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진우 관련 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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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앙고등학교 교장 | |||||||||||||||||||||||||||||||||||||||||
제9대 김성수 | → | 제10대 송진우 | → | 제10대 최두선 |
{{{#!wiki style="margin: -10px -10px" | <tablebordercolor=#fff><tablebgcolor=#fff> | 이달의 문화인물 (1990-1997) | }}} | |||
{{{#!wiki style="margin:0 -10px -5px; min-height:calc(1.5em +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6px -1px -11px" | 1990년 | |||||
7월 김정희 | 8월 장영실 | 9월 김소월 | 10월 세종대왕 | 11월 김홍도 | 12월 신재효 | |
1991년 | ||||||
1월 나운규 | 2월 정철 | 3월 한용운 | 4월 김정호 | 5월 방정환 | 6월 정약용 | |
7월 문익점 | 8월 안익태 | 9월 허준 | 10월 주시경 | 11월 윤선도 | 12월 이해랑 | |
1992년 | ||||||
1월 이황 | 2월 정선 | 3월 박지원 | 4월 우장춘 | 5월 신사임당 | 6월 류성룡 | |
7월 일연 | 8월 홍난파 | 9월 고유섭 | 10월 이윤재 | 11월 안창호 | 12월 윤동주 | |
1993년 | ||||||
1월 이이 | 2월 이인문 | 3월 장보고 | 4월 이천 | 5월 윤극영 | 6월 원효 | |
7월 지석영 | 8월 안중근 | 9월 박연 | 10월 최현배 | 11월 장지연 | 12월 윤백남 | |
1994년 | ||||||
1월 우륵 | 2월 황희 | 3월 김유정 | 4월 홍대용 | 5월 강소천 | 6월 이상백 | |
7월 안견 | 8월 박은식 | 9월 박승희 | 10월 이희승 | 11월 정도전 | 12월 신채호 | |
1995년 | ||||||
1월 강세황 | 2월 조식 | 3월 월터 정 | 4월 최무선 | 5월 이원수 | 6월 김병로 | |
7월 이육사 | 8월 김구 | 9월 채동선 | 10월 김윤경 | 11월 이수광 | 12월 곽재우 | |
1996년 | ||||||
1월 김만중 | 2월 최치원 | 3월 이순지 | 4월 서재필 | 5월 김명국 | 6월 유일한 | |
7월 도선 | 8월 심훈 | 9월 왕산악 | 10월 정인승 | 11월 전형필 | 12월 이제마 | |
1997년 | ||||||
1월 송석하 | 2월 성현 | 3월 최윤덕 | 4월 이중환 | 5월 초의 (의순) | 6월 한호 | |
7월 이세보 | 8월 박제가 | 9월 박진 | 10월 장지영 | 11월 왕인 | 12월 송진우 | |
※ 선정 당시 기관명은 문화부(1990~1993) → 문화체육부(1993~1998) → 문화관광부(1998~2005)였다. | ||||||
이달의 문화인물(1998-2005)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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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47a0><colcolor=#ffffff> 출생 | 1890년 5월 8일 | ||
전라도 담양도호부 고지산면 손곡리 대실 (現 전라남도 담양군 금성면 대곡리 손곡마을)[1][2] | |||
사망 | 1945년 12월 30일 (향년 55세) | ||
서울특별자유시 종로구 원서동 74 (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창덕궁길 117) | |||
묘소 | 국립서울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198호[3] | ||
본관 | 신평 송씨[4] | ||
초명 | 송진옥(宋鎭玉) | ||
호 | 고하(古下)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0047a0><colcolor=#ffffff> 부모 | 아버지 송훈, 어머니 남원 양씨 | |
배우자 | 유차 | ||
자녀 | 양자 송영수 | ||
친인척 | 양손자 송상현 | ||
학력 | 영학숙 (졸업) 세이소쿠영어학교 (수료) 긴조중학교 (졸업) 와세다대학 (법학 / 중퇴) 메이지대학 (법학 / 학사) | ||
종교 | 유교 (성리학) → 개신교 (장로회) | ||
신장 | 175cm[5] | ||
경력 | 동아일보 제3·6·8대 사장 동아일보 주필 동아일보 고문 동아일보 대표청산위원 동본사[6] 사장 조선유학생친목회 총무 한국민주당 제1대 수석총무 중앙학교 학감 중앙고등보통학교 제10대 교장 조선민립대학기성회 중앙집행위원 범태평양회의 조선인대표단 월남 이상재 사회장 준비위원 이화여자전문학교후원회 창립총회 준비위원 국민대회준비위원회 위원장 순국선열추념대회 위원 | ||
서훈 |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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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 일제강점기, 미군정기의 정치인, 독립유공자, 언론인.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7]2. 생애
1890년 5월 8일 전라도 담양도호부 고지산면 손곡리 대실(현 전라남도 담양군 금성면 대곡리 손곡마을)에서 아버지 송훈(宋壎, 1862. 4. 14 ~ 1928. 10. 5)과 어머니 제주 양씨(濟州 梁氏, 1858. 11. 13 ~ 1919. 8. 13) 양기영(梁紀永)의 딸 사이의 4남 4녀 중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어렸을 적에는 한학을 배웠으나 창평군의 영학숙에서 신학문을 접한 뒤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김성수 등과 몰래 일본으로 유학을 간다. 세이소쿠(正則)영어학교를 다니다가 긴조중학교에 편입하여 졸업했고, 당초 와세다대학 법학부에 입학했으나 중퇴하고, 메이지대학 법학부로 옮겨 1915년 졸업했다. 유학 시절 도쿄에서 안재홍, 장덕수, 신익희 등과 조선 유학생 친목회를 결성했다.
적을 치자면 먼저 적을 알아야 한다는 이치에서이지. 그들에게 지지 않으려면 먼저 그들을 알 필요가 있어. 그래서 우리는 그들이 생각하는 이상을 생각해서 앞을 질러야 하지 않겠는가...
-일본 유학을 주장하는 그에게 백관수가 이유를 묻자
-일본 유학을 주장하는 그에게 백관수가 이유를 묻자
이제부터 광복운동은 과거의 의거 관념에서 벗어나야 한다. 첫째, 한 두 사람 또는 한 두 단체의 광복운동이 아니라 전 민족적인 집단운동이라야 할 것이고, 둘째, 어떤 한 부분을 통한 광복운동이 아니라 정치, 경제, 산업, 문화 등 각 부분이 병행해야 한다는 점에서 우리는 교육사업을 해야겠고, 산업을 일으켜야 하겠고, 동시에 금융기관과 신문, 출판기관을 가져야 한다.
