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모에 미러 (일반/밝은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04-12 22:12:54

한용운

파일:대한민국장 약장.png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수훈자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0;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4D4D4D, #696969 20%, #696969 80%, #4D4D4D); color: #fede58"
{{{#fede58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파일:건국훈장 대한민국장 부장.png
1949
이승만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949
이시영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953
제임스 A. 밴 플리트
파일:미국 국기.svg
1953
장제스
파일:대만 국기.svg
1955
하일레 셀라시에
파일:에티오피아 제국 국기.svg
1957
응오딘지엠
파일:베트남 공화국 국기.svg
1958
아드난 멘데레스
파일:튀르키예 국기.svg
1962
허위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962
김좌진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962
오동진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962
조병세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962
안중근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962
윤봉길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962
이준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962
강우규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962
김구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962
안창호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962
신익희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962
김창숙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962
손병희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962
이승훈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962
한용운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962
최익현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962
이강년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962
민영환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964
더글러스 맥아더
파일:미국 국기.svg
1964
해리 S. 트루먼
파일:미국 국기.svg
1964
루트비히 에르하르트
파일:독일 국기.svg
1965
프랑수아 톰발바예
파일:차드 국기.svg
1965
다비드 다코
파일:중앙아프리카 공화국 국기.svg
1965
수루-미강 아피디
파일:베냉 국기.svg
1965
레오폴 세다르 상고르
파일:세네갈 국기.svg
1965
펠릭스 우푸에부아니
파일:코트디부아르 국기.svg
1965
레옹 음바
파일:가봉 국기.svg
1965
아마두 바바투라 아히조
파일:카메룬 국기.svg
1965
하마니 디오리
파일:니제르 국기.svg
1965
조모 케냐타
파일:케냐 국기.svg
1965
무테사 2세
파일:우간다 국기.svg
1965
필리베르트 치라나나
파일:마다가스카르 국기.svg
1965
툰쿠 압둘 라만
파일:말레이시아 국기.svg
1966
타놈 키티카초른
파일:태국 국기.svg
1966
쑹메이링
파일:대만 국기.svg
1966
천궈푸
파일:대만 국기.svg
1968
쑨원
파일:중화민국 북양정부 국기.svg
1968
천치메이
파일:중화민국 북양정부 국기.svg
1969
피델 산체스 아르난데스
파일:엘살바도르 국기.svg
1970
조만식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976
임병직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977
필립 제이슨
파일:미국 국기.svg
1979
박정희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980
최규하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981
시리낏 끼띠야꼰
파일:태국 국기.svg
1981
푸미폰 아둔야뎃
파일:태국 국기.svg
1983
전두환(취소)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989
김규식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989
조소앙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999
장면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2008
여운형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2019
유관순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2021
홍범도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 : 독립유공자 : 기타 공훈 및 국가원수}}}}}}}}}
한용운 관련 틀
[ 펼치기 · 접기 ]
----
3.1 운동의 민족대표 33인
{{{#!wiki style="margin: 0 -10px;"
{{{#fede58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bottom: -15px;"
{{{#555,#aaa
권동진 권병덕 길선주 김병조 김완규 김창준 나용환 나인협 박동완 박희도(日) 백용성
박준승 손병희 신석구 신홍식 양전백 양한묵 오세창 오화영 유여대 이갑성 이명룡
이승훈 이종일 이종훈 이필주 임예환 정춘수(日) 최린(日) 최성모 한용운 홍기조 홍병기
※ 친일반민족행위자 관련 인물은 (日)로 표기.
}}}}}}}}}}}}}}}

