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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8-29 10:33:18

합동출판사

1. 개요2. 합동 이전 - 자유경쟁 시대3. 등장4. 수법5. 반 합동 저항사
5.1. 제1차 반(反) 합동 - '갈매기부대'의 반란5.2. '소년한국'과 '합동'5.3. 제2차 반(反) 합동5.4. 만화가협회의 가세
6. 최후7. 합동이 남긴 교훈과 평가8. 기타9. 출처10. 관련 문서11. 관련 자료

1. 개요

合同出版社

대한민국만화 출판사 겸 만화 출판사들의 집합체. 만화 검열제와 함께 1960~70년대 한국 만화계에 파멸을 몰고 온 존재다. 쉽게 설명하면 거대 출판사들의 카르텔. '주식회사 합동' 혹은 '합동문고', '합동동우회'라고도 불렸다. 당대 만화계에 끼쳤던 영향력은 1990년대 만화계에서 도서출판 대원서울문화사가 가졌던 영향력 혹은 2000년대 중반 이후의 만화 및 웹툰계에서 네이버다음(카카오)의 영향력을 합친 것보다도 큰 수준으로 한국만화계에서는 가히 독보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합동은 만화책의 생산과 유통을 일관체제로 구축하여 만화문화의 보급과 확대 재생산에 전문성을 확보했다는 점만은 긍정적으로 평가하지만 이 시스템은 만화작가 등의 참여가 배제된 채 개인의 영리추구에 입각하여 그 도구로 전락하고 말았다는 점에는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다.

2. 합동 이전 - 자유경쟁 시대

6.25 전쟁 휴전 뒤부터 시작된 만화출판 붐은 1950년대 중반 이후 만화잡지 출간 붐으로 이어졌다. 이때 만화잡지를 낸 출판사에서는 시중 서점 판매용 만화책도 같이 내서 양질의 제본만화가 쏟아져 나오는 계기를 마련했다. 그러나 만화책의 서점판매 방식은 1950년대 후반에 이르러 만화방의 증가로 만화 잡지와 만화 단행본 시장이 단번에 사라지고 대신 만화방에서 돈을 받고 독자들에게 만화를 빌려주는 시스템이 정착되어 최종 소비자인 독자는 만화책을 직접 사서 보는 기회를 빼앗기고 말았으며, 만화책은 오직 만화방 업자들에게 파는 독특한 유통방식이 짜여진 것이다. '총판'을 통한 만화책 유통 구조가 바로 그것이다.

만화방이 경쟁적으로 생겨난 것은 1960년대 초의 일이다. 이 때 만화책을 전문으로 출판한 업소는 약 25개소에 달했다. 출판사는 전속 만화작가를 영입해 '얼마나 많은 인기 작가를 확보할 수 있느냐'에 따라 그 위상이 결정되던 시절이었다. 초창기의 만화출판사는 용두동을 거점으로 김경언(1929~1996), 김산호, 이상호(1927~1992), 김정파(1924~1992), 박현석, 권영섭 등의 작가를 확보한 '부엉이문고(대표 오학운)'을 필두로 임창(1923~1982), 김종래, 박기당(1922~1979), 오명천, 조원기, 엄희자 등의 전속 작가를 둔 '제일문고(대표 이종덕)', 그리고 박기정-박기준 형제와 박부성이 소속된 '크로바문고(대표 박기준[1]) 등이 규모 면에서 메이저 급으로 분류되었다.

이 외에도 신촌을 거점으로 한 진흥사(대표 이용태. 소속 작가는 박향수, 김현수 등), 삼진사(대표 이영택. 소속 작가는 이근철[2], 권웅 등), 진영(대표 이영래. 소속 작가는 하고명-하룡 형제 등) 등이 마이너 그룹을 형성했다. 기타 군소 업체로는 새싹, 진선미, 낙타 등이었다.

자유총판 시대에는 출판사들이 만화방을 상대로 자유로운 만화책 판매 경쟁을 펼쳤다. 출판사들을 모두 합쳐 하루에 4~7종의 만화책이 나오던 시절이었다. 이 체제는 1960년대 중반부터 생겨난 작가 출판사들에 의해 무너지게 되었고 유통업계는 이에 따라 재편되었다. 여기서 '작가 출판사'란, 만화가가 창작은 물론 생산, 유통과정 등 경영에 직접 참여한 시스템을 말한다. 작가 출판사들이 생겨난 배경은 만화가가 출판사의 전속 제도에서 탈피해 실질적으로 사주가 되어 더 많은 돈을 벌고자 했던 것이었다.

작가 출판사들의 태동은 박기당 화백에 의해 주도되었다. 박기당은 1966년에 오성문고를 세웠다.[3] 당시 최대 만화 출판사인 제일문고 소속이었던 자신을 포함해 김기율, 김원빈(1935~2012), 고우영(추동성), 유세종, 손의성, 김종래, 오명천 등을 영입해 만든 오성문고는 세워지자마자 만화 출판계의 판도를 뒤바꿔 버렸다. 반면 전속작가를 뺏긴 제일문고는 얼마 안 가 공중분해되고 말았다. 그러나 오성문고 역시 소속 작가간의 불협화음과 경리문제 등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작가 이탈까지 속출해 얼마 안 가 와해되었다.

이후로도 작가 출판사의 설립은 몇 차례 더 시도된 적이 있었다. 작가 개개인이 자신의 출판물에 대한 관리인(주로 친척)을 따로 두어 세운 '오복문고'가 대표적인 예다. 오복문고에는 김종래, 김원빈, 유세종, 조원기, 엄희자, 고우영 등이 참여했다.

