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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879년 8월 29일 |
충청도 결성현 현내면 박철리 (現 충청남도 홍성군 결성면 성곡리 박철마을)[1] | |
사망 | 1944년 6월 29일 (향년 64세) |
경기도 경성부 동대문구 성북정 (現 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동 심우장) | |
묘소 | 경기도 구리시 교문동 |
본적 | 강원도 양양군 도문면 장항리 211 (現 강원특별자치도 속초시 설악동 211 내원암)[2] |
본관 | 청주 한씨[3] |
가족 관계 | 아버지 한응준, 어머니 창성 방씨 아들 한보국, 딸 한영숙 |
별칭 | 본명: 정옥(貞玉) 법명: 용운(龍雲) 아호: 만해(萬海) |
활동 분야 | 불교, 독립운동, 문학 |
학력 | 명진학교 (졸업) |
종교 | 불교 |
상훈 |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추서 |
저서 | 님의 침묵, 불교대전 |
외부 링크 | 만해 한용운 기념관 홈페이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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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의 시인, 승려, 독립유공자, 불교사회주의자. 속명은 정옥(貞玉), 법명은 용운(龍雲), 호는 만해(萬海).3.1 운동을 계획하고 독립선언서에 서명 했다. 독립선언문을 쓰지는 않았다는 것은 KBS《역사적인 그날》203회에 설명이 나온다.[4]
민족 세력을 규합해 독립 운동을 하고 일제의 압력에 조금도 굴하지 않았다. 시인으로서 주옥같은 작품들을 통해 한글 문학의 발전에 큰 공헌을 했고, 승려로서 매너리즘에 빠져있던 조선 불교의 개혁에도 앞장섰다. 평소 입이 거칠고 곡차를 좋아해 괴짜 스님으로도 유명했다.
2. 생애
1879년 8월 29일, 충청도 결성현 현내면 박철리(현 충청남도 홍성군 결성면 성곡리 박철마을)에서 부농인 아버지 한응준(韓應俊)과 어머니 창성 방씨(昌成 方氏) 사이의 두 아들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어릴 적 고향에서 한학을 배웠고 18세 때인 1896년(또는 1897년) 고향을 떠나 백담사 등을 전전하며 수년간 불교 서적을 읽었다고 전해지나 정확한 것은 알 수 없다.출가의 원인 역시 정확하게 알려져 있지 않으나, 당시 고향 홍성에서도 동학농민운동과 의병 운동이 전개되고 있었는데 그의 부친 한응준은 일찍이 충훈부(忠勳府)[5]의 종5품 도사(都事)를 지내다가 1894년(고종 31) 12월 5일 호연초토사(湖沿招討使) 이승우(李勝宇)의 참모관(參謀官)에 제수되어 동학농민운동 진압에 참여하게 되었으며#, 도중 전사하였다. 이로 보아 역사적 격변기의 상황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1905년, 영제(永濟) 스님에 의하여 수계(受戒)를 하니 득도 때의 계명(戒名)은 봉완(奉玩)으로 이때 출가하여 얻은 법명이 바로 용운(龍雲)이다.[6]
1910년, 국권이 피탈되자 중국에 가서 독립군 군관 학교로 운영 중이던 우당 이회영 등의 신흥무관학교를 방문, 격려하였다. 뒤이어 만주와 시베리아 등지를 방랑하다가 1913년 귀국해 불교 학원에서 교편을 잡았다. 이후 1912년 양산 통도사에서 팔만대장경을 열람하고 1914년 부산 범어사에서《불교대전(佛敎大典)》을 간행하고 대승불교의 반야 사상(般若思想)에 입각하여 종래의 무능한 불교를 개혁하고 불교의 현실 참여를 주장하였다.
이후 오세암으로 들어가 화두를 참구하며 수행에 정진했다. 그렇게 수행하던 중 오도송(悟道頌)을 지었다.
男兒到處是故鄕
幾人長在客愁中
一聲喝破三千界
雪裡桃花片片飛
남아란 어디메나 고향인 것을
나그네 수심에 잠긴 이 그 몇이더냐
한 마디 큰소리 질러서 삼천 대천 세계 깨뜨리니
눈 속에 복사꽃 조각조각 날리네.
