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000><colcolor=#fff> 전 원균묘 傳 元均墓 | |
다른 이름 | 엉규이 무덤, 목 없는 장군묘[1] |
지정현황 | 비지정유산 |
소재지 | 경상남도 통영시 광도면 황리 산43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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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의 장군 원균(1540년 ~ 1597년)이 묻혔다는 전승이 있는 무덤.2. 역사적 배경
선전관 김식(金軾)이 한산(閑山)의 사정을 탐지하고 돌아와서 입계하였다.
"...신은 통제사 원균(元均) 및 순천 부사 우치적(禹致績)과 간신히 탈출하여 상륙했는데, 원균은 늙어서 행보하지 못하여 맨몸으로 칼을 잡고 소나무 밑에 앉아 있었습니다. 신이 달아나면서 일면 돌아보니 왜노 6∼7명이 이미 칼을 휘두르며 원균에게 달려들었는데 그 뒤로 원균의 생사를 자세히 알 수 없었습니다."
《선조실록》 선조 30년(1597년) 7월 22일 신해 2번째기사 #
"...신은 통제사 원균(元均) 및 순천 부사 우치적(禹致績)과 간신히 탈출하여 상륙했는데, 원균은 늙어서 행보하지 못하여 맨몸으로 칼을 잡고 소나무 밑에 앉아 있었습니다. 신이 달아나면서 일면 돌아보니 왜노 6∼7명이 이미 칼을 휘두르며 원균에게 달려들었는데 그 뒤로 원균의 생사를 자세히 알 수 없었습니다."
《선조실록》 선조 30년(1597년) 7월 22일 신해 2번째기사 #
원균은 배를 버리고 언덕으로 기어올라 달아나려고 했으나 몸이 비대하여 소나무 밑에 주저앉고 말았다. 수행하는 사람도 없이 혼자였던 그는 왜적에게 죽었다고도 하고 도망쳐 죽음을 모면했다고도 하는데 정확한 사실은 알 수가 없다.
《징비록》
《징비록》
1597년 칠천량 해전에서 패배한 원균은 행방이 묘연해졌는데 김식은 고성군 추원포(춘원포, 오늘날 통영시 광도면 황리)에서 고성 당동으로 넘어가는 고개(칠천곡)에서 왜노 6-7명이 칼을 휘두르며 원균이 쉬고 있던 소나무 아래로 달려들었고 생사는 알 수 없다고 조정에 보고했다.
임진왜란이 종결된 후 조정은 원균이 사망했다고 판단해 1605년 선무일등공신으로 추증해 주었다.[2] 원균의 시신은 이때도 찾지 못해서 경기도 평택에 가묘가 조성되었다.
3. 지역 전승
통영시의 지역 구전에 의하면 임진왜란 때 어느 장군이 왜적에게 죽어 목이 달아나고 갑주까지 탈취당했는데 그 시신을 주민들이 수습해주어 근처 산록에 묻으면서 목 없는 장군묘로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이후 약 100여년 전 엉규이 무덤 일대가 개간되었는데[3] 개간 과정에서 기골이 장대한 인골이 나왔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엉규이 무덤이라는 말이 전설로 전해지게 되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향토사학계는 1985년에 발간된 '통영군사', 통영문화원의 '통영향토사 연구 논문집', 선조실록 및 선조수정실록에 선전관 김식의 기록을 근거로 봉분이 원균의 묘로 확실시된다고 주장한 바 있다. # 그러나 원균의 후손들에게는 별다른 관심을 받지 못한 채 방치되었다.
2014년 전 원균묘는 통영시 황리와 고성군 당동 사이에 있는 국도 77호선 확장공사에 포함되면서 없어질 위기에 처했으나 지역 사회와 언론의 관심을 받으면서 보존되었다. #
그러나 재정비는커녕 발굴조사도 현재까지 이루어지지 않는 상태다.[4]
4. 기타
5. 관련 기사
- 패장의 묘라서?… 통영 '원균 묘 추정 봉분' 도로 확장에 사라질 판 - 2014년 부산일보 기사
- 안정 황리를 가다, 소가야팔천곡 고무덤군과 전원균묘 - 2020년 통영신문 기사
- [속보]도로개설로 사라질 위기 통영 원균 장군 추정 무덤 보존길 열렸다 - 2020년 부산일보 기사
- 통영에 있는 엉규이 무덤을 아시나요?, 2021년 오마이뉴스 기사
- 최광수의 통영이야기-335 엉규이무덤의 진실, 2022년 한산신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