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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14 11:52:22

백남준

파일:괴테 메달 백색.svg
한국인 및 한국계 외국인 괴테 메달 수상자
<rowcolor=#fff> 1995년 1998년 2007년
<rowcolor=#000,#ddd> 윤이상(독일) 백남준(미국) 김민기
* 괄호는 수상 당시의 국적

파일:금관문화훈장 약장.png
금관문화훈장 수훈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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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남준
白南準 | Paik Nam-june
파일:백남준 사진.png
<colbgcolor=#a4a4a4> 출생 1932년 7월 20일
경기도 경성부 서린정
(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서린동)[1]
사망 2006년 1월 29일 (향년 73세)
플로리다주 마이애미
최종 국적
[[미국|]][[틀:국기|]][[틀:국기|]]
본관 수원 백씨 (水原 白氏)
학력 경성수송국민학교 (졸업)
경기중학교 (졸업 / 47회)[2]
홍콩 로이든 고등학교 (졸업)
도쿄대학 문학부 (미술사학 / 학사)[3]
프라이부르크 국립 음악 대학교 (수료)
뮌헨 대학교 대학원 (철학 / 석사)
뮌헨 대학교 대학원 (음악사학 / 박사)
프랫 대학교 (미술학 / 명예박사)
장르 아방가르드
가족 아버지 백낙승, 어머니 조종희, 3남 2녀 중 막내
배우자 진안 이씨[4], 구보타 시게코(1937~2015)
외조카손자 지누
직업 예술가 (비디오 아티스트)
파일:백남준 02.png
TV 안경을 쓰고 포즈를 취하는 백남준
파일:백남준 01.png
아내 구보타 시게코와 함께

1. 개요2. 일생3. 평가4. 국내 소장 미술관5. 국외 소장 미술관6. 어록7. 여담

[clearfix]

1. 개요

대한민국 출신의 미국 예술가. 20세기를 대표한 세계적인 예술가 중 한 명이었다. 특히 비디오 아트의 선구자로 꼽힌다. 텔레비전과 기술적 매체를 예술 작품에 통합하여 현대 예술의 발전에 기여한 인물로 인식되고 있다.

특유의 파격적인 예술 세계관으로 유명하며, 볼프 포스텔과 더불어 20세기 비디오 아트의 세계를 개척한 세계적인 예술가이지만, 비디오 아트 대가 이전 시절에는 전위예술 퍼포먼스 아티스트이기도 했다. 한국을 포함해 전 세계 방방곡곡을 돌아다녔으며, 플렉서스 멤버로 퍼포먼스 예술에서도 한 축을 담당했다.[5]

2. 일생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백남준/일생 문서
번 문단을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3. 평가

"백남준을 비디오아트의 창시자라고만 규정하기엔 부족함이 많다. 20세기에 이미 디지털로 연결된 세상을 내다본 선지자였으며 인공위성까지 동원할 만큼 엄청난 배포의 기획자였다. 마셜 매클루언 같은 문명비평가부터 데이비드 보위 같은 가수까지 전 세계 수많은 인사가 그의 친구였다. 백남준이 연하장을 보내는 이는 1000명이 넘었다. 그야말로 국제적인 스타였다."
미술사학자 김홍희 #
"백남준이 한국에서 예술을 했다면 이렇게 세계적으로 유명한 거장이 되었을까? 나는 가끔 주변 이들에게 이야기한다. 아마도 힘들었을 거라고. 아쉽게도 한국 사회는 귤을 맛있는 귤로 키우지 못하고 탱자로 만드는 경향이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일찍 한국을 떠난 덕분에 한국인의 원형적 심성과 내면을 가장 잘 보존한 사람이 되었다고 나는 믿는다. 그리하여 그가 만든 작품 앞에서 우리는 잃어버린 기억과 한국의 문화적 유전자를 대면하게 되는 것이다."
이어령[6]

백남준이 높게 평가 받는 이유는 첨단기술매체와 인간이 어떻게 공존해야 할지 상상하고 이를 예술로 표현했다는 점에 있다. 당시 예술가들이 텔레비전 같은 새로운 매체에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고 이를 배척하거나 파괴하는 작업을 선보인데 반해, 백남준은 새로운 예술을 선보이기 위해 전자회로 관련 기술도 직접 공부하고 아베 슈야 같은 기술자와 협력할 정도로 적극적인 모습을 보였다. 심지어 작품 <etude 1>(1967-1968)을 만들기 위해 벨 연구소에서 포트란 언어로 코딩까지 시도했다고 한다.[7]

