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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덕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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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colcolor=#fff> 노덕술
盧德述
파일:노덕술.jpg
창씨개명 마쓰우라 히로
松浦 鴻
해촌
海村
별명 일경의 호랑이
출생 1899년 6월 1일
대한제국 경상남도 울산군 대현면 장생포
(現 울산광역시 남구 장생포동)
사망 1968년 4월 1일 (향년 68세)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종로구 궁정동 22-1 자택
본관 교하 노씨
학력 경상남도 울산보통학교 (중퇴)
수상 공로상신 (1940)
훈8등서보 (1941)
화랑무공훈장 (1950, 51)
충무무공훈장 (1953)

1. 개요2. 생애
2.1. 친일 행적2.2. 해방 이후2.3. 몰락
3. 여담4. 관련 자료5. 대중매체에서
5.1. 드라마
5.1.1. 야인시대5.1.2. 관련 문서
5.2. 기타 창작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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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친일반민족행위자.

일제강점기 때부터 활동한 경찰공무원으로, 경찰관 재직 당시 독립운동가 다수를 체포, 고문, 살해악질 고문 경찰로써 악명을 떨쳤다. 창씨개명한 이름은 마쓰우라 히로(松浦 鴻). '고문귀' 하판락, '고문왕' 김태석 등과 함께 독립운동가들을 붙잡아 고문한 친일 경찰의 대표 격으로, 이러한 부역 행위에 따라 사후 친일인명사전에 반민족행위자로 수록되었다.[1] 링크[2]

2. 생애

1899년 6월 1일 경상남도 울산군 대현면 장생포(現 울산광역시 남구 장생포동)에서 노발보[3]의 5남으로 태어났다. 일제강점기 초기에 보통학교(현 초등학교)에 진학한 것을 보면 나름 여유롭게 살던 집안 출신으로 추정된다.[4] 울산 보통학교 2학년을 중퇴하고 일본인 상점에서 일하다가 돈을 더 벌기 위해 홋카이도로 건너가서 일했다고 한다. 귀국 후 1918년 경찰이 되기 위해 경남순사교습소에 지원해 1920년에 경남에 있는 순사교습소를 졸업한 후 경상남도 경찰부 보안과 소속으로 경찰 근무를 시작했는데 사법계에 근무하면서 1921년에는 순사부장이 되었고 1924년 경부보, 1932년 경부, 1943년 경시로 진급하여[5] 1944년 수송보안과장에 임명되었다.

2.1. 친일 행적

그는 고등계형사로서 악질 친일 경찰로 유명했는데 불령선인으로 찍힌 독립운동가를 체포하고 고문 취조하는 데 앞장섰으며 후술하듯 고문치사한 사람까지 나왔고 고문 취조를 통한 건수 올리기로 일사천리로 승진가도에 올랐으며 일제로부터 훈8등서보 같은 수훈을 받았다. 어찌나 악랄했던지 민중들 사이에도 친일 고문 경찰=노덕술이라고 인식될 정도였으며 그가 경찰로 지낼 동안 불렸던 별명도 일경의 호랑이였다고 한다.

그의 고문수법은 매우 악랄했는데 직접 새로운 고문을 고안하기도 했으며 천장에 매달고 구타하기, 머리카락 뽑기, 이빨 뽑기, 손발톱 뽑기, 혀 뽑기, 코에 뜨거운 고춧물을 붓는 방식의 물고문, 비행기 태우기는 기본이고 전기고문이나 대못상자까지 마다하지 않았다. 얼마나 잔혹했으면 일제강점기에 경찰에서 전국의 고문기술을 총 정리했는데 그 가운데 70%가 그의 작품이라는 설이 맴돌 정도다. 후술하듯 그 때문에 고문 후유증으로 죽은 독립운동가만 무려 6명이다.[6]

