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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4-15 21:15:38

채만식

<colbgcolor=#000><colcolor=#fff> 대한민국의 소설가
채만식
蔡萬植
파일:attachment/20070529115221197234112.jpg
백릉(白菱), 채옹(采翁)
본관 평강 채씨[1]
출생 1902년 7월 21일[2]
전라북도 임피군 군내면 동상리
(現 전북특별자치도 군산시 임피면 읍내리)
사망 1950년 6월 11일 (향년 47세)
전라북도 이리시 마동
(現 전북특별자치도 익산시 마동)
학력 임피공립보통학교 (졸업)
중앙고등보통학교 (졸업)
와세다대학 고등학원 (문학 / 중퇴)
직업 소설가, 극작가, 수필가, 축구선수(센터백)[3]
부모 아버지 채규섭, 어머니 조우섭
배우자 은선흥(殷善興), 김시영(金氏榮)
종교 유교(성리학)
활동 1922년 ~ 1950년

1. 개요2. 생애3. 친일 행적
3.1. 평가
4. 여담5. 가족6. 채만식 문학상7. 대표작8.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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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내 작품 중 후진에게 참고가 될 만한 것은 단 하나도 없다. 모두 없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혹시 작품 이외의 것을 들라면 이렇게 말하고 싶다. “문학을 나처럼 해서는 안 된다.”[4]

대한민국소설가, 친일반민족행위자. 본관은 평강(平康)이며, 호는 백릉(白菱), 채옹(采翁)이다. 대표작으로는 〈레디메이드 인생〉(1934), 《탁류(濁流)》(1937) 《태평천하(太平天下)》(1938)[5], 〈치숙(痴叔)〉(1938), 〈여인전기(女人戰紀)〉(1944), 〈미스터 방(方)〉(1946) 등이 있다.

2. 생애

1902년 7월 21일 전라북도 임피군 군내면 동상리(현 전북특별자치도 군산시 임피면 읍내리)에서 부농인 아버지 채규섭(蔡奎燮, 1862 ~ 1944. 12. 16)[6]과 어머니 한양 조씨 조우섭(趙又燮, 1865 ~ 1947. 4. 18)[7] 사이의 5남 1녀 중 다섯째 아들로 태어났다. 고향의 임피공립보통학교와 서울의 중앙고보를 거쳐 와세다대학 고등학원 문과에 입학하였다. 이 와세다 고등학원은 구제고등학교 및 대학 예과 과정에 상응하는 고등교육기관이다. 그러나 1년 만에 중퇴하고 동아일보에 입사했다. 기자 생활을 하면서 써 온 소설로 등단하였고, 곧 기자 생활을 그만두었다. 그 이후 동반자 작가[8] 성향의 작품을 발표하였으나 차차 풍자적인 성향의 작품을 발표, 〈레디메이드 인생〉과 <인텔리와 빈대떡>으로 입지를 굳혔다.

40대 후반에 사망해 작품 활동기가 길지 않았음에도 대표적 다작 작가로 유명한데 소설, 희곡,[9] 동화, 수필, 평론 등 200여 편의 작품을 남겼다. 하지만 작품의 양만이 아니라 질적인 면에서도 채만식은 동시대 작가 위에 도도하게 군림한다. 서동산(徐東山)이라는 가명으로 최초의 근대적 장편 추리 소설인 〈염마(艶魔)>를 발표한 작가이기도 하다. 김유정과 함께 신식교육을 받은 도시인임에도 사투리를 자유자재로 다룬 작가인데 제주도 사투리 말고는 다 나온다. 똑같이 사투리 활용이 다채로운 김유정이 요절로 30여편만 남긴데 반해 200여편을 남긴 사람의 작품이 8도 사투리를 넘나들어서 전집 내기 힘든 작가로 유명하다.

예술가답게 잦은 검열 기준을 넘나드는[10] 풍자적 성향의 작품을 잇따라 발표하다가, 그 이후 독서회사건으로 인하여 친일의 길로 접어들게 된다.

