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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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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00m 14좌 완등자 (대한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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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석
2001년, 세계 7번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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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5fa1><colcolor=#fff> 인류 최초 산악 그랜드슬램 달성
박영석
朴英碩, Young Seok Park
파일:external/www.kyeongin.com/612655_210229_3721.jpg
이름 박영석(朴英碩), Young Seok Park
출생 1963년 11월 2일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사망 2011년 10월 18일 (향년 47세)
네팔 히말라야산맥 안나푸르나 5,700m부근
등반경력 인류 최초 산악 그랜드슬램 달성
에베레스트 남서벽 신루트 개척
그 외 여러 기록 달성
직업 산악인
가족 배우자, 슬하 2남
학력 숭의국민학교 (졸업)
동북중학교 (졸업)
오산고등학교 (졸업)
동국대학교 사범대학 (체육교육학 / 학사)
동국대학교 대학원 (체육교육학 / 석사)
링크 공식사이트[1]

1. 개요2. 어린 시절3. 산악인의 삶4. 실종 및 사망 처리5. 여담

[clearfix]

1. 개요

파일:external/www.kbmaeil.com/local_news_g_1143453611.jpg
동국대학교 중앙도서관 입구에 붙어 있는 히말라야 14좌 완등 기념 부조
대한민국산악인. 세계 최초로 탐험가 그랜드슬램 / 산악 그랜드슬램의 위업을 달성했다.

2. 어린 시절

그가 산을 좋아하게 된 계기는 친구 때문이었다. 어릴 때 친구 집이 설악산에서 산나물과 기념품을 파는 가게를 했는데 그 친구 따라 우연히 대청봉에 올랐다가 산의 매력에 푹 빠졌다고 회고했다. 그는 방학 때마다 설악산을 찾았다.

3. 산악인의 삶

그러다가 1980년 동국대 마나슬루 원정대가 등정에 성공하는 장면을 보고 산악인이 되기로 마음을 굳혔다. 1983년 동국대 체육교육과에 진학, 산악부에 들어갔다.

1993년 아시아 최초로 에베레스트 무산소 등정을 한 것을 시작으로 온갖 각종 기록을 세우며 기네스북에도 올랐다. 2004년 세계 최단 기록으로 무보급 남극점 도달에 성공, 이듬해 북극점에 도달해 세계 최초로 '산악 그랜드슬램'을 달성했다.

그가 거둔 기록은 다음과 같다.

게다가 그는 등정주의가 아닌 등로주의, 즉 새로운 산악길을 만들고 그만큼 험하디 험한 산길로 가며 도전하던 사람이었다. 그러기에 몇 번이고 죽을 고비를 겪었는데 1994년 에베레스트 남서벽 등반 도중 깎아지른 절벽을 내려오다 발을 헛디뎌 떨어졌지만 몸에 묶은 로프 덕에 살아났다. 이때 얼굴을 빙벽에 부딪혀 얼굴뼈가 부서지는 부상을 당했는데, 붕대로 대충 고정시키고 내려오다가 너무 고통스러워 후배에게 차라리 크레바스에 밀어넣어 죽게 해달라고 부탁할 정도였다고 한다. 1995년에는 눈사태로 파묻혔다가 살아났고,[2] 1997년 다울라기리에서는 크레바스에 빠졌다가 겨우 나와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3] 이런 수많은 죽음의 위기를 겪고도 평생 산악인으로 살았고 최후까지 산에 오르다 죽었으니 산을 엄청 사랑했던 인물이었던 건 틀림없다.

'1%의 가능성만 있어도 절대로 포기하지 않는다'라는 방침을 가장 중요시하던 그는 선배 엄홍길과 더불어 전설적인 산악인으로서 이름을 떨쳤다.

다만 이 부분에 있어서 걸러 들어야 할 것이 박영석이 실제로는 상업주의, 마케팅주의적 면모를 많이 가지고 있었다는 점이다. 박영석은 막대한 스폰서쉽을 기반으로 대규모 원정대를 꾸리고 노멀루트로 산소와 고정로프를 사용하는 극지법으로 등반했다.[4] 14좌 등반에 있어서 산소통을 5개 (칸첸중가, K2 -동영상 41분 45초 참고)나 사용하여 (신동아 609호. 2010년 5월 18일자) 2017년 현재 시점에서 역대 두 번째로 많은 사용량이며 14좌 완등 당시에는 압도적인 1위였다. 박영석의 14좌 완등 이전 완등자는 7명인데 이들이 사용한 산소통 횟수를 모두 합쳐도 박영석의 횟수보다 적다(...). 즉 박영석 자신이야 말로 정상사냥꾼, 등정주의자라는 비판을 받은 장본인이다. 박영석 이전의 14좌 완등자들인 메스너, 쿠쿠츠카, 로레탕, 카르솔리오, 비엘리키, 오이아르자발, 마티니 중 메스너, 로레탕, 오이아르자발은 무산소로 완등했고 쿠쿠츠카, 카르솔리오[5], 비엘리키는 1번, 마티니만 2번이다. [6]

