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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09 10:14:47

허영만

허영만의 주요 수훈 및 수상 이력
{{{#!folding [ 펼치기 · 접기 ]
대한민국 문화훈장 수훈자
파일:문화보관.jpg
<colbgcolor=#980000><colcolor=#EDE4D3> 연도 <colbgcolor=#EDE4D3><colcolor=#980000> 2022년
이름 허영만
분야 만화가
보관문화훈장(3등급)
}}} ||
허영만
許英萬 | Heo Young-man
파일:허영만 인터뷰 프로필.jpg
<colbgcolor=#a4a4a4><colcolor=#ffffff> 본명 허형만 (許亨萬)
출생 1948년 8월 12일 ([age(1948-08-12)]세)
미군정 전라남도 여수군 화양면[1]
국적
[[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
본관 양천 허씨 (陽川 許氏)[2]
학력 여수동국민학교 (졸업)
여수중학교 (졸업)
여수고등학교 (졸업)
가족 부친 허종, 모친 박옥정
배우자 이명자
아들 허석균
딸 허보리(1981년생)[3][4]
친손자 허민, 허윤
외손자 이한진, 사위 이수민
직업 만화가
종교 불교
데뷔 1974년 한국일보 '집을 찾아서'
링크 파일:유튜브 아이콘.svg | 파일:X Corp 아이콘(블랙).svg

1. 개요2. 생애
2.1. 2000년 이전2.2. 2000년 이후
3. 오너캐4. 비판
4.1. 시대에 뒤떨어진 시각과 국수주의, 미신
4.1.1. 국수주의4.1.2. 미신4.1.3. 부자 사전
4.2. 기득권, 꼰대적인 시각
4.2.1. 청년 실업을 청년들의 눈높이 탓으로 돌림
4.2.1.1. 식객 자반 고등어4.2.1.2. 식객 순대 편4.2.1.3. 노동법 보호도 못 받는 노동을 함이 아름답다고?
4.2.2. 자본가 미화
4.3. 스토리 작가에 따른 작품성 격차4.4. 맛의 주관적 잣대
5. 사건 사고
5.1. 표절 및 저작권 위반5.2. 성경의 역사 허영만 저격 논란
6. 주요 작품 목록7. 수상8. 방송9.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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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만화가. 70년대부터 2000년대에 이르기까지 한국만화 정점에 있던 한국만화계의 대부이자 한국 만화 발전의 주역으로 대본소-만화잡지-웹툰 시대를 모두 경험한 만화가이다. 그래서 허영만은 세대를 구분할 수 없는 만화가로도 불리는데, 한국 만화 초창기부터 활동하며 독보적인 영역을 개척하면서 무당거미, 각시탈, 비트, , 타짜, 날아라 슈퍼보드, 식객, 말에서 내리지 않는 무사 등 수많은 만화를 그려왔다.

2. 생애

2.1. 2000년 이전

멸치어장을 하던 아버지 허종(許宗)의 사업 실패로 가세가 기울어 화가 대신 만화가의 길을 택했다. 허영만의 아버지는 사업 시작 전엔 일제 순사 출신으로 해방 후에는 경찰로도 근무했는데 하루는 허영만이 왜 일제 순사를 했냐고 물어봤더니 아버지가 "먹고 살 길이 없어서 취직하려고 순사 시험 봤는데 덜컥 붙어서 하게 됐다."고 한다.[5] # 인근 해역 섬사람들이 아버지 송덕비를 세워준 걸 보면 그래도 악질 순사는 아니었던 것 같다고 술회했다.[6] 그래서인지 독립운동가가 주인공으로 나오는 쇠퉁소나 각시탈 등 독립운동 설정의 만화를 그리기도 했다. 박문윤[7], 엄희자, 이향원 등의 문하에서 수학했다.

1974년 한국일보 신인만화공모전에 "집을 찾아서"가 당선되면서 만화가로 데뷔했다. 데뷔한지 40년이 넘는 한국 만화계에서 손꼽히는 대가 중 한 명이다. 그가 40년 동안 그린 만화 수는 본인도 모른다고 할 정도로 많다. 워낙 많다 보니 초창기에는 우주 흑기사(건담 표절. 영화사는 건담 하청을 맡아 남은 작화지를 재활용하여 만듦), 망치, 1989년 "미스터 손(초반부가 드래곤볼의 설정과 유사하다는 지적 후 부르마 격인 여자를 빼고 사오정, 저팔계 투입으로 대박이 나서 나중에 애니메이션 "날아라 슈퍼보드"로 만들어졌다.) 등의 논란도 있었다. 만화평론가인 박기수 한양대 교수는 "박봉성, 이현세, 허영만 같은 작가도 알게 모르게 초기에 일본 만화의 영향을 받았지만 그걸 극복하려고 많은 노력을 했고, 이 부분은 훗날 우리 만화사에서 긍정적으로 평가해야 할 부분이다."라고 평했다.[8]

무협만화가로 알려진 이재학(만화가) 문하에서 그림을 그리며 수습생활을 하기도 했다. 이재학 이름으로 연재되던 히라소니가 허영만이 그림을 많이 맡았고 이 히라소니는 각시탈을 창작할때 영향을 주기도 했다. 더불어 이재학 그림체 영향을 초창기에 허영만도 많이 받았다.

1975년에 발표한 각시탈이 인기를 끌면서 본격적인 대중적 인지도를 얻기 시작했다. 이후 '각시탈'의 후속 시리즈, '무당거미' 시리즈로 인기를 끌었고 '각시탈'의 스핀오프 버전이라고 할 수 있는 '쇠퉁소'(어깨동무에 연재)와 '무당거미'의 비쩍 마른 주인공을 연상케 하는 강공이 등장하는 '변칙복서'를 어린이잡지 새소년에 연재, 히트를 치면서 인기작가의 반열에 올랐다.

