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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관문화훈장 수훈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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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관문화훈장 수훈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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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 대국수 조남철 大國手 趙南哲 | |
출생 | 1923년 11월 30일 |
전라북도 부안군 | |
사망 | 2006년 7월 2일 (향년 82세) |
서울특별시 | |
국적 | [[대한민국| ]][[틀:국기| ]][[틀:국기| ]] |
입단 | 1941년 |
마지막 대국 | 1999년 |
단급 | 九단 |
칭호 | 대국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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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바둑기사. 호는 송원(松垣).대한민국 바둑계의 개척자이자 최고 원로로 평가받는다. 조남철-김인-조훈현-이창호-이세돌-박정환-신진서로 이어지는 대한민국 바둑계를 대표하는 기사 계보의 시초이기도 했다.[1] 그를 대표하는 별칭은 '조국수'.[2] 50년대부터 60년대 중반까지 확고한 국내 바둑계의 정점을 차지하고 있었다 보니 아예 국수 칭호 자체가 조남철을 의미하는 것이 된 것.[3]
2. 주요 약력
1948년 제1회 전국위기선수권 우승 (이후 1955년 제5회까지 5연패)1956년 제1기 국수 제1위전 우승 (이후 1964년 제9기까지 9연패)
1958년 제1기 왕좌전 우승
1959년 제1기 5강전 우승 (이후 1962년 제4기까지 4연패)
1960년 제1기 최고위전 우승 (이후 1967년 제7기까지 7연패)
1968년 제1기 명인전 우승
1969년 제3기 왕좌전 우승
1971년 제3기 명인전 우승
1973년 제1기 최강자전 우승
1983년 九단 승단 (특별승단)
1984년 한국기원 명예이사장
1989년 은관문화훈장[4]
1994년 제18기 국기전 최고령 본선진출(당시 나이 71세)
1997년 명지대학교 바둑지도학 교수
2000년 6월 1일 국가유공자 지정[5]
2006년 7월 2일 사망
2006년 7월 4일 금관문화훈장 추서
2006년 사후 대국수(大國手) 칭호 헌정
2019년 일본기원 제16회 바둑 명예의 전당(囲碁殿堂)에 헌액
3. 생애
전라북도 부안군 줄포면에서 1923년 11월 30일 태어나 1937년 교동보통공립학교를 졸업했다.[6] 생년을 보면 알수있듯 일제강점기, 8.15 광복, 한국 전쟁이라는 한국 현대사의 질곡을 모두 겪었으며 이러한 사회적 급변에서도 바둑 외길을 걸어왔다. 한국전쟁 때는 피난보따리에 생필품이 아닌 기보를 챙겨 다녔다는 일화도 유명하다. 조남철이 없었다면 한국 바둑이 지금과 같은 위상을 갖추긴 매우 힘들었을 것이다.조남철이 일본에서 유학하던 시절. 조남철(오른쪽 여성 대국자 뒤편의 소년)이 다른 원생들과 대국을 지켜보고 있다.
일본 기타니 미노루 九단의 문하생 출신으로, 해방 직후인 1945년 11월 5일 조남철은 한성기원(現 한국기원)을 설립하는데 주도적으로 참여한다. 그리고 조남철은 당시까지 한국에서 유행하던 순장바둑[7] 대신 세계 바둑 흐름에 맞춰가자는 이유로 일본식 규칙을 강력하게 주장해서 현재에 이르게 되었다.[8] 사실 이렇게 보면 이후 70년대까지 많은 프로 바둑 기사들이 일본으로 유학가는게 어찌보면 당연한 수순이었을지도 모른다.
1950년대 초대 국수위에 올라 국수위를 9연패하는 등 한국바둑의 초창기에는 그야말로 적수가 없던 최강자였다. 허나 60년대 중반 일본 유학을 다녀온 김인이 등장하며 최강자에서 물러났으며, 1972년 명인전 결승에선 당시 신인이던 서봉수 2단에게도 패하며 '서봉수가 3단만 되었어도...'라고 말하기도 했다.
