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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한민국 매국노의 대명사 이완용 | 노르웨이와 서양 매국노의 대명사 비드쿤 크비슬링[1] |
1. 개요2. 용례3. 매국노가 되는 이유
3.1. 부귀영화를 누리기 위해3.2. 정치적, 종교적 대의를 우선해서3.3. 국가/민족적 정체성이 옅거나 혼란한 경우3.4. 국가의 상태를 비관한 경우3.5. 나라에서 제대로 대접을 받지 못한 경우3.6. 정치 투쟁에 휘말려 망명한 경우3.7. 내 나라보다 다른 나라가 더 좋은 경우3.8. 나라를 지키려다가 매국으로 변질된 경우3.9. 스스로의 생존을 위해서3.10. 농담조로 쓰이는 경우
4. 매국노로 취급받는 인물 예시5. 고찰해 보아야 할 점6. 여담7. 관련 문서1. 개요
이 괴물이 권력에서 손을 놓을 때까지 나는 조국으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리투아니아의 매국노 안타나스 스니에치쿠스의 친어머니 마리야 스니에치쿠비에네(Marija Sniečkuvienė, 1863–1948)가 망명 중 인터뷰에서 남긴 말.
리투아니아의 매국노 안타나스 스니에치쿠스의 친어머니 마리야 스니에치쿠비에네(Marija Sniečkuvienė, 1863–1948)가 망명 중 인터뷰에서 남긴 말.
매국노(賣國奴, Quisling)란 본인과 정신적, 물질적 유대관계에 속해 있던 민족이나 국가의 주권 혹은 이권을 다른 나라에 팔아넘겨 그 대가로 일신의 영달을 얻으려고 한 사람을 일컫는 단어다. 법적으로는 외환의 죄, 구체적으로는 외환유치, 여적(與敵), 이적죄 등에 해당된다.
매국노에서 파생된 용어로는 사리사욕에 눈이 멀어 고향 혹은 본인이 살고 있는 지역에 해를 가하거나 배신하는 매향노(賣鄕奴)가 있다.
2. 용례
사전적으로는 어디까지나 자신의 이득만을 위해 국가와 백성을 팔아먹고 백성을 고통 받게 만든 경우를 매국노라고 칭한다. 다만 이는 사전적인 정의일 뿐 현대에는 확대해석되는 경우가 많은데, 현대의 매국은 꼭 나라를 망하게 해야 매국이 아니라 사사로운 이익이나 신념에 의해 조국을 직접적으로 배신(betrayal)하는 '행위'까지 지칭하는 것, 더 나아가 나라의 주권이나 이권을 팔지 않고도 맹목적으로 다른 나라를 추종하는 행위로도 뜻이 넓어졌다.[2] 단순하게는 민족과 국익 혹은 기존의 한국 사회에 반하는 행위에 매국이라고 하는 경우도 있고 정치적으로 적대세력에게 프레임을 씌우기 위해서 매국이라고 지칭하는 사례도 있다. 물론 사람마다 매국의 범위는 다를 수 있으니 가치판단은 개인의 몫이다.한때는 매국도 당연히 능력과 그에 걸맞은 지위가 있어야 가능한 것으로 생각되었지만 시대가 변해서 상류층이 아니어도 컴퓨터 활용능력과 정보력을 가지면 쉽게 가짜 뉴스나 왜곡된 정보를 만들어 자국에 해를 끼치고 타국의 적대세력에게 도움을 주는 매국적 행위가 가능해졌다. 물론 나라에 손해 정도만 주는 게 아니라 아주 나라를 망하게 하는 매국노는 주로 국가의 핵심 직위에 있는 사람들 중에서 나오는 일이 잦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선 우크라이나 정계에 원래도 러시아에 종속된 정치인들이 많았다곤 하지만, 색출작전을 통해 발견된 러시아에 협력하는 인원 중 정치인이 거의 반수였고 판사는 4분의 1이 해당했다는 것이 밝혀지면서 보다 실질적 매국을 할 수 있는 정치적 입지를 가진 고관대작의 매국이 여전히 큰 영향력이 있다는 결과가 나오기도 했다. #
2013~14년경에 한국 넷상의 오타쿠 관련 인터넷 커뮤니티에서는 일본 극우 미디어물이나 일본 극우 요소가 있는 게임 혹은 그런 요소가 있는 것으로 논란이 되었던 작품 등을 계속 즐기거나 옹호하는 한국인 유저들을 지칭하는 '프로' 매국노라는 단어가 생겼다.
매국노들은 빌붙었던 적대국을 믿고 호의호식하지만, 이를 누리는 것은 자신의 국가가 침략국의 지배를 받고 있을 때뿐이다. 쓰임이 다하거나 자신의 고향이 식민지배국으로부터 해방된 후에는 과거 식민지배국으로부터 토사구팽 당하고 피지배국 국민들에게는 배신자로 규정되어 단죄되거나 독립국 정부나 위임통치국으로부터 재기용되어 일한다고 해도 대부분은 단물만 빨리게 되며 고위직에 오른다고 해도 지역 토호가 되는 것에서 그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매국노의 후손들은 조상들의 매국 행위 전력이 드러나면 커리어에 악영향을 끼치게 되는데 자신의 조상의 매국 행각을 옹호나 미화 또는 부정하거나 자신들의 조상이 매국노 중에서 을사오적, 노덕술, 이종형 급으로 악질적인 경우라면 정계 또는 자신의 분야에서 몰락할 뿐만 아니라 정상적인 사회 생활을 하지 못하게 되는 등 앞길이 막히게 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한 마디로 매국노 본인들의 순간의 사익과 부귀영화 추구를 위한 매국 행위가 후손들의 앞길을 막고 그들의 인생까지 망쳐놓는 셈이다.[4] 이런 취급에서 벗어나려면 가족과 사회의 온갖 질타[5]를 이겨내고 공식적으로 가문에 대한 비판을 하거나 틈날 때마다 사죄 행사를 여는 건 기본이고 각종 애국적 공로를 쌓거나[6] 거의 먹은 돈 다 뱉어내고도 더 뱉어낼 정도로 사회 기부에도 열심히 참여하는 등 정말 혼신의 노력을 다해야 겨우 해방될 수 있다.
비록 '외세'에게 나라를 넘겨주지는 않았을지언정, 악질 지도자[7]나 그러한 지도자의 후예[8], 문제가 많던 전임자보다도 더 악랄한 후임자[9]의 세력 확장과 집권을 손수 유도한 격이 된 경우도 사실상 넓은 의미에서의 매국노라고 봐도 무방하다. 나라를 팔아넘길 의도는 없었다 해도 결과론적으로 보면 외부의 적 못지않게 국가를 치욕스럽게 한 내부의 적에게 나라를 팔아넘긴 격이기 때문이다.[10]
3. 매국노가 되는 이유
한국에는 이완용, 윤덕영의 영향인지 단순히 재물을 탐하여 국가를 팔아넘기고 매국노가 된다는 인식이 널리 퍼져 있지만 실제로 매국노가 되는 이유는 많으며 심지어 일부는 좋은 의도로 시작한 경우도 있다.[11]매국노들은 능력이 뛰어난 사람들이 대부분인데 단순한 외세 부역 정도는 명령에 따르기만 하면 되는 멍청이들도 할 수 있지만 적극적으로 나라를 파는 행위는 애초에 자신에게 그만한 능력과 사회적인 위치가 있어야 가능하기 때문이다. 아래와 같은 이유들 때문에 매국노로 변절하는 경우가 많다.
3.1. 부귀영화를 누리기 위해
자신이 적국으로부터 권력, 돈 같은 개인적인 이익을 얻기 위해 해당 국가에게 매국을 하는 행위. 일명 팔지 못할 것을 팔아서 누리지 못할 것을 누린 자.[12] 금전적인 목적으로 자국을 비방하거나 자국의 기밀을 적국에 팔아넘기는 경우[13]도 여기에 포함된다.결국 자기 이득을 위해 이리저리 꼼수만 쓰는 놈이야말로 현대판 매국노다. 물론 나라 자체를 무너뜨릴 외환의 죄 수준까지는 아니지만 비유적 의미로서의 매국노로는 그 정의를 충분히 만족한다. 자기 이득만을 위해 자국을 우롱한 것 그 자체가 확장된 의미의 매국이다.
이 유형에 해당되는 매국노는 쓰임이 다하면 자신이 사리사욕을 위해 빌붙었던 나라로부터 본인은 물론 그 후손들까지 버림 받게 되거나 동아줄이 썩어간다고 느끼면 다른 나라로 갈아타기도 한다. 이 유형은 기득권층이나 기득권층이 아니지만 안정적인 위치에 있는 계층에서 가장 많이 배출된다.
3.2. 정치적, 종교적 대의를 우선해서
신앙심이나 이념 자체가 나쁘지 않지만 과도한 경우 자신이 속한 국가보다 자신의 종교나 이념을 우선시하는 성향으로 인하여 직간접적으로 국가에 해를 끼칠 수 있는데 개인적 이익을 추구하는 적극적 매국 행위와는 구분할 필요가 있다. 가이 포크스, 황사영이 대표적인 사례다. 다만 이 경우 매국이라고 보기 애매한 경우가 많다. 종교나 이념이 체재나 정권과 양립하지 않을 수는 있어도 결국 어느 정치나 종교도 다 자신과 주변 사람들이 더 좋은 세상에서 살도록 하는 것이 목적이므로 스스로는 오히려 애국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결과적으로 주장하는 이념과 종교의 방향성이 옳다면 실제로도 매국이 아닌 애국이 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김대중이 군사정권 시절 외신 인터뷰에서 한국의 군사정권을 비판한 것을 (김대중이라는 정치인에 대한 평가와 별개로) 오늘날 매국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 김영삼도 1979년 YH무역 사건에 대해 미국의 조치를 촉구하는 외신 인터뷰[14]를 했다가 당시 매국으로 몰려 국회의원직 상실까지 됐지만[15], 오늘날은 이를 누구나 유신 독재 정권 측의 탄압 명분 내지 프레임으로 보지, 진지하게 매국으로 보는 경우는 없다.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비시 프랑스에 맞선 자유 프랑스는 자국과 전쟁까지 했지만 전후 연합국의 승리로 프랑스가 해방되자 자유 프랑스와 그 지도자인 샤를 드골은 현대 프랑스의 국부(國父)이자 애국자로서 칭송받는다. 반면 당시 프랑스의 유일한 합법 정부이자 자국민의 희생을 걱정해 자신 나름대로의 '애국적인' 결정을 내린 비시 프랑스의 총리 피에르 라발은 프랑스인들의 수치이자 천하의 매국노로 기억된다.
