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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우영

대한민국 문화훈장 수훈자
파일:문화은관.jpg
<colbgcolor=#980000><colcolor=#EDE4D3> 연도 <colbgcolor=#EDE4D3><colcolor=#980000> 2005년
이름 고우영
분야 만화
은관문화훈장(2등급)

<colbgcolor=#000><colcolor=#fff> 고우영
高羽榮 | Koh Woo-Young
파일:/image/005/2005/04/25/20050425_21_02.jpg
중노년기의 모습
본관 제주 고씨
출생 1938년 9월 27일
만주국 봉천성 본계호
(현 중화인민공화국 랴오닝성 번시시 시후(溪湖)구)
사망 2005년 4월 25일 (향년 66세)
경기도 고양시 일산동구 백석동 일산병원
가족 형 고상영, 고일영
배우자 박인희
아들 고성우 포함 3남 1녀
학력 동항초등학교 (졸업)
동성중학교 (졸업)
동성고등학교 (졸업)
필명 추동성[1]
종교 가톨릭 (세례명: 요셉)
별명 우영이
파일:/image/038/2005/04/25/cutie4200504251820070.jpg
본인이 그린 자화상
1. 개요2. 생애3. 사망4. 평가와 영향력5. 작품 목록6. 여담7.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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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만화가. 대담한 필치의 그림과 현실을 풍자한 독특한 재해석과 연출로 명성을 쌓았다. 대표작 고우영 삼국지처럼 동양의 고전 소설을 만화로 그려내었다. 일본에 요코야마 미츠테루가 있다면, 한국에는 고우영이 있다고 해도 될 정도로 동양고전 만화에 불멸의 족적을 남겼다.

2. 생애

1938년(호적상으로는 1939년) 만주국 봉천성 본계호(현 중화인민공화국 랴오닝성 번시시 시후구)에서 일제강점기일제 경찰간부를 지낸 고종률(高鍾律)[2]과 어머니 김신숙[3] 사이의 5남 2녀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유년기인 일제강점기 당시, 아버지경찰 간부였었기 때문에 만주에서 부족한 것 없이 자랐다. 그 시절에 집에 자가용이 있고 큰 사냥개를 키웠을 정도라고 고우영이 회고한 적이 있다. 8.15 광복 후 구사일생으로 월남했다. 전쟁 시기 개성 진골여관 은둔처의 생활상, 서울대병원 안뜰에 시체가 널브러져 있는 모습 등을 포착하여 그린 드로잉이 현재까지 남아 있다.

월남 당시, 아버지의 옛 동료들이 아버지를 크게 반겼지만 양심 때문에 경찰 간부직을 포기하고[4] 낚시를 하며 여생을 보냈다고 한다. 고우영은 한중수교 이후 1990년대 중국에 처음 여행을 갔을 때 만주의 고향이었던 동네를 겨우 찾아가 봤지만 너무 오랜 세월이 흘러서 그런지 어릴 때 다니던 학교나 옛 집이 모두 사라지는 등 옛 모습은 거의 찾을 수 없었다고 한다.

젊을 때는 사냥을 무척 즐겼던 탓에 김왕석(1927~2017)[5]의 맹수와 사냥꾼이 재간되었을 때 삽화 및 특전엽서를 그리기도 했다.

1955년, 고등학생의 신분으로 "추동성"이라는 필명으로 만화계에 데뷔했으며 필명은 자신이 다니던 고등학교동성고등학교에서 따왔다. 가끔 드물게 '추동성'이 본명이며 '고우영'이 필명이라는 식으로 서술이 된 자료가 있는데 틀린 서술이다.

당시 만화방 만화(대본소)가 주류가 되었던 만화 시장에서 "쥐돌이"[6], "공주 애찌루" 등을 그렸고, 후에 전업 만화가로 데뷔하면서 심장마비로 일찍 요절한 형 고일영이 그리던 "짱구박사"를 이어받아 그리기도 했다.[7] 하지만 합동출판사독점체제가 구축되고, "교과서 같은 만화"나 그린다는 이유로 업계에서 쫓겨난 뒤에 약동이 시리즈의 그림작가를 맡다가 스토리 작가인 방영진의 건강이 악화되어 작품이 연중되어 연재처를 찾아 나서는등의 우여곡절을 겪었다.

그렇게 고생을 하다가 1972년, 일간스포츠에 연재한 임꺽정이 연재되었는데 이 작품이 대히트를 기록하면서 본격적인 만화가로서의 행보가 시작되었다. 이 작품 연재에 장기영 당시 한국일보 사장의 결정이 주효했었다.