3. 등장

그렇게 만화시장에 출판사간의 경쟁이 진행되면서 이합집산에 따라 생겨난 '춘추전국시대'는 1967년에 합동출판사가 등장해 이를 평정하면서 마무리되었다. 창업주 이영래(1928년생)는 서울에서 방앗간, 인쇄소(진영정판사) 등의 사업을 하다 1950년대 말부터 '진영출판사'를 세워 만화와 인연을 맺었다. 진영출판사 시절에 행했던 그의 만화출판 영업방식은 박리다매를 원칙으로 하여 싼 만화책을 다량 제작해 공급한다는 방식을 택해 처음에는 영세 만화방 업자로부터 호응을 얻었다. 이에 힘입어 그는 주변의 친인척까지 동원해 '삼진사', '진흥' 등 만화출판업에 진출해 세를 불렸다.

1950년대 말 당시에 어지간한 만화출판사들은 서울 신촌과 동대문구 용두동에 몰려 있었다. 이 때 이영래와 관련된 출판사들은 전부 신촌에 있었다. 당시 부엉이문고와 크로바문고 등은 서울 용두동에 있었기 때문에 만화출판계의 판도는 '신촌'과 '용두동'으로 양분되었다. 이런 자유 경쟁체제는 1966년에 이영래가 용두동 쪽의 출판사들을 차례차례 신촌이 먹으면서 끝나고 말았다. 이는 '신촌 시대'라고 불린 합동의 출발이었다.

박봉희 전 한국만화출판인협회 회장은 합동출판사의 시작에 대해 "1967년 7월, 이영래가 주도한 진영, 진흥, 삼진사 등의 영향권에 있던 출판사를 모태로 출발했다. 또 경영난에 부딪혀 고생하고 있던 오성문고의 박기당 사장과 합작하기로 했고, 부엉이문고의 오학운 사장을 설득해 '합동'이 그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다. 크로바문고도 설득했으나 결국 출판을 포기하고 말았다. 이 과정에서 일부 군소 출판업자들은 모두 고배를 마시고 말았다."고 증언했다. 일부 만화계 원로들에 의하면 합동의 실질적인 출발은 1966년이었다고 증언한다.

당시 합동출판사의 본진 세력권이 신촌이었기에 합동출판사 회장 이영래는 일명 신촌 대통령이라고 불리며 만화가들에게 공포의 대상이 되었다. 당시 이영래의 재력이 얼마정도였냐 하면 홍대입구역 근처, 정원까지 딸린 고래등만한 집에 전속 운전기사가 있었고 집안에는 당구대까지 있었다고 한다. 게다가 만화가를 불러 회유하면서 즉석에서 당시에는 상당한 거금인 20만원을 쥐어줬을 정도였다(박문윤 회고). 하지만 정작 연재하던 만화가들을 우습게 대하고 후술하듯이 연재하는 만화가들에게 돈은 무척 짜게 줬다... 권력도 대통령 급이었던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참고로 그 재산은 만화가들을 착취한 결과물이다.

거기에 만화계 측에서는 합동과 이영래를 각각 '신촌공화국'과 '신촌 대통령'으로 부른 것에 대비해 '반 합동'에 가담한 군소 출판사들을 '야당'으로 불렀고, 합동은 당연히 '여당'으로 불리워졌다. 합동의 하수인으로서 이권을 챙겼던 작가들을 '주주작가'라 비꼬아 부르기도 했다.

결성 당시 합동의 초대 사장은 이종세가 맡았고 그 아래로는 부엉이문고(김태수), 오성문고(홍순창), 진영(양학성), 삼진(이수용) 등 4개 출판사가 각각 독립형태를 취하고 있었다. 동일 출판물을 만들면서 산하에 여러 출판사들을 독립시키는 형태를 취했던 이유는 판매액을 분산시켜 절세를 하기 위한 목적에서였다. 즉 바닝프로덕션의 원조격인 시스템[4]. 또한 세금 문제 말고도 만화 검열제 등으로 만화에 대해 부정적인 인식이 있다보니 경찰, 검찰측과 많이 꼬이기 때문에 만약 어떤 만화가에게 사건이 터지면 그 출판사에만 피해가 가고 합동 본사에는 피해가 가지 않게 하기 위해서일 수도 있다. 간단히 요약하면 절세와 본사의 피해를 줄이기 위해서 그러는 거다.

합동출판사의 규모가 어느정도였냐면 1970년 경향신문 기사에 의하면 1969년 당시 합동출판사에서 펴낸 1년 출판본이 1314만권 정도으로 나오고 하루에 20종의 만화를 매일같이 1000부에서 2000부씩 찍은것으로 나오는데 당대에 만화시장을 독점했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생각보다 많은 수치처럼 보이지 않지만 1인당 GDP가 200달러를 갓 넘어서고 만화방 만화가 당시 만화시장의 대부분을 차지했던것을 감안해야 한다. 거꾸로 얘기하자면 그 어렵던 시절에도 만화산업이 나름대로 잘 발달되어있다라는 얘기도 되지만 하지만, 어차피 그 수입의 대부분이 이영래와 그 수하들에게 돌아갔고 고위층과 연줄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 연줄을 만화검열 완화나 만화가 권익 향상에 눈꼽만큼 신경쓰지도 않았으니 만화가들에게는 별 의미가 없었고 만화의 질은 퇴화의 길을 걸었으니 만화사적으로 보았을때 씁슬한 시대가 아닐수 없다. 참고

4. 수법

부엉이문고 거래에서 (창작 편수를) 한 달에 2권 배당받고, 이것도 제자에게 절반 수수료를 지불하고 나면 생활비가 달려 견딜 수 없는 고역이다. 참다못해 부엉이문고 오학운 씨를 만나 이 이야기 저 이야기하였다. 이러고 오학운 씨의 전화를 기다리고 있는데 김경언 씨의 전화가 왔다. 지금 만지고 있는 원고가 무엇이냐며 내일 그 원고를 들고 용두동에 있는 여관으로 나오라고 했다. (중략) 거기에서 나는 김정파 씨로부터 원고내용을 꼼꼼하게 지적당했고, "이래서 인기가 없다. 이런 식으로 고쳐라."는 식의 얘기를 들었다. (중략) 나는 하늘이 노랬다.

