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낙승 白樂承 | |||
<colbgcolor=#000><colcolor=#fff> 창씨명 | 시라카와 라쿠쇼 白川樂承 | ||
출생 | 1896년[1] 6월 25일 | ||
조선 한성부 동부 (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창신동) | |||
사망 | 1956년 10월 12일 (향년 60세) | ||
본관 | 수원 백씨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000><colcolor=#fff> 학력 | 메이지대학 전문부 (법률과 / 졸업) 니혼대학 (상과 / 학사) | |
부모 | 아버지 백윤수, 어머니 | ||
배우자 | 조종희 | ||
자녀 | 아들 백남일, 백남헌, 백남준 딸 2명 | ||
주요 경력 | 대창무역주식회사 이사 대창직물주식회사 이사 애국합명회사 사장 대창사 이사 삼화제역 사장 합명회사 백용상회 사장 해동직물 사장 태창직물공업주식회사 사장 흥아직포공장 창업주 선광수출공예주식회사 사장 조선도변주공주식회사 사장 강원조선철공주식회사 사장 태창공업주식회사 사장 조선기계제작소 관리인 태창직물회사 사장 태창산업주식회사 사장 태창방직주식회사 사장 | ||
비고 | 친일파 708인 명단 등재 친일반민족행위자 명단 등재 친일인명사전 등재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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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 1935년 금강산 여행 중에 찍은 가족사진.[2] |
일제강점기, 대한민국의 기업인, 친일반민족행위자. 본관은 수원(水原)[3].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의 부친으로 대한민국 최초의 재벌 태창그룹의 창업자다. 그의 집안은 600년 조선 상계의 중심인 종로 육의전을 운영했다.
일제강점기 말에 국방헌금을 내고 군수품을 조달하여 친일인명사전 경제 부문에 등재되었다.
2. 생애
1896년 6월 25일 한성부 동부(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창신동)에서 종로 시전 상인 백윤수(白潤洙)의 4남 중 막내 아들로 태어났다. 위로 백낙원(白樂元), 백낙중(白樂仲), 백낙삼(白樂三) 등의 형이 세 명 있었다.일본 메이지대학 전문부 법률과와 니혼대학 상과를 졸업하였으며, 귀국 후 1921년 부친이 설립한 대창무역(大昌貿易)의 이사로 취임한 것을 시작으로, 1925년 대창직물(大昌織物)[4] 이사에 취임하였고 1927년에는 합명회사 애국(愛國) 사장에 취임했다. 1928년에는 태창방직(泰昌紡織)의 이사에 취임했고 1933년에는 대창사(大昌社) 이사에 취임했다. 1935년에는 삼화제약(三和製藥)을 창립하고 사장에 취임하였다. 이어 1937년 합명회사 백용상회(白湧商會) 사장에 취임하였다. 1939년 맏형 백낙원이 사망하자 뒤를 이어 해동직물(海東織物) 사장에 취임했고, 같은 해 태창직물(泰昌織物) 사장에 취임했다.
1941년에는 태창방직의 사장에 취임했고, 1942년에는 대전흥아직포공장(大田興亞織布工場)을 설립하고 사장에 취임하고 같은 해 선광수출공예(鮮光輸出工藝) 사장에도 취임하였다. 또한 같은 해 전남도시제사(全南道是製絲)와 조선해수흥업(朝鮮海水興業) 등에 이사로 취임했고 유정칠공장(柳町染工場)과 대흥무역(大興貿易) 등에 감사로 취임했다.
한편, 그는 주로 태창직물의 면포를 만주로 수출하여 큰 이익을 취하였는데, 일제 말기 전시체제에서 중공업 분야로 진출하여 군수업체를 운영했다. 일본무연탄제철(日本無煙炭製鐵)주식회사를 통해 소형 용광로 제철사업을 수행하면서 1944년 군수생산책임제 기업으로 선정됐고 1945년 군수회사법에 따른 군수회사로 지정됐다. 이 외에도 1942년 강원조선철공(江原造船鐵工)주식회사 사장에 취임해 조선업에도 진출하였고, 박흥식의 조선비행기공업(朝鮮飛行機工業)주식회사 설립에도 참여하여 5천주 이상을 보유했으며, 조선기계제작소에는 관리인으로 경영에 참여했다.