한일병합에 충격을 받아 방황하다가 다시 동경에 돌아가서 친구들에게 새로운 행동방향을 밝히며[8]
한일병합에 충격을 받아 방황하다가 다시 동경에 돌아가서 친구들에게 새로운 행동방향을 밝히며[8]
1916년 귀국하여 김성수와 함께 중앙학교를 인수하였다. 중앙고등보통학교의 교장으로서 학생들에게 민족 의식을 불어넣었으며 동아일보사가 주식회사로 개편되자 사장에 취임하여 이후 30여 년간 사장, 고문, 주필 등을 역임하면서 <동아일보>를 민족의 대변지로 이끌었다. 사장으로 재임할 당시 물산장려운동, 민립대학설립운동, 브나로드 운동 등을 이끌었기 때문에 <동아일보>의 창업자는 김성수이지만 <동아일보>의 사상적 바탕을 이루는 사람은 바로 송진우라고들 한다. 1919년 전민족적인 3.1 운동 당시 민족 대표 48인의 1명으로 3.1 운동을 주도하였다. 이로 인해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게 되었으며 옥중에 모친의 사망 소식을 접하였다고 한다.
사진 출처 : 국사 편찬 위원회 한국사 데이터 베이스 → 일제 감시 대상 인물 카드 → 송진우# |
1920년대 전반 김성수 등과 함께 '자치론'을 주장했으며 조선인의 합법적인 운동과 참정권 획득을 위해 김성수, 이광수 등과 '연정회'라는 단체를 조직하려 하기도 했다. 1926년 6.10 만세 운동과 관련된 혐의로 종로경찰서에 불려가 취조를 받았으며 <동아일보>에 '3.1 운동 7주년 기념사'를 게재한 일로 실형을 받아 수감되었다. 1927년 신간회 경성지회에 가입했으며 송진우가 신간회에 가입할 당시 조직의 주도권은 공산주의자와 비타협적 민족주의자 일부가 쥐고 있었는데 이들은 송진우와 <동아일보> 계열 인사를 타협적 민족주의자, 대자본가로 인식하고 비난했다. 이로 인해 안재홍 등 몇몇 신간회 간부는 송진우를 가입 즉시 제명하자고 주장하기도 했으나 1929년 광주학생항일운동 이후 기존 신간회 간부들이 체포되면서 송진우 등 <동아일보> 계열을 중심으로 한 보수적 민족주의자들이 중앙 지도부를 차지하게 된다. 신간회의 지회들이 새 지도부의 노선에 반발하면서 신간회는 1931년 해소된다.
1930년대 초 민족의 구심점이 필요하다는 판단 아래 <동아일보> 사장으로서 역사적 위인들에 대한 현양 사업을 펼쳤다. 권율 사당을 중수하고 이순신 현충사를 완공하고 영정을 봉안했으며 1934년 일제에 의해 강제 철거된 단군릉 수축을 위한 기금 모금을 하였는데 각 현양 사업들에 대해 기자들을 특파해 보도하도록 하여 민족 의식을 일깨우기도 하였다.[9]
학문의 세계란 자기의 경험과 착상만으로 무엇이나 해치울 수 있는 것 같은 안락한 세계는 아니다. 자기만의 경험을 여러 가지 다른 수많은 경험과 기교해서 음미되어야 하고 한계가 설정되어야 하며 이와 같은 다양한 경험적 사실을 통일적으로 이행하기 위한 이론적 작업의 시행도 거듭되어야 한다. 종교와 신앙은 인간 본래의 것이다.
-1934년 평양 숭실전문학교의 신사 참배 거부를 옹호하기 위해 학문과 종교의 자유를 논하면서
-1934년 평양 숭실전문학교의 신사 참배 거부를 옹호하기 위해 학문과 종교의 자유를 논하면서
1935년 새해를 맞아 광산 부자 최창학과 함께 황해도 신천 온천으로 드라이빙하다가 차가 낭떠러지 아래로 굴러떨어져 죽을 뻔했다 살아난 적이 있었다. 다행히 바퀴가 아카시아 나무에 걸려서 전치 3주에 그쳤다고 한다.
최송설당[10] 동상 제막식에 참석한 최송설당 여사(앞쪽)가 축하하러 온 고하 송진우, 몽양 여운형과 자리를 함께한 사진인데, 확실히 둘이 그렇게 친해 보이지 않는다.)
1936년 일장기 말소사건 이후 <동아일보>가 정간되자 책임을 지고 사장직에서 물러났다. 9개월 뒤 복간된 후 <동아일보>는 점점 일본과 타협하는 노선을 보이게 되었으며 종국에는 학도병 권유문을 뿌리는 등 친일 언론이 되었다. 송진우는 조선총독부의 협력 요구를 수 차례 거절했다고 하는데 창씨개명을 거부했고 태평양전쟁 전후 조선임전보국단 협력을 거부하였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송진우도 친일파라면서 1934년 '조선대아세아협회'라는 조선총독부 관제 단체에 명의가 있다는 것과 일제강점기 말 1945년 '조선언론보국회 명예회원'에 명의가 있다는 것 등을 근거로 제기하는 이들이 있는데 이 부분에 대해 딱 잘라 말하자면 송진우는 친일파가 아니다.[11]
일제의 패망이 멀지 않으니 동요하지 말고 어린이들에게 정신교육을 시키라. 민족긍지를 심어주고, 일제필망, 독립필지의 굳은 신념을 갖게 하여 참고 견디어 나갈 수 있는 정신력을 길러주라.