{{{#!wiki style="margin: -10px -10px"<tablebordercolor=#fff><tablebgcolor=#fff> 파일:문화부 심볼.svg이달의 문화인물
(1990-1997)
}}}
{{{#!wiki style="margin:0 -10px -5px; min-height:calc(1.5em +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6px -1px -11px"
1990년
7월
김정희
8월
장영실
9월
김소월
10월
세종대왕
11월
김홍도
12월
신재효
1991년
1월
나운규
2월
정철
3월
한용운
4월
김정호
5월
방정환
6월
정약용
7월
문익점
8월
안익태
9월
허준
10월
주시경
11월
윤선도
12월
이해랑
1992년
1월
이황
2월
정선
3월
박지원
4월
우장춘
5월
신사임당
6월
류성룡
7월
일연
8월
홍난파
9월
고유섭
10월
이윤재
11월
안창호
12월
윤동주
1993년
1월
이이
2월
이인문
3월
장보고
4월
이천
5월
윤극영
6월
원효
7월
지석영
8월
안중근
9월
박연
10월
최현배
11월
장지연
12월
윤백남
1994년
1월
우륵
2월
황희
3월
김유정
4월
홍대용
5월
강소천
6월
이상백
7월
안견
8월
박은식
9월
박승희
10월
이희승
11월
정도전
12월
신채호
1995년
1월
강세황
2월
조식
3월
월터 정
4월
최무선
5월
이원수
6월
김병로
7월
이육사
8월
김구
9월
채동선
10월
김윤경
11월
이수광
12월
곽재우
1996년
1월
김만중
2월
최치원
3월
이순지
4월
서재필
5월
김명국
6월
유일한
7월
도선
8월
심훈
9월
왕산악
10월
정인승
11월
전형필
12월
이제마
1997년
1월
송석하
2월
성현
3월
최윤덕
4월
이중환
5월
초의 (의순)
6월
한호
7월
이세보
8월
박제가
9월
박진
10월
장지영
11월
왕인
12월
송진우
※ 선정 당시 기관명은 문화부(1990~1993) → 문화체육부(1993~1998) → 문화관광부(1998~2005)였다.
이달의 문화인물(1998-2005) }}}}}}}}}

파일:조선 어기 문장.svg 조선의 승려
{{{#!wiki style="margin: -5px -11px; padding: 5px 0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6px -1px -11px"
각성 경순공주 경허 경헌
광언 기화 김연일 만공
명안 명연 무학대사 보우
불노 선수 설제 신미
영규 유일 유정 윤우
의엄 이동인 이회광 일옥(진묵대사)
지안 지탁 진희 청학
체정 초의선사 쾌선 태능
학열 학조 한용운 해안
혜희 휴정
}}}}}}}}} ||
<colbgcolor=#0047a0><colcolor=#ffffff>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한용운
韓龍雲 | Han Yong-un
파일:한용운.png
출생 1879년 8월 29일
충청도 결성현 현내면 박철리
(現 충청남도 홍성군 결성면 성곡리 박철마을)[1]
사망 1944년 6월 29일 (향년 64세)
경기도 경성부 동대문구 성북정
(現 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동 심우장)
묘소 경기도 구리시 교문동
본적 강원도 양양군 도문면 장항리 211
(現 강원특별자치도 속초시 설악동 211 내원암)[2]
본관 청주 한씨[3]
가족 관계 아버지 한응준, 어머니 창성 방씨
아들 한보국, 딸 한영숙
별칭 본명은 정옥(貞玉)
법명은 용운(龍雲)
아호는 만해(萬海)
활동 분야 불교, 독립운동, 문학
학력 명진학교 (졸업)
종교 불교
상훈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추서
저서 님의 침묵, 불교대전
외부 링크 만해 한용운 기념관 홈페이지

1. 개요2. 생애3. 작품4. 대중매체에서5. 기타6. 둘러보기

[clearfix]

1. 개요

한국시인, 승려, 독립운동가, 불교사회주의자. 속명은 정옥(), 법명은 용운(), 호는 만해().