설령 그 대의가 틀렸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실패자일지언정 매국노라고 보지 않기도 한다. 실제로 비시 프랑스는 빠른 항복으로 프랑스가 입을 전쟁의 피해를 최소화했다는 점에서 재평가를 받기도 하며 라발에 비해 친독 성향이 적었던 필리프 페탱은 적어도 프랑스인을 위하려 했다는 평가를 자주 받기도 한다.
3.3. 국가/민족적 정체성이 옅거나 혼란한 경우
같은 민족이 복수의 국가를 이루고 있거나 복수의 민족이 하나의 국가를 이루고 있는 경우에 자신이 속한 국가에 대한 소속감이 약하고 민족, 종족 의식이 강하다면 매국 행위가 나타날 수 있다.대표적으로 전자는 제2차 세계 대전 직전의 오스트리아 나치당이, 후자는 소련이나 유고슬라비아 연방의 민족주의 운동들이 해당된다.
후자는 정말 그 국가가 해체되고 민족별로 국가가 찢어지면 애국자와 매국노가 순식간에 뒤바뀌어 버린다. 그 예시 중 하나가 스테판 반데라. 1991년 소련 붕괴 전까지 반데라는 '나치 독일에 협력하고 소련을 찢어 놓으려고 한 매국노'로 교육되었지만, 1991년 소련 붕괴 후 우크라이나가 독립하면서 과거 우크라이나 민족운동/독립운동이 조명받았고 당대 주요 독립운동가였던 반데라는 '소련과 나치 독일에 맞서 싸운 독립투사'로 우크라이나 내부에서 그 평가가 뒤집혔다.[16] 영국에서는 영국의 식민지였던 미국을 독립시킨 조지 워싱턴을 반역자라고 여기는 여론이 있다.
3.4. 국가의 상태를 비관한 경우
주로 북한과 에리트레아, 민주 캄푸치아처럼 인권 상태가 생지옥 수준이거나 기득권층을 제외한 대부분의 국민에 대한 부조리가 심한 국가일 경우에 일어난다. 국민 대다수가 아니더라도 자신이 속한 사회에서 정치적+사회적 부조리를 당하는[17] 취약 계층이나 국가 개혁에 실패하고 절망에 빠진 끝에 그 국가와 민족 자체를 혐오하게 된 지식인 및 개혁자들이 이러한 유형이 될 확률이 높다.대표적으로 캄보디아의 전 총리 훈 센은 고국이던 민주 캄푸치아에서 군인으로 복무해 온 주제에 고국의 최대 적국이던 베트남과 협조하며 반캄보디아 게릴라 활동을 하다가 베트남이 민주 캄푸치아를 멸망시키고 괴뢰국 캄푸치아 인민공화국을 세우는 데도 함께했으며 권력도 그 괴뢰국의 수상으로서 독재 권력을 누려 오다가 아들에에 권력을 세습한, 어떻게 보면 매국노의 극한이라고 할 수 있는 인물이지만 그가 버린 조국에서 벌어진 일이 인류 역사상 최악의 참극인 킬링필드였기 때문에 훈 센을 독재자라며 비판하는 사람은 있어도 매국노 취급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오히려 베트남에게 나라를 빼앗긴(?) 폴 포트가 한 짓이 사실상 고의적으로 자국의 모든 인프라를 파괴하고 베트남의 침공을 유도한 꼴이었기 때문에 더욱 매국노스럽다. 캄보디아 사람들도 훈 센의 독재 시기가 킬링필드 시대보다 훨씬 낫다고 할 정도로.[18]
친일반민족행위자 중에서는 윤치호나 박중양이 자국 혐오에 빠진 지식인 및 개혁자로 분류될 수 있으며 을사오적 중 이근택도 국가의 상태를 비관하여 매국노의 길을 걸은 케이스에 속한다. 참고자료[19] 다만 친일반민족행위자 중에는 조선의 부조리를 통해 이익을 얻던 기득권층에 속했던 인물들이 많았다. 또한 독립운동가 가운데 친일파로 변절한 경우도 있는데, 독립운동에 소극적인 소시민에 분노하거나, 도저히 독립이 될 것 같지 않은 상태를 비관하여 친일파로 변절한 사례가 있다.
이때 왜 매국을 했는가에서 충분한 이유와 당위성이 있는 경우 오히려 칭송받는 경우도 있는데 이러한 경우의 가장 대표적인 경우가 중국에서 첫 손 꼽히는 혼란기인 5대10국 시대의 재상 풍도다. 왕조시대에는 열심히 욕을 먹었지만 지금은 절조가 없긴 해도 자신과 백성들의 생존을 위한 것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북한이탈주민도 한국에 와서 북한 체제의 실상을 까발린다면 한국에서는 정의롭다고 칭찬 받지만 북한 입장에서는 매국노에 불과하다. 일본 제국에 반대하고 조선의 독립을 위해 애쓴 후세 다쓰지나 가네코 후미코 같은 사람도 있다.
아즈텍의 말린체나 틀락스칼텍 등도 이런 종류의 매국노라는 평가를 받기는 하지만 사실 이는 지금의 기준을 당대에 적용한 오류다. 이들은 아즈텍인이 아니라 아즈텍의 피정복민들이었다. 마치 한국의 독립운동가들은 일본 제국을 배신했으니 매국노라는 소리나 마찬가지다. 다시 말해서 일제를 몰아내고 미국에게 한반도의 신탁통치를 부탁한 이승만[20], 영국을 몰아내기 위해 일본군과 손을 잡은 찬드라 보스처럼 자신들을 억압하는 적을 망하게 하기 위한 행동을 한 것일 뿐이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틀락스칼텍 독립운동 세력이 손잡은 스페인 식민 당국이 나중에는 뒤통수를 치고 틀락스칼텍도 점령해 억압하는 바람에 결과적으로는 지배자만 바뀐 꼴이 되어 버렸다.
자국 혐오에 극단주의적으로 심취한 자가 매국노가 되기도 한다. 한국에서 수익을 받아먹을 생각을 하면서 한국인을 내로남불스럽게 욕하는데 한국에서의 수익이 끊기면 다른 나라의 일자리에 기생하여 명예외국인 취급으로 경멸받는 처지가 되기도 한다. 이러한 부류는 온갖 사상, 철학, 학문에 기생하면서 내분을 일으킨 다음 다른 사람들이 실제로 피해를 보면 자기만 튀면서 그래도 자기는 옳았다는 정신승리로 철면피를 깠기 때문에 극단적인 검열 혹은 공론화 실패의 영향을 받지 않는 한 후세대한테서도 좋은 소리를 듣지 못한다. 같은 극단주의자라도 미래의 자신의 일자리가 될 경제적 공간을 망치고 그곳에서 사내 정치를 하는 다른 극단주의자를 좋게 볼 리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레바논에서는 베이루트 항구 폭발 사고 이후 정부에 대한 분노 때문에 "레바논 정치체제가 제대로 정립되기 전까지 프랑스가 다시 통치해야 한다. 향후 10년간 레바논을 프랑스 보호령으로 만들어 달라"는 온라인 청원이 시작 이틀 만에 5만 7천 명[21]의 서명을 얻은 바가 있다. #
하지만 이렇게 국가의 현실 때문이라는 옹호도 지나치면 자칫 일종의 논리적 오류로 변질될 위험이 있다. 위의 개인적인 부귀영화 추구를 이런 식으로 미화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대표적으로 연남생이 있다.
3.5. 나라에서 제대로 대접을 받지 못한 경우
정부나 국가 기관 등에서 제대로 된 국민 취급을 해 주지 않아 자국에 대한 실망심이나 복수심에 매국을 하는 부류. 대표적으로 나라로부터 사실상 죽으라는 명령을 받고 흉노로 귀화해 버린 전한의 중항열과 미국의 베네딕트 아놀드가 자신의 전공(戰功)을 인정받지 못하고 모함을 받아 영국에 매국을 한 사례가 있다. 이런 매국의 주요 인물은 실질적인 개인 군사 규모를 많이 쥔 경우가 많다. 4번 문단의 경우와도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자신이 속한 사회에서 부조리를 당하는 계층들이 이 유형에도 속하게 될 가능성이 높은데 대표적인 사례가 배정자다.[22]
고대 중국 중산국이라는 나라도 왕이 신하들에게 양고깃국을 대접하다가 하필 사마자기라는 신하 순서일때 양고깃국이 떨어지자 왕이 사과까지 했음에도 이에 원한을 품고 매국노가 되어서 중산국을 멸망시켰다. 다만 사마자기가 쪼잔하다고 볼 수 없는데 당시 고대 중국에서는 왕은 부족장들 대표에 불과했고 신하들은 부족장으로 자신의 부족과 가문을 대표한다고 볼 수 있기에 우리눈에는 별것도 아닌 일이지만 당시에는 자신이 속한 부족과 가문의 모욕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일이었다.
삼국시대 신라의 신하였던 검일과 모척은 대야성 성주 김품석이 자신들 아내를 겁탈하고 본인의 첩을 만들자, 복수심을 갖고 백제에 대야성 성문을 열고 항복하였다.
위의 나라가 막장인 경우 문단과 유사한 부분으로, 역시 자칫하면 논리적 오류라는 함정에 빠질 수 있다.
3.6. 정치 투쟁에 휘말려 망명한 경우
정치 투쟁에 휘말려서 역적의 모함을 받고 패배한 측이 타국으로 망명해 고국에 복수심을 품고 적극적으로 침공을 부추기는 경우도 있다. 대표적으로 오자서의 사례가 있으며 고구려의 연남생도 이 경우에 속한다. 조선시대에는 이괄의 난에 휘말려 후금으로 망명한 한윤 등이 있다.후백제에는 개국군주인 견훤이라는 유일무이한 사례가 있는데 무려 자기가 세운 나라를 자기가 멸망시킨 전례없는 사례다.