1927년 10월에는 좌우연합 단체인 신간회 동래지회 간부 박일형을 잡아들여 무자비하게 고문했고 1928년 10월에는 부산동맹휴교 사건으로 혁조회[7]가 적발되었을 때 혁조회의 회장 김규직을 비롯한 혁조회 간부 7명 등을 잡아들여 고문했는데 이때 혀 뽑기 등의 고문을 받았던 김규직, 유진흥, 양정욱 3명이 고문 후유증으로 사망했다.[8] 이후에도 조선공산당 사건과 관련된 보통학교 교원들을 체포하여 고문하였고 1929년에는 조선인 일본 유학생 강연회의 강연자들을 잡아들이고 고문하였으며 광주학생항일운동 참가자들과 관련자 석방을 주장한 동맹휴학 관련자들도 체포한 후 고문하였다. 1932년 5월 당시 ML당원인 김재학이 메이데이 시위행렬에 참가했다가 잡혀 그에게 천장에 매달려 구타를 비롯한 숱한 고문을 받았다. 당시 김재학의 조카 김문한은 '이제는 말할 수 있다'에 나와 다음과 같은 증언을 남겼다.
"하여간 통영에서 엄청나게 잡혀가지고 제일 많이 고문한 사람들이 허가비 노덕술이 한경부 이런 사람들이야. 솔직히 말하면 그는 들어가면 물고문하고 전기고문하고 반쯤 죽여 버리지요. 뭐."
악인열전 p.133



같은 울산 출신이던 독립운동가 이관술이 반제동맹을 지도하며 독립운동가를 양성하는 활동을 하던 중 검거되어 고문당했는데 그도 고문에 가담하였다. 이관술은 이후에도 1940년 경성 콤그룹건으로, 1946년 정판사 위조지폐 사건으로 그에게 고문을 당했다.

이 뿐만 아니라 1938년 혜산 사건을 수사하며 박달박금철[9] 등 조국광복회 소속 독립운동가들을 고문한 최연, 고등계 형사로서 독립운동에 대한 사찰 업무를 맡은 최운하 역시 그와 같은 반열에 든다.

그는 그러면서도 평안남도 경찰부 수송보안과장으로 지낼 때 평남자동차수송협력회 이사를 지내며 군수품 수송에 앞장서는 등 일제 침략 전쟁에도 적극적으로 협력하였다.

심지어 순사부장 시절인 1923년에는 그의 외삼촌이 살인 혐의가 있는데도 놔주거나 수사를 목적으로 금품을 수수받기도 했고 1931년에는 상해죄로 잡혀온 사람의 어머니를 안심시키고는 그녀에게 100원(현재 시세로 약 800만 원)을 받아낸 후 그 사람에 대해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아 사기죄로 고발당하는 등 부패한 면모를 보였다.

2.2. 해방 이후

해방 후 잠시 평양경찰서장을 맡던 중 공산주의 세력에게 체포되어 몇 달간 구금되었다가[10] 1945년 11월 9일 월남하였고 다음 해에 장택상에 의해 수도경찰청 수사과장에 기용되어 경찰 내의 반이승만 세력 숙청, 좌익분자 검거를 주도하였다.

