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모에 미러 (일반/밝은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09-23 14:14:39

조남철


파일:나무위키+유도.png  
은(는) 여기로 연결됩니다.
동명의 정치인에 대한 내용은 조남철(정치인) 문서
번 문단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파일:금관문화훈장 약장.png
금관문화훈장 수훈자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5px -13px"
1974
조택원
무용가
1975
안수길
소설가
1976
홍종인
언론인
1977
최석채
언론인
1978
방정환
독립운동가, 아동문학가
1979
고유섭
미술사학자
1980
전봉초
음악가
1981
김소월
시인
1982
이효석
소설가
1982
조지훈
시인
1983
홍승연
언론인
1983
천관우
언론인
1983
이육사
독립운동가, 시인
1984
이원수
아동문학가
1984
장발
미술가
1985
강소천
아동문학가
1986
홍진기
언론인
1987
김남중
언론인
1990
모윤숙
시인
1990
주시경
독립운동가, 국어학자
1994
김상만
언론인
1994
나운영
음악가
1994
이숭녕
국어학자
1995
공병우
한글연구가
1995
김소희
국악인
1995
문신
미술가
1995
정명훈
음악가
1995
이대원
미술가
1995
류경채
미술가
1996
송석하
민속학자
1996
신용호
기업인
1996
조병화
시인
1997
신순남
미술가
1997
홍두표
언론인
1997
최창봉
언론인
1997
정진숙
출판인
1997
고병익
역사학자
1998
방우영
언론인
1998
김연준
작곡가
1999
방일영
언론인
1999
방종현
국어학자
1999
김세형
음악가
1999
이유태
미술가
1999
김흥수
미술가
1999
장준하
독립운동가, 언론인
1999
송건호
언론인
2000
황순원
소설가
2000
백남준
미술가
2000
서정주
시인
2001
김기창
미술가
2001
김천흥
국악인
2001
장우성
미술가
2001
김수영
시인
2001
최영희
역사학자
2002
임권택
영화감독
2002
오지호
미술가
2003
박동진
국악인
2003
윤석중
아동문학가
2004
구상
시인
2004
이혜구
음악사학자
2005
박성용
기업인
2005
정세영
기업인
2006
신상옥
영화감독
2006
김동원
연극인
2006
차범석
극작가
2006
조남철
바둑기사
2007
송도균
언론인
2007
노성대
언론인
2007
송범
무용가
2008
박경리
소설가
2008
이청준
소설가
2008
김영랑
시인
2009
유현목
영화감독
2010
전숙희
수필가
2010
앙드레 김
패션 디자이너
2010
김영환
군인, 6.25전쟁기 해인사 폭격명령 거부
2011
박완서
소설가
2012
지관
해인사 주지
2012
이건희
기업인
2012
허동수
기업인
2012
김형규
국어학자
2013
이우환
미술가
2014
호머 헐버트
선교사, 한글 체계화 공헌 및 한글 보급·한글 홍보 공로
2014
전형필
문화재수집가
2014
이은관
국악인
2016
백성희
연극인
2016
임영웅
연극인
2017
박맹호
출판인
2018
최인훈
소설가
2018
이영희
한복 디자이너
2018
정지용
시인
2018
황병기
국악인
2020
서세옥
미술가
2019
김성환
시사만화가, 대표작《고바우 영감
2020
손창근
미술품소장가
2021
윤여정
영화배우
2021
이어령
문화부장관, 작가, 정치인 겸 문학평론가
2021
박서보
화가
2022
송기숙
작가
2022
송해
희극인
2022
김우창
문학평론가
2022
김지하
시인
2022
이정재
배우
2022
황동혁
감독
2023
이미자
대중음악인
2023
조수미
성악가
2023
이미경
기업인
2024
이문열
소설가
}}}}}}}}} ||