1919년, 3.1운동 때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서 독립선언서에 선언하고 자진 체포되었다.幾人長在客愁中
一聲喝破三千界
雪裡桃花片片飛
남아란 어디메나 고향인 것을
나그네 수심에 잠긴 이 그 몇이더냐
한 마디 큰소리 질러서 삼천 대천 세계 깨뜨리니
눈 속에 복사꽃 조각조각 날리네.
3년을 복역한 뒤 출소해 민족 의식 계몽에 대한 준비를 한 후 1926년 시집 《님의 침묵》을 출판하여 저항 문학에 앞장서고 불교계 항일 단체 ‘만당‘에 당수로 추대되는 등 각종 민족 운동 및 독립운동에 앞장섰다.
어려운 불교를 대중에게 쉽게 알릴 수 있는 방법에 대해 고민해 팔만대장경의 핵심 부분만 뽑아내어 《불교대전》을 간행하였으며 <유심>이라는 불교 잡지를 발간하여 글로써 민족 의식을 지키고자 노력하였다.
1944년, 광복을 불과 1년 남기고 향년 65세에 뇌졸중으로 입적했다. 숨진 뒤에도 체온이 내려가지 않고 혈색도 양호했기에 사람들은 한용운이 다시 눈을 뜨지 않을까 기다렸다가 사흘이 지나자 화장했다고 하며 화장한 후 망우리 공동묘지에 매장했다.
1962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공로훈장 중장(重章)(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3. 작품
- 님의 침묵그러나 이별을 쓸데없는 눈물의 원천을 만들고 마는 것은 스스로 사랑을 깨치는 것인 줄 아는 까닭에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의 정수박이에 들어부었습니다.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제 곡조를 못 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돕니다.― 「님의 침묵」
- 알 수 없어요꽃도 없는 깊은 나무에 푸른 이끼를 거쳐서 옛 탑(塔) 위의 고요한 하늘을 스치는 알 수 없는 향기는 누구의 입김입니까.근원은 알지도 못할 곳에서 나서 돌부리를 울리고 가늘게 흐르는 작은 시내는 굽이굽이 누구의 노래입니까.연꽃 같은 발꿈치로 가이없는 바다를 밟고 옥 같은 손으로 끝없는 하늘을 만지면서 떨어지는 날을 곱게 단장하는 저녁놀은 누구의 시입니까.타고 남은 재가 다시 기름이 됩니다. 그칠 줄을 모르고 타는 나의 가슴은 누구의 밤을 지키는 약한 등불입니까.― 「알 수 없어요」
- 이별은 미의 창조이별은 미의 창조입니다.이별의 미는 아침의 바탕(質) 없는 황금과 밤의 올(糸) 없는 검은 비단과 죽음 없는 영원의 생명과 시들지 않는 하늘의 푸른 꽃에도 없습니다.님이여 이별이 아니면 나는 눈물에서 죽었다가 웃음에서 다시 살아날 수가 없습니다. 오오 이별이여.미는 이별의 창조입니다.― 「이별은 미의 창조」
- 나룻배와 행인나는 나룻배당신은 행인만일 당신이 아니 오시면 나는 바람을 쐬고 눈비를 맞으며 밤에서 낮까지 당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당신은 물만 건너면 나를 돌아보지도 않고 가십니다 그려그러나 당신이 언제든지 오실 줄만은 알아요나는 당신을 기다리면서 날마다 날마다 낡아갑니다나는 나룻배당신은 행인― 「나룻배와 행인」
- 사랑하는 까닭
- 복종
- 수의 비밀
- 인과율
- 일경초
- 심(心)
- 두견새
- 최초의 님
- 흑풍[7]
4. 대중매체에서
- 1979년에는 그의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여 연극 <님의 침묵>이 만들어졌는데, 극본은 이재현, 연출은 유홍렬이 각각 맡고 배우 민지환이 한용운 역을 맡았다.
- 1986년 3.1절에 KBS1을 통해 특집드라마 <님의 침묵>을 방영한 바 있는데, 극본은 김항명, 연출은 류시형 PD가 각각 맡았으며 배우 이문환이 한용운을 연기했다.
