에게 잡혔다가 노비로 대남도에 가게 된다. 대남도에서 코끼리 대변을 처리하는 신세로 살다가 68세의 나이로 쓸쓸히 죽었다. 아들 원사웅이 바른 처신으로 능력을 인정받아 조선의 북미 식민지 덕진성(시애틀) 성주가 되고 그 자손이 미주 최고의 명가 미주 원씨로 번창하게 된 것에 비하면 너무나도 대비되는 모습. 원균(명군이 되어보세!) 항목 참조.
- 2018년 김경록의 웹소설 <더 퍼거토리>에서는 주인공 왕현을 살해하고자 하는 황제의 측근으로 등장한다. 관직은 중서령. 왕현의 아버지인 전 황제를 독을 써서 살해했고, 이를 이용해 황제를 세운 공신. 결국 이것이 알려지며 황제가 폐위된 이후, 계란에 맞으면서 재판정에 서는 굴욕을 겪는다. 이후 모든 죄를 폐제에게 뒤집어 씌우고 자신은 수족 역할만 했다고 주장하면서 교수형에 처해진다.
- 2019년 차돌박E의 웹소설 <근육조선>에서는 작가가 역사상 여러 간신이나 문제아들을 개과천선하면서 역사가 바뀌게 했지만, 원균만큼은 꼴보기 싫다는 이유로 허무하게 죽게 한다. 사인이 바로 다음아닌 석쇠공 저글링 실수로 비롯된 뇌진탕.[62]
- 2020년 코락스의 웹소설 <죽지 않는 왕-무왕 단종>에서는 조선에서 잘리고 시마즈의 부하가 된다. 굉장한 말솜씨로 능력자인 것처럼 포장하지만 실제로는 역사대로 일개 도적 수준. 이순신에게 항복했으나 그를 생리적으로 혐오하는 이순신에게 시마즈 성에서 내습하라는 협박을 받고 시마즈 성으로 일본 포로들과 돌아간다. 시마즈 성 함락 직전에 시마즈를 배신하고 총으로 시마즈를 겨누었으나 화약이 불발되었고, 결국 시마즈에게 목숨을 구걸하다가 두동강나고 만다.
- 2020년 마늘맛스낵의 웹소설 <고려, 신대륙에 떨어지다>에서는 조선의 통제사로 등장한다. 임금이 지키고 있으라는 명령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전열함을 가진 해적 이근수에게 백오십척에 달하는 배를 꼬라박은 끝에 참패하고 포격에 의해 전사한다. 남은 배는 동생 원전이 수습하여 도원수 이윤신에게 인계한다.
- 2021년 간절히의 웹소설 <전생 첫날 수도를 버리다>에서는 이순신의 분노를 사는 부하 경상우수사로 등장한다. 칠천량 해전이 사라지면서 무난하게 공신작위를 받았지만 그를 경계하는 광해가 선조를 축출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군에서 해임된 것으로 보인다. 덕분에 선왕의 충신이라 군에서 밀려난 조선 최고의 수군 전문가라는 명성을 얻게 된다. 네덜란드와의 해전에서 조선이 패배할 것이라 장담하는 바람에 경제공황을 불러왔다. 그러나 이순신의 승전 이후 입장을 바꿔버려 손해를 본 송상을 벙찌게 만든다. 유언비어를 퍼뜨린 꼴이지만 70이 넘은 나이에 살아있었다는 것에 광해가 놀랐을 뿐 처벌하지 않기로 하면서 웹소설 중 몇 안 되게 자연사하는 데 성공한다.
- 이순신 3부작
- 2022년 개봉한 영화 <한산: 용의 출현>에서는 손현주가 연기했다. 극중 캐릭터가 방어적인 전략가(?)로 소개된 데다 하필 또 연기력이 출중한 손현주가 배역을 맡다보니 대단한 미스캐스팅에 더해서 배우 보정을 우려하는 의견이 있었다. 그러나 실제 영화에서는 겁쟁이 주제에 입만 살은 꼰대 졸장에 학익진도 제대로 익히지 못하고 사격통제도 제대로 하지 못해 화약이 일찍 소진되어버려 원균 담당 영역으로 와키자카군이 돌파할 위기를 초래하는 등 큰 트롤링까지 하고 부하 장수들에게도 신뢰를 얻지 못하는 등 졸장의 모습으로 올바르게 묘사되어, 캐릭터 소개는 일종의 페이크였다. 오히려 배우낭비가 아니라 손현주의 연기력 덕에 원균의 찌질한 면모가 제대로 묘사될 수 있었던 셈.[63] 이 인물이 방어에 능한 전략가였으면 이순신이 본격적으로 활약하기 전까지 왜군이 그렇게 설쳐댈 수 있었을 리가 없다. 다만 일부 시선을 의식해서인지 조선인 민간인의 목을 왜군 수급으로 위장시키는 등의 수많은 악행들은 생략되었다.
- 한산의 후속작인 <노량: 죽음의 바다>에서도 손현주의 원균이 특별출연으로 등장한다. 칠천량에서 원균이 도망가면서 지휘 체계가 무너졌다는 언급이 나오며, 이순신이 전사자 명단을 보고 전우들을 회상하는 장면에서 등장한다.
- 2023년 일본 만화 노부나가를 죽인 남자 ~일륜의 데마르카시온~에서는 원역사대로 이순신은 애국심 넘치는 일세의 영웅으로, 원균은 겁쟁이 졸장부로 잘 묘사되었다.#
- 에버소울 기원의 탑 순이 스토리에서는 무리하게 출정했다가 역사대로 칠천량 해전에서 일본 수군에게 대패한 이후 도망치는 것으로 나온다. 원균 생존설을 의식한 건지는 불명이지만 사망 묘사는 나오지 않았다.
- 엠파이어즈 근대사회의 여명[64]에서는 장군이 아니라 동인의 우두머리이자 재상으로 나온다. 원래역사와 다르게 아예 나라를 배신한 내부의 적으로 등장한다. 비밀리에 만주족을 포섭하여 조선을 침략하고, 군대를 몰래해산하여 신립장군이 죽게 하였다. 일본과 비밀리에 협상을 하는데 내용이 일본에 한강 이남의 땅 전부를 바치고[65] 중국에게도 조공을 계속 바치겠다는 매국노로 등장한다. 결국 류성룡에게 들켜서 체포된다.
- 졸 임진록에서는 실제 역사에서 똥별에 이순신과 갈등하는 사이인 것과 달리 작중 유일한 개념인이며 역할은 이순신이 싸지른 똥 뒤처리 역할을 한다.
- 노부나가를 죽인 남자-일륜의 데마르카시온편에서도 출현한다. 무능한 돼지에 이래저래 이순신에게 민폐만 끼치는 트롤러로 나온다.
6. 기타
- 2010년 1월, 평택시에서 그곳 출신의 위인들을 배경으로 하는 달력을 선보였는데 원균이 1월에 있다. 평택시 소개 페이지에다가는 평택의 역사 인물로 박문수, 조광조와 같이 원균을 박아놓았는데 하도 태클이 먹혔는지 지금은 페이지를 날려버리고 원효, 의상, 혜초 등을 비롯한 새로운 인물들을 집어넣고 간략한 설명만을 넣었는데 그 와중에도 꿋꿋이 원균을 집어넣으면서 ‘일심[66]으로 순국한 영웅 원릉군 원균’이라는 제목과 함께 임진왜란에서 수많은 승리를 거두고 칠천량 해전에서 분사했다고 적어놨다.
- 선조의 입장에서 보면 원균을 옹호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야만 자신이 한양을 버리고 몽진 간 걸 변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안 그래도 광해군이 분조를 꾸려 일본에 맞섰던 일로 인해 광해군의 인기가 아버지의 인기를 웃도는 상황이었는데, 마찬가지로 한산도 대첩을 앞두고 가덕도에 불을 지르고 도망간 원균을 옹호해야 자신의 몽진이 말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선조는 어이없게도 원균은 이순신에게 구조를 요청했으므로 공신이라 하며 본인도 명나라에 구조를 요청했으므로 공신이라는 논리를 내세워 임금의 자리를 유지했다. 한마디로 원균은 시대를 잘 타고난 덕에 국왕으로부터 엄청난 옹호를 받게 된 것이며, 이는 원균옹호론의 뿌리가 된다. 추가로 이 덕분에 원균을 칠천량 해전의 책임을 물어 처벌하려면 선조 임금부터 퇴위시켜야만 했다. 그야말로 국왕과 운명공동체가 되는 기막힌 행운아였던 셈이다. 이런 상황이 아니었더라면 원균이 이렇게까지 유명해지지도 않았을 것이다.
- 2011년 7월에는 옥포 해전이 원균이 총대장이고 이순신은 그저 원군에 지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정신나간 사람도 나타났다. 그것도 옥포 대첩 기념 사업회 추진 위원회 회장이라는 작자가 한 말. 파면 팔수록 개막장이라는 증거만 나오는데도 아직도 원균을 못 띄워서 안달인 사람들이 계속해서 나타나는 것이 신기할 따름.
- 원유철의 외모가 원균 영정과 매우 닮은 것을 보고 우스개소리로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말을 하는 경우가 있는데, 당대 그려진 원균의 영정은 전해지지 않고 현재의 원균 영정은 현대에 후손들의 외모를 참고해 복원한 것이므로 닮은 것이 당연하다.