비슷한 시기에 어깨동무에 연재한 '태양을 향해 달려라', '쟘비지강의 달무리' 또한 인기를 끌었다. 80년대 중반까지 주로 무당거미 시리즈와 기타 작품이 대본소를 통해 유통되었고, 이 시기에 이현세, 이상무, 박봉성 등과 함께 대본소를 장악한 대표적인 한국만화가가 되었다. 원래 주인공 이름은 각시탈까지 외자인 이영이었지만 무당거미 이후 이강토로 바뀐다. 참고로 이강토는 각시탈의 에피소드 가운데 두만강의 어느 마을에서 만나게 되는 어느 소년의 이름이기도 했다.

한편으로 이 때 허영만은 개인적으로도 좌절을 겪기도 했다. 당시 만화시장을 과점하며 만화판을 쥐락펴락 했던 합동출판사에 맞서서 '땡이문고'를 통해서 만화를 출판시키려다가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었고, 이 때 다른 만화가들과 마찬가지로 돈벌이를 위해서 별 수 없이 합동으로 되돌아가야 했다. 허영만의 작품 중 부자사전에 보면 이 당시 에피소드를 2페이지에 걸쳐 술회했는데, 깡말라서 갈비뼈가 튀어나온 채 트렁크 팬티만 입고 펜을 무기처럼 쥐고 있는 작가 오너캐가 "끝까지 싸운다!"며 눈을 부라리고 있다.

당대 다른 만화가들과 마찬가지로 대본소 만화와 보물섬에 '미스터 고'로 유명한 '제 7구단' 등 어린이용 만화잡지의 연재활동 등으로 작품생활을 이어가던 1986년에 허영만은 당시 만화계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새로운 방식의 작품을 발표했는데 이른바 '스토리 작가'의 도입이 그것이다. 1986년 발표한 '카멜레온의 시(詩)'는 김세영과 함께 한 첫 작품이다.

이 작품은 당대 다른 만화들에 비해 보다 심오한 내용과 대사 구성, 코믹적 요소를 완전히 들어내 버린 스토리 구성 등으로 인해 성인 만화독자들에게 큰 인기를 끌었다. 이 성공은 허영만에게 그림체도 그림체이지만 스토리를 구성하기 위한 자료 수집과 다방면의 지식 등이 중요하다는 인식을 가져다 준 것으로 보인다.

이후 김세영과 함께 한 '고독한 기타맨', '오! 한강'[9]도 성공을 거두는 등 한동안 이 허영만-김세영 체제는 승승장구했다. 이후 김세영 작가는 빠지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다소의 잡음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여러 자료에서 확실한 내용은 나오지 않지만, 아마도 성공에 따른 수익 배분에 있어서 김세영 작가의 불만이 많았던 것으로 보여진다. 한때 허영만과 같이 작업한 만화 '타짜' 등에 대해 공동저작물인정 운동을 벌였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타짜(만화)는 1~3부는 김세영이 스토리를 썼고, 4부는 허영만(혹은 다른 작가)이 스토리를 담당해서 전작과 분위기가 확연히 다르다.

하지만 김세영도 이후 수익 배분에서 논란을 일으켰다. 갬블 시리즈를 같이 작업한 강영환은 김세영을 저작권법 위반으로 고소했다. 김세영은 강영환의 이름을 빼고 자신 홀로 그리고 작업한 것처럼 작품을 재연재하여 자가당착이라는 비난을 받았다기사

80년대 후반 허영만은 다소 아스트랄한 주제의 만화를 그리기 시작했는데, '블랙홀'과 '화이트홀'로 대표되는 이 작품들은 저승과 영혼, 미스테리 현상에 무속에다가 외계인 등의 신비주의적 주제들을 다루고 있다. 이들 작품은 허영만의 작품에서 매우 특이한 경우라고 할 수 있는데, 그 이전과 이후에서 비교적 사실적인 스토리와 배경을 강점으로 하던 작가가 갑자기 이러한 주제를 다루는 것에 대해 여러 독자들이 기이하게 생각했다고 한다. 한편으로는 이 작품들 중 일부는 그림체에서 기존의 허영만 작품에 비해 현저하게 낮은 퀄리티를 보여주고 있다. 이는 80년대 말 다른 작가들과 마찬가지로 소위 '대본소 시스템'이라는 걸 도입했기 때문이다. '대본소 시스템'이라는 건 한마디로 주요 스토리라인과 장면만 메인 작가가 그리고 나머지는 '제자'라고 불리는 이들이 그리는 방식이다. 권당 인세가 형편없는 수준인데다가 빠르게 다음 권을 그려나가야 수지가 맞는 대본소 시스템 특성 상 작품의 질보다는 빠른 속도가 더 중요했다. 때문에 주조연급 캐릭터 외에는 한 눈에 봐도 대충 그린 것이 단번에 확인되는 등 전반적인 작품의 질이 급격하게 낮아졌지만, 당시 만화가들의 경제적 형편을 살펴보면 이는 어쩔 수 없었던 고육지책이었다. 반면에 위의 신비주의적 작품의 인기는 오히려 기존 작품을 압도했는데 이는 제자들의 작품의 상상력이나 스토리가 더 우수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배고픈 작가와 만화에 열정만을 가지고 있었던 그 작가의 제자들('식객')의 저렴한 노동력(혹은 세 끼 밥만 제공하는)이 만난 시대의 비극적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이래저래 얘기를 들어보면 허영만 본인도 이 시기를 생각도 하기 싫어한다. 오죽하면 타임머신이 있다면 그 때로 가서 말리고 싶다며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후회되는 일이라고 한다. 식객에서도 보성레스토랑 일행 가운데 하나인 만화가 김경민이 성찬과 같이 국수공장을 작품 소재 취재로 가서 국수를 뽑는다는 사장의 말을 듣고, 수십 명씩 두는 대본소 만화공장 사장이 "만화를 한달에 얼마나 뽑습니까?" 말한 걸 생각하면서 "만화가 국수냐! 뽑게?" 자기도 모르게 화내는 묘사를 넣은 걸 보면 만화공장체제를 엄청 싫어하는 걸 알 수 있다.