- 1993년에는 MBC가 3.1절 특집극 <님의 침묵>을 제작한 바 있는데, 극본은 이은교, 연출은 조중현 PD가 각각 맡았으며 배우 노영국이 한용운을 연기했다.
- 1996년에는 극단 ‘신시’가 한용운의 일대기를 다룬 뮤지컬 <님의 침묵>을 만든 바 있는데, 연출가 김상열이 극본까지 겸하고 안무는 박상규, 작곡은 유승엽이 각각 맡았으며, 배우 김갑수가 한용운을 연기했다.
- 1997년에는 극단 ‘우리네땅’이 뮤지컬 드라마 <님의 침묵: 만해 한용운의 일대기>를 제작한 바 있는데, 극본은 김상렬, 연출은 김봉열, 안무는 최종숙이 각각 맡았다.
- 2002년 SBS 대하드라마 <야인시대>에선 배우 유형관이 연기했다. 자세한 내용은 한용운(야인시대) 문서 참고.
- 2023년 영화 <만해 한용운 님의침묵>에서 배우 오안진이 연기했다.
5. 기타
- 동국대학교는 1기 졸업생인 한용운을 높이 기려 만해관, 만해광장, 만해시비 등으로 그의 업적을 기리고 있다. 동국대학교의 전신은 1906년 설립한 명진학교가 기원인데 한용운이 명진학교 출신이다.
- 고향인 충청남도 홍성군 결성면 성곡리에는 한용운의 생가를 복원하고 만해체험관을 건립했다.
- 대처승[8]을 인정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였으며 이에 대해 조선총독부에 허가를 요청하는 건백서를 보내기도 했다. 한용운 본인도 대처승이 되었는데 원래 출가 전에 결혼을 해서 아들 1명(한보국)을 두었다가 이혼하고 나중에 승려 시절인 1931년에 재혼하여 외동딸(한영숙)을 보았다.
- 첫째 아들인 한보국은 신간회에서 활동하는 등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을 하다가 6.25 전쟁 때 월북했다. 한보국은 북한에서 독립운동가의 후손이라며 그럭저럭 대우를 잘 받았고, 1976년에 사망했다고 알려져 있다.
- 둘째인 한영숙은 아버지의 기념 행사에 가끔 참석하는 것을 제외하면 특별한 대외 활동을 하지 않고 평범한 생활을 하면서 성북동의 심우장을 지켰다. 심우장 건너편에 일본 대사관저가 들어서자 아버지처럼 이를 보지 않으려고 심우장을 떠났다는 야사가 있었으나 한영숙 씨가 부인했다.
- 한용운의 대처승 인정 요구는 당시에도 파격적인 소수 의견이었고 광복 이후 한국 불교의 주류가 된 조계종도 대처승을 허용하지 않아 현대에도 소수의 승려만이 결혼을 한다. 태고종이 대처승을 인정하는 대표적인 종파이다.
- 한용운은 이른바 근대적 불교를 추구하며 불교의 대중화를 꾀했고 그 과정에서 대처승의 인정을 요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물론 한용운의 근대적 불교 추구는 사회진화론적 색채가 보인다고 비난받으며 불교 사회주의[9] 등 다양한 평가를 받는다.[10]
- 한용운이 스님이 된 지 얼마 안 됐을 때의 일인데 세계를 여행하며 경험을 쌓고 싶었던 한용운이 배를 타고 가다가[11] 블라디보스토크에 들렀을 때의 일이다. 동료 스님들과 같이 있었던 한용운을 한 무리의 조선 청년들이 포위했다. 당시 일제의 앞잡이나 친일파들이 스님으로 많이들 위장했다고 하는데 진짜 스님인 한용운이 엉뚱하게 친일 밀정으로 몰린 것이다.[12] 맞아죽을 위기에 처한 스님들이 '우린 단지 중일 뿐이다. 살려달라'고 애원해도 청년들은 쉬이 의심을 풀지 않았고 분위기는 험악해져갔다. 그때 한용운이 "우릴 죽여도 개의치 않겠으나 이국의 바닷물에 던지지 말고 조국 땅에 묻어주시오.'라고 대답하자 그제야 그들이 친일파가 아님을 안 청년들이 사과하고 물러갔다고 한다.