3. 친일 행적

내지의 어머니들은 이천육백여 년을 두고 한결같이 나라를 위하여 아들네를 전지에 내보내되, 동치 아니하도록 도저한 도야(陶冶)와 훈련과 그리고 자각(自覺) 가운데서 살아 내려왔다. 그런 결과 일본 여성은 사랑하는 아들을 나라에 바쳤으되 조금도 미련겨워하며 슬퍼하는 등 연약한 거동을 함이 없이 가장 늠름하기를 잊지 아니하는 천품이 정신이 잡히기에 이르렀다. 어머니 된 정에 노상 어찌 슬픔이 없을 리가 있을꼬마는, 한때 속으로 슬퍼하였지, 혼자서 암루(暗淚)나 흘리면 흘렸지 일상에 상심하는 얼굴을 지닌다거나, 항차 남 앞에서 눈물을 보인다거나 하는 법은 전연히 없다.
여러 백 년을 나라와 나라 위할 줄을 모르고 오직 자아본위(自我本位), 가정본위(家庭本位), 오직 일가족속본위(一家族屬本位)로만 살아온 조선 백성은 따라서 어머니들의 군국에 대한 정신적 준비랄 것이 막상 충분치가 못하 였다. 빈약한 편이 많았다.
“나라는 개인보다 중(重)하니라.”
“민족의 번영은 언제나 그 민족의 젊은이가 흘린 바 피와 정비례하느니라.”
채만식, 「여인전기」
"당신, 죄 지셨잖아요? 그 죄, 지신 채 그대루, 저생 가시구퍼요?"
아내가 나를 죄인이라고 부르기는 처음이었다. 그는 울면서 그 말을 하였다.
나를 죄인이 아니라 여기려고 아니하는 이 낡아빠진 아내가, 나는 존경스럽고 고마웠다.
채만식, 「민족의 죄인」, 『레디메이드 인생』, 애플북스, 2014.

다른 친일파 문학가처럼 강연과 친일적 소설과 시로 친일 행위를 하였다. 하지만 별로 부각되는 행적을 보이지는 않았으며 무엇보다 채만식은 광복 이후에 〈민족의 죄인〉(1948.10, 1949.1)이라는 중편 소설을 발표하여, 자신의 친일 행적을 반성하였다. 물론 그렇다고 친일 행위를 한 사실이 변하지는 않지만, 채만식은 적어도 포장하지 않고 자신의 잘못을 공개적으로 드러내면서 다른 친일 문인들보단 양심이 있다는 평을 받는다.

광복 이후에는 <미스터 방>이나 <논 이야기>, <이상한 선생님> 등으로 미군정 하의 남한의 상황을 풍자한 소설[11]을 남기기도 하였다. 1948년 6월에 장편 《탁류》의 3판 인세와 〈잘난 사람들〉의 고료를 보탠 돈으로 이리(지금의 익산시)의 주현동에 처음으로 자신의 집(기와집)을 샀고, 채만식은 자신이 마련한 집을 '거룩'하다고 부를 정도로 감격했지만 1년 2개월 만에 그 ‘거룩한’ 집도 팔아 버리고 마동 296번지의 초가집으로 옮겨야 했다.

그리고 6개월 만에 세상을 떠났다. 향년 47세. 그의 48번째 생일을 40일 앞두고 있었고, 6.25 전쟁정확히 2주 앞둔 1950년 6월 11일 오전 11시 반이었다. 사인은 폐결핵이었다. [12][13] 채만식의 차남 채계열(蔡桂烈·1928~2004)에 따르면('나의 아버지 채만식') 그는 죽기 두어 달 전에 김제 출신 시인 장영창(1920~1995)에게 "장 군(君), 인편이 허락하는 대로 원고지 20권만 보내 달라"는 편지를 보냈다고 한다. 그 이유라는 게,
내가 건강이 좋아져서 글이라도 쓰려고 하는 것 같이 생각할는지 모르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네. 나는 일평생을 두고 원고지를 풍부하게 가져본 일이 없네.[14] 이제 임종이 가깝다는 예감을 느끼게 되는 나로서는 죽을 때나마 한 번 머리 옆에다 원고 용지를 수북히 놓아 보고 싶은 걸세.

라고. 군산의 채만식기념관에 소개되어 있다. 사망하면서 남긴 유언은 "널 위에 누이고 그위에 들꽃을 가득 덮은 후 활활 태워" 달라는 것이었다고 한다. #

3.1. 평가

연세대학교 교수 최유찬은 자신의 저서 <문학의 모험>에서 채만식의 친일 행위를 비판하기만 하는 행태에 비판을 가했다. 상술하였듯이 채만식의 경우 인정하고 뉘우치는 모습을 보여서인지 60년대부터 꾸준히 친일파 연구와 고발에 힘쓴 돌베개 출판사에서 쓴 친일파 관련 서적에선 이효석과 같이 그래도 조금은 긍정적인 평을 내리고 있다. 적어도 이 둘은 그걸 사죄하고 후회하고 반성하기라도 했으니, 자신들의 친일 행위를 숨기거나 도리어 뭐가 잘못이냐고 뻔뻔하게 외쳤던 김동인이나 이광수(소설가), 이무영, 서정주 등 여러 친일 문인들보다는 낫다는 식이다.