- 원균을 선무 1등 공신에 봉하는 공신 교서는 현재 보물 제1133호로 지정되었다.[67] 참고로 이순신 공신 교서는 사람들의 무관심 속에 수십 년간 뒷세계를 떠돌다 2007년에 발견되었고 2008년 6월 27일 보물 제1564호로 지정되었다.[68]
- 이이화는 자신의 저서 한국사 이야기 11권 <조선과 일본의 7년 전쟁> 편에서 원균의 죽음을 묘사할 때 도망하다 죽었다고 분명히 옆에 명시해놓고 그 다음줄에 '최후만은 참으로 장군다웠다.'고 서술했다. 당시에는 육지로 도망가기는 했어도 싸우다가 죽었단 설이 대세이기는 했다. 원래 저 책이 옛날책이고 재야사학자의 한계 때문에 지금보면 오류가 많은 편이다.
- 조선판 무타구치 렌야라는 평가가 있다. 왜냐면 무타구치 렌야도 임팔 작전에서 일본군 병사를 무려 80% 정도 사상하게 만든 화려한 전과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무타구치 렌야는 전투에만 무능했지, 민간인 학살 등엔 전혀 개입 안 할 정도로 적어도 사람은 좋다 정도의 평가를 받을 정도니 원균과 무타구치 렌야를 비교하는 게 오히려 무타구치 렌야에게 모욕일 지경, 하지만 둘 다 자국의 병사를 많이 한큐에 죽게 만든 건 같기에, 원균이 죽은 후 죄책감에 시달려서 하늘에게 빌었고, 무타구치 렌야로 환생해서 조선의 독립에 기여해서 자신의 죗값을 치렀다는 드립이 유행한다.
- 일본 측에서는 자국 측 다이묘를 띄어주기 위해 맹장으로 띄우는 경향이 강하다. 주로 시마즈 요시히로 미화에 사용하는 듯하다. 오히려 실제 행적으로 보면 원균은 기무라 헤이타로와 더욱 근접하다고 볼 수 있는데, 기무라 헤이타로도 버마 방면군 사령관 부임 당시에 졸전을 거듭하다가 영국군이 근접하자 겁에 질려[70] 도주하면서 당시까지 버마에 남아 있던 아군 중 무려 7만 5천 명을 죽음으로 몰아넣고도[71] 뻔뻔하게 권력의 비호를 받고 육군 대장 자리에 오른 희대의 졸장이었지만, 그 기무라 헤이타로도 졸전의 이유가 최소한의 정상참작할 만한 이유가 있다는 것과[72] 자국민을 사살하여 전공을 과장하려는 시도는 하지 않았단 것만 봐도 원균이 어느 정도로 포악한 졸장이었는지 알 수 있다.[73]
- 전술에 대한 식견이 지나치게 부족해서, 왜 수군이 쳐들어오면 배를 자침시키고 도망치기가 일쑤였다. 원균이 학익진 훈련에서 자주 열외되었다고 하는데, 학익진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보면 정확하다. 수군으로 출전할 때마다 배를 버리는 일이 잦았고, 첫 출전부터 배를 버렸는데 한산도 대첩 역시 경상 우수사인 원균이 경상 우수영에 자기 배를 버리고 이순신의 등 뒤에 숨은 것에 불과하며, 특히 칠천량 해전에서는 (만취 상태였다는 것을 감안하더라도) 막다른 곳으로 몰리자 거북선을 포함한 조선 수군 전부를 내다 버리는 만행까지 저질렀다. 원균 맹장설이 지지받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가 바로 이것.(애초 맹장이라도 되었으면 임진왜란 발발 초 삼도수군 최강 전력에 전라좌, 우수영을 합한 것보다 더 많은 판옥선을 보유한 경상우수영군으로 고니시 유키나가의 1군을 해상에서 충분히 저지하거나 최소한 동래부가 제대로 작동하고 있던 제승방략체제하에 병력을 결집하여 항전할 수 있는 시간을 벌어주는 정도의 지연 작전은 충분히 했을 것이다.)[74]
- 의병장 조경남이 남긴 <난중잡록>[75]에 따르면 엄청난 대식가로 그의 한 끼 식단이라는 게 쌀 2말, 생선 20마리, 닭 4마리로 닭이 없으면 꿩고기를 먹었다고 한다. 백성들은 피죽도 못 먹고 굶어죽기 일쑤였던 상황에 장군이라는 인간이 이런 탐욕적인 행동만 했으니 백성들과 함께 왜군과 싸우던 조경남이 원균을 혐오할 만했다. 고도비만이라서 말을 탈 수가 없었다고 하며 이 문제 때문에 육군이 아니라 수군으로 배치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당시 경상도 장군인데 전라도 사람들도 이걸 알고 있었을 정도니 조선 8도에 고도비만이라고 소문이 났던 상황이었다. 그래서 당시부터 많은 사람이 원균의 이런 못난 모습을 조롱했으며 한 유생은 칠천량 패전 소식을 듣고 '원균이 나라를 버린 게 아니라 원균의 배때기가 원균을 버렸다.'는 시를 지어 고인 드립을 치기도 했다.[76]
- 알코올 중독으로 추정되는 기록도 많은데 이순신이나 김완 등 원균을 직접 목격한 사람들의 기록에서 원균이 수시로 술에 취해 있었다는 이야기가 자주 나온다. 특히 작전회의 같은 중요자리에서도 술을 달라고 징징대는 일이 많아 사람들의 비웃음을 샀고[77]. 특히 김완의 기록에 따르면 칠천량 해전에서 조선 수군이 전멸하는 과정에서 원균이 술에 취해 지휘를 엉망으로 하는 걸[78] 김완이 직접 목격했다고 하니[79] 알코올 중독이 심각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 3살 아래 둘째 동생인 원연은 아버지 및 형과 달리 선비로 살다가 전란이 터지자 의병을 모아 왜군을 격파하고 이후 현감이 되어 치적을 쌓았으며 정유재란 때 다시 군사를 모아 왜군과 맞서 싸우다 전사한 사람이다. 원연의 아들이자 원균의 조카인 원사립은 서천군수로 있다가 왜군을 막아냈다. 넷째 동생인 원전은 원균이 도망친 칠천량 해전에서도 도망치지 않고 끝까지 싸우다 전사한 장수였다. 원균의 아들 원사웅도 평범한 수준은 되는 무난한 장수였다. 그동안 세간에 많이 퍼져있고 위키백과 한국어판에까지 실렸던 '원균이 칠천량 전투에서 아들과 함께 전사했다.'는 설에 따르면원균의 핏덩이 손주를 당시 55세의 부인 윤씨가 길러 대를 간신히 이었다고 한다. 윤씨는 무려 96세까지 살아 홍주 땅에 묻혔으나 가세가 몰락해 시신을 거둘 이가 없었다. 집의 노비가 말년의 인조에게 알려 간신히 매장하였다. 그러나 이 간신히 대를 이은 증손자가 박세채 등 송시열의 제자들에게 새 행장을 부탁하자 영문도 모르던 이들이 "중과부적"으로 대표되는 왜곡된 행장을 지었다.
라는 거짓 주장이 있다. 사실은 아들 원사웅은 칠천량 전투에서 전사하지 않고 이후에 계속 벼슬을 했으며, 인조 때에는 이괄의 난을 평정하고 살아남은 공신들의 종묘 사직 기도 연명문인 <17공신 회맹문>에 보면 선무공신 원균의 장남이자 절충장군 전 지중추부사인 원사웅으로 기록에도 집안이 몰락하기는커녕 분명히 고위직을 지낸 것으로 나와 있다. 심지어 원주 원씨 족보에 기록된 걸 보면 원사웅은 자식까지 있다.
- 이순신의 업적이 해외에서도 널리 알려지기 시작함에 따라, 원균도 "세계 최악의 졸장" 이미지로서 역사에 관심이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나름 유명해지고 있는 중이다. 특히 외국의 한 유튜버가 제작한 임진왜란 관련 다큐멘터리에서 칠천량 해전을 다룬 편의 베스트 댓글 중 "Won' Gyun should have changed his name to 'Lost' Gyun'(원가놈[80]의 이름을 '진'균으로 바꿔야 해)"라는 명품 언어유희 댓글이 압권이다. 제작자마저도 이 의견에 크게 동의했는지, 아예 이 댓글을 고정시켜 놓았다. 그 전편에서 이순신이 잡혀가고 원균이 삼도수군통제사가 되는 장면에서는 "From the best admiral in human history to the worst admiral in human history.(인류 역사상 최고의 제독에서 인류 역사상 최악의 제독으로)"라는 댓글도 달렸을 정도.[81] 다만 그가 저지른 악행들과 취중 전투 지휘까지는 알려지지 않았고 그냥 무능한 장수 정도로만 알려진 상태다.
- 하지메 사토루라는 이름으로 일본 수군 최고의 명장이라는 낚시 밈도 있다. 조선독립군 스파이 모전구렴야 혹은 김렴야 드립과 같다.[82]
- 경상남도 거제시 하청면 칠천도에는 칠천량해전공원이 건립되어 있는데 칠천량 해전이 벌어진 곳으로 알려진 그곳이다. 평택에 있는 원균 기념관과는 다르게 원균의 패악과 역사를 잊으면 다시 되풀이된다는 사실을 알리기 위한 곳으로, 쉽게 이야기하면 원균을 부관참시하고 그의 실책을 박제하는 시설물이다.
- 의외로 페이트 세계관 내에서 한국 서번트가 나온다면 이라는 커뮤니티의 반응에서 이순신 보다 원균이 가능성이 높지 않느냐는 의견도 존재한다. 루리웹에서 이런 팬만화가 나온 적도 있다.