-1940년 창씨개명을 거부하고 처벌받고 쫓겨난 아이들의 부모들이 찾아와 하소연을 하자
-1940년 창씨개명을 거부하고 처벌받고 쫓겨난 아이들의 부모들이 찾아와 하소연을 하자
광복 직전인 1945년 8월 8일, 마지막 조선 총독이었던 아베 노부유키의 밀사가 비밀리에 송진우를 찾아와 일본인들의 재산을 지켜주고 안전하게 탈출할 수 있도록 도움을 요청하였으나 끝내 거절하였고,[12] 1945년 8월 11일에도 조선총독부 측에서 경기도지사 이쿠다를 통하여 한국인 지도자 중 한 명이었던 송진우를 접촉하여 '행정 위원회'를 구성하여 줄 것을 요청하였다. 또 해방 하루 전 날인 1945년 8월 14일에는 니시히로 다다오 조선총독부 경무국장의 초대로 총독부를 방문하여 일본의 패전 소식과 함께 이후의 조선 반도의 치안을 맡아달라는 요청을 받았으나 이 또한 거절하였다. 송진우는 중경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봉대(奉戴)와 연합군의 승인을 이유로 대면서 요청을 거절하였다.[13][14]
이처럼 해방 직전까지 일제는 꾸준히 사람을 보내어 송진우를 비롯한 국내 여러 한인 지도자들에게 여러차례 접촉하여 전후 재한 일본인들 처리 문제에 대한 안위를 보장받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또 이 당시에 일제가 미군이 진주하기 전에 먼저 그들의 악행을 낱낱히 알고있는 한인 지도자들을 꼬드겨 모아놓고 집단으로 학살해놔야 나중에 해방이 되더라도 그들에 의한 후환이 없을 것이고, 또 일본인들을 향한 조선인들의 살인, 약탈 등으로부터 보호될 수 있다는 소문이 돌아 국내 지도자들 사이에선 일제의 교섭에 응하면 안된다는 여론이 지배적이었다. 그들이 자신들을 모아놓고 무슨 짓을 꾸미고 있을지 알 도리가 없었기 때문.[15]
1945년 8.15 광복 후 여운형 등이 이끄는 조선건국준비위원회 참여를 거부[16]하고 9월 6일 박헌영, 여운형 등을 중심으로 조선건국준비위원회가 조선인민공화국[17]으로 개조되자 송진우는 이를 '정부를 참칭하는 반역의 집단'이라며 인공 내각과 박헌영, 여운형을 비난하였다. 여운형은 1945년 송진우의 집을 나오는 길에서 괴한들에게 두들겨 맞는 테러를 당하여 사실상 결별하게 되는데 이 때문에 조선건국준비위원회는 서울 지역 우익의 불참, 박헌영 계열 좌익 세력의 주도권 장악으로 좌익 성향으로 가기 시작했다.[18]
송진우는 9월 7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봉대론을 내세우며 국민대회 준비회를 조직한다. 송진우는 법통을 가진 대한민국 임시정부지만 국외에서 활동했던만큼 '국민 대회'를 통해 국민들의 인정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고 동시에 당시 난립해있던 여러 정치 단체들이 서로 사상이 다르겠지만 우선은 법통을 가진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단결하여 국제 사회에 독립 국가로 승인받아 민족의 독립을 완성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19] 9월 9일 서울에 진주한 미군정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정통성을 부정하자 임시정부 봉대론을 버리고 미군정과 유착하여 독자 세력화를 시도한다.[20] 당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해방 전후로 연합국으로부터 대표성을 인정받기 위해 노력했지만 실패[21]해왔다.("한국 독립운동 단체들이 분열되어 있어 임시정부의 대표성을 인정할 수 없다.", "한반도 국내 세력과 연계가 없으므로 한국인을 대표할 수 없다."는 이유였다.)[22] 9월 16일 송진우는 우익 세력 규합의 필요성을 느껴 한국민주당을 결성하고 당대표격인 수석 총무가 되었다.
이 때부터 송진우는 진보 진영에서 역사적으로 두고두고 까이는 스텝을 밟기 시작하는데 애초에 한국민주당이 막판에 일본에 굴복한 언론인들, 자본가, 지주, 기득권 세력(이들을 극단적으로 친일반민족행위자라고도 한다.)의 지지를 바탕으로 이루어진 정당이기 때문에 민중과 상당히 괴리되어 있었고 이러한 열세를 극복하기 위해 이들은 친미를 내세워 미군정에 적극 협력해 비호를 받게 되었고 이를 통해 세력을 확장해가기 시작했다. 1945년 10월 5일 송진우와 김성수가 군정 위원회의 한국인 고문으로 임명되자 한국민주당의 위상은 더욱 올라갔는데 여기서 한국민주당의 특성을 말하자면 한국민주당 인사들은 대부분 미국 유학파들로 상당한 실력가들이었으며 이들은 기본적으로 미국식 민주주의와 시장 자본주의를 옹호하였으며 조선 민족에 대한 열등 의식을 가지고 있어 이들을 개조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이들이 미국에서 유학하고 돌아와서 친일로 전향한 이유) 하지만 무엇보다 이들은 기본적으로 유산 계급에 속했고 일제강점기에 사회주의자들에게 당한 게 많았기에 사회주의에 적대적이었다. 한반도 사정을 전혀 몰랐던 미군정은 영어를 잘하는 이들에게 정치적 조언을 듣고 사회주의를 탄압하였다는 의견이 있다.
하지만 1946년 미군정은 과도 민주 정부 수립과 좌우합작운동을 지원했고 이 결과 좌우합작위원회, 좌우합작 7원칙이 도출되었으며(미군정이 좌우를 포함하는 정치 세력을 만들려고 시도하자 이승만은 하지 중장을 공산주의자라고 비난하기도 하였다. 이후 좌우합작위원회는 좌우익 서로의 의견 차이로 1947년 해체되었다.) 비판과 달리 한국민주당 당규에는 ●국민 기본생활의 확보 ●교육 및 보건의 기회균등 ●중공주의(=중상주의)의 경제정책 수립 ●주요 산업의 국영 또는 통제관리 등이 포함되어 있는데 지금의 관점에서 보면 사회주의적 요소가 많다. 송진우의 연설에서 알 수 있듯이 공산주의 세력과의 타협은 거부했지만 사회주의에 대해 적대적인 것은 아니었다.[23]
송진우가 해방 이후 우익의 지도자로 성장하면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와의 관계도 점차 악화됐다. 본래 송진우와 한국민주당은 애국지사 후원회, 환국지사 후원회를 조직하여 임시정부 인사들을 금전적으로 후원하기도 했지만 임시정부의 법통론과 송진우의 현실주의가 충돌하면서 사이가 점차 멀어졌다. 친일 문제가 대표적인 예인데 김구가 귀국한 직후 송진우가 후원금 900만 환을 전달하자 김구는 친일 인사의 돈이 섞여 있다며 조완구를 통해 돌려 보냈다.[24] 12월 중순에는 송진우, 장덕수 등 한국민주당 인사와 김구, 김규식, 조소앙, 신익희, 엄항섭 등 임시정부 인사가 식사를 하다 친일 문제로 고성을 주고 받으며 싸우기도 했다.[25] 그 와중에 미군정이 이승만에게 힘을 실어 주자 한국민주당도 김구보다 이승만과 가까워지게 됐다. 그럼에도 한국독립당(김구), 한국민주당, 이승만은 서로 단결하려는 노력들을 해왔는데 1947년 12월 한국민주당의 장덕수가 피살된 이후로 임시정부 세력과 한국민주당, 이승만 세력은 결별하게 된다.[26]
천만의 말씀이오. 우리에게는 비록 식민지 교육이라 할지라도 전문학교 이상 대학교육을 받은 한국인이 많고 해외에서 항일투쟁을 해 온 혁명 세력이 있기 때문에 두려울 것이 없고 그럴 필요는 조금도 없으니 염려 마시오.