이때 허영만의 화실에서 허영만 이름으로 만화 그리다 독립한 인물이 조운학이다. 서술된 것으로만 보면 인기가 없었을것 같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사실은 '블랙홀'과 '화이트홀'은 대본소에서 아주 인기가 많았다. '블랙홀'의 경우는 작품성으로 보면 나아가서 대표작이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을 정도의 명작 이다. 자신의 작품이 아니어서 문제일 뿐이다. 안타깝게도 지금은 찾아볼 방법이 없다. 한편, 1988년에 발표한 '미스터 손'은 1990년에 '날아라 슈퍼보드'라는 제목으로 애니메이션화되어 KBS에서 방영되었고, 1992년 방영 당시 42.8%라는 국내 애니메이션 역사상 전무후무한 시청률을 기록하기도 했다. 원작 만화에서 어린 소년인 손오공과 미소녀가 같이 여행하는 초기부분이 드래곤볼 설정과 비슷하여 논란의 소지가 있자 잡지 연재 11회차부터 그 캐릭터를 삭제하고 삼장법사와 사오정 저팔계를 투입하게 되었다. 물론 다른 인물들 투입으로 결과적으로 대박이 났지만 비난의 소리 때문에 굳이 그런 결정을 내렸어야 했나하는 평가도 있다.

미소녀와 손오공이라는 설정이 드래곤볼과 유사하지만 그것을 오마주로 삼아 나름의 오리지널리티를 추구해갈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초기연재시 미로 캐릭터는 상당히 인기가 좋았었다. 이 시기 망치라는 작품또한 미래소년 코난의 설정 즉 세계종말 후 무인도에서 사는 괴력을 가진 소년에 대한 비슷한 설정이 사용되어 논란이 있었다. 대본소 시장이 위태위태하던 시절부터 허영만은 본인의 주특기를 살린 만화들을 만들어가기 시작하는데, 90년대 초반과 중반에는 매우 사실적이고 디테일한 스토리를 살린 만화들을 만들기 시작했다. 90년대 한국사회에서는 x세대가 대중문화 주류로 부상했는데, 이들은 이전의 집단주의적인 성향에서 벗어나 개인주의를 추구하고 자의식이 강하며 기존의 가치나 관습에서 자유로운 특성을 지녔다.

이러한 시대의 특징을 절 포착해 허영만이 작품에 구현시켰는데 그것이 비트다. 비트는 영화로도 나왔는데 1997년 서울에서 35만관객을 동원하며 흥행에 성공했다. '퇴역전선'이나 광고회사 직원들의 애환을 다룬 '미스터Q'나 '세일즈맨' 등의 기업/직장인 만화, 48+1과 같은 갬블만화 또한 그 시기 인기를 끌었고, 넓게 보면 만화 자체도, 드라마도 성공한 '아스팔트 사나이'도 여기에 해당될 수 있고, 지금까지 발표되는 작품들도 이 맥락과 닿아있는 작품들이라고 할 수 있다. 90년대 발표한 일련의 작품들로 허영만은 자신의 독보적인 오리지널리티와 명성을 획득한다.

2.2. 2000년 이후

꼴을 그릴 당시엔 식객과 동시연재를 하다 2009년 2월자로 식객은 지면에서는 연재가 종료되었다. 3월 19일부터 파란에서만 연재하고 한동안 쿡에서 연재하다가 2010년 3월자로 완결되었다.

인터뷰에서 70년대엔 고우영, 이상무에게 밀리다가 80년대 들어와 이현세에게 밀려 편집장에게 '허선생은 2등 전문이구먼'이라는 소리를 들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현세의 작품들이 당시 시대적 분위기에 더 맞았던 것뿐이고, 현재의 평가도 그렇다는 건 아니다. 평가라는 건 시대에 따라 변하게 되어 있고, 남벌 등의 작품에 나오는 이현세의 과도한 마초이즘은 지금에 와서는 비판은 커녕 조롱의 대상에 가깝다. 상대적으로 꾸준하게 높은 평가를 받아온 허영만과는 다른 것이다.

작품 하나 그리는데 필요한 배경지식을 위해 엄청난 양의 자료수집을 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식객의 경우 이호준 취재담당과 함께 전국을 누비벼 준비기간만 3년이 걸렸다고 한다. 몇주씩 집에 안가고, 텐트에서 숙식을 해결하기도 했다. 그러한 철저한 현장 취재 덕분에 식객 '비육우' 편은 축산물 등급 판정소 홍보물로도 활용되고, '쇠고기 전쟁' 편은 요리학교 교재로도 쓰인다. 다만 이나 부자사전은 예외. 자료를 많이 모으다 보니 자료와 만화가 역전되어 만화를 위해 자료를 모으는 것이 아니라 모은 자료들 중 만화로 그리기 적당한 에피소드를 추려내어 만화로 그려놓는 게 아닌가 싶을 때가 있다. 특히 식객은 후반부로 갈수록 실존인물에 실화를 사용하는 비율이 늘어가고 있다.

원로 만화가임에도 불구하고 여러가지 쟝르에서 끊임없이 다양한 시도를 하고 있다. 그의 만화를 원작으로 하는 영화드라마가 만들어져 인기를 끈 경우가 많다. '식객'과 '타짜'는 둘 다 영화와 드라마로 제작되었다. 그외에 영화화 된 작품으로는 '각시탈', '비트'와 '48+1'이 있으며, 2013년에는 미스터 고 3D가 개봉되었다. 2013년까지 드라마화된 작품으로는 '각시탈', '아스팔트 사나이', '미스터Q', '사랑해'가 있다.