당시 신문에서는 단컷만화나 4컷 만화가 주로 연재되었고 그 때문에 신문만화는 무조건 단컷 아니면 4컷이라는 고정관념이 자리잡고 있었던 때였다. 그런데 장기영 사장이 일본이나 구미 신문에서 연재되던 극화가 큰 인기를 끌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일간스포츠에 이와 비슷한 형식의 만화를 연재하라고 지시했었다. 그러나 당시 일간스포츠 편집국은 이에 대해 매우 반발했고, 이에 장기영 회장이 그 편집진을 해고한다고 엄포를 놓고, 김수남 당시 소년 한국 주간이 편집진을 다독여 결국 만화를 연재함으로써 수습이 되었다. 그 인연 덕분이었는지 나중에 고우영은 한국일보에서 <한국만평>을 연재하게 되었다. 이후 수호지, 삼국지, 열국지, 초한지 등의 고전 중국 관련 역사물과 가루지기전, 일지매 등 한국에서 전해져 내려오는 설화를 재정립한 만화 등을 그리며 연거푸 히트를 쳤고, 한국을 대표하는 만화가의 반열에 오른다. 1980년대 들어 그는 당대 유행하던 프로덕션식 제작공정을 거부하고 스스로 실용학습만화라든가 삽화 등 만화 외적인 활동에 몰두하다 보니 장편에서 호흡이 잘 이어지지 못하는 경우가 생겼다. <서유기>가 대표적인 예인데, 삼장법사의 탄생에 인간드라마를 할애해 최선을 다했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줄거리 전개에 급급해 동력이 떨어졌다. 다만 이보다 짧은 <21세기 아리랑 놀부뎐>, <가루지기> 등 한국 고전을 재해석한 작품이 더 호평을 받았다.

그 시절 많은 만화가들이 그랬듯 그 또한 등산이 취미였고 유명 산악인들과 친분도 있을 정도로 조예도 깊었다. 때문에 만화에서 등산 관련 패러디가 굉장히 많이 나온다. 대표적으로 삼국지에서 심심찮게 등장하는 카라비너.

1970년대에 미국을 여행하고 쓴 미국만유기, 84년도에 유럽을 여행하고 쓴 유럽만유기, 1995년도에 중국을 여행하고 쓴 중국만유기 3권 모두가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다만 이 때 연재중이던 초한지는 작가가 미리 완결까지 그리고 떠나는 바람에 그림이 초기에 비해서는 퀄리티가 떨어진다. 당시에는 이메일이 없어서 팩스를 주로 쓰던 시절이니 어쩔수 없어도 본인도 무척 아쉬워하던 이야기. 이 작품은 고우영의 저작 중에 유일하게 만화가 아닌 일반 서적으로 출판되었으며, 사후(2007년 추모 2주기)에 '고우영의 좌충우돌 세계여행기'라는 제목으로 복간되었다. 어투는 만화에서 나레이션으로 보이던 어투와 거의 같다.

1990년대 들어서 눈이 나뻐지더니만 한 쪽 눈을 볼 수 없는 상태까지 되었다. 그럼에도 그 상태로도 안경을 쓰고 작품을 연재했고, 1994년에 십팔사략을 내며 대작 사극작가로 돌아왔다. 이 작품 역시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청소년 추천 도서가 되기도 했다. 그 와중에도 1988년부터 한국만화가협회 회장을 4년간 지냈으며, 1996년부터 2년간 한국일보에 <한국만평>을 연재했다.

2000년대 초반부터 사망시까지 고우영의 작품 스타일은 '줄거리보다 교훈을 강조하는 리메이크'이자 '시대초월'인데, 1980년대를 풍미했던 작가들이 변화된 만화 제작환경 및 독자들의 기호에 따라 잊혀진 것과 달리, 원로 만화가임에도 스스로의 본질을 발견해 스타로 다시 떠올랐다. 십팔사략 이후 대장암 진단을 받아서 건강상의 문제로 뚜렷한 행보를 보이지 못하다 2001년 딴지일보 너부리 기자의 주도로 삼국지의 무삭제 복간판을 웹상에 연재했고, 완결 후 CD롬으로 냈다. 웹연재 당시 고전작품임에도 불구하고 해당 작품이 지닌 특유의 해학이 네티즌들의 기호와 딱 맞아 인기를 끌었다. 이것이 기폭제가 되어 잊혀져가던 그의 작품들이 재발행되었고, 그의 이름은 다시 한번 수면 위로 떠오르게 된다.

참고로 미국으로 이민가 살던 딸이 미국 유명 안과 병원에서 진료하길 요청해 미국가서 수술을 받고 나서야 2000년 초반에 10년 만에 한쪽 눈 실명상태에서 회복될 수 있었다. 이 일은 고우영 본인이 알리길 싫어해 그가 사망한 다음에서야 공개된 일이다. 부천 한국만화박물관에서 2015년 그의 사망 10주기를 기념하여 이벤트를 열 당시, 10년 넘게 쓰던 안경을 전시했고 수술받아 회복되자 기뻐하던 이야기라든지 유족들의 간략한 회고를 적은 글도 전시되었었다.