파일:은관문화훈장 약장.png
은관문화훈장 수훈자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5px -13px"
1974
박화성
소설가
1978
김환기
화가
1978
나운규
영화감독
1978
이중섭
화가
1978
현진건
소설가
1980
박수근
화가
1980
조치훈
바둑기사
1984
박두진
시인
1988
김광균
시인
1988
김중업
건축가
1988
이봉상
화가
1989
조남철
바둑기사
1989
조훈현
바둑기사
1992
김영주
화가
1992
김춘수
시인
1992
장리석
화가
1992
전광용
소설가
1992
한갑수
교수
1995
박노수
화가
1995
전왕영
시인
1996
이창호
바둑기사
1998
김남조
시인
1999
박홍근
아동문학가
2001
권영우
화가
2001
박용철
시인
2001
박태현
작곡가
2001
신경림
시인
2001
유종호
문학평론가
2001
이지관
문화연구가
2001
최일남
소설가
2001
홍연택
지휘자
2002
고은태[1]
시인
2002
김종하
화가
2002
나춘호
출판가
2002
민경갑
화가
2002
박보희
한국문화재단 총재
2002
이수홍
한국문화협회 이사장
2002
이오덕
아동문학가
2002
이형기
시인
2002
이호철
소설가
2002
정수봉
교육인
2003
박봉석
사서, 국립도서관학교 교장
2003
신동엽
시인
2003
이종상
화가
2003
천상병
시인
2003
황병기
국악인
2004
김동혁[2]
연극인
2004
김사엽
국문학자
2004
김서봉
화가
2004
김충현
서예가
2004
김희조
지휘자
2004
박연희
소설가
2004
엄대섭
도서관연구회장
2004
임동권
민속학자
2005
고우영
만화가
2005
김성구[3]
불교인
2005
김충실[4]
무용가
2005
전숙희
수필가
2005
이문열
소설가
2006
이규태
언론인
2006
임영방
국립현대미술관장
2006
한명희
국립국악원장
2006
홍기삼
교육인
2007
김주영
소설가
2007
이강덕
종묘제례악 명예보유자
2007
안병희
국어학자
2008
박광진
예술인
2008
오세영
시인
2008
최종태
조각가
2008
한백유[5]
화가
2009
이미자
가수
2010
김희진
무형문화재 매듭장
2010
레프 콘체비치
러시아인 한국학자, 훈민정음 해례본 러시아어 번역 공로
2010
백건우
피아니스트
2010
백성희
연극배우
2010
장민호
연극배우
2010
전혁림
화가
2011
신영균
영화배우
2011
이수만
가수, 연예기획사 사장
2011
하춘화
가수
2011
이근배
시인
2011
해의만
국악인
2012
최영필[6]
가수
2012
김기덕
영화감독
2012
김순옥[7]
드라마 작가
2012
손숙
연극배우
2012
윤일봉
배우
2013
구봉서
희극인
2013
안성기
영화배우
2013
조용필
가수
2013
최인호
소설가
2013
김혜자[8]
가수
2014
김승옥
소설가
2014
박정란
드라마 작가
2014
송해
희극인
2014
최영한[9]
배우
2015
이천백[10]
희극인
2015
이덕화
배우
2015
이성희
음반제작자
2016
김윤식
문학평론가
2016
백영수
화가
2016
홍경일[11]
배우
2016
김명자[12]
배우
2016
김덕용[13]
희극인
2017
김남진[14]
가수
2017
박근형
배우
2017
윤여정
배우
2018
이순재
배우
2018
김민기
가수
2018
조동진
가수
2019
김혜자
배우
2019
양희은
가수
2019
봉준호
영화감독
2020
변인철[15]
배우
2020
고두심
배우
2021
김병기
화가
2021
이장희
가수
2021
이춘연†
영화인
2021
안숙선
국악인
2021
한석홍†
사진 작가
2022
강수연
배우
2022
박찬욱
영화감독
2023
원종철
삼원인쇄 대표
2024
신순기[16]
배우
2024
강부자
배우

[1] 필명 고은[2] 예명 김동원[3] 법명 월운[4] 예명 김백봉[5] 예명 한묵[6] 예명 금사향[7] 필명 김수현[8] 예명 패티김[9] 예명 최불암[10] 예명 남성남[11] 예명 남궁원[12] 예명 김지미[13] 예명 남보원[14] 예명 남진[15] 예명 변희봉[16] 예명 신구
}}}}}}}}} ||

<colbgcolor=#000> 대국수 조남철
大國手 趙南哲
파일:external/file.tygem.com/124947K-7.jpg
출생 1923년 11월 30일
전라북도 부안군
사망 2006년 7월 2일 (향년 82세)
서울특별시
국적
[[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
입단 1941년
마지막 대국 1999년
단급 九단
칭호 대국수
1. 개요2. 주요 약력3. 생애4. 여담5. 주요 기사들과의 상대 전적

[clearfix]

1. 개요

대한민국바둑기사. 호는 송원(松垣).