3.1 운동을 계획하고 독립선언서 작성에 함께 했다. 민족 세력을 규합해 독립 운동을 하고 일제의 압력에 조금도 굴하지 않았다. 시인으로서 주옥같은 작품들을 통해 한글 문학의 발전에 큰 공헌을 했고, 승려로서 매너리즘에 빠져있던 조선 불교의 개혁에도 앞장섰다. 평소 입이 거칠고 곡차를 좋아해 괴짜 스님으로도 유명했다.

2. 생애

1879년 8월 29일, 충청도 결성현 현내면 박철리(현 충청남도 홍성군 결성면 성곡리 박철마을)에서 부농인 아버지 한응준(韓應俊)과 어머니 창성 방씨(昌成 方氏) 사이의 두 아들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어릴 적 고향에서 한학을 배웠고 18세 때인 1896년(또는 1897년) 고향을 떠나 백담사 등을 전전하며 수년간 불교 서적을 읽었다고 전해지나 정확한 것은 알 수 없다.

출가의 원인 역시 정확하게 알려져 있지 않으나, 당시 고향 홍성에서도 동학농민운동의병 운동이 전개되고 있었는데 그의 부친 한응준은 일찍이 충훈부(忠勳府)[4]의 종5품 도사(都事)를 지내다가 1894년(고종 31) 12월 5일 호연초토사(湖沿招討使) 이승우(李勝宇)의 참모관(參謀官)에 제수되어 동학농민운동 진압에 참여하게 되었으며#, 도중 전사하였다. 이로 보아 역사적 격변기의 상황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1905년, 영제(永濟) 스님에 의하여 수계(受戒)를 하니 득도 때의 계명(戒名)은 봉완(奉玩)으로 이때 출가하여 얻은 법명이 바로 용운(龍雲)이다.[5]

1910년, 국권이 피탈되자 중국에 가서 독립군 군관 학교로 운영 중이던 우당 이회영 등의 신흥무관학교를 방문, 격려하였다. 뒤이어 만주시베리아 등지를 방랑하다가 1913년 귀국해 불교 학원에서 교편을 잡았다. 이후 1912년 양산 통도사에서 팔만대장경을 열람하고 1914년 부산 범어사에서《불교대전(佛敎大典)》을 간행하고 대승불교의 반야 사상(般若思想)에 입각하여 종래의 무능한 불교를 개혁하고 불교의 현실 참여를 주장하였다.

이후 오세암으로 들어가 화두를 참구하며 수행에 정진했다. 그렇게 수행하던 중 오도송(悟道頌)을 지었다.
男兒到處是故鄕
幾人長在客愁中
一聲喝破三千界
雪裡桃花片片飛

남아란 어디메나 고향인 것을
나그네 수심에 잠긴 이 그 몇이더냐
한 마디 큰소리 질러서 삼천 대천 세계 깨뜨리니
눈 속에 복사꽃 조각조각 날리네.
1919년, 3.1운동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서 독립선언서에 선언하고 자진 체포되었다.

3년을 복역한 뒤 출소해 민족 의식 계몽에 대한 준비를 한 후 1926년 시집 《님의 침묵》을 출판하여 저항 문학에 앞장서고 불교계 항일 단체 ‘만당‘에 당수로 추대되는 등 각종 민족 운동 및 독립운동에 앞장섰다.

어려운 불교를 대중에게 쉽게 알릴 수 있는 방법에 대해 고민해 팔만대장경의 핵심 부분만 뽑아내어 《불교대전》을 간행하였으며 <유심>이라는 불교 잡지를 발간하여 글로써 민족 의식을 지키고자 노력하였다.

1944년, 광복을 불과 1년 남기고 향년 65세에 뇌졸중으로 입적했다. 숨진 뒤에도 체온이 내려가지 않고 혈색도 양호했기에 사람들은 한용운이 다시 눈을 뜨지 않을까 기다렸다가 사흘이 지나자 화장했다고 하며 화장한 후 망우리 공동묘지에 매장했다.