장택상과 더불어 여운형 암살 배후로 거론되기도 한다.[11] 1946년 4월 당시의 동아일보 사장 송진우의 암살범 한현우 등 일당들을 검거함으로써 경찰 수뇌부의 인정을 받았고 이승만에게서 반공 투사라고 극찬을 받기도 했다. 이러는 와중에 독립운동가 중 최고 거물 중 한명이었던 김원봉을 체포, 김원봉에게 모욕적인 처우로 치욕을 주어 그가 월북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1949년 1월 24일 반민특위에 의해 체포되었으며 1949년 1월 26일 공범 백민태의 자수로 그가 반민특위 간부들을 암살하려는 음모를 꾸몄다는 사실이 밝혀졌다.[12] 그는 백민태에게 노일환, 김웅진, 김장열, 이문원 등을 납치하여 "우리는 이남에서 살 수 없으니 북으로 가겠다."라는 가짜 유서를 강제로 받도록 하고 이후 암살하면 뒤처리[13]는 경찰이 알아서 하겠다는 지령을 내렸지만 이 음모는 실패로 돌아갔다.
파일:노덕술.png
공판에 출석하는 노덕술
그는 지명수배 상태에서도 번호판을 단 경찰 지프에 경호원까지 대동하여 다녔고 내무부장관 윤치영이나 외무부장관 장택상 등의 집을 방문하여 "내가 잡힐 줄 아느냐"며 큰소리도 쳤다고 한다. 결국 동화백화점 사장 이두철의 집에서 검거되었는데 권총 6자루와 다량의 실탄, 현금도 34만 1천 4백 원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경향신문 반민특위 조사기록에 따르면 1949년 그의 재산은 60~70만 원에 달했는데 이는 당시 80킬로그램 쌀 8만 가마를 살 수 있고 현재 시세로 치면 100억 원이 넘는 재산을 모은 셈이다.[14] 상술했듯 순사부장 시절부터 부패한 면모를 보여줬단 것을 감안하면 부정축재로 모은 재산이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파일:이승만노덕술2.png
파일:노덕술과이승만.jpg
노덕술에 관한 이승만의 국무회의록
노덕술 피검에 관하여는 그가 치안기술자임을 비추어 정부가 보증하여서라도 보석하도록 함이 요망
불법조사관 2명 및 그 지휘자를 체포하여 의법처리하여 계속 감시하라 지령하시다
이승만 대통령
당시 이승만 대통령은 그가 체포되자 그는 그저 치안기술자일 뿐이라며 김상덕 반민특위 위원장을 직접 만나 그의 석방을 종용했고## 공보처장 명의로 '정부인사의 조사를 중지한다'고 공포하고 특위법의 개정까지 시도하는 등 특위 활동을 방해하였다.## 이에 대한 반민특위위원장 김상덕과 부위원장 김상돈의 당시 국회 증언
파일:노덕술33.jpg
헌병 복무 당시의 노덕술. 안경을 끼고 좌측에 두번째로 서 있는 사람이 노덕술이다.
여담으로 우측에 양복을 입고 있는 사람은 최난수라는 인물로 노덕술과 똑같은 친일 경찰 출신에 반민특위 간부들을 암살하려고 했던 자다.
그는 병보석으로 풀려난 후 무죄 판결을 받고 석방되어 바로 경기도청 경찰국의 주임으로 영전했고 군에 장교로 입대하여 헌병 중령으로 변신하였으며[15] 1950년에는 육군본부 제1사단 헌병대장, 1954년 부산 제2육군 범죄수사단장, 1955년 서울 15육군범죄수사대 대장을 지내는 그 이전과 마찬가지로 주로 대공수사 업무를 담당했다. 참고로 9.28 서울 수복 후에는 서울에 있던 인민군 부역자 처리 과정에도 참여했다고 한다.#[16]

그의 일화 가운데 유명한 것은 '저놈 잡아라!' 사건이다. 이 사건은 탁 치니 억 하고 죽었다의 롤모델 격이며 1948년 초에 벌어진 장택상 피습 사건의 용의자 임화 박성근을 고문하던 중 박성근이 수사관의 폭행으로 인해 사망하자 시체를 몰래 얼어붙은 한강에 구멍을 내고 유기한 후 노덕술이 취조실 창문을 열고 "저놈 잡아라!" 라고 외치며 박성근이 도망간 것으로 둔갑시킨 것이다. 자세한 내용은 저놈 잡아라! 문서 참조.