물론 좋게 봐주기 힘든 경우가 훨씬 더 많다. 모함이 아니라 진짜로 역적이었거나 정치 권력에서 퇴출될 만큼 무능한 권력자가 축출되자 타국으로 도망가서 그 나라에 빌붙는 경우, 높은 확률로 국가 공인 천하의 개쌍놈이 확정된다. 여기에 화룡정점으로 외세를 끌어들여 침공을 부추기는 경우 수십 년 후 그 나라 역사책에 매국노로 기록되어 후손들까지 욕을 먹는다.
3.7. 내 나라보다 다른 나라가 더 좋은 경우
다른 나라를 좋아하다 못해 자기 나라까지 팔아먹거나 배신할 수 있을 정도로 빠진 경우다.가장 유명한 케이스로는 표트르 3세가 있는데 프로이센 왕국에 대한 개인적 호감 때문에 즉위 직후 다 이긴 7년 전쟁을 자기 배를 자기가 갈라 여태껏 먹어치운 것과 함께 간이고 쓸개고 모조리 빼다 준 행동으로 현재까지도 대놓고 멍청이 취급을 받고 있다. 오죽하면 독일에서 그의 행보를 브란덴부르크 가의 기적이라고 조롱할 지경.[23]
대한제국의 매국노 중에는 송병준과 고영희[24], 이병무, 조중응[25]이 을사조약 훨씬 전부터 친일파였으며[26] 해외에서는 클레멘트 고트발트와 안타나스 스녜츠쿠스가 소련을 추종하며 나라를 소련의 손아귀에 넘겨줬다.[27]
3.8. 나라를 지키려다가 매국으로 변질된 경우
나라를 외국으로부터 지켜내겠다고 다른 외국에 팔아넘기는 특이한 경우다. 물론 명분으로 삼기에는 아주 그만인지라, 본심은 다른 데 있고 명분으로만 내거는 경우까지 포함한다면 아주 많다.아르날두 두스 헤이스 아라우조는 포르투갈로부터 동티모르를 독립시키기 위해 일본군과도 손을 잡은 적이 있고 인도네시아와의 합병을 추구했으며, 대한제국의 매국노 중에서는 조중응이 러시아로부터 조선을 지키려면 일본에 기대야 한다는 신념 하에 친일파가 된 후 러일전쟁 뒤에도 친일 신념을 고수하면서 나라를 일본에 팔아넘겼다.
캄보디아는 국왕이 나서서 크메르 왕국을 프랑스 식민제국에 팔아넘겼고, 이후에는 헹 삼린과 훈 센이 베트남에 나라를 팔아넘기고 캄푸치아 인민공화국의 주석과 총리가 되었는데, 크메르 왕국은 태국과 베트남 사이에서 나라 운명이 풍전등화였던 상황이라 어느 쪽이든 외세에 넘어가는 운명은 피할 수가 없었고, 캄푸치아 인민공화국이 적대하던 민주 캄푸치아는 그 악명높은 킬링필드를 일으켰다는 점에서 참작의 여지가 있다.[28] 게다가 참으로 아이러니하게도 두 사례 다 매국 후 오히려 매국 전보다 국가 상황이 훨씬 좋아졌다.[29]
3.9. 스스로의 생존을 위해서
점령당국의 위협과 압박 아래 자의에 의해서든 타의에 의해서든 점령국과 협조하는 것. 자국의 군대가 패배하고 침략국의 군대가 진주하는 상황에서 남겨진 민간인들이 홀로 침략국에 저항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과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경우 객관적으로 민족 반역자에는 해당되지 않겠지만, 당시에는 이들이 적의 식민지·점령을 이롭게 했다는 이유로 저항파에게 반역자로 간주되어 처벌당하는 일은 잦았다.가령, 중일전쟁 중 허난성 정저우는 1941년 8월 중순부터 일본군의 점령 하에 있었는데 이곳의 지방 유지들은 '유지회[30]를 만들지 않으면 마을을 초토화시켜버리겠다'는 일본군의 협박에 유지회를 만드는 등의 '한간'행위에 나서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불과 1개월 후 중국군이 돌아왔고, 중국군은 유지회의 조직자 12명을 한간이라는 죄명을 붙여 처단했다.
3.10. 농담조로 쓰이는 경우
무언가 큰 피해를 받았을 때 전생에 나라를 팔아먹었다고 한탄을 하거나 놀림을 받는 경우가 있다.[31] 또한 해외에 나가서 자국을 망신시킬 만한 민폐를 저지른 사람도 매국노라고 부르기도 한다. 유적에 낙서를 하거나 도둑질을 하거나 불법은 아니더라도 매너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는 경우가 이에 해당한다.스포츠계에서도 국제 대회에서 능욕급 참패를 당하고 돌아온 선수들을 매국노라고 부르기도 한다. 유명한 예시로는 마라카낭의 비극 당시의 브라질 축구 국대, 한일전에서 패배한 한국 선수들 등이 있다. 물론 반칙이나 승부조작을 한 것도 아니고 정정당당하게 붙어서 진 걸 가지고 매국노 취급을 하는 것은 좋은 팬의 자세가 아니다. 국가대표 경기에 스포츠토토 베팅을 하면서 대한민국 국대와 경기하는 반대쪽 나라의 팀에다가 베팅하는 행위도 농담삼아 매국노라고 불리기도 한다.
한국사 과목과 국어 과목을 놓은 학생들(역포자, 국포자)이 자조적인 농담으로 매국노라고 하는 경우도 있다. 휴대폰 유저들 사이에서도 소니 엑스페리아 등 일본 제품을 쓰는 사람을 보고 매국노라고 놀리기도 한다.
매국노의 원래 의미와는 거리가 멀지만, 한만두나 맛자욱 드립을 칠 때 긴 문장의 도입부에서 사용하기도 한다.
4. 매국노로 취급받는 인물 예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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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f 문서명 = 문서명 != null ? 문서명 : calleeTitle
의 [[매국노/예시#|]] 부분을}}} 참고하십시오.5. 고찰해 보아야 할 점
5.1. 국가를 개인이 팔 수 있는가?
이상의 문단에서 보았듯, 매국노는 이유야 어떻든 간에 자국을 다른 나라에 판 사람들을 가리킨다. 그러나 '매국노'라는 단어에는 다음과 같은 근본적인 의문이 있다. 바로 최소 수 백만 명의 인구가 거주하고, 나름대로 행정기관도 있는 한 국가를 개인 몇 명의 의지만으로 타국에 '판매'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가능하냐는 것이다. 이 문단은 매국노 모두가 정당화될 수 있다는 것이 아니라, 그런 매국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해야 한다는 취지이다.우리나라의 경우 대표적인 매국노는 이완용임이 의심의 여지가 없고, 그 밖에도 각계의 친일반민족행위자들을 매국노로 이른다. 그러나 정말로 이들 때문에 멀쩡하던 대한제국이 멸망했다고 할 수 있을까? 대한제국이 멸망한 이유는 당시 중국에서도 활발히 논의되었다. 물론 중국에서 한국을 본 시각이기 때문에 중국의 대외위기를 염두에 두었고 중국인들의 한국 인식이 반영될 수밖에 없었지만, 모든 이들이 망국의 책임이 이완용과 같은 친일파에게 있음을 주장하지는 않았다. 일본에서 14년간 망명 생활을 하였고 한일관계와 동북아 정세에 밝던 량치차오는 이렇게 썼다.
"금세의 입헌군주국에서는 군주가 정치적 책임을 질 수 없기 때문에 나쁜 짓을 하지 못한다. 따라서 군주의 현명함과 무능함은 그 나라의 정치와 별다른 관계가 없다. 하지만 전제군주국은 이와 다르다. 나라의 운명은 전적으로 궁정에 달려 있는데 군주 한 사람과 한 집안의 일은 사소한 일이라도 전체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중략) 소위 조선의 태황제는 재위 50년 동안 위로는 아버지에게 견제를 받고 집에서는 강한 부인의 눈치를 보며 아래로는 군벌세족으로부터 위협을 받고 좌우, 수족들에게 현혹되었다. 이로 인해 정치가 통일적으로 이루어지지 못하고 신속한 결단이 내려지지 못하였기에 나라의 원기가 점차 소진되고 말았다. 조선의 멸망은 사실 황제의 탓이었다."
량치차오, <조선 멸망의 원인(朝鮮滅亡之原因)> 中.
량치차오, <조선 멸망의 원인(朝鮮滅亡之原因)> 中.
그는 조선 멸망의 가장 큰 원인은 왕실에 있었으며, 특히 고종의 무능을 지적하며 역대 망국 군주의 악덕을 두루 갖춘 못난 자로 평했다. 량치차오는 뒤이어 왕실뿐만 아니라 조선의 사회에 대해서도 비판을 가하며, 다음과 같이 조선인을 근시안적이고 다혈질이며 게으른 민족이라고 했고, 그들의 게으름이 나라를 멸망에 이르게 한 중요한 원인이라고도 말했다.
"무릇 전 세계 중 개인주의가 가장 발달한 나라는 조선일 것이다. 조선인들은 수다 떠는 것을 제일 좋아한다. 두, 세 명이 만나면 하루 종일 수다를 떠는 데 지칠 줄 모른다. 조선인의 성격을 아는 외국인이라면 그들이 하는 말이 한 마디도 마음에서 나온 것이 아님을 알 것이다. 조선인들은 화나기가 쉽고 사고를 자주 저지른다. 수모를 당하면 반드시 팔소매를 걷어 올린다. 하지만 그들의 노여움은 하루도 지나지 않아 바로 가라앉는다. 조선인들은 미래에 대한 개념이 상당히 빈약하다. 서민들은 한 끼를 해결하면 바로 삼삼오오 차를 끓여 나무 그늘에서 모여 앉아 하루 종일 수다를 떨게 된다. 그들은 내일의 먹거리를 걱정하지도 않고 마치 황제처럼 태연자약하다."
량치차오, <조선 멸망의 원인(朝鮮滅亡之原因)> 中.
량치차오, <조선 멸망의 원인(朝鮮滅亡之原因)> 中.
정말로 당시 조선인들은 게을렀는데, 왜냐하면 많이 생산해봤자 양반들에 의해 몽땅 빼앗겼기 때문이었다.[32] 애써 일해도 결과물은 전부 착취당하고, 돌아오는 것은 없으니 자신들의 생존에 필요한 최소량만 일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량치차오도 조선의 양반을 '모든 악의 근원'이자 '나라가 망해도 나는 부귀하고 편안하다고 하는 자들'이라고 비난했고, 그 밖에도 양반의 허세, 관료의 부정부패와 자의적 수탈, 당쟁 등을 구체적으로 지적했다.