그러나 최유찬 교수의 의견에 대한 반박 의견도 있다. 최유찬은 채만식이 <문학과 전체주의>에 적은 '어둠 속에서 잠을 잘 못 자는 자신이 전등을 끔으로써 불면증을 겪는다'는 이야기를 빛과 어둠의 알레고리를 이용해 당대 현실이 암흑의 세계임을 암시한다고 주장했지만,[15] 막상 채만식은 불면증에 시달려서 포도주를 먹었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다.[16]

또한 최유찬은 김재용의 <협력과 저항>을 인용하면서 논리적 왜곡을 저질렀다. 김재용은 채만식 문학의 친일 파시즘화 계기를 1940년 중반 왕정위의 신남경정부수립으로 보고 친일의 내적 논리로서 '멸사봉공'[17]의 이데올로기를 들고 있고, 해방 후 <민족의 죄인>의 논리가 실망스러운 것은 "친일 파시즘에 경도되었던 내적 논리- 15세기 이후 유럽에서 시작된 근대에 대한 근본적인 반성에서 나온 인간 해방-에 대한 근본적 비판이 빠져 있기 때문이다"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다. 하지만 이는 최유찬이 김재용의 논리를 왜곡한 것이다. "이 내적 논리가 타당하지 않다는 것은 이미 한수영에 의해 지적되었다. 신남경정부의 수립이란 하나의 단순한 외적 사건을 친일작가가 되는 원인으로 삼는 논리, 논거가 부실한 문제점이 지적된 것이다. 그러나 이 내적 논리는 채만식이 자발적 협력을 한 친일작가임을 입증하는 반석 같은 진리가 되지 않으면 안 될 운명에 놓였다. (중략) 5장은 채만식이 해방된 조국에서 '고독한 반성'을 하고 했지만 김재용의 기대에 크게 미치지 못하는 것이었음을 분석하고 있다. 채만식은 김재용의 기대와는 달리 무한삼진을 언급하지도 않고 신남경정부를 아는 체도 하지 않은 것이다."라고 서술한다. 이는 당연한 결과인데 왜나하면 김재용은 앞서 <민족의 죄인>읠 비판하면서 그 이유를 분명히 밝혀 놓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신남경정부의 수립과 같은 친일의 계기가 분명 아니었던 것이다. 궁극적으로 최유찬의 논리의 가장 큰 문제점은 채만식을 항일작가로 다시 일으켜 세우면서 결국 그것은 다시금 민족주의 담론에 갇혀버린다는 점일 것이다.[18]

4. 여담

본 항목의 사진은 프랑스 문학 작품에 나오는 백작의 모습을 평소 모방해서 입고 다닌 것으로, 돈이 없어도 언제나 감색 외투에 회색 바지, 중절모를 갖추고 다녀서 주위에서 '불란서 백작'이라고 불렸다고 한다. 본인도 저 옷차림을 굉장히 마음에 들어했는지 외투와 중절모를 갖춘 정장에 웃는 모습으로만 사진을 찍었고 남의 집에 갈 때에도 항상 자신의 개인 수저를 들고 다녔다고 한다. 채만식의 중절모와 외투는 그의 외동딸 채영실이 군산의 채만식기념관에 기증해서 현재 사진과 함께 전시되어 있다.

평소 육식을 즐겨서, 집안 살림이 어려워도[19] 밥상에는 꼭 고기 반찬을 올렸다고 한다. 하루는 지인이 채만식의 집에서 함께 식사를 하다가 밥상을 보고 이토록 고기를 즐기니 채(菜)만 식(食)이 아니라 '육(肉)만식(食)'으로 불러야 하는 것 아니냐며 농담을 하기도 했단다. 이런 습관에서 기인했는지 채만식의 작품에서는 음식에 대한 묘사가 상세한 편이며, 심지어는 먹는 산적을 가지고 소설 한 편을 쓰기도 했다.

채만식만의 독특한 작품 형태로 '대화소설'이 있는데, 지문이 없이 대화로만 이루어져 있으면서 희곡과는 달리 인물, 시대, 장소 제시도 없고 막이나 장의 구분도 없고 무대지시문도 없는 소설을 가리킨다.
점잖은 사람: 명년에는 자네 논이나 몇 말지기 부치게 해주게.
지주: 그새도 농사를 많이 짓지 아니했나?
점잖은 사람: 남의 논 서른 말지기를 지어왔지만 비싼 도조를 치루고 남는 게 있어야지.
지주: 버들골에 있는 열닷 말지기를 명년부터 부치게.
점잖은 사람: 구(舊) 작인(小作人)이 말썽을 아니하겠지?
지주: 내 논 가지고 내 마음대로 작인을 옮기는데 누가 말썽이야? 그새도 그러기는 했지만 앞으로는 일체 농군(農業勞動者)에게는 논을 아니 줄 테야…… 도조를 잘러먹고 간도로 달어나니까.
점잖은 사람: 하기야 농군이 별로 논을 부치어보지도 못했지.
지주: 그게 옳은 일이지.
점잖은 사람: 도조는 얼마씩이나 할까?
지주: 평년작에 양석(150평 1두락에 2석)은 먹는 상답이니까……
점잖은 사람: 응.
지주: 그새까지는 열일곱 섬을 받어왔지만 열석 섬만 치지.
점잖은 사람: 농채(農業資金)도 좀 대어주게.
지주: 금융조합에 보증이나 서주지.
-<조그마한 기업가> 中

읽어보면 소위 대본소설과 비슷한 문체임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이런 '대화소설'은 그의 희곡과 함께 다루어지는 경우가 많다.