2016년 7월 뉴스타파의 탐사보도에 따르면 그는 놀랍게도 이 시기 화랑무공훈장 2개와 충무무공훈장 1개를 받았다고 한다.[17] 일제강점기에도 그 악행을 인정받아 1943년 일제로부터 훈8등 서보장(일제의 훈장)을 받았던 인물이 해방 이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처벌은커녕 훈장을 받았으니... 이처럼 악랄한 일제 경찰 출신 중 해방 이후에도 이승만 정권의 비호를 받으면서 대한민국 훈장을 받은 경우는 모두 17명이다.

1954년 제3대 국회의원 선거에는 선거에 출마하기 위해 잠깐 군에서 예편한 것으로 보이지만 선거에 출마하지 못하면서 다시 군으로 복귀했다.

2.3. 몰락

그러다가 불행 중 다행히도 영원할 것만 같았던 그의 부귀영화도 그리 오래가지는 않았다. 그는 특무대장 김창룡과 권력을 놓고 암투를 벌이다 이승만 눈밖에 나면서 날개가 꺾였고 1955년 11월에는 밀수에 가담했다는 것이 발각되어[18] 동월 11일에 재판에서 징역 6개월, 집행유예 1년, 전급료 몰수를 선고받았다. 1958년에는 제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자유당에 공천을 시도했으나 거절당했다.

4.19 혁명 후에 열린 1960년 6월에는 제5대 국회의원 선거에 울산군 을 선거구에 출마하였는데 이때 '빨갱이를 때려잡던 반공투사'라는 구호로 선거운동을 하며 자신의 '반공투사' 경력을 살려 표를 얻고자 했으나 선거 결과는 41,109명 중 1,744표(4.24%)만 얻어 전체 후보 여덟 명 중 여섯 번째로 낙선(무소속 정해영 당선)되었다. 당시에는 친일파라고 해도 고향의 인재라면 뽑아 주는 게 보통이었고 개중에는 상당히 질이 나쁜 자들도 많았다.[19] 그럼에도 그가 이렇게까지 폭망한 것은 그가 얼마나 인망을 잃었는지 보여준다. 즉, 반민특위의 처벌은 면했지만 세상의 처벌은 면하지 못한 것. 심지어 본인을 반민특위의 처벌로부터 구해준 은인인 이승만의 눈밖에 나기까지 했으니 더더욱 쓰라린 업보를 치른 셈이다. 고향을 떠난 후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할 때까지 한 번도 고향에 온 적이 없었던 그는 투표 결과가 안 좋은 것을 알게 되고 고향 사람들에게 인사도 하지 않고 그냥 갔다고 한다. #

국회의원 선거에서 떨어진 그는 낙선 3개월 후인 1960년 9월에 일본으로 망명한 선우종원이 귀국하자 선우종원을 찾아와 초라한 행색에 약간 다리를 절뚝거리며 나타나 보자기를 풀어 국제 공산당 사건[20] 관련 브리핑을 전달하고 홍택희[21]라는 사람이 이렇게 나쁜 짓을 했으니 잡아 없애라고 부탁을 하며 마지막 권력의 끈을 잡으려고 했으나 선우종원이 의연한 반응을 보이면서 계획은 무산되었다.

이후에는 1961년경 서울경찰청 유치장에서 사식(私食)을 넣어줬다는 증언이 전하고 1964년 서울특별시 종로구 궁정동 22-1 자택으로 거처를 옮겼다는 것 외에는 행적이 묘연했으나 1965년 6월에 뜬금없이 서울특별시 중구에서 불법 흥신소를 운영한 혐의로 체포당하기도 했다. 사실 1965년 5월에 서울의 한 흥신소에서 서울지검 검사였던 함정호[22]를 미행하던 사건이 발각되자 검찰이 서울의 흥신소를 대대적으로 조사하는 일이 있었는데 이와 함께 여러 불법 흥신소들이 적발되었으며 흥신소 장부를 열어보니 반 이상이 개인을 미행하는 등의 사생활 침해로 채워져 있어 물의를 빚었다. 놀랍게도 함정호를 미행하던 흥신소가 바로 노덕술이 사장으로 있던 흥신소였다! 이는 그가 몰락한 후에도 정신을 차리기는커녕 얼마나 안하무인이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며 해방 후에 수도경찰청 수사과장을 역임하며 '부통령급' 위상을 가졌던 데다 헌병 중령까지 보냈던 사람이 불법 흥신소를 운영하며 검사를 미행하다가 구속되는 꼴이 되었다는 것 자체가 그가 얼마나 세간의 관심에서 잊혀지며 완벽히 몰락했는지를 보여준다.[23]