대한민국 바둑계의 개척자이자 최고 원로로 평가받는다. 조남철-김인-조훈현-이창호-이세돌-박정환-신진서로 이어지는 대한민국 바둑계를 대표하는 기사 계보의 시초이기도 했다.[1] 그를 대표하는 별칭은 '조국수'.[2] 50년대부터 60년대 중반까지 확고한 국내 바둑계의 정점을 차지하고 있었다 보니 아예 국수 칭호 자체가 조남철을 의미하는 것이 된 것.[3]

2. 주요 약력

1948년 제1회 전국위기선수권 우승 (이후 1955년 제5회까지 5연패)
1956년 제1기 국수 제1위전 우승 (이후 1964년 제9기까지 9연패)
1958년 제1기 왕좌전 우승
1959년 제1기 5강전 우승 (이후 1962년 제4기까지 4연패)
1960년 제1기 최고위전 우승 (이후 1967년 제7기까지 7연패)
1968년 제1기 명인전 우승
1969년 제3기 왕좌전 우승
1971년 제3기 명인전 우승
1973년 제1기 최강자전 우승
1983년 九단 승단 (특별승단)
1984년 한국기원 명예이사장
1989년 은관문화훈장[4]
1994년 제18기 국기전 최고령 본선진출(당시 나이 71세)
1997년 명지대학교 바둑지도학 교수
2000년 6월 1일 국가유공자 지정[5]
2006년 7월 2일 사망
2006년 7월 4일 금관문화훈장 추서
2006년 사후 대국수(大國手) 칭호 헌정
2019년 일본기원 제16회 바둑 명예의 전당(囲碁殿堂)에 헌액

3. 생애

전라북도 부안군 줄포면에서 1923년 11월 30일 태어나 1937년 교동보통공립학교를 졸업했다.[6] 생년을 보면 알수있듯 일제강점기, 8.15 광복, 한국 전쟁이라는 한국 현대사의 질곡을 모두 겪었으며 이러한 사회적 급변에서도 바둑 외길을 걸어왔다. 한국전쟁 때는 피난보따리에 생필품이 아닌 기보를 챙겨 다녔다는 일화도 유명하다. 조남철이 없었다면 한국 바둑이 지금과 같은 위상을 갖추긴 매우 힘들었을 것이다.

파일:external/www.nongmin.com/20120318172515.jpg
조남철이 일본에서 유학하던 시절. 조남철(오른쪽 여성 대국자 뒤편의 소년)이 다른 원생들과 대국을 지켜보고 있다.

일본 기타니 미노루 九단의 문하생 출신으로, 해방 직후인 1945년 11월 5일 조남철은 한성기원(現 한국기원)을 설립하는데 주도적으로 참여한다. 그리고 조남철은 당시까지 한국에서 유행하던 순장바둑[7] 대신 세계 바둑 흐름에 맞춰가자는 이유로 일본식 규칙을 강력하게 주장해서 현재에 이르게 되었다.[8] 사실 이렇게 보면 이후 70년대까지 많은 프로 바둑 기사들이 일본으로 유학가는게 어찌보면 당연한 수순이었을지도 모른다.

1950년대 초대 국수위에 올라 국수위를 9연패하는 등 한국바둑의 초창기에는 그야말로 적수가 없던 최강자였다. 허나 60년대 중반 일본 유학을 다녀온 김인이 등장하며 최강자에서 물러났으며, 1972년 명인전 결승에선 당시 신인이던 서봉수 2단에게도 패하며 '서봉수가 3단만 되었어도...'라고 말하기도 했다.

이후 프로 현역에선 물러나 바둑 공부를 더 했던 것으로 보이며, 9단도 1980년대 들어 땄다. 국내 세번째 九단. 참고로 국내 최초의 九단은 조남철보다 한참 나이가 어린 조훈현 九단이다.[9] 조훈현이 최초의 九단이 된 것은, 조남철 九단이 八단으로 승단한 후(대략 1960년대 초중반) 더이상 승단 대회에 출전하지 않고 바둑 보급에 힘썼기 때문이다.[10] 그렇지 않고서야 당대 최강자가 八단에서 20여 년 동안 머무를 턱이 없었다.