- 의외로 이순신에 대한 폄하(이길 수 있는 전투만 했다, 장비 빨이다 등)를 모두 반박해 줄 수 있는 산증인이기도 하다. 특히 외국에서 이순신을 평가할 때 함선의 차이와 화포의 화력으로 일본에게 상대 할만한 해상 전투인데 과대 평가 아니냐는 의견에 아이러니하게 원균의 칠천량 해전의 대패가 완벽하게 반박할 수 있는 자료로 활용된다.
- 조정에 조총 70자루를 바치자 선조가 기뻐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임진왜란 중에 원균이 세운 유일무이한 공이라고도 볼 수 있으나 문제는 원균이 보여준 행적 때문에 저 조총 70자루가 떳떳한 방법으로 얻은 건지는 의문이다.[83][84]
- 후대에는 원균과 관련된 시설물을 소개하는 사이트에서 별점 테러를 당하고 있다.# 후손들에게 실시간으로 별점 테러를 당하고 있다고 조롱하는 건 덤. 단, 칠천량해전공원은 원균을 부관참시하기 위한 시설물이라 예외.#
6.1. 막장인 인간성
원균은 무능한 것뿐만 아니라, 같은 나라의 민간인을 왜군으로 몰아 학살도 저질렀다[85]는 잔혹 행위 의혹까지 있는 등 인격마저 막장이었다고 한다.일본으로 잡혀간 여자들은 관백(關伯) 평수길(平秀吉)이 엄히 금지시켜 되돌려 보냈는데 수사(원균)가 적선을 쳐부순 날에 배에 가득 실려 있던 아이들과 여자들이 우리 나라 사람이라고 외쳤으나 듣고도 못 들은 척하고 모두 목을 쳤다고 한다. 이로써 송서(宋瑞)의 딸과 손녀도 우리 나라 사람 손에 죽은 것이 아니겠는가.
《정만록》
《정만록》
정만록에 따르면 한산도 해전 직후 이순신에게 위임받은 패잔병 처리 임무에 실패하자, 이를 만회하기 위해 일본에 잡혀갔다 돌아오던 조선인 여성과 어린 아이들을 모두 죽여 왜군의 목을 벤 것이라고 속였다고 한다. 다만 이따위 거짓말을 했다면 조정에서 원균에 대한 문책이 있어야 하지만, 그러한 기록은 없으니 사실이 아닐 수 있다는 의견도 있다. 아무리 군공을 조작하기 위해 거짓 전공을 보고하는 일이 난무했던 때라지만, 자국민 학살은 자칫하면 백성들이 "아오씨 우리 군사들도 우리 죽이네? 이딴 나라 필요없음" 하며 외면하거나 반란을 일으킬 수도 있기 때문. 다만 한국전쟁의 최덕신이 의도적으로 일으킨 학살극이나 나름 잘 나간 형 두어서 인간 말종짓 함에도 두둔된 백인엽을 생각하면 학살했을 가능성도 전혀 없지는 않다.
더욱이 난중일기에는 그가 남해안의 섬에 배 두척을 보내어 조선인 어부들의 목을 찾는 것을 이순신이 저지하고 돌려보냈다는 기록[86]과 거짓으로 왜군 노릇한 자를 목을 베어 바친 것을 바로잡은 장계를 올렸다는 기록[87]이 있다. 여기서 일부러 민간인을 왜적으로 둔갑시킨 것이 진실인지는 좀 더 확인이 필요하나, 수급을 구걸했다는 은봉전서의 기록까지 볼 때, 여러 기록에서 그가 수급에 목매다는 모습을 보여주었고, 최소 무리하게 민간인 시신에서 목을 거두거나 섣부른 처형을 했다는 진술이 공통적으로 발견되는데서 많은 이들이 그가 잔혹한 성정을 가졌음을 의심하는 데에는 충분하다.
'최소한 배신하거나 임무를 방기하고 도망치지는 않았다.'는 것이 예나 지금이나 일부 원균 옹호론자들의 논거 중 하나이고, 원균을 마구 조롱하고 비난하는 당시의 여론을 공정하게 기록한 <난중잡록>에서도 주석에서는 '당시에 겁에 질려 임무를 저버리고 도망쳐버린 놈들이 하고 많은데, 무능했어도 최소한 싸우다 죽은 원균을 마구 비난하는 건 과도한 것이 아니냐' '원균을 선무 원훈에 책정한 것은 왕법의 공정성을 보여주는 것이다'라고까지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이는 조선왕조실록과는 달리, 당시의 정권의 검열 하에서 선조의 관점에서 쓰였을 가능성도 있기 때문에 가려서 봐야 할 필요도 있다.
도망친 것은 제외하더라도, 원균은 무능하더라도 임무를 저버리지 않고 끝까지 용감하게 싸우다 죽었다기보다는, 자기가 판 무덤을 자기가 들어가게 되자, 궁지에 몰려서 자포자기하고 자살적인 행동을 한 것에 가깝다. 그것도 조선 수군의 전력을 저승길 동무 삼아서 말이다. 따라서 죽음으로 항전했다기보다 죽음으로 이적 행위를 하고 나라를 멸망의 위기에 빠뜨린 것에 가까운 행동에 근거를 둔 원균에 대한 그런 옹호론은, 결코 올바른 주장이 아니라고 볼 수 있다. 차라리 끌고 갔더라도 중간에 질 것 같다고 느껴졌을 때, "그냥 니들은 알아서 살아남아라"라는 무책임해보이지만 그나마 그가 내놓을 수 있을 만한 조치 중엔 가장 나을 조치라도 내렸다면, 수군이 그리 허망하게 궤멸되진 않았을 것이다. 칠천량 해전에서 이순신 장군이 그토록 키운 수군의 반수는 침몰하고, 반수는 도망쳤다. 차라리 저 명령을 내렸다면, 각자 적어도 이탈해도 죄는 되지 않는다고 생각할 수도 있고, 원균만 무능했지 그 아래는 죄다 이순신이라는 명장과 오랫동안 함께 일해 온 베테랑들이니, 그들은 살아남기 위한 가장 좋은 길을 찾았을 것이다.
만약 이 내용이 맞다면 원균은 실제로는 전사한 것이 아니라 부하들에게 엉터리 작전으로 해전을 완전히 말아먹고는 자기 혼자, 그러니깐 건방지게 자신의 가족들까지 전부 죽게 만들고 도망쳤다는 것이 된다. 모든 의혹들이 맞다면, 원균은 매우 뻔뻔하게도 자국민을 맘대로 학살하고 엉망인 작전으로 병력을 말아먹은 주제에 혼자서 탈영을 한 셈이다.
흔히 원균을 무타구치 렌야와 비교하고 심지어 원군이 환생한 것이 무타구치 렌야다식의 농담도 있다. 그러나 비록 무타구치 렌야는 무능하고 뻔뻔한 인물이었지만 적어도 자국 민간인뿐만 아니라 점령지의 민간인과 포로를 대상으로 한 그 어떤 범죄를 저지른 적이 없기에 전범재판에서 비교적 가벼운 형을 받을 만큼 최악의 똥별이지언정, 인간으로서의 선은 지킨 인물로 원균과 비교하는 것은 무타구치 렌야에 대한 모욕이다. 적어도 무타구치 렌야는 민간인들을 학살하고 공으로 꾸민 적은 없다. 오히려 무능할 뿐만 아니라 전쟁범죄를 저지르기까지 한 츠지 마사노부가 진짜 일본판 원균에 가까운 포지션이다. 그리고 무타구치는 지휘나 작전술과 전략은 막장이었지만 군사행정능력은 뛰어났다. 그래서 그의 휘하 부하들의 군 기강을 잘 잡아났기 때문에 부하들이 적국에서 민간인 학살과 약탈등 전쟁범죄 같은 것도 저지르지 않았다. 반면 원균은 무관으로서 지휘나 군사 행정능력 작전술은 물론 모든 것도 무능한 똥별이었다.
6.2. 추증 - 선무공신 1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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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택시 도일동 산82에 자리잡은 원균의 사당.[88] |
원균은 이순신, 권율과 함께 임진왜란 3대 선무공신이다. 원균이 선무공신에 제수되었음이 공을 증명한다는 시각도 있으나 사실은 선조의 무한한 원균 사랑의 발로. 정확하게 말하면 왕권 강화에 집착했던 선조는 이순신의 위명이 조선 백성들에게 널리 퍼졌다는 사실을 매우 꺼려 이를 견제하고자 원균을 1등 공신으로 만든 것.[89] 더군다나 이몽학의 난을 당해 정신적 충격을 받아버린 선조로서는 뭔가 대단하다고 생각되는 인물을 계속 견제하고자 했다. 게다가 신립이 탄금대에서 드러눕고 한양까지 털려버리자 선조는 요동으로 도망가려고 한 반면 광해군[90]은 분조를 꾸려 조선을 누비고 다니며 전쟁을 독려하고 노력했다. 이미 백성들의 지지도 역시 선조 <<< 넘사벽 <<< 광해군인 상황이었다. 당시 조정에선 이순신을 싫어하는 사람들까지 한 목소리로 "원균에게 어찌 그런 영예를 주냐"고 반대했지만 선조가 다 씹고 무리하게 공신으로 만들었다. 그랬기에 원균은 전후 논공행상에서 2등에 제수되었으나 원균에게 출정하라고 독촉하던 선조는 태도를 바꿔 칠천량의 패배를 도원수와 비변사의 독촉 때문인 것으로 몰며 자기의 생떼만으로 원균을 1등 공신으로 제수시켰다. 또한 이는 원균이 이순신에게 원군을 요청한 것 자체를 공으로 만들어[91] 명나라에 원군을 요청한 자기 자신을 높이기 위한 술책이기도 했다. 종전 후 공신 책봉에 대한 논의를 시작할 때 선조는 "명나라 덕분에 이겼지, 조선 장수들은 한 게 없다"면서 "그중에서도 이순신과 원균 두 장수는 바다에서 적군을 섬멸하였고 권율은 행주(幸州)에서 승첩을 거두어 약간 나은 편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즉, 왕이 공로가 있다고 한 세 장수 중 하나가 원균인데 공신 명단 자체에서 빼면 왕 체면이 뭐가 됐을까? 2등 공신에 올린 것조차도 선조 체면 세워주기용에 가깝다.