이후에 굿데이에 고려 말부터 조선 초까지야사를 담은 수레바퀴를 연재하다 건강상의 사정으로 중단하기도 했다. 작가 본인은 조선왕조 500년을 자신만의 색으로 담아내겠다는 원대한 목표를 세우고 시작하였으나 실제로는 음담패설을 뒤적거리는 데에 그쳐 팬에게 안타까움을 샀다.[8] 연재 초반엔 역성혁명, 1차 왕자의 난 등의 조선 초기 정치적 사건들을 대한민국 현대사의 5.16, 12.12 등과 절묘하게 엮어 가며, 권모술수가 난무하던 시대의 적나라한 인간 군상을 묵직한 톤으로 그렸으나, 조준이 국화라는 기생의 질투로 인해 역모죄로 모함을 당했다가 결백이 드러난다는 에피소드[9] 이후로는 슬슬 말초적인 재미를 추구하는 방향으로 흘러간다.[10] 내용 자체는 용두사미에 그쳤을지언정, 그가 여태껏 만화를 그려오면서 쌓은 내공만큼은 이 만화에서 절정을 이루었다.

50대 중반부터 아내 박인화(세례명은 마리아) 여사와 같이 성당에 다니기 시작했고 세례명요셉이였다. 고우영은 크로닌의 소설 <천국의 열쇠>를 만화로 각색했고, 천주교 신문인 평화신문에 돈키호테를 신부로 각색한 만화 <몬시뇰키호테>를 연재하기도 했으며 가톨릭출판사에서 1998년에 편찬한 아동용 교리 공부책 <교리책 밖의 교리 이야기>(홍문택 신부 저)의 삽화를 그리기도 했다.

말년에 창세기부터 요한묵시록까지 성경 전체를 만화로 옮길 마음을 먹었다고 한다. 또한 고우영 화백은 작고하기 전에 자신의 유년기 시절 만주에서의 삶에서 현대 한국에 이르기까지 경험했던 것들을 바탕으로 일종의 자서전의 성격을 띈 작품을 하나 구상하였으나 결국 갑작스럽게 운명하면서 이는 이루어지지 못했다. 실지로 조선일보에 따르면 "내 인생과 한국만화 100년 역사를 만화로 정리하겠다."라고 제안하며 2004년에 샘플 원고 2회분을 보내왔다고 한다. 하지만 구체화 되기 전에 병세가 급격히 나빠지면서 계획에 멈추고 말았다.

3. 사망

이렇게 투병하던 그는 2005년 4월 25일, 일산병원에서 지병인 대장암이 재발하여 사망했다. 이후 수많은 만화가들과 만화가 지망생들이 고우영을 추모하며 추모 그림을 그리기도 했고, 문화관광부로부터 표창도 받았다. 장례 미사는 일산 마두동성당에서 거행한 후 유해는 서울시립승화원에서 화장되어 청아공원에 모셔졌다.

허영만에 나온 관상 분석에 따르면 얼굴 전체가 짧고 눈빛이 약했지만 눈썹이 나아서 그나마 오래 산 거라고 나온다. 하지만 그의 집안에 대대로 유전병이 있어서 오래 산 이가 없다는 점 때문에[11] 자신도 오래가지 못할 것이라고 예전부터 느꼈다고 한다. 확실히 아버지나 형들에 비해 오래 산 거지, 허어나 박부성 같은 1938년생으로 2022년에도 생존한 동갑내기 만화가들에 비하면 단명한 편이다.

심수회 후배 이정문[12]의 회고를 봐도 고우영은 오래 전(80년대)부터 "우리집 남정네들은 유달리 일찍 갔어. 내가 장수하는 건지."라고 말했으며, 죽기 한달 전 여러 만화가들이랑 같이 간 마지막 여행에서는 사진을 찍으면서 미소와 같이 "정문아...이거 영정 사진이니까 잘 찍어줘." 이런 말까지 했다고 한다. 이런 걸 보면 오래 못가 자신이 죽을 걸 각오한 모양. 그래도 이 여행에서 돌아오면서 산을 바라보며 한숨을 쉬더니만 "아, 산은 10년이 지나도 20년이 지나도 여전히 그대로인데..."이란 말도 하며 아쉬워했다. (2005년에 몇 달만 발행하다가 폐간한 월간 계간만화라는 잡지에서 이정문이 그린 고우영 추모 만화에서 발췌)

이 특집 추모 만화에서 이정문은 오래전, 선배 고우영이 그려준 관우 그림을 액자에 담아 내 화실 벽에 걸어뒀는데 고우영이 사망한 날에 그 액자가 갑자기 떨어졌다. 30년이 넘도록 한 번도 떨어지지 않던 그 액자가 떨어진 날이 공교롭게도 그날 떨어져서 '어? 이상하다... 혹시 선배님에게 무슨 일이 있나?' 불안해했고 그리고 얼마 안 가 사망한 소식을 전화로 듣고 그 액자를 안으며 "선배님, 가시는 걸 알린 건가요!" 라며 엉엉 울었다고 회고했다. 장례식에 비도 많이 와서 이정문은 고우영 선배님 가시는 걸 하늘도 슬퍼하는지 싶었다라고 마지막으로 만화를 끝냈다. 사망 기사

