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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05 00:05:23

춘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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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성
春城
파일:94569_30496.jpg
속명 이창림(李昌林)
국적
[[대한민국|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대한민국
]][[틀:국기|
파일: 특별행정구기.svg
행정구
]][[틀:국기|
파일: 기.svg
속령
]]
출생 1891년 3월 30일
조선 춘천도호부 인제현
강원도 인제군 인제면 원통리
사망 1977년 8월 22일 (향년 87세, 법랍 74세)
대한민국 경기도 의정부시 호원동 망월사
본관 평창 이씨
별칭 무애도인(無碍道人)

1. 개요2. 생애3. 기행

[clearfix]

1. 개요

대한민국독립운동가이자 승려.

2. 생애

1891년 강원도 인제군 인제면 원통리에서 태어났다. 1903년 13세 때 백담사에서 출가하여 10여년간 만해 한용운을 모시며 수학한 직계제자.

하지만 자신은 만해에게 파문당했다고 생각해 어디에서 만해스님의 수제자라고 하면 극구 부인했다고 한다. 사실 여기엔 일화가 있는데, 만해가 투옥되었을 때 춘성을 비롯한 제자들은 스승님의 잠자리를 걱정했다. 춘성은 만해가 출소할 때까지 아궁이에 불을 때지 않았을 정도였다. 하지만 나중에 한용운과 사이가 크게 벌어지게 되는데, 한용운이 아직 감옥에 있을 때 춘성이 정성을 기울여서 만들어온 솜바지 저고리를 드렸다. 그런데 이를 이상하게 여긴 만해 한용운이 "이 솜바지 저고리를 만들려면 수월찮게 돈이 있어야하는데 너는 무슨 돈이 있어서 이 비싼 솜바지 저고리를 만들어 왔느냐?"라고 묻자 춘성은 절에 딸린 텃밭을 팔아 만들어왔다고 하자 화를 내며 "절에 딸린 텃밭은 부처님 재산이거늘 감히 네가 마음대로 팔았단 말이냐?"라고 질책했다. 이에 춘성은 "텃밭은 나중에 다시 사면 되지 않습니까?"라고 답했지만 한용운은 완고하게 "아니 될 소리! 너는 부처님의 재산인 사중(寺中, 절의) 땅을 사사롭게 쓰기 위해 함부로 팔았으니 죄중에도 큰 죄를 저질렀다! 난 너 같은 상좌를 둔 일이 없으니 오늘부터 내 제자라는 소리는 입밖으로 내지 마라!"라면서 제자가 정성들여 만든 솜바지 저고리를 받길 거부했으며 이 일로 춘성스님은 트라우마가 생겼는지 누군가 자신에게 스승이 누구냐고 물어도 "저에게는 은사가 안 계십니다."라고 계속 답했다고 한다. 출처

1919년 설악산 신흥사의 주지가 되었고, 1929년 만공의 법을 이어받았다. 1950년 6.25전쟁 때에는 북한산의 망월사에서 머물렀으며 1977년 세수 87세, 법랍 74세로 사망하였다. 유언에 따라 사리와 재는 서해에 뿌려졌으며, 생전 한용운을 도와 독립운동을 하기도 했다.

3. 기행

춘성이 유명한 건 유명한 독립운동가였던 만해 한용운의 제자인 점도 있지만 무엇보다 아래의 기행들과 육두문자 설법 때문. 그렇다고 그게 다 해괴한 것도 아니고 일부는 해학적이면서도 정곡을 찌르는 말이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이 기행들 때문에 겉보기에는 땡중처럼 보일 수 있어도, 입이 거칠 뿐이지 항상 도덕적인 삶을 살려고 노력했으며 한 평생 재산을 탐한 적도 없었고 오로지 옷 한 벌과 바리때 하나만으로 살았다.

1. 군사독재 시절, 춘성스님이 야간 통행금지를 어기고 길을 걷고 있었다. 스님을 발견한 경찰이 정체를 물으니 중대장이라 답했고, 그게 무슨 뜻이냐 물으니 내가 중들의 대장이라며 무심한 듯 시크하게 지나갔다고 한다.

2. 지하철을 타던 중, 예수쟁이가 나타나 그에게 '죽은 부처 말고 부활한 예수를 믿으라'고 하자, 스님이 그들에게 부활이 뭔지 물었다. 이에 예수쟁이들은 부활이란 죽었다 살아나는 걸 뜻한다고 답했는데, 그러자 춘성스님은 "그렇다면 너희들은 밤에 죽었다가 아침에 살아나는을 믿어라. 내가 살면서 죽었다 부활하는 것은 좆밖에 보지 못했다. 늬들이 말하는 "부활"이 죽었다 살아나는 것이라고 했으니 내 좆을 믿어라!"고 답했다. 그러자 주변 사람들은 스님의 말에 빵터졌고, 예수쟁이들은 그 말에 당황해하며 그냥 가버렸다고 한다.만화

3. 이번엔 기차를 타던 중, 또 다른 예수쟁이가 나타나 어디에나 있는 하나님을 믿으라고 하자, "하나님은 어디에나 있으면 똥통에도 있겠네."라고 답변하고 이에 흥분한 예수쟁이가 그럼 부처도 똥통에 있는거냐고 묻자, 스님은 "부처가 똥이고 똥이 부처인데 말하고 말게 뭐가 있냐?"[1]고 대답했다고 한다.