-1945년 국민대회를 마친 후 중국 대공보 기자가 신탁통치의 불가피성을 질문하자
-1945년 국민대회를 마친 후 중국 대공보 기자가 신탁통치의 불가피성을 질문하자
비록 공산주의 세력에 대해 적대적인 태도를 보였기는 하지만 그는 기본적으로 민족의 실력 및 문화 양성과 민주주의라는 원칙을 고수하였던 원칙주의자였다. 그가 몰락하게 된 것은 1945년 12월 28일 모스크바 3상 회의에서 한반도 신탁 통치안이 전해졌을 때 반탁 운동에 신중을 기하라고 자신의 입장을 표명한 때부터였다. <동아일보>와 <조선일보>는 모스크바 3상 회의 결과가 나오기도 전에 "신탁 통치가 결정이 되었고 미국은 반탁, 소련은 찬탁을 주장하였다"는 식으로 양측 입장을 완전히 바꿔 사전에 오보하는 신탁통치 오보사건을 터트렸는데 이에 대해 송진우는 <동아일보> 사장이면서도 반탁을 주장했던 임시정부 요인들과 의견을 달리하였다. 강원용의 증언에 의하면 당시 경교장 회의에 신탁통치안에 대해 논하기 위해 정당 대표들, 좌익, 우익, 중간파 할 것 없이 모였는데 다들 격해있었다고 한다. 이 때 석상에서 김구는 “우리가 왜 서양 사람 구두를 신느냐. 짚신을 신자. 양복도 벗어버리자. 우리 민족은 다 죽는 한이 있더라도 신탁통치만은 받을 수 없다.”면서 흥분했다고 하는데 강원용은 당시 자리에 모인 사람들 대부분이 그런 입장이었다고 증언했다. 그러나 송진우는 원칙적으로 반탁 입장임을 명시하면서도 “침착하고 신중하게 대처하자.", "미국을 적으로 돌리면 공산당이 어부지리를 얻는다.”, "무력으로 미군정으로부터 정권을 접수하려 해서는 승리할 수 없다."는 등의 주장을 했다고 한다.# 또한 다른 자리에서 송진우는 자신을 찬탁론자로 몰고가는 시중의 여론을 불쾌히 여기면서도 “우리들은 미군이 적어도 2년 동안은 머물러 있기를 원한다. 만일 미군이 지금 떠나게 되면 공산주의자들이 권력을 잡게될 염려가 있다. 왜 그러냐면 그들은 우리들보다 조직이 잘되어 있기 때문이다.”라고 주장하였다. 그는 해방 직후의 혼란이 수습되기 전에 미군이 빠져버린다면 한반도는 혼란의 도가니로 가거나 공산주의 세력에 의해 통일이 될 것이라고 판단했다.# 당시 송진우의 입장은 강준식의 《적과 동지》에 이렇게 묘사되어 있다.
강병순: 찬탁을 주장하셨다는 소문은 사실입니까?
송진우: 누가 그따위 소리를 해?
강: 좌익이 퍼뜨린 낭설인가 봅니다. 어쨌든 그런 소문이 파다하게 나돌더군요.
송: 임정은 짚신 감발을 하고 다니면서라도 반탁하겠다고 하는데. 반탁하는 건 좋지만 군정과 충돌하는 건 피하는 게 좋다고 했더니 백범이 화를 내면서 고하는 찬탁파냐고 묻더군.[27] 아마 그런 얘기가 와전된 것이겠지. 조선을 신탁 관리 아래 둔다는데 나라고 찬탁을 주장할 수 있겠나.
강: 글쎄, 그러셨겠지요. 저도 이상하다고 생각은 했습니다.
송: 허지만 백범은 차제에 정권을 인수하겠다는 생각인 모양인데 이게 도무지 현실 정치를 무시한 얘기란 말이야. 군정이 저렇게 터억 버티고 있는데 정권을 인수하겠다고 나오면 군정과 부딪칠게 뻔한 이치 아닌가. 아무리 생각이 간절해도 앞뒤를 좀 재가며 일을 해나갈 줄 알아야지. 이건 숫제 모험을 하려 드니 도대체 어떻게 뒷감당을 하겠다는 거야.
강: 듣고 보니 그렇군요.
송: 역사를 상고해봐도 조선인은 개개인이 우수한데 비해선 집단 전략에 능하질 못해. 정신은 고귀하달 수 있지만, 가령 기미년 운동을 돌이켜봐도 독립하겠다는 감정과 기분만 앞섰지 그에 부수되는 여러가지 전략이 없어. 그저 만세 부르다 많은 양민만 희생시키고 끝났거든. 물론 그로 인해 상해 임정이 서고 독립 정신을 고취시키는 운동들이 시작된 점은 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민중 운동의 결과론이고, 적어도 3.1 운동을 추진했던 지도부의 정치 능력만큼은 빵점이었단 말이야. 전국적으로 만세의 불길을 질러놓는 덴 성공했지만, 그 다음 즉 일본의 무력 제압에 대처할 방안은 아무 것도 없어. 그저 태화관에서 선언문 낭독하고, 경찰에 자진 신고한 것밖에 더 있는가. 내 말은 이번 반탁 운동도 그런 식이 되어선 곤란하다, 이 말이야.[28]
임정은 거리 시위의 여세를 몰아 정권을 인수하겠다지만 적어도 지도부가 그런 무모한 계획을 추진하면 곤란하지 않은가. 말이야 바른 말이지, 우리가 정권을 달란다고 그럼 가져가시오 하고 내놓을 군정이 어디있겠나. 응해오지 않을 때의 대비책도 있어야지. 그래서 내가 방법을 신중히 고려해보자고 했던 건데, 백범은 오히려 화를 내면서 나더러 찬탁파냐고 묻더란 말이야. 원, 정치한다는 사람들이 이렇게 말귀를 알아듣지 못해서야. 쯧쯧.
송진우: 누가 그따위 소리를 해?
강: 좌익이 퍼뜨린 낭설인가 봅니다. 어쨌든 그런 소문이 파다하게 나돌더군요.
송: 임정은 짚신 감발을 하고 다니면서라도 반탁하겠다고 하는데. 반탁하는 건 좋지만 군정과 충돌하는 건 피하는 게 좋다고 했더니 백범이 화를 내면서 고하는 찬탁파냐고 묻더군.[27] 아마 그런 얘기가 와전된 것이겠지. 조선을 신탁 관리 아래 둔다는데 나라고 찬탁을 주장할 수 있겠나.
강: 글쎄, 그러셨겠지요. 저도 이상하다고 생각은 했습니다.
송: 허지만 백범은 차제에 정권을 인수하겠다는 생각인 모양인데 이게 도무지 현실 정치를 무시한 얘기란 말이야. 군정이 저렇게 터억 버티고 있는데 정권을 인수하겠다고 나오면 군정과 부딪칠게 뻔한 이치 아닌가. 아무리 생각이 간절해도 앞뒤를 좀 재가며 일을 해나갈 줄 알아야지. 이건 숫제 모험을 하려 드니 도대체 어떻게 뒷감당을 하겠다는 거야.