2003년 2월 11일 KBS 김동건의 리얼토크 41분 45초부터

2000년대 이후에는 14좌 완등 자체가 그리 명예로운 타이틀도 아니며 무산소 완등자만 어느 정도 높게 평가 받는다. 성과주의와 마케팅주의에만 매달려 기업과 유착해 막대한 스폰싱을 받아 그를 기반으로 대규모 원정대를 꾸려 고정로프와 산소통을 사용하여 정상을 오르고 그 성과를 등반을 잘 모르는 일반인을 대상으로한 마케팅에 활용하는 형태, 즉 '등반의 순수성'을 상실한 것이 한국 산악계의 오랜 문제점이다. 그리고 그 정점에는 박영석, 엄홍길, 김재수, 한왕용과 같은 소위 14좌 완등자들이 있다.

실제 한국 산악계, 더 나아가 해외에서 가장 높은 평가를 받는 인물들은 위에 열거된 14좌 완등자들이 아니라 유학재, 박정헌, 정승권, 최석문, 김창호, 임덕용, 남선우와 같이 신루트 개척, 초등, 단독 등반, 동계 등반의 기록을 남긴 등반가들이다. 이들이 과연 일반인들에게 얼마나 알려져있는가?

가셔브룸 4봉의 빛나는 벽의 중앙립 루트가 개척되었을 때 국내 언론의 반응은 8,000m도 안되는 산을 등반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라는 반응이 나왔다. 반면 해외에서는 쿨러닝에 비유하며 산악 후진국[7]에서 세계 최고의 업적을 세웠다고 칭찬했다.

보이텍 쿠르티카는 14좌 달성자들 두고 '숫자는 사람들을 잡아먹는다. 손에 동창 따위도 걸려본 적 없는 사람들조차 말이다' 라고 말했다. 메스너, 쿠쿠츠카, 로레탕, 비엘리츠키, 오이아르자발, 카르솔리오가 위대하다고 불리는 이유는 그들이 14좌를 완등했기 때문이 아니라 히말라야에서 그 누구도 넘볼 수 없는 등반을 펼쳤기 때문이다.

경량, 속공 등반의 선구자 로레탕, 단독 속도 등반의 비엘리츠키, 3개의 신루트를 개척한 속도 등반의 명수 카르솔리오, 2개의 신루트를 개척한 무산소 완등의 오이아르자발까지.

아이러니 한 것은 이들 6명 이후 14좌 완등자들 가운데 신루트를 개척(당연히 알파인 스타일[8])한 인물은 데니스 우룹코 뿐이다. 아이러니하게도 현재에 비해 장비가 열악했던 1970, 1980년대의 등반가들이 지금 (2020년대)보다도 더 뛰어난 업적을 남긴 것이다.[9] 더 안타까운 것은 저 위의 기준이 어디까지나 14좌 완등자들 중에 신루트를 개척한 인물이 데니스 우룹코 뿐이라는 얘기다. 6인의 완등자들의 시대를 지나고도 여전히 8,000m 급에서의 루트 개척은 지속적으로 시도되고 있으며 박영석의 시대에도, 2021년인 현재에도 동계 초등과 신루트 개척은 시도되고 있다. 과거에 비하여 그 빈도가 줄었을 뿐이다.

오히려 첨예한 등반들은 8,000m보다 6~7,000m급에서 더욱 강하게 이뤄지고 있다. K2의 서벽을 개척한 소위 러시아의 괴물들 중 14좌 완등자는 한 명도 없고 안나푸르나 남벽을 단독으로 개척등반한 율리스텍 또한 14좌를 다 완등하지는 못했고 윈터 마에스트로라 불리며 현재 동계초등 4회로 공동 1위에 올라있는 시모네 모로 역시 14좌를 오르지는 않았다.