- 만주로 향하면서 '굴라재'라는 고개를 넘는데 키가 작고 스님이라 머리를 매우 짧게 깎은 그를 주변을 정탐하러 온 일본인으로 오인한 조선 독립군 후보생 청년들이 한용운을 향해 총을 쏴서 총알이 머리에 박혔다. 총격을 당한 한용운이 주저앉자 눈앞에 관세음보살이 나타나서는 "어서 스스로 생명을 구하려 하지 않고 왜 머뭇거리느냐?"라고 하였고 이에 한용운은 정신을 차리고 벌떡 일어나 달렸다고 한다. 병원에서 무마취수술을 받으면서 신음 한 번 내지 않았다고 한다. 이에 치료를 해준 독립운동가 김동삼은 '활불(살아 있는 부처)'이라며 감탄했다고 한다. 나중에 청년들이 병원으로 찾아와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빌자 한용운은 "뭐 그럴 게 있나? 청년들이여, 아무 걱정 마시오. 나는 독립군이 그처럼 용감한 줄은 미처 몰랐구려. 난 이제 마음을 놓았소. 조선의 독립은 그대들 같은 용사들이 있어서 아주 희망적이오."라고 화답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 총격의 후유증으로 한용운은 한평생 머리를 이유없이 흔들거리는 체머리(한의학에서는 풍두선이라고 칭함) 증상이 생겼으며 뼈 속까지 박힌 총탄도 다 빼지는 못해 입적할 때까지 그 상태로 살아가야 했다.
- 어느 날 한용운이 친일 주지들이 가득 모인 회의장에 우연히 참석하여 연설을 하게 되었다. 한용운은 갑자기 세상에서 가장 더러운 것이 무엇인지 아느냐고 물었다. 주지들은 모르겠다고 했고 한용운은 "세상에서 가장 더러운 것은 바로 똥이다."라고 했다. 그런데 한용운은 "하지만 똥보다도 더 더러운 것이 있습니다. 그게 무엇인지 아십니까?"라고 물었고 주지들은 대답하지 못했다. 그러자 한용운은 "그건 송장입니다. 똥 옆에서 밥을 먹을 수 있는 사람은 있어도 썩어가는 송장 옆에서 밥을 먹을 수 있는 사람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럼 송장보다도 더 더러운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라고 했다. 흥미가 동한 주지들이 귀를 기울이자 한용운은 단상을 후려치며 벽력같이 외쳤다. "바로 여기에 모인 네놈들이다!"
- 1921년 12월 22일 서대문형무소에서 가석방되던 날 한용운 및 그와 함께 출감하는 민족 대표들을 환영하려는 많은 인파가 형무소 대문에 모여들었다. 그러나 한용운은 친일을 하던 사람, 3.1 운동 준비 과정에서 내뺐던 사람들 몇몇의 얼굴을 기억하다가 그들이 군중에 섞여 있는 모습을 보고는 "환영 나올 줄은 알면서 왜 자신이 환영받을 일은 하지 못한다는 말인가!"라고 쌀쌀맞게 말했다.
- 1940년 2월 11일 창씨개명이 발효된 후 일부 독립운동가들마저 이름을 바꾸고 친일파로 전향하자 격노한 홍명희가 한용운을 찾아와서 "이보게, 만해. 이광수, 최린, 윤치호, 주요한 등이 창씨개명을 했다네. 어떻게 이런 개 같은 놈들이 있나?"라고 분통을 터트렸다. 그러자 한용운은 "벽초, 그들은 개같은 놈들이 아니네."라고 말했다. 홍명희가 "그게 대체 무슨 소리인가?"냐고 따지자 한용운은 "개는 주인을 배반하지 않네. 하지만 이들은 민족과 조국을 배신했으니 개만도 못한 놈들이네. 개들이 자네 말을 들었으면 얼마나 섭섭해 하겠나?"라고 화답했다. 그러자 홍명희는 "이런, 개에게 큰 실례를 범했구먼."이라고 수긍하고 개에게 사과를 읊조렸다고 한다.