전북 군산시 임피면 축산리에 채만식 묘소[20]가 위치해 있으며 내흥동에 채만식문학관[21]이 위치해 있다.

5. 가족

채만식은 생전에 두 번 결혼했다. 정확하게는 첫 번째 부인인 은선흥(殷善興·1901~1993)과 이혼 절차를 밟지 않고 거의 별거하게 된 상태에서 다른 여자와 함께 산 것이지만. 은선흥과의 결혼은 집안에서 정한 혼처로 서로 사랑이 없어 신혼 초부터 별거를 했고, 은선홍과의 사이에 무열(武烈·1926~1945)과 계열(桂烈·1928~2004) 두 아들을 두었는데 무열은 장티푸스로 결혼도 하기 전에 사망했다. 채만식은 1922년에 일본으로 건너간 뒤에 간토 대지진으로 이듬해 귀국했지만 군산으로는 돌아가지 않았고, 은선흥도 보수적이고 남아선호사상이 강한 채만식의 집안에서 고된 시집살이를 하다 이혼 절차도 없이 쫓겨나 친정이 있는 익산 함라면 부근에서 살았으며, 자식이 장성해서는 아예 구리 교문동으로 가 버렸다고 한다.

이후 은선흥은 평생 재혼하지 않았으며, 1993년 10월 21일에 사망해 남양주 모란공원묘지에 묻혔다. 채계열의 아들인 채석재가 월간조선에서 말하기로는 언젠가 한 번 채만식이 함라면의 은선흥에게 찾아와서 문을 두드렸지만 은선흥은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고 한다. 사망했을 때에도 주위에서 그리고 채만식문학관이 있는 군산시에서도 선산이 있는 곳으로 모실 것을 제의했지만, 채석재는 생전 할아버지(채만식)와 만나고 싶어하지 않았던 할머니의 의사를 따라서[22] 군산이 아닌 남양주에 모셨다고 밝혔다.

1930년대 중후반에서 1940년 사이에 채만식은 숙명여고를 나온 신여성 김씨영(金氏榮)[23]과 동거하면서, 김씨영과의 사이에 병훈(炳焄, 1942년생)과 영훈(永焄, 1947년생) 두 아들과 영실(永實, 44년생)이라는 딸을 두었다. 채영실은 나중에 출가해서 비구니가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김시영은 채만식이 폐결핵으로 사망한 뒤 6.25 전쟁이 터지고, 임피면으로 피난을 떠났던 김씨영은 결국 소재를 알 수 없게 되었다. 시숙인 채명식(蔡明植)[24]가 이들을 찾으려 애를 썼지만, 결국 찾지 못했다고...

그러다 조선일보 1973년 10월 16일자에 채만식과 김시영의 아들 가운데 맏이인 채병훈의 이름이 등장한다. 폭력과 특수절도 등 전과 4범에 기소유예 처분을 받은 것을 합쳐서 교도소를 7번이나 드나들며, ‘창신동 독종’으로 관내 형사들도 혀를 내두를 정도의 특급 우범자로... "아버지 이름 辱되지 않게"(조선일보 1973년 10월 16일 7면 기사) 조선일보 기사에서 소개된 채병훈의 생은 참 딱하고 기구하기 짝이 없는데, 임피면으로 피난한 뒤에 어머니의 심부름으로 아버지 원고[25]를 찾기 위해 혼자 부산으로 내려갔다가 길을 잃고 구걸을 하다가 걸어서 4개월 만에 군산으로 돌아왔지만 어머니는 소재를 알 수 없게 되었다.[26]

이후 채병훈은 백부 밑에서 1년간 지내다 어머니가 서울 명륜동 외가에 있다는 소문을 듣고 하굣길에 책가방을 든 채 무작정 상경했지만 거기서 끝내 어머니를 찾지 못한 채로 거리를 배회하다 서울 뒷골목의 불량배들과 어울려 남의 물건을 훔치기 시작했다.[27] 1961년 6월 절도죄로 1년간 복역한 것을 시작으로 성격이 더욱 난폭해졌고 ‘똘마니’ 8명을 거느린 왕초 노릇을 하며 주먹질과 도둑질을 일삼았다. 1963년 1월에는 터키 대사관에 침입해 타자기 등을 훔치기도 했다. 1969년 박씨 성 가진 여자와 가정을 이뤄 아들까지 낳았으나 여전히 교도소를 들락거렸다.