이후 프로 현역에선 물러나 바둑 공부를 더 했던 것으로 보이며, 9단도 1980년대 들어 땄다. 국내 세번째 九단. 참고로 국내 최초의 九단은 조남철보다 한참 나이가 어린 조훈현 九단이다.[9] 조훈현이 최초의 九단이 된 것은, 조남철 九단이 八단으로 승단한 후(대략 1960년대 초중반) 더이상 승단 대회에 출전하지 않고 바둑 보급에 힘썼기 때문이다.[10] 그렇지 않고서야 당대 최강자가 八단에서 20여 년 동안 머무를 턱이 없었다.
조훈현 九단이 승단대회를 통해 九단 승단이 확실시되자 한국기원 일각에서는 이제라도 조남철 국수에게 특별승단을 통해 九단 승단을 했어야 한다는 주장 또한 제기되었지만 이행되진 않았다. 1982년 조훈현이 九단에 오르고, 1983년 김인이 두번째로 九단에 오른 뒤, 그제서야 조남철도 특별 승단 형식으로 九단에 올랐다.[11]
2006년 7월 2일 노환으로 임종했다. 향년 82세. 사망 이후 정부로부터 금관문화훈장, 한국기원/동아일보로부터 대국수(大國手) 칭호를 받았다. 대한민국의 유일무이한 대국수인 셈.
4. 여담
생전 많은 바둑 저서를 남겼는데, 국내 최초 바둑 입문서인 위기개론, 바둑첫걸음, 바둑에 살다 등 26권을 비롯하여 행마의 기초, 행마의 급소 등 이론서를 내놓았다. 일본어 일색이던 바둑용어를 단수, 빵때림, 끝내기 등 한국어로 바꾼 것으로도 나름 유명하다. 덕분에 나중에는 '걸어다니는 바둑법전'이라는 별명이 붙었다고 한다.조치훈 九단과 같은 집안이며[12], 조남철은 조치훈의 숙부다. 참고로 이 집안은 프로기사를 여럿 배출했는데 조상연 七단, 최규병 九단, 이성재 九단, 최영찬 二단 등이 대표적이다. 기사
바둑에 관한 여러가지 일화가 있다. 예를 들어 어느날 어떤 기자가 "선생님, 바둑을 잘 두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라고 물었더니, "바둑 잘 두는 방법? 그런 거 있으면 나 좀 가르쳐 주게"라고 되물었다고 한다. 또 전성기 시절에는 한참 수읽기를 하다가 "갈!"이라고 외치며 바둑돌을 바둑판에 소위 두드렸는데 심심치 않게 바둑돌이 부서졌다고 한다.
2018년, 아들 말에 의하면 생전 형식적인걸 아주 싫어했다고 한다.
어린 시절 조훈현과 만나 대국을 한 적도 있는데, 한국기원이 아직 생기기 전 명동에서 송원기원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조훈현과 그의 아버지인 조규상 씨가 방문했다. 이에 목포에서 온 어린아이와 3시간 동안 바둑을 두어 이겼더니, 꼬마가 우는 것을 보고 다시 한번 두었다고 한다. 별일 아닌 것 같지만, 당대 이미 한국 바둑계의 거성이던 양반이 어린이와 바둑을 3시간이나 둔 것도 모자라 한 번 더 두는건 어찌보면 놀라운 일이다. 이렇게 두 판을 두고 조훈현의 기력을 강한 8급으로 인정해 주었다고. 참고로 상대전적은 조남철 九단 기준으로 4승 15패이다.
바둑 애호가로 중정부장도 지낸 이후락은 60년대 당시 조남철을 종종 불러 지도바둑을 두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이후락이 대국료를 주지 않기 시작했다. 이에 조남철은 어느날 “낼 것은 내고 바둑을 배우라”고 따끔한 일침을 가했다. 조남철에 따르면 “무소불위의 권력자였던 그의 손이 부들부들 떨리는 것을 보고 속으로 ‘조금 심했나’ 싶었지만 어차피 엎지러진 물이라 그냥 있었다”고 한다. 이후 이후락은 관철동 한국기원 회관[13] 건설을 물밑에서 도와주는 것으로 일종의 대국료를 대신하였다.
아마추어 바둑계에서 대국이 밀릴 때 자주 쓴 조남철이 와도 안돼라는 유행어의 장본인이기도 했다. 상황이 다 끝나서 도저히 역전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자조적으로 던지는 말로 쓰던 표현이었다. 이것이 80년대 이후부턴 '조훈현이 와도 안 돼', '이창호가 와도 안 돼', '이세돌이 와도 안 돼', '알파고가 와도 안 돼'로 발전. 쉽게 말해 바둑의 신이 와도 안 된다는 관용적 표현이었다.