- 살아 생전에 조선일보를 지지했다는 점 때문에 '조선일보의 친일 행각은 조선총독부의 강압에 의한 것'이라는 주장에 대한 대표적인 근거로 거론되기도 한다. 조선일보가 진보 성향이던 1930년대 초 뿐만 아니라 폐간하던 1940년까지 조선일보에 계속 기고했다. 조선일보가 친일 행적을 남긴 1938~1940년에도 조선일보에 계속 기고한 사실을 보면 한용운은 조선일보가 친일 매국 신문으로 변절했다고 생각하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 일례로 변절한 친일파 최남선이 한용운과 가까운 사이임을 자처하자 한용운은 최남선의 장례를 치르고자 하였고 후에 최남선이 찾아오자 이런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선생님, 접니다. 육당(최남선의 호)이 왔습니다.""육당이 누구요?""아니? 선생님, 이 육당을 벌써 잊어버리셨습니까?""내가 알던 육당은 벌써 뒈져서 장례를 치렀소."
선생의 냉대에 최남선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냥 돌아갔다고 한다. 비슷한 이야기가 최남선-정인보, 이광수-홍명희에게도 있다.
- 3.1 운동 때 김윤식이 독립청원서 사건으로 작위를 박탈당한 얼마 뒤에 라빈드라나트 타고르가 우연의 일치[13]로 노벨문학상으로 받은 기사 작위를 반납하게 된 사건이 벌어지자 한용운은 인도에도 김윤식 같은 사람이 있었다고 칭찬하는 듯 까는 듯하는 말을 했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사실 만해 선생의 시는 타고르의 영향을 받았고 "타고르의 시(詩) Gardenisto를 읽고"라는 제목의 시를 쓴 적도 있다.[14]
- <님의 침묵>을 비롯해 지은 대부분의 시들은 대단히 여성적인 어조로 쓰였지만 한용운 본인은 호방한 사람이었다. <님의 침묵> 서문에서도 이를 잘 확인할 수 있다.
- 1910년 경술국치를 전후해서 중추원과 통감부에 승려의 대처 문제와 관련하여 '헌의서'와 '건백서'를 보냈다. 건백은 정부나 임금에게 자신의 뜻을 올린다는 뜻이다. 그 글에서 데라우치 마사타케에게 '殿'이라는 경칭을 사용했고 조선 왕조를 전 한국(前韓國)이라고 표현했다. 또한 1937년 '지나사변과 불교'라는 글에서 중일전쟁을 옹호하고 총후국민의 의무를 강조하는 글을 썼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일제의 통감부에 건백서를 올린 것은 당시에는 불교 개혁이 절실했고 개혁을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정치의 힘을 빌리려 했던 것이다. 또한 건백서 제출만으로 만해를 친일로 볼 수는 없다. 그뿐만 아니라 '지나사변과 불교' 글은 만해의 글이 아니라는 것이 밝혀졌다. 이 글은 당시 불교지 편집장이였던 이종욱[15]이 쓴 것임을 전 <만해전집> 편집자였던 최범술 씨가 확인했다고 한다.참조 기사
- 같은 민족 대표였지만 1930년대 이후 자치론, 1940년대에는 친일이라는 전형적인 변절 루트를 밟은 박희도와의 재미있는 비교가 천도교 계열인 개벽사의 잡지 《제일선》 1932년 7월호에 ‘대경실색, 가장행렬화보’라는 제목으로 합성 사진과 함께 실렸다.[16](5) 誘之不動(유지부동) 한용운 씨: 사진을 자세히 보십시오.女: 키-스를 해주어요.한: 웨! 점잔치 못하게 이러시오.女: 점잔이 다 무어 말너(말라)비트러진 거야! 엉 어서 키-스 해주어… 응.이와가티(이와 같이) 섹씨(색시)가 조르나 한용운 씨는 그래도 끔적(꿈적)아니하고잇습니다.이 사진이 ‘카메라’놈의 작난(장난)이 아니고 사실 이러한 경우를 우리 한씨가 당한다면?(6) 곱사춤의 명인 박희도 씨: 박희도씨가 곱사춤으로 당대의 명인이(아니)라는 것은 세상이 다 아는 바입니다.이것을 분개한 박씨는 이삼일전에 불국 파리를 건너가 그곳에 유명한 땐서와 이와가티 곱사춤을 추는 광경을 텔레비존으로 본사에 피송하야 독자제군의 간담을 서늘하게 햇습니다.‘카메라’놈도 행셋머리가 고약해!’