나는 방향을 바꾸고자 크로바문고 박기준 씨를 찾아가니 중국집에서 정중히 대접하며 "이 선생은 우리가 거래할 수 없지요."한다. 오면서 그 말이 무슨 뜻인지 곰곰이 생각했다. 집에 와서 매일 일은 계속하고 있었으나 일이 손에 안 잡혀 이종세 씨를 찾았다. 이종세 씨는 나를 반갑게 맞으며 내 뜻을 받아주었다. 이 순간 얼마나 좋았는지 모른다. 그런데 한 시간도 안되어 이종세 씨는 이영래 씨와 무슨 의논을 하였는지 그 뜻이 취소되었다. 여기서 나는 오학운 씨의 파워를 크게 느꼈다. 그 후 오학운 씨는 (나에게) "한 달에 3권을 그리라."고 하였다. 이때 내 작품이 <버림받은 개>였다.

- 이재화 화백의 자서록에서.
1966년에 어린이 만화계는 크나큰 일이 일어났다. 치열한 경쟁을 이겨 나온 대여섯 개 출판사 사장들이 모여서 이회장(이영래)을 중심으로 합동주식회사를 만들기로 한 것이다. (중략) 이 모의는 작가들 몰래 진행되었다. 그리고 일이 끝난 다음 작가들에게는 간단한 통보가 날아왔다. 나는 이런 조짐이 벌써부터 있음을 알았지만, 당하고 나니 육중한 쇠뭉치로 한 대 맞은 느낌이었다. (중략) 합동은 출발했다. 최고 원고료와 최저 원고료가 정해졌다. 작가가 다달이 그려야 할 만화의 권수도 정해졌다. 모두가 회사의 외길 통행이었다. (중략) 책을 찍어내 뿌리면 전국의 총판에서 받아들이는 보증금만 해도 운영자금은 남아돌았다. (중략) 지금까지는 대본업자(만화방 영업자)가 필요한 만화를 골라서 샀다. 그러나 이제는 회사 쪽에서 스무 권을 한 질로 묶어서 내놓는 것을 몽땅 사게 했다. 대본업자들은 만화를 선택할 자유가 없어졌다.

- <더러운 어린이 만화 장사(임창 화백 글)>. 뿌리깊은 나무 1976년 8월호
주위의 소개로 이영래 회장을 만나 만화책 출판에 관한 얘기를 나눴다. 이영래 씨는 "해보려면 이름은 내가 지어주지. 필명을... 남재주로 하자."라고 제의했다. 그러나 내가 "본명으로 표기하고 싶다."고 말하자 "남제주로 이름을 바꾸거나, 아니면 만화작가의 길을 포기하던가 둘 중 하나를 택하라."고 잘라 말했다. 아마도 당시 서울의 강남 지역이 개발 붐으로 땅값이 치솟자 나에게도 '남(南)'쪽을 강조한 이런 이름을 지어주었던 것 같다.

내 필명이 남서울이 아닌 남제주가 된 이유는 이 회장이 이미 남서울(이구원의 필명)이란 작명을 해줬던 작가가 활동 중이었기 때문이다. 이 회장은 "서남방에 기운이 서려있다"며 서남북(김영구의 필명)이라는 신인 작가의 작명도 했고, 무슨 지명 같기도 한 오동촌 등 당시의 웃기는 만화작가 이름들은 모두 그의 작품이었다.

장난같은 만화작가의 이름이 많이 등장하자 급기야는 1977년경 심의실[5]에서 "만화작가 이름들이 코미디 같다"며 고치라는 지적을 했다. 그러나 이 회장을 남서울을 남서운으로 바꾸고, ㄴ받침을 마치 ㄹ처럼 흘려 쓰는 등 자신의 작명에 이상하리만큼 집착했다. 나는 심의실의 지적을 기회 삼아 '이 때다' 하고 남제주를 본명 '이희재'로 재빨리 바꾸어 버렸다. 이것이 이 회장에게는 괘씸죄에 해당되었고, 나는 합동에서 결국 잘리게 되었다.

- 이희재 화백의 증언.

독점이 시작되면서 합동은 만화책을 세트로 묶어 만화방에 독점 공급하는 변칙적인 판매 방법을 선보였다. 만화방 영업자들에게는 "세트를 판매하든지, 아니면 접어라"는 방법으로 만화책 내용에 따른 구입자의 취사선택권을 박탈했다. 이런 판매방식의 도입으로 합동은 만화작품의 인기에 관계없이 어떤 내용의 만화건 자의적으로 생산해 팔아먹을 수 있는 체제를 구축해내는 데 성공했다. 이때부터 합동은 'A는 몇 권, B는 몇 권' 하는 하는 식의 창작편수 지정은 물론 원고료까지 일방적으로 책정하는 등의 비정상적 생산/유통 시스템의 틀을 다졌다.