그런데 정치적 관점에서 보면 원균이 공을 세운게 되는데 바로 선조의 실추된 명예를 회복시킨 어처구니 없는 공로이다. 전쟁과는 아무 상관없는 선조 개인 영달을 위한 공로가 되는 것으로 한마디로 원균의 선무공신은 의전상의 공로이지 실질적인 공로가 아닌 셈이다. 결국 선조는 자기 명예 떨어지는 걸 막으려고 원균을 공신으로 삼아준 것일 뿐으로 절대 원균이 잘나서가 아니다. 대한민국 국군으로 따지면 똑같이 원수 계급장을 달고 있어도 이순신과 권율은 진짜 원수가 맞는데 원균은 장군 1명 뽑아서 원수 정복을 입힌 것일 뿐이다. 선조가 노골적으로 도망쳐버렸는데 그걸 덮기 위해 똑같이 도망친 원균을 옹호하여 원균에게는 임금님이랑 같은 행동을 한 것만 강조하고 선조에게는 그런 원균과 같은 행동을 했으니 영웅이라는 어처구니없는 논리를 디밀어 원균을 선무공신으로 삼아준 것이다. 이렇게 보면 원균은 엄청난 행운아인 셈인데 자신이 망하려면 일단 선조가 반정을 먹어야만 하니 다른 사람도 아니고 임금님과 운명공동체가 되어버린 덕분에 원균은 영웅아닌 영웅이 되었고 어느 누구도 원균을 건드리지 못하는 지경까지 가고 말았다. 조선 왕조에서 원균 수준의 행운아는 그 이전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없었다.
선무공신 제수는 선조 37년(1604년) 10월에 하사된 선무공신 교서를 통해 이루어졌다. 당시로도 매우 정치적인 녹훈으로, 선무공신 1등공신인 이순신, 권율, 원균은 1604년 제수 당시 시점으로도 모두 죽은 사람들이다(원균 1597년 전사, 이순신 1598년 전사, 권율 1599년 병사). 말 그대로 죽은 영웅은 있어도 살아있는 영웅은 없다. 다만 선조가 아무리 인정하기 싫어해도 이순신이 세운 공은 온 천하가 다 아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기에, 선무 1등 공신 3명 중 이순신은 원훈, 으뜸에 위치한다.
선조수정실록을 보면, 편찬자들이 상당한 원균까였음을 알 수 있다.[92] 사실 당시에도 선조 외에는 원균을 까는 사람밖에 없었다 쪽이 답이다. 심지어 이후 실록에서도 무능하고 악한 사람을 빗대어 말할 때 제일 먼저 들먹이는 이름이다. 그 지역에 탐관오리가 넘쳐나 마치 원균을 보는 것 같았다 어쩌고, 왕이 잘못하면 원균 같은 놈이 벼슬을 하니 저쩌고 등등.
敎資憲大夫知中樞府事贈孝忠仗義迪順協力宣武功臣崇祿大夫議政府左贊成兼判義禁府事原陵君元均書
자헌대부(정2품)·지중추부사(정2품) 원균을 효충장의적순협력선무공신·숭록대부(종1품)·의정부좌찬성 겸 판의금부사(종1품) 원릉군으로 추증한다.[93]
자헌대부(정2품)·지중추부사(정2품) 원균을 효충장의적순협력선무공신·숭록대부(종1품)·의정부좌찬성 겸 판의금부사(종1품) 원릉군으로 추증한다.[93]
내용은 "장군은 전사하였어도 살아 있는 것과 같으니, 공업(功業)은 끝을 보지 못하였으나, 훈상(勳賞)은 죽어도 가상하므로 선무공신 1등에 책훈(策勳)하고 3품계를 올려주며, 부모와 처자에게도 3품계를 올리고 노비 13구(口), 전지 150결(結), 은자(銀子) 10냥, 옷감 1단(段), 내구마(內廐馬) 1필을 하사"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즉, 여기서는 원균이 전사했다고 쓰고 있다.
만약 원균이 사고를 안 치고 이순신의 뒤를 따라다니며 해오던 대로 수급을 챙기는 행위만 했더라도 선무 2등 정도는 받을 자격이 되었을 것이다. 아무리 본인이 무능하더라도 이순신의 명령을 받고 출전해 적군을 쳐부수며 싸웠다면 적어도 그 공은 원균 자신의 공이 되었을 테고, 후대에 '원균은 무능하고 성정이 포악했으나 싸울 때는 잘 싸웠다.'는 말이 나와도 헛소리로 치부되진 않았을 것이다. 더불어 원균의 집안도 대대로 대우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94]
6.3. 원균옹호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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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원균옹호론#s-|]]번 문단을#!if 문단 == null & 앵커 != null
{{{#!if 문서명 = 문서명 != null ? 문서명 : calleeTitle
의 [[원균옹호론#|]] 부분을}}} 참고하십시오.경기도 평택시에서 5선 한나라당계 국회의원을 지낸 원유철이 원균 백부의 후손이다. 정확히 말하면 원균의 경우 아들인 원사웅의 후손기록이 부족한 편으로 동생인 원연의 아들인 원사립이 꾸준히 관직에 있으면서 원연계가 원씨 집안의 혈통을 이었는데 대표적인 인물인 원유철이 원연의 13대손이다. 그래서 원유철의 지역구이자 원균의 출신지인 평택시에서는 원균을 밀어주고 빨아주는 중이며, 일례로 평택시민신문에는 원균을 옹호하는 기사가 심심찮게 올라온다.
사실 원주 원씨 중에서도 임진왜란 당시 원균의 친동생인 원연[95], 원전, 조카인 원사립처럼 목숨 바쳐 활약한 인물들이 있음에도 그러지 않는다는 것은 결국 평택시의 문화 및 역사인물 홍보행정에 원유철과 원주 원씨 문중의 입김이 강하게 반영된 것으로 봐야 한다.
즉, 이런 원균옹호론은 여야를 떠나 정치인들 대부분이 그다지 긍정적으로 보지는 않으나,[96] 평택시에서 원주 원씨 세력의 입김이 워낙 크다 보니 아직까지도 논란 속에서 계승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참고로 원균을 옹호하는 원씨 후손들의 직계조상이 바로 원연인데, 원연은 임진왜란 발발 후 의병을 일으켜 뛰어난 전술로 와키자카 야스하루를 격퇴한 명장이자 좋은 목민관이었고, 정유재란이 발발하자 또다시 의병을 일으켜 싸우다 전사한 위인인데 원씨 후손들은 정작 자기들 직계조상인 원연의 무덤은 방치하고 있는 패륜을 저지르고 있다. 게다가 조선 조정이 원연, 원사립 부자의 공을 인정해 원씨 가문에 하사한 양효충효정문마저 방치하는 등 조상님에게 할 수 있는 불효를 전부 저지르고 있다.
6.3.1. 원균평전
2014년에 평택시에서 편찬한 원균평전이 대표적인 원균을 재평가하자는 주장이 담겨 있다.원균평전을 비롯한 평택시에서 원균을 자랑하는 글을 읽어보면 납득하기 어려운 내용이 한 둘이 아닌데 구체적으로 지적해 보자면 기원전부터 세계 각지에서 널리 사용되어 온 충각전술[97]을 마치 원균이 창시한 전술인 것처럼 역사를 왜곡하고 미화하여 서술하고 있으며 이순신과의 불화 이유를 공로 다툼이라고 설명해서 이순신에게도 문제가 있는 것[98]처럼 양비론에 입각한 원균 옹호를 주장하는 데다가 칠천량 해전의 패전 책임은 다른 사람도 아니고 어이없게도 권율 장군에게 완전히 떠넘겼다.
6.3.2. 원릉군기념관
위의 사진은 평택시 도일동에 위치해 있는 원균의 가묘다. 이름은 원릉군(原陵君)기념관. 평택시 공식 블로그.