- 만해 문학의 특징은 불교 사상과 독립 사상이 예술적으로 결합된 사상시(思想詩)라는 점이다. 사상시는 종교적 신념, 정신적 가치관, 이념 등을 시로 표현한 것을 말한다. 자유와 평등 사상, 민족 사상과 민중 사상으로 요약되는 만해의 불교적 세계 인식과 독립 사상은 만해 문학의 핵심으로 만해 문학은 불교 사상, 독립 사상, 문학 사상이 삼위일체를 이루고있다.
- 1925년 설악산 백담사에서 창작하고 1926년 서울 회동서관에서 간행된 시집 『님의 침묵』은 전편이 '이별 - 갈등 - 희망 - 만남'이라는 구조의 끈으로 연결되어 있다. 다시 말하면 '소멸[正] - 갈등[反] - 생성[合]'이라는 변증법적 지양을 목표로 하는 극복과 생성의 시편들이라 할 수 있다. 님을 이별한 시대인 일제강점기는 바로 침묵의 시대이자 상실의 시대인 것이며 언젠가 맞이하게 되는 만남의 시간은 회복의 시대이자 광복의 시대로 만해의 시는 빼앗긴 조국을 되찾고자 하는 광복의 시이자 저항시로서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 『님의 침묵』에는 여러 충청도 방언과 토속어가 자연스럽게 사용되어 지는 것이 특징인데 이러한 향토적 정감의 방언 및 토속어 사용과 서민적인 시어의 활용은 만해의 민중 정신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시에서 나타나는 여성적인 어조는 한국 시가의 전통에서 연원한 것으로 잃어버린 조국과 민족에 대한 회복의 소망을 역설화한 여성주의적 방법으로 형상화한 것이다. 만해 시의 탁월한 은유와 역설은 한국의 전통시를 계승한 것으로 만해의 시는 민족 주체성을 시적으로 형상화한 민족시로서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
- 동시대의 고승인 만공과 절친한 사이였다. 사적으로 독립 자금을 한용운에게 전달하기도 했다. "지금 온 조선 땅에 사람이 하나 하고도 반 있는데 그 하나가 바로 만해"라고 극찬하기도 했다.
- 남한에 남은 유일한 혈육인 딸 한영숙 씨의 증언에 의하면 한용운의 독립의지, 독립운동의 어려움을 강조하느라 터무니 없이 날조된 이야기가 매우 많다고 한다.[17] 수십년간 하도 시달리고, 몇 번이나 아니라고 해도 듣질 않아서 지긋지긋 하다는 소회를 밝혔다. 일제에 대한 저항 정신으로 심우장을 북향으로 지었다는 설은 남향이면 총독부를 바라보게 될 터이니 차라리 좀 볕이 덜 들고 여름에 좀 덥더라도 북향하는 게 낫겠다며 주춧돌을 돌려 북향으로 지었다는 일화인데 심우장은 물론 그 주변 집들 모두 북향이다. 왜냐면 거기가 비탈진 북향 언덕이라서. 터가 안좋았던 건데 와전된 것이었다. 아래 근거기사 링크.