5. 주요 기사들과의 상대 전적
김인 九단 38:69 1무서봉수 九단 3:16
유창혁 九단 0:3
윤기현 九단 21:32 2무
조훈현 九단 4:15
하찬석 九단 6:12
[1] 조남철과 김인은 완벽한 독주 체제였고, 조훈현에게는 서봉수라는 반발짝 뒤에서 쫓아오는 경쟁자가 있었다. 이창호 역시 유창혁이라는 경쟁자가 있었고 전성기가 지났음에도 노익장을 불태우는 스승 조훈현은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이세돌은 1인자라 부르기에 부족함은 없었지만 최철한, 박영훈 등을 상대로 압도적 우위를 점하지는 못했다. 이는 달리 보면 한국바둑의 저변이 활성화되고 발전하면서 선수층 역시도 두터워졌다는 것을 보여주는 역사다.[2] 이후 조국수 칭호는 세대교체를 통해 후배 바둑기사인 조훈현이 자연스레 물려받게 되는데, 조남철 국수와 조훈현 국수를 각각 조국수라고 부를 때의 한국어 발음은 같지만, 조남철 국수는 趙국수, 조훈현 국수는 曺국수로 한자는 다르다.[3] 좀 더 정확하게는 당시 국수란 타이틀은 개나소나 여러명이 쓰고 있었기 때문에, 당시엔 국수전을 국수 제1위전이라고 불렀다고 한다.[4] 당시 조훈현 九단이 예상을 뒤엎고 1회 응씨배에서 우승하면서 대대적인 바둑열풍이 일어나자 정부에서 조훈현 九단에게 은관문화훈장을 주려고 했는데 조훈현 九단이 대한민국 바둑의 개척자인 조남철 九단이 먼저 받아야 한다는 의견을 강하게 어필했고 결국 두 사람이 같이 받게 되었다.[5] 6.25 전쟁 참전 중 부상.[6] 고향의 전북 줄포국민학교를 다녔다는 기사도 있다.[7] 17수까지 고정된 포석을 두고 시작하는 전통 바둑. 현재는 초반 포석 변화의 다양성이 적다는 단점 등의 이유로 사장되었다. 다만 이게 언제부터 한반도에서 유행했는지는 삼국시대부터 조선 말까지 간격이 넓고 학자마다 의견도 갈린다. 참고로 조남철은 순장바둑에서도 뛰어난 실력자였다고 한다.[8] 이것과 관련해 한 일화가 있다. 조남철은 1954년 대만에서 열리는 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준비를 했는데, 당시엔 달러 환전을 하기 위해선 정부 허가가 필요했다. 이에 당시 자유당 서열 3위였던 장경근의 백으로 이승만 대통령 앞에서 조남철과 김봉선이 경무대 시범 대국을 했는데, 첫판을 현대식 바둑으로 두자 이승만이 "자네들은 왜 왜놈 바둑을 두나"하고 질책을 했다고 한다. 이에 조남철이 해명을 한 뒤 2국부터는 순장 바둑을 뒀다고 한다.[9] 90년대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우리나라의 승단은 과거 한중일 3국 중 가장 어렵다고 정평이 났었고 단의 권위 또한 가장 높았다. 일반대국이 아닌 승단대국에서는 프로끼리 단에 따라서 돌을 접어두고 대국을 했고 신문기전의 1차예선은 저단자들끼리 두고 고단자들은 2차예선부터 출전하였다.[10] 다른 프로기사들과 단수 차이가 너무 많이 난 것에 부담을 느낀 것도 있다.[11] 참고로, 이 두 조국수 이전에 일종의 명예 九단을 받은 인물이 있긴 했는데, 바로 대통령 이승만. 재임 시절 그에 대한 아첨(...)으로 준 일종의 흑역사다. 1950년대 중반 대만과의 교류전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이승만이 배려해 준 적이 있는데, 그에 대한 보답 차원에서 나온 일이다. 자유당 3인자였던 장경근이 바둑광이라 한국기원 이사장을 지내기도 했는데 이 연줄로 이루어진 일.[12] 조치훈은 부산에서 태어났지만, 집안은 전북쪽이다.[13] 지금은 이전해서 상관은 없고 건물 자체도 리모델링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