2013년 4월 식객2카카오페이지에 연재하기 시작했다. 다른 웹툰들과 다르게 유료 웹툰이다. 월 2,000원이라고 한다. 올 컬러라고 하니 기존에 식객을 보았던 사람들에게 어필이 가능하다.참조 더불어 앞으로 10년은 계속 만화가로 활동하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2015년에는 미스터블루중앙일보커피 한잔 할까요?를 연재 중이다. 2018년 1월 28일부터는 네이버 웹툰 아버지의 컵을 정식 연재하기 시작했다. 2018년 4월 한국경제 TV 와우넷에 주식투자를 그린 <3천만원>을 연재했다. 이후 전문가의 도움을 받으며 <허영만의 6000만원>을 연재하였다. 하지만 2020년 6월 25.02% 손실을 내며 연재가 중단됐다.참조

3. 오너캐

오너캐는 특별히 정해져 있지 않으나, 식객에선 베레모를 쓰고 옆구리에 종이들을 낀 모습으로 자주 등장한다. 60회 메밀묵 편에서 등장한 까다롭기 그지없는 암행어사가 바로 허영만의 오너캐였다. 잡지에 맛집 칼럼을 쓰는 쉽게 말해 인기절정의 파워블로거 같은 느낌의 영향력 있는 칼럼니스트로 묘사되는데 이 사람이 별점 4점 이상을 주는 집은 기존에도 이미 맛집으로 유명한 집이라서 더욱 신뢰가 높다는 듯.

부자사전에서는 리트리버 애완견 처칠과 함께 나오는데 대학생 자식을 둔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회춘한 모습으로 그렸다. 다만 부자사전 작중에서 허영만의 화실이 딱 한 번 나오는데, 거기서는 본인과 닮은 캐릭터가 따로 나온다. 40대만 해도 머리카락이 많았지만 나이가 들면서 탈모가 심해졌다. 더불어 식객 냉면 편에서 냉면가게 주인으로 나온 게 허영만의 60대 모습이기도 했다.

4. 비판

시대의 전환점의 경계선에 선 작가들이 비판의 표적이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숙명이라 하더라도 허영만은 그 정도가 심하다. 그 이유는 특유의 경직적인 사고방식으로 '끝까지 자신은 옳고', 자신에게 반대하는 이는 인생을 덜 살아서 그런 것이라는 독선적인 태도가 근간일 것이다[10]. 실제로 그의 작품들은 근 10년을 넘어오는 동안 항상 평면적이었다.

4.1. 시대에 뒤떨어진 시각과 국수주의, 미신

4.1.1. 국수주의

국수주의[11] 요소로 비판을 받았다. 예를 들어 식객의 경우 1회에서 생모를 찾아 한국에 온 해외 입양아에게 한국문화니 받아들이라며 냄비에 담긴 찌개를 함께 떠먹기를 강요하는 부분이다.[12] 이건 나중에 엄마랑 같이 밥 먹을 때 엄마 숟가락이 찌개에 들어가면 안 먹을 거냐고 물으니 수긍하긴 했다. 그러나 해외 입양아 입장에선 성찬은 타인이다.

다만 식객의 그 유명한 헤이! 츄라이! 츄라이!가 나오는, 외국인에게 청국장 먹이기 에피소드를 보면 허영만 작가도 비판의식이 있다. 정확히는 동아일보에 <식객>을 연재할 때, 동아일보를 통해 들어온 독자의 오피니언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의견 정취 및 수렴)성장하는 모습을 보여줬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이 점이 1970년대 다른 기성 작가들과 현대까지 거장으로 남은 허영만이란 작가를 구분짓는 요소다.

아스팔트 사나이에서는 러시아에 살던 고려인이 '나는 한국을 조국이라 생각한 적이 없어'라며 악역으로 나오다가 참혹하게 죽는다. 무당거미에서 에릭이라는 한국계 교포 후예가 한국계임을 부정하고 금발 염색하고 살아가며 권투 선수로 나오는데, 주인공 강토가 한국인으로서 자존심도 없냐며 경기에서 두들겨 패주고 그를 폐인 상태에서 비참하게 죽어가게 만든다. 엄연히 심판의 감독과 경기규칙에 따라 진행하는 권투경기에서 권투 선수가 규칙에 따라 정당하게 경기를 함이 아닌, 상대 선수에 대한 혐오감정을 담아서, 폐인으로 만들 정도로 극렬하게 다른 선수에게 주먹을 휘두르는 폭력이 정당한지도 문제이지만, 이런 묘사에서 허영만 화백의 국수주의적인 색채가 드러난다. 때문에 '허영만의 만화에선 쌍팔년도 국수주의가 배어 있다'고 보는 시선도 있다.

원래 단행본에서 성인 대상으로 시작한 작품이었으나[13] 예상외로 어린 독자들도 많이 있었기 때문에 '신세대 독자의 존재를 충분히 알고 있음에도 필요를 파악하지 못했다'고 해석될 수 있다. 특히 1990년대 이전의 작품이라면 모를까 2000년대 이후 시점에서 보면 식객의 일부 에피소드들은 고루하고 시대착오적인 시각으로 보일 수 있다.

4.1.2. 미신

신문 연재만화였던 에 대해서는 과학적 방법론을 무시하고 미신적인 내용을 장황하게 다룬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었다. 그렇잖아도 관상학 자체가 비과학적인 측면이 강한데, 더하여 동양인의 얼굴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관상을 가지고 백인, 흑인까지 억지로 분석하려다 보니 관상학 기준으로도 신빙성이 떨어진다. 예를 들면 광대가 나온 사람이 더 정이 많고 겸손하다며 흑인들이 그래서 백인보다 착하다는 주장을 내세우기도 했다. 하지만 겉모습만 보고 판단함은 당연히 편견이다.

4.1.3. 부자 사전

부자사전에선 어느 미국 토크쇼를 보고 매춘 여성이 당당하게 나와 자랑스러워하는 걸 보고 경악했다고 말하며 돈벌고자 저런다느니 뭐니 비판적으로 보는 것과 월세를 받아내기 위해 지나치게 신경 쓰는 건물주, 비열한 방법으로 돈을 긁어모은 여러 사람들도 비판하듯이 묘사했지만 정작 자신은 그 부자사전에서 알박기를 비롯하여 돈 벌자면 이런 건 감안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모순된 시각을 보이기도 했다. 심지어, 그 부자 가운데 포주로 일하고 매춘업으로 돈을 번 이에 대해서도 그가 졸업한 학교에 거액을 기부한 것을 두고 찬양하며 그를 이해한다고 그렸다. 뿐만 아니라 부자가 되는 방법과 필요성 등을 강조하며 부자가 되는 것이 좋다는 취지로 전개하면서 너무 악독한 부자들의 비중이 크고 부동산 불패신화에 집착하며 분산투자에 대해서는 매우 부실하게 묘사하는 등 경제 관념이 지나치게 구시대적, 비합리적이라 경제 서적으로써의 가치가 매우 낮다. 더구나 매춘업으로 축적된 부의 이면에는 성을 착취당하는 여성들의 인권 유린이 존재할 가능성이 있는데 이에 대한 고려가 부족한 것은 특히 아쉬운 부분이다.