4. 산에서 나무를 베던 중 산림법 위반으로 경찰에게 잡혀가 조사를 받았는데[2] 경찰이 반말로 "이봐, 당신 본적이 어디야?"라고 묻자, 스님이 큰 소리로, 당당하게 "우리 엄마 보지다!"라고 답하자 당황한 경찰이 "아니, 당신 어디서 태어났냐고!?" 라고 다시 묻자, "우리 아빠 자지에서 났지"라고 답했다고 한다.

그리고 경찰들이 왜 나무를 베었는지 묻자 "그야 산에 널부러진 나무를 가져와 요긴하게 쓸까 해서 그랬지."라고 말했지만 이게 끝이 아니었다. "이보슈, 경찰 양반. 이 우주는 감옥이야 감옥! 사람들을 실정법으로 다스리면 성자들도 죄인이 되는데 사람을 처벌하려면 평등하게 해야지. 자비와 선의로 행동한 사람들을 처벌하면 안돼. 시골의 중들이 시줏돈을 받아 거지에게 주면 그것도 공금횡령이 되지만 사람을 살릴 수 있다면 그건 죄가 아니야." 하고 장광설을 설파하였다. 이 말을 들은 경찰들은 기가 차 그냥 보냈다. 나중에 절에 돌아가서는 "아 글쎄 그놈들이 내 말귀를 못 알아들어"라고 웃었다고 한다.[3][4]

5. 한 번은 비구니 사찰 중창불사를 위한 법회에 모피옷과 고급 핸드백과 같은 사치품으로 치장한 귀부인들이 많이 방문했는데, 스님이 법문 끝에 던진 한마디가 그야말로 걸작이었다.
시집 장가가는 데는 보지와 자지가 제일이듯, 중창불사[5] 하는 데는 돈이 제일이니 오늘 이 법회에 온 인간들아 돈 많이 시주하고 가거라!

이 이후로 스님이 방문한 사찰에는 방문자가 크게 늘기 시작했다고 한다.

6. "백척간두에서 나뭇가지를 놓을 수 있는 사람이 대장부다"라는 주제로 백범 김구의 일화를 소개하면서 법문을 했는데, "백척간두에서 다시 한 발을 더 내딛으면 그 다음 경계는 무엇입니까?"라는 어느 수행자의 질문에 "야, 이 새끼야. 내가 떨어져 봤어야 알지."라고 답했다고.

7. 독실한 불교 신자였던 육영수 여사의 생일날 춘성 스님이 초청받아 법문을 하게 되었는데, 몇십분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다가 "오늘은 육영수 보살께서 지 애미 보지에서 응아하고 나온 날입니다."라고 딱 한마디만 했다. 많은 사람들이 당황했지만 그 누구도 뭐라 하지 않았고, 박정희 대통령은 나중에 부인의 말을 듣고는 "정말 보기 드문 훌륭한 분이 나타나셨다."라며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6] 또 한번은 육영수에게 "우리 입이나 한번 맞추자"라고 했는데, 당황한 주위 사람들과 달리 대통령 부부는 당황한 기색도 보이지 않고 스님의 농담을 받아 깔깔 웃었다고 한다.[7]

8. 그는 이불이 '부처를 멀리한다(離佛)'라는 뜻을 갖고 있다고 하여 평생 이불을 덮지 않고 살았는데, 한번은 절로 수행하러 온 사람들이 추위를 견디다 못해 이불을 몰래 들여오다가 춘성에게 들켰다. 춘성은 "수행하는 자가 따뜻한 잠자리를 가지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야 이 놈들아! 그거 당장 내놓거라!"라고 일갈하고는 모두 불태워 버렸다. 하지만 그 누구도 스님에게 반항하지 않았다.