조훈현 九단이 승단대회를 통해 九단 승단이 확실시되자 한국기원 일각에서는 이제라도 조남철 국수에게 특별승단을 통해 九단 승단을 했어야 한다는 주장 또한 제기되었지만 이행되진 않았다. 1982년 조훈현이 九단에 오르고, 1983년 김인이 두번째로 九단에 오른 뒤, 그제서야 조남철도 특별 승단 형식으로 九단에 올랐다.[11]

2006년 7월 2일 노환으로 임종했다. 향년 82세. 사망 이후 정부로부터 금관문화훈장, 한국기원/동아일보로부터 대국수(大國手) 칭호를 받았다. 대한민국의 유일무이한 대국수인 셈.

4. 여담

생전 많은 바둑 저서를 남겼는데, 국내 최초 바둑 입문서인 위기개론, 바둑첫걸음, 바둑에 살다 등 26권을 비롯하여 행마의 기초, 행마의 급소 등 이론서를 내놓았다. 일본어 일색이던 바둑용어를 단수, 빵때림, 끝내기 등 한국어로 바꾼 것으로도 나름 유명하다. 덕분에 나중에는 '걸어다니는 바둑법전'이라는 별명이 붙었다고 한다.

조치훈 九단과 같은 집안이며[12], 조남철은 조치훈의 숙부다. 참고로 이 집안은 프로기사를 여럿 배출했는데 조상연 七단, 최규병 九단, 이성재 九단, 최영찬 二단 등이 대표적이다. 기사

바둑에 관한 여러가지 일화가 있다. 예를 들어 어느날 어떤 기자가 "선생님, 바둑을 잘 두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라고 물었더니, "바둑 잘 두는 방법? 그런 거 있으면 나 좀 가르쳐 주게"라고 되물었다고 한다. 또 전성기 시절에는 한참 수읽기를 하다가 "!"이라고 외치며 바둑돌을 바둑판에 소위 두드렸는데 심심치 않게 바둑돌이 부서졌다고 한다.

2018년, 아들 말에 의하면 생전 형식적인걸 아주 싫어했다고 한다.

어린 시절 조훈현과 만나 대국을 한 적도 있는데, 한국기원이 아직 생기기 전 명동에서 송원기원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조훈현과 그의 아버지인 조규상 씨가 방문했다. 이에 목포에서 온 어린아이와 3시간 동안 바둑을 두어 이겼더니, 꼬마가 우는 것을 보고 다시 한번 두었다고 한다. 별일 아닌 것 같지만, 당대 이미 한국 바둑계의 거성이던 양반이 어린이와 바둑을 3시간이나 둔 것도 모자라 한 번 더 두는건 어찌보면 놀라운 일이다. 이렇게 두 판을 두고 조훈현의 기력을 강한 8급으로 인정해 주었다고. 참고로 상대전적은 조남철 九단 기준으로 4승 15패이다.

바둑 애호가로 중정부장도 지낸 이후락은 60년대 당시 조남철을 종종 불러 지도바둑을 두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이후락이 대국료를 주지 않기 시작했다. 이에 조남철은 어느날 “낼 것은 내고 바둑을 배우라”고 따끔한 일침을 가했다. 조남철에 따르면 “무소불위의 권력자였던 그의 손이 부들부들 떨리는 것을 보고 속으로 ‘조금 심했나’ 싶었지만 어차피 엎지러진 물이라 그냥 있었다”고 한다. 이후 이후락은 관철동 한국기원 회관[13] 건설을 물밑에서 도와주는 것으로 일종의 대국료를 대신하였다.

아마추어 바둑계에서 대국이 밀릴 때 자주 쓴 조남철이 와도 안돼라는 유행어의 장본인이기도 했다. 상황이 다 끝나서 도저히 역전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자조적으로 던지는 말로 쓰던 표현이었다. 이것이 80년대 이후부턴 '조훈현이 와도 안 돼', '이창호가 와도 안 돼', '이세돌이 와도 안 돼', '알파고가 와도 안 돼'로 발전. 쉽게 말해 바둑의 신이 와도 안 된다는 관용적 표현이었다.