1권에선 돈 많은 이를 이용해먹는 부자를 그리며 부자가 되려면 이래야 한다고 하다가, 2권에선 오디오 가게를 하는 실제 부자를 이야기하며 이 사람 곁에 일하며 마음에 든 이들을 몇 명 데려다가 부자로 만들어줬다며 부자를 잘 사귀어야 한다느니 1,2권 내용이 천차만별이라 엉성하기까지 하다. 때문에 부자사전을 보려면 '강남의 자수성가한 부자들의 적나라한 단면' 외에는 그냥 흥미로 읽거나[14] 혹은 원작인 한상복의 '한국의 부자들'과 같이 읽는 편이 좋지만 이 원작부터도 별 거 없다. 이 만화가 원작 내용을 그대로 그린 것이니까.

제도 상의 민주화가 이루어졌지만 전두환 정권과의 연속성이 있는 노태우 정권이 집권해 과도기라고 볼 수 있던 1990년에는, 독재라도 좋고 잘 살면 그만이라며 엄연히 헌법에 나오는 인권들인 파업(노동 3권)과 민주화 운동(집회와 결사의 자유)을 죄다 비난하던 만화를 그렸던 적이 있다. 당시에도 엄청난 욕을 먹었고 허영만 본인도 숨겨 버려 거론하지 않는다. 제목은 퇴색공간이란 만화책인데 글, 그림 모두 허영만 이름으로 되어 있다. 허영만은 오래 전부터 독재라든지 상관 없이 잘 살게 하면 그만이고 기득권에 맞서는 걸 비난한다고 볼 여지가 충분하다.

4.2. 기득권, 꼰대적인 시각

작가가 노년기에 접어들어서 새롭게 떠오른 문제점.

4.2.1. 청년 실업을 청년들의 눈높이 탓으로 돌림

4.2.1.1. 식객 자반 고등어
젊은이들이 쉽고 편하게 대기업이나 들어가려고 한다는 대사로 젊은 세대들의 반발을 사기도 했다.

식객 자반 고등어 편에서 성찬의 조카가 대학교를 졸업한 후에 실업을 겪는다. 몸과 마음이 지쳐서 성찬을 따라다니다, 자반 고등어 간잽이의 노동, 운암정에서 조리 노동자의 산 지식을 보면서 다시 이력서를 쓰며 회복탄력성을 보여주는 에피소드가 있다. 문제는 "삼삼기업"이라는 기업을 소개받았을 때, "그런 기업에 들어가기 싫은데.. 내 컴퓨터에 있는 이력서를 보내"라고 말하는 장면이다. 그 후 조카가 성찬에게 전화를 걸어 문제는 나에게 있었어...라고 말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 에피소드에서 허영만은 청년들의 실업 문제를 대기업이나 공기업만 가려고 하여 생기는 개인의 문제로 여기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허영만은 노동 시장이 공기업/대기업/중소기업,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불평등으로 나뉘어 있어(노동시장의 이중화), 중소기업에서 경력을 시작하여, 대기업 등으로 이직해 임금을 올리기가 힘든 한국의 실태를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개인은 이 구조에 적응해서 대기업 입사를 위해 스펙을 쌓으며 20대를 보내게 되는 것인데, 단지 눈이 높아서 중소기업에 입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은 노동 시장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것이다.
4.2.1.2. 식객 순대 편
식객 순대 편에서는 청년들이 순대 공장 일을 꺼리는 걸 두고 젊은이들이 쉬면 쉬었지 이젠 힘든 일은 안 한다고 한다든지, 우리 고유의 먹을 것이 외국인 손에 의존해야 한다느니, 꼴에서 직업 없다고 하는 사람들은 힘든 일 안하고 투정부린다고 하는 부분 등이다. 그런 일들은 힘들고 위험함에도(실제 산업재해는 50인 미만 사업장에서 많이 일어난다. 그래서 중대재해처벌법의 적용범위를 50인미만 사업장으로 넒혀서 적용한다.(2024년)) 보수가 적은 일이라 꺼리는 것임에도, 그걸 그저 안이한 의식의 문제로만 여기고 있는 것이다. 선진국 대다수가 더럽고 힘들며 임금도 적은 일은 젊은 층도 피해서 이주 노동자가 하는 게 대다수이다. 또한 노동자가 직장을 구할 때는 임금, 노동 시간, 고용 안정만을 고려하지는 않는다. 단순 반복 노동의 숙달성이 아닌, 전문적인 지식이나 기술을 익히며, 능력을 인정받아 승진하는 등 발전 가능성을 따지는 발전 욕구 또한 중요한 판단 기준인데, 허영만은 인간의 발전 욕구를 고려하지 못하고 있다.
4.2.1.3. 노동법 보호도 못 받는 노동을 함이 아름답다고?
에서는 농업과 함께 근로기준법의 적용을 받지 못하는 직업인 어업에 종사하는 청년을 보고 열심히 사는 모습이 아름답다고 칭찬을 한다. 어업이나 농업은 근로기준법의 노동시간 제한 등 노동법의 적용 예외 산업이다.(근로기준법 제63조.) 노동법으로써 정한 노동 조건의 최저 기준조차 보호받지 못하는 어업 노동자의 삶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못하고 있다.