그러다 1973년 9월 27일 7번째로 출소한 그는 무턱대고 《조선일보》를 찾아, 자신이 직접 쓴 ‘탁류에 휩쓸린 어제는’[28]이라는 제목의 200자 원고지 350장 분량의 수기를 보이며 기자에게 “맨주먹뿐이다. 전과자인 저를 쳐다보는 사람들의 눈초리도 무섭다. 리어카라도 마련할 수 있는 길이 없을까요?”라고 호소하며 조선일보 기자 임백에게 도움을 청했다. 이후 각지에서 도움의 손길이 이어져서, 당시 김현옥(金玄玉) 내무장관이 채병훈을 불러 집세와 생활보조비를 전하기도 했다. ‘탁류에 휩쓸린 어제는’은 김 장관의 호의로 출판사와 계약[29]했으며 출판사 외판사원으로 취직했지만, 《동아일보》 1973년 10월 29일자 기사에 장씨 성을 지닌 사기꾼이 채병훈에게 “일본 제일권업(第一勸業)은행 서울지점을 털자”고 꾀었다가, 마음을 다잡고 새 사람이 되기로 한 채병훈이 신고하여 덜미가 잡히는 등# 아주 평탄한 대로만 걸은 것은 아니었다.

이후 채병훈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국내뿐 아니라 북한에서 발간된 자료까지 모두 망라, 소장되어 있다는 국립중앙도서관국회도서관에도 채병훈의 수기 '탁류에 휩쓸린 어제는'을 찾을 수 없다. 비구니로 출가한 채영실은 2003년에 군산에 채만식문학관이 개원할 때에 초청받았는데, 채만식의 아들인 채계열이 이복 여동생인 채영실을 보고 먼저 인사를 건넸지만 채영실은 그를 냉담하게 외면했다고. #

채병훈의 어머니인 김씨영에 대해서 "아들 채병훈이 부산으로 간 사이에 낳은 자식들을 버리고 가출했다"고 월간조선에서 채석재의 증언을 전했는데, 김씨영의 딸인 채영실(정현 비구니)이 월간조선 인터뷰에 나와서 그렇지 않다고 반박했다. # 채영실의 증언은 채석재의 증언과 상충되는 부분이 많다. 우선 김씨영의 학력도 숙명여고를 나온 신여성이 아니라 보통학교밖에 나오지 않았으며, 남편 채만식이 사망하고 2주일 뒤에 6.25 전쟁이 터졌고, 조선인민군이 김씨영과 채영실이 살던 집에까지 쳐들어와 "채만식 어디 갔느냐?"며 채만식을 내놓으라고 강짜를 부려서 고초를 겪었다고 한다. 어렸을 때 감나무에 올라갔다가 떨어져서 왼쪽 팔이 불편했던 김씨영은 시집 식구들과 딸 채영실을 함께 피란보냈지만 돌아와 보니 셋째 큰아버지가 돈 될 만한 것은 모조리 팔아버려서 할아버지가 알고 지내던 산지기 집 뒷방에서 살았고, 한쪽 팔이 불편한 상태에서 먹고 살려고 온갖 일을 했다. 이를 보다 못한 김씨영의 누이가 이거라도 팔아서 먹고 살라며 반지를 줬는데, 넷째 큰아버지가 이를 가지고 부산으로 팔러 갔다가 소식이 끊겼고, 이를 채병훈에게 찾아 오라고 시켰는데 거기서 채병훈이 깡패들에게 잡혀 몇 달 동안 고생하게 되었다는 것이 채영실의 증언이다. 채병훈이 돌아오기 전에 예의 넷째 큰아버지가 돌아왔는데, 부산에서 반지를 팔았던 돈을 쓰리(소매치기)를 당해 잃어버렸다고. 이후에도 김씨영은 셋째 큰어머니와 함께 역전으로 나가서 떡과 고구마를 팔기도 하고, 채만식의 원고를 들고 서울로 올라가 이무영에게 전해 주었지만 출간이 되었는지 어쨌는지를 알 수 없었다고 채영실은 증언했다.

채영실은 아홉 살 때 출가해 비구니가 되었다. 채영실이 비구니가 된 것은 외갓집이 불교와 인연이 깊었던 것도 한몫했는데, 채영실의 이모인 도안(到岸) 역시 수덕사의 김일엽을 상좌로 출가한 비구니였다.[30] 도안 비구니는 누이인 김씨영이나 조카들이 가난하게 살고 있는 것을 보고 "입이라도 하나 덜자"며 채영실을 데리고 수암산 부근 암자로 갔는데, 둘째 큰아버지가 "왜 내 동생 딸을 중으로 만들려느냐"며 다시 데리고 갔다고 한다. 채영실은 양조장을 하던 큰아버지 큰딸 즉 자신의 사촌 언니 집에서 사촌 언니가 낳은 딸을 보게 되었는데, 어머니 김씨영이 양조장에 들렀다가 우연히 딸이 그곳에서 애를 보고 있는 것을 보고 놀라서 다시 집으로 데려왔고, 이후 김씨영은 식구를 데리고 상경했다. 서울로 온 뒤에 도안 비구니가 찾아와서 다시 채영실을 데리고 수덕사 견성암으로 데리고 갔고, 개심사에서 이모 도안 비구니를 상좌로 출가, 법명을 정현(淨賢)이라 했다.