평택시의 원균 밀어주기는 계속되었고 2018년 4월에는 '원릉군기념관'[99]을 개관했는데 당연히 지역구 의원이자 원주 원씨 대종회 회장인 원유철도 참여했다. 건립 목적은 2018년 4월 16일 개막식 때 축사를 한 원유철의 발언으로 알 수가 있는데 기념식에서 원유철은 “원릉군 원균 장군의 많은 업적은 감춰지고 마지막 패전만 부각된 지금까지의 인물 평가는 오늘날에 와서 새롭게 조명돼야 한다.”고 말했다. 이러한 이유에서인지, 기념관 내부의 소개글들도 대부분 기존 통설을 바로잡자는 취지로 설명되어 있다. 몇 가지 사례를 소개하자면
- 칠천량 해전의 책임을 원균에게 출전을 강요한 조선 조정에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출전을 강요당하다. 칠천량 해전▣왜의 수군군세왜는 강화 회담을 하는 3년여의 기간 동안 수군의 전력을 철저히 증강 시켰다.수많은 대선이 건조되었고, 패전의 경험을 살려 우리 수군에 대한 전략도 준비된 상태였다. 또한 순천에서 부산포까지 중요한 포구는 모조리 왜의 육군이 점령하고 있었다.▣조선 조정의 전략조정의 목표는 왜의 상륙을 저지하기 위해 적을 미리 격파하는 것이었다.▣원균의 전략그러나 원균의 전략은 달랐다. "부산으로 가는 길목인 안죽도, 가덕도 등 육지에 숨어있는 적을 그대로 두고 부산 앞바다로 나가는 것은 퇴로가 차단되어 만약에 대비할 수 없어 병가의 승산이 아니니 먼저 육지의 왜병을 쫒아내 주어야 한다."는 수륙병진을 주장했다.조정에는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이중간첩 요시라가 조선 수군이 기습하면 승리 할 것이라고 귀뜸하므로 줄곳 출전을 강요하였다.급기야 도원수 권율은 머뭇거려 실기했다며 통제사 원균을 곤장으로 윽박지르므로 일이 돌이킬 수 없이 잘못된 것을 알면서 부산 앞바다에 나아갔다.
- 원균이 이순신을 모함한 적이 없다는 내용을 소개하고 있다.□ 원균은 이순신을 모함하지 않았다.▶ 조정이 이순신에게 물은 죄목은1. 일본의 이중 간첩 요시라가 경상병사에게 제공한 가토가 조선에 올때 공격하라는 정보를 조정이 이순신에게 명령하였으나 이를 묵살한 일,2. 당시 오랜기간 전투를 하지 않고 대치만 하고 있는 이순신을 독려하기 위해 통영으로 내려간 세자(광해군)의 수차례 걸친 호출에도 임하지 않은 일,3. 왜영방화 사건으로 체찰사 이원익과 군관 정희현이 한 일을 스스로가 한 것처럼 장계하여 조정을 속인 일,[100]4. 원균과 함께 치른 옥포 해전에서 공적에 대한 단동 장계로 남의 공을 빼앗은 일 등이다.이 네 가지의 잘못은 모두 조정과 통제사(이순신) 간에 명령 또는 장계로 확인된 명확하고 공개적인 사건이다.따라서 이를 두고 모함 운운함은 결코 타당한 논리라 할 수 없다.원균은 이순신과 갈등은 있었으나 모함한 일은 없었다.
- 임진왜란 발발 당시 원균의 행적에 대해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원균의 임란 초기 대응원균이 경상우수영에 도임한지 두 달 후인 1592년 4월 13일 임진왜란이 발발했다. 조정은 왜가 명나라와 외교 관계가 단절된 것에 대한 조선에 분풀이를 하는 것이며, 1만 명 규모의 왜침은 충분히 방어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왜병의 수는 15만의 대군이었다.약 100여 년간 전국시대를 거친 왜군은 생각보다 강했고 부산에 상륙한 왜군은 불과 18일 만에 서울을 함락시켰다.그러나 100여년간 태평성대였던 조선은 숭문천무[101]의 전통으로 문약의 극치였고, 방위체제도 병농일치제, 진관체제 등 취약해 있었다.이러한 상황에서 왜군의 침공을 받은 경상 좌수영 관할은 거의 무인 지경이었다. 경상좌수사는 도망쳤으며 관내 모든 관포는 텅 빈 상태였다.□ 부임한 지 불과 2개월의 경상 우수사 원균은▶ 우선 적침 상황을 조정에 보고하고 전라좌수사 이순신에게 알려 전투준비를 하게 하는 한편▶ 관내 각관포의 지휘관을 수영으로 집결시켜 본진을 지키도록 하고▶ 비장 이영남을 전라좌수사 이순신에게 보내 함께 적을 막자고 원병을 청하였다.▶ 또한 자신은 급히 흩어진 수군을 모아 함대를 편성하고 적과 싸워 곤양 가덕도 등지에서 적선 10여 척을 불살랐다.▶ 그 후 연합수군이 편성되어 옥포 해전을 치르기 전 24일간 고군분투하며 왜의 서진을 막았다.이순신은 수차례의 출전 요청에도 맡은바 경계가 있음을 이유로 움직이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원균의 수하 이운룡이 간절히 청하고 이순신의 수하인 정운, 이순신등이 강력히 출정을 요구하고,조정이 출정을 명하므로 출전요청 20일 후인 5월 6일 옥포 앞 바다에 도착하였다.
- 원균은 암담 그 자체인 경상도 해상 방어를 위해 각고의 노력을 한 반면, 이순신은 경계를 핑계로 뭉그적 댔다는 뉘앙스를 풍기고 있다. 명백한 역사왜곡이기에, 귀중한 국민의 세금이 잘못된 곳에 남용되었다는 비판의 목소리가 쏟아지고 있다. ##, ##, ## 한 네티즌이 평택시에 직접 문의하기도 했지만, 평택시는 "원균의 숭고한 호국정신에 대한 재조명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답변을 보내왔다. 관련 글.
6.3.3. 원균장군문화벨트시민연대
원균을 옹호하는 시민단체로, 2022년 6월 8일 출범하였다. 출범식에 정장선 평택시장이 참여하였고, 2022년 10월에는 원균을 비판한 역사 유튜버를 사자명예훼손 혐의로 고소하기도 하였다.# 원균의 후손들과 긴밀한 관계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후손이 아니라면야 굳이 원균을 옹호할 이유를 찾기 어렵기도 하고, 무엇보다도 사자명예훼손 고소는 직계 후손이 아니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연구자료 발표, 토론회 등 행사를 개최하여 원균에 대한 바른정보를 전한다고 한다. 각종 지역 행사에도 참여하여 원균 부스를 만들어 열심히 홍보활동을 하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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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R] 매큔-라이샤워 표기법로는 Wŏn Kyun[2] 일본은 그동안 죽인 조선의 장수들은 하나도 빠짐없이 적어왔는데 그 어디에도 원균의 수급을 취했다는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전투가 끝난 이후 생존 소식까지 조정에 전달되었다. 원균은 기록에 미친 조선 실록에서조차 사망은 안 했지만 행방불명과 패전을 이유로 생존 및 시신, 양측 사료를 불문하고 해전 당일 사망으로 기록이 조작된 업적을 세운 인물이 된다.[3] 외모에 대한 기록에서 초고도비만이며 100kg 전후였다는 기록과 말을 탈 수가 없을 정도로 뚱뚱했다라는 기록이 많다. 한번 앉은 자리에서 닭 3~4 마리를 먹었다는 기록과 허구한 날 대식을 일삼았다는 기록이 있다. 이는 근거없는 구전이 아닌 임진왜란 때 가장 유명한 의병장 중 하나인 조경남이 쓴 난중잡록의 기록이다. 난중잡록은 전쟁 후 시간이 지나 선조가 죽자 광해군의 지시로 궁궐에 가져가서 조선왕조실록 참고 자료로 쓰게 했을 만큼 신빙성이 높은 책이다. 과거에는 식량이 귀했기 때문에 특히 종교에선 필요 이상으로 먹는 것은 죄라고 여겼다.[4] 태어난 날과 사망한 날은 기록되어 있는데, 생년과 몰년은 모두 미상이다. 병마절도사를 지냈는데, 장남의 임팩트가 너무나 강한 데다 많이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라서 잘 부각이 안 될 뿐, 이 사람도 살아생전에 아들급으로 상당한 개차반이었다.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첫 기록부터가 궁 내 순찰이 임무인 선전관이면서 순찰을 게을리해서 그 당시 임금 중종이 궁내 기강 해이를 질타하는 부분이었고, 이후 전라좌수사를 뇌물로 달고는 을묘왜변 당시 아예 출정을 하지 않아서 파직당할 뻔했다가 빽이던 문정왕후가 무마해 줬다는 기록이 나오며, 문정왕후 실각 후엔 좌천당한다. 공문서에 기록된 마지막 기록은 길주 목사던 시절에 공금을 빼돌려 여진족과 밀수를 하다가 적발되어 파직당한 것이다. 