또 이재화 선생의 자서록에 의하면 합동 측이 만화 원고를 심사했던 한국아동만화자율회(이하 자율위)[6]의 심의위원 인선에까지 압력을 행사했다는 얘기가 있는데, 내용은 아래와 같다.
오늘도 자율위에 결재를 하러 나갔다. 이종세 씨가 나를 보자기에 이야기를 들었다. 김기옥 씨와 김인홍 씨를 잘라버리라는 것이었다. 이유는 그들이 엄정 중립해야 할 만화심사원인데 매일 저자들을 만나 지나친 술을 마시고 쓸데없는 말이 너무 많다는 것이었다. (중략)

자율위에 오학운 씨가 나왔다. 나에게 다가온 그는 "자율위 회장은 어떻게 되는 거요?" 했다. "회장이라니?" "이번 회장은 김경언 씨를 시키시오." "그렇다면 새 이사회를 가져야 되겠는데..." 했다. 그러자 "그런 걱정은 할 것 없고 본인에게 꼭 전화하여 어떻게 해서라도 회장이 되도록 말하시오"하고 나가 버렸다. 그가 나간 후 이모저모 생각했다. 이게 어느 식인지 모르겠다. 그러나 내가 거래하는 경영주의 말이 아닌가? 고집부리다 일 떨어지면 이판에 어떻게 될 것인가. 애 어멈의 얼굴표정이 파노라마같이 떠올랐다.

마지못해 김경언 씨에게 전화를 했다. (중략) 얼마 후 이영래 씨의 후원 하에 전국대본조합[7]이 설립되었다. 그런데 전국대본조합이 본래의 대본소 정화사업만 하면 아무 일도 없었는데, 자율위에서 심사한 만화를 사후심사하겠다고 나서 문제가 발생했다. 쉽게 말해서 자율위를 잡아먹겠다는 식이었다, 그렇다면 자율위 이사도 있고 주위에 많은 저자들이 있을 텐데 소위 대본소를 한다는 사람이 만화를 심사한다는데 왜 그리 말 한마디하는 사람이 없었다. 참으로 이상했다. (중략) 내무부가 무엇을 어떻게 하겠다고 만화를 사후 심사하겠다는 단체를 만들어 주었나 이것이다 (중략) 나는 내무부에 도전하였다 (중략) 나는 소문대로 신촌(합동을 지칭)에서 거래가 끊겼다.

1973년에 소년한국일보와 공동 독점체제를 형성한 합동의 만화판 장악은 이때부터 더욱 노골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만화작가에게 생사여탈권과도 같은 원고창작 편수 결정과 원고료의 책정, 심지어는 위와 같이 이희재 화백에게 '남제주'라는 필명을 쓰도록 강요한 것처럼 신인 작가들의 필명까지 직접 작명하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졌다.

또 합동이 만화작가들의 발목을 꼼짝달싹 못하게 붙잡아 둘 수 있었던 무기 중 하나로는 만화 원고의 소유권은 물론 판권까지 장악했다는 것이다. 합동은 작가들의 원고를 매절 형태로 죄다 사들여서 이의 소유권을 포함한 모든 권한을 출판사가 갖는다는 계약서를 쓰도록 했다. 이 독소조항은 법정에까지 비화되는 등 원고 반환 분쟁의 빌미가 되기도 했고, 한국만화가협회의 집단 반발을 불러일으키기도 했지만 결국 합동 측의 원고는 작가에게 돌려지지 않았다. 현재의 출판저작권 개념으로는 언뜻 이해가 가지 않는 일방적 계약 형태였다.

5. 반 합동 저항사

5.1. 제1차 반(反) 합동 - '갈매기부대'의 반란

합동의 만화계 독주와 전횡적 군림은 만화 작가들은 물론 만화방 영업자들에게도 엄청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처음 얼마 동안에는 합동에 반발하는 대항세력이 등장했으나 얼마 가지 않아 합동의 조직적이고 집요한 방해로 끝이 났다.

'타도 합동'의 첫 포문을 열고자 한 시도로는 1967년 말 ~ 1968년 초에 벌어졌던 '황소문고 사건'이었다. 박봉희를 중심으로 부엉이문고의 작가 박현석과 김기량(김경언 화백과 동서지간)이 서울 약수동에 황소문고를 세운다는 것이 이 계획의 골자였으나, 김경언 화백의 미진한 대응으로 결국은 불발에 그치고 말았다.

두 번째 반란은 1968년 '대지문화사(대표 김길용)'를 설립, 군소 출판사와 작가 총판장 등을 규합해 합동의 독점에 제동을 걸었던 일이다. 그러나 대지문화사는 1년도 못 가 공중분해되고 말았다. 이유인 즉슨, 박봉희 씨의 증언에 의하면 "영화 쪽 일을 해왔던 김길용 씨가 만화쪽 일을 잘 몰랐던 데다가 합동 쪽의 집요한 방해를 도저히 견디다 못해 이영래로부터 2천만 원[8]을 받고 만화 원고와 경리장부 등을 모두 합동에 넘겨준 뒤 어느 날 갑자기 잠적했다."라고 밝혔다. 이로 인해 소속 작가들은 모두 합동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대지문화사는 1년 뒤인 1969년, 김창용을 대표로 앉힌 '국제문화사'를 세우고 또 다시 '합동 타도'에 나섰다. 국제문화사는 구 대지문화사의 관계자들과 인쇄시설은 물론 사진, 제본까지 만화책을 일괄 생산해낼 수 있는 탄탄한 모양새를 갖추고 출발을 했으나 이 역시 1년 반을 못 넘기고 1970년 하반기에 결국 와해되고 말았다.

또 이재화, 김정파, 박현석, 김기율 등이 합동에 반발하는 '용씨리즈' 만화를 내고 서울 을지로 3가에 사무실을 낸 것도 이맘때였다. 그러나 용씨리즈 역시 합동이 총판을 동원해 은밀한 판매통제를 가하자 얼마 안 가 해체되고 말았다. 이후 청춘출판사, 수범사, 국일문화사, 자유문화사 등 '반 합동' 출판사가 속속 생겨났지만 이들은 약속이나 한 듯이 전부 와해되고 말았다.

거기에 1969년, 만화가 임창 화백은 이향원, 박부길 등과 함께 1차로 '땡이문고'를 세워 합동과의 전쟁을 시작했다. 그러나 이 역시 합동의 집요한 와해공작으로 인해 해체되어 흡수되는 전례를 따르고 말았다.