4. 실종 및 사망 처리

2011년 10월 18일, 후배인 강기석(33) & 신동민(37)과 함께 안나푸르나에 한국인 경로를 개척하기 위해 등반하던 중 연락이 두절됐다. 눈사태에 휘말린 것으로 추정되며, 수색대가 실종 예상 지역을 수색했으나 흔적을 찾지 못했다. 결국 행방불명으로 인한 인정사망 처리됐다. 향년 47세. 이에 따라 대한산악연맹은 10월 30일 위령제를 지냈다.[10] 훗날 눈이 녹는 등의 지형 변화로 인해 눈에 묻힌 박영석과 휘하 대원들의 시신이 밖으로 드러나고, 지나가던 등산가들이 발견해주지 않는 한 영원히 안나푸르나에 잠들어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KBS에서 당시 동행취재하여 출국[11]부터 실종 상황까지 함께 하게 되었는데, 이는 나중에 '박영석, 안나푸르나 마지막 10일의 기록'이라는 제목으로 다큐멘터리로 방송됐다. [KBS 스페셜] 박영석 대장, 안나푸르나 마지막 10일의 기록

5. 여담

파일:external/www.campuslife.co.kr/img_427_1.jpg
상단부에 있는 히말라야 14좌 완등 부조의 제막식 사진.[12] 이 부조는 박영석이 살아있을 당시에 제작된 것이라, 사실 엄밀히 말하자면 도서관 개축 기념 겸해서 붙여놓은 것이다. 그러던 것이 실종사고 이후로는 동악인들의 성지 비슷한 곳이 되었다.

허영만과 매우 친해서 허영만 만화 식객이나 부자사전에서도 나오기도 했다. 그리고 허영만과 친구들이 추진한 바다 여행을 그린 책자 <집 나가면 생고생 그래도 나간다>(2010)에서도 나왔는데 이 책에선 8천미터 산도 여러번 자유롭게 오고간 자신이 바다에서 배멀미하던 것에 기겁하던 이야기를 담기도 했다. 허영만과 함께 한 힐링 캠핑 - 뉴질랜드 캠퍼밴 여행에도 일행의 한 명으로 나오며, 허영만 원작의 영화 타짜에도 허영만 본인과 함께 카메오로 출연했다. 그만큼 허영만과 형님아우하며 친하게 지냈기에 그의 실종 및 사망 보도에 허영만이 직접 실종 장소를 찾았고, 끝내 수색에 실패하자 안타까워하며 명복을 빌었다. 식객(만화) 복어 편에서는 허영만과 박영석이 복어를 먹다가 '히말라야에서 살아 돌아온 사람이 파주에서 복어 먹다가 죽었다고 하면 세상 사람들이 웃을 일'이라고 농담을 나누는 장면이 나오는데,이 대사에 담겨진 '산사나이는 산에서 죽어야지 제대로지~'란 느낌으로 박영석이 안나푸르나에서 삶을 마감한 것.

선배인 엄홍길도 명복을 빌면서 "산악인으로서 언젠가 맞이할 일이자 각오할 일[13]이지만 어린 녀석이 먼저 가다니..."라고 회고했다.

그의 죽음에 대하여 등산업계의 무리한 마케팅 경영이 죽게 만들었다는 주장이 나오기도 했다. 그러나 기사 속에서 인터뷰의 당사자로 나오는 박기성 산악평론클럽 대표는 기사 자체가 잘못된 것이라며 모교인 동국대학교 산악부 홈페이지에 '기사로 심려를 끼쳐드린 사람이 동국산악회 선후배들께 사죄합니다'라는 사과문을 게재하였다.[14] 사과문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본인은 히말라야 거벽등반 경험이 없기 때문에, 현지 상황에 대해서 전혀 모르고 단지 친하게 지내는 산악계 후배가 미디어오늘과 이번 참사에 관한 인터뷰를 한다기에 동행을 했을 뿐인데, 정작 기사에서는 메인 인터뷰이였던 후배 산악인은 유령처럼 사라졌고 <미디어오늘> 기자는 "들은 대로 썼을 뿐"이라 하니 혼자서 덤터기를 쓰는 처지가 되어버렸다는 것이다. 게다가 미디어오늘 기자에게 기사가 나가기 전에 미리 보여달라는 요구를 하였으나[15], 끝내 보여주지 않았고 잘못된 부분은 바로잡을 기회가 없었다는 이야기도 들어있다. 기사의 내용 자체는 기업체와 언론의 이벤트 마케팅에 휘둘리는 산악계 현실에 대한 비판[16]이지만, 과정은 상당히 부적절했던 것으로 보인다.