https://www.hankookilbo.com/News/Read/201202261185349070
http://www.hs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80954
불교계는 여전히 이 설화를 포기할 생각이 없는지 2022년 6월 13일 선학원 주최 '만해 한용운 스님 78주기 추모 학술제'에선 "'조선총독부가 마주보기 싫어 심우장을 북향으로 지었다는 설'에 대해 한영숙 여사도 총독부가 보기 싫어서 북향으로 지은 것이라는 확인을 받았다"고 주장했다.#(6분 33초부터) 한영숙 여사 본인이 직접 말하는 영상이라도 있는 것이 아니라 '확인받았다는 주장'인데 상술했듯 비탈진 북향 언덕이라 북향으로 지을 수 밖에 없었다. 한영숙 여사가 인정했음이 사실이라면 몇 번이나 아니라고 해도 듣질 않아서 지긋지긋해진 끝에 이제 그만 묻게 하려고 마지못해 원하는 대로 말해준, 즉 어거지로 답을 받아낸 사례거나 완전한 왜곡으로 보인다. 물론 심우장이 북향인 덕에 조선총독부를 향하지 않는 것에 만족했을지는 오직 망인인 한용운만이 안다. - 한용운이 일제의 배급을 거부해 영양실조에 걸렸다는 주장에 대해서도 한 여사는 날조라고 밝혔다. 호화롭진 않아도 삼시새끼 밥 안굶었고 풀죽 쑤어 먹은 적도 없었다고. 한용운은 게장을 좋아해서 김치와 함께 늘 밥상에 올라왔으며 이따금 생선토막이 올라왔다고 한다. 또 술을 무척 즐겨서 아내가 늘 술을 담가놓았다고. 한용운의 건강을 해친 건 영양실조가 아니라 고혈압이었다. 평소 술과 짠음식을 즐긴 탓인지 나이들어 혈압에 이상이 생겼는데 추운 날 밖에서 눈을 쓸다 혈압이 도져 풍이 와 쓰러지면서 급격히 쇠약해졌다고 한다.
- 젊은 시절 이광수가 그의 집인 심우장을 방문하자 그의 행동을 잠시 관찰하더니 "네놈은 나라를 배신할 인물이니 다시는 내 앞에 오지 마라!"하고 일갈하면서 내쫓았다는 설이 있었는데 이것은 당연히 허구다. 이광수는 1892년생이고 한용운이 심우장에 기거한게 1933년부터니 젊은 이광수와 심우장에서 만날 수도 없었고 두 사람은 심우장에 터잡기 한참전부터 알고 지내던 사이였다. 이광수가 상해에서의 궁핍한 생활과 임정내 파벌싸움에 진력이 나서 귀국할 무렵 한용운은 3.1운동 참여로 3년 옥고를 치르고 풀려나던 참이었다. 출소한 한용운은 1922~23년 물산장려운동과 민립대학설립 운동에 참여했고 이때 이광수와 면을 트고 교류했다. 이광수가 친일로 기운 건 수양동우회 사건이 벌어진 1938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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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folding [1] 전통적 운율·정서를 계승한 시인.[2] 조국 광복 염원·의지 및 부정적 현실 극복을 다룬 시인.[3] 정치적 이념을 배제한 순수 서정시를 추구한 유파. 특정 사상이나 계급주의적 관점을 강조하던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카프)에 반발하며 등장했으며, 시 동인지 《시 문학》을 중심으로 순수 서정시 운동을 주도했다. 김영랑, 박용철, 정지용, 신석정 등의 시인이 활동했다.[4] 부정적 현실을 지식인의 관점에서 비판한 소설이 많았다. 특히 의식의 흐름 기법이 많이 쓰였다. 대표적으로 이상의 날개와 박태원의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이 있다.[5] 장편소설 중에서도 일제 강점기에 부정적 인물이 득세하던 현실을 반영한 소설이 이때 주목받았다. 대표적으로 채만식의 태평천하, 염상섭의 삼대가 있다.[6] 계몽주의에 기반한 농촌 계몽 소설, 향토적 삶을 다룬 향토적 농촌 소설, 식민지 지배와 통치 제도의 억압성과 부조리로 인한 농촌의 현실을 다룬 현실 비판적 농촌 소설이 있다.[7] 만주 사변 이후 더욱 극심해진 일제의 사상 통제와 검열을 피해, 역사적 사건을 다루어 민족 의식을 고취하고자 하였다.