이때부터 만화 작가들 사이에는 '갈매기부대'라는 말이 생겨났다. 이 말은 합동에 대항하는 새 출판사가 나타나면 마치 어선을 만난 갈매기처럼 만화 작가들이 떼를 지어 나타났다가는 먹이를 먹고 난 뒤 각자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다는, 작가랑 갈매기와 같은 속성을 빗댄 자조적인 은어였다.

이 와중에 박기당이 주축이 되어 작가들끼리의 과당경쟁을 막고, 작가가 직접 출판에 나서자는 '작가출판'의 움직임이 고개를 든 것도 이 때였다. 박진우가 주도한 '횃불회 사건'이 그것으로, 합동의 방해를 피해 작가 개개인에 은밀히 접촉하면서 이 움직임은 본격화되었다. 이때 박진우는 "2~3개월 간 점조직 형태로 작가들을 포섭했으나 박기정 씨가 '어떤 형태로든 독점방식은 반대한다'는 뜻을 굽히지 않아 이 계획은 실패하고 말았다. 이로 인해 횃불회의 작가 80%가 합동으로 넘어갔다. 이 영향으로 국제문화사가 문을 닫게 되었다"고 증언했다.

이렇게 합동은 자신의 독점체제에 반발하는 대항세력에 대해 온갖 방법을 동원하여 차근차근 굴복시켜 나가는 과정으로 더욱 힘을 키웠다. 1970년 국제문화사 해체 뒤 합동은 명실상부히 만화방의 천하통일을 이루었다.

5.2. '소년한국'과 '합동'

'건전한 만화로 건전한 어린이를 기르자’는 뜻 아래 소년한국일보는 우수만화 출판사업을 벌이기로 하여, 그 첫 시리즈가 오는 11일을 기해 전국적으로 일제히 발매됩니다. 4×6배판 100페이지의 부피에 ‘오프세트’ 인쇄로 매일 15종씩 발간될 이 만화책은 재미있고 명랑하고 밝은 내용을 참신한 ‘스타일’로 꾸며 6백만 독자의 어린이만화책에 ‘새롭고 즐겁고 건전한’ 바람을 불러일으킬 것입니다. 보다 혁신적인 우수 만화의 제작을 위해 만화 작가 50여명과 아동문학가, 극작가 20여 명을 동원한 황금의 집필진이 갖추어졌으며 전국의 영업소 및 한국일보의 각 지사, 지국, 보급소를 통해 어린이 만화 도서실에 배본됩니다. 명랑한 어린이의 양식으로뿐 아니라 사회의 명랑화를 위해서도 보탬이 될 이 소년한국일보의 만화를 일반 가정과 교육계에서 안심하고 권장해주시고 또한 적극 성원해주시길 바랍니다.

- 1973년 1월 7일 소년한국일보가 낸 알림 기사.
소년한국 초창기에 장기영 씨가 본인을 어떻게 알았는지 서대문구 노라노예식장 뒤편에 있는 자기 집에서 아침 일찍(오전 6시) 만나자고 했다. 그는 나에게 "만화 경쟁에서 이길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가?"를 물었고 나는 이에 대해 5일간이나 강의를 했다. 나는 "5백~6백만원 정도 투자해서 몇몇 인기작가를 데려오면 싸움은 끝날 것"이라고 말하면서 신촌(합동출판사)과 경쟁하도록 부추겼다. 나는 예전의 합동에 당했던 쓰라림을 기억하면서 소년한국일보사가 경쟁을 통해 이겨줄 것을 은근히 바랐는데, 결과는 만화유통 지분을 '한국'과 '합동'이 나눠 갖게 되는 것으로 낙착이 났고 또 이로 말미암아 독점체제는 더욱 공고해지고 말았다. 나는 결국 만화유통계에 새로운 독점체제를 구축하는 데 기여한 꼴이 되고 말아 씁쓰레한 기분이 들었다.

- 전 한국만화출판인협회 회장 박봉희 씨 증언

합동의 독점에 반발한 군소 출판사들이 하나같이 참패를 면하지 못하자 한국일보의 자회사인 소년한국일보사가 1971년[9]에 이르러서 만화출판/유통업계에 투신하며 합동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이에 앞서 한국일보는 1968년에 자매지인 <주간한국>을 통해 '만화왕국 신촌대통령'이라는 제하의 기획기사를 통해 합동의 만화 유통독점과 이영래 회장의 만화계 전횡을 샅샅히 고발하는 한편 한국일보의 사설까지 동원해 합동의 부조리를 비판했다. 그러나 한국일보의 이러한 비판은 합동에 이은 또 하나의 독점 만화유통체제를 만들기 위한 터 다지기에 지나지 않았다.

1973년 1월, 소년한국일보사는 "합동동우회의 독점사업을 깨뜨리고 대본업자와 만화 작가의 권익을 보호하며 아동만화 출판업계의 정화 및 정상화를 기하겠다"는 사업취지를 내세워 합동과의 일전을 시작했다. 영세 출판업자들이 이합집산을 거듭하면서 '합동'이라는 독점 체제를 완성했던 만화유통 시장에 조직과 자금력을 갖춘 대형 언론사가 뛰어든 것은 대단한 사건이었다. 당시 소년한국일보사에서 만화출판을 전담했던 만화운영팀의 책임자는 고봉진, 제작판매는 장기태 총무이사가 맡았으며 초창기 전속 작가로는 박기정 그룹의 작가 7~8명이 참가했다.