4.2.2. 자본가 미화

스포츠조선에 연재하고 김영사에서 낸 책인 <부자사전>에서 허영만은 '세계에서 한국만큼 부자가 살기 어려운 나라는 없다'하는 주장을 하기도 했다. 일견 타당한 구석이 있긴 하지만, 책에 묘사된 부자들의 상당수가 부동산 알박기 등으로 대표되는 편법적인 방식으로 축재를 한 것이라 한국이 아니었으면 애초에 그들은 부자가 될 수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비판에는 한계가 분명하다.

단 이 만화는 그저 원작이 한국의 부자 100인(이전 제목은 한국의 부자들)이라는 책을 만화화한 것이고 그 책에 나온 내용대로 나온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하지만 애초에 원작이라고 있는 그대로 만화화했다면 작가 그 자신의 가치관은 애당초 존재하지 않거나, 원작자와 어느 정도 일치하거나 둘 중 하나인데 어느 것이라도 문제가 된다. 그리고 부자사전에서는 "착하게 사는 것, 법을 지키며 사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이 부자가 되는 방법은 아니다."라고 당당하게 나온다. 아예 엄연한 불법인 알박기로 축재하는 사례(그것도 알이 땅에 반쯤 파묻힌 그림까지)는 물론, 탈세 증거인멸로 세무서 직원들이 허탕 치는 장면까지 그려놓았다!

4.3. 스토리 작가에 따른 작품성 격차

2012년까지 연재한 말에서 내리지 않는 무사몽골까지 가서 사전답사하고 그렸지만 초중반부만 해도 수려한 그림체, 당대 문화의 뛰어난 반영 등으로 수작의 전형으로 손꼽혔으나, 중반부의 막장 드라마 스토리와 후반부의 급작스러운 전개 때문에 아쉬워하는 팬들이 많다. 허나 이때문에 다음 연재 당시 자무카 관련 드립이 흔해서 댓글이 재밌다는 평가가 많았다.

1980년대 한국만화에 대한 수요가 폭발하면서 스토리 작가의 존재가 부각되기 시작했다. 허영만의 경우 '카멜레온의 시', '오! 한강', '타짜'의 김세영 스토리 작가와의 호흡, '담배 한 개비', '2시간 10분'의 노진수 스토리 작가와의 호흡, 이현세의 경우 '공포의 외인구단'의 김민기 스토리 작가와의 호흡, 야설록 스토리 작가와의 '아마게돈', '카론의 새벽' 등이 크게 히트쳤다.

따라서 "엄청난 자료수집과 다양한 장르 시도는 작화가와 함께 했던 여러 스토리 작가의 공이 크며, 스토리 작가가 받아야 할 칭송을 작화가가 받는 경우들이 많다"라는 평가도 있다. 물론 허영만, 이현세와 같은 네임드 작화가들이 스토리 작가의 공을 가로챈 것은 아니다. 허영만의 경우도 "김세영, 노진수 작가와의 호흡이 좋았다."며 그 공을 인정했다.

또한 다양한 장르시도의 공을 스토리 작가에게만 돌리는 것은 작화가의 역할에 대해 오해가 있기 때문에 나올 수 있는 평가이다. 한국이나 일본 같은 만화 제작 시스템 하에서는 스토리 작가의 만화력이 작화가를 상회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만화가는 글 작가의 스토리를 콘티화하는 과정에서 기본틀만 남기고 구성 자체는 다시 하게 된다.

다만 감독이 시나리오를 재수정할 경우 이름을 올리는 경우도 있는 영화계와 달리 만화계에서는 스토리 작가 자리에 작화가 이름이 이중으로 들어가는 경우는 없다. 이건 한국의 경우만이 아니라 일본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무엇보다 스토리 작가가 자료수집을 철저히 하더라도, 단어 하나 문장 몇 마디 조차도 비주얼화가 필요한 만화화 과정에서는 작화가가 별도로 자료수집을 해야 한다. 실제로 허영만은 '취재하는 만화가'의 이미지로 유명하다. '타짜'의 경우도 허영만이 직접 발로 뛰어가며 취재를 해가면서 자료수집을 했다.

작화가가 해당 분야에 대해 취재와 자료수집이 부족하다면 스토리작가가 좋은 스토리를 넘겨도 좋은 작품으로 만들어낼 수가 없다. 이는 김세영 스토리 작가가 허영만과 결별 후 강영환 작화가와의 소송전, 이후 자신이 직접 스토리와 작화를 모두 다 한 만화들은 그저 그런 평가를 받는 사례를 봐도 알 수 있다. 단, 이런 점을 감안하면 '아무리 스토리 작가가 따로 있다 하더라도 작품에 대한 찬사와 더불어 작품에 대한 비난과 비판도 최종적으로 작품을 완성한 만화가가 받는 게 맞다.'

4.4. 맛의 주관적 잣대

식객에서 자주 꼰대스러운 지적질이 나와서 많은 비판을 받는다. 특히 회를 먹을 때 초장이냐 간장이냐를 두고 큰 논란을 빚었는데, 114화 양식 광어(단행본 23권) 편에서 회를 먹는데 초고추장을 찾는 사람에게 '평소에 회를 초고추장에 드십니까? 그건 회를 먹는 것이 아니고 쌈을 먹는 것이다. 생선의 얕은 맛을 즐기는 것이 회인데 강한 초고추장을 같이 먹게 되면 모든 생선회의 맛이 구별되지 않고 초고추장 맛으로 통일된다'라는 말로 강하게 비난한다. 그렇지만 상황이 양식 광어하고 자연산 광어를 맛으로 비교하는 자리였다는 것을 감안해야 한다.

애초에 음식이라는 것은 정답이 존재하지 않고, 개개인의 기호에 따라 알아서 먹는 것인데 한국에서 보편적인 초고추장을 마치 맛알못들이나 먹는 양념처럼 치부해 상당히 논란이 일었다. 김치를 먹는 한국인에게 어떤 외국인이 너희들은 왜 배추의 참맛을 가리게 고춧가루와 소금, 젓갈을 넣어 망치느냐?는 것과 마찬가지. 물론, 초고추장의 강한 맛이 생선마다 다른 고유의 향을 가릴 수는 있겠지만 회는 식감으로 먹기도 하며, 이런 저런 설명도 필요없고 개인의 기호가 최우선이다. 생선회를 무슨 맛으로 먹느냐며 아예 생선회 자체를 싫어하는 사람도 있고, 그런 사람은 처음부터 양념 맛으로 먹기도 한다. 극단적인 비유이기는 하지만 애초에 그런 걸 따질거면 생선구이도 찌개도 하지 말고 죄다 생으로 먹어야 한다.