백남준은 저술이나 이론 작업도 꽤 많이 했다. '전자 고속도로'를 예견한다든지, '인포 아트'에 대해 논한다든지. 인터넷[8]스마트폰[9], 유튜브스트리밍[10]이 일상화된 지금 읽어보면 당연하고 뻔하다 싶은 내용을 써놓은 경우가 많지만, 인터넷은 커녕 모든 사람이 컴퓨터를 휴대하고 다닌다는 발상 자체가 공상 과학의 영역이었던 70년대에 그런 예견을 한 것으로, 전자 고속도로의 개념을 작품화한 '전자 초고속도로' 라는 작품을 1974년도에 만들었다.[11] 본문에 나오는 내용 중 일부를 74년도 이전에 예견했고, 93년도까지 현재 21세기의 모습을 예언했으며 전부 현실화되었다. 그 빌 게이츠도 자신의 저서에 비슷한 내용을 저술했지만, 이쪽은 95년도다. Apple의 존 스컬리가 지식 탐색기의 개념을 제안하기 시작한 것도 83년이었고 이 때도 아직 시기상조였다고 여겨졌다가 2000년대에 들어서야 제대로 구현되었다. 그의 통찰력이 대단하다고 할 수 밖에 없다.

많은 예술가는 새로운 매체가 등장할 때마다 민감한 반응을 보여왔는데 당시 TV는 '바보상자'로 취급하고 TV를 비롯한 미디어 컨텐츠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대부분이었으며 좋은 미래를 전망하지 않았다.[12] 이 때문에 사실상 비디오 아트 뿐 아니라 미디어 아트를 논할 때도 백남준을 빼놓고 말하는 것은 힘들 정도다. 실제로, 미디어 아트 관련 서적에 백남준은 적어도 한 구절씩은 꼭 들어가 있을 정도다.[13]

세계 유명 미술관에서 백남준의 작품을 소장품목에 넣은 것도 전혀 신기한 일이 아니다. 해외 예술 경향을 국내에 소개하거나, 휘트니 비엔날레의 경험을 살려서 광주비엔날레[14] 조직에 큰 도움을 주는 등 한국 미술 역사의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4. 국내 소장 미술관

2001년 백남준은 경기도와 함께 아트센터 건립을 논의해 왔다. 주제는 '백남준이 오래 사는 집'으로 백남준 타계 이후 2008년 10월 경기도박물관이 위치한 경기도 용인시 상갈동 일대에 백남준 아트센터라는 이름으로 개관하였다.[15] 주로 현대 미술을 위시한, 퍼포먼스, 개념, 설치 미술이 중점적으로 전시되며, 정기적으로 행위 예술 페스티벌이 열리곤 한다. 백남준 아트센터가 들어선 곳은 도립박물관과 한국민속촌, 도립국악당 등이 인접해 있어 용인시는 용인 G-뮤지엄파크(경기도박물관·백남준아트센터·경기도어린이박물관)를 구축해 문화·예술적 시너지효과를 내고 있다. 또한 용인 마북동에 있는 한국미술관은 그의 작품과 그의 아내의 작품이 자주 전시된다. 이래저래 백남준과 용인은 인연이 깊은 듯.

용인의 백남준 아트센터 외에는 다음의 기관에서 백남준 작품을 소장하고 있다. 다만 소장 중이더라도 모니터가 나가서 수리 중일 가능성을 배제하지는 말자. 실제로 백남준 작품은 CRT 모니터가 나가서 수장고에 끌려가거나 가림막으로 가려 놓거나 아예 TV를 꺼 버리는 경우가 있다.