이러한 점은 조선인 여성 독립운동가 김재천도 일컫었다. 그녀는 조선의 멸망 원인을 일본 침략과 같은 외적 요인 이외에도 조선 내부의 내적 요인을 지적했다. 특히 김재천은 '조선인은 이기적이어서 가정을 사랑하고 동포를 사랑하지 않으며, 금전과 권세를 사랑하고 나라를 사랑하지 않으며, 당파를 지어 사사로운 이익을 영위하고 서로 알력을 하는 등 도덕적 문제가 많다'고 역설했고 '도덕이 추락하고 당파가 복잡함, 법률이 불공정하고 군벌세족이 횡포함, 내정이 문란하고 외교가 실패함, 교육이 부진하고 백성이 불량 관습이 많음, 생계가 어려워 비적이 봉기함'의 5가지 점을 비판했다.
물론 고종이 선대 왕들에 비해 특별히 무능했다고도 할 수는 없고, 나라의 멸망을 고종 1인에게 돌리는 것은 지나친 확대해석이지만 고종이 개혁을 미루지 않았더라면, 하다못해 을사조약의 체결에 대해 고종이 묵인하지 않고 반대 의견을 명확히 했다면 조약의 체결이 훨씬 어려웠을 것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따라서 그는 망국에 기여했다고 할 수 있으며, 당시 조선은 이미 썩을대로 썩어 있었다는 점에서 양반 계층을 위시한 조선 사회 역시 책임이 없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이완용이 나라를 팔았다'는 인식에만 매몰되어 친일파들이 을사조약, 정미7조약, 기유각서, 한일병합조약 등의 매국에 찬성하지만 않았다면 경술국치와 일제강점기가 없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안 될 일이다. 그러한 인식은 멸망의 책임을 이완용과 일본 제국의 탓만으로 돌려 망국의 근본적인 원인을 외면하거나, 나라 멸망의 길로 한 발자국씩 옮아갔던 우리 스스로의 반성을 회피하는 결과를 낳게 된다. 실제로 한철호 교수는 이완용 덕분에 권력을 유지하는 데만 급급하고 부정부패를 일삼던 고종과 집권층들이 책임을 벗어나게 되었다고 지적하였다.
"개인이 팔 수 있는 게 나라라면 그것은 이미 나라가 아니다. 조선은 이미 망하는 길로 들어서 있었고, 이완용은 나쁜 놈이지만 그가 없어도 조선은 망했을 것이다. 이완용에게만 조선 망국의 모든 책임을 덮어씌워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인물, 다각도로 보기] 매국노 이완용, 유레카 제463호, 정선학, 2022.6. 5p.
[인물, 다각도로 보기] 매국노 이완용, 유레카 제463호, 정선학, 2022.6. 5p.
5.2. 합작의 정치
"(합작이라는) 실제 숲의 중심부에 있는 것은 아마도 모호함의 덤불일 것이다. 그것은 바로 점령이라는 경험의 본질을 묘사하고 있다."
로더릭 케드워드, 합작에 대해 묘사하며. <근대 중국의 친일합작>, 티모시 브룩, 2008. 61p에서 재인용.
로더릭 케드워드, 합작에 대해 묘사하며. <근대 중국의 친일합작>, 티모시 브룩, 2008. 61p에서 재인용.
매국노가 생기는 배경에는 위의 대한제국처럼 평화적(?)으로 식민지가 되는 경우도 있지만, 세계사에는 그렇지 않은 경우가 더 많았다. 바로 적국이 전쟁을 통해 자국을 침략하고, 그 과정에서 현지인이 점령당국과 협조하면서 '매국노'가 생기는 것이다. 이러한 매국노 역시 비도덕적이고 반민족적이며 기회주의적이기만 한 인물로 묘사되고, 실제로 그런 인물들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정말로 그러한가? 피에르 라발, 비드쿤 크비슬링과 같이 점령에 저항하지 않고 적국에 투신한 행위를 일컫는,[33] 상대국과의 합작, 또는 협력(collaboration)이라고 불리는[34] 이러한 특수한 정치상황은 보기보다 훨씬 복잡한 배경이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 문단 아래의 사례들은 대부분 전쟁과 함께 출현한 매국노를 예시로 들었지만, 점령이라는 공통된 배경이 있다는 점에서 한국의 친일반민족행위자를 이해하는 데에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애초에 세간의 흔한 인식과 달리 합작 자체부터도 희귀한 일이 아니다. 일찍이 로버트 팩스턴은 비시 프랑스에 관한 연구를 통해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모든 프랑스인들이 독일에 저항했다'는 프랑스의 레지스탕스 신화를 깨부수었으며, 비시 프랑스도 대중적 지지를 얻었다는 점을 밝혔다. 마찬가지로 <근대 중국의 친일합작>을 통해 중일전쟁 시기 대부분의 중국인들이 일본에 저항하지 않았음을 증명한 티모시 브룩은 '점령은 합작을 낳는다'라고 단언할 정도로 적국과의 합작은 흔한 일이었다는 점을 역설한다.
"나는 앞서 점령은 합작을 낳는다고 주장했다. 점령은 어떤 엘리트들에게 좋든 나쁘든 보통의 정치적 환경에서는 그들이 가질 수 없는 기회를 주면서 합작을 낳는다."
<근대 중국의 친일합작>, 티모시 브룩, 2008. 36p.
<근대 중국의 친일합작>, 티모시 브룩, 2008. 36p.
"협력은 제2차 대전 시기 유럽에서만 있었던 특이한 현상이 아니라, 외부 침입자의 지배 하에 현지인이 자발적이던 타의에 의해서건 지배자의 정책에 협조했던 보편적인 역사적 현상이었다."
중일전쟁기 일본점령구의 로컬 경험 ― 對日 ‘협력’과 관련하여, 이은자, 2013.10. 3p.
중일전쟁기 일본점령구의 로컬 경험 ― 對日 ‘협력’과 관련하여, 이은자, 2013.10. 3p.
이미 학계의 여러 논문들에서는 합작 행위의 이해를 위해서라면 이러한 이분법적인 판단을 그만두어야 하며 이러한 합작이 또한 애국과 정반대의 말은 아니라는 인식을 공유하고 있다. 중일전쟁기 중국의 대일협력을 연구한 박상수 교수 역시 식민지·점령지 연구가 극복해야 할 관점으로, '이분법적 사고, 목적론적 접근법, 도덕론적 도그마, 민족주의적 해석'의 4가지를 제시하였다. 그 내용과, 실제 몇 가지 사례들은 아래와 같다.
5.2.1. 이분법적 사고 지양
"합작의 실제를 택한 것으로 보이는 사람들도 뒤늦게 생각해보면 간단한 것같이 보이는 것과는 달리, 또 뒤늦게 번성한 민족주의의 화법과 달리 선택과 모험의 복잡한 계산을 하고 있었다. 이 모든 것은 점령에 대해서 말하기에는 우리가 받아들였던 것이나 가정했던 것보다 더 모호한 이야기들이 있다는 것을 시사한다."
<근대 중국의 친일합작>, 티모시 브룩, 2008. 31~32p."
<근대 중국의 친일합작>, 티모시 브룩, 2008. 31~32p."
가장 기본적인 것으로 흔히 매국의 반대말은 애국이라고 생각되지만, 사실 그렇지 않다는 점이다. '점령자와의 합작'이란 단순히 애국과 매국이라는 이분법적으로 나눌 수 있는 것이 아닌, 애국과 매국 모두의 양면성을 가질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침략과 저항 사이에는 구별할 수 없는 이른바 회색지대가 있었으며 합작은 그곳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예를 들어, 중일전쟁 중 국민혁명군이 패퇴하자 산서성 다퉁 시의 지역 인민단체는 시민들을 향한 일본군의 보복을 우려하여 스스로 성문을 열어 일본군을 맞이했고, 기꺼이 '한간'이라는 악명을 뒤집어쓰고자 하였다. 한편, 충밍 섬에서 항일세력이 일본군이 탄 트럭을 폭파시키자 일본군은 백 명이 넘는 중국인들을 학살하여 응징하는 일도 발생했다. 전자의 경우 도시 전체가 일본군에 '투항'한 것과 다름없음에도[35] 이를 매국이라고 단정지을 수 있는가? 후자의 경우 '정의로운 저항'은 민간인의 학살을 부수적인 피해로 무시하고 계속 저항운동을 해야 마땅하다고 여길 정도로 위대한 것일까? 모든 저항이 민족을 위한 일이었다고 말하기 어려운 것과 마찬가지로, 침략자에 대한 협력이 곧 민족에 대한 반역이라고 할 수는 없다. 심지어 중일전쟁 중 충밍 섬에서는 지방의 저항세력은 일본군과 투쟁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지역 민중을 약탈하는 데 집중했다고 한다.
"그리고 적어도 본 사례연구를 통해서 내가 재구성할 수 있는 저항의 현실을 보면, 저항운동은 일본인들과 전투하기보다는 지역주민들을 잡아먹는 데 대부분의 힘을 소모했다. 게릴라가 공격을 가했을 때 그것은 지역주민들에게 결과적으로 재난을 가져다주었다."
<근대 중국의 친일합작>, 티모시 브룩, 2008. 264p.
<근대 중국의 친일합작>, 티모시 브룩, 2008. 264p.
이는 단순히 권력이 없어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일반인들에게만 통하는 논리가 아니다. 가령, 일본 치하에서 현 지사로 복무했지만 한겨울 현이 경제위기에 빠지자 사재를 털어 지은 솜옷 100벌을 빈민들에게 나누어준 전장현 지사 궈즈청의 경우에는 어떻게 판단할 것인가? 일본의 괴뢰조직인 난징 자치위원회의 회장직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했지만 그 대가로 일본군의 학살 중지를 요구한 타오시싼은 또 어떠한가?[36] 존 헌터 보일은 왕징웨이의 대일합작에 대해 말하면서, 왕징웨이에게는 '비열하고 이기적인 동기'도 있었지만 '고상하고 애국적인 동기' 역시 있었다고 하였다.[37] 우리가 왕징웨이의 매국적인 동기에만 집중하고, 애국적인 동기에는 눈길을 주지 않는 것이 타당한가? 티모시 브룩은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피난민들에게는 식량을, 일본군에게는 매춘부를 공급한 모호함의 대가인 난징의 지미 왕(왕청디엔)[38]은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가? 피난민들을 먹여 살리는 것은 저항의 행위인가 아니면 점령자가 지배를 확립할 수 있도록 돕는 길인가? 매춘부를 공급하는 것은 점령자와 합작하는 것인가 아니면 군인들에게 성행위를 위한 비폭력적인 기회를 줌으로써 대다수의 여성들을 보호하는 길인가? 만약 지미 왕의 개인적 의도가 일본군을 돕거나 방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뜻밖의 기회를 이용하여 부를 얻으려고 한 것이었다면 그가 한 일에 대한 우리의 평가는 달라질 것인가?"