실제로 허영만은 식객 작품 전반에 걸쳐서 음식을 먹을 때 양념을 강하게 해서 원재료의 풍미를 해치는 것을 디스한다. 그런데 그런 허영만도 허영만의 백반기행 같은 각종 방송에서 먹을 때는 양념탓을 하거나(무한도전), 소스를 찍어먹는 모습을 보여 이중잣대에 따른 세이콘 드립이 흥하기도 했다. 즉 개인의 기호가 극대화 되는 음식에 주관적인 하나의 기준을 제시하며 자신이 하는 방식 이외에는 덜 떨어진 것으로 묘사하고, 양념의 존재를 무시했으면서 정작 자신은 잘만 양념을 해서 먹더라는 것이다. 다만 생선회, 생선구이, 생선찌개처럼 똑같은 재료로 만들어도 각각 다른 요리로 양념의 중요도가 각기 다 다르고 또 허영만이 양념 자체를 싫어하는 것이 아니라 양념이 강해서 원재료의 풍미를 해치는 걸 싫어하는 것이지만 이 또한 개인의 취향이니 어떤 사람은 양념이 강한 걸 선호하는 사람도 있으니 정답은 없다. 어느 한쪽은 맞고, 어느 한쪽은 틀린 차원의 문제가 아니므로 개인의 취향을 드러내는 것은 문제될 것이 없지만 자신의 주관적 기준을 앞세워 이를 강요하는 듯한 발언은 비판받을 소지가 있다.

다만 이러한 문제는 식객에 자문을 했던 맛 칼럼니스트 황교익 논란과도 비슷한 부분이 있는데, 둘은 친분이 있어서 허영만은 황교익이 쓴 책 '미각의 제국'에 추천사를 써주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식객으로 일어나는 논란 대부분은 황교익이 이전에 논란을 일으킨 행보들과 일맥상통한다. 식객 만화 작중에 나온 맛 칼럼리스트인 에드워드 케빈이라는 캐릭터도 작중에서 한국 음식은 일본의 지배를 받았기 때문에 일본 음식의 흔적이 배어 있어야 한다고 하는 등, 허영만, 황교익 뿐만 아니라 사실 맛이라는 부분이 주관적인 요소가 크게 좌우하다 보니 미식가를 자처하는 이들이 주로 비판받는 부분이기도 하다. 황교익이 한국 통닭은 닭고기 본연의 맛이 떨어지고 양념 맛으로 먹는다고 디스하면서도 꼼장어 요리는 고추장 양념이 중요하다는 등의 발언이나 또한 허영만이 작중 설탕을 독약 수준으로 혐오하는 점 역시 비슷하다.

5. 사건 사고

주의. 사건·사고 관련 내용을 설명합니다.

사건 사고 관련 서술 규정을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5.1. 표절 및 저작권 위반

아스팔트 사나이다카르 랠리에 도전했던 카레이서 최종림이 쓴 책인 사하라 일기에 대한 저작권법 위반으로 소송을 당해 법원에서 10%정도의 저작권 침해가 인정되어 일부 패소 판결을 받았다.
판결문 - 崔씨의 소설 `사하라의 일기'와 許씨의 만화가 전체적인 표형양식과 주제 및 구성에 있어 다소 차이가 있으나 일부 사건구성에서 유사한 내용을 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며 "전체적으로 볼 때 대략 10%상당의 저작권을 침해한 사실이 인정된다.

5.2. 성경의 역사 허영만 저격 논란

작가 본인이 일으킨 사건은 아니고 네이버 웹툰 성경의 역사에 외모와 이름을 닮았으며 허영만의 젓가락질 버릇까지 묘사해놓은 '허영수'라는 만화학과 교수 캐릭터를 전형적인 꼰대 교수에 여자 후배 몸이나 만지는 파렴치한을 보고도 별 심각성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으로 묘사해놓아서 논란이 일었다.

2021년 5월 19일 기준으로 수정한 이름이 '허영'수에서 천덕'만' 이라서 사실상 비꼬려는 의도라는 게 유력시되었고 많은 사람들이 분개하고 있다. 심지어 그 이름마저 천덕강[15]으로 다시 수정하여 작가의 자질이 의심되는 저질스럽고 유치한 대응으로 불난 집에 기름을 부어버렸다.

