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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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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000><colcolor=#fff> 대한민국의 소설가
황순원
黃順元
파일:황순원 프로필.jpg
출생 1915년 3월 26일
평안남도 대동군 재경리면 빙장리
사망 2000년 9월 14일 (향년 85세)
서울특별시 동작구 사당동
국적
[[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
학력 숭실중학교 (졸업)
오산학교 (졸업)
와세다 제2고등학원[1] (문과 / 졸업)
와세다대학 문학부 문학과 (영문학 / 학사)
직업 소설가, 시인
데뷔 1931년 동광 '나의 꿈' 등단
가족 아버지 황찬영
어머니 장찬붕
삼남 중 첫째
배우자 양정길
슬하 3남 1녀
종교 개신교(장로회)

1. 개요2. 일생3. 창작 경향4. 대표 작품5. 기타6. 수상 경력7. 관련 문서8. 둘러보기

[clearfix]

1. 개요

대한민국시인이자 소설가이다. 본관은 제안(齊安). 자(字)는 만강(晩岡)이다.

김동리, 김승옥과 함께 한국 현대문학을 대표하는 소설가로 평가받는다.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은둔작가였다.

후술하겠지만 아들이 시 '즐거운 편지'로 유명한 황동규 시인이며, 손녀 황시내도 소설가로 활동하고 있다. 즉 3대에 걸친 문인 집안이다.[2]

2. 일생

파일:external/wl.nl.go.kr/img150126-5_2.jpg
젊은 시절의 황순원. 숭실중학교 졸업 사진이다.

평안남도 대동군 재경리면 빙장리(現 평양시 순안구역 재경리)에서 출생했다. 평양부 숭덕학교 교사였던 아버지 황찬영(黃贊永)은 3·1 운동 당시 태극기를 배포하다 체포되며 옥살이를 하기도 했다. 와세다대학 영문과에서 수학하면서 이해랑 등과 '동경학생예술좌'에서 창립, 활동했다. 이 후 동경학생예술좌는 한글 말살정책이 시행될 때 까지 한국 최초로 여러 고전극들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하는 등 왕성한 활동으로 전설이 되었다.

1930년부터 신문에 시를 발표하면서 시인으로 활동했으며, 1931년 16세에 문학지 동광에서 《나의 꿈》을 발표하면서 정식으로 등단했으며 이후 1935년 발족한 동인 삼사문학의 일원으로 발탁되었다.

1937년부터 소설 창작에 관심을 두기 시작해 1940년 《》을 발표하며 본격적으로 소설을 창작하기 시작했으나 1942년 일제의 한글말살정책이 시작되자 평양의 빙장리로 낙향, 은둔하게 된다.[3] 그리고 1945년까지 작품을 발표하지 않는다.[4]

광복 이후 지주계급으로 몰리게 되면서 결국 월남을 선택했다.[5]목넘이 마을의 개》 등을 발표, 활동을 재개하며 한국 전쟁 이후에는 《카인의 후예[6]》, 《나무들 비탈에 서다》, 《일월》등의 장편소설을 주로 썼고, 서울중/고등학교 교사로도 교편을 잡았다.

1957년부터 1980년 정년퇴임 시까지 경희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로 강단에 서서 후학들을 가르쳤다. 훗날 '경희사단'이라고 불리며 문단의 큰 축을 차지한 경희대 출신 문인들은, 모두 그에게서 가르침을 받은 이들이었다. 류시화, 정호승, 조세희, 전상국, 한수산, 고원정[7], 김종회, 이문재, 박주택, 이성부 등 문단에서 쟁쟁한 이름을 떨치는 문인들이 그의 제자들이다. 시나리오와 드라마 작가로 유명한 신봉승도 그의 제자 중 하나였다.
1985년 산문집 《말과 삶과 자유》를 내기까지 왕성한 활동을 보였고, 1992년 《현대문학》에 시 8편을 낸 것을 끝으로 더 이상 글을 쓰지 않았다. 말년에는 산책을 하며 가끔 제자들을 만나는 걸로 소일하다 2000년 9월 14일, 자택에서 85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시신은 충남 천안시 풍산공원묘원에 안장되었다가 2009년 경기도 양평군 서종면 수능리 황순원문학촌 옆으로 이장되었다.