<근대 중국의 친일합작>, 티모시 브룩, 2008. 316~317p.
<근대 중국의 친일합작>, 티모시 브룩, 2008. 316~317p.
뿐만 아니라 호세 라우렐과 같이 일본에 협조한 필리핀의 엘리트들을 가리켜 제레미 옐런은 양면전술을 구상한 애국적 협력자로 평가했으며,[39] 파시즘과 가깝긴 했지만 동시에 평화를 유지하여 프랑스 국민들을 보호하기 위해 출마한 마르셀 데아도 있고, 한간재판 당시 자신들의 일본 투항이 중국의 생존을 위해서였음을 열변한 중국의 고위 한간들도 있다. 당장 매국인지 애국인지 논란이 있기로 유명한 필리프 페탱과 윤치호는 더 말할 필요조차 없다. '애국주의'는 저항파들의 독점물이었던 것이 아니며, 우리가 매국노라는 단어를 쉽게 사용하는 것과는 달리 이러한 사례들은 점령시기에 흔히 나타난다.
5.2.2. 목적론적 관점 지양
"현재의 우리가 과거의 역사를 보는 건 흑백이 분명한, 결과 중심적인 관점이 되기 쉬워요. 결과를 아는 상황에서 누군가를 판단하는 경우가 많다는 거죠. 하지만 당대인의 관점으로 봤을 때 어떤 일도 원래부터 결과가 내정돼 있는 상황에서 발생하지 않고, 막상 들여다보면 굉장히 복잡한 경우가 많아요. (중략) 단순히 모든 것의 좋고 나쁜 부분을 기계적으로 보지 말고, 최대한 당대인의 입장에서 그를 하나의 ‘연극 속 인물’처럼 바라볼 때 우리가 더 당대를 입체적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는 걸 이야기하고 싶었습니다."
국립중앙박물관 강민경 학예연구사.
국립중앙박물관 강민경 학예연구사.
합작에 대해 합리적인 이해를 위해서라면, 최종 승리자인 저항자의 입장을 전제로 합작자들의 '죄'를 설명하는 목적론적 사고 역시 그만두어야 한다. 즉 전쟁의 과정과 결과를 모두 아는 현재의 관점에서 과거의 합작을 평가하는 것이 아닌, 자국이 점령당하고 어떤 세력이 이길지 한치 앞도 알 수 없었던 당시의 관점에서 합작의 배경과 동기를 이해해야 한다는 뜻이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인 1940년 유럽에서는 독일과의 협력이 대세였고, 저항 세력은 무시될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독소전쟁에서 재빠르게 소련을 항복시킨다는 독일의 구상이 실패하고, 전쟁에서 독일이 승리할 것이라는 전망이 점차 불투명해지고서야 유럽에서의 협력은 점차 저항으로 선회하기 시작했다.[40] 그럼에도 전쟁이 끝나자 저항 세력에 의해 만들어진 레지스탕스 신화가 전세계적으로 생겼다는 사실은[41] 승자에 의해 패자가 재단된 목적론의 대표적인 예라고 할 것이다.
이런 결과론적인 판단은 당시 현실의 역동성을 무시하게 만든다. 만일 제2차 세계 대전에서 나치 독일과 일본 제국이 승리했다면 각각의 합작정부인 비시 프랑스와 왕징웨이 정권이 프랑스, 중국의 정통성을 이었을 것이고, 어쩌면 오늘날까지 '무의미한 저항 대신 합작을 택해 국익을 수호하였다'는 평가를 받았을 것은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그렇게 광복이 실현되지 못했더라면 친일반민족행위자는 '시국의 변화를 빠르게 받아들인 현실주의자'로, 독립운동가들은 '과거에 연연하여 치안만 불안하게 한 분리주의자이자 수구파'로 평가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전쟁의 승패가 달라졌다고 해서 합작자에 대한 평가까지 정반대로 바뀌는 것이 합당한가? 만약 반대로 목적론적으로 역사를 평가하고자 한다면, 일본에 복종하며 살 수밖에 없었던 일제강점기의 조선인들 역시 저항을 하지 않고 일본에 순응했으므로 매국노와 다름없다는 평가도 가능할 것이다. 그러한 설명에 대해 윤치호는 이렇게 지적했다.
"국내에 살 수밖에 없었던 사람으로서 일본의 신민이 되어 그들의 요구와 지령에 순종하지 않고 거절할 수 있었던 사람이 누가 있는가?"
<윤치호 일기>, 역자 서문 중. <근대 중국의 친일합작>, 티모시 브룩, 2008. 11p에서 재인용.
<윤치호 일기>, 역자 서문 중. <근대 중국의 친일합작>, 티모시 브룩, 2008. 11p에서 재인용.
마찬가지로, 친일반민족행위자 인물 중 서정주와 백선엽처럼 경술국치 전후에 출생한 경우도 특히 유념하여야 한다. 이들은 각각 1915년생과 1920년생으로 이미 대한제국 멸망 후에나 태어났을 뿐더러, 여기에 '애국'이나 '민족' 관념을 이해할 나이 15살을 더하면 적어도 1930년대, 즉 조선이 식민지가 된지 20년 이후에나 활동을 시작할 수 있었던 것이 된다. 매각할 국가가 이미 없을 때 어떻게 매국을 할 것인가? 일평생 국가의 보살핌을 받아본적도 없고 민족의식이 주입되기도 어려운 시기에 자란 이들을, 어떻게 '매국'이라거나 친일'반민족'행위자라고 비난할 수 있겠는가?
1930년대 조선에서는 광범위한 수준에서 일본과 협력하려는 조선인 계층이 형성되었는데, 이는 당시 조선인 협력자들도 민족 내부의 반일 정서를 알고는 있었지만 이제는 중등교육 이상의 교육을 받게 되어 조선총독부의 하급 관리나 교원이 될 수 있었다는 희망에서 기인한 일이였다. 독립을 이룬 오늘날의 관점이 아닌 나라가 식민지 상태까지 떨어진 당시의 관점에서 보면, 이미 망한 나라를 위해 싸우기보다는 현재 주어진 상황에 적응해서 힘 닿는 데까지 진출하는 것이 가장 합리적인 선택이었을 것이다.[42] 일제 치하의 35년은 결코 적은 시간이 아니며,[43] 우리가 친일파들의 행동을 보고 비난하기 전에 그들의 다양한 배경을 먼저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공통되게 중요한 것은 도덕적 단죄가 아니라 친일의 역사적 이해가 우선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중략) 친일파를 연구하는 역사가의 직무는 연구 중인 친일파를 만들어낸 규범과 조건을 탐구하는 데 있는 것이다."
박영철 군산대학교 사학과 교수, 역자 서문 중. <근대 중국의 친일합작>, 티모시 브룩, 2008. 11p.
박영철 군산대학교 사학과 교수, 역자 서문 중. <근대 중국의 친일합작>, 티모시 브룩, 2008. 11p.
5.2.3. 도덕론적 접근 지양
"내가 독자들에게 유일하게 부탁하고 싶은 것은 일본과 합작한 사람에 대한 유죄 판단을 그들의 활동을 다 보기 전까지는 보류해달라는 것이다. (중략) 누가 일본과 거래를 했는가를 찾지 말고 이러한 거래를 통해 그들이 저지른 선이나 악을 찾기 바란다."[44]
<근대 중국의 친일합작>, 티모시 브룩, 2008. 37~38p.
<근대 중국의 친일합작>, 티모시 브룩, 2008. 37~38p.
합작자들을 도덕론에 입각하여 판단하는 것도 적절하지 않다. 이는 곧 승리자(저항자)의 도덕론으로만 판단하게 되기에 '합작자들은 부도덕하다'는 생각을 갖게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비드쿤 크비슬링처럼 과거부터 현재까지 두고두고 욕먹는 합작자가 있는 한편, 왕다셰(汪大燮)처럼 과거에는 매국노로 비난받았으나 현재에 와서 그 오명을 벗은 인물도 있고,[45] 수카르노처럼 과거와 현재 변함없이 민중으로부터 칭송받는 합작자도 있다. 심지어 수카르노는 일본이 전쟁 말기까지 계속해서 인도네시아의 자원을 수탈할 때에도 적극적으로 일본과 협조했는데도 말이다.
즉, 경우에 따라 합작은 비도덕적이지 않았고, 오히려 추앙받는 경우도 있으므로 적과의 합작이라는 행위만을 보고 이를 비도덕적인 행위로 단정지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합작이라는 행위가 도덕적이지 않다는 이유만으로 합작자를 비난하게 되면 합작자의 논리와 행위에 대한 이성적인 이해를 불가능하게 되고, 그저 지워야 할 흑역사로만 취급하게 된다. 이는 합작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방해한다.
흔히 존 라베로 유명한 '난징안전구 국제위원회'는 일본군의 난징 대학살 앞에서 난징 시민들을 구제한 것으로 오늘날까지 존경받고 있다. 그러나 같은 시기 일본의 괴뢰행정기구인 난징 자치위원회에서 일한 왕청디엔(지미 왕)도 비슷한 활동을 하였다.[46] 왕청디엔은 난징 자치위원회의 본래 목적에 따라 난민들에게 음식을 공급하였고, 국제위원회도 식량과 식량을 나를 트럭을 공급하며 동시에 일본의 난징 자치위원회와도 협조했다. 티모시 브룩은 두 조직의 관계를 '공모'라고 명명하며, 다음과 같이 썼다.