참고자료[5] 의병을 모아서 일본군의 침략에 맞서 싸우며 공을 세웠다.[6] 형의 부관으로, 칠천량 해전에 형제가 같이 참전했는데, 형은 비겁하게 빤스런한 반면 동생은 끝까지 남아 싸우다 전사했다.[7] 숙경옹주의 5대손. 『선원록』 한국학중앙영구원 장서각 소장[8] 본래 서자였으나 적자가 되었다.[9] 의신군 이비(義信君 李備)의 측실로, 의신군은 성종의 15남 운천군의 (양)손자이나 의신군의 부친인 이천군(伊川君)이 본래 성종의 4남인 완원군의 친아들이기 때문에 실제로는 완원군의 손자이다. #[10] 삼사공파 20세손.(족보(1)족보(2)족보(3))[원문] 史臣曰: "閑山之敗, 元均可磔, 而將卒皆無罪焉, 何也? 均之爲人, 乃麤暴一無知人也。 初與李舜臣爭功, 百端構捏, 逐舜臣而自代。 外爲大言, 有若一擧而殲賊者然, 及智窮兵敗, 捨船登陸, 使士卒盡爲魚肉, 當時之罪, 誰執其咎? 閑山一敗, 湖南繼沒, 湖南覆沒, 而國事不可更爲矣。 目擊時事, 胸欲裂而骨欲銷也。"[12] 칠전량 패전의 책임은 원균의 몫이 크다고 비변사에서 말하였는데, 선조가 "원균을 핑계대지 말라."고 감싸자 한 사관평이다.[13] 전략된 내용에서는 원균이 권율의 명령으로 편지를 보내 억지로 조상했다는 내용이 있다.[14] 원균이 부하의 아내를 강간하려 시도했다는 증언이다. 그리고 무장이라는 인간이 민간인 여성을 일대일로 제압하는 데 실패했다는 어이없는 사실도 확인할 수 있다. 더구나 이순신이 백의종군으로 당시 머문 지역은 오늘날 합천으로 그 근방에 삼국 시절 격전지인 대야성이 위치한다. 거기에서 김춘추 사위 품석이 동일한 짓거리를 하는 덕에 백제한테 점령당하는 결과를 부르고 여기에서 화랑 죽죽이 역사상에 알려진다.[15] 유자광, 임사홍, 윤원형도 간신으로 분류되기는 했어도 이 셋은 엄밀히 따지면 조선이라는 국가 체제에 해를 끼치는 악행을 저지른 것은 아니었다. 다만 정적이었던 사림파를 제거하는 사화를 일으켰기에 사림파에 의해 간신 소리를 들은 것뿐이다.[16] 추증받은 품계와 직위.[17] 무엇보다 이순신은 전쟁 내내 조정으로부터 물질적인 지원을 전혀 받은 적이 없으며, 재정이 많이 소모되는 군대라는 조직을 스스로 굴려 나갔다. "당신들이 물자 지원을 안 해줘서 진 거요." 해도 조정이 충분히 납득할 수 있을 정도로 열악한 상황에서 단 한 번의 패배도 겪지 않고 싸우는 족족 이겼을 뿐만 아니라, 그마저도 단 한 척의 판옥선도 격침되거나 빼앗긴 적이 없을 정도로 대승을 내리 거두었다.[18] 학살당한 조선 백성들의 수급까지 취했다.[19] 헌데 선조는 진급이 너무 빠르다는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순신을 파격승진 시킨 적이 있다.[20] 이는 이순신 자기 자신에게도 고스란히 적용되는 기준이어서, 난중일기에서도 자신의 판단이나 행동을 자책하는 표현이 많다. 인터넷에서도 이순신을 형편없는 장수라고 까는 내용의 글이 있어서 찾아봤더니 그 글을 쓴 게 이순신 자신이었다는 식의 밈이 있을 정도다.[21] 더구나 이렇게 죄인으로 살고 있을 때 이순신의 어머니가 그 충격으로 사망했는데, 이순신은 부고를 직접 전해 들었음에도 시묘살이조차 못 했다. 당시 유교 가치관에 따르면 전시라도 부모상을 당하면 고향에 돌아가 시묘살이를 해야 했는데, 이마저도 무시당하는 매우 원통한 취급을 받은 것이다. 그리고 그 원인제공을 한 장본인이 다름 아닌 원균이니 그를 증오하지 않는 것이 더 이상하다.[22] 한자 문화권에서 사람을 칭할 때 아무 직함이나 칭호도 없이 성씨만 딸랑 써 놓는 것은 형식적인 존칭조차 붙여 줄 가치도 없는 인물이라는 뜻으로, 기실 불구대천의 원수 내지는 흉악 범죄자에게나 쓰는 극히 경멸적인 표현이다. 현대식으로 치면 "원가놈"이라는 표현과 비슷하지만, 당시에는 상대를 향한 모욕과 하대의 의사가 매우 강한 표현이었다. 씨(호칭) 문서 참조.[23] 아무리 원균 때문에 화가 나는 상황을 서술할 때조차도 '표현할 길이 없'는 식으로 매우 절제된 표현을 사용하였다. 심지어 칠천량 해전 이후 원균이 죽은 (것으로 추정되는) 이후에는 지금까지 건조한 배들과 그동안 생사를 함께한 장병들이 고기밥 신세가 된 것을 두고두고 원망할 법도 한데, 그래도 죽은 사람을 붙잡고 늘어지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는지 아니면 그냥 더 이상 그 이름조차 입에 담기도 싫었는지 몰라도 원균에 대한 일체의 서술을 그만두었다.[24]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이순신만큼 원균을 잘 아는 이도 드물다. 전란이 터진 임진년부터 원균이 사라지는 정유년까지, 좋든 싫든 원균과 부대껴서 가장 고생해야 했던 사람이 바로 이순신 자신이기 때문이다.[25] 이들은 왜란 초반부터 모두 제 발로 원균을 따라다니던 장수들이었고, 이 중 기효근과 김승룡은 몇 번 대면한 적도 있었다. 이들의 이름이 언급되는 시점에서 이순신 장군은 굉장히 불길한 느낌이 들었을 것이다.[26] 방답(防踏)은 인명이 아니라 지역명이며, 방답 첨사 이순신(李純信, 충무공과는 동명이인)을 말한다. 정3품인 우수사가 아니라 한계급 아래인 종3품의 첨사가 병력을 보냈으니 현대로 치면 사단 병력이 오는 줄 알았는데 연대 병력이 온 셈. 이 우수사는 이억기 전라 우수사를 가리키는 것으로 봐야 한다.[27] 난중일기에서는 같은해 2월 1일부터 비가 계속 내렸고, 역풍이 있었다고 언급되었다. 같은해 2월 5일. 보성 군수의 소속 함대가 비 때문에 발이 묶여 합류가 늦었다는 얘기도 나온다. 안 그래도 바람세를 포함한 기상 여건이 불순했고, 거기에 이억기의 전라 우수영 함대는 신안 앞바다 기지 함대들까지 우수영에 모여야 하고, 여기에 우수영이 있는 해남에서 견내량까지 이동 거리를 감안하면 원균 함대보다 10일 정도 더 수고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원균은 이걸 따져보지도 않고 이억기가 안 왔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발끈한 거다. 이 같은 원균의 험담은 원균을 두둔하는 대신들에게 '원균은 조정의 명을 받고 제일 먼저 달려왔지만 이순신과 이억기는 때마다 늦었기에 원균이 화가 나서 단독으로 출동하고자 했다'고 전해졌을 것이라고 추측된다.[28] 이 날은 웅포 해전을 한 날이다.[29] 禿沙伊項, 현 부산시 강서구 녹산동.[30] 적군도 아니고 고기잡는 자국민을 잡아다 목을 베어 공적으로 삼을 생각이었다는 것이다.[31] 이영남과 이여념은 원균 휘하의 기지 대장들이다. 계속 언급되겠지만 부하들에게까지 뒤통수를 맞을 정도로 무능했다.[32] 명군 총사령관 송응창.[33] 이 시기 나고야에는 10만여 왜군이 조선 출정을 대기하고 있었고 북쪽으로부터는 16만의 왜군이 남하해 내려오고 있는 위험한 상황이었다.[34] 전략된 내용에서는 탐망꾼이 보고한 내용이 서술되었다. '웅천에 있던 적선 4척이 자기네 본토로 돌아갔고 김해 어귀에 있던 적선 150여 척이 나왔는데 19척은 본토로 돌아가고 남은 배들은 부산으로 갔다'는 내용이다. 원균의 얘기는 이걸 공격하자는 얘기 같은데 새벽 2시에 떠나자면 취침 중인 병사들을 깨워서 출동 준비에 들어가야 하고, 여기서 웅천에 도착하면 정오쯤. 수비력이 가장 탄탄할 시간이다. 때문에 작전 제의를 하려면 수사들간의 정보 분석 → 작전 입안 → 출동준비 → 출항 순으로 절차가 있는 법인데 원균은 그런 거 없이 그냥 가자고 한 거다.[35] 6월 10일 축시(새벽 2시)에 온 원균의 제안에 대해 이순신이 공문으로 자신이 생각하는 작전 계획안과 작전 회의 요청서를 보낸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정작 출정하자고 공문을 보냈던 본인은 전날 마신 숙취인지 아니면 아침부터 술을 마셨는지 인사불성이었다는 얘기. 상식적으로 자신이 출정하자고 요청했으면 바로 답변을 받을 준비를 하고 자신이 생각하는 작전안을 구체화하여 다른 수사들과 논의를 하고 있어야 했다.[36] 바닷속에 들어가서 조개, 미역 따위의 해산물을 따는 일을 하는 사람.[37] 이 부분은 원균은 아마 이순신을 깔보고 있지 않았나 생각할 수 있는 항목이다. 자신의 배 25척은 어디 숨겨놓고 7척, 8척만 이끌고 와서 출동을 제안한 것으로 보아하면, 이순신이 자신의 말을 들을 거라고 판단한 듯하다. 그리고 후에 장계에 올릴 때 이 일을 들먹이면서 "저는 항상 용감하게 나가 싸우자고 했는데 이순신 저 놈은 쫄아서 절대 안 나왔습니다"라고 모함까지 했다.