강: 듣고 보니 그렇군요.
송: 역사를 상고해봐도 조선인은 개개인이 우수한데 비해선 집단 전략에 능하질 못해. 정신은 고귀하달 수 있지만, 가령 기미년 운동을 돌이켜봐도 독립하겠다는 감정과 기분만 앞섰지 그에 부수되는 여러가지 전략이 없어. 그저 만세 부르다 많은 양민만 희생시키고 끝났거든. 물론 그로 인해 상해 임정이 서고 독립 정신을 고취시키는 운동들이 시작된 점은 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민중 운동의 결과론이고, 적어도 3.1 운동을 추진했던 지도부의 정치 능력만큼은 빵점이었단 말이야. 전국적으로 만세의 불길을 질러놓는 덴 성공했지만, 그 다음 즉 일본의 무력 제압에 대처할 방안은 아무 것도 없어. 그저 태화관에서 선언문 낭독하고, 경찰에 자진 신고한 것밖에 더 있는가. 내 말은 이번 반탁 운동도 그런 식이 되어선 곤란하다, 이 말이야.[28]
임정은 거리 시위의 여세를 몰아 정권을 인수하겠다지만 적어도 지도부가 그런 무모한 계획을 추진하면 곤란하지 않은가. 말이야 바른 말이지, 우리가 정권을 달란다고 그럼 가져가시오 하고 내놓을 군정이 어디있겠나. 응해오지 않을 때의 대비책도 있어야지. 그래서 내가 방법을 신중히 고려해보자고 했던 건데, 백범은 오히려 화를 내면서 나더러 찬탁파냐고 묻더란 말이야. 원, 정치한다는 사람들이 이렇게 말귀를 알아듣지 못해서야. 쯧쯧.
여러분의 생각이 모두 애국심에서 나온 것이란 걸 나도 알고 있지만 나라를 이끄는 지도자들로서 경박해서는 안되겠지요. 여기 누구라도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결정된 의정서의 원본을 제대로 읽어본 분이 있습니까? 내가 알고 있기로는 그 내용이 미소공동위원회를 설치한 후 한국의 정당 사회단체들과 협의해서 남북을 통일한 임시정부를 세우고 5년 이내의 신탁통치를 하는 것으로 되어 있는데, 내가 알고 있는 게 정확하다면 길어야 5년이면 통일된 우리의 독립정부를 세울 수 있는 것을 그렇게 극단적인 방법으로까지 반대할 이유는 없지 않겠습니까? 어차피 우리가 우리 힘으로 정부를 세운다고 해도 현재 이렇게 분할통치되고 있는 상황이고, 강대국간에 전후(戰後) 문제가 아직 해결되지 않은 상태에서 우리가 그들과의 합의없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신탁통치가 길어야 5년이라고 하니 3년이 될 수도 있는 것인데, 그렇게 거국적으로 반대할 이유가 뭐 있습니까. 물론 나도 신탁통치는 반대합니다. 그러나 반대 방법은 다시 한번 여유를 가지고 냉정히 생각해 봅시다.
신탁통치 소식이 전해진 직후 경교장(김구의 사저) 회의에서#[29]
신탁통치 소식이 전해진 직후 경교장(김구의 사저) 회의에서#[29]
하지만 이러한 송진우의 태도는 일제강점기의 상처가 덜 가신 민중들과의 괴리를 심화시키는 것이었고 반탁을 주장하는 임시정부 요인들과 견해를 달리하는 것이었다. 물론 그의 발언은 모두가 현실적이고 사실인 것은 맞다.[30] 그러나 문제는 현실이 그의 생각만큼 느긋함을 요구하고 있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신탁통치안이 내려진 후 국내의 세력은 오로지 '찬탁'이냐 '반탁'이냐의 두 세력만 존재할 뿐 그 외의 어떠한 입장도 용납되지 않았다. 송진우는 당시의 상황이 해방이 되고 난지 얼마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간과했을 뿐 아니라 신탁통치안에 나왔던 자주적 통치 능력을 갖추기까지 당분간이란 항목을 알지 못했다는 것이다. 여기서 "당분간"이라는 기간은 연합국이 일방적으로 정한 것이라 기한이 언제까지인지를 명시하지 않았다는 점이다.[31] 따라서 반탁 측에서 내놓았던 의견인 '사실상의 또다른 식민 통치'라는 것도 틀리지 않았다는 것이다.[32] 이후 미소공동위원회의 결렬로 한반도 문제는 UN 소총회로 이관되었다. UN 감시하의 총선거를 위한 위원단의 북한 지역으로의 입장이 소련군정 당국에 의해서 거부당하자 UN 소총회는 선거 가능한 지역에 한해서만이라도 총선거를 추진할 것을 결정하였다. 결국 한반도는 남과 북에 별개의 정부가 수립되며 남북분단되었다. 송진우는 한반도가 공산주의 세력에 의해 지배될 수 있으니 적어도 2년 동안은 미군 주둔이 필요하다는 현실적인 입장이었지 찬탁은 아니었다.
미군정부는 군정에 그쳤으면 좋겠소. 반탁운동은 이 나라 국민의 의사이며 국민운동인데, 국민운동에 군정이 개입한다는 것은 현명한 행동은 아니라고 생각되오.
-반탁 시위를 하는 시위 행렬을 미군 헌병이 강압으로 해산시키자 군정장관 아놀드를 방문하여 항의하면서
-반탁 시위를 하는 시위 행렬을 미군 헌병이 강압으로 해산시키자 군정장관 아놀드를 방문하여 항의하면서
특히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대표격인 김구 세력의 큰 반감을 사게 되었는데 그로부터 얼마 안 있어[33] 25세의 한현우[34]에게 암살당하였다. 한현우는 일당들과 새벽에 서울특별시 종로구 원서동에 있는 송진우의 저택에 들어와 13발의 총탄을 난사했고 송진우는 얼굴, 심장, 배에 총알 6발을 맞아 즉사했다.[35]
송진우의 사후에는 그의 친구 김성수가 한국민주당을 이끌게 되었지만 사망 전까지는 송진우가 해방정국에서 명실상부한 한국민주당 및 국내우익세력의 리더 역할을 했다. 신탁통치 문제에 대한 생각에서 볼 수 있듯이 한국민주당 내에서 냉철하고 합리적인 판단력과 비교적 중도적인 성향을 갖고 있었으며 다른 상당수 한국민주당 계열 인사들과 달리 일제에 협력하는 것을 끝까지 거부했기 때문에 친일 문제에서도 자유로웠던 인물이다. 그랬기에 만일 그가 암살당하지 않았더라면 훗날 벌어진 끔찍한 사상대립의 역사의 피해가 줄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3. 대중매체에서
- 1973년작 영화 《광복 20년과 백범 김구》에선 배우 성소민이 연기했다.