5. 국외 소장 미술관

6. 어록

"문화도 경제처럼 수입보다는 수출이 필요해요. 나는 한국의 문화를 수출하기 위해서 세상을 떠도는 문화 상인입니다."
— 1984년에 "왜 한국 무대를 놔두고 외국 무대에서만 활동하는가?" 라는 질문에 답하며.#[19]
"인생은 싱거운 것입니다. 짭짤하고 재미있게 만들기 위해 (예술을) 하는 거지요."
"1982년에 만일 전쟁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나는 쉰 살이 될 것이다. 2032년에 내가 여전히 살아있다면 나는 백 살이 될 것이다. 3032년에 내가 여전히 살아있다면 나는 천 살이 될 것이다. 11932년에 내가 여전히 살아있다면 나는 십만 살이 될 것이다."
— 1964년, 동료 예술가 볼프 포스텔이 "정확한 자서전을 써달라"고 부탁하자 써낸 답글 중
''백남준을 비디오 아트의 창시자라고만 규정하기엔 부족함이 많다. 20세기에 이미 디지털로 연결된 세상을 내다본 선지자였으며 인공위성까지 동원할 만큼 엄청난 배포의 기획자였다. 마셜 매클루언 같은 문명비평가부터 데이비드 보위 같은 가수까지 전 세계 수많은 인사가 그의 친구였다. 백남준이 연하장을 보내는 이는 1000명이 넘었다. 그야말로 국제적인 스타였다.”
미술사학자 김홍희 #
"백남준이 한국에서 예술을 했다면 이렇게 세계적으로 유명한 거장이 되었을까? 나는 가끔 주변 이들에게 이야기한다. 아마도 힘들었을 거라고. 아쉽게도 한국 사회는 귤을 맛있는 귤로 키우지 못하고 탱자로 만드는 경향이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일찍 한국을 떠난 덕분에 한국인의 원형적 심성과 내면을 가장 잘 보존한 사람이 되었다고 나는 믿는다. 그리하여 그가 만든 작품 앞에서 우리는 잃어버린 기억과 한국의 문화적 유전자를 대면하게 되는 것이다."
백남준의 오랜 호형호제, 이어령
"그건 그렇고, 30세기에는 무슨 일이 벌어질까?"
"....선생님, 혹시 (곧 다가올) 21세기 말씀이십니까?"
"아니, 1000년 후 30세기."
1994년 미국 휘트니미술관 2인 전시를 함께한 설치미술가 강익중과 나눈 대화[20]
백남준은 어려울 때마다 정신적으로 의지한 내 마음 속의 부처였다.
오노 요코, 백남준의 장례식 추모연설 中
나는 세계적인 예술가가 아닙니다. 세기(世紀)적인 예술가입니다.
2002년 무렵 경기문화재단에 보낸 친필 편지