2015년 한국만화박물관 고우영 10주기 추모 이벤트에서 아내가 회고하길 "살아 생전 아이들에게도, 나에게도 욕을 한번도 한 적이 없었던 사람이었다. 물론 아이들이 잘못하면 꾸짖고 매질이야 했지만 정해진 수만 종아리를 몇 대치고 잘못을 깨우치게 했을 뿐, 에 된통 취해도 절대로 나에게도 아이들에게 구타나, 욕설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아이들에게 공부하라느니 강요도 하지 않았던 사람이었다..."라고 이야기한 바 있다. 아들인 고성언을 비롯한 자식들도 아버지는 취해도 우리를 함부로 때린 적도 없고 실수로 욕하면 우리나 어머니에게 곧바로 사과하셨다. 공부하란 강요도 안하고 하는 일을 알아서 하려무나 이렇게 말할뿐이었다고 회고했었다. 지금이야 물론 당연시되는 일이지만 당시 가장들 대부분이 매우 권위적이었던 걸 생각하면 여러가지로 대단한 사람이었다.[13] 이런 됨됨이는 후배들에게도 똑같은데 친했던 이정문은 당시 회고하면서 30년 넘도록 친하게 지내면서 아무리 취해도, 후배들을 부려먹거나 군기같은 걸 매우 질색하고 욕을 하지도 않은 사람이라고 한 걸 보면 군기같은 걸 질색하고 후배들도 매우 배려해준 성격이었음을 알 수 있다.

만화평론가 장상용도 2009년 저서 <나는 펜이고 펜이 곧 나다>[14]에서 짓궂게 이야기하면서도 정다움이 많던 고우영을 추모했다. 전화로 "장 기자! 전화번호 바꾸었으면 날래 날래 알려줘야 할거 아니야!"라고 짓궂게 말하던 목소리가 아른거린다고 하며, 허영만도 꼴에서 고우영을 이야기하다가 '보고 싶습니다. 선배님...'이라고 아쉬움을 담아 작게 썼다.

사실 관상이나 집안에 수명이 짧다는 뒷이야기가 원체 많았지만, 진짜 이유는 고우영 화백 자체도 건강관리를 거의 안하다시피 했다. 집필 활동을 하면서도 원체 사람만나고 술마시는걸 좋아했고, 담배도 많이 피워대서 고우영 삼국지를 그릴때도 우영이 만화 그리다 담배 한대문식으로 묘사할정도로 골초였고, 위에 아내의 회고로도 가족들이 있지만 길창덕이나 이정문 같은 동료 만화가들과 진탕 술을 먹는게 낙이었다고 한다. 지병인 대장암 역시도 원인이 음주와 흡연이니 본인이 작품활동을 하면서 사람 만나 술마시고, 골초인 쾌락적으로 사신 생이 되었다.

4. 평가와 영향력

고우영은 한국 만화사에서 가장 독창적이고 독보적인 감각을 지닌 작가로 평가받는다. 작품 전체에 배어있는 여유로움과 유머 감각, 완급조절 능력, 강렬하고 즉흥적인 인상의 화풍 등은 그가 한국 만화대부로 평가받는 주된 요소다.

첫번째로 손꼽히는 그의 강점은 드로잉 능력. 딴지일보에서 삼국지 복간할 때 작업 영상을 보면 그냥 쓱쓱 그린다. 고우영 삼국지 자체가 신문 연재를 위해 속필을 했던 작품이고 컷도 작아서 비교적 손이 덜 가는 작품에 속하긴 했지만, 지금도 읽다 보면 입이 떡 벌어지는 수준의 컷들이 많다. 단행본 출간된 십팔사략의 경우 한 페이지에 컷을 훨씬 적게 쓰는 호사가 가능했는데, 특히 1~2권의 필력은 그야말로 가공할 수준에 이르러 있다.[15]

주위 사람들의 증언에 따르면 본인은 생전에 작업을 할때 빼면 딱히 그림 연습도 안했고 오히려 술 마시고 취미 생활을 즐기는 데 시간을 더 썼다고 한다. 본인도 자신은 노력형이 아니고 95%가 천재성, 5%가 노력이라고 했다.[16][17] 하지만 18년간 거의 하루도 거르지 않고 연재만화를 그리고 있었다는 것을 감안하면 '게으른 천재'는 결코 아니다. 동시에 24시간 중에 20시간을 만화를 한다고 말하거나, 꿈에서 본 내용을 만화로 그린 것도 비일비재 하는 것을 봐서는 일상 중에도 계속 스토리 고민을 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단순하게 그리는 시간이 적다는 것일 뿐, 그야말로 만화 천재였다.