- 1981년작 MBC 드라마 《제1공화국》에선 배우 박근형이 맡았는데, 비록 출연은 짧지만 여운형과의 갈등 관계나 임시정부 계통 인사들과의 갈등 관계가 잘 묘사되어 있다. 박근형은 당시 눈에 띌 정도로 느릿한 대사 처리를 선보였는데 아마 중후하고 근엄했다는 송진우의 말투를 재현한 듯하다.
- 1982년작 KBS1 8.15.특집드라마 《그 여름의 이틀》에선 배우 김흥기가 연기했다.
- 1984년작 MBC 드라마 《조선총독부》에선 성우 김수일이 연기했다.
- 1985년작 KBS 대하드라마 《새벽》에서는 배우 박웅이 연기했다.
- 1989년작 MBC 특집드라마 《백범일지》에선 성우 정승현이 연기했다.
- 1990년작 KBS 대하드라마 《여명의 그날》에선 배우 권성덕이 연기했다.
- 1994년 2월 6일자 KBS1 《다큐멘터리극장》에서는 배우 박경득이 연기했다.
- 2003년작 SBS 대하드라마 《야인시대》에선 성우 임성표가 연기했다.
- 2006년작 KBS1 대하드라마 《서울 1945》에선 배우 박칠용이 연기했다.
4. 기타
- 정치적으로는 독재를 배척하는 민주주의 체제를 추구했다. 이것은 경제적으로도 마찬가지였는데, 정치에서 독재가 문제있듯이 경제에서 독점 자본이 문제있다는 인식을 보였으며, 사회주의 성향을 포용하는 성향을 보여주기도 했다.[36] 오늘날의 표현으로 '경제 민주화'의 원조격 인물이었던 셈.
정치적으로는 민주주의 정체(원문: 民主々義政體)를 수립해야 합니다. 독립한 국가가 될지라도 그 권력이 한 사람의 것이 되고 일계급의 독재한 바가 된다면 무엇으로써 우리의 생명재산과 자유가 보장될수 있겠습니까. 이러한 국가나 사회에는 오직 마찰과 대립이 있을뿐이니 우리는 만인이 기구하는 민주적 정치체제를 확립하지 않으면 안될지니...(중략)
과거에 있어서는 자유에만 치중하고 균등에 있어서는 진실한 고려가 없었기 때문에 자본가가 이윤 추구에 방분한 나머지 경제적 균등의 기회는 파괴되고 따라서 근로 대중의 생활은 그 안정을 잃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치적 민주주의가 독재적 전횡을 타파하는데 있는 것 같이 경제적 민주주의는 독점의 자본을 제재하는데 있는 것이니 진정한 의미의 경제적 민주주의는 그 정책에 있어서 사회주의 계획 경제와 일치된 점을 발견치 못하리라고도 생각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대자본을 요하고 독점성을 띄운 중요 산업은 국영화 혹은 공영으로 해야만 할 것이오. 또한 토지 정책에 있어서도 종래의 불합리한 착취 방법을 단연 배제하기 위하여 일본인 소유 토지의 몰수에 의한 농민에게 경작권 분여는 물론이거니와 조선인 소유 토지도 소유를 극도로 제한하는 동시에 매매 겸병을 금하여 경작권의 전국적 시설을 촉진하여 민중의 생활을 권보하지 않으면 아니될 줄 믿습니다.
송진우의 연설, 동아일보 1945년 12월 23일 1면 기사 民族(민족)을 永久維持(영구유지) 韓民黨 政見發表 放送(한민당 정견발표 방송)) 중 일부 인용
과거에 있어서는 자유에만 치중하고 균등에 있어서는 진실한 고려가 없었기 때문에 자본가가 이윤 추구에 방분한 나머지 경제적 균등의 기회는 파괴되고 따라서 근로 대중의 생활은 그 안정을 잃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치적 민주주의가 독재적 전횡을 타파하는데 있는 것 같이 경제적 민주주의는 독점의 자본을 제재하는데 있는 것이니 진정한 의미의 경제적 민주주의는 그 정책에 있어서 사회주의 계획 경제와 일치된 점을 발견치 못하리라고도 생각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대자본을 요하고 독점성을 띄운 중요 산업은 국영화 혹은 공영으로 해야만 할 것이오. 또한 토지 정책에 있어서도 종래의 불합리한 착취 방법을 단연 배제하기 위하여 일본인 소유 토지의 몰수에 의한 농민에게 경작권 분여는 물론이거니와 조선인 소유 토지도 소유를 극도로 제한하는 동시에 매매 겸병을 금하여 경작권의 전국적 시설을 촉진하여 민중의 생활을 권보하지 않으면 아니될 줄 믿습니다.
송진우의 연설, 동아일보 1945년 12월 23일 1면 기사 民族(민족)을 永久維持(영구유지) 韓民黨 政見發表 放送(한민당 정견발표 방송)) 중 일부 인용
- 현실주의적이고 이념 문제에 상대적으로 온건했던 송진우가 암살당하지 않았더라면 당대 좌우 대립이 조금이라도 완화되지 않았을까 평가하는 이들도 있다. 실제로 송진우 암살 이후 한국민주당에서는 김성수가 수석 총무로 선출되는 등 보수적 색채가 짙어졌다.
- 생전 '목소리가 멋진 남자'에 손꼽혔으며 억양에 악센트가 없고 근엄하고 중후하기로 이름나 있었다고 한다. 특히 일본어 악센트가 세지 못한 것으로 유명했다. 가령 光化門(광화문) 550番(동아일보 사옥의 주소다)이라고 부를 때 「고까몽」할 것을 「고가뭉」하고 또 「私し 宋鎭禹ですが」라고 전화 받는걸 보면 「와따시 송징우데스가」하고 첫자부터 마즈막 「데스가」에 이르기까지 줄곧 고저 장단 없이 그냥 주욱 말했다고 한다.
- 초대 대한민국 부통령을 지낸 이시영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활동을 할 때 둘째아들이 결혼을 서울에서 해야했는데 당시 동아일보 사장이었던 송진우가 주례를 섰고 동아일보에서 결혼 비용을 대주었으며 큰아들은 한자를 잘해서 동아일보 교열부 기자로 취직시켜 주었다고 한다. 이시영의 조카인 이종찬 전 국정원장은 당시 동아일보가 해외로 나간 독립운동가들의 개인사를 돕는 국내 거점 역할을 했다고 평가했다.기사 또한 김좌진 장군 휘하에서 항일무장투쟁을 했던 이강훈 전 광복회장은 “인촌 김성수가 송진우 동아일보 사장을 통해 김좌진 장군에게 여러차례 군자금을 보내왔다."고 증언했다.기사
-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교수, 국제형사재판소(ICC) 소장을 지낸 송상현이 송진우의 양손자이다.