이 시기 소위 애국기(愛國機)랍시고 일제에 비행기 1대를 헌납했으며#, 1938년 12월 24일 국방비 명목으로 1만엔을 경성부 동대문경찰서에 헌납하는 등# 소위 성심국방금품(誠心國防金品)을 1만엔 이상을 헌납한 전력이 있다.# 오랜 시간이 지난 후, 백남준은 방송을 통해 자신의 집안이 친일파였음을 공개적으로 인정하면서 '해방이 되었던 날, 모든 사람들이 기뻐하며 거리에서 환호를 지를 때 우리 집은 문을 걸어 잠그고 애국기(愛國機)의 기념 엽서를 불태웠다.'고 고백했다.
8.15 광복 후에는 태창공업(泰昌工業), 태창산업(泰昌産業), 태창직물, 태창방직, 해전직물(海田織物), 대전흥아직포 등을 경영했으며, 조선기계 관리인, 조선상공회의소 상임위원 등을 지냈다. 또 1948년 대한문화선전사(大韓文化宣傳社) 사장에 취임하기도 했다.
한편, 한국민주당에 가담하였다가 1947년 근로인민당이 창당되자 여운형을 찾아가 근로인민당 본부로 사용해달라며 구 천향원(天香園) 요릿집 건물을 헌납하기도 하며 정치권과 연계를 맺으려는 시도를 했다.#
1949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특별경찰대에 체포되어 서울종로경찰서에 수감되었으나 불기소처분을 받고 석방되었다.
이승만에게 정치자금을 기부하여 쌓은 친분을 이용해 고려방직공사를 불하받고 대출과 외화 조달에 특혜를 받았으며, 자유당 정권의 비호 아래 여러 경제 관련 스캔들에 연루되었다.
순종의 비인 순정효황후 윤씨가 6.25 당시 피난하였다가 1953년 휴전 이후 서울로 돌아왔을 적에 이승만은 창덕궁이 국유재산이라는 이유로 순정효황후의 낙선재 거주를 불허하였다.[5] 이에 순정효황후는 정릉에 있던 인수재(仁修齋)로 거처를 옮겼는데, 당시 경향신문 기사에 따르면 이 건물이 백낙승의 집이었다고 한다.
1956년 10월 12일 사망했다.
3. 기타
백남준 선생이 백낙승의 아들이다. 어린 시절 부친의 자금력 덕으로 유복하게 자랐기 때문에[6] 그 시절에는 귀했던 여러 문물들을 접하고 자라서 예술세계의 토대가 되었다고 회고한다. 여담으로 홍콩으로의 출국 당시 백남준의 여권번호는 '7번'이라고 하는데, 당시 여권번호는 발행 순서로 기재되었다고 한다. 해방 직후의 어수선한 정국으로 해외 출국이 쉽지 않았던 시기 백낙승의 금권력을 간접적으로 확인해 볼 수 있는 부분이다.5.16 군사정변 이후 박정희는 민심안정 대책으로 여러 가지 조치들을 시행했는데, 태창방직도 부정축재 대상자 명목으로 국가에 몰수되었다.[7] 백낙승 일가의 금권력으로도 무마할 수 없었고 결국 이들 백낙승의 후손들은 일본으로 망명하여 일본으로 귀화하였다.
4. 미디어
드라마 야인시대에서 배우 윤갑수가 연기했다. 71~72회 출현한다.김두한이 친일파들로부터 애국자금을 걷을 때 등장한다(71회). 김두한 일행이 한밤중에 자택에 침입하여 성금을 낼 것을 요구하자, 집에 현금이 없으니 날이 밝고 사무실에 오면 수표를 끊어주겠다고 한다.
72회에서 다른 친일파들과 함께 수도경찰청으로 와서 강도를 당했다며 김두한을 처벌하라고 요구한다. 허나 김두한이 "우리 남쪽에도 곧 반민족특별법이 생길 거야. 그렇게 되면 당신들 모두 법정에 서게 된다, 이 말이야!"라고 일갈하자 다른 친일파들과 함께 애국성금을 낸 거라며 태세를 전환하고 귀가한다.
[1] 대한연감 4288년판에는 1906년생으로 오기되어 있다.[2] 앞줄 맨 왼쪽에 있는 아이가 백남준, 그 뒤에 있는 자가 바로 백낙승이다.[3] 27세 낙(樂) 항렬.[4] 1936년경 해동직물(海東織物)로 상호를 변경했다.[5] 실제로는 잘 알려져 있다시피 이승만이 구 왕족을 싫어해서였다.[6] 어느 정도였냐면 해방 직후 서울에 딱 2대밖에 없던 캐딜락 중 1대가 백낙승의 소유였으며, 심지어 6.25 난리통에도 파인애플을 먹고 다녔을 정도.[7] 그 후 태창방직은 한국산업은행의 관리를 받다가 이듬해 서갑호에 의해 인수되어 판본방직을 출범시켰고 이는 현재의 방림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