채영실에 따르면 절에서는 ‘속세 일은 비로 쓸 듯이 싹싹 쓸어 비워야 중 노릇을 잘한다’며 소설도 함부로 읽지 못하게 했기에 아버지가 쓴 소설도 제대로 읽어 볼 겨를이 없었지만, 그런 와중에도 틈틈이 아버지 관련 신문 기사를 스크랩해 두었다가 후일 군산에 있는 채만식문학관에 기증하게 된다. 이후 상좌이자 이모인 도안 비구니를 따라 사찰을 옮겨 다니다 도안 비구니가 입적한 뒤에 어머니 김씨영과 인천에 자리를 잡았고, 4년 뒤인 1980년에 김씨영은 세상을 떠났다.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뒤에 동생 채영훈이 반송장인 채로 나타났는데, 채영훈은 대구에서 제화 기능공을 하다 뇌동맥이 터져 쓰러졌고 대구에서 치료가 안 된다고 인천까지 택시를 타고 와서 경희의료원에 입원했다. 퇴원 후엔 통원치료를 다녔는데, 채영실은 채영훈을 데리고 병원에 다니느라 지하철 1호선이 있는 경기도에 다시 자리를 잡았고, 채영훈은 1996년에 세상을 떠났다. 채영실 즉 정현 비구니는 2023년의 제1회 백릉채만식문학상[31] 시상식에도 참석해 직접 시상을 맡았다.

6. 채만식 문학상

전라북도 군산시에서 채만식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여 채만식의 작가 정신을 기념하기 위해 소설가들에게 수여하는 문학상을 제정했다. 매년 10월 5일 군산 시민의 날에 시상식이 열린다. 2003년부터 시상되기 시작했는데, 2005년에는 채만식의 친일 논란 때문에 한 해 걸렀다. 관련 기사. 2006년부터 다시 시상하기 시작해 2018년 15회를 맞았다. 다음은 채만식문학상 역대 수상자 명단.
채만식 문학상 역대 수상자
<rowcolor=#373a3c> 회차 연도 작가 작품명
1 2003 정형남 내 안의 나를 찾아서
2 2004 백시종 서랍 속의 반란
3 2006 라대곤 망둑어
4 2007 손영목 거제도
5 2008 김상렬 그리운 쪽빛
6 2009 전성태 늑대
7 2010 문순태 생오지 뜸부기
8 2011 김지연 명줄
9 2012 송하춘 스핑크스도 모른다
10 2013 공선옥 그 노래는 어디서 왔을까
11 2014 이시백 나는 꽃도둑이다
12 2015 성석제 투명인간
13 2016 손홍규 남자의 가출
14 2017 한수산 군함도
15 2018 이선구 아담의 추억

2018년을 기점으로 채만식문학상 시상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2023년에 불교문예에서 다시 '백릉채만식문학상'을 제정하여 6월 3일에 계간 불교문예・불교문예작가회・통일문학관이 서울 종로구 소재 동숭동 예술가의집 다목적홀에서 주최한 ‘불교문예 100호 출판기념회 및 문학상 시상식’에서 시상을 행했다. 이후 매년 봄 부처님오신날에 즈음하여 소설(단편, 중편, 장편)을 대상으로 수상작을 선정하여 시상을 행하기로 했으며, 제1회 백릉 채만식문학상의 경우 채만식의 딸인 채영실(정현 비구니)이 직접 수상식에 참석해 시상을 행했다. ##
백릉 채만식 문학상 역대 수상자
<rowcolor=#373a3c> 회차 연도 작가 작품명
1 2023 심아진 신의 한 수(소설집)