한국 전통 설화와 이야기 문학의 토대를 흡수했으며 초창기엔 자신의 만화를 "만화소설"이라 명명했을 정도로 문학적 토양이 튼튼하다. 고우영 특유의 필력과 시나리오 감각은 독보적인 위치에 있었고, 그는 이것을 만화로서 성공적으로 구현했다. 붓의 특징을 능수능란하게 써서 만화로 승화시킨 시대를 앞서간 작가였다. 일견 거칠어 보이나 정확하고도 만화적으로 희화화된 선과 다른 만화가들이 따를 수 없었던 풍부한 동작과 표정이 고우영의 간판. 고우영의 만화는 신문에 연재된 작품이 많아서 컷이 작고 균일하게 배치되어있음에도 술술 읽힌다는 평가가 많은데, 그 이유가 바로 이러한 스토리텔링 능력 덕분이다.

이러한 필체가 일본의 시라토 산페이 같은 작가의 시대극에서 볼 수 있는 극화와 얼핏 비슷해 보이지만, 내용을 전개하거나 표현하는 방식 등 고우영만의 독자적인 스타일이 극화와는 다른 형태로 나타나 있다. 특히 재발간을 몇 번한 수호지의 경우는 이런 그림체가 달라지는 모습이 눈에 보일 정도이다. 독자에 따라서는 초기의 극화체의 그림체를 더 선호하기도 하지만 여백의 미와 없는 듯하면서 있는 듯한 화면구성을 자랑하는 후기 작품도 후배들에게 좋은 귀감이 되는 바다.

고전 텍스트의 해석에서도 원전을 그대로 따라가는게 아니라 자신만의 독특한 재해석이 풍부하게 반영되었으며 극적인 완성도도 높아 후대의 작품들에 큰 영향을 미쳤다. 예를 들어 국내 삼국지 매체에서 자주 써먹은 "초선왕윤은 그렇고 그런 사이", "진짜 초선은 죽고 이후 등장하는 초선은 닮은 여자", "아두가 그 모양인 것은 유비가 집어던져서 그렇다.", "관우와 제갈량이 서로 경계했다." 등은 모두 고우영이 만든 픽션이다. 고우영 삼국지의 쪼다인 척 하는 효웅 유비 캐릭터는 최훈삼국전투기를 그리며 거의 그대로 써먹었고 탁월한 검술과 천재적인 병법을 가진 꽃미남 몰락왕족에 안타까운 로맨스를 더한 고우영 초한지의 한신 캐릭터는 문정후형민우가 초한지를 그리며 그대로 차용했다. 단 이렇듯 작가 개인의 각색이나 혹은 기존에 잘못 알려져 있던 역사적 오류가 그대로 들어가 있는 경우가 많으므로 주의할 필요는 있다. 특히 앞서 언급한 사례들 중 유비가 던져서 아두가 바보가 되었다는 것, 쪼다인 척 하는 능구렁이 유비, 한나라 왕족 출신 한신 등은 아직도 진짜인줄 아는 사람들이 많이 보인다. 그만큼 고 화백이 맛깔나게 풀어썼다는 얘기이지만 실제 역사상으로는 그런 일 없었으므로[18] 다른 사람과 얘기하거나 할때는 주의하자. 또한 수십 년이 지난 지금 봐도 전혀 썰렁하지 않은 시대를 초월한 유머 감각이 일품이다. 섹드립, 언어유희, 자학개그, 제4의 벽(메타발언)은 기본에, 고대 중국사인데 자동차나 총기류가 천연덕스럽게 등장하거나 취미였던 등산, 낚시, 복싱을 소재로 한 개그 등 장르도 매우 폭넓다. 어떤 장소나 물건에 대한 그럴싸한 썰을 한동안 풀어놓고는 "지금 그곳에 가 보면 찾을 수 없는데, 왜냐하면 그런 건 원래 없기 때문이다." 식의 능청스러운 낚시도 종종 한다.[19][20] 심지어 삼국지에서 손견이 옥새를 득템하는 장면에서는 옥새 포장지에 작가의 다른 작품 광고까지 하고 있다. 이처럼 뻔뻔한 개그를 치는데도 너무 자연스러워서 그저 웃게 된다.

예를 들어 서유기에서 손오공이 미래의 책을 읽고 과학기술을 터득해 제트기[21]를 만들어 타고 날아가는 걸 본 용왕이 그를 본받아 독서를 하고자 하여, 책들 중 왠지 자신과 잘 맞아 보이는 헤밍웨이바다와 노인을 읽는데, 읽은 후 '용감한 다랑어(Tuna)의 투쟁기'[원문]라는 독후감을 남긴다. 고우영의 개그는 대충 이런 식이다. 이런 다양한 개그들은 오늘날 만화에서는 흔한 것이지만 작가의 주 활동 시기가 70~80년대임을 생각하면 상당히 시대를 앞선 것이다.