- 위 여운형과 찍은 사진을 보면 그도 만만치 않은 장신으로 보인다.
5. 관련 단체
[1] 도로명 주소 : 전라남도 담양군 금성면 손곡길 12-1.[2] 신평 송씨 집성촌이다.[3] 원래 망우리공원에 있었으나 1966년 서울특별시 강서구 지향산 기슭으로 이장하였다가, 1988년 5월 3일 현재의 위치에 이장되었다.[4] 노송공파(老松公派) 24세 진(鎭) 항렬.[5] 친구로 지냈던 인촌보다 훨씬 컸다.#[6] 동아일보 강제폐간 이후 사옥의 관리를 위해 설립한 법인이다.[7] 3.1 운동에 연루되어 보안법 위반으로 실형을 선고받았다.자료.[8] 출처-송진우 기념사업회#[9] 송진우 기념사업회 # 동아일보 칼럼 #[10] 영친왕의 보모이자 김천고등학교 설립자.[11] 1934년 '조선대아세아협회'라는 것에 대해 해명하자면 이 단체에는 12명의 친일파 거두와 방응모, 여운형, 송진우 등 15명의 조선인의 명의가 있다. 이는 '신문사 사장 직함'으로써 피할 수 없었다고 봐야 하는데 왜냐하면 당시는 신문사 경영 자체가 민족 운동인 시절이었기 때문이었고 신문사를 통해 합법적으로 독립운동 양성을 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신문사의 원활한 운용을 위해 자신의 이름이 도용 또는 이용되는 것을 묵인하는 방법이었다고 해석하면 된다. 1945년 일제강점기 말기에 '조선언론보국회'에 송진우의 명의가 있는 것도 시기를 고려해 봐야 하는데 이 시기 송진우는 거의 모든 활동을 그만두고 칩거 생활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안재홍, 홍명희, 여운형 등처럼 명의를 도용당했다고 해석하면 될 것이다. 송진우는 조선총독부로부터 무슨 협력의 대가로 받은 급부가 없으며 대개 일반적인 친일파들은 자신들의 지위나 재산을 지키기 위해 협력한 반대 급부를 받는 게 당연했다. 반면 그의 평생 동지격인 김성수는 중일전쟁 때부터 라디오 시국 강연 등 나섰던 기록이라든가 조선총독부로부터 반대 급부를 받았다는 것도 있다. 즉 김성수를 친일파라 부를 수는 있어도 송진우를 친일파라 부르기 어렵다. 받은 게 없기 때문이다. 비슷하게 안재홍 같은 사람도 오히려 친일세력쪽에서 친일 의혹을 주장하기도 했는데, 안재홍이 일제 시대에 항일 활동을 하다가 별 희한한 죄목들로 수도 없이 억울한 감옥 생활을 반복한 걸 생각하면 말도 안되는 이야기이다. 물론 현재의 국가보안법에 해당하는 죄목(반국가단체 결성. 안재홍은 상해 임시정부의 조선 내 연락 조직을 만들었다가 잡혔고 감옥에 끌려가서 몇년을 살았다.)으로도 감옥에 가기도 했다.[12] Louise Yim, 《My Forty Year Fight For Korea - The Thrilling Personal Story of Korea's Joan of Arc》, 1951, A. A. Wyn, p. 227-228[13] 이전에 기술에서는 일본인들이 송진우를 찾아간 적이 없다고 자꾸 단언하는데, 오히려 당시 송진우와 함께 국내에 거주하며 독립운동하던 지사나 동지들은 하나같이 일제가 패망이 가까워지자 지속적으로 여러번 밀사를 보내서 '우리가 통치권을 주는 대신 일본인들의 재산을 보호해주고 안전하게 빠져나게 해달라'는 요청을 하기 위해 송진우를 찾아왔다는 사실을 동일하게 증언한다. 즉, 일본은 비단 송진우 뿐 아니라 여운형이나 안재홍 등 기타 다른 지도급 한국인들에게 혹여 해방 후 폭동이 일어나거나 한인들이 자신들을 습격하고 재산을 빼앗을 것이 두려워 이러한 뒷공작을 펼쳤던 것이다. 단순히 소수의 몇몇 일본 고위 관계자들이 자신은 그런 밀사를 보낸 일이 없다고 (애초에 나치 전범과도 같은 이들의 말조차 얼마나 곧이곧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지부터가 미지수다.) 또는 송진우에게 접촉한 바 없다고하여 다른 일본 지도자들까지 그런 일을 하지 않았다고 말하는건 그야말로 어불성설이다. (政界秘史 事實의 全部를 記述한다, 希望出版社, 1966, p. 105-129, p. 195-226 / 大韓民國 建國과 나, 滄浪張澤相記念事業會, 1992 / 許政, 《내일을 위한 證言 : 許政回顧錄》, 1979, 샘터사, p. 97 / My Forty Year Fight For Korea - The Thrilling Personal Story of Korea's Joan of Arc, A. A. Wyn, 1951, p. 227-228 / 東山回顧錄 尹致暎의 20世紀, 三星出版社, 1991, p. 136-167 등을 참고)[14] 그래서 나중에 송진우는 일제와 교섭하는 여운형에게 '어차피 연합군이 들어와서 일제를 무장해제 시키고 해외의 독립운동 지사들이 귀환하면 그 때 절차를 거쳐서 이양을 받아야지 왜 일본 앞잡이 노릇을 하냐'며 강력히 비판하였다. 또 그는 '내가 여러번 충고했지만 여운형은 일제와 밀약하여 인계받은 후, 조직을 이끌고 자신의 방식대로 일을 하려고 이미 작심했기에 그 누구의 말도 들으려하지 않는다'고 한탄하였다. (東山回顧錄 尹致暎의 20世紀, 三星出版社, 1991, p. 136-167 / My Forty Year Fight For Korea - The Thrilling Personal Story of Korea's Joan of Arc, A. A. Wyn, 1951, p. 235-240[15] My Forty Year Fight For Korea - The Thrilling Personal Story of Korea's Joan of Arc, A. A. Wyn, 1951, p. 223-236[16] 사실 여운형은 해방 이후 조선건국준비위원회 활동 당시 서울 지역 우익의 대표격인 송진우를 찾아가 좌우를 망라하는 조선 민족의 통일 국가를 건립하자고 지속적으로 협력을 요구하였고 설득했으나 송진우는 "경거망동을 삼가라, 충칭에 있는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지지해야 한다"는 소리만 하면서 여운형의 제안을 끝내 거절하는 보수적인 입장을 취했다. 이런 태도를 보인 원인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말이 있지만 이는 당시 송진우가 보기에 조선건국준비위원회 활동이 국제적인 승인을 받았는지 불분명하므로 그럴 바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지지하는 편이 낫다고 보았기 때문도 있고 여운형이 과거 고려공산당 활동에 몸담았던 전적이 있어 공산주의자라고 판단했기 때문도 있다. 