1962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공로훈장 중장(重章)(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3. 작품

4. 대중매체에서

5. 기타

그러나 최근 2022년 6월 13일 선학원 주최 '만해 한용운 스님 78주기 추모 학술제'에선 "'조선총독부가 마주보기 싫어 심우장을 북향으로 지었다는 설'에 대해 한영숙 여사도 총독부가 보기 싫어서 북향으로 지은 것이라는 확인을 받았다"고 한다.#(6분 33초부터)[15][16]

6. 둘러보기

한국의 현대문학
{{{#!wiki style="margin:0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6px -1px -11px"
<rowcolor=#fff><colbgcolor=#87cefa,#010101><colcolor=#fff> 연대 서정 갈래 서사 갈래
1910년대 상징주의 시 (김억) · 현대적 자유시 (주요한) 신소설 (이인직 · 이해조 · 최찬식)
1920년대
동인지 시대
감상적·퇴폐적 낭만주의 시 (이상화) ·
김소월[1] · 한용운[2]
감상적·퇴폐적 낭만주의 소설
(김동인)
자연주의 · 사실주의 소설
(염상섭 · 현진건)
신경향파 문학 국민 문학파
(신민요 운동 · 시조 부흥론)
신경향파 문학 국민 문학파
계급주의 문학 계급주의 문학
1930년대 시문학파[3] (모더니즘 시) · 생명파 · 전원파 모더니즘 소설[4] · 장편소설[5] · 농촌소설[6] · 역사소설[7]
1940년대
~ 광복
청록파 · 저항시 (이육사 · 윤동주 · 신석정) 국문학의 암흑기[8]
광복 ~
1950년대
이념시(연간조선시집) · 해방기념시집 · 순수시 귀향 소설 · 분단 문학
전쟁시 · 모더니즘 시 · 서정시 전쟁소설 · 분단 소설 · 귀향 소설
1960년대 현실 참여시 순수 서정시 참여문학 순수문학
1970년대 민중시 · 노동시 민중 소설 · 농민·어민 소설 · 노동 소설 ·
순수 소설 · 중간소설 · 대중소설
1980년대 민중시 · 서정시 · 해체시 노동 소설 · 연작소설 · 역사 장편 대하소설
1990년대
~ 현재
생태시 · 해체시 (도시시 · 일상시) · 메타시 · 디카시 일상 소설 · 다문화 문학 · 소수자 문학(퀴어, 페미니즘) 장르소설
{{{-2 {{{#!folding
[1] 전통적 운율·정서를 계승한 시인.[2] 조국 광복 염원·의지 및 부정적 현실 극복을 다룬 시인.[3] 정치적 이념을 배제한 순수 서정시를 추구한 유파. 특정 사상이나 계급주의적 관점을 강조하던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카프)에 반발하며 등장했으며, 시 동인지 《시 문학》을 중심으로 순수 서정시 운동을 주도했다. 김영랑, 박용철, 정지용, 신석정 등의 시인이 활동했다.[4] 부정적 현실을 지식인의 관점에서 비판한 소설이 많았다. 특히 의식의 흐름 기법이 많이 쓰였다. 대표적으로 이상날개박태원의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이 있다.[5] 장편소설 중에서도 일제 강점기에 부정적 인물이 득세하던 현실을 반영한 소설이 이때 주목받았다. 대표적으로 채만식태평천하, 염상섭삼대가 있다.[6] 계몽주의에 기반한 농촌 계몽 소설, 향토적 삶을 다룬 향토적 농촌 소설, 식민지 지배와 통치 제도의 억압성과 부조리로 인한 농촌의 현실을 다룬 현실 비판적 농촌 소설이 있다.[7] 만주 사변 이후 더욱 극심해진 일제의 사상 통제와 검열을 피해, 역사적 사건을 다루어 민족 의식을 고취하고자 하였다.[8] 당시 일제의 민족말살정책중일전쟁태평양 전쟁을 거치면서 더욱 심화되어 아예 한국어 사용 자체를 금지할 지경에 이른 관계로 주제 의식이 모호하고 불분명한 몇몇 단편들만 간신히 명맥을 이었다. 대표적으로 순수 소설인 황순원'별'이 1941년에 발표되었다. 이 시기에 학창시절을 보낸 전후세대(1920년대생) 작가들은 체계적인 한글 교육을 받지 못한 탓에 다른 세대와 비교도 안되는 굴곡진 인생 경험을 했음에도 이를 풀어내는데 한계가 있었고 이전 세대와 60년대 부상한 한글세대(김승옥 등) 사이에 끼어버렸다.
고전문학 · 장르문학 }}}}}}}}}