6. 주요 작품 목록

7. 수상

8. 방송

9. 기타



[1]전라남도 여수시 화양면[2] 31세 ◯만(萬) 항렬. https://www.chosun.com/site/data/html_dir/2015/06/07/2015060702546.html[3] 서울대학교 서양화과를 나와 현재는 서양화가로 활동 중이다.[4] 이상 출처: 박석환, 『허영만』[5] 일제시대 순사 경쟁률은 1922년 2.1:1에 불과했으나 1926년 10.7:1, 1932년 19:1로 갈수록 경쟁률이 높아졌다. 좋지 않은 이미지에도 불구하고 당시 피식민지 측인 조선인으로써는 나름 권력도 있고 정년이 보장되는 몇 안되는 직종이었기에 일반인들에겐 상당히 인기있는 직업이었다.[6] 그렇지만 동학농민운동의 도화선이 된 고부군수 조병갑도 송덕비(조병갑 청덕 선정비)가 있다. 조병갑 송덕비는 함양군수와 천안군수를 지내면서 세워졌는데, 경남 함양군 상림공원과 충남 천안 광덕면에 있다. 물론 조병갑 송덕비 철거 운동이 있다. 일제시대 서민들이 피부로 느끼는 친일 권력직은 총독부 관리들이 아니라 오히려 접하기 쉬운 면서기나 순사나 고등계 형사인데 특히 순사는 일본도를 차고 휘두르고 다니며 민폐를 끼치고 겁을 주며 조선사람을 잡아가는 위협적인 존재였다. 일제 순사가 권력의 상징인 송덕비가 있다는 게 사실상 반쯤 타의적인 이유도 있기도 하지만[7] 계몽사 학습그림과학으로 유명하다. 필명 박정혜, 박평일.[8] 영향을 받았다기 보다는 우주 흑기사처럼 아예 베낀 만화가 있었다. 반면에 동시대 작가 중에는 이상무, 고우영, 고행석, 이재학 같이 자신의 오리지널 작품을 고수한 작가도 많으니 그다지 호의적으로 볼 수는 없는 노릇이다. 물론 이재학도 일본 추리소설을 번안해서 만화로 만들거나 성룡을 빼다 박은 '무룡'이라는 캐릭터로 홍콩영화의 만화화라는 지적을 받았었으나 점차 자신만의 정체성을 구축해갔다.[9] '오! 한강'은 윤석열이 몇번씩이나 봤다고 방송에서 언급하기도 했다.[10] 꼴 6권 21pp. ~ 29pp.[11] 이전 문서에는 민족주의라고 했는데, 민족주의는 백범 김구 선생의 삶과 실천처럼 민족의 독립과 일치를 강조하는 사상이다. 민족의 뛰어남을 주장하는 국수주의가 보다 정확하다.[12] 허영만이 '다 같이 찌개에 숟가락 넣고 먹자'는 주의는 아니고 내용을 전개하는 과정에서 나오는 하나의 에피소드였지만 주인공이 강요하는 정신적인 폭력을 정당화했다는게 문제이다.[13] 그 때문에 좀 더 자유롭고 개방적인 표현을 추구했는지 작가가 식객, 부자사전 등 여러 본인의 작품 내에서 저속하고 불쾌하게 느껴질만큼 지나치게 노골적으로 선정성 묘사가 짙어 독자를 불편하게 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14] 애초에 이 작품은 기획의도 자체가 스포츠신문 지면에 흥미 거리로 연재된 만화다.[15] 이 이름은 허영만의 작품 식객 110화에 등장한 단역인 천강덕에서 따온 것으로 보인다.[16] 주인공 이강토는 사기 도박을 저지르다가 2번이나 걸려서 결국 두 팔이 잘려나가고 두 팔에 의수를 차고도 여전히 도박에 미쳐 사기 화투 도박이나 하다가 결국 칼에 맞아 죽는다.자살같이 죽은 셈이지만 죽기 전까지 도박하고 싶다라고 발광하는 유언이나 남기다가 피토하며 처참하게 죽는다. 그의 죽음을 보던 옛 동료 역시 허드렛일로 눈칫밥이나 얻어먹으며 푼돈 벌고도 그걸로 도박질하다가 다 날려버린다고 도박에 미쳐 도박에 죽는다며 울고 결국 그도 파멸이 기다릴 결말을 보여준다.[17] 에로배우 진주희의 리즈시절 외모는 간간히 회자되는 편이다.[18] 카카오웹툰 연재 시의 제목이며, 단행본은 2020년에 ‘독립혁명가 김원봉’으로 출간되었다.[19] 물론 수억 원의 스피커와 비교하면 저렴한 건 사실이지만 일반인 중 고가의 오디오를 살 수 있는 사람은 적으니 현실적인 구절은 아니다. 작가가 같은 작품 다른 페이지에서 제화업체 사장 등과 함께 다니며 땅투기를 하는 등, 전반적인 소득수준이 높아졌음을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다.
다만 예전 오디오 애호가들은 요즘의 카푸어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소득보다 오디오에 투자하는 비용이 더 많았음을 감안할 필요도 있다. 공사장에서 장시간을 일하여 오디오를 사거나 반지하에 살면서 자동차와 맞먹는 가격의 오디오를 구입하는 사례도 많았다. 당시 오디오는 냉장고나 에어컨과 비슷한 위치의 가전제품이고 지금보다 오디오를 취미로 삼는 사람도 많았기 때문이다. 당시 전세값의 70%를 오디오에 투자해야 진정한 오디오 애호가라는 말도 등장할 정도.
[20] 들기름 막국수가 메인 메뉴인 고기리막국수는 이 집에서 빚은 동동주 역시 그 맛이 일품이지만 사장님께서 철저하게 1인 1잔만을 판매하기 때문에 이점 참고하시길 바랍니다.[21] 식객 단행본에는 이 이후 에피소드가 짤막하게 실려 있다. 비서실에서 "그룹 비서실이 삼계탕 찾으러 다니는 부서인 줄 아느냐"라고 항의받았다고 한다. 그 뒤에 "구 회장과 나는 40년지기 친구다."라고만 짤막하게 적어놓았다.[22] 여순사건 문서에서 설명되어있듯이 당시 군과 경의 갈등은 심각했다.[23]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그림을 보여 줘 넘어가게 한다고. 실제 허영만과는 전혀 닮지 않은 몰골인데도 피해자가 속출했다. 사칭범의 언변과 만화가는 후줄근한 외모라는 고정관념이 맞물려 사람들이 사칭에 쉽게 속아넘어간 것으로 보인다.[24] 더욱 기가 막히는 것은 심지어 허영만의 실제 얼굴을 아는 사람들조차 속은 사례가 있다는 것. 사기꾼이 30대 가량의 꾀죄죄한 외모를 가진 남성이었다는 점으로 미루어 보아 천계영 사칭범과 동일인물일 가능성도 커보였다. 천계영도 자신을 사칭하면서 행인들에게 돈을 빌려가는 사기범으로 인해 곤욕을 치른 바 있었다. 그런데 천계영은 여자다. 천계영이라는 이름이 얼핏 들어서는 남자 이름으로 들릴 만큼 중성적이라 남자려니 하고 사칭한 듯.[25] 참고로 감독 이름은 당연히 "전"씨고, 마누라 얼굴 생김새는 누가 봐도 주걱턱을 가진 어느 전직 영부인이다. 그리고 대머리 감독 동생 이름은 "전투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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