그러나 소년한국일보는 당시 만화계에서 일본 만화를 복제/전재하고 있다는 눈총을 받아왔다.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이재화 화백은 자서록에서 아래와 같이 밝혔다.
나는 오랜만에 신동헌 씨와 김경언 씨를 만나 한자리를 했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 '소년한국' 이야기가 나왔다. (중략) 나는 한국일보 이전 태양신문에 관계했던 일로 장기영 사장과는 특별한 배려가 있었다. (중략) 이런 관계를 잘 알고 있었던 김경언 씨는 소년한국의 만화를 지적하면서 사장에게 한 마디 하라는 것이었다. 이때 소년한국에는 임창 씨가 주로 만화를 많이 그렸는데 거의가 소년한국은 일본 만화를 그대로 복제 게재하여 소위 일간신문의 체면도 생각 못하고 한편 한국 만화를 똥칠하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여하튼 '소년한국일보'를 앞세운 언론 재벌과 이영래의 '합동'은 1년 가까운 지루한 소모전을 벌였다. 합동이 책값을 낮추자 소년한국도 울며 겨자먹기 식으로 값을 낮추었고, 한 명이라도 더 많은 인기작가를 데려오느라 양측은 온갖 편법을 동원하는 등 치열한 제살깎기 전쟁을 치렀다. 만화 유통을 독점하겠다며 치열한 경쟁을 했던 합동과 소년한국 측은 결국 1년 사이에 모두가 1~2억원 대의 손해를 보았다. 그러나 양측은 경쟁을 하는 와중에도 협상을 위한 물밑 접촉을 진행했고, 1973년 12월에 마침내 두 회사는 각각 월별만화발행종수에서 60:40[10]의 지분을 갖는다는 합의를 하고 패권 다툼을 종료했다. 이로써 새로운 독점 업체가 또 하나 탄생한 것이다.

이후 소년한국은 만화계에서 '또 다른 합동'이란 비난을 받으면서도 독점의 고지를 사수하기 위해 자체 만화작가의 양성에 힘을 쏟아 1973년부터는 신인작가 공모에 나섰다. 이 등용문을 통해 배출된 대표적인 작가가 <아기공룡 둘리>로 유명한 만화가 김수정이었다.

소년한국과 합동이 합쳐 새로 만들어진 '합동'은 만화책을 공동 출판하는 공판소를 설치했다. 이로 인해 서울지역 총판은 일대 변혁이 일어났다. 5개 총판 중에 소년한국 측은 김진, 이호열, 송상희 등이 3개소를 맡았고 합동 측에선 김승환, 홍순창 등이 나머지 2개 총판을 맡았다. 이들의 공동 만화유통 장악은 자유경쟁이 시작된 1982년까지 계속되었다.

이들의 공동 판매체제에 관한 증거로 1976년에 만화방 주인들이 연대해 청와대에 보낸 진정서 내용에 따르면, 당시 합동출판사의 간판 회사인 상록문화사(사장 이종세)가 아동 만화를 쉬지 않고 1종당 약 2,300권(1975년 3월까지 2,700권)씩, 매일 만화책 2만 3천 권을 냈으며, 전국 만화방에 공급하는 정가는 1백원이나, 외무원의 수수료 등을 빼면 85원 정도에 공급되어 연간 6억 5천만 원의 매상을 내 순 이익이 1억 원 이상으로 추정된다고 밝혔다. 그리고 소년한국일보(사장 장강재)는 합동과 동일한 면에서 공동 보조하여 같은 양의 만화책을 같은 값에 판다고도 밝혔다.

5.3. 제2차 반(反) 합동

언론사까지 가세한 새로운 '합동'이 한국 만화유통계를 완전히 장악하자 이에 반발하는 '반 합동' 움직임도 덩달아 일어났다. 그러나 이 역시 합동에 대항하기는 중과부적이었다.

1974년에 임창 화백은 자신의 자본으로 박부길, 박수산(1940[11]~1984) 등의 작가를 참여시켜 2차로 '땡이문고(사장 박봉희)'를 만들어 '새 합동'에 반발했다. 땡이문고는 1975년, 당대 인기작가였던 이상무를 비롯해 이향원, 허영만, 김철호 등을 작가 출판 형태로 끌어들여 서울 동대문에 사무실을 얻고 출판사명을 '거인문고'로 바꿔 합동과 치열한 경쟁을 벌였다.

또 1970년대 중반에 이르러 스스로를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제3진' 작가를 자처한 이영복, 이행남, 김완기, 김현우, 백일석, 호민, 천광석, 정훈, 태수, 신문수, 이화춘 등이 연합해 '작가씨리즈'를 세워 합동의 횡포에 맞섰다.

작가씨리즈는 당시 만화방에 게시할 포스터까지 제작/배포하는 등 만화계 내부의 독점판매 형색과 이로 인한 작품에 질적인 저하를 개선키 위해 힘썼다. 당시 배포된 포스터 문구에는 '만화계의 일대혁신'이란 구호와 함께 '자유판매 보장만이 우량만화 배출한다'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건 걸 보면 당시 합동측의 독점 횡포가 얼마나 심했는지 말해 준다.

중소 출판사를 중심으로 한 '반 합동'의 기세는 1975년부터 본격화되었다. 거인문고를 필두로 현대(대표 유덕수), 동진사(대표 하영조), 화문각(대표 유동근) 등의 잇단 출현이 그것이다. 반 합동 계열의 출판사들은 지방 총판, 만화방 영업자를 찾아다니며 '세트제 강매제도 폐지를 통해 합동을 타도하자'고 외치며 지원을 호소했다. 특히 거인문고, 동진사, 현대는 동대문 쪽에서 공동으로 사무실을 쓰며 신촌의 아성을 무너뜨리기 위해 힘을 쏟았다.

