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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3-07 00:16:55

한현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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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주범한현우.png
본명 한현우(韓賢宇) / 한원율(韓元律)
가명 한홍건, 한계일
본관 청주 한씨
출생 1918년 강원도 고성군 간성읍
본적 평안북도 중강진
사망 ?[1]
학력 1941년 와세다대학 정경과 졸업
가족 부친[2], 모친[3], 4남 중 장남, 슬하 3녀, 사위 전병민[4]
전과[5]맥아더 포고령 제 5호 위반에 따른 15년 징역형
1. 개요2. 일생
2.1. 범행 전의 행적2.2. 범행
3. 대중매체에서

[clearfix]

1. 개요

미군정 시기 우익 활동가로, 송진우 암살 사건의 주범.

2. 일생

2.1. 범행 전의 행적

1918년 강원도 고성군 간성읍에서 태어났다. 본적은 평안북도 중강진이며 소학교까진 조선에서 마치고 일본으로 유학을 가서 금성고등학교와 와세다대학 정경과를 졸업했다. 졸업 후 도메이통신(교도통신의 전신)에서 일하다가 조선독립연맹을 세워 지하운동을 했으나 발각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일본국체연구소' 란 이름으로 둔갑시킨 후 당시 일제 총리도조 히데키를 암살할 계획을 세웠으나[6] 발각되어 인심교란의 죄로 징역 10개월, 집행유예 4년형을 언도받는다. 형을 산 후 조선으로 돌아와 ' 격몽의숙 ' 이란 조직을 만들었다.

2.2. 범행

1945년 12월 29일, 송진우신탁통치 문제에 대해 신중론을 폈다는 소식을 듣고 격분해 본인의 조직 ' 격몽의숙 ' 의 부하 유근배[7], 김의현[8], 이창희[9], 김인성[10], 백남석[11], 신동운[12] 과 함께 범행을 계획하곤, 유근배, 김의현, 이창희, 김인성과 함께 송진우의 집에 침입하여 전백[13] 이라는 자에게 받은 일제 권총으로 송진우를 살해했다. 이 일로 한현우는 사형구형받은 후 무기체형언도받았으나 불복상고했다. 상고심에서 또 사형을 구형받았으나 15년 징역형을 언도받은 후 마포형무소에 수감되었다. 6.25가 터진 후 북한의 인민군들에게 붙잡혀 취조 받았으나 이전에 일본에 있을 적에 조선독립연맹이란 지하운동 단체를 만든 과거로 인해 "동무야말로 진정한 해방투사" 란 말을 듣고 마포형무소에서 풀려났다. 풀려난 후 부산을 활보하다 한현우가 부산을 활보한단 소식이 야당 국회의원의 귀에까지 들어가자 당시 미군정이던 일본으로 이민갔고, 좌익 재일동포 단체인 '조선민족민주주의전선(민전)'의 야마나시, 홋카이도, 오사카지부를 와해시키는 데에 기여했다.

이후 '한홍건', '한계일' 등의 가명을 쓰면서 일본인 여자와 재혼해 슬하에 3자녀를 두었고,[14] 도쿄도 메구로구에 살면서 한일 고대사 관련 서적을 저술하는 한편 1980년부터 12년 동안 민단 기관지 <한국신문> 논설위원으로 근무했다. 1993년 2월 20일, 당초 청와대 정책수석비서관으로 내정된 사위 전병민이 장인의 과거 이력으로 인해 사퇴하자 한현우 자신은 도쿄에서 기자회견을 통해 이에 가슴 아파하면서도, 송진우 암살 행위에 대해서는 "고하가 신탁통치에 찬성했으므로 국가의 장래를 위해 어쩔 수 없었다"고 견해를 밝혔다.

동월 23~24일 이틀에 걸쳐 <한겨레신문>을 통해 증언록이 게재되었고,(1부, 2부) 2002년 1월 20일자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 '비밀결사 백의사' 편을 통해서 하반신 마비 상태로 인터뷰에 임할 때도 비슷한 견지로 주장해왔다.

3. 대중매체에서


[1] 후술하듯 적어도 2002년까지는 생존해 있었다.[2] ? ~ 1942[3] 1884 ~ ?[4] 장녀 한씨의 남편으로, 1980년부터 7년 동안 현대사회연구소 편집장과 정책기획실장을 맡았고, 노태우와 김영삼 전 대통령 당선에 도움을 준 선거 전략가이기도 했다. 2003년 '한국정책연구원'을 세워 고문까지 맡았다.[5] 박정희 대통령이 송진우 암살 전과를 말소함[6] 한현우에게 파시즘적인 사상을 고취해온 일본의 국수주의자 나카노 세이고가 도조 히데키에 비판적이라서 그러한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이나, 언론인 청암 송건호는 1978년 저서 <한국민족주의의 탐구>를 통해 한현우를 '국수적 민족주의 광신자'로 평했다.[7] 1927~?[8] 1925~1950[9] 1928~?[10] 1925~?[11] 1922~?[12] 1923~1991[13] 본명은 전병구, 1905~?[14] 반면 본처는 국내에 남아 있다가 1983년부터 사위 전병민의 자택으로 갔다. 이에 전병민 측은 해당 사실이 언론에 알려지자 곤혹스러하는 한편, "장인의 송진우 암살 사건은 본인이 태어나기 전에 일어난 것인데, 연좌제도 없어진 지 40여년이나 됐음에도 왜 본인과 관계없는 개인적인 일까지 문제가 되느냐"는 식으로 억울하다며 견해를 내비쳤다.(동아일보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