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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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95153E><colcolor=#FFC224> 태조강헌대왕실록 | |
분량 | 15권 3책 |
기록시기 | 1392년 7월 ~ 1398년 12월 |
실록 편찬자 | 하륜(河崙), 유관(柳觀)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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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태조실록(太祖實錄)은 조선 제1대 국왕인 태조 이성계(李成桂)[1]가 조선을 건국하기 전에 대한 행적과 재위(1392~1398) 7년간의 역사를 기록한 조선왕조실록이다. 총 15권 3책으로 구성되어 있다. 대한민국의 국보 제151호에 해당한다.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과 국가기록원에 소속된 역사기록관에서 소장하고 있다.2. 내용
국사편찬위원회 태조실록 전문정식 명칭은 태조강헌대왕실록(太祖康獻大王實錄)이다.
첫 번째 실록인만큼 고려 후기 이성계가 즉위하기 전의 행적들을 기록한 총서(總序)가 첫머리에, 여기서 고려 후기의 역사와 전주 이씨 왕가의 역사를 서술한다. 곧이어 이성계가 즉위한 1392년 7월부터 1398년 12월까지 태조의 재위 6년 6개월간의 기록을 담은 실록으로, 1413년 3월에 최종 완성되었다. 현재 대한민국에 남아있는 종류는 총 2종으로, 정족산본은 사람이 직접 손으로 쓴 필사본, 태백산본은 활자본이다.
1408년(태종 8) 5월에 태조가 사망하자 이에 태종이 하륜(河崙), 유관(柳觀), 정이오(鄭以吾), 변계량(卞季良) 등에게 명을 내려 편찬했다. 원래는 춘추관기사관(春秋館記事官) 송포(宋褒) 등이 아직 시대가 멀지 않고, 또 당시에 활동했던 인물들이 대부분 살아 있으므로 역사서술의 공정성을 위해 조금 기다렸다가 만들자고 건의했지만 태종이 이들에게 벌을 주고 이에 반발하여 사초를 제출하지 않은 자에 대해 자손을 금고(禁錮)하고 은 20냥의 벌금을 징수하도록 하는 처벌규정까지 만들며 완성한 것이다.
1300년대 후반 여말선초 시기의 한국사를 굉장히 자세히 담고 있어 그 가치가 매우 크지만, 몇몇 학자들은 조선의 건국 정당성 및 당시 집권자인 태종의 대권을 위하여 몇몇 상황을 저자들의 입맛대로 일부 곡필한 것 아니냐는 의심을 보내기도 한다. 일단 조선왕조실록의 다른 부분과 달리 태조실록 총서의 경우 이성계 및 그의 조상들이 왕이 아니라 고려왕조의 '일개 장수'이던 시절의 기록이다. 즉 사관이 옆에서 보고 일거수일투족을 기록한 것도 아니며, 그 시기는 국가적 기록이 아니라 교차검증이 되지 않는 부분도 많다.
이성계가 무너뜨린 고려왕조에 대해서는 우창비왕설 등 실로 문란하고 퇴폐해 망해야 마땅한 나라로 묘사하였고, 건국 과정에서 태종이 하드캐리한 활약상에 대한 내용, 그리고 왕자의 난 이후에는 신덕왕후와 태조의 잘못에 대해 자세히 묘사하고 그들의 횡포에도 아버지께 효심을 다하며 어쩔 수 없이 아버지를 끌어내린 후에도 때론 눈물까지 흘리며 끝까지 그에게 정성을 다하는 태종의 모습을 그려낸다. 실제로 1차 왕자의 난 당시 무기도 없이 수십명 만으로 하늘의 뜻을 받아 경복궁에 바로 입성했다던가 하는 곡필들이 매우 많이 수록되어 있기 때문에 다른 실록과는 달리 태조실록은 거의 당시 집권자(태종)의 입맛대로 놀아났다는 것이 공식 학계에서도 꽤 진지하게 연구된다.
사초와 관련해서는 무오사화 같은 거대 사건 때문에 묻히긴 하지만 조선왕조 최초의 사옥인 이행(李行)의 사옥이 벌어진 시기이기도 하다. 실록을 만들기 위하여 고려 때의 사관들에게 가장사초를 내놓게 하면서 은근히 조선왕조에 유리하게 내용을 자기검열하도록 몰래 압박을 넣었는데 눈치없이 이행이라는 사관이 이성계의 욕을 쓴 사초를 그대로 제출해서 난리가 난 사건이다.# 이행은 장 100대에 가산을 적몰당하고 울산으로 유배갔으며, 훗날 태종이 태종 10년 3월부터 10월말까지 7개월 정도 사관이 편전에 입시하지 못하게 했을 때도 이때 이행의 행각을 근거로 삼기도 했다.
3. 곡필이 의심되는 내용
- 고려 후기의 전반적인 막장 묘사 : 물론 고려 말의 정치에 문제가 많았던 것은 대체로 사실이지만, 거기에 왕조 개창의 정당화를 위해 MSG를 상당히 친 것이 문제다.
- 이성계의 조상 및 이성계의 즉위 전 무인으로서의 활약상에 대한 묘사 : 예를 들어 활 한발로 새 5마리를 맞추는 등 젊은 시절 태조 이성계의 무협지 급의 무예 찬양 같은 부분을 말한다. 물론 이성계가 걸출한 무인이었던 것은 사실이나, 총서를 읽어보면 너무 무협지에 맞먹게 묘사한 부분이 많고, 아무리 조선왕조실록이 정확성을 인정받고 있다고 하나 총서의 이 기록들은 조선 건국 이전 이성계가 무장이던 시절의 일화라 사관이 옆에서 보고 일거수일투족을 기록한 것도 아니고 교차검증이 되지 않는 부분이 많다.
- 위화도 회군 당시 백성들의 환호 속에 사냥을 하면서 천천히 회군했다는 등의 묘사 내용.
- 1차 왕자의 난 직전 신덕왕후의 갑작스런 악녀 돌변
- 왕자의 난 당시 무기도 거의 안든 수십명으로 경복궁을 장악했다는 내용 : 정작 태조, 정종, 태종실록에서 원경왕후 민씨가 병장기를 마련해 거사를 도운 사실을 지속적으로 거론한다..
- 정도전의 죽음 : 정도전의 최후가 매우 비굴하게 묘사되어 있다. 참고로 남은도 숨어있다가 자신은 괜찮을거라며 밖으로 나섰다가 쿠데타군에게 잡혀서 참살된다.
- 조사의의 난 당시 태종의 행적들.
- 실록 내내 어리석은 아버지를 끝까지 효도로서 대하는 착한 태종의 모습들이 있다.
4. 외부 링크
[1] 즉위 후에는 피휘 시 불편함을 방지하기 위해 이단(李旦)으로 개명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