"지미 왕(왕청디엔)이 (일본의) 신질서에 봉사한 것은 저항 전쟁과 시기가 일치했기 때문에 그의 친일합작은 그를 국제위원회 위원과는 반대로 비도덕적인 쪽에 세우게 만들었다. (중략) 우리는 국제위원회와 지미 왕을 선악의 양편에 모두 자리 잡게 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지미 왕은 난징 민중들뿐만 아니라 점령자들을 위해서도 일했다. 그리고 보기에 따라서는 서양인들도 중국의 친일합작자와 그들의 점령정부를 강화시켜줄 뿐이었던 공공질서의 회복을 도왔던 만큼 난징 민중들뿐만 아니라 점령자들을 위해서도 일했던 것이다."
<근대 중국의 친일합작>, 티모시 브룩, 2008. 216p.
<근대 중국의 친일합작>, 티모시 브룩, 2008. 216p.
국제위원회 위원이었던 설 베이츠는 이후 1941년 6월 뉴욕의 한 강연에서 '국제위원회의 구제공작이 합작정부를 강화한 게 아니냐'는 질문을 받고, "일본에 대한 기여는 근소하다. 중국인의 사기와 인격에 대한 기여는 일본인을 위해 하는 모든 것을 보충하고도 남는다는 것이 여론이다"고 대답했다. 이는 국제위원회의 활동이 정당했음을 역설하는 내용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국제위원회 당사자들도 일본에 대한 기여가 '적어도 근소하게는 있었다'는 점을 은연중에 자백한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두 조직은 활동과 결과 면에서 비슷했다. 자치위원회와 국제위원회 모두 난민들을 먹여살렸고, 좋든 싫든 일본의 점령지 통치를 도왔다. 그러나 국제위원회는 오늘날까지 칭송받는 한편, 왕청디엔은 1939년 중국 정부가 출판한 한간 명단에 오른다. 국제위원회를 도덕적이라고 칭한다면, 왕청디엔과 같은 합작자들도 도덕적이라고 칭하지 못할 이유가 있을까? 이렇듯 도덕적으로 합작을 판단하기 전에 합작의 복잡함과 모호성을 먼저 이해해야 할 것이다.[47]
5.2.4. 민족주의적 해석 지양
"다행히 새로운 협력연구 성과들은 그러한 한계를 넘어 협력이 저항 민족주의로 단순화될 수 없는 수많은 경쟁적 요소들을 포함하는 복합적인(complex), 모호한(ambiguous), 양가적인(ambivalent), 그리고 진화하는(evolving) 행위였음을 밝혀내고 있다."
내셔널리즘의 張力과 對日 ‘協力(collaboration)’의 이해 — 중일전쟁기 ‘漢奸’ 문제 再考 —, 박상수, 2017.12. 15p.
내셔널리즘의 張力과 對日 ‘協力(collaboration)’의 이해 — 중일전쟁기 ‘漢奸’ 문제 再考 —, 박상수, 2017.12. 15p.
내셔널리즘적인 역사 해석이 위험한 이유는, 민족주의적 해석은 종종 역사를 왜곡시키기도 할뿐더러 시기적으로 강력한 민족주의의 형성 이전에, 또는 지역적으로 민족주의가 생기기 이전에 발생한 역사 규명에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48] 설령 우리나라처럼 민족주의가 강한 나라라고 하더라도 이러한 해석은 합작의 복잡한 형태와 측면들을 무시한 채 단순히 '반민족적 행위'로 단정짓기 때문에 합작의 또 다른 해석을 방해한다. 민족주의적 접근은 그저 역사의 수많은 해석법 가운데 한 가지로만 여겨야 한다.
존 헌터 보일은 필리핀, 인도네시아, 인도, 버마의 경우 일본과의 합작은 애국적인 것으로 평가된다고 언급하면서, 적과의 합작은 민족주의와 통할 수 있고, 어떤 경우에는 높이 평가받기도 했다고 주장한다. 당시 동남아시아에서는 대부분의 국가가 이미 제국주의 열강에게 지배당하던 시기였기에, 동남아시아의 정치인들은 강력한 일본의 힘을 이용해 서양 식민지배를 몰아내고 독립을 이루고자 했다. 동시에 일본과 독일의 침략으로 직접적으로 주권이 침해된 중국, 프랑스와는 달리 이미 주권을 잃은 상태였으므로 대중적으로도 합작의 정당성을 얻기에 수월했다. 따라서 동남아시아에서의 합작은 단순히 일본에게 복종하는 '괴뢰'가 아니라 독립된 주권 국가를 세우려는 민족주의적이고 애국적 행동으로 간주되어 왔으며, 상당한 대중적 호응과 지지를 얻을 수 있었다.
물론 일본 또한 서양 제국주의자들과 크게 다르지는 않았기에(...) 일본과의 합작을 통한 독립은 그 뜻을 이룰 수 없었지만, 이들 지역에서 합작자는 대부분 매국노로 여겨지지 않았다. 필리핀의 합작자 호세 라우렐은 전후 미국에 의해 반역 혐의를 받았지만, 대통령 명령에 따라 재판도 받지 않고 사면되었을뿐더러 현대 필리핀사 역시 그를 공식적인 필리핀 대통령으로 포함시키고 있다. 찬드라 보스는 일본의 항복 직후 불행한 비행기 사고로 사망하였지만, 모한다스 카람찬드 간디는 "잘못된 길을 갔지만 확실히 애국자였다"고 평했고 그가 이끌던 인도 국민군 병사들이 인도로 귀환할 때도 대중들의 지지 시위가 잇달았다.
한편, 유럽에서의 합작자들은 나치 독일을 미래의 물결로 보고 자신들의 정치적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독일의 정책과 제도를 모방해야 한다고 확신한 경우가 적지 않았다.[49] 네덜란드의 안톤 뮈서르트의 경우, 독일과의 합작을 통해 대네덜란드주의를 이룩하려고 한 애국・민족주의적 동기가 영향을 미쳤으며 헝가리의 살러시 페렌츠의 경우, 과거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명예를 되찾기 위해서 합작을 결행했다. 프랑스의 피에르 라발 등은 나치즘과의 초국가적 연대 의식을 보여주며 프랑스의 주권을 희생하면서까지 독일의 대의를 추종했는데, 그들은 파시즘을 기초로 한 형제적・박애적 질서와 전 유럽의 연대를 지지했다. 즉 이들은 프랑스 1개 국가의 국익보다는 유럽 전체의 이상을 보기를 선호했던 것이다.
그리고 합작이 '반민족주의적'이었다는 도식도 꼭 맞지는 않는데, 로이드 이스트만은 많은 사람들이 중일전쟁기를 중국의 적개심과 민족주의가 고양된 시기로 기억하고 있지만 이는 일부에 불과했다고 하며, 심지어는 난징 대학살 이후에도 많은 중국인, 특히 농민들은 일본군에게 적대적이지 않았으며 중일전쟁은 일반 민중, 특히 대부분의 농민 개개인과는 무관한 전쟁이었다고 역설했다. 비슷한 시기 화북의 농촌을 탐사하던 일본 남만주철도주식회사 연구원들도 농민들은 일본군뿐만 아니라 민족주의자, 한간들에게도 무관심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일본 점령시기 전장 현의 모습을 기록한 책 <전장윤함기>를 저술한 장이보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적에게 짓밟힌 적이 없는 곳에 있던 어떤 동포들은 적이 침략했다고도 생각하지 않고, 다만 체제의 변화일 뿐이며 우리는 여전히 전과 같이 삶을 즐기면서 평화롭게 살고 우리의 일에서 기쁨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장이보. <근대 중국의 친일합작>, 티모시 브룩, 2008. 325p에서 재인용.
장이보. <근대 중국의 친일합작>, 티모시 브룩, 2008. 325p에서 재인용.
당시 민중은 국가와 민족보다는 자신과 가족의 안전에 관심을 가졌고 일본군이 중국군보다 더 위험한 적이라고 보지 않았다. 오히려 일본군의 점령으로 무정부 상태가 계속되면서 지역의 각종 세력은 이때를 틈타 자신의 생존과 세력 확장을 우선 목표로 삼기도 하였다. 결국 민족주의가 강하다고 여겨지는 중국에서조차 합작이 반민족과 반드시 같은 위치에 있지는 않았던 것이다.[50]
민족주의로 둘째가라면 서러울 한국 또한 예외는 아니다. 박상수 교수는 중화민국 임시정부(괴뢰정부)의 수장 왕커민과 "나는 민족을 위해 친일했소"라는 말로 유명한 이광수를 '협력적 애국주의', '친일 민족주의'로 표현한다. 이러한 점은 광복 후 여러 친일파들에게서도 확인되며, 이를 변명으로 치부해버릴 수도 있겠지만 그렇지 않을 가능성도 간과하지는 못할 것이다. 따라서 합작은 그저 반민족행위로만 받아들일 수는 없으며, 설령 반민족행위라는 근거가 있다고 해도 모든 합작이 국가와 민족에 대한 범죄행위로 단죄될 수는 없는 매우 복잡하고 다양한 경우를 포함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5.3. 참고문헌
- 근대 중국의 친일합작, 티모시 브룩, 한울아카데미, 2008.
- 내셔널리즘의 張力과 對日 ‘協力(collaboration)’의 이해 — 중일전쟁기 ‘漢奸’ 문제 再考 —, 박상수, 2017.12.
- 글로벌 비교의 시각으로 본 중국의 戰時 협력(1937-1945) ― 왕징웨이(汪精衛) 정권에 대한 비교 분석 ―, 박상수, 2025.12.
- 식민지·점령지 협력자 형성의 면면 : 일제하 한국, 중국, 만주, 대만, 베트남 및 독일 치하 유럽의 경험 비교, 박상수, 2006.12.
- 중일전쟁기 일본점령구의 로컬 경험 ― 對日 ‘협력’과 관련하여, 이은자, 2013.10.
- 국경을 넘나들던 친일파 — 이완용과 근대 중국의 매국노 담론(1905~1945) —, 황영원, 2021.6.
- [인물, 다각도로 보기] 매국노 이완용, 유레카 제463호, 정선학, 2022.6.
- [인물 바로 보기 2] 이완용, 망국의 책임자에게 면죄부를 준 친일파의 거두, 내일을 여는 역사 제15호, 한철호, 2004.3.
- 친일과 대한민국, 철학과 현실 통권 제126호, 최진석, 2020.9.