7. 여담



[1] 다만 1937년부터 1950년까지 어린 시절을 살았던 곳은 창신동 197번지에 위치한 99칸짜리 한옥집이었던, 속칭 '큰대문집' 이다. 지금은 백남준기념관으로 리모델링했고, 본인도 창신동을 평생 그리워했다.[2] 일제강점기는 5년제, 광복 후에는 6년제 중·고등학교 통합 학제였기 때문에 중학 과정 수료 후 영국령 홍콩으로 유학을 떠났다.[3] 부전공 음악사학[4] 사별했다. 날짜 불명[5] 퍼포먼스 예술은 그 이전 예술에서는 볼 수 없는 현대 예술의 대표적 예술 활동인데, 플렉서스 멤버들과 했던 수많은 퍼포먼스가 이제는 주류 예술이 되었다.[6] 백남준과 오랜 세월 호형호제하는 가까운 사이였다고 한다.[7] 백남준은 자신이 예술가가 되지 않았다면 물리학자(공학자)가 되었을 것이라고 했다.[8] 전자와 고속도로란 명칭 때문에 하이패스를 연상할 수 있지만, 정확히는 '전자초고속도로를 통해 풍부한 정보를 접할 가능성이 있음'을 언급했기에 인터넷 혁명을 예견했단 것이 맞을것이다.[9] 누구나 손에 작은 TV를 가지고 다니면서 전자고속도로를 사용할 것이라고 했다.[10] 영상산업의 종반엔 누구나 쉽게 영상을 찍어 공유하고 소통하는 시대가 올 것이라고 예견했다.[11] 휴대 및 이동이 가능한 컴퓨터 개념으로 만들어진 IBM 5100의 출시 연도가 1975년이었는데, 그렇게 가볍게 만든 컴퓨터의 무게는 우려 20kg이 넘었다.[12] 백남준은 기술 발달로 인한 미래 비관을 정면으로 반박했다. TV가 보편화 되기 시작하면서 바보상자뿐 아니라 빅브라더로 유명한 1984 등의 소설도 유명했는데 그는 이를 빗대어 ‘굿모닝, 미스터 오웰’이라는 작업을 1984년 1월 1일 방송한다. 세계 최초로 인공위성을 이용하여 전세계 동시 생중계를 한 것이다. 빅브라더는 현실적으로 모든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는 대중매체라 생각할 수 있는데 백남준은 오히려 전세계에 영향을 미칠 기반이 되는 인공위성을 이용해 TV가 사람을 바보로 만들기보다는 전세계인을 이어주는 매체이자 즐거움을 주는 것이라는 선언을 한 셈이다. 2020년 시점에서 TV를 넘어서 인터넷과 스마트폰이라는 매개체로 인해 미디어 매체가 일상 속에 녹아들고 단순 유흥을 넘어뉴스, 정치, 다큐 등등 다양하게 녹아들어 이제는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 된 것을 생각하면 그의 생각은 정확했던 것이다.[13] 백남준이 빠져 있다면, 그 서적의 전문성을 의심해봐도 무방하다.[14] MBC 인기가요에 나와서 광주비엔날레를 홍보하는 영상. 존댓말로 시작해 갑자기 반말을 하더니 애교 섞인 존댓말로 돈 좀 많이 써달라는 마무리가 압권이다. 백남준의 선구안 덕분에 광주 비엔날레는 세계에서 인지도와 명성이 무척 높은 비엔날레 중 하나로 자리잡았고, 해외 관람객도 많이 찾아오는 국제적인 행사가 되었다.[15] 서울을 포함하더라도, 이 정도 수준의 현대미술관은 찾기 어렵다. 난해하고, 많은 관람객을 유치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또한, 백남준의 세계적 네임밸류로 인해, 해외의 현대미술작가들은 이곳에서 전시를 많이 한다. 때로는, 해외에 엄청난 네임밸류를 가진 작가가 서울이 아닌, 용인 백남준 아트센터에서 전시를 열기도 한다.[16] 일반에는 텔레비전거북선으로 잘 알려져 있다.[17] 독일 뮌스터 조각예술제 출품.[18] 여의도역 쪽을 정문이라 가정. 사실 정문과 후문이 구분이 안간다.[19] 이 명언은 백남준이 한국전쟁으로 인해 부랴부랴 일본으로 출국하여 독일과 미국 등 세계 여러나라를 떠돌다가 34년만인 1984년에 다시 고국을 찾았을 때 어느 기자가 백남준에게 물어본 질문과 대답이다. 백남준의 이 명언이 2020년대를 비롯한 현재의 대한민국에서 한류의 영향력으로 전세계의 국가에서 한국 문화의 수출에 크게 기여하고 경제 분야에서도 큰 효과를 낸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제대로 미래를 예견했고 소름돋는 선견지명이 아닐 수 없다. 현재의 대한민국은 일제강점기나 전쟁 직후 보다는 경제력이 선진국으로 인정받을 정도로 눈부시게 많이 상승했지만 1980년대 당시에는 대한민국의 전반적인 국력이나 국제적인 위상이 지금보다 크게 부족했고, 문화 분야에서는 세계적으로 내세울 인물이 백남준이나 김연자 등, 극소수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로부터 약 40년이 지나 2020년대를 비롯한 현재의 대한민국은 한류의 영향력으로 세계 각국에서 대중문화 수출에 활발히 나서고, 경제분야에서도 매우 큰 효과를 낸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매우 탁월한 선견지명임을 잘 보여준다. 애초 컬러TV를 만들 의지가 없던 박정희 및 최규하로 인해 비디오 아트 재료로 쓰는 한국산 컬러TV가 들어가는 것은 그들이 죽거나 물러난 80년대를 넘긴 후였다. 그러니 해외에만 나돌 수 밖에 없는 것이고, 수출 외에는 답없는 나라가 주제 모르고 나댔다고 경제성장으로 극찬받을 것 하나도 없다고 박정희를 대놓고 디스한 셈이다.[20] 2인전이 끝나고 백남준과 강익중, 그리고 미국 월가(街)의 금융인들과 가진 식사자리에서 나온 대화였다. 분야를 가리지 않는 광적인 독서와 매일 두 시간씩 여덟 개의 주간지, 네 개의 월간지, 세 개의 일간지를 읽었던 백남준이었기에, 자연스럽게 월가에서 벌어지는 세세한 변화들을 꿰뚫어 본 그는 월가의 금융인들을 놀라게 했다. 그 직후에 나온 대화가 바로 문제의 30세기에 관한 질문. 후에 강익중은 30세기의 세상을 상상하던 백남준을 두고 낮에도 별을 보는 사람이라고 했다.[21] 클린턴의 스캔들을 비꼬아 사실 클린턴은 주위 사람의 바지를 벗기는 힘이 있기 때문에 백남준이 당한 것이라는 드립도 나왔었다.[22] 백남준은 1932년생, 백남봉은 1939년생으로 두 사람은 7살 차이밖에 안 난다.[23] 참고로 백남봉의 본명은 '박두식'으로 '백남봉'이라는 이름은 연예인 활동용 예명이었는데, 백남준이 국내에 알려지기 십여 년 전부터 이 예명을 사용했기 때문에 백남준의 명성을 노린 것과는 전혀 관계 없다.[24] 실제로 사카모토 류이치는 백남준에 대한 존경을 담은 헌정곡 'A tribute to NJP'라는 곡을 작곡해 자신의 앨범에 수록한 바 있다. 그가 작곡한 영화음악 등에 비교해보면 다소 전위적인 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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