7. 대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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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현대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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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fff><colbgcolor=#87cefa,#010101><colcolor=#fff> 연대 서정 갈래 서사 갈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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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대
동인지 시대
감상적·퇴폐적 낭만주의 시 (이상화) ·
김소월[1] · 한용운[2]
감상적·퇴폐적 낭만주의 소설
(김동인)
자연주의 · 사실주의 소설
(염상섭 · 현진건)
신경향파 문학 국민 문학파
(신민요 운동 · 시조 부흥론)
신경향파 문학 국민 문학파
계급주의 문학 계급주의 문학
1930년대 시문학파[3] (모더니즘 시) · 생명파 · 전원파 모더니즘 소설[4] · 장편소설[5] · 농촌소설[6] · 역사소설[7]
1940년대
~ 광복
청록파 · 저항시 (이육사 · 윤동주 · 신석정) 국문학의 암흑기[8]
광복 ~
1950년대
이념시(연간조선시집) · 해방기념시집 · 순수시 귀향 소설 · 분단 문학
전쟁시 · 모더니즘 시 · 서정시 전쟁소설 · 분단 소설 · 귀향 소설
1960년대 현실 참여시 순수 서정시 참여문학 순수문학
1970년대 민중시 · 노동시 민중 소설 · 농민·어민 소설 · 노동 소설 ·
순수 소설 · 중간소설 · 대중소설
1980년대 민중시 · 서정시 · 해체시 노동 소설 · 연작소설 · 역사 장편 대하소설
1990년대
~ 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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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전통적 운율·정서를 계승한 시인.[2] 조국 광복 염원·의지 및 부정적 현실 극복을 다룬 시인.[3] 정치적 이념을 배제한 순수 서정시를 추구한 유파. 특정 사상이나 계급주의적 관점을 강조하던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카프)에 반발하며 등장했으며, 시 동인지 《시 문학》을 중심으로 순수 서정시 운동을 주도했다. 김영랑, 박용철, 정지용, 신석정 등의 시인이 활동했다.[4] 부정적 현실을 지식인의 관점에서 비판한 소설이 많았다. 특히 의식의 흐름 기법이 많이 쓰였다. 대표적으로 이상날개박태원의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이 있다.[5] 장편소설 중에서도 일제 강점기에 부정적 인물이 득세하던 현실을 반영한 소설이 이때 주목받았다. 대표적으로 채만식태평천하, 염상섭삼대가 있다.[6] 계몽주의에 기반한 농촌 계몽 소설, 향토적 삶을 다룬 향토적 농촌 소설, 식민지 지배와 통치 제도의 억압성과 부조리로 인한 농촌의 현실을 다룬 현실 비판적 농촌 소설이 있다.[7] 만주 사변 이후 더욱 극심해진 일제의 사상 통제와 검열을 피해, 역사적 사건을 다루어 민족 의식을 고취하고자 하였다.[8] 당시 일제의 민족말살정책중일전쟁태평양 전쟁을 거치면서 더욱 심화되어 아예 한국어 사용 자체를 금지할 지경에 이른 관계로 주제 의식이 모호하고 불분명한 몇몇 단편들만 간신히 명맥을 이었다. 대표적으로 순수 소설인 황순원'별'이 1941년에 발표되었다. 이 시기에 학창시절을 보낸 전후세대(1920년대생) 작가들은 체계적인 한글 교육을 받지 못한 탓에 다른 세대와 비교도 안되는 굴곡진 인생 경험을 했음에도 이를 풀어내는데 한계가 있었고 이전 세대와 60년대 부상한 한글세대(김승옥 등) 사이에 끼어버렸다.
고전문학 · 장르문학 }}}}}}}}}