[1] #. 3.1 운동 당시 신문조서에 따르면 출생지가 충청남도 홍성군 홍성면 남문리(현 홍성읍 오관리 남문마을)로 기재되어 있는데, 이 마을은 만해가 7살 때 이주하여 성장한 곳이라 한다.[2] 1914년 지적원도 참고. 현재의 설악동 211번지와 경계가 완전히 같으며, 소유주도 내원암으로 동일하다.[3] 이양공파(夷襄公派) 33세. 별록에 입보되었다.[4] 조선시대 공신에 관한 사무를 담당하던 관서. 지금의 국가보훈처에 해당한다.[5] 그러니까 '용운 스님'인 것이다. 일부 소개글에는 법명을 보통 이름(속세 시절 이름)으로 표기하는 오류가 존재한다. 한용운이라는 이름이 알려져 있다보니 이걸 본명으로 오해해 생긴 오류로 보인다.[6] 결혼을 하여 가정을 둔 승려를 말한다. 조선 시대 억불 정책 속에 생겨났고 일제강점기 동안 많이 늘어났다. 현재는 기혼승이라고도 부른다.[7] 캄보디아 국왕 시아누크가 자기의 독재와 줄타기 외교 노선을 정당화하기 위해 주창한 동명의 이론과는 다르다.[8] 이른바 '불교 사회주의'는 말 그대로 불교의 근본 정신이 청빈과 나눔이라는 믿음에 기초한 것으로 마르크스주의와는 전혀 다른 방향에서 등장한 것이었다.[9] 이때 당시에 이런 일화도 있었다. 난생 처음 백인을 본 한용운이 러시아인 선원을 보고 "여봐라, 이 아라사 뱃놈아! 넌 웬 키가 멋대가리없이 크기만 하냐! 그리고 눈은 또 왜 그런 색깔이냐!"하고 외쳤고 이를 뭔 소린지 알아듣지 못하는 선원들이 히죽거렸다고 한다. 당시에도 시비거는 투가 아니라 처음 보는 사람한테 신기하다는 투로 웃으면서 얘기한것이었다.[10] 실제로도 조선 불교계는 일제의 지배에 많이 협조했다.[11] 1919년 암리차르 학살 사건 발생에 대한 항의였다.[12] 이를 보아 한용운이 타고르의 시를 에스페란토 번역본으로 접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다만 그가 직접 에스페란토를 배워서 독해했는지, 원전을 에스페란토로 접하고서 조선어 번역본으로 읽었는지는 알 수 없다.[13] 일제강점기의 불교 승려이며 대한민국 제2대 국회의원동국대학교 이사장도 지냈다. 초년에는 항일 운동을 했지만 나중에는 일제에 협조했으며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도 포함되었다.[14] 웃긴 것은 박희도의 가 한용운 선생 묘로부터 관리사무소 쪽으로 내려오면 있다는 것이다.[15] 확인했다는 주장, 현재 출처 확인 안됨.[16] 다만 일본에 대한 적대감만은 분명해 글자조차도 싫어했는데 그 일화로 어느 날 한용운이 신문을 보던 중 가나 문자가 나와서 딸이 "아버지, 이 글자는 무슨 글자에요?"라고 물으니 한용운 왈, "그건 글자도 아니다. 몰라도 된다"라고 했다고 한 일화가 전해진다.

분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