그러나 동대문에 소재한 3사는 갑자기 세무사찰을 당했고, 특히 거인문고는 보관 중이던 원고를 합동 측에 의해 빼앗기고 이의 반환을 위한 법정소송이 벌어지는 등의 우여곡절을 겪다 결국 소속작가 대부분이 합동으로 이적되는 바람에 와해되고 말았다. 합동 측의 집요한 방해공작으로 인한 참패였다. 이로 인해 합동에 맞서다가 경제적 어려움을 겪어야 했던 허영만 화백은 <부자사전>에서 이 때를 회상하면서 '한국만화계는 다시 어둠에 잠겨야 했다' 라고 회고했다.

5.4. 만화가협회의 가세

위와 같이 합동으로 인한 피해가 속출하자 1976년에는 한국만화가협회 역시 일제히 '반 합동'의 포문을 열었다. 당시 만협 회장인 박기당 화백은 그해 1월에 <만협소식> 1/2호를 통해 '만협 부조리에 대한 고찰'을 발표하고 합동 측의 횡포를 낱낱이 지적했다. 이어서 <뿌리깊은 나무> 8월호에 임창 화백이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합동의 독점횡포를 고발한 '더러운 어린이 만화 장사'가 실렸고, 이어서 <세대> 11월호에는 언론인 오소백(1921~2008)의 집중 취재로 독점유통 만화계의 부조리를 고발한 '흙바람 속의 아동만화계'가 잇달아 발표되는 등 합동의 횡포는 더 이상 만화계만이 아닌 사회 전체의 치부임이 환기되기 시작했다.

이에 만화계와 만화방 업자들도 연대해 청와대와 문화공보부를 비롯한 관계요로에 진정서와 호소문을 보내는 등의 노력을 기울였다. 특히 1976년에 다수의 만화가들이 서명한 이 <호소의 글> 서두에는 "연간 3천 종이 상회하는 세계적 발행기록의 한국 아동만화는 현재 한국일보사와 합동문화사(희원사, 칠성사, 화성사, 대우사 등 4사) 양대 동업체의 시장 독점으로 인해 만화의 질은 최악으로 추락하여 6백만 아동의 정서 순화에 가공할 위협을 주고 있다. 이 무책임한 출판업자(한국, 합동)들은 출판의 기본 이념조차 외면하고 질보다 양적 생산에 급급, 철저한 영리만을 추구하고 있으며 그 수단, 방법 등을 아래에 골자화하여 적는다."라고 지적하고 있었다.

6. 최후

이렇게 공권력의 묵인 하에 메이저급 언론사까지 담합시킬 정도로 위세(혹은 횡포)가 대단했던 합동출판의 최후는 의외로 허무했다.

우선 1972년부터 만화책을 빌려보는 게 아니라 사게 하고자 고급화를 내세우며 어문각에서 내던 클로버 문고의 등장도 제법 타격을 주었다. 종이질도 합동의 엉망인 만화책과 차원이 다르고 만화가들에게 주는 대우도 훨씬 좋았기에 합동에 이를 갈던 만화가들이 하나둘 클로버 문고로 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여전히 만화방이 주류였기 때문에 여전히 합동이 절대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반면 반 합동의 움직임은 1970년대 중반에 들어 만화방이 포화상태에 이르러 만화책의 유통 규모가 하향추세를 걷고 있는 때에도 계속되었다. 특히 1979년에 이르러 이상무, 장윤식, 임창, 허영만, 김민 등이 참여한 삼현출판사(대표 박봉희), 새동무(대표 소동석), 진송문고(대표 최진식), 성심(대표 조한구), 프린스(대표 정병현), 타임(대표 이재근) 등이 '연합친목회'를 결성하여 합동에 일제 반격을 시작했다. 연합친목회는 합동의 만화책과 다른 3백원짜리 두꺼운 특판만화로 경쟁을 했다.

1980년 내내 계엄사를 동원한 시사만화 가위질과 '만화정화방안' 등으로 만화 탄압 일변도의 정책을 펼치던 전두환 정권은 1981년부터 정권에 대한 반발을 무마하기 위해 3S 정책라는 회유책을 시행하자 만화도 조금씩 음지에서 양지로 풀리기 시작했는데, 이 시기에 보물섬을 위시로 한 만화잡지가 다시 나타나게 되었다.[12]

게다가 보물섬은 '만화를 통한 건전한 아동 문화 육성'을 명분으로 하여 초기부터 양질의 만화들을 실어서 어린이들을 침침한 대본소에서 양지로 끌어내는데 성공한다. 또한 보물섬이 인기를 모으면서 눈치를 보며 만화 부록만 내던 타 어린이 잡지사에서도 만화연재량을 대폭 늘렸고 이는 만화가들을 잡지[13] 쪽으로 몰려나가게 하는 촉매제가 되었다. 또한 이들 잡지사에서의 만화가들의 대우가 합동과는 비교도 안 되게 좋았기에[14] 당연히 합동출판사는 세를 급속히 잃었다. 비슷한 시기 극장판 애니메이션이 크게 인기를 모았던 것도 한몫했다.

1982년에 합동과 동거했던 소년한국일보사가 합동과의 결별을 선언하여 연합친목회와 거래했고, 그 직후 무협지를 주로 냈던 대룡출판사가 만화 시장에 진출해 만화가들에게 100만원을 선불하겠다는 조건을 내세워[15] 합동에 남아있던 만화가들 대부분을 스카우트해갔다. 그러나 이 때는 만화방이 더 이상 블루오션이 아닌 레드오션으로 전락했고, 만화 독점에 따른 폭리 추구가 불가능해지면서 사업으로서의 만화유통 독점은 매력을 잃어갔다.

합동의 '종말'은 1986년에 찾아왔다. 대한출판문화협회 산하에 박봉희 씨를 회장으로 앉힌 한국만화출판인협회가 세워져 20년만에 우리 만화계의 독점이 사라지고 만화책 유통업계에 자유 경쟁시대가 도래하여 합동의 횡포는 도태의 길을 걸으며 역사속으로 사라졌다.