3. 창작 경향

초기 단편소설, 즉 단편집 <늪>(1940)에 발표된 작품들에서 현재형 표현[8]이 주로 쓰였고 감각적 묘사가 두드러졌다. 그리고 이 경향은 훗날 발표되는 소설들에서도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이를 두고 평론가 김현"그가 단편까지를 시의 연장으로 본 것이 아닐까"(「안과 밖의 변증법」)하고 추측하기도 하였다. 그래서 사람들은 황순원의 소설을 '시적인 소설'이라 말하게 된다.

도스토옙스키로부터 영향을 받아 믿음과 신에 대한 심도 깊은 고찰과 생명존중 사상이 작품 곳곳 깊게 물들어있다.
한 예로 문학 평론계 3인방[9]으로 유명한 문학 평론가 김윤식은 자신의 비평집 <신 앞에서의 곡예>에서 그를 두고 " 말년 <신들의 주사위>에서는 도스토옙스키로부터 벗어나 신 없는 성자의 경지에 도달하였다"라고 평가하며 황순원은 그저 좋은 작가가 아니라 대가 중의 대가였다 라며 글을 마쳤다. 김윤식은 한국 단편소설 명장으로 이태준과 황순원을 꼽은 적 있다. [10]

말년에는 순수문학에 회의를 느끼고[11] 작가주의적인 작품들을 썼다. 특히 1960년대 이후로는 40년 동안 쌓아온 필력과 작가의식으로 실험적인 소설들을 쓰게되었고, <탈>, <나무, 그리고 돌>, <차라리 내목을>, <막은 내렸는데>,<문자풀이> 등의 작품들에서 당시에는 전무하다시피했던 기성작가의 성숙미와 세련성, 필력을 보이며 말그대로 살아있는 거목의 위력을 보였다. [12]

그 이외에도 세련되고 간결한 문체와 단조롭고 정체되어있는 완급조절 등으로 높이 평가받는다. 또한 설화체 문장이 특이하다 할 수 있는데, 이는 대화나 묘사를 서술에서 따로 분리시키기보다는 서술하는 문장 속에 모두 녹여버리는 기법이다. 이는 고전소설과 같은 방법이라 할 수 있다. 현대소설이 설화체 문장에서 벗어나면서 그 생명력을 얻었던 것이 현실이라고 한다면 황순원은 이러한 설화체 문장으로 돌아가면서 새로운 특성을 얻었던 셈이다. 물론 이런 설화체 문장을 이전에도 쓰지 않은 것은 아니므로 황순원만의 특수한 기법은 아니다.

작품 내에 주로 서울, 또는 고향인 평안도 일대의 방언이 많이 등장한다.

시인으로서도 나쁘지 않은 평가를 받는다. 작가 스스로가 소설을 시의 연장으로 본다는 말에 수긍하기도 했고, 문단에도 시로 등단했으며 유작 또한 소설이 아닌 시이며, 아들 황동규는 현재 한국 순수시의 거목인 만큼 시와 연이 깊다. 특히 그의 말년 시는 성숙미나 세련성에 있어서 소설을 능가한다는 평가를 심심찮게 받기도 한다. 황순원의 시는 사물을 다르게 표현하므로서 저자가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을 연구해볼 수 있다. 작가의 장점인 인물의 심리묘사또한 그렇게 다져진 것이다.