[1] 목사공파(牧使公派)-임피 종중 22세 동(東) 항렬. 족보명은 채동만(蔡東萬).[2] 음력 6월 17일.[3] 중앙고보소속으로 제2회 전조선축구대회 중등부 준우승을 차지했다.[4] 2017년에 루이앤휴잇에서 나온 <작가로 산다는 것>에 실린 채만식의 기고에서 발췌한 것이다. 본서에는 채만식 외에도 이상, 나도향, 현진건 등 근현대 문인들의 작가로써의 생각이나 철학, 회고를 담은 짧은 기고들이 함께 수록되어 있다.[5] 《조광(朝光)》 연재 당시 원제는 천하태평춘(天下太平春).[6] 족보명 채진한(蔡鎭漢).[7] 평강채씨대동보 권1 1512쪽에는 임천 조씨(林川 趙氏)로 등재되어 있다.[8] 당시 유행하던 카프 계열에 직접적으로 참여하지는 않지만 그와 비슷한 경향의 소설을 쓴 일련의 작가들을 통칭해서 부르는 말. 동반자 작가의 대표적인 예로 이효석이 있다.[9] 동반자 작가 시절에는 오히려 소설보다 희곡을 많이 썼다.[10] 마르크스막걸리라고 돌려쓰는 등, 이런 경향은 <치숙>에서 잘 드러난다. 후기 소설(시기적으로는 일제 말)로 갈수록 총독부의 탄압 강도와 정비례하는 검열 때문에 '청산가리'와 같은 고유 명사를 '○○칼리' 같은 식으로 복자 처리해서 나오기도 한 듯하다.[11] 소설 속에 나오는 미 육군들의 모습도 그리 좋게 나오지 않는데, 거만한 상급자라는 투로 표현했다. 미국은 남한의 사정을 정확히 알지 못했기에 남한을 꿰고 있던 과거 친일파 세력에게 세부적인 절차를 맡겼고, 미국 본토에서도 소련의 최전방인 북한을 막을 최전선으로만 인식했다. 그러니 '거만한 상급자'라고 보는 것도 틀린 시각은 아니다.[12] 당시 결핵은 돈이 조금만 있었더라면 치료가 가능했었지만 채만식은 가난해서 그럴 돈조차 없었다. 게다가 창작을 격하게 하여 건강이 상했고 당시 그의 맏아들 채무열(蔡武烈·1926~1945)도 장티푸스에 걸려 자신의 병세 또한 뚜렷함에도 불구하고 아들의 병간호를 하느라 몸을 돌보지 못하였다. 안타깝게도 채무열은 결국 장티푸스로 사망했고, 후사도 없었다.[13] 만일 한국전쟁이 발발할 때까지 살아있었으면 채만식 또한 조선인민군에게 납북되었을 확률이 매우 높았다. 당장 이광수도 전쟁이 일어나자마자 피난을 가지 못한 채 북한군에게 납북되었으니...[14] 평소 채만식은 결벽증이 심해 글이 자신의 마음에 들 때까지 고치는 경우가 많아 원고지 한 장 분량의 초고를 쓸 때에도 10장은 기본으로 버리고 썼다고 하며, 작품을 쓸 때에도 원고지 수를 항상 확인해서 담당 기자가 매우 까다로워했다고 한다.[15] 채만식전집 10(창작과비평사, 1989) 268~269쪽[16] 채만식, <포도주>- 매일신보 1939.7.23. 이글의 첫머리는 다음과 같이 시작된다. "며칠씩 밤을 밝혀가면서 일을 하고, 그러면서도 낮으로나마 수면을 충분히 갖지를 못해 늘 피로해서 있고, 또 그렇지 않더라도 밤에 잠을 이루자면 두세 시간씩 삐대고, 그러한데다가 지나간 봄에는 근 40일간 불여의한 일로 건강이 가뜩이나 더 쇠약했었고 ....... 이런한 여러 가지의 나의 생리상 형편을 잘 아는 친구 하나가 포도주를 먹어보라고 권을 하는 것이었다."[17] 滅私奉公. '사사로운 욕심이나 이득을 버리고 공익을 추구한다'는 뜻이다. 왕징웨이는 나라를 구하기 위해 일본과 화친하자는 주장을 폈는데, 채만식도 이런 식의 논리를 피며 친일 활동을 했다는 것이다. 자세한 것은 왕징웨이 문서 참고.[18] 자세한 내용은 2011년에 출판된 "채만식 문학의 인식론적 지형도와 구성 원리" 284쪽부터 참고.[19] 왜냐면 채만식은 형의 금광 사업에 투자했다가 사업이 실패하는 바람에 가난한 삶을 살게 되었기 때문이다. 신식 교육을 받은 것도 그렇고 원래부터 가난한 형편이었던 것은 아닌 셈이다.[20] 다만 2016년 6월 경 한 시민이 군산시 홈페이지에 "채만식 묘소가 전혀 관리되고 있지 않는 거 같다"는 글이 작성되어 있다.#[21] 2001년 건립되었으며 160평 넓이의 지상 2층 건물. 상세주소는 강변로 449.[22] 채석재는 월간조선에서, 한번은 채만식이 버스를 타고 처가가 있던 함라를 지나는데 마침 버스 안에 장남 채무열이 있었고, 채만식과 동행한 사람이 채무열에게 "이 분(채만식)이 네 아버지시다"라고 소개했지만 채무열은 "나에겐 아버지가 없어요"라고 답했단다. 그러고 나서 얼마 뒤에 채무열은 열병으로 요절했는데, 평소 '똑똑하고 남자다워서' 남편처럼 의지했던 큰아들의 죽음이 남편과의 만남에 충격을 받아 그렇게 된 거라고 생각했던 은선흥은 그 일로 더욱 채만식을 원망했을 것이라고 했다.[23] 김씨영의 딸인 채영실이 '김씨영(金氏榮)'으로 읽는 것이 맞다고 밝혔다. 다섯 획으로 된 한자로 이름을 짓느라 '씨(氏)'를 써서 이름을 지었다고.[24] 채만식의 큰형이다.[25] 채만식은 죽기 전 부산의 학우사에서 발행되던 월간지 《학우》에 작품 〈소년은 자란다〉를 연재하고 있었다.[26] 채석재는 김씨영이 식구를 버리고 가출했다고 했지만 김씨영의 딸 채영실이 이를 부정했다. 후술.[27] 채병훈에 대해서 동생 채영실은 어려서부터 아버지, 어머니 말을 잘 듣지 않았고, ‘나는 죽을 때까지 첩의 아들이라는 낙인이 찍혀서 살아야 된다’며 아버지 채만식한테 달려들었다가 채만식이 결국 화가 나서 ‘내가 저놈을 죽이고 가야 어미가 편안하게 산다’며 짚고 다니는 단장으로 채병훈을 때렸고, 그걸 어머니가 "나도 같이 죽이라"고 말리는 통에 어머니도 덩달아 맞았다고 한다. 그러고 얼마 후 채만식이 사망했고, 채병훈은 커서 집을 나간 후로 단 한 번도 나와 어머니를 찾아오지 않았다고 증언한다.[28] 아버지 채만식의 《탁류》에 빗댄 수기이다. 탁류는 조선일보에서 연재되었던 소설이기도 하다.[29] 월간조선에 따르면 당시 계약금이 23만 5000원이었다고 전한다.[30] 김일엽은 만공월면을 상좌로 출가했다. 즉 채영실은 법계상 만공의 증손제자가 되는 셈.[31] 제1회 백릉채만식문학상은 심아진의 소설집 <신의 한 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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