시사나 역사, 정치 풍자도 짙게 배어나온다. 삼국지의 계륵의 일화에서 조조베트남 전쟁헨리 키신저가 이랬을 것이라며 고민하는 장면이 나오고 수호지의 송강박정희 대통령 얼굴이다. 수레바퀴에서는 정도전의 죽음에 관해 논하면서 실록에는 비굴하게 죽었다 나오지만 실제론 이렇지 않았을까 하며 당당하게 서서 '옥좌에 현혹되어 국사를 망치는가' 하며 꾸짖는 장면을 넣었는데 이 때 반란군을 12.12란 숫자가 적힌 탱크로 표현했다. 하지만 정치풍자라는 명목으로 허접한 실력을 가린 범상한 작가들과 달리 풍자를 제외한 작품만으로도 고평가를 받으며 살아남았다.

무엇보다도 이런 수많은 개그나 풍자들을 전혀 어색하거나 억지스러운 느낌 없이 매우 자연스럽게 작품 속에 녹여냈다는 것이야말로 가장 대단한 점이다. 저 정도로 많은 개그가 등장하면 보통 아예 대놓고 가벼운 개그만화로 나가는 경우가 많은데, 고우영의 작품은 엄연히 기본적으로는 진지한 정극을 표방하면서도 중간중간 웃음을 유발하는 장면들을 전혀 위화감 없이 삽입했다. 다른 작가들은 작품 속에서 개그를 치면서 '이건 개그요' 하며 억지로 강조하다 흐름도 끊고 재미도 놓치는 경우가 많다는 걸 생각하면, 말 그대로 천재적인 수준의 센스와 내공인 셈이다.

본인이 직접 만화속에 개입하기도 하는데 열국지의 마지막 장면에서 천하통일을 마무리한 진시황이 좀 쉬겠다며 모자를 벗고 수염을 떼자 고우영 본인이 나타나며 작품을 마무리짓는다. 삼국지에서 심심하면 자신을 유비에 비유해대거나 관우자가 자기 이름에도 있다는걸 끊임없이 강조한 것은 잘 알려진 사실. 그 외에도 전개 과정에서 은근슬쩍 본인 자랑을 집어넣는 개그가 많다. 가령 등장인물에 대해 '우영이 닮은 애'라고 표현하거나 "저어기 멀리 동방 바다건너 반도국매우 잘나신 만화가 한 분이 계신다" 같은 식. 그런데 이게 어색하거나 튀질 않고 내용과 자연스럽게 녹아든다. 그 외에도 만화 작업을 하는 모습으로 자주 등장하거나 캐릭터들끼리 작가 뒷담을 까기도 한다. 고우영 화백의 영향인지 90년대나 2000년대 초반에 잡지에서 연재되던 한국 만화에서는 작가가 만화에 개입하는 연출이 자주 나오기도 했다.

성인 대상의 작품이 많고 본인 페르소나도 독하다보니 작품의 수위가 굉장히 높은 편이다. 성적인 묘사는 다른 극화물 작가들과 비슷한 정도지만 잔혹 묘사는 고전속 날것을 거의 그대로 가져와 독보적으로 많이 나온다. 대체로 힘을 뺀 그림체로 많이 나와서 부담이 없어서 그렇지 참수[23]거열형은 기본이요, 거세나 온몸이 뭉게져 죽은 시체나 말 그대로 시체의 뼈와 살이 분리되는 장면도 꽤 자세하게 나온다. 특히 임꺽정에서 최후의 적인 윤원빈의 최후를 보면 삼국지에서 나오는 참수 장면은 애교로 보일 것이다.

단, 고우영 수호지는 예외, 원작에 워낙 잔혹한 묘사가 많다보니 오히려 훨씬 순화시켰다. 특히 자음과모음판 신판의 경우 이규가 가짜 이규를 잡아먹는 장면을 그냥 상상만 하고 밥만 먹는 걸로 바꿨고 송강이 사형을 선고받게 한 황문병양산박 두령들이 육체를 산 채로 잘게 썰어 술안주로 구워먹는 장면은 아예 글로만 묘사하고, 이규가 단독으로 식인했다는 뉘앙스로 바꾸었다. 다만 그 직전에, 죽을 사람들의 알몸은 잘 묘사했다. 그리고 무송자기 형의 복수를 위해 반금련을 끔살하는 장면은 글로 묘사하지만 목을 자르고 배를 가른 시체가 한컷에 그려져있다.

고우영이 정립한 중국사 인물들의 이미지가 꽤나 강렬하게 한국 만화에 남았다. 비극적인 한신의 삶, 쪼다같은 유방유비, 새로운 해석의 제갈량 등. 제갈량의 경우는 시간이 지나며 점점 더 고평가 받다보니 고우영의 해석같은 경우는 없다시피 하지만 인물들의 재해석에 큰 여지를 남겼고, 지금 널리 알려진 미청년 한신[24]도 사실상 고우영 초한지에 의해 남겨진 이미지다. 쪼다지만 속이 큰 유방과 유비 역시 최훈의 삼국전투기의 유비와 매우 비슷한 포지션. 여러모로 한국 만화에 큰 영향과 족적을 남겼다.