그러나 그는 재판 결과 징역 8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고 풀려났으며 그의 손녀뻘 친척이 증언한 바에 따르면 1967년경 그는 돈이 없다고 글씨 쓴 거나 가져가라고 했으며 자기는 친일파가 절대 아닌데 사람들이 자꾸 그런다(자신을 친일파라 부른다)고 했고[24] 청빈해서 친척들 뒤를 봐주거나 하는 일은 전혀 없었다고 한다. 적어도 말년에 생활고에 시달렸던 것과 대외 활동을 사실상 포기한 것만큼은 자명하다. 출처 그는 1968년 4월 1일에 서울 종로구 궁정동 22-1 자택에서 향년 68세를 일기로 지병으로 사망했다.[25] 그나마 말년에는 사회에서 매장되고 잊혀진 채 가난하게 살다가 쓸쓸히 죽으며 생전 악행에 대한 어느 정도의 업보는 치른 셈이다.[26][27]

3. 여담

4. 관련 자료

5. 대중매체에서

5.1. 드라마

5.1.1. 야인시대

파일:yain.png
" 너무 순진해. 응? 정의라고 했나? 힘이 곧 정의다. 알겠나? 앞으로도 그걸 명심해. 힘, 힘 말이야!"
배우 서영탁[37]이 연기하였다.

작품 진행 때문인지 이정재의 원래 상관이던 조개옥이 빠지고 그 자리에 들어왔다. 찌질한 상관으로 등장하며 사실상 이정재를 다시 주먹세계로 돌아가게 만든 원흉이자 동대문파 탄생의 일등공신이라고 할 수 있다.

반민특위가 창설되고 특경대가 자신을 쫓기 시작하자, 백민태에게 반민특위와 관련된 국회의원과 김두한, 유진산, 이정재를 죽여달라고 암살을 사주한다. 그런데 백민태는 항일 극렬 테러리스트였기 때문에 그대로 경찰에 자수하여 암살은 실패하였고 결국 이정재에게 체포당하여 재판장에 서게 된다. 재판장에서도 자신은 아무 것도 모른다며 발뺌한다.[38]