7. 합동이 남긴 교훈과 평가

만화평론가 손상익은 우리 만화사에서 합동의 유통 독점은 많은 교훈을 남기고 있다고 하여 아래와 같이 말했다.

우선 출판문화 사업을 단지 영리추구에 급급한 사업적 취향의 인사가 독점해 횡포를 부렸다는 것이다. 이로 인해 우리 만화는 무려 40여년을 답보 상태에서 맴돌았다. 우리 만화와 일본만화의 운명이 크게 달라진 이유 중 하나가 바로 '합동'이라는 변수였다. 합동은 우리 만화 창작계의 자유경쟁 원칙을 철저히 파괴하여 일방적 통제로 우리 만화시장을 황폐화시켰던 것이다. 합동이 사라지고 난 1980년대 이후에야 수준 높은 우리 만화작품이 나온 것은 이를 뒷받침하는 반증이다.

이 외에도 합동은 만화 작가간의 상호 불신을 조장하고 나아가 실력보다 인맥이나 수완을 중요시하는 반 문화적 풍토를 만화계 내부에 깊이 드리웠다는 점에서 많은 교훈을 남겼다. 우리 만화사에서 합동이 끼친 역할은 반면교사나 다름없게 되었다.

또 합동이 우리 만화유통업계에 끼쳤던 부정적 측면은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1. 만화유통 장악을 통해 만화 작가들의 고유한 창작 영역에까지 통제의 손길을 가했다는 점이다. 이로 인해 우리 만화 및 만화문화의 전반적인 수준을 퇴행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2. 자유경쟁 판매방식을 무시한 강제 판매시스템을 도입해 만화계 전반의 거센 저항을 받았다. 독점과 강매는 이윤 극대화를 위한 저질, 저가의 만화책을 양산시키는 발판이 됐고 이로 인해 만화방이 사회로부터 혐오시설로 지탄을 받는 한 원인이 되었다.

3. 독점판매에 의한 거대 자본의 축적으로 경쟁 출판사를 무력화시키는 등 지속적인 매수행위가 가능했고 이로 인해 만화계 내부가 서로를 불신하는 비 문화인 집단으로 전락되고 말았다. 매수행위는 공정한 경쟁의 원칙을 무너뜨려 만화계 전체를 무기력하게 했고, 만화작가 개개인은 물론 심지어 심의기구의 회장과 심사위원 임면(任免)에까지 실권을 행사하는 등 우리 만화계를 사조직화해 실질적으로 원격조종하는 도구로 사용됐다. 이렇게 합동 시절에 형성되었던 그 앙금의 뿌리는 지금까지도 음이야 양이야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4. 합동이 상당 기간 우리 만화계를 파행으로 몰고 갈 수 있었던 것에는 만화인들의 집단 진정과 호소에도 불구하고 정부 당국이 이 독점체제를 직/간접적으로 묵인했다는 점도 빼놓을 수 없다. 현재 만화계가 정부의 문화 정책을 근원적으로 불신하게 된 동기가 합동을 비호했던 당시 정부의 실정에서 비롯되고 있음은 자명하다.

8. 기타

9. 출처

10. 관련 문서

11. 관련 자료



[1] 실질적으로는 박기정의 영수가 대표였다.[2] 당시 하고명, 백산, 손의성과 함께 '멋쟁이 백구두 4총사'로 불렸다.[3] 그러나 박기당 화백은 1976년 <만협소식> 2호를 통해 작가 출판사의 첫 태동을 1967년이라고 회고했으나 기록에 의한 여러 정황을 참작할 때 이의 출현은 1966년에 이미 시작된 걸로 여겨진다.[4] 합동은 1967년에 설립되었으므로 이쪽이 먼저(바닝은 1971년). 바닝의 경우 돈 되는 연예인들은 자사에 넣는 것이 아니라 산하 소속사에다가 넣고 그곳의 수입금들을 많이 퍼가는 시스템으로 돈을 번다.[5] 한국도서출판주간신문윤리위원회(현 간행물윤리위원회)를 지칭함.[6] 1961년 5.16 이후 창설되어 1968년에 한국아동만화윤리위원회에 사전심의 업무를 넘길 때까지 존속했던 만화가와 만화출판업자 중심의 자율심의기구. 참고로 이재화 화백 역시 자율위 창설 당시 실무진 중 하나였다.[7] 정식 명칭은 '전국대본업정화협회'로, 이영래의 합동 측이 주축이 된 내무부 산하 사단법인체로서 1966년 9월에 단체인가를 받음. 당시 합동 측의 이익을 대변한 어용단체로 만화방 업자들의 지탄을 받았다.[8] 이 액수에 대해서는 여러 이견이 있는데, 2천 4백만원 또는 1천 4백만원이라는 얘기도 있다.[9] 출판사 등록은 1972년 2월 3일에 했다.[10] 실질적으로는 50:50이라는 얘기도 있다.[11] 호적상으론 1944년생.[12] 참고로 이 당시 보물섬을 창간한 육영재단의 총재가 박근혜였는데, 땡땡주의자로 유명했고, 보물섬에도 잠깐 땡땡의 모험을 연재하게 한 적이 있었다. 이렇게 고분고분 만화광으로만 남았으면 모두에게 좋았을텐데... 그랬기 때문에 만화 시장에 대한 이해도가 다소 빨랐을지도 모른다.[13] 그 이전에도 여러 잡지에서 만화를 연재했으나 호당 몇 편정도 싣는 수준에 그쳤기에 많은 만화가를 수용할 수 없었다.[14] 사실 합동출판사가 만화가들을 사유화해서 노예처럼 부리는게 비정상적인 것이다. 어떤 출판사를 비교하더라도 합동보다는 조건이 좋을 것이다.[15] 당시 대학등록금이 50~60만원, 소수 하이컬러 계층이었던 대졸 초임이 30만원 정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