4. 대표 작품

5. 기타

담배를 뻐끔여 온 때문에
이젠 담뱃대만 들면
슬픈 일이 날라와 빠짝인다'||

6. 수상 경력

7. 관련 문서

8. 둘러보기

한국의 현대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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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fff,#ddd><colbgcolor=#87cefa,#010101><colcolor=#fff,#ddd> 연대 서정 갈래 서사 갈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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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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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민요 운동 · 시조 부흥론)
신경향파 문학 국민 문학파
계급주의 문학 계급주의 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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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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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록파 · 저항시 (이육사 · 윤동주 · 신석정) 국문학의 암흑기[8]
광복 ~
1950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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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시 · 모더니즘 시 · 서정시 전쟁소설 · 분단 소설 · 귀향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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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전통적 운율·정서를 계승한 시인.[2] 조국 광복 염원·의지 및 부정적 현실 극복을 다룬 시인.[3] 정치적 이념을 배제한 순수 서정시를 추구한 유파. 특정 사상이나 계급주의적 관점을 강조하던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카프)에 반발하며 등장했으며, 시 동인지 《시 문학》을 중심으로 순수 서정시 운동을 주도했다. 김영랑, 박용철, 정지용, 신석정 등의 시인이 활동했다.[4] 부정적 현실을 지식인의 관점에서 비판한 소설이 많았다. 특히 의식의 흐름 기법이 많이 쓰였다. 대표적으로 이상날개박태원의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이 있다.[5] 장편소설 중에서도 일제 강점기에 부정적 인물이 득세하던 현실을 반영한 소설이 이때 주목받았다. 대표적으로 채만식태평천하, 염상섭삼대가 있다.[6] 계몽주의에 기반한 농촌 계몽 소설, 향토적 삶을 다룬 향토적 농촌 소설, 식민지 지배와 통치 제도의 억압성과 부조리로 인한 농촌의 현실을 다룬 현실 비판적 농촌 소설이 있다.[7] 만주 사변 이후 더욱 극심해진 일제의 사상 통제와 검열을 피해, 역사적 사건을 다루어 민족 의식을 고취하고자 하였다.[8] 당시 일제의 민족말살정책중일전쟁태평양 전쟁을 거치면서 더욱 심화되어 아예 한국어 사용 자체를 금지할 지경에 이른 관계로 주제 의식이 모호하고 불분명한 몇몇 단편들만 간신히 명맥을 이었다. 대표적으로 순수 소설인 황순원'별'이 1941년에 발표되었다. 이 시기에 학창시절을 보낸 전후세대(1920년대생) 작가들은 체계적인 한글 교육을 받지 못한 탓에 다른 세대와 비교도 안되는 굴곡진 인생 경험을 했음에도 이를 풀어내는데 한계가 있었고 이전 세대와 60년대 부상한 한글세대(김승옥 등) 사이에 끼어버렸다.
고전문학 · 장르 문학 }}}}}}}}}



[1] 사실상 와세다대학대학예과인 교육기관이다. 이 당시 일본은 대략 19살 때 구제중학교를 졸업하면 바로 대학에 갈 수 있는 게 아니라 먼저 대학예과 시험에 합격해야만 본과과정(구제대학 학사과정)에 진입할 수 있었다. 대학예과와 학제상 동급인 구제고등학교나 구제전문학교를 나와도 본과에 편입할 수 있었다.[2] 황동규 시인의 즐거운 편지는 본래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의 가제이기도 했다.[3] 공교롭게도 생몰년까지 똑같은 동갑내기면서 한국 현대문학을 대표하는 문인(시인)이었던 서정주와 가장 대조되는 내용이었다.[4] 이 기간 동안 써둔 글 중 대표적인 것이 독 짓는 늙은이다.[5] 그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쓴 작품이 바로 《카인의 후예》다.[6] 소설의 제목은 1916년 출판된 아리시마 타케오의 동명의 소설 《카인의 후예(カインの末裔)》에서 따왔다.[7] 문필 활동 외에 KBS1 <다큐멘터리극장>과 <역사의 라이벌> MC로 이름을 날렸다.[8] 보통 소설의 문체는 의도가 존재하지 않는 한 과거형 표현을 주로 쓴다는 것을 생각해보자.[9] 백낙청김현, 김윤식.[10] 이태준의 <달밤>과 황순원 <우산을 접으며>를 한국문학 최고의 명단편으로 꼽기도 했다. https://www.youtube.com/watch?v=lY5ItRhaYRc[11] <독 짓는 늙은이>, <소나기>, <목넘이마을 개> 등 그의 초기작품들의 완성도가 전쟁 직후였던 한국문단에 더욱 주목받았고, 이로 인해 대중을 포함, 기성작가나 평론가들에게까지 그는 그저 순문학작가, 또는 해방전후 민족의식과 생명존중사상에 관련된 작품을 쓴 작가로 기억되기도 한다.[12] 한국에 거목작가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현진건, 김동인, 정지용, 이태준,염상섭 같은 작가들 모두 젊은 나이 요절했으므로 수십년의 인생을 문학에 바쳐온 한 문학가는 황순원과 서정주, 김동리를 제외한 이전 한국문학계에 존재하지 않았다. 그마저도 황순원이 거의 은퇴를 했을 1970~80년도 무렵에서야 박경리, 이청준, 김승옥, 이문열 등의 작가들이 문단의 혜성처럼 나타났고 여러 연구가 진행될 수 있었다.[13] 서울과 평양의 거리는 약 200km 가량이다. 지금이야 남북한으로 분단되어서 못 갈 뿐 물리적으로는 차 한 번 타면 길어야 몇 시간 정도지만, 조선 후기인 이 시대에는 며칠씩 걸리는 거리였다.[14] 조선시대 장례는 관을 매장한 후 그 땅을 석회로 봉하는 풍습이 있기 때문이다.[15] 이쪽도 아버지 황동규처럼 서울대학교를 졸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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