[38] 松峙: 순천시 서면.[39] 우치적: 순천 부사.[40] 백의종군 하던 당시.[41] 좌수영은 전라 좌수사 겸 삼도수군통제사의 본영을 말한다. 당시 이순신은 백의종군 중이라 제대로 된 보직도 받지 못한 상태였는데, 그런 이순신에게 달려와서 눈물을 뿌렸다는 것은 원균의 일처리가 지극히 한심했다는 뜻이다.[42] 전략된 내용에서는 원균이 권율의 명령으로 편지를 보내 억지로 조상했다는 내용이 있다.[43] 원균이 부하의 아내를 강간하려 시도했다는 증언이다. 그리고 무장이라는 인간이 민간인 여성을 일대일로 제압하는 데 실패했다는 어이없는 사실도 확인할 수 있다. 더구나 이순신이 백의종군으로 당시 머문 지역은 오늘날 합천으로 그 근방에 삼국 시절 격전지인 대야성이 위치한다. 거기에서 김춘추 사위 품석이 동일한 짓거리를 하는 덕에 백제한테 점령당하는 결과를 부르고 여기에서 화랑 죽죽이 역사상에 알려진다.[44] 申蓁. 신진.[45] 안골포와 가덕의 일본군을 먼저 물리쳐야 수군이 나아갈 수 있다는 말 자체는 맞다. 하지만 이순신을 모함하면서 자신이 부산포를 공격하겠다고 했던 것은 원균 자신이었는데, 이제 와서 육군이 먼저 힘을 써 줘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앞뒤가 안 맞는 것이다. 더군다나 당시 안골포와 인접한 곳에 있는 조선 육군은 김응서 경상 우병마사의 병영뿐인데, 고작 수천 명뿐이며, 그나마도 낙동강 하구부터 초계까지 수비 작전 중이었다. 이 병력으로 요새에 틀어박힌 왜군을 몰아낸다는 게 말이 되는가?[46] 主將, 원균을 뜻한다.[47] 맨날 되지도 않는 모함만 하던 원균으로부터 상석에 앉아 대접받는 꿈을 꿔서 이게 웬일인가 싶었는데, 현실에선 사고치고 총대장한테 붙잡혀 갔다는 얘기. 원균은 이때 출전을 차일피일 미루고 있다는 이유로 도원수 권율에게 호출당하여 곤장을 맞는 치욕을 겪었다.[48] 이 내용 때문에 결국 이순신은 삼도 수군 통제사에서 박탈당하고 서울로 압송되고 그 자리를 원균이 차지한다.[49] 《승정원일기》, 인조 9년 4월 5일자[50] 선조 말 청년 관료 윤계선(1577~ 1604)이 쓴 소설. 1600년 호서 암행어사로 충주에 갔다가 꿈에서 임진왜란 때 싸우다가 죽은 영웅들(김시민, 송상현, 조헌 등)이 한자리에 모여 잔치를 벌이며 감회를 토로하는 걸 목격하는 내용의 소설인데, 여기서 다른 영웅들은 이순신을 가장 상석에 앉힌다. 전사한 원혼들에게 신립은 욕을 먹고 원균은 잔치에 몰래 들어오려다가 몰매를 맞는다.[51] 한마디로 너무 평면적인 악역이라 비현실적인 악역인 셈이다.[52] 1980년 MBC 드라마 <전원일기>의 종기 아버지 역, 2000년 KBS 드라마 <태조 왕건>에서는 승려 석총 역, 2005년 MBC 드라마 <제5공화국>에서는 신현확 역.[53] 참고로 이 말을 한 이는 극중에서 주현의 매니저였던 이동욱.[54] 원래는 이순신 역을 줘야지 하필 원균 따위 배역을 줬다고 화가 나서 출연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매니저가 이 말로 꼬드겨서 넘어간다.[55] 난중일기를 보면 원균이 작전 중에 군선에 기생을 태우고 논 건 사실이나 귀양은 엄연히 처벌이라 반성하고 근신해야 한다. 장희재처럼 빽이 든든하다면 모를까 귀양지에서 방탕하게 보내면 조정과 왕의 눈 밖에 나고 생명줄을 단축시키는 행위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56] 2015년 KBS 드라마 <징비록>에서 신립 역.[57] 해설도 겸했다.[58] 1992년생. 1998년 KBS 드라마 <왕과 비>에서는 연산군의 아역, 2001년 SBS 드라마 <여인천하>에서는 명종의 아역을 연기했다. 2008년 MBC 드라마 <천하일색 박정금>을 마지막으로 연예계 활동을 전혀 하지 않고 있다.[59] 최재성은 <불멸의 이순신> 방영 전 인터뷰에서 "원균이 세간에서 평하는 것처럼 악랄한 인간이었다면 아예 처음부터 캐스팅을 거부했을 것"이라며 원균이 역사의 피해자라는 주장에 동의하는 듯한 발언을 했다. 하지만 최재성이 <불멸의 이순신>에서 제일 마지막으로 외운 대사(칠천량 해전에서 죽을 때 유언)가 "이순신이 옳았고 내가 틀렸다"였음을 감안한다면 최재성은 원균을 신으로 숭배하는 수준까지는 아니라고 볼 수 있다.[60] 원균이 맹장인지는 둘째치고 당연히 이순신과 원균 모두 임진왜란 와중 전사했기에 전후의 얘기 자체가 설립할 수 없다.[61] 2002년 SBS 드라마 <야인시대>에서는 두뇌파 주먹패 두목 김동진 역, 2004년 KBS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에서는 이일 역, 2006년 SBS 드라마 <연개소문>에서는 백제의 용맹스런 맹장 윤충 역, 2007년 SBS 드라마 <왕과 나>에서는 충신 김자명 역, 2008년 KBS 드라마 <대왕 세종>에서는 악역 김도련 역, 2009년 KBS 드라마 <천추태후>에서는 강감찬의 부장 김종현 역, 2012년 KBS 드라마 <대왕의 꿈>에서는 신라 화랑의 믿음직하고 강직한 지휘관이며 감독관인 풍월주 호림 역. 2019년 폐암으로 별세했다.[62] 작중에서 주인공인 류성룡이 전생이전에 친구가 보여준 케틀벨 저글링을 새로운 신체단련법이라 알려주며 발등이나 깨지라고 했지만 머리 맞고 죽어버리면서 효과 좋네 라는 평만 남겼다.[63] 작중 정말로 찌질하고 고집만 센 데다 무엇 하나 도움이 안 되는 꼬장꼬장한 꼰대로 확실하게 각인되는데, 이것이 올바른 묘사임을 감안하면 손현주의 연기력이 빛을 발한 것이다. 결국 감독이 의도한 대로 이 작품에서의 원균은 무능함의 극치를 제대로 보여준 것이 맞다.[64] 2003년도 서양게임이다.[65] 정작 일본은 거부했는데, 어차피 한반도를 전부 점령하기 위한 정유재란을 준비중이었기에, 평화협상은 화전양면 전술.[66] 일심이긴 했다. 일관적으로 헛짓만 했다는 게 문제였지만.[67] 당연한 소리지만 공신 교서라 문화재적 가치가 있는 것이지, 원균이 받아서 가치가 있는 게 절대로 아니다.[68] https://www.joongang.co.kr/article/2710077, https://www.cha.go.kr/nationBbz/selectNationPostList.do;jsessionid=XK8mgBX3AHPXaljPi5tbPBf5PzEOnafCsHbj1tPyabXTku2v7GF1xgsHtXOyF3vi.cha-was02_servlet_engine1?mn=NS_01_04&nationId=75248&pageIndex2=59&searchCnd=&searchWrd=&searchStartDay=&searchEndDay=[69] 현재 공식적으로 알려진 선산의 묘지는 시신이 없는 가묘이며, 실제 묘지는 통영시에 위치해 있을 가능성이 있다고 한다. # 실제 시신이 묻힌 것으로 추정되는 봉분은 방치된 상태이며(해당 링크의 기사는 부산일보 8월 기사, 후손들이 벌초 비용을 보내고 성묘도 온다고 한다) 77번 국도 확장 공사로 아예 사라질 가능성도 있다.[70] 영국군의 버마 침입을 알고는 공포에 질린 상태로 손을 떨면서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고 한다.[71] 참고로 궤멸적 피해를 입었다는 그 임팔 작전의 일본군 사망자 수가 기무라의 적전도주 후 일본군 사망자의 70% 정도인 약 5만 2천 명이었다. 심지어 제28군은 부대원의 과반이 사망했다고 한다.[72] 사실 기무라가 버마 방면군 총사령관으로 부임할 때 버마 방면군은 임팔 전투의 대참패의 영향으로 이미 힘도, 사기도 바닥난 한 줌의 패잔병 무리로 전락한 상황이었다.[73] 한국 한정으로 유포되던 버마에서의 민간인 학살은 정작 극동군사재판 관련 자료에서는 전혀 언급되지 않고, 제대로 된 근거도 없다. 물론 기무라 헤이타로는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의 개전에 관여한 혐의로 A급 전범 판결을 받고 처형된 7명 중 한 명이었던 데다가 포로 학대 문제에서 자유롭지 못한 게, 비록 직접적으로 포로학대를 지시한 근거는 없지만 포로 학대를 방치했던 인물이었는데, 더 가관인 건 기무라는 포로 학대를 인지하고 있었는지 겉으로는 버마에서 군인들에게 포로 학대를 자제하라는 명령을 내렸다고 한다.[74] 다만 원균이 아무리 맹장이라고 그건 불가능했을 것이라는 의견도 있다. 원균 휘하의 전력이 강한 건 사실이지만 이 전력이 평상시에는 각 지역에 흩어져 있기에 이를 모으기 위해선 다소의 시간이 필요하다. 