이렇듯 고우영은 그림을 그리는 스타일이나 감각적인 면모 외에도, 조선시대 풍속화와 같은 붓터치 등을 통해 만화계에서 가장 한국적인 작화를 선보였다는 점에서 진정한 한국 만화의 원류를 이끌어낸 작가이기도 하다. 더불어 그가 작품에서 녹여내는 개그와 해학, 재해석 등 문학적인 표현법도 한국어 특유의 언어유희와, 한국 문화를 기반으로 삼고 있다. 즉, 고우영은 명시적으로 드러나는 그림체와 감성적으로 드러나는 작문능력 모두 한국의 토속적인 문화로부터 영향을 받았고, 이 두가지 면모를 고스란히 계승하여 만화로서 극적으로 풀어내며 '가장 한국적인 만화'라는 결과물을 여럿 배출해냈다. 또한 '고우영 가루지기' 등을 미디어 믹스화하며 1인으로서 다양한 컨텐츠를 제작하는 등 활동 영역을 넓히며 시대를 앞서나가는 면모를 보여줬다. 이 때문에 고우영은 종합적으로 진정한 한국 만화의 대부로 평가받는다.

5. 작품 목록

복간판 기준 가나다순. 그의 작품 저작권은 사후에도 고우영화실이 관리하고 있다.

6. 여담

파일:고우영만화대전집.jpg
번호 작품
1~5 고우영 삼국지(전5권)
6~8 고우영 수호지(전3권)
9~13 고우영 일지매(전5권)
14~17 고우영 열국지(전4권)
18~19 고우영 서유기(전2권)
20~27 고우영 초한지(전8권)

7. 참고 자료



[1] 만화가로 일하던 둘째 형 고일영(高一榮)의 필명이 '추동식'이었다고 하며, 동성이라는 이름은 자신의 모교인 동성고등학교에서 따왔다고 한다.#[2] ? ~ 1961년. 이명 고종률(高種律). 평안남도 순사로 근무하던 중 1923년 12월 31일 평안남도지사로부터 정근(精勤)증서를 수여받았다.# 1930년 평양경찰서 경부보, 1931년부터 1932년까지 중화경찰서 경부보, 1933년 맹산경찰서 경부보 등을 지냈다.#[3] 1958년 사망.[4] 사실 이때 일본 경찰 출신도 이미지 세탁하고 경찰에만 잘만 들어갔던 시대였다. 미군정 시절에 인민위원회를 강제해산시키고 구 일본경찰들을 재채용했기 때문으로, 야인시대에서 잘 묘사되며 대구 10.1 사건이 벌어진 이유도 구 일본 경찰 출신들이 다시 채용되면서 사람들에게 행패를 부렸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이 당시에 경찰에 대한 이미지가 매우 좋지 않았다.[5] 수렵소설을 주로 쓴 작가로 유명하다. 90세 나이에도 대전일보에 '수렵야화'라는 소설을 연재하다가 2017년 8월 6일 병으로 세상을 떠났으며 작품은 10월 말에 완결했다. 작품은 2021년에 내려졌다.[6] 다만 쥐돌이는 딱지만화로 만화방이 생기기전에 그린 만화다.[7] 짱구는 이마나 뒤통수가 남달리 크게 튀어나온 머리통'이라는 의미를 지녔다. 이 당시의 한국만화들이 그렇듯이 만화영화학습만화로 활발히 만들어지지 않으면서 후세에 묻힌 작품이기는 하지만, 크레용 신짱이 한국에 수입되기 전에 짱구라고 하면 보통 고우영 형제의 짱구박사를 떠올리는 일이 많았다. 영화 바람에서도 주인공의 별명이 짱구박사다.[8] 작가 스스로도 연재 도중에 '이게 아닌데'라는 식으로 자평한 내용의 컷이 있다.[9] 정치적 격동기였기에 기생조차 역모죄를 이용할 줄 알았다는 코멘트가 깔려 있다.[10] 해당 사건 자체는 실제로 실록에 짤막하게 기록되어 있다.[11] 아버지는 쉰살을, 두 형은 마흔도 넘기지 못하고 사망했다.[12] '심술 1000단 심똘이'와 한국 로봇 만화 명작인 '철인 캉타우'를 그렸다.[13] 욕을 맛깔나게 잘하는 상남자 캐릭터들을 많이 등장시켰지만 그걸 그리는 작가는 정 반대의 인간상이었다는 말이 된다.[14] 2004년에 낸 <한국의 만화가 18인>에서 더 보강하고 만화가들을 더 여럿 취재하며 낸 책이다. 2004년판에서 살아있을때 취재하던 박봉성과 고우영은 2005년 똑같은 해에 사망하고 신문수는 2021년, 박기정은 2022년에 차례로 사망했다.[15] 십팔사략 연재 후반에 1997년 외환 위기로 인해 책을 출판하는게 매우 어려운 상황이었고, 이 때문에 고우영도 십팔사략을 시팔사략이라며 무지하게 욕하기도 했다.[16] http://ch.yes24.com/Article/View/14531[17] 그러면서도 고우영 본인은 평범한 사람일 뿐이고, 요절한 자신의 형 고일영이야말로 진짜 천재였다고 하였다.[18] 유비가 자기 아들을 던진건 연의의 창작인 동시에 그 얘기가 나온 연의에서도 이 때 부작용으로 유선이 바보가 됐다는 얘기는 일절 없다. 중국 본토에서 유비의 이미지는 능구렁이나 매력 원툴의 성인보다는 또 한 사람의 걸출한 효웅에 가까운데다가 실제 유비는 군사를 부리는데 능했던 사람이며, 한신은 한나라 왕족이 아니라 생년에 대한 정확한 기록조차 알기 힘든 한미한 출신이다.[19] 극단적으로 서유기에서는 작 초반에 일행이 당나라를 출발할 때 풀어놓은 떡밥을 막판에 일행이 당나라로 귀국할 때 '사실 그딴 건 없었다'며 회수했다. 자세히 설명하자면 삼장이 서천행의 첫 발자국을 뗀 그 자리를 표시해놓은 병사가 있었는데, 나중에 삼장이 돌아오는 것을 먼 발치에서 발견하고 그 자리에 서서 '오신다! 오신다!' 하고 호들갑을 떨다가 그 표시를 그대로 밟자 환호한다. 그리고 당태종도 그 사실을 알게 되자 그 자리를 보존하고 주변에 울타리를 둘러쳐서 기념으로 남겨놓았다고 썰을 푼다. 그러나 지금 그 자리에 가면 찾아볼 수 없는데 그런 건 처음부터 없었기 떄문이라며 만화 초반부부터 깔아놓은 대형 낚시를 시전한다.[20] 그래놓고 "거짓말도 버릇 된다는데 큰일이다."라며 셀프 딴지까지 덧붙이기도 한다.[21] 그것도 초음속 성능을 위해 세심하게 델타익으로 만든다.[원문] 바다와 노인을 읽고나서.