[8] 당시 일제의 민족말살정책이 중일전쟁과 태평양 전쟁을 거치면서 더욱 심화되어 아예 한국어 사용 자체를 금지할 지경에 이른 관계로 주제 의식이 모호하고 불분명한 몇몇 단편들만 간신히 명맥을 이었다. 대표적으로 순수 소설인 황순원의 '별'이 1941년에 발표되었다. 이 시기에 학창시절을 보낸 전후세대(1920년대생) 작가들은 체계적인 한글 교육을 받지 못한 탓에 다른 세대와 비교도 안되는 굴곡진 인생 경험을 했음에도 이를 풀어내는데 한계가 있었고 이전 세대와 60년대 부상한 한글세대(김승옥 등) 사이에 끼어버렸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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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3.1 운동 당시 신문조서에 따르면 출생지가 충청남도 홍성군 홍성면 남문리(현 홍성읍 오관리 남문마을)로 기재되어 있는데, 이 마을은 만해가 7살 때 이주하여 성장한 곳이라 한다.[2] 1914년 지적원도 참고. 현재의 설악동 211번지와 경계가 완전히 같으며, 소유주도 내원암으로 동일하다.[3] 이양공파(夷襄公派) 33세. 별록에 입보되었다.[4] 그가 썼다고 잘못 알려진 것은 한용운선생의 팬의 왜곡이라고 한다. 실제 작성자는 최남선이다.[5] 조선시대 공신에 관한 사무를 담당하던 관서. 지금의 국가보훈처에 해당한다.[6] 그러니까 '용운 스님'인 것이다. 일부 소개글에는 법명을 보통 이름(속세 시절 이름)으로 표기하는 오류가 존재한다. 한용운이라는 이름이 알려져 있다보니 이걸 본명으로 오해해 생긴 오류로 보인다.[7] 장편 소설. 한용운은 주로 시를 썼지만 소설을 쓰기도 했었다.[8] 결혼을 하여 가정을 둔 승려를 말한다. 조선 시대 억불 정책 속에 생겨났고 일제강점기 동안 일본불교의 영향으로 많이 늘어났다. 하지만 해방 후에 비구승들이 대처승은 왜색불교라면서 각 사찰에서 무자비하게 끌어냈고, 이렇게 쫓겨난 이들이 따로 태고종을 만들었다.[9] 캄보디아 국왕 시아누크가 자기의 독재와 줄타기 외교 노선을 정당화하기 위해 주창한 동명의 이론과는 다르다.[10] 이른바 '불교 사회주의'는 말 그대로 불교의 근본 정신이 청빈과 나눔이라는 믿음에 기초한 것으로 마르크스주의와는 전혀 다른 방향에서 등장한 것이었다.[11] 이때 당시에 이런 일화도 있었다. 난생 처음 백인을 본 한용운이 러시아인 선원을 보고 "여봐라, 이 아라사 뱃놈아! 넌 웬 키가 멋대가리없이 크기만 하냐! 그리고 눈은 또 왜 그런 색깔이냐!"하고 외쳤고 이를 뭔 소린지 알아듣지 못하는 선원들이 히죽거렸다고 한다. 당시에도 시비거는 투가 아니라 처음 보는 사람한테 신기하다는 투로 웃으면서 얘기한것이었다.[12] 실제로도 조선 불교계는 일제의 지배에 많이 협조했다.[13] 1919년 암리차르 학살 사건 발생에 대한 항의였다.[14] 이를 보아 한용운이 타고르의 시를 에스페란토 번역본으로 접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다만 그가 직접 에스페란토를 배워서 독해했는지, 원전을 에스페란토로 접하고서 조선어 번역본으로 읽었는지는 알 수 없다. 어느 쪽이든 한국 최초의 에스페란티스토인 홍명희와 막역한 지우였던 만큼 접하기 어렵진 않았을 것이다.[15] 일제강점기의 불교 승려이며 대한민국 제2대 국회의원과 동국대학교 이사장도 지냈다. 초년에는 항일 운동을 했지만 나중에는 일제에 협조했으며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도 포함되었다.[16] 웃긴 것은 박희도의 묘가 한용운 선생 묘로부터 관리사무소 쪽으로 내려오면 있다는 것이다.[17] 일본에 대한 적대감만은 분명해 글자조차도 싫어했는데 그 일화로 어느 날 한용운이 신문을 보던 중 가나 문자가 나와서 딸이 "아버지, 이 글자는 무슨 글자에요?"라고 물으니 한용운 왈, "그건 글자도 아니다. 몰라도 된다"라고 했다고 한 일화가 전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