6. 여담
- 과거 사례에 대한 매국 여부는 현대에 와서 정해지는 경우가 있다. 예를 들어 낙랑공주, 경순왕, 정비 안씨는 각각 엄연히 고구려, 고려나 조선에게 말 그대로 나라를 넘겼던 사람들이지만 현대에서 같은 '한국사'로 취급되는 한반도 국가에게 나라를 판 것이기에 매국노라고 손가락질을 받지 않는다.[51]
- 이것과 비슷한 형태로 이중간첩을 들 수 있다. 다만 이중간첩은 성격이 다양해서 무조건적인 비교는 어렵다. 양측에서 정보를 교환하면서 결과적으로는 자기가 소속된 쪽에 유리하게 첩보전을 하는 이중간첩도 있기 때문이다.
- 단테의 신곡 지옥편에 따르면 매국노들은 지옥 마지막층에서 다른 배신자들과 함께 얼음 속에 갇혀 고통 받는다고 한다. 물론 사익을 위해 국가를 배신한 매국노와 정당한 이유로 왕과 정권에 반기를 든 사람은 구분했다. 후자는 매국노가 아니라는 것이다.
7.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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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나치 독일의 침공에 적극 협조하고 스스로 독일의 괴뢰 정부의 수장이 되어 조국인 노르웨이뿐만 아니라 서양 전체에서 매국노의 대명사로 통한다. 매국노를 뜻하는 영어 단어 Quisling도 이 사람의 성에서 유래했을 정도다.[2] 언어의 역사성에 따라 중세에는 '사고'의 뜻을 가졌던 '사랑하다'가 현대에는 '애정'의 뜻을 주로 가지게 된 것처럼 단어는 뜻이 바뀔 수 있다.[3] 예컨대 평시 동해의 제해권과 제공권을 유지하고 대일 비상사태 때 반격의 주력을 맡을 동해와 포항의 해군 1함대 모항과 대구의 공군 제11전투비행단/포항경주공항의 해군항공사령부, 동해 해상치안을 총괄하는 동해지방해양경찰청 산하 해양경찰서 등의 국방/안보 관련 기관에 대한 고의적이고 조직적인 물리적 사보타주 등. 꼭 물리적 사보타주가 아니더라도 이 기관들 내부의 민감한 기밀정보를 무단으로 수집하고 고의적으로 일본에 유출하는 것도 충분히 적대적 행위다.[4] 한 예로 신기남은 아버지 신상묵이 독립운동가들을 고문하던 악질 친일 고문경찰이었단 것이 밝혀지자 열린우리당 의장직에서 사임해야 했으며, 대한제국의 매국노 후손(물론 친일파) 중 해방 후에도 권세를 누린 경우도 실무 부역자(정확히는 판사) 출신이던 민복기와 군인 출신이던 이종찬 2명이 전부다. 게다가 이종찬은 해방 후 출사를 마다하며 민족의 죄인이니 자숙의 시간을 가져야 한다고 했고, 결혼 상대방 집안이 한미하다고 모친이 탐탁잖아 함에 "친일파인 우리 집안은 뭐가 그리 잘났습니까" 하고 물리치기도 했으며, 육군참모총장으로서 독립군 출신을 가능한 한 중용하려고 애쓴 등 나름대로 반성하는 모습을 보인 경우다. 이순용은 부친이 정미칠적이지만 본인이 독립운동가로 활동했기 때문에 논외.[5] 한 쪽에서는 패륜아, 한 쪽에서는 매국노라는 소리가 들려오는 데다 돈 문제 등 실질적인 위협도 받으니 정말 미칠 수밖에 없다. 가족들은 그 매국노의 입장에 동의하지 않더라도 가족 중 한 명이 뭔가 액션을 취하면 자기들이 눈에 띄어 사회적 질타를 받거나 가족간 문제가 생기는 등 조용히 살기 어려워지니 잠자코 있으라는 의미에서 각종 위협을 가할 수도 있다. 매국노나 역적의 가족들이 가만히 있는 이유는 꼭 그 사람에게 동의해서가 아니다. 오히려 그렇게 제 자신을 쥐죽은 듯 살아야 하게 만든 그 사람이 미웠으면 미웠지 좋아할 이유가 없다. 물론 가정에서 세뇌를 받아 그런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은 어디까지나 실리적으로 혹은 가족을 비판한다는 것에 대한 본능적 거부감에 의해 그러는 것이다.[6] 대표적인 인물이 우장춘, 이순용&이관용 형제, 박승유. 친가, 외가, 처가 모두 악질 매국노와 연관된 구용서도 친일 행위에는 전혀 가담하지 않았다.[7] 독재자라거나, 민주주의 국가를 통치하면서도 비민주적 행각과 부정부패, 국가 경영 실패를 유발했다거나, 과거 식민지배국을 위시한 외세에 굴종적 외교를 펼쳤다거나 등[8] 소속 정당이 같다거나 등[9] 전임자와 같은 세력(정당 등)인지 다른 세력인지는 상관없다.[10] 대표적으로 아돌프 히틀러의 집권을 묵인한 파울 폰 힌덴부르크(비록 바이마르 공화국의 태생적, 근본적 체제 모순이 컸다고는 하나 이를 감안해도 그의 묵인이 낳은 나비효과가 너무 컸다), 이디 아민이라는 잔인한 군인을 비호하고 키우며 인류사 최악의 괴물을 낳은 밀턴 오보테(심지어 이 자의 나비효과로 요웨리 무세베니와 조지프 코니까지 나왔다), 극단적 무능과 종미로 폴 포트 집권의 발판을 깔아준 론 놀, (공산정권 중에서도 한 손에 꼽힐 정도로 악랄했던) 엔베르 호자 체제를 끝내고도 나라를 내전으로 몰아넣으며 그 호자의 후예에게 정권을 넘겨준 살리 베리샤(이미 "내전 한참 전"이던 1992년에 알바니아 경제가 석기시대급으로 망가져 정상적인 경제 복구 방법이 불가능했단 걸 감안하더라도 그 호자의 후예에게 정권을 넘겨준 것 하나만으로도 어떠한 참작도 불가능하다), 무모한 친위 쿠데타 시도로 탄핵당하며 디나 볼루아르테의 대통령직 계승만 자초한 페드로 카스티요가 있다. 물론 장면, 무함마드 무르시, 토마 상카라처럼 비합법적으로 축출되거나 숭정제, 미하일 고르바초프, 빅토르 유셴코, 가브리엘 보리치처럼 진짜 본인이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을 정도로 악재밖에 없거나 시대가 기울어가던 경우는 동정표를 얻곤 한다. 레흐 바웬사처럼 본인의 업적이 인류사급으로 크거나/후임이 (독재정당의 후예라고 해도) 진짜로 유능했던 경우 역시 논외다.[11] 넓게 보면 나라를 더 잘 살게 하기 위해 다른 정부에 내정간섭 수준의 도움을 요청하는 것도 매국이라고 볼 수 있다. 과거 한국을 미국의 51번째 주로 만들자! 따위의 유형이 이런 케이스다. 실제로 많은 지역에서 이걸 진지하게 고려하고 있다. 더 넓게 보아 아직은 두 정부가 서로를 통일되어야 할 분단국가로 보니 문제는 없지만 서로 다른 나라로 보게 된다면 북한 입장에선 민주주의와 민족 통일을 위해 위해 남한에 흡수되자는 의견도 매국일 수 있다. 엄밀히 따지면 아직 다른 나라는 아니니까 현재는 이건 매국은 아니고 그냥 반정부집단에 가담 혹은 그를 지지하는 반역에 가깝지만 실제론 준 매국에 가깝게 취급한다. 특히 북한에선 남한을 미국의 괴뢰정권으로 보기 때문에 남한 주도의 통일 지지는 나라를 미국에 갖다 파는 매국이라고 해도 무방하다.[12] 맨 위에 나오는 이완용 부고 기사에서 따온 문구다.[13] 대표 사례가 냉전기 미국의 간첩인 로버트 핸슨과 올드리치 에임스.[14] 뉴욕 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미국이 공개적이고 직접적인 압력을 통해 박 대통령을 제어해 줄 것"이라든가 "이를 위해 한국에 대한 원조를 중단해야 한다"는 등의 발언을 했다.[15] 주지의 사실로 이게 부마민주항쟁, 10.26 사태로 이어졌다.[16] 다만 반데라가 나치와 협력해 소련인, 유대인, 폴란드인을 학살한 행위로 대놓고 찬양하지 못하고 있다.[17] 이러한 경우는 지배층들과 기득권층들이 이를 방치해 두거나, 자신을 제외한 사회 구성원들이 자신들에게 불만을 표출하는 것을 막기 위해 소수 계층에 대한 차별을 조장하거나, 국민 중 일부를 프락치로 만드는 등 부조리와 병폐를 고의적으로 조성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18] 덤으로 베트남의 반식민지 시절도 폴 포트 시절보다 훨씬 살기 좋았고 죽은 사람도 더 적다못해 인프라도 복구되고 인구도 늘어났다.[19] 정확히는 일본의 군사 정보를 캐내기 위해 대한제국 정보대를 창설했다가 너무 비관적인 정보들을 얻게 되어 친일로 기울어진 것이다.[20] 다만 이 경우는 이승만의 탄핵 사유 중 하나로 언급될 만큼 당시 대한민국 임시정부 내에서도 큰 논란거리였다.[21] 당시 레바논 인구의 1% 이상이다![22] 아버지 배지홍이 흥선대원군을 지지했는데 그만 반대 세력인 명성황후의 민씨척족이 정권을 잡는 바람에 배지홍은 처형당하고 배정자는 4살에 어머니와 함께 노비로 전락하는 비참한 처지가 되고 말았다. 이로 인해 배정자는 명성황후와 민씨척족을 증오하기 시작했으며 일본이 명성황후를 암살하자 일본에게 붙었다. 참고로 나중에 동학/갑신정변 세력도 일본의 편에 섰는데 이들 역시 명성황후와 민씨척족들의 횡포에 피해를 입어서 명성황후와 민씨척족에 대한 증오심을 가지고 있었다.[23] 다만 표트르 3세는 참작 여지가 있는 게 그냥 독일 귀족으로 살던 사람이 외할아버지 혈통 때문에 억지로 러시아 황제로 추대된 것이다. 