용감한 다랑어(Tuna)의 투쟁기이다.
작가는 그 다랑어가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인간에게 굴복하지 않은 것을 쓰고 있다. 늙은 어부는 결국 다랑어의 고기를 먹을 수 없게 된다. 당연한 귀결이다.
그러나 작가는 하나의 중요한 과실을 범하고 있다. 상어를 나쁜 고기로 표현한 것이 그것이다.
상어도 역시 내가 다스리는 어족 아닌가?
전체적으로 바다와 물고기의 생리를 사실과 맞게 표현한 것만은 높이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23] 전반적으로 엑스트라의 목이 유달리 가볍게 툭툭 잘린다. 게다가 목이 날아가는 시체들도 뭐라고 한마디씩 하는 장면이 많아서 고어보다는 코미디에 가까운 연출이다.[24] 예쁘장하게 생긴 남자이면서 또 중성적인 매력을 가진 캐릭터. 후에 제갈량도 이렇게 묘사된다.[25] 강도에게 살해당한 삼장법사의 아버지가 부활하는 페이지의 신문 연재 당시 광고가 들어간 공란에 만화 작업 중인 고우영 화백 캐릭터가 나오고 '설마 고 화백께서도 환생을 하시려나?'는 문구가 있다. 편집자가 남긴 듯. 참고로 여기서 나온 고 화백 캐릭터는 정확히 자음과모음 판본 열국지 4권 194 페이지의 첫 컷(문학동네 판본은 5권), '성현의 제자들' 에피소드에서 오기를 다루려고 할 때 힘들게 만화 작업을 하고 있는 모습으로 나왔다.[26] 자필로 되어있는 작품은 삼국지, 초한지, 열국지, 수호지가 대표적이며, 십팔사략, 일지매는 텍스트 식으로 되어있다. 참고로 글꼴은 해설은 고딕체, 대사는 명조체.[27] 고우영 화백이 그렸던 작품 별로 대표 캐릭터들 몇몇이 나와 독자들에게 새해인사를 한다. 이때 수호지 사이드에서는 전혀 등장없던 노준의가 나와 자신이 나오기 전에 연중됐다고 하며 이제는 자신도 등장하면 좋겠다며 수호지의 연재 재개를 빌었지만 끝내 실현되지는 못한다.[28] 본명은 권성국으로 1938년생 동갑.[29] 동아일보에서 시사만화 나대로 선생을 그렸다. 나중에 한나라당에 입당해 정치인으로 나서려다가 공천 탈락. 나대로가 간다라는 책자에서 선배인 고우영과 권투를 한 것을 회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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