허나 친일파들의 도움 없이는 국가를 운영할 기반이 부족했던 이승만에 의해 반민특위가 해체되며 다른 친일파들과 함께 풀려나게 되었고 오히려 이정재가 체포당해 모진 고문을 당한다. 이 일을 계기로 이정재는 정치권에 환멸을 느껴 경찰을 그만두게 된다.[39]
김 형사: 용서하십시오, 주임님. 이거 그래도, 불행중 다행입니다. 석방이에요.
이정재: (기운 없는 목소리로) 그래…? 왠 일이냐…? 한참 맞을 줄 알았는데…
김 형사: 대통령 지시랍니다. 그, 병원에 안 가봐도 되겠습니까?
이정재: 그래… 아직 걸을 만 하다. 부장 어딨어?
노덕술: (지하실 문이 열리며) 여기 있어. (계단을 걸어내려오며 웃는다.) 넌 너무 순진해, 응? 정의라고 했나? 힘이 곧 정의다. 알겠나? 앞으로도 그걸 명심해. 힘, 힘 말이야![40]
이정재: 그래… 잘 배웠다. 역시 넌 나한테 설교할 만 해. 그러나 조심해라. 그래도 정의는 있는거야!
노덕술: 후후후… 정의? 하하하… 너는 세상을 더 살아야 돼. 정의? 하하하…
(이정재가 계단을 올라가다가 돌아보며 노덕술을 노려본다.)
이정재: 야, 친일파! 더럽고 치사하지만, 니 말이 맞다. 네 말이 맞다, 새끼야! (노덕술에게 침을 뱉고 나간다.)
노덕술: 아니, 아니… 이… 야, 야 너, 이정재! 야 임마 너! 너 조심해, 앞으로! 알았어?
고문 당하고 비참하게 경찰서를 나가는 이정재를 보면서 득의양양했으나, 얼마 후 자기 부하였던 곽영주가 이승만의 눈에 들어 고속으로 승진하는 걸 보고는 똥 씹은 표정이 되고 곽영주에게 굽신거린다. 6.25 전쟁 때인 87화에서 김두한이 카바레 방화사건이 접수되자 김형사가 전선에서는 젊은사람들이 죽어가고있는데 카바레한다고 곧 풀려난다고 하자, 계엄군에 넘기지만 계엄군도 건드리기 싫다며 조병옥에게 보고서를 꾸며서 송치시킨다. 이후 에피소드에는 등장하지 않는다. 그가 모시게 될 상관인 곽영주의 동네 형님인 이정재를 고문한게 그의 귀에 들어왔다면 숙청하고 죽였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특히 이정재는 노덕술보다 훨씐 높으신 분이 되었으니, 동대문 연합회에 끌려가지나 않으면 다행일 것이다.[41]

최근에는 합성물에도 가끔 등장하고 있다.[42]