여운형이 <동아일보>의 라이벌 신문 중 하나였던 <조선중앙일보> 사장이었으므로 자존심상 라이벌이 운영하는 조직인 조선건국준비위원회 아래로 들어가기 싫었기 때문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일제강점기에도 조중동 경쟁이 있었으며 당시 3대 신문이었던 방응모의 <조선일보>, 송진우의 <동아일보>, 여운형의 <조선중앙일보>의 회사 확장, 잡지 발행 경쟁은 "3증 경쟁"이라고 불릴 정도였다.[17] 조선공산당이 실권을 가지고 있었다.[18] 박헌영도 그렇고 송진우가 개방적인 자세를 취해 여운형의 협력을 받아들였다면 좌우 대립이 한결 완화되어 통일 국가 수립이 한층 앞당겨졌을 거라는 가정도 있다. 해방 전후사를 연구해본 사람들은 민중 세력인 여운형과 유산자 및 기업가를 대변하는 지식인 송진우가 결별하지 않고 연대했더라면 남한 정국이 완전히 달라졌을거라는 얘기를 한다. 송진우와 결별한 여운형은 지주나 자본가들과 연대가 되지 않자 자연히 정치적 자원을 생산 현장의 노동자들로부터 얻을 수 밖에 없었던 것이고 따라서 당시 노동자 세력을 대변하던 극좌파 박헌영 세력과 손을 잡게 되었다는 것이다.참조.[19] 1945년 12월 연설문 일부 #[20] 한국민주당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세력이 결별한건 한국민주당의 송진우에 이어 장덕수가 피살당한 이후이다.[21] 물론 그외 다른 정치 단체들도 인정 못받은건 마찬가지였다. 8월 30일 임시정부 요원들이 미국 대사관을 방문하여 임시정부 자격으로 입국을 희망한다고 밝히기도 했지만 거부되었다. 그래서 김구를 비롯한 임시정부 요인들은 12월 19일 개인 자격으로 환국하게 되었다.[22]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 발언. #[23] 민족주의자들의 공산주의 세력에의 거부가 꼭 경제적 측면만은 아니었는데 일례로 북한에는 전통 명절이나 세시풍속이 모두 사라졌다. 왜냐하면 공산주의자들은 전통 문화를 모두 봉건 잔재로 봤기 때문이다. 중국 공산당의 문화대혁명 때도 기존의 전통 문화에 대한 대대적인 파괴가 있었다. 물론 송진우는 남녀 교제를 반대하던 당시의 통념을 반박하며 남녀 교제와 자유 연애를 긍정한다던가 국민들에게 과학적 지식을 보급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실력 양성을 주장하는 등 신문물에 개방적인 편이었다.[24] 송진우는 "정부가 받는 세금에는 양민의 돈도 죄인의 돈도 들어있는 것입니다."고 설득해 다시 돌려보냈다고 한다.[25] "국내에 있던 사람들은 크건 작건 모두 친일파."라고 하자 "그러면 우리 모두 숙청감이란 거냐"며 임시정부와 한국민주당 사람들간에 언쟁이 벌어지자 송진우가 "국내 사람들은 맘편히 살았을거 같으냐. 여러분들을 임시정부의 법통 때문에 떠받드는 것이지 노형들 개인 때문에 이러는 게 아니다. 모두들 건국에 힘쓸 생각이나 먼저 하자."고 중재해 일단락됐다고 한다.[26] 당시 암살의 배후로 김구가 지목되었다.[27] 실제로 기밀 해제로 공개된 당시 미군정 문서에 따르면, 미군정은 김구를 대단히 부정적으로 평가했다.[28] 송진우는 젊은 시절인 3.1 운동 당시 민족대표 48인의 한사람으로서 3.1 운동을 주도하여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29] 이 말은 당시 송진우의 실제 발언을 옮긴 것이 아니라 팩션 소설의 대사이다.[30] 특히 위의 대화문에서 밝힌 미군정이 버티고 있는데 임시정부에서 정권 인양으로 나오면 미군정이 그냥 있지 않는다는 말은 송진우의 탁월한 식견을 보여주고 있다. 미군정은 임시정부 요인 중 1명이었던 김구에 대해 부정적인 의견을 밝혔는데 그런 상황에서 임시정부가 정권을 인수하겠다고 나오면 미군정에서 순순하게 나올 일은 없었다.[31] 5년이라는 기간이 나와 있기는 했지만 과거 루즈벨트가 한국도 필리핀처럼 20~50년의 장기간의 신탁통치를 구상하고 있었음을 고려한다면 명목상 제시되어 있는 기간이라고 볼 여지가 존재한다. 당시 정치가들이 이를 인지하였을지는 모르지만 이를 고려한다면 설득력 있는 내용이다.[32] 이에 대해서는 모스크바 3상회의의 신탁통치안에 "한국을 독립국가로 재건하기 위한 임시한국민주정부를 수립(set up a provisional Korean democratic government.) 최고 5년 기간의 4개국 신탁통치안을 임시한국정부와 협의(consultation) 구체화를 위해 2주 이내에 미국, 소련 사령부 대표회의(미소공동위원회) 소집"이라고 나와있으며, 그 최고 5년의 기한도 한반도에 단일 임시정부를 세워 협의했다면 줄일 수도 있는 조건이 명시되어 있다는 점을 들어 반박하는 주장도 있다. 하지만 미소공동위원회 기간 동안 찬탁과 반탁에 대한 의견 차이로 임시 한국 정부를 세우지도 못했고 따라서 신탁 기간을 논하지도 못했으므로, 결국 이 논리는 현실화되지 못했다.[33] 가장 짧은 기간으로 보는 입장에서는 2시간 만에 암살당했다.[34] 한현우는 백의사 소속이라는 이야기가 있는데 한현우의 진술에서는 송진우 암살 이후에 김구와 이승만이 좋아했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그래서 백의사와 김구로 이어지는 연결 고리 때문에 송진우 암살 배후는 김구라는 의혹이 있다. 한현우는 1993년 김영삼 정부 출범 당시 청와대 정책수석으로 내정되었다가 사퇴한 전병민의 장인임이 알려져 다시 화제가 되기도 했다.[35] 허정의 회고에 따르면 송진우는 암살 전날 경교장에서 늦게까지 김구, 장덕수와 신탁통치 문제를 의논했는데 밤이 깊자 장덕수가 자신의 집에서 자고 가라고 했다 한다. 그러나 잠자리에 예민했던 송진우는 제안을 사양하고 자신의 집으로 돌아갔는데 이 때 장덕수의 말을 들었으면 적어도 그 날의 암살을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36] 1945년 12월 정견발표 연설문 上 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