2016년 8월 박영석의 차남인 박성민씨가 포함된 수색대가 안나푸르나로 출발하였으나, 끝내 시신을 찾지 못했다. #

2021년 7월, 1999년 박영석과 함께 등반하다가 실종된 허승관의 시신이 발견되었다. #.


[1] 도메인 작동 안됨.[2] 갈비뼈가 부러지는 부상을 입었다.[3] 크레바스에 떨어지기 직전 고정이 되어있는지 알 수 없는 2개의 고리를 발견하고 그 중 하나에 자신의 로프를 연결하였다. 그 직후 크레바스에 빠졌는데 운이 좋게도 연결한 고리가 고정된 고리였다.[4] 이는 엄홍길, 오은선, 김재수 대장과 같이 한국에서 추앙받는 산악인들에게도 똑같이 적용될 수 있으나 박영석의 경우 좀 달라서 기본적으로 알파인 방식을 선호했고 캠프를 만들고 오르락 내리락한 건 맞으나 C1, C2를 베이스로 C3.4를 생략하거나 C2.3.4 전부 생략하고 한번에 올라가는 세미 알파인 방식을 사용했다.[5] 그것도 하산시에만 소지[6] 그러나, 정작 박영석 본인은 14좌 등반에 있어 산소통 사용을 K2와 칸첸중가 2번만 사용 하였다고 직접 밝힌 바 있다.[7] 1970, 1980년대도 아니고 1997년이다. 이때 까지도 한국은 등산 후진국이라는 평가를 받았다.[8] 크리스 보닝턴이 에베레스트와 안나푸르나의 남벽을 등반하던 1970년대도 아니고 대량의 고정로프와 산소를 사용하는 극지법은 현대의 알피니즘과는 한참 떨어져 있는 비판의 대상이다. 이른바 불확실성을 제거하여 산을 소유하고자 하는 행위라고 메스너는 비판한다. 그리고 당연히 위 6명은 히말라야에서 알파인스타일 등반을 시도한 최초의 인물들이다. 박영석의 에베레스트 신루트는 극지법으로 개척되었다.[9] 다만 이 부분은 고민의 여지가 있는게, 지구는 크기가 정해져있고 선구자가 더 뛰어난 업적을 남길 가능성이 훨씬 높으며 후발주자들은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선점효과. 앞으로 아무리 훌륭한 탐험가가 나온다 한들 아문센의 업적을 뛰어넘을 수 있을 가능성은 없고, 아무리 대단한 우주비행사가 나온다 해도 가가린이나 암스트롱을 뛰어넘기는 힘들다. 최초라는 업적은 그 자체로 불멸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10] 애초에 고산에서 실종되면 살아돌아올 가능성이 거의 없고 사망으로 직결되는 거나 마찬가지다.[11] 출국장에서 걱정에 눈물을 쏟는 아내에게 '울지 마라. 내가 뭐 죽으러 가는 거냐'라며 짐짓 큰 소리를 치는 장면이 나온다. 가족들을 안심시키려 했던 말이 현실이 되어버린 안타까운 장면.[12] 동국대학교 WISE캠퍼스에도 박물관을 들어가기 전 1층에 있다.[13] 엄홍길 문서에 나와 있듯이 그도 몇 번이고 죽을 고비를 넘겼음을 알 수 있다. 아예 한국을 나갈 때 유서를 쓰고 간다고 할 정도.[14] 자유게시판에서 글쓴이 박기성으로 검색하면 나온다.[15] 사실 기사가 나가기 전에 미리 보여달라는 요구를 하면 들어주는 기자는 거의 없다. 인터뷰 후에 다시 유선상으로 팩트체크를 하면 모를까. 사전검열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16] 이전에도 오은선고미영의 여성 세계 최초 14좌 완봉 경쟁이 있었는데, 블랙야크 대 코오롱의 스폰서 대결이 과열되면서 9년 동안 3개봉을 등정하던 것을 1년에 4개봉씩 등정하는 오버페이스를 벌이게 되었다. 결국 오은선은 칸첸중가 미등정 논란으로 산악계에서 생매장당하고, 고미영 씨는 추락사하자 해당 기사와 똑같은 내용의 비판이 산악계 내외에서 쏟아져 나왔다.