문제는 이순신의 경우 4월 15일에 임진왜란 발발 소식을 들었고 5월 4일에 첫 출전을 한다. 그러니까 출정에 20일 가까이 걸렸다는 것인데 그나마 다행히 이순신은 일본군의 거점지인 부산진으로부터 아주 멀리 떨어진 전라남도 서남부 해안이었지 원균은 그냥 남해, 사천 이런 곳들이다. 이순신보다 일본군으로부터 훨씬 더 취약한데 이런 상황에서는 원균이 아무리 대단해도 이순신처럼 휘하 병력을 다 모으고 결전을 벌일 수가 없다. 그 이순신조차 20일이나 걸려서야 첫 전투를 치를 수 있었는데 원균이 아무리 대단해도 그것보다 더 단축하는 건 불가능하다. 심지어 원균의 경상우수영은 가장 규모가 컸기에 전력이 강하다는 장점은 있지만 급할 때 모이기는 더 힘들다는 게 단점이다. 이러니 앞서 '임진왜란 발발 이후'에서 나왔듯 병선을 모조리 자침시키는 게 더 현명했다. 적어도 병선을 자침시키면 적이 노획하여 쓰지 못하기 때문. 상기했듯 흥남 철수작전과 툴롱 프랑스 함대 자침처럼 자침은 의외로 공식적인 전술이긴 하다. 그러니까 이때의 원균은 겁쟁이라서 싸우지 않았다기보다는 그 나름대로 가장 최선의 선택을 한 거다. 원균이 진짜 잘못한 건 그 다음. 병선을 자침시킨 후 아무것도 안 한 것이다. 그나마 고민은 했지만 선택지 중 하나가 도망이었다는 것이 문제.[75] 전쟁 이후 선조가 <조선왕조실록> 임진왜란기 참고자료로 공인한 대표 기록 중 하나이다.[76] 중국의 고사에서 인용한 것이다. 송나라의 당진이라는 무장이 식탐이 심해 늘 배가 불룩하게 나와 있었는데 어느 날 평소처럼 게걸스럽게 먹고 만족스럽게 배를 쓰다듬으며 "배야, 내가 널 저버리지 않았단다!"라며 실로 황당한 혼잣말을 했다. 그러자 옆에 있던 사람이 그걸 보고 기가 막혀서 "장군은 장군의 배를 저버리지 않았지만 장군의 배는 장군을 저버렸구려. 장군은 장군의 배를 그렇게 정성스레 먹여 살리는데 배란 놈은 장군을 위해 계책 하나 내놓지 않으니 말이오!"라며 비웃었다.[77] 이 일화를 기록한 이순신 장군도 술을 좋아하긴 했지만 전투중이나 중요한 자리에서는 당연히 자제했다.[78] 무려 전투 내내 술에 취해 뻗어서 호령만 했다고 한다. 그러면 칠천량 해전 당시 왜 상식을 벗어난 행동들만 보여줬는지 어느 정도 설명이 된다. 김완의 증언에 따르면 칠천량 해전 전날 낮잠을 잔 후 술을 퍼마셨다고 한다.[79] 김완은 칠천량에서 부상당한 뒤 포로로 잡혀 고초를 겪다가 간신히 탈출해 이순신 휘하로 합류한다.[80] '원'씨의 영어 표기인 'Won'은 영어로 '이겼다'는 의미다.[81] 다만 현재는 두 영상 다 비공개 상태다.[82] 진지하게 일본어로 옮긴다면 음독으로는 겐 킨이 되고, # 훈독으로는 모토 히토시가 더 보편적일 것이다.[83] 출처:https://sillok.history.go.kr/id/kna_12704023_008[84] 비슷하게 전두환도 베트남 전쟁 파병 당시 전공이 전혀 없자 총기를 밀수해 베트공에게서 노획한 거라고 거짓 보고를 한 바가 있다.[85] 혹은 공을 세우기 위해 민간인을 고의적으로 학살한 뒤 왜군으로 보고했다는 설도 있다. 원균의 행적을 봤을 땐 이쪽이 더 신빙성이 높다[86] 1593년 2월 28일 기록.[87] 1594년 3월 13일 기록.[88] 본래는 원균의 묘역 앞에 있었으나, 물이 나고 낡아 현재의 위치인 묘 뒷편 언덕으로 옮겨 세웠다.[89] 이순신이 죽자 남도의 백성들이 모두 통곡하고 상여를 붙잡아 운구 행렬이 앞으로 나아가기 힘들 정도였다.[90] 왕위에 오른 뒤에는 지독한 의심병에 걸려 사치와 내정적 실책을 거듭한 끝에 폐위되었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선조의 자식들 중에 유일하게 백성을 챙기고 할 일을 다한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따지고 보면 광해군이 우리가 아는 암군으로 변질된 것도 임진왜란 시기의 트라우마에 더하여 뜬금없는 늦둥이 적자의 출생과 자신보다 광해군이 더 인기가 높자 불안해진 아버지 선조의 지속적인 견제로 흔들리던 후계 구도에 대한 두려움이 겹쳐 성격장애가 생겼다는 추측이 많다.[91] 근데 이마저도 원균이 원군 요청이고 뭐고 튀려던 걸 부하가 겨우겨우 뜯어말리고서야 한 거다.[92] 선조수정실록은 기존의 실록이 너무 북인 쪽의 시각으로 쓰여졌다고 여겨 인조 때 서인이 주축이 되어 편찬한 사서인데, (사실 선조실록이 문제가 없던 것도 아니라서 분량부터가 사초가 많이 소실되어 한달치 분량이 보통 실록의 하루치 분량만도 못한 경우도 많았고 선조수정실록이 서인에게 좀 봐주는 성향이 강했던 만큼 선조실록은 서인들 말대로 서인까 성향이 강했다.) 서인 계통의 인물인 원균이 서인에게 까이는 상황에서 조선 때도 원균에 대한 인식이 어땠는지 바로 알 수 있다.[93] 이전 내용은 불천위에 모셨다고 하였으나 불천위에 관한 내용은 없고, 또 한문을 해석하면 ‘자헌대부[중략\]원릉군 원균에게 내리는 교서’ 정도 되는데 어디서 교지 중간 부분을 잘라오다가 내용이 오기된 듯하다.[94] 당시에는 조상을 잘 두면 후손들까지 줄줄이 덕을 보았다. 세조 때, 단종 복위 운동 가담자 중 정보라는 사람이 있어 참형을 당할 예정이었는데, 그가 정몽주의 후손임을 알게 된 세조가 귀양형으로 낮춰 주었다. 삼족을 멸해도 이상하지 않을 반역죄를 저지른 죄인조차도 조상 덕에 감형받고 산 것이다. 대우가 이 정도니 공을 세워 인정받음은 그야말로 가문의 영광이다. 근데 원균 이 인간은 반대로 가문의 수치가 되었다. 더군다나 원균의 그 '원씨'는 조선 최초의 후궁인 성비 원씨를 냈을 정도로 그 위세가 아주 대단했는데, 원균 혼자서 가문에 똥칠을 해 버렸으니...[95] 이 사람은 그 원균의 친동생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원균과는 차원이 전혀 다른 위인이다. 원연이 장손이 아니라는 이유만으로 서자 취급을 하여 외면한 점도 원균을 더더욱 띄우게 되는 원인이 되었다.[96] 애초에 상술했듯 원균은 보수, 진보, 중도를 떠나 역사를 공부했던 사람들로부터 대부분 부정적으로 평가받고 그의 만행에 관한 출처가 명확한 데다, 국민들이 가장 존경하고 업적에선 말할 것도 없고 인품에서조차 인권이 발달된 현대에서조차 흠을 찾는 게 더 힘든 이순신하고 대립한 터라 정치인들이라면 지지자들의 눈치를 봐서라도 긍정적으로 평가하기가 더더욱 힘들다. 정치인들 중에는 역사에 빠삭한 사람들이 많기도 하고.[97] 해당 글에서는 당파라는 이름을 사용하는데 이 당파라는 이름 자체도 이미 기원전부터 사용되었다.[98] 이순신이 개전시부터 전 휘하 장병에게 수급을 우선시하지 말고 적을 격파하는 것만을 우선시하라고 무지막지하게 엄포를 놓았기 때문에 참수 기록이 격침 기록에 비해 너무 적어 공과에서 불이익을 받아왔다는 걸 고려해 보면 개소리다. 이순신 입장에서는 원균이 수급을 탐하는 것은 단지 자기 공을 뺏어가는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적은 수급이라도 그걸 가지고 공적 분배를 통해 부하 장수 및 장병들에게 보상과 동기 부여를 해야 이순신 특유의 빡빡하고 철저한 전술을 장병들과 장수들이 열성을 다해 따를 텐데 그 운영이 원균의 사적인 욕심 때문에 흔들리는 것이다.[99] 건물명에 붙은 원릉군은 원균이 임진왜란이 종료된 후 받은 작호에서 따온 것으로 평택시와 원주 원씨 종친회가 적극적으로 추진해 건설되었다. 건설비는 시비와 도비가 각각 2억 5천만 원, 원주 원씨 종친회에서 1억 7천만 원을 지원해 총 6억 7천만 원이 투입되었다. 운영비는 원주 원씨 종친회에서 부담하며 평택시에서 문화관광해설사 배치 비용을 지원한다고 한다.[100] 왜영 방화사건은 안위, 김난서가 왜영에 불을 지른 사건으로 이순신이 이를 보고했다.(선조실록 1597년 1월 1일 기사) 그러나 이후 김신국이라는 인물이 "이순신이 한 게 아니라 체찰사 이원익과 군관 정희연이 한 일인데요?"라는 장계를 올렸고(선조실록 1597년 1월 2일 기사) 이 사건으로 이순신이 왕을 기망했다며 조정이 뒤집어졌다. 그러나 이 사건은 김신국이라는 인물의 거짓 장계일 확률이 높은데 관련 내용을 참고. 그리고 1월 27일에 선조가 "그거 이순신이 올린 장계가 맞어."라며 인정을 하는 것으로 일단락 되었다.(선조실록 1597년 1월 27일)[101] 崇文賤武. 문을 숭상하고 무를 천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