9. 어느 노파에게 노처녀 손녀가 있었는데, 하도 눈이 높아서 웬만한 남자는 성에도 차지 않았다. 이에 노파가 손녀의 어리석음을 일깨워 주고자 스님에게 보냈는데, 스님이 대뜸 "네 그 좁은 것으로 내 큰 것이 들어가겠느냐"라고 했다고 한다. 그러자 손녀가 아연실색해서는 할머니에게 돌아가 "스님은 엉터리 땡초다"라고 하자, 노파가 "그럼 그렇지. 바늘구멍보다도 좁은 네 소견머리에 어찌 큰스님의 바다 같은 깨우침이 들어가겠느냐"라고 나무랐다고 한다. 즉, 손녀가 의미한 '좁은 것'과 '큰 것'은 성적인 의미이지만, 객관적으로는 그리 해석될 이유가 하등 없고 노파의 말처럼 좁은 것은 손녀의 이해력, 큰 것은 춘성스님의 가르침이 될 수 있는 것이다.

10. 입적(사망)이 가까워질 무렵 제자 승려들이 "만일 다비 후에 사리가 만약에 안 나오면 신도들이 실망할 텐데 어떡합니까"고 묻자 스님은 "야 이 씨부랄 놈들아. 내가 불자들 위해서 사냐?"고 일갈했다. 유명한 승려들 중 사리에 연연하지 말라고 생전에 훈계하는 경우가 굉장히 많다. 그런데 춘성 스님은 그걸 직설적인 욕으로 말한 셈이다.

11. 6.25 전쟁이 터지고 3일만에 수도 서울이 점령당했다. 너도 나도 살겠다고 피난 가기 바빴다. 스님들이나 수도자들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더군다나 조선인민군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라는 논리로 점령지의 종교인들을 탄압하거나 학대하였기에 상좌승들 역시 살기 위해서 피난을 떠났다. 그러나 춘성 스님은 몇명의 상좌들과 수도자들을 데리고 의정부 망월사를 지켰다. 1953년 6.25 전쟁이 휴전하고 피난을 간 스님들이 되돌아왔지만 나 혼자 살겠다고 도망친 것이 죄스러워서 춘성 스님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지 못했다.

춘성 스님은 되돌아온 스님들에게 "야 이 개 좆같은 놈아. 이렇게 다시 만나게 되는구나. 살아서 반갑다"라며 따뜻하게 맞았다. 한편 일부 스님들은 혼자 살겠다고 도망간 스님들에게 책임을 물어야 된다고 했지만 춘성 스님은 언급하지 말라며 불문(不問)에 붙였고, 이후로 누구도 혼자 도망간 스님들에게 책임을 묻지 않았다.


[1] 후당 시기 선사인 운문(雲門)의 유명한 선문답이다. 어떤 이가 '부처가 무엇입니까'하고 묻자 '마른 똥막대기'라고 답했다는 일화. 부처와 대중을 분리해서 보는 편견을 깨뜨리기 위한 화두로 이후 선불교 역사를 풍미한(?) 화두다. 태조왕건의 궁예의 대사 중 하나인 똥막대기도 여기서 온 말.[2] 사실은 절을 재건하기 위해 부러진 나무를 베어서 가져간 것이었다고 한다. 돈으로 아닌 산의 부러진 나무로만(!)[3] 사실 불법이 맞긴 하다.#작정하고 엄청난 양을 가져가지 않는 이상 굳이 단속하거나 신경쓰지 않을 뿐이다. 만일 저걸 다 잡았다면 막말로 등산 시 나뭇가지를 지팡이 대용으로 사용하거나, 부상 시 나무 부속물을 임시 부목의 형태로 사용하는 것조차 죄다 산림법 위반에 절도로 잡아 넣어야 하는 데다가, 진짜 잡았다가 누구 다치기라도 하면 큰일나기에 안 잡는 것이다. 단 버섯의 경우 잡을 때가 조금 더 있다.[4] 사실 길거리에 있는 은행을 줍거나, 나뭇잎이나 꽃을 꺾거나 하는 것도 죄다 절도 및 점유율이탈횡령죄가 적용될 수 있고 실제로 판례도 있다. 그러나 지자체 입장에서는 굳이 막을 이유가 없기에 안 막는 것이다. 어차피 그런 가로수 부속물들 자기들이 다 치워 버려야 하니까.[5] 중창불사(重創佛事)는 퇴락한 절의 시설을 다시 재건하는 사업을 말한다. 중창은 다시 세운다는 뜻이고, 불사는 불교 교단이나 사찰과 관련된 크고 작은 사업 등을 의미한다.[6] 영부인의 생일이라고 감언이설을 할 것 없이, 본질은 어느 누구든 똑같이 그냥 생일인 것이 춘성스님의 법문 핵심이라 볼 수있다.[7] 박정희 정부는 가지각색의 독재 행적, 인권 유린 및 언론 통제로 악명이 높았지만 정작 박정희 본인은 전주 사찰 당시 할매국밥 사건도 그렇고 언론에서 하는 게 아닌 측근들이 자기에게 농담처럼 던지는 말이나 모르는 사람이라도 자기 앞에서만 험한 농담을 하면 굉장히 잘 받아주었다고 한다. 본인부터가 농담을 좋아하기도 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