5. 주요 기사들과의 상대 전적

김인 九단 38:69 1무
서봉수 九단 3:16
유창혁 九단 0:3
윤기현 九단 21:32 2무
조훈현 九단 4:15
하찬석 九단 6:12


[1] 조남철과 김인은 완벽한 독주 체제였고, 조훈현에게는 서봉수라는 반발짝 뒤에서 쫓아오는 경쟁자가 있었다. 이창호 역시 유창혁이라는 경쟁자가 있었고 전성기가 지났음에도 노익장을 불태우는 스승 조훈현은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이세돌은 1인자라 부르기에 부족함은 없었지만 최철한, 박영훈 등을 상대로 압도적 우위를 점하지는 못했다. 이는 달리 보면 한국바둑의 저변이 활성화되고 발전하면서 선수층 역시도 두터워졌다는 것을 보여주는 역사다.[2] 이후 조국수 칭호는 세대교체를 통해 후배 바둑기사인 조훈현이 자연스레 물려받게 되는데, 조남철 국수와 조훈현 국수를 각각 조국수라고 부를 때의 한국어 발음은 같지만, 조남철 국수는 趙국수, 조훈현 국수는 曺국수로 한자는 다르다.[3] 좀 더 정확하게는 당시 국수란 타이틀은 개나소나 여러명이 쓰고 있었기 때문에, 당시엔 국수전을 국수 제1위전이라고 불렀다고 한다.[4] 당시 조훈현 九단이 예상을 뒤엎고 1회 응씨배에서 우승하면서 대대적인 바둑열풍이 일어나자 정부에서 조훈현 九단에게 은관문화훈장을 주려고 했는데 조훈현 九단이 대한민국 바둑의 개척자인 조남철 九단이 먼저 받아야 한다는 의견을 강하게 어필했고 결국 두 사람이 같이 받게 되었다.[5] 6.25 전쟁 참전 중 부상.[6] 고향의 전북 줄포국민학교를 다녔다는 기사도 있다.[7] 17수까지 고정된 포석을 두고 시작하는 전통 바둑. 현재는 초반 포석 변화의 다양성이 적다는 단점 등의 이유로 사장되었다. 다만 이게 언제부터 한반도에서 유행했는지는 삼국시대부터 조선 말까지 간격이 넓고 학자마다 의견도 갈린다. 참고로 조남철은 순장바둑에서도 뛰어난 실력자였다고 한다.[8] 이것과 관련해 한 일화가 있다. 조남철은 1954년 대만에서 열리는 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준비를 했는데, 당시엔 달러 환전을 하기 위해선 정부 허가가 필요했다. 이에 당시 자유당 서열 3위였던 장경근의 백으로 이승만 대통령 앞에서 조남철과 김봉선이 경무대 시범 대국을 했는데, 첫판을 현대식 바둑으로 두자 이승만이 "자네들은 왜 왜놈 바둑을 두나"하고 질책을 했다고 한다. 이에 조남철이 해명을 한 뒤 2국부터는 순장 바둑을 뒀다고 한다.[9] 90년대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우리나라의 승단은 과거 한중일 3국 중 가장 어렵다고 정평이 났었고 단의 권위 또한 가장 높았다. 일반대국이 아닌 승단대국에서는 프로끼리 단에 따라서 돌을 접어두고 대국을 했고 신문기전의 1차예선은 저단자들끼리 두고 고단자들은 2차예선부터 출전하였다.[10] 다른 프로기사들과 단수 차이가 너무 많이 난 것에 부담을 느낀 것도 있다.[11] 참고로, 이 두 조국수 이전에 일종의 명예 九단을 받은 인물이 있긴 했는데, 바로 대통령 이승만. 재임 시절 그에 대한 아첨(...)으로 준 일종의 흑역사다. 1950년대 중반 대만과의 교류전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이승만이 배려해 준 적이 있는데, 그에 대한 보답 차원에서 나온 일이다. 자유당 3인자였던 장경근이 바둑광이라 한국기원 이사장을 지내기도 했는데 이 연줄로 이루어진 일.[12] 조치훈은 부산에서 태어났지만, 집안은 전북쪽이다.[13] 지금은 이전해서 상관은 없고 건물 자체도 리모델링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