심지어 러시아 혈통이던 어머니도 표트르 3세를 낳자마자 죽어서 표트르 3세는 러시아인의 정체성을 느낄 계기가 전혀 없었다.[24] 무려 강화도 조약 이전부터 친일파였으며, 매국노 중에서도 개화파 출신인 극히 드문 예이다.[25] 하술하듯 매국노 중에서도 정말 특이한 부류에 들어간다.[26] 우연히도 이들은 송병준을 제외하면 모두 정미칠적, 경술국적에 모두 들어가는 인물이기도 하며 송병준도 정미칠적에 들어간다.[27] 이들은 나치의 침략 때는 나치 저항 운동을 벌였다.[28] 심지어 훈 센은 민주 캄푸치아 정권의 정책의 영향으로 첫 아들을 잃기도 했다.[29] 전자는 식민지가 된 후 오히려 과거에 잃은 영토까지 되찾았고, 후자는 킬링필드 종결 반 세기도 안 되어 최빈국에서 탈출했다. 후자의 경우 여전히 나라꼴이 막장이긴 하지만, 킬링필드 당시 나라의 기틀이 뿌리까지 뽑혔음을 감안하면 이 정도도 선방한 셈이다.[30] 일본 제국군의 중국 점령지 관리 1단계 조직인 '치안유지회'로 추정된다. 2단계는 치안유지회를 자치위원회로 재조직하는 것, 3단계는 자치위원회를 다시 현공서로 바꾸는 것이었다. 자치위원회와 현공서의 수립은 파괴된 지역의 재건을 맡은 일본인 선무반의 역할이었지만 1단계인 치안유지회는 선무반이 수립할 수도, 그 전에 군대가 먼저 수립할 수도 있었다.[31] 반대로 좋은 일이 일어났을 땐 전생에 나라를 구했다는 발언이 나온다.[32] 조선을 둘러본 이사벨라 버드 비숍은 양반들을 가리켜 '허가받은 흡혈귀'라고 묘사했다.[33] 용어에 대해서 정의하자면, 티모시 브룩은 헨리크 데슬레프센의 말을 빌려 "점령권력의 출현으로 생성된 압력하에서 권력의 지속적인 행사"라고 설명하였으며 박상수 교수는 "특정 지역을 외지인이 지배할 때 현지인들이 그에 저항하지 않고 자발적이든 강압에 의해서건 지배정책에 협조했던 보편적인 역사 현상"이라고 말한다.[34] 영단어 'collaboration'의 번역에 대해 티모시 브룩과 황동연 교수는 '합작'이라는 말을 선호한다. 브룩의 경우 당사자들 간의 대등함을 나타내고 부정적 의미가 없다는 이유로, 황동연의 경우 합작자들의 자발성과 적극성을 강조하기 위해 이 용어를 쓴다. 반면 박상수 교수는 '협력'이라는 용어를 더 선호하는데, 점령자와 협력자 사이에는 힘의 우열이 명확하기에 애초부터 불평등할 수밖에 없는 관계라는 점을 강조하고, 적극적 합작뿐만 아니라 소극적 합작까지 포함하는 더 넓은 범위를 아우르기 위해서이다. 두 주장 모두 일리가 있지만 이 문단에서는 중립적 관점을 위해 '합작'으로 용어를 대부분 통일하였다.[35] 당시 지역 유지들은 전통 중국의 사대부 정신에 따라 국가가 혼란한 시기에는 자신들에게 질서를 유지할 책임이 있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이들은 "전성 수 만 명의 생명을 보전"하기 위해 성문을 열어주었다. 그들에게는 중국 내셔널리즘보다 지역민들을 살리는 게 훨씬 중요했다.[36] 기존에 타오시싼은 자선단체인 홍만자회 난징분회의 회장으로, 이미 지역사회로부터 명망이 깊었다. 이에 일본 선무반은 지방유력인사인 그가 회장직을 맡게 하여 난징 자치위원회가 일본의 꼭두각시로 보이지 않게 위장하려고 했다. 그렇게 일본과의 거래에 따라 타오시싼은 회장직을 수락했지만, 학살을 중지하라는 그의 부탁이 효과가 있었는지의 여부는 알려지지 않았다. 비록 합작이 양측 모두의 필요에 의해 성사되었지만, 점령자와 합작자는 서로 대등하지 않은 관계였음을 볼 수 있는 부분이다.[37] 물론 왕징웨이의 동기와 의도 자체는 확실히 밝혀지지 않았으며, 이 역시 보일 개인의 연구결과에 불과하다. 보일 역시 자신의 연구가 왕징웨이가 반역자라는 증거를 찾아내는 것도, 순수한 영웅적 자질을 갖추고 있다는 관점을 찾는 것도 아니라는 점을 미리 밝혔다.[38] 일본의 괴뢰행정기구인 난징 자치위원회에서 일하였다. 왕청디엔에 관한 상세한 내용은 더 아래의 '도덕론적 접근 지양' 문단을 참고하자.[39] 당시 미국의 식민지였던 필리핀은 미국으로부터 1934년부터 10년 간의 과도기를 거친 후 독립하기로 약속받았지만, 호세 라우렐 등의 엘리트들은 연합국의 승리에 확신을 가질 수 없었다. 따라서 그들은 연합국이 결국 승리하더라도 약속된 필리핀 독립 정부가 실현될 때까지는 질서와 안정을 유지하기 위해 일본과의 합작이 필요하다고 믿었다.[40] 비시 프랑스의 경우 독일이 프랑스를 완전히 점령한 안톤 작전이 변곡점이 되었다. 이 작전으로 비시 프랑스는 기존의 자율성을 잃게 되었고, 정부 내에서는 독일에 대한 적극적 협력자들이 더욱 힘을 얻었다. 그러나 반대로 프랑스 대중들은 점차 비시 정부에 대한 지지를 버리고 저항으로 바뀌게 된다.[41] 마르게리타 자나시는 필리프 페탱의 전후 재판의 사례가 천궁보의 재판에 중요한 판례와 비교의 예시를 제공하였다고 하면서, 프랑스식 '저항 민족주의'의 단순화된 서사가 글로벌적으로 확산되어 갔다고 하였다.[42] 8.15 광복 이후 서정주의 변명으로 유명한 "해방이 그토록 빨리 올 줄은 몰랐다"는 말은 사실 거짓말이 아니다. 솔직히, 그 누가 1945년에 광복이 올 줄 알았겠는가? 연합국 지도자의 일원이었으며 일본 제국 코앞에서 일본군과 맞서 싸운 장제스조차 승전 직전에서야 일본의 항복에 관한 내용을 겨우 알 수 있었다.[43] 보통 1세대가 바뀌는 기간은 30년이라고 한다. 따라서 일제강점기의 35년은 1세대가 바뀌고도 남은 시간인 것이다.[44] 이 책은 중일전쟁기 중국의 합작 경험에 관한 책이기에 '일본'이라는 대상이 명시되지만, 도덕적 접근을 지양해야 한다는 점은 모든 합작의 올바른 이해를 위한 공통적인 항목이기에 이 인용문에서 '일본'을 뺀 채 읽어도 뜻하는 바는 같을 것이다.[45] 왕다셰(1859~1929)는 1890년대부터 1926년까지 외교관으로 근무한 외교 원로로, 현대에는 1900년대 서양 열강들의 청나라 철도 침탈을 저지하는데 크게 기여하였으며, 제1차 세계 대전 참전을 추진해 파리 강화 회의에 중국이 참여할 수 있게 했고, 이로써 중국의 이익을 지켰다는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다. 그러나 당시에는 철도를 부설하기 위한 영국의 차관을 얻기 위해 외교 교섭에 나섰다는 이유로 1911년 '중국의 이완용'으로 불렸을 정도로 비난을 받았다. 다만 왕다셰의 경우 비드쿤 크비슬링이나 수카르노와는 달리 자국이 점령당한 상태에서 적국을 돕는 합작을 하지는 않았다.[46] 왕청디엔은 난징 자치위원회의 고문이었지만, 동시에 국제위원회의 관련인이기도 했다. 독일 공사의 보고서에 의하면 왕청디엔은 일본군에게 "만일 당신이 나를 반대한다면, 지금 당장 나를 쏘아 죽이는 게 좋을 거야!"라고 소리칠 만큼 용기 있는 사람이었다고 한다. 또한 그는 일본에게 난민들을 먹여살릴 대량의 식량을 요구하기도 했다.[47] 다만 합작에 대한 부정적 시각을 버리되, 반대로 애써 합작의 긍정적 효과를 찾으려 하는 것은 또다시 도덕론적 사고의 한계로 되돌아가는 것과 같으므로 주의해야 한다. 합작이라는 행위를 볼 때에는 도덕적 판단을 아예 배제하고 봐야 한다는 것이다.[48] 황영원 조교수에 의하면, 진회, 장방창, 오삼계, 석경당 등의 경우 중국의 다민족 공동체라는 국가주의적 시각에서 볼 때 이들을 매국노로 간주하는 것은 사실 적당치 않다고 하면서, 이들은 모두 중원의 한족 정권과 주변 소수민족 정권이 대항하는 가운데 나타난 주화파 인물이라 오늘날 다민족 국가인 중국의 입장에서 매국노로 보기에는 정치적 올바름에 어긋난다고 말하였다. 다만 당시 중국의 민족주의는 아직 다민족 국가의 아이덴티티로 발전되지 못하였고 한족 중심의 종족주의적 성격이 강하였다고는 하였다.[49] 유럽의 합작자들은 나치 독일의 파시즘과 이념적으로 일체화되어 합작에 나선 경우가 꽤 있다. 비록 합작은 했을지언정 일본 제국과 이념적으로는 동상이몽을 꿈꾸었던 중국의 한간들과는 다른 부분이다.[50] 물론 항일 자체가 중국 민중의 동의를 얻은 것인만큼 중국인들의 반일의식이 적지는 않았다. 점령지에서 일본과 합작하여 정치적 지위를 얻은 중국인들은 게릴라들의 테러에 의해 죽거나 위협을 받기 일쑤였다. 그럼에도 티모시 브룩은 '저항은 결코 합작자들을 저지시키지 못했다'며 오히려 합작자와 일본인의 관계를 더욱 밀착시키는 효과를 얻었다고 하였다.[51] 만약 호동왕자가 고구려의 왕자가 아닌 중국의 왕자였다면, 낙랑공주는 오늘날처럼 사랑의 희생양으로 묘사된 비극적인 주인공이 아닌 사랑에 눈이 멀어 공과 사를 구별하지 못하고 국가를 망하게 만든 희대의 매국노로 기억될 수 있음은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나머지 경순왕, 정비 안씨의 사례도 마찬가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