5.1.2. 관련 문서

5.2. 기타 창작물



[1] 물론 김덕기도 악명 높은 친일 경찰이긴 했지만 그가 직접적으로 고문을 저질렀다는 증거는 없고 본인도 반민특위 재판에서 독립운동가 2명을 손수 사살했단 것은 인정해도 고문은 한 적이 없다고 주장했다.[2] 다만 해당 만화에서는 말년에나마 처참하게 몰락한 노덕술이 마지막까지 잘 먹고 잘 살다 간 것처럼 묘사되어 있다는 것을 유의해야 한다.[3] 1930년 9월 사망했다.[4] 1919년 기준 조선인의 보통학교 취학률은 3.9%였으나 한국 거주 일본인은 91.4%였다. #[5] 일제강점기에 경시를 단 조선인은 35년 지배 기간 동안 21명뿐이었다. 즉, 그는 친일을 해서 올라갈 수 있는 곳 그 이상을 간 것이다. 다만 그런 그도 조선인 경찰 중 최고봉에는 오르지 못했는데 일제강점기 조선인 경찰 중 가장 직급이 높았던 사람은 1944년에 황해도청 경찰부장을 역임한 윤종화다. #[6] 참고로 확실히 확인된 유명 친일파의 고문치사 및 살인 수를 비교하면 일제 고문 경찰 하판락은 1명을 고문치사케 했고 노덕술의 선배인 김태석은 고문치사시킨 사람은 없다. 고문경찰은 아니었던 김덕기는 독립운동가 2명을 손수 엽총을 쏴 살해했으며 신상묵은 독립운동가 4명을 고문치사케 했다. 비록 경찰이 아니라 밀정이긴 했지만 이종형은 확인된 것만 해도 무려 17명의 독립운동가들을 죽음으로 몰고 갔다.[7] 19~23세 정도의 젊은 학생 150여명의 회원이 있던 항일조직이었다.[8] 정확히는 김규직은 옥사했고 유진흥과 양정욱은 병보석으로 가출옥된 후 얼마 안 가 사망했다.[9] 이 둘은 훗날 북한 초기 정치 세력 중 하나인 '갑산파'의 일원이 되었다.[10] 이것이 노덕술의 반공 성향에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11] 직접 암살한 것은 아니지만 여운형이 지속적으로 테러를 당할 때 경찰임에도 테러범을 봐주고 고의적으로 방관함으로써 암살을 유도하였다. 그리고 노덕술은 암살범들하고 비밀리에 서로 짜고 '단독범행'으로 축소하는 데 커다란 일조를 했다.[12] 이때 수사과장 최난수, 사찰과 부과장 홍택희, 중부서장 박경림이 함께 하였다. 검찰의 기소문에서 밝혀지길 이 계획의 재정분야는 박흥식, 언론분야는 이종형이 담당하였다고 한다.[13] 여기서 이 뒤처리의 의미는 "38선에서 월북하려는 반민특위 위원들을 저지하자 저항하여 사살하였다"라는 수사발표를 한다는 뜻이었다.[14] 출처 악인열전 p.137[15] 이근안은 군인에서 경찰로 변신했다.[16] 다만 한홍구 등 일각에서 말하는 것처럼 부역자 처리 과정의 주도 인물은 아니었을 가능성이 높다.[17] 전자는 1950년과 1951년에, 후자는 1953년에 받았다고 하지만 국가보훈처, 국가기록원에도 노덕술이 한국전쟁 당시 진짜 북한군과 맞서 싸운 공로를 입증할 자료는 없다고 한다.#[18] 정확히는 시가 4억 6천만 환(460만 원)의 미 군수물자를 밀수하는 자들과 결탁하여 수사를 가장하고 물품을 운반하는 대가로 600만 환(6만 원)을 수수받은 것이었다고 한다. 1955년 11월 13일자 동아일보 기사 중 다시 한 번 말하지만 1955년 기준으로 6만 원을 수수받은 것이며 화폐가치 변동과 당시 한국의 경제사정을 고려하면 어마어마한 뇌물을 수수받은 셈이다.[19] 실제로 죄악이 노덕술도 능가하는 수준이었던 최악의 친일파 이종형도 고향인 강원도 정선군에서 국회의원으로 당당히 당선되기도 했다.[20] 선우종원을 장면 총리의 측근이라는 이유로 공산주의자로 모함한 사건으로, 이 사건으로 선우종원은 8년여간 일본으로 망명 생활을 해야 했다.[21] 1948년에 수도관구경찰청 사찰과 부과장을 지냈던 사람으로, 노덕술의 지휘 하에 반민족행위처벌법 제정을 주도한 국회의원들을 암살할 계획을 세우기도 했다.[22] 훗날 대한변호사협회 회장을 역임하게 된다.[23] 참고로 당시 노덕술의 구속을 다룬 신문기사들에서는 '흥신소 대표' 노덕술이 전직 수도경찰청 수사과장이었다는 것은 전혀 다루지 않았다.[24] 설령 노덕술이 진심으로 친일 성향이 아니었다면 더욱 가관인 게 노덕술은 별다른 신념도 없는데도 출세를 위해 당대의 기득권에 빌붙으며 독립운동가들을 탄압했다는 말이 된다.[25] 기존에는 노덕술이 서울대학교병원에서 죽었다는 소문이 많이 돌았으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26] 사실 진짜 악질 중의 악질 친일파들은 김태석, 김덕기, 이종형처럼 제 명에 가지 못하거나, 하판락처럼 잘 사나 싶다가 말년에 그로 인한 피해자의 노력과 폭로로 모든 만행이 폭로되어 사회적으로 매장당하거나, 노덕술과 신상묵처럼 다른 범죄로 구속되어 망신을 당하게 되는 등 끝이 좋지는 않았다. 매국노들의 후손들도 이종찬, 민복기 같은 극소수를 제외하면(이순용은 독립운동가로 활동했으므로 논외) 일제강점기의 위세를 유지한 경우는 전무하다.[27] 심지어 예전에는 노덕술에 대해 '몰년 미상', '군에서 예편한 후 잠적했다' 등으로 기록된 자료까지 있었을 정도로, 국회의원 선거 낙선 후도 아닌 군 예편 후에 어떻게 살았는지조차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28] 明月館, 1909년 설립된 한국 최초의 근대 요릿집. 참고자료[29] 그 역시 노덕술과 같은 행보를 걸었다. 일제강점기의 악행, 반민특위에 의해 체포, 습격으로 탈주, 이후에 잘 먹고 잘 살았지만 사후에는 두고두고 악질 친일파로 손가락질을 당하게 되었다. 그나마 마지막에는 밀수에 가담한 것이 들통나 군에서 쫓겨나고 국회의원 선거에서 낙선하고는 불법 흥신소를 운영하며 검사를 미행하다가 구속되며 생전에 어느 정도 죗값을 치른 노덕술과는 달리 하판락은 무려 1990년대 후반까지도(!) 만행이 공론화되지 않은 채 잘 먹고 잘 살았다.[30] 시 자체는 노덕술을 애국심을 가진 영웅처럼 묘사하며 유체이탈 화법을 쓰고 있다.[31] 참고로 이쪽도 21세기에 사망한 사람인데도 몰년조차 제대로 알려지지 않을 정도로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32] 다만 노덕술은 권력 투쟁에서 밀려 자택에서 병사했고 이승만의 총애만 믿고 사방에 적을 만들었던 김창룡은 1956년에 부하들에게 암살당했다.[33] 쿠레바야시 아사오도 무고한 사람을 고문해 누명을 씌우며 출세한 인물이다.[34] 이관술 입장에서는 억울할 수밖에 없는데 이관술은 오직 대한민국 땅에서 끝까지 살다가 누명을 쓰고 억울하게 죽은 것은 물론이고 북한 정권 수립에도 기여한 것이 전혀 없다.[35] 당장 노덕술이 6.25 전쟁 시기에 훈장 3개를 수여받은 것이 밝혀진 것만 해도 전국민적으로 공분이 들끓었는데 현충원에 묻혀 있는 것이 사실이었으면 훈장 수여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의 공분이 들끓었을 것이다.[36] 오늘날의 무궁화동산 자리에 있었다.[37] 본명은 서동근으로 여러 대하사극에서 조연과 단역을 맡았다. 2017년에 사망했다.[38] 특경대도 경찰 소속이었기 때문에 정문을 지키는 초소의 경찰들이 이정재와 특경대원들이 탄 차량이 등장하자 거수경례를 하는 모습이 등장한다. 계급도 경위인 데다 직책도 수사주임이었던 만큼 그들보다 상관격인 셈이다. 그 증거가 이정재와 특경대원들이 탄 차량이 경찰 마크가 부착된 관용차량이었다.[39] 실제 역사에서는 김원봉에게 모독을 준 것을 작품 진행을 위해 이정재에게 옮긴 것으로 보인다.[40] 이정재는 이 말을 기억하고 있다가, 전쟁 이후에 자유당과 손을 잡고 권력을 취하려 하였다.[41] 특히나 성질이 매우 더럽기로 유명한 이석재나 조열승, 임화수 같은 사람들에게 걸려서 끌려갔으면 맞아 죽었거나 운이 좋아 목숨을 건졌더라도 반 병신이 될 확률이 매우 높다. 과묵한 경호원 스타일인 이억일 또한 자신의 회장님께 그런 불경한 짓거리를 저지른 노덕술을 절대 용서할 리도 없을리 만무하니. 동대문상인연합회 식구들에게 끌려갔으면 실제 몰년보다 더욱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였을 것이다.[42] 특히 이정재가 노덕술에게 침 뱉는 장면이 많이 쓰인다.[43] 이승만의 제안으로 어진의 저택에 비행기 자폭테러를 일으켰고, 핀을 뽑은 수류탄을 쥔 채 어진과 동반자살을 꾀했으나 어진이 그대로 벽장 안으로 들어가버리는 바람에(칼이나 전기 충격기, 수류탄처럼 사람을 해칠 수